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은 그야말로 절망과 좌절의 연속입니다. 독감으로 고생하는 와중에 그림 그리는 것 때문에 크게 고생했기 때문입니다. 원래 그림 그리기에 재능이 없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이 정도일줄은 몰랐습니다.


 제가 바로 직전에 쓴 글을 보신 분이라면 작대기 두 개를 성대라고 표시하고 있는 제 그림 실력을 바로 보실 있습니다. 아무런 디테일을 표현할 수 없어서 그냥 작대기 두 개를 그렸습니다. 더 슬픈 것은 그 그림을 그리는데 2주가 걸렸다는 점입니다. 말이 2주이지 스스로의 재능과 실력을 깨닫고 자각하고 인정하는 자학의 기간에 가까웠습니다. 그림만 그리려고 하면 모든 것이 멈춰 버리고 셧다운 되어버리는 일상의 나날이었습니다. 재능이 없는 거지요.


 음성학 포스팅에 집어넣을 그림을 위해서 한 달 정도 열심히 GIMP를 익혔습니다만 여전히 다루기 힘들고 어색한 도구입니다. 그리고 여전히 그림을 그리려고 하면 멍하니 멈춰 버립니다. 최근에는 드로잉을 익혀보려고 책을 사서 연습해보고 있습니다만 인연이 없다는 말이 무엇인지 다시금 느낍니다. 연습을 해도 무엇인가 되고 있다는 느낌은 전혀 받지 못합니다. 그리고 재미도 없고 점점 멀리하게 됩니다. 


 아마도 이런 게 재능이 아닐까 싶습니다. 여튼, 원래 그림을 잘 그리고 싶은 욕심이 있는 것은 아니라서 심리적으로 타격을 입지는 않았지만 음성학 포스팅을 올리는게 쉽지 않네요. 아마도 그림이 무슨 필요냐고 말하실 분도 계시겠지만 길게 보면 그림이 필요합니다. 앞으로 올릴려고 하는 내용들은 점점 복잡해질 것이고 영어 공부에도 필요하기 때문에 직관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그림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래서 힘들더라도 기본적인 수준까지는 올리려고 노력중입니다. 영세한 블로거로서 디자이너를 고용할 수는 없으니까요. 


 그러다가 최근에는 제가 완전히 잘못 생각하고 있다는 점을 알게되었습니다. GIMP는 저에게 적합한 그림을 그리는 도구가 아니었습니다. 저에게 그림은 예술적인 영감을 구현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전달하고자 하는 것을 간결하고 직관적으로 제시할 수 있는 의사소통의 도구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저에게 필요한 것은 그림 보다는 도안에 가깝다는 점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럴려면 벡터 기반의 그림을 그릴 수 있는 툴이 필요하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찾아보니 일러스트레이터가 그런 도구더군요. 저는 그런 오픈소스 쪽을 선호하기 때문에 일러스트레이터처럼 사용할 수 있는 잉크스케이프(Inkscape)를 사용하려고 합니다. 다행히 유튜브에 사용법과 사용례들이 많이 나와서 익히기는 어렵지 않을 것 같습니다.


 GIMP와는 달리 잉크스케이프 동영상 강의들을 보고 있으면 할 수 있는 것들이 자연스럽게 보입니다. 역시 저는 이공계여서 그런지 자연스러운 감정을 표출하는 미술보다는 도형과 간단한 선으로 표현하는 것이 그나마 편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또, 그나마 도구의 사용법들이 보이고 어떻게 전개해야할지가 조금 보이기 때문입니다. GIMP에서는 재능의 편린조차 볼 수 없었다면 잉크스케이프에서는 손발은 움직여볼 여유가 생기는 것 같습니다. 아마도 이것이 그나마 얻은 발전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여튼, 새로운 툴을 익혀야 하는 상황이 답답하면서도 1년 전에는 상상도 못했던 일들을 하고 있는 자신을 보는 것이 재미있고 신기하다고 스스로에게 세뇌하면서 익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수준에 올라오면 앞서 제시한 그림들도 전부 수정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독감으로 거의 2주를 고생했습니다. 예전에는 독감을 그냥 체력으로 버틴 것 같은데, 지금은 약먹고 주사맞아도 2주간 아무 것도 못하는 체력이네요. 최근 독감이 지독한 건지 제 체력이 엉망인건지 잘 구별되지 않는 요즈음입니다. 여러분들도 독감 조심하시고 되도록 예방접종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최근에는 영어 음성학을 포스팅하고 있습니다. 


 1년 정도 선행 학습을 했고, 기대가 상당히 큽니다. 


 수십년간 알게 모르게 결핍으로 있었던 영어를 완전히 끝장낼 수 있겠다는 기대입니다. 그래서 해외에서 풍부한 정보를 수월하게 흡수할 수 있게 될 것이라는 기대입니다. 


 하지만 원하는 수준의 포스팅을 하고 학습 자료를 만들기 위해서 배워야 할 게 너무 많습니다. 


 우선, 다양한 이미지와 그림들을 블로그에 올리고 Anki에도 집어넣어야 합니다. 그런데 시중의 이미지에서 마음에 쏙 드는 이미지가 없고 마음에 든다 싶으면 제가 원하는 방향의 그림이 아닌 경우가 많았습니다. 또, 저작권 문제도 있습니다. 덕분에 제가 직접 그림을 그리고 이미지를 만들어야 하는 상황입니다. 결국, 그림을 배우고 이미지를 조작 소프트웨어도 공부하고 있습니다.


 이미지 조작 소프트웨어는 포토샵을 생각했지만 GIMP로 결정했습니다. GIMP는 포토샵과 비슷한 소프트웨어 툴입니다. 단지, 오픈소스 진영에서 만들어진 무료 툴이라는 점이 포토샵과 다를 뿐입니다. 제가 포토샵을 배운 적이 없어서 장단점을 설명하긴 어려울 것 같고, 무료라는 점과 리눅스 사용을 염두에 두고 배우고 있습니다. 장기적으로 리눅스 활용을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오픈소스 진영에서 나온 툴들을 잘 써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아쉽게도 그림에는 재능이 너무 없습니다. 작업을 따라하다 보면 영감을 얻고 새로운 툴을 사용하는 즐거움도 있어야 하지만 무미건조하게 기능을 익힐 뿐입니다. 그래서 기계적으로 정확한 그림을 그리는 것에 맞춰서 연습하고 있습니다. GIMP는 포토샵과 달라서 참조할 수 있는 책도 정보도 너무 부족합니다. 결국, 유튜브에서 해외의 튜토리얼들을 따라하면서 배우고 있습니다. 다시금 영어의 필요성을 절감합니다.


