010 영어 원어민의 자음 발음이 자음과 모음으로 들리는 이유

 


 무성 모음의 발견은 그 동안 아무도 해결해주지 않았던 궁금증을 스스로 풀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그 궁금증이란 영어 원어민이 자음만 발음한다고 말하지만 아무리 들어도 모음 없이 발음하는 것 같지 않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앞에서 004 분절음과 자음만 발음하기 편에서 한국어 원어민들이 습관적으로 모음 /으/를 붙여 발음하기 때문에 이런 습관을 교정해야 한다는 사실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이론은 충분히 이해했다. 그런데, 내 자신이 한국어 원어민으로서 자음만 발음한다는 영어 원어민의 발음을 듣어 보면 문제가 생긴다. 아무리 들어도 자음과 모음을 붙여서 발음하는 것으로 들렸기 때문이다. 즉, 영어 원어민이 ‘strong’을 발음하면 내 귀에는 혀를 굴려가면서 /스뜨롱/이라고 말하는 것으로 들리지 /ㅅㄸ롱/으로 들리지 않는다. 


 이런 현상에 대한 이유를 고민해보았다. 처음엔 한국어가 음절마다 ‘초성+중성+종성’을 한 단위로 여기는 언어이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했다. 즉, 한글에서는 모든 소리가 중성에 모음을 집어넣은 소리이기 때문에 이런 구조에 맞추기 위하여 모음이 없는데도 비슷한 모음을 들은 것처럼 착각하는게 아닐까 생각했다. 또는 어렸을 때 /ㄱ/의 소리를 ‘그’라고 읽는 식으로 항상 모음 /으/를 붙여서 자음을 읽도록 배웠기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실제론 없는 모음을 어떤 환상 때문에 들은 것이라면 벌써 1년 이상 자음과 모음을 분리해서 들어보려고 노력한 지금에는 어느 정도 들을 수 있어야 했다. 하지만 여전히 내 귀에는 영어 원어민이 모음과 자음을 붙여서 말하고 있는 것으로 들린다. 결국, 자음만 발음한다는 것에 납득하지 못했음에도 이론상 타당하니 방법이 없었다. 원어민이 자음만 발음한다고 스스로를 세뇌해야만 했다. 아무리 세뇌해도 한 줄기 솟아나는 의심이 있지만 내 귀가 막귀라서 소리를 잘 분간하지 못한 것이라고 믿어야만 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무성 모음이라는 개념을 발견하면서 오래된 궁금증이 해결되었다. 그리고 내 머릿속에서 어떤 일이 벌어진건지 깨닫게 되었다. 


 다음은 음소 /h/만 소리내고 있는 영어 원어민의 음성이다.

 

 

 

 내 경우에는 위의 소리가 /하/로 들린다. 물론, 일상생활에서 일반적으로 내는 /하/와 소리와 분명히 다르다. 그래도 머릿속에서는 /하/라고 들린다. 이 부분에서 한국어 원어민이 모든 자음에 모음 /으/를 붙여 발음하도록 배웠기 때문이라는 추측은 깨진다. /h/의 소리는 /으/가 아니라 /아/를 덧붙여 말하고 있는 것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바로 앞 포스팅에서 무성 모음을 들어본 사람이라면 /h/와 무성 모음  의 소리가 같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왜 같은 말소리를  음소 /h/와 무성 모음 라고 서로 다르게 부르는 것일까? 이는 하나의 말소리를 서로 다른 관점에서 들여다보고 있기 때문이다.


 음소 /h/는 성대를 떨지 말고 살짝 긴장시키면서 숨을 내뿜으면서 나는 소리다. 밖으로 밀려난 숨이 주변의 음성기관과 마찰하면서 /h/ 소리가 난다. 이 때, 핵심은 기류의 마찰이 일어난다는 점이다. 성대에서 밀려난 기류가 목구멍이나 입과 마찰하면서 나는 음을 /h/라고 하는 것이다.


 반면, 무성 모음 는 구강의 모양과 혀의 위치가 중요하다. 무성 모음 가 음소 /h/와 같은 소리가 나는 이유는 직접 소리를 내보면 바로 이해할 수 있다. 목구멍을 연 상태에서 성대가 떨리지 않는 무성음으로 또 공기를 강하게 내뱉지 않는 무기음으로 소리를 내려고 하면 아무런 소리가 나지 않는다. 어떻게 든 소리를 내려면 숨을 강하게 내뱉어 기류를 마찰시키는 것 말고는 소리를 낼 방법이 없다. 무성음이고 동시에 숨을 강하게 내뱉지 않는 무기음으로 소리를 내려고 하면 아무런 소리가 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무성 모음은 필연적으로 유기음이 된다. 하지만 무성 모음에서 초점을 맞추고 있는 부분은 혀의 위치와 입술 모양 등이지 기류가 마찰하면서 나는 소리가 아니다.