 또, 음원이 문제입니다. 음성학은 소리가 중요합니다. 저도 음성학을 책으로 공부했기 때문에 풍부한 음성자료를 접하지 못했다는 점이 항상 아쉬웠습니다. 단순히 언어학으로 이론을 공부할 거라면 별 필요 없겠지만 영어를 공부하기 위해서 음성학을 공부한다면 다양하고 풍부한 오디오로 개념을 실질적으로 익히는 것이 필요하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Ankilog를 포스팅하면서는 풍부한 음성자료를 찾아서 배치하고 Anki에도 그런 자료를 집어넣어서 익히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다양한 음원과 그 음원을 다룰 수 있는 프로그램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찾아본 결과 Audacity를 익혀보기로 했습니다. 


 결국, 음성학 Ankilog 포스팅은 조금 느리게 올라갈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소프트웨어 툴이 손에 익고 관련 내용들이 정리되면 점점 포스팅 하는 속도가 빨라질 것으로 생각합니다. 


 최근에는 배우고 익혀야 할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제 스스로 부족한 점이 많다는 자각도 많아지고 조바심도 납니다. 당장, 글쓰기, 그림, 사진, 이미지 작업, 디자인, 음원 편집이 필요해 보입니다. 이러다가 동영상 편집까지 배워서 유튜브를 하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다행히 학습 블로그이니 배울 것이 많다는 점은 또 그만큼 컨텐츠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니 불행 중 다행이라 생각합니다. 블로그를 하면서 배운 것들도 나중에 같이 공유할 기회가 있다면 좋을 것 같습니다.

 최근 고민이 많아졌습니다. 글쓰기가 너무 힘들어졌기 때문입니다.


 원래, 생각 가는대로 쓰던 편이었는데, Anki로 문장 암기를 하면서부터, 또, 블로그를 쓰면서부터 조금씩 글에 눈을 뜨고 말았습니다. 숨겨진 재능이 확 개화해서 글쓰기 수준이 올라간다면 좋았겠지만, 아쉽게도 어설프게 눈만 뜬 수준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글을 보는 눈은 높아졌지만 글쓰는 솜씨는 전혀 그렇지 않은 상항에 빠져버렸습니다. 그러니 글을 쓰다가 제 글 보기가 힘들어 놓아버리는 나날입니다.


 글쓰기에 눈을 뜬 덕분에 이제는 글을 보면서 '문장이 유려하다.'라느니 '글이 짜임새 있다.'라든지 하는 말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늦깍이에 문학에 눈을 뜨고 있습니다. 문장을 외워서 입으로 굴려보는 재미가 있다고 할까요. 문학에 재능이 부족한 저같은 사람이 문학을 제대로 공부하는 방법은 결국 암송이라는 깨달음도 얻고 언어에 대한 깊은 이해에 도달한 점도 매우 좋지만 글쓰기가 안되어 블로그를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Anki로 문장 암기하기에서 겪은 최악의 부작용입니다.


 벌써, 2주 이상 새로운 포스팅을 못올리고 있습니다. 글쓰기 진행이 잘 안되어 글쓰기 관련 책을 읽고 외우고 있습니다만 언제쯤 나아질지 잘 알 수가 없네요. 이제 문장을 쓰는 법은 어느 정도 익숙해졌지만 개요를 짜거나 정리하는 일은 어려워서 스스로 만족할 정도의 수준으로 글을 쓴다는 경지는 까마득해 보입니다. 글쓰기 연습이 끝나기고 포스팅 한다면 1~2년 후에 포스팅이 가능해질 것입니다.  게다가 건강상의 문제나 일이 바빠지면서 시간 내기가 조금씩 힘들어지고 있습니다. 이런 식이면 점점 늘어지고 흐지부지 될 것으로 보입니다.


 블로그에 글을 쓴다는 목적이 제 삶을 정리하고 나아가는 큰 힘이 됩니다. 그래서 포스팅이 늘어질수록 그 동안 구축했던 규칙과 목표가 희미해지면서 삶의 활기가 떨어집니다. 덕분에 매일 블로그를 올려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지금 쓰는 이 글도 어떻게든 글을 올려야 한다는 강박에서 튀어나온 글입니다. 강박감이 글쓰기에 대한 공포증을 가까스로 극복한 경우입니다.


 이런 식이면 계속 포스팅이 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잠시 제 생각을 정리해서 나열하는 글쓰기는 중단하고 공부한 결과를 정리하는 Ankilog 위주로 포스팅을 하려고 합니다. Ankilog는 짧게 주요한 내용을 나열하는 방식이므로 글쓰기의 영향은 어느 정도 줄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흘러 글쓰기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으면 글쓰기 관련 포스팅을 할 수 있게 되었으면 좋겠네요.

 HTML/CSS 관련 Ankilog를 올리기 시작한 것은 2017년 12월 부터였으니 대략 1년이 넘어간다. 이 1년 동안 포스팅을 성실하게 올리지는 못했지만 나름 꾸준하게 올렸다. 하지만 2019년이 되면서 HTML/CSS에 대한 Ankilog 포스팅이 막혔다. 그만 둔 것이 아니라 막힌 것이다.


 그 이유는 HTML/CSS 공부에 대한 맥락을 잃어버렸고, 오류가 많았기 때문이다. 


 우선, IT를 공부하려는 의도로 시작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디자인을 공부하고 있었다. 내 의도는 명백히 IT 기술인데 어느새, 폰트와 조판, 색깔의 배치 등을 출판 편집 디자인 같은 것을 공부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걸 깨닫자마자 스스로 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헤매면서 길을 잃게 되었다.


 사람들마다 잘 맞는 공부가 있는 법이다. 그리고 나의 경우 디자인은 잘 맞는 공부가 아니다. 흥미도 관심도 없기 때문이다. 나에게 디자인이란 그저 단순하게 잘 읽히고, 잘 보이면 되는 것이지, 색깔의 배합과 여백의 크기에 관심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재능이 있는 것도 아니고 관심이나 흥미가 있는 것도 아닌 것을 공부하는 것은 고행이다. 이런 것을 공부하려면 필연적인 맥락이 존재해야 한다. 가령, 평소라면 식용 가능한 식물이 무엇인지 관심이 없겠지만 산에서 길을 잃고 식물을 채취해서 먹어야 하는 상황이라는 필연적인 맥락이 생기면 열심히 식용 가능한 식물이 무엇인지 관심을 가지게 될 것이다. 


 시험과 점수는 바로 이러한 필연적인 맥락을 부여하기 위한 기본적인 장치다. 하지만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공부는 점수나 자격증을 따기 위한 시험공부가 아니라 순수하게 즐기는 공부다. 새로운 지식을 아는 순간 그동안 이해하지 못했던 것들을 이해하게 되고 의미를 이해하게 되는 것을 즐긴다. 그런데 맥락을 잃은 순간 이 모든 지식의 즐거움이 빛바래게 된다. 맛있는 밥이 갑자기 모래처럼 씹히는 느낌이다.


 두 번째 이유는 오류가 꽤 많이 발생한다는 점이다. 나름 최선을 다해서 검증한다고 했지만, 전문가로서 공부해야할 내용을 정리해서 올리는 것이 아니라, 초보자로서 그날그날 공부한 내용을 올리고 있기 때문에 당연히 그 내용이 근시안적일 수밖에 없다. 그날 공부할 때는 옳다고 생각했던 내용들이 다른 곳에서 오류라는 점이 밝혀지거나 하는 경우가 가끔 발생한다. 


 혹은 의문점이 생겼는데 이 의문점을 해결할 수 없는 경우도 많다. 사실, 이 부분이 제일 힘들다. W3C 튜토리얼도 종종 이상한 방식으로 설명하는 것 같고, 책을 읽어보니 외국 사이트를 그대로 베낀 것도 많이 눈에 띈다. 또, HTML 버전, 실무 경력, 웹 브라우저의 종류에 따라서 이야기가 달라지는 경우도 많아 무엇을 신뢰하고 학습해야할지 잘 모르겠다. 일일이 검증을 해보려고 하는데, 검증할 사항은 너무 많고 제대로 하고 있는지 확신이 잘 서지 않기 때문에 더더욱 손을 대기가 어렵게 느껴진다. 


 원래 내 성향대로라면 좀 더 기초적인 분야로 돌아가서 이를 이해하고 다시 돌아와야 맞지만 HTML 관련 역사나 내용을 보면 더 기초적인 분야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없어 보인다. 웹에서 가장 기초적인 분야는 HTML이기 때문이다. 이 HTML을 CSS로 꾸미고 Javascript로 작동시키는 것이 웹의 기본이기 때문이다.

 

 또, IT를 처음 공부할 때는 그저 프로그래밍 언어를 공부하면 된다고 막연히 생각했다. 하지만 조금씩 공부를 하면서 프로그래밍 언어는 그저 수단일 뿐이라는 점도 알게 되었다. 프로그래밍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기본적인 제어 외에는 IT의 관련 분야를 배우는 것과 같았다. 네트워크를 프로그래밍 한다면 프로그래밍 언어도 알아야 하지만 네트워크를 이해하고 네트워크에서 조작가능한 부분과 개선할 점 등을 아는 것이 더 중요하다. 프로그래밍 언어는 그저 도구일 뿐이다. 결국, IT를 공부한다는 것은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그리고 관련 분야의 토픽을 같이 공부하는 것이다.


 HTML도 마찬가지다. 결국, 웹 브라우저에 표시될 웹 사이트를 만드는 것이 기본적인 역할이다. 그리고 CSS는 그 자체로 디자인이라는 목적을 위해서 설계된 언어이기 때문에 디자인의 개념들이 CSS에 녹아들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IT가 아닌 것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은 것 같다. 


 HTML과 CSS를 처음 공부할 때는 이게 뭔지도 모르고 그저 필요한 기초 IT 공부라고 생각했다. 이게 웹 페이지를 구축하고 디자인하기 위한 도구라는 점을 들어서 알고는 있었지만, 이제 “정말 그렇구나.” 라고 진실로 체득하게 된 셈이다. 즉, 뒤집어 생각해보면 내가 발전했기에 오히려 길을 잃어버린 것이다.


 따라서 지금 내가 할 일은 잃어버린 맥락을 복원하고 내공을 닦는 것이다. 그 동안 블로그에 포스팅하기 위해 포스팅할 주제 위주로 내용을 파악했다면, 당분간은 웹 페이지 디자인에 관한 디자이너들의 고민과 기초적인 내용과 토픽을 읽어보고 관련 HTML과 CSS를 사용하는 방식에 대하여 조금 총체적으로 파악해보려고 한다. 맥락이 없는 공부가 고행이라면 맥락을 만들면 되는 것이다. 기본적인 내용들을 파악함으로써 평생 한번도 건드려보지 못한 영역을 맛볼 수 있게 된다면 그것도 매우 이익이다. 오히려, HTML과 CSS 공부라는 맥락으로 디자인을 조금 파는 것도 괜찮아 보인다. 그리고 그래도 영 안맞는다면 아주 기초적인 수준만 달성하고 돌아오면 될 일이다. 


 맥락을 복원하고 내공이 조금 쌓일 때까지 HTML/CSS 포스팅을 잠시 쉬어가려고 한다. 어차피, 공부는 Ankilog로 할 것이므로 결국, 다시 Ankilog 포스팅으로 돌아올 것이다. 너무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2019년 올해는 시작부터 난감하다. 블로그가 잘 써지지 않는다. 그래서 지금은 천자문만 포스팅하고 있다.


 예전에 블로그에 올린 글을 읽을 때마다 참 슬프다. 평생 글을 쓰지 않고 남의 글만 읽다가 글을 쓰려고 하니 자기 수준이 보이기 시작한다. 맞춤법은 틀리고 글은 중구난방이다. 특히, 해외의 글을 번역한 경우는 정말 어떻게 이렇게 글을 썼을까 싶을 정도로 절망적이다.