 영어 원어민이 발음한 음소 /h/의 소리가 무성 모음 와 같은 이유는 음소 /h/의 소리를 낼 때, 혀를 쓸 일이 없어서 혀가 자연스럽게 늘어지고 목구멍을 크게 열기 위해 입을 크게 벌리는 것이 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혀의 위치와 입의 모양은 유성이든 무성이든 모음 /아/의 혀 위치와 입모양과 동일하다.  즉, 음소 /h/ 소리를 낼 때 모음 /아/의 혀 위치와 입술 모양이 가장 자연스럽고 편하기 때문에 영어 원어민은 그렇게 발음하는 것이고 그 소리가 무성 모음 처럼 들리는 것이다. 그리고 한국어 원어민은 무성 모음 에서 들려오는 모음 적인 부분이든 유성 모음 [아]이든 모두 동일한 음소 /아/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이 소리가 머릿속에서는 /하/로 번역된다.


 중요한건 이 순간 음소 /h/와 무성 모음 는 자음인 동시에 모음이라는 점이다. 그저 보는 관점이 달라지면 자음이던 것이 모음으로 변하고 모음이던 것이 자음으로 변한다. 동일한 소리를 보는 관점이 두 가지로 갈라진 셈이다. 구강이나 혀의 위치 입술의 모양 등으로 인하여 방출되는 공기의 양상은 모음적인 요소를 드러내고, 어떤 조음 위치에서 기류가 폐쇄되거나 마찰되었는가를 통하여 자음적인 요소가 드러난다. 그렇다면 이는 음소 /h/만 그런 것일까?


 하나의 말소리가 자음적인 면과 모음적인 면을 동시에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영어 원어민의 자음 발음을 들어 보니 안 보이던 것들이 보인다. 가령, 영어의 자음 발음에서 /s, z,  t, d, n, l/는 어째서인지 /스, 즈, 트, 드, 느, 르/로 들린다. 자연스럽게 모음 /으/가 첨가된 것 처럼 들린다. 영어 음소/s, z,  t, d, n, l/는 모두 혀끝을 윗잇몸(치경)에 접근시키거나 붙이는 방식으로 소리가 난다. 이 때, 혀의 위치와 입술 모양 모음 /으/를 낼 때의 모양과 유사하기 때문에 한국어 원어민은 자동반사적으로 /으/를 덧붙여 듣는 것이다. 그리고 유성 모음과 무성 모음을 구별하지 않으니  발음할 때는 태연히 유성 모음 /으/를 붙여서 발음한다. 하지만 영어 원어민 입장에서는 유성 모음 /으/는 별개의 음이니 한국어 원어민의 발음은 없는 음을 덧붙인 것철럼 이상하게 여겨질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s, z,  t, d, n, l/의 발음에서 추가된 모음 /으/는 실제 모음 /으/를 조음할 때의 혀의 위치와 입술 모양과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모음은 자음에 비해서 그 소리가 분명하게 구별되지 않는다. 혀의 움직임이나 입술의 모양의 차이라는 것이 미묘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모음은 조금 차이가 나더라도 미묘한 차이점을 무시하고 유사한 모음으로 번역해서 듣게 된다. 따라서 한국어 입장에서는 가장 유사한 모음인 /으/를 덧붙여 듣게 된다.


 결국, 영어 원어민이 자음만 발음할 때, 자음과 모음을 붙여서 들었던 내 귀는 크게 잘못되지 않았다. 단지, 영어 원어민이 모음으로 듣지 않는 것을 모음으로 들었을 뿐이기 때문이다. 서로 음성체계가 다르기 때문에 이런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추측하면, 유성음과 무성음을 강하게 구분하는 영어와 그렇지 않은 한국어, 유기음과 무기음을 강하게 구분하는 한국어와 그렇지 않은 영어로 음성체계가 다르고, 한글의 구조상 무조건 모음이 말소리에 있어야 한다는 한국어 소리에 대한 모델이 이런 차이를  강화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음성체계의 차이를 발견하고 나니 그 동안 헷갈렸던 것들이 상당 부분 해소된다. 가령, 어떻게 자음만 발음하는지 명료하게 이해했고, 영어의 비슷한 음들 /s, ʃ/, /z, ʤ/  등 소리는 비슷하지만 조음 위치가 다른 음들을 어떻게 구별해야 하는지 비로소 알 수 있게 되었다.

 


Ankilog 학습파일


학습용 Anki 파일은 아래와 같습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Ankilog 파일:  010 영어 자음 발음에서 모음이 들리는 이유.apkg


수정 : 2020-04-04 오전 12:11 Ankilog 문구 다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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