 영어를 번역한 글이 너무 이상하고 작위적이라고 느껴서 번역 관련 책을 찾아보았다. 그 동안 우리말을 얼마나 모르고 썼는지 깨닫게 되면서 부끄럽기도 하고 글쓰기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렇게 책 한두 권을 읽으니 이제는 내적인 규범이 생기면서 글을 쓰기 너무 어려워졌다. 자기 검열이 강화되었다고나 할까?


 자기 검열이 강화된 것에 이어 욕심도 많아지기 시작했다. 왜 이리 하고 싶은 것이 많아지는지, 거기에 이것저것 처리해야할 일들이 끼어들어 마음을 심란하게 한다. 지금은 열심히 욕심을 들여다보면서 빨리 처리할 수 있는 것은 빨리 처리하고 필요없는 욕심은 정리하려고 노력중이다. 


 천천히 하나씩 하나씩 해가면 될 테지만 그럼에도 마음은 답답해지고 자꾸 조바심이 난다. 공부하고 싶은 것도 많고, 현실에서 이루어야할 일들 때문에 마음은 쫓긴다. 올해는 유난하다. 


이건 슬럼프일까? 슬럼프라고 하기에는 전성기가 없었다. 뭔가 잘 되고 있어야 슬럼프가 오는 것인데 지금은 끊임없는 모색과 시간부족에 시달리는 것이므로 슬럼프라고 말하긴 어려울 것 같다. 하고 싶은 것은 많고, 정리는 되지 않고, 저돌적으로 밀고 나가고 싶지만 안 되고 답답한 기분. 이 기분은 상당히 친숙하다. 부족한 것이 많고 감내해야만 한다는 것을 알고 입을 꽉 물고 있는 이 기분, 하나에 집중하려고 하는데 정신이 산란해지는 이 기분, 20대에 느꼈던 기분이다. 


 아마도 글쓰기가 시작이었던 것 같다. 부족한 것들이 보인다. 부족한 것들을 채우려고 생각하니 막막하다. 덕분에 지금 하고 있는 일들에 대한 부정적인 가치평가가 내 속에서 줄을 잇고 있다. 즉, 방황하고 있는 것이다. 확실히 욕심이 과해졌다. 


 아마도 당분간은 지속될 것 같다. 가장 먼저 불필요한 것들을 잘라내고 부족한 것을 채우기 위해서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희망을 가져본다. 한 번도 자각하지 못했던 글쓰기의 문제점이라든가 구체적인 목표 등을 세워야 하는 이 상황은 그 막막함과 불안이 성장통과 닮아있다. 익숙한 것과 결별해야만 하는 결단과 다시 변화의 낯설음에 대한 불안과 그 결과를 알 수 없다는 막막함이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성장통의 결과는 성장이다. 늦깎이에 새로운 성장을 맞이하게 된다니. 가슴이 뛴다. 

한자 공부를 하는 이유에 대한 정리되지 못한 이야기들


한자를 공부하고 있다고 이야기하면 사람들이 바라보는 시선이 정말 재미있다. 무척 신기해하는 느낌이라고 할까? 여튼, 대화가 끊기고 잠시 정적이 흐른다. 이제 한문이라는 것이 우리의 생활과 거의 관련되지 않는 분야라는 것을 새삼 느낀다.


IT 시대로 넘어오면서 한문은 더더욱 외면 받는다. 그리고 그게 정상이다. 중국마저도 한자를 잘 안쓰는 시대에 한자를 공부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관련 분야의 학자일 수밖에 없다. 게다가 한자는 컴퓨터에서 사용하기 정말 어려운 글자 체계라서 더더욱 사용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시대에 한자를 공부하고 사용하고 싶다고 한다면 결국, 동양철학, 한의학, 사주, 풍수 등을 공부하는 경우라고 할 수 있다. 뭐, 나도 그런 분야에 대한 호기심이 없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구태여 한자를 공부할 필요가 있을까 싶다. 어차피 다 한글로 번역되어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한문의 번역을 어디까지 믿을 수 있을까? 솔직히 믿기 어렵다. 번역이라는 것 자체가 상당히 난제다. 해당 언어에 능통하고 그리고 그 책이 다루고 있는 분야에 능통한 사람이 한국어에도 굉장히 능통해야 한다. 이 세 가지가 전부 갖춰져야 볼만한 책들이 나온다. 그래서 소설이나 시들은 상당히 번역이 잘 된다. 하지만 조금만 문학이 아닌 쪽으로 전문성이 높은 책들의 번역은 정말 슬프기 그지없다. 그런데 한문은 여기에 한 술 더 뜬다. 한문은 내가 접해본 언어들 중 가장 축약된 언어형식을 가지고 있고 문장을 읽을 때 난해한 언어다. 그래서 내용도 엄청 축약되어 있다. 따라서 이것을 한글로 다시 전개할 때, 본인의 생각이 반영될 수밖에 없다. 내용을 더 자세하게 풀어쓰면 풀어쓸수록 더 원문과 거리가 멀어진다.


읽고 있던 책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서 Anki로 한문을 공부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지만 번역이 엉망인 책들은 한문을 공부하게 된 가장 최종의 방아쇠였을 뿐, 그 전에 이미 한문에 대한 상당한 호기심이 있었고 그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스스로 생각한 한문 공부의 필요성은 다음과 같다. 

    

1) 국어가 정확해진다. 

2) 글자 자체가 풍부하게 의미작용을 한다. 

3) 암기하기 좋고 곱씹기 좋다.

4) 한문으로 읽어야 좋은 정말 좋은 문헌이 많다.

5) 언어적인 측면



1) 국어가 정확해진다.


오랫동안 ‘자유’라는 말을 영어의 ‘freedom’이라고 생각해왔다. 멜 깁슨이 “브레이브 하트”에서 ‘freedom’을 외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다가 우연한 계기로 ‘자유’의 한자어인 ‘自由’를 알게 되었다. 그것은 ‘자기 원인’, ‘스스로의 이유로’라는 의미였다. ‘freedom’은 외부의 억압과 착취가 없는 것 뿐이라면 ‘自由’는 스스로의 이유로 자신의 이유로 스스로 움직인다는 것이었다. 


서구 형이상학에서 모든 원인의 인과연쇄는 결국, 자기 자신을 원인으로 하는 제1원인으로 귀결되고 그 제1원인은 스스로 말미암아 작용하는 존재가 된다. 그리고 흔히 그러한 존재를 신(GOD)이라고 한다. 즉, 신은 ‘自由’로울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인 셈이다. ‘自由’라는 것은 어리석음에 흔들리지 않고 지혜롭게 생각하고 행동하며 스스로 작용을 시작하고 책임지는 신적인 존재로 인간의 존재를 끌어올리는 단어였던 것이다. 이를 깨닫게 된 날 내 삶은 분명히 조금 나아졌다.


또, 자연이라는 말이 있다. 영어로는 ‘nature’다. 하지만 한자어로는 ‘自然’이다. 이 둘은 명백히 다른 언어다. ‘nature’가 문명의 반대편을 지칭하는 단어다. 장자크 루소가 “자연으로 돌아가라.”라고 이야기했을 때, 이것은 그야말로 문명을 버리고 원시 상태로 돌아가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한자어 ‘自然’은 본성에 따라서 저절로 그러하게끔 되는 것이다. 따라서 문명은 인간의 ‘自然’이므로 이 또한 배척할 대상이 아니다. 단지, 서로 이질적인 것들의 ‘自然’과 조화를 이루는 것이 중요할 뿐이다. 


사람들은 ‘자연’을 이야기하면서 전원으로 돌아가 느긋하고 평화로운 삶을 이야기한다. 서구의 ‘nature’와 동양의 ‘自然’이 섞여서 혼합되어 버린 것이다. 나는 ‘自然’이라는 단어를 알게 되면서 알게 모르게 혼동되던 개념들을 풀 수 있었고, 이제 더 이상 인간의 문명을 자연스럽지 않은 것으로 혐오하지 않게 되었다.


보다시피 서구에서 들어오는 개념들을 번역한 번역어와 기존의 언어들이 부딪히고 섞이면서 수많은 혼란을 가져온다. 그런데 기존의 언어들은 대부분 한자어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한자를 모르면 그 의미가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고 그저 사용하는 방식에 따라서 막연히 의미를 아는 경우가 많다. 이러니 점점 언어의 혼란은 가중되는 것이다. 



2) 글자 자체가 풍부하게 의미작용을 한다. 


그렇다면 “글자 자체가 풍부하게 의미작용을 한다.”라는 것은 무엇일까? 표음문자의 단어는 한 단위로 뭉뚱그려진 것이다. 가령, ‘사람’은 사람이다. 그냥 그렇게 지칭한다. 그런데 한자어로 사람은 ‘人(사람 인)’이다. 이는 두 다리로 서있는 사람의 모양이다. 즉, 형상을 본 떠 만든 글자이다. 여기에 木(나무 목)을 붙이면 사람이 나무에 기대어 쉬고 있다는 의미의 休(쉴 휴)가 된다. 글자들이 만들어진 맥락을 유추하면 그림이 그려지고 의미작용이 풍부해진다.


또, 예를 들어보자. 태양은 日(날 일)이고 달은 月(달 월)이 된다. 이 둘을 합쳐서 明(밝을 명)을 만든다. 빛의 근원이 낮에는 태양이고 밤에는 달이었던 시절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적합한 글자다. 이제는 明(밝을 명)에다가 식물이나 풀을 의미하는 초두머리(艹)를 씌우면 萌(싹 맹)이 된다. 萌(싹 맹)을 보면 땅속에서 버티던 식물들이 지표를 뚫고 나와 밝은 곳에 드러나는 것을 싹이라고 여긴 사람들의 심상이 그려진다. 


한자를 공부하다 보면 이런 식으로 글자가 만들어진 원리를 자연스럽게 생각하고 확정하게 된다. 물론, 그 원리가 고고학적으로 정확한 것은 아니고 스스로의 생각에 불과하다. 하지만 한자가 만들어진 납득할만한 이치를 찾았을 때 그 한자는 머릿속에 각인되고 그 글자가 생생하게 살아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경험을 자주 하게 된다. 이것은 표음문자에서는 맛보기 힘든 특이한 문자 경험이라고 할 수 있다. 



3) 암기하기 좋고 곱씹기 좋다.


한문을 번역한 책들을 살펴보자. 항상 한문은 짧고 한글은 길다. 그럴 수밖에 없다. 한자는 어지간한 개념을 전부 하나의 글자로 만들기 때문이다. 우리말로 “공자가 말하기를”이라고 하면 한자어로는 “子曰”이다. 한자어는 2글자인데 한글은 공백 포함해서 8글자로 4배다. 이렇게 한자가 짧기 때문에 당연히 암기하기에 좋고 곱씹기에 좋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건 단점이기도 하다. 한자어의 번역이 어려운 이유기도 하지만 너무나 축약되어 있는 한자 덕분에 정확한 정보의 전달이 되기는 어렵다. 오히려 각 시대의 사람들은 이러한 한자어로 된 문헌을 보면서 그 시대에 맞는 깨달음을 얻기 일쑤였고, 덕분에 사람들마다 해석이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이건 한문의 문법체계와도 관련이 있는데, 한문의 문법은 정말 너무나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지나치게 열린 체계이다. 이런 열린 체계의 문법과 축약된 한문이 합쳐지면 해석은 중구난방이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따라서 이러한 한문의 공부는 외워서 곱씹는 수밖에 없다. 매일 매일 곱씹다 보면 글자들이 살아 움직이면서 합종연횡을 하고 그러다가 도달한 균형점에서 그 의미작용을 선연히 드러낸다. 이때, 의미는 단순히 하나가 아닐 수 있다. 여러 가지 의미들이 입체적이고 복합적으로 드러날 수 있다.


내가 만일 지식을 공부하려고 한다면 그 지식을 한자로 축약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일 것이다. 내가 공부한 지식을 타인에게 전달하는 용도로 한자와 한문은 별로겠지만 내 스스로 지식을 저장하고 사용하기 위한 용도로 한자는 가장 고효율의 압축을 보여준다. 그리고 곱씹기를 통하여 입체적이고 복합적으로 드러나는 의미형태가 흥미롭다. 



4) 한문으로 읽어야 좋은 정말 좋은 문헌이 많다.


평소 한문은 고리타분하고 꼬장꼬장한 잔소리 모음처럼 생각했다. 그러다가 대학 때, 구장산술(九章算術)을 읽어보고 그 정밀함에 꽤 놀랐다. 그렇게 조금씩 접하게 된 내용들을 보면서, 너무나 많은 천재들이 남겨놓은 저술들이 있음을 자각하게 되었다. 


개인적으로 고대의 기술과 수학에 관심이 있고, 노후를 위하여 명리나 풍수에도 관심이 있다. 그리고 그런 쪽을 뒤져보다 보면 정말 말이 되지 않는 이야기만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입이 벌어지는 글도 가끔 마주치게 된다. 하지만 이해하기가 너무 어렵다. 기초가 없고, 한문을 모르니 한글로는 그 맛을 잃는 경우가 많다. 


김용의 영웅문 3부작이 다시 한글로 재번역되어 나왔다. 한문을 모르는 신세대를 위하여 한자어를 한글로 풀어서 설명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볼 때마다 김이 빠지는 느낌이다. 한자어가 주는 심상이 사라지고 한글의 설명이 되면서 그 생기를 잃어버린 것이다. 한문 특유의 심상을 느낄 수 없으니 소설의 즐거움도 줄어드는 것이다. 결국, 한문도 원문으로 봐야 제대로 맛을 느낄 수 있는 셈이다.



5) 언어적인 측면


마지막으로 한문 공부를 하다 보니, 언어적인 측면도 무척 흥미로워지기 시작했다. 특히, 의미작용이라는 부분에서 그렇다. 한문은 이야기의 축적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긴 이야기가 사자성어나 고사성어로 축약되고 고유명사화 된다. 그리고 다시 축약된 성어들이 모여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고 또 축약된다. 그래서인지 익숙한 한문을 접할 때는 그 의미작용이 매우 강하게 이루어진다는 느낌을 준다. 즉, 사자성어만 들어도 관련 고사가 한꺼번에 입력되는 느낌이다. 표음문자 체계에서도 다양한 측약어를 사용하지만 한자만큼 직접적인 느낌을 주지 않는다. 기회가 닿는다면 이런 부분도 조금 연구해보고 싶다. 

대화를 하거나 글을 쓸 때가 되면, 그 동안 여상하게 마음속에서 흐르고 있던 많은 것들이 언어의 형태로 구체화되기 시작한다. 말을 하다보면 자신이 한 말에 소스라치게 놀라는 경우도 종종 있다. 자신이 몰랐던 것들이 갑자기 말로 튀어나오기도 하고, 강력한 공격성이나 집착이 표출되기도 한다. 그 많은 말들이 내 맘속에 있었다는 것이 신기하기도 하다. 아마도 마음 속에 있었던 것들이 언어화되기 전에는 어떻게 존재했는지 알 수 없었던 것 같은 느낌이다.


실제, 대화를 할 때 대화를 하고 있는 자신을 스스로 관찰해보면 할 말이 그냥 떠오르는 것을 종종 보게 된다. 인사말, 하고 싶은 농담이나, 오늘의 토픽 등등 하나하나 갑자기 튀어나온다. 성급한 사람이라면 이렇게 튀어나온 말들을 그대로 입으로 옮겨서 화를 자초하기도 하지만 조금만 신중한 사람이라면 그 말을 우선 속으로 되새겨보면서 큰 화를 불러올 말을 걸러내려고 한다. 


사실, 말뿐만 아니라 글도 대부분 자동으로 떠오르는 것이다. 소설 작가들의 창작 이야기를 보면 글이란 써지는 것이지 쓰는 것이 아니다. 이들이 작업하는 양상을 보면 이렇다. 우연히 좋은 소재와 영감이 떠오르면, 바쁘게 그것을 정리하여 글로 적어낸다. 그리고 작가는 첫 번째 독자로서 자신의 글을 읽고 그 글을 통해 새로운 느낌을 얻고 또 영감을 얻어 자신이 쓴 글을 또 발전시킨다. 좋은 점과 나쁜 점을 찾아내고 새롭게 변화시키면서 이를 다듬어 보고 다시 독자가 되어 글을 읽고 다시 다듬는 과정이 반복될 수록 글은 좋아진다. 결국, 좋은 작품은 뛰어난 예술적 창의성과 그것을 다듬고 그로 인하여 다시 영감을 얻는 과정의 수많은 반복에 다름 아니다. 이 때, 소설가는 결국 예술적 창의성이라는 어디선가 튀어나오는 것을 하염없이 기다리거나 영감의 원천을 얻기 위해 다양한 행동을 취하기도 한다. 


시나 소설 등의 글은 자리에 앉아서 끈덕지게 스스로와 교류하면서 쓰는 것이지만 대화는 조금 다르다. 시간에 쫓기고 즉각적이다. 이야기할 화제를 고르거나 말을 다듬을 시간이 글에 비해서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따라서 실수할 가능성도 높기 때문에 말이 빙빙 돌면서 상황을 파악하고 서로의 말에서 영감과 유대관계를 구축하면서 조금씩 내밀한 이야기를 하게 된다. 


덕분에 대화는 대화 당사자들이 서로 잘 알고 있는 또는 공감하고 있는 항상 주변에 현존하고 있는 것 또는 상황을 위주로 시작되는 경우가 많다. 가볍게는 누구나 느낄 수 있는 날씨로 공감을 하고 같이 겪은 즐겁고 힘든 일에 대한 공감을 표현하면서 공감과 유대관계를 구축하는 것이 대부분의 대화의 역할이다. 물론, 그런 공감 찾기 과정을 뛰어넘어 깊은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한두명에 불과할 것이고 대부분의 사람들과 하는 이야기는 소소한 농담 따먹기와 주변에 대한 공감 정도일 것이다. 그리고 서로가 공감할 수 없다면 대화는 없을 것이기 때문에 결국, 일상적인 대화란 대부분 대화 당사자들이 직접 마주치고 있는 현실에 대한 묘사와 공감 정도에 국한된다. 


이런 대화들은 자연스럽게 일어난다. 나와 저 친구의 관계가 이 정도에 불과하니 말을 조심하고 공감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해서만 이야기해야겠다고 계산하고 판단하면서 말하지 않는다. 실제로는 그냥 본능적으로 자신과 어울릴 수 있는지 없는지를 옳든 틀리든 규정한다. 자신과 어울릴 수 있을 것 같아 산변잡기로 주변의 공감할만한 것들을 던지다 보면 대화 당사자들은 서로 어울릴 수 있는지 없는지 여부가 금방 파악된다. 공감하는 것들이 많으면 서로 잘 통하는 사람들이고 그렇지 않으면 서로 잘 안 통하는 사람일 뿐이다.


직장에서 만난 친구 중에 조금 내향적인 것으로 판단되는 친구가 있었는데, 어쩌다 대화를 해본 결과 그 친구의 대화를 도저히 따라갈 수 없었다. 그 친구가 갑자기, 시카고에서 유행하는 피자를 이야기하면서 웃었는데, 왜 웃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고, 내가 멀뚱멀뚱하게 있으니 그 친구는 다급히 자리를 파하고 가버렸다. 아마도 우리는 서로 대화하기 어려운 사람으로 서로를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대화를 하면서 모든 말들은 즉석에서 만들어진다. 이전부터 익숙하게 사용해서 입에 붙은 말들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말들은 전부 그 자리에서 만들어진다. 그러다 보니 명사가 잘 사용되지 않는다. 정확하게 말하면 모두가 공감할 수 없는 상황이나 이 자리에 없는 자신만의 무엇을 말하지 않고 눈앞에 있거나 이미 모두에게 중요한 상황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게 된다. 이런 것들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라서 그것을 지칭하는 말들은 대부분 대명사이다. 마치 볼드모트처럼 사람들은 이름을 회피하고 그저 ‘그’라고만 지칭하는 것이다. 표현력이 뛰어난 사람은 설명도 대부분 시연 위주로 한다. “그가 이렇게 했어.”라고 말하면서 몸으로 그의 행동을 보여주거나 표정을 흉내내거나 한다. 사용하는 언어는 대부분 간단하고 바로 얼마 전에 보고 들었거나 지금 눈앞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들을 주로 사용한다.


언어는 그 모든 것에 있어 조금은 부가적이다. 가령, 내가 자주 사용하는 컵이 다른 사람의 컵과 비슷해서 서로 계속 그것을 교환하면서 쓰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할 때면 이렇게 이야기할 수도 있다. “이게 A의 컵이야. 이게 내 컵이고, 비슷하지, 알고보니 비슷한 컵을 서로 계속 교환하면서 썼어!”라고 컵을 보여주면서 이야기하는 경우를 떠올려 보자. 우리는 언어를 이용해서 컵 두개로 이야기를 만들어 내고 있다. 이 때, 실제의 컵이 언어에 엮이면서 현실과 분리되지 않고 그것을 끈끈하게 이어서 서로 연관된 현실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것은 현실임과 동시에 언어화되어 존재하게 된다.


일상적인 대화를 관찰하다보면, 어떤 사물, 어떤 상황, 어떤 인물들이 분류되면서 언어화되는 것을 본다. 사물은 간단하다. 대부분 다른 것과 구분되는 지점이 명확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황은 어떨까? 직장 상사가 말도 안되는 이유로 직원들을 트집잡고 군기잡고 소리지르면서 상황을 짜증나게 만들면, 모든 직원들은 휴게실로 몰려가서 그 상사를 씹는다. 이 때, 그 복잡한 상황은 단순히 “그 상황”이라는 말로 하나의 개체로 묶여버린다. 그 상황을 겪은 모든 이들이 그것에 공감하고 있기 때문에 딱히 구체적으로 설명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의 정신세계는 그러한 개체를 간단히 만들어 버린다.


하지만 직장상사의 이야기는 단위를 어떻게 쪼개느냐에 따라서 굉장히 다른 이야기로 변질된다. 직장상사의 분노의 원인으로 이야기가 좁혀지면 화살이 그 분노의 원인을 제공한 다른 사람에게 넘어갈 수 있다. 자신이나 그 직장상사나 내리갈굼의 동일한 피해자로 만들어낼 수도 있고, 그 직장상사의 분노를 유발시킨 다른 직원에게 화살이 날아갈 수도 있다. 이 모든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직장상사를 규탄하는 것으로 상황이 묶인 것은 그 직장상사에 대한 기존의 쌓여온 경험을 통해 사람들에게 이 문제는 직장상사가 나쁜 것이라는 인식이 자리를 잡았기 때문일 것이다.


상황이 단위로 쪼개지고 그 단위에 따라서 언어화 되는 것은 너무나 자동적이고 익숙한 일들이다. 다양한 상황과 사물들이 마치 그것이 당연하다는 듯이 단위로 쪼개어져 인식된다. 앞서, 언어가 구사되는 법 01에서 정확히 알지도 못하는 전문 용어를 단순히 몇가지 키워드가 일치하는 영상을 통해서 매칭되고 그것을 그대로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 고민을 하면서 뜬금없이 비약을 하게 되었다. 즉, 언어라는 것이 인간이 인지하는 여러가지가 자연스럽게 반영되어 장전되었다가 자동으로 발사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그러한 비약이었다. 그렇게 의심하게 된 것의 배경이 이 일반적인 대화에 대한 관찰이었다.

앞서의 뜬금없는 결론을 상기해보자. 언어라는 것이 인간이 인지하는 여러 가지가 자연스럽게 반영되어 장전되었다가 자동으로 발사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 뜬금없는 이야기를 조금 신빙성 있는 이야기로 전개해보자. 조금 긴 과정일 것 같다.


우선은 자막과 영상의 대응이라는 것에 주목해보자. 앞서, 어려운 전문용어 자막과 영상의 매치로 그 용어를 이해했다고 스스로 여기게 된 것을 이상하게 생각했다. 왜 그러냐면 마치 이런 것과 같은 느낌이다.


친구랑 길을 걷고 있는데 갑자기 친구가 이렇게 말한다. 

“내가 어제 길을 가다가 피젯스피너를 주웠어.” 

그런데 나는 “피젯스피너”라는 단어를 처음 들어봤다. 그럼 당연히 이렇게 말할 것이다. 

“피젯스피너가 뭐야?”, 

그러자 친구가 피젯스피너를 꺼내서 보여주면서 말한다. 

“이거야.”

그렇게 나는 “피젯스피너”라는 것을 인식했다. 


이 대화는 간단하게 축약하면 이런 상황이다. 대화 도중에 모르는 단어를 들었기 때문에 대화가 중단되고 해당 단어에 대한 일련의 파악이 있었다. 이 경우에는 그 궁금증을 실물을 보면서 해소했다. 물론, 완전히 해소된 것은 아니지만 그것으로 족했다. 하지만 관심이 있는 경우가 아니라면 그냥 실물을 본 순간 그냥 해소가 된다. 이 경우에는 단지 “피젯스피너”는 이것(실물)이라는 일련의 등치만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났다. 만일, 친구가 그 “피젯스피너” 실물을 보여주지 않고 말로 이것을 설명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가령, “돌리는 거야.”, “이렇게 꼭지가 3방향으로 나있는 것도 있고, 장난감이야.” 원래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것을 설명할 때마다 새로운 궁금증이 나온다. 말로 전해진 어떤 사물의 외양이나 용도는 추상적이기 때문에 이해하기가 힘들다. 그리고 그것은 자꾸 답답함을 가져온다. 마치 앞에서 “피젯스피너”라는 모르는 단어를 들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새로운 설명은 다시 새로운 답답함을 가져온다. 하지만 실물을 보았을 때, 그 모든 궁금증이 가라앉고 선택의 문제가 된다. 그것을 직접 받아 면밀히 파악해볼 것인가 아니면 그냥 실물을 보고 그 단어에 매칭시키고 넘어갈 것인가로 선택하게 된다. 공이 완전히 나에게로 넘어왔다. 더 이상의 설명은 그저 실물에 부차적인 것이 될 뿐이다. 


위의 대화를 언급한 것은 우리가 모르는 단어나 낯선 단어를 마주볼 때 반드시 그것의 내용을 채워야한다는 압력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내용은 구체성을 갖추어야만 납득이 된다. 즉, 말로 설명하게 되면 구체적으로 상상하거나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 설명이 반복되어야만 할 것이다. 하지만 구체적인 사물을 보고, 듣고, 맛보고, 만져보게 되면 더 이상의 설명은 필요 없어진다. 이것은 본능처럼 자연스럽게 발생한다. 언어는 그 대응물이 있어야만 내 속에서 작동하는데 대응물이 없으니 언어가 작동하지 않고 대화는 멈추며 대화를 잇기 위해 그 대응물을 찾는 것이다. 


이제, 자막과 영상의 대응을 통해 그 용어를 이해했다고 여기는 과정이 무엇인지 감잡을 수 있다.  황색포도상구균(Staphylococcus aureus) 감염(infection)이라는 자막과 함께 무언가 노란 기류 같은 것들이 세포들 사이로 퍼지는 영상을 봤을 때 자막에서 제시한 몇가지 키워드 '황색', '균', '감염'이라는 키워드와 영상이 일치했다. 따라서 나는 그 노란 기류를 '황색포도상구균'이라고 즉각적으로 인지했고, 그것이 퍼지는 것을 '감염(infection)'이라고 즉각적으로 인지했다. 그렇게 황색포도상구균(Staphylococcus aureus) 감염(infection)이라는 자막의 대사가 영상과 완전히 일치했기 때문에 자막은 영상을 가리킨 것이 되었고 더 이상의 의문은 발생하지 않았다. 물론, 이것은 영상이 자막을 충실히 구현했고 동시에 그 영상의 진위나 정확성을 따지고 파악할만한 배경지식이 없기 때문에 바로 자막과 영상이 동일하다는 매칭이 이루어진 것이다. 만일, 전문지식과 식견이 있었다면 영상을 비판적으로 봤을 가능성이 높다.


이제까지 언어가 대응물을 찾지 못했을 때 그 대응물을 찾기 위한 일련의 과정이 개시된다고 말해왔다. 그렇다면 굳이 대응물을 찾는 과정이 발생하지 않는 말들은 이미 대응물이 있다는 것이 된다. 그리고 그 대응물은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바로 그 ‘의미’라는 것이 될 것이다. 결국, 지금까지 열심히 써온 내용들이 실은 누구나 아는 “언어와 의미가 어떻게 대응되는가?” 하는 질문을 찾았고 그 대답의 일부를 찾은 상황인 것이다. 즉, 현재까지는 의미 모를 단어를 마주쳤을 때 반드시 그 구체적인 의미를 찾는 과정이 자동적으로 부지불식간에 개시되고 기존에 의미를 모른다면 새로운 의미가 그대로 수용되지만 기존에 의미를 알고 있다면 그것이 비판적으로 수용된다는 점을 파악한 셈이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언어가 의미와 어떻게 대응되는지 본격적으로 살펴보자.

세상에는 굉장히 어려운 단어들이 많다. 특히, 어떤 전문 영역에서만 사용되는 전문용어들은 매우 복잡한 개념을 구현하고 있어서 외국어가 아니더라도 그것을 익히기 위해서 상당한 배경지식과 이해를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그 대표적인 것이 의사들이 사용하는 의학용어일 것이다. 


미국 드라마 닥터 하우스는 메디컬 드라마라서 대사의 많은 부분이 생전 처음 들어보는 전문 의학용어다. 그래서 영어로 직접 듣거나 한국어 자막으로 읽거나 전혀 모르는 용어라는 점에선 똑같다. 하지만 이 모르는 용어라도 한국어 자막으로 드라마를 시청할 때는 드라마를 즐기는데 전혀 문제가 없다. 그런데 같은 단어를 자막 없이 영어로 듣게 되는 순간 갑자기 너무나 낯선 용어가 되어 버린다.


너무 많이 본 나머지 에피소드의 내용과 캐릭터 대사들에 매우 익숙해진 미국 드라마를 자막 없이 봤을 때, 잘 들린다고 생각했던 영어가 자막이 사라지면 안 들리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앞서 추론한 바가 있다. 즉, 자막에 대해서 익숙해진 나머지 영어로 들은 것이 머릿속에서 자막으로 동시 재생이 되면서 그런 착각이 발생한 것이다. 하지만 바로 다음에는 새로운 의문점이 생기게 되는데 왜 전부 아는 단어로만 이야기하고 있는데도 드라마를 알아먹지 못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다. 이 문제는 언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광범위한 이해를 선물한 문제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문제를 다루기 전에 처음 생긴 의문은 이것이다. 닥터 하우스에서 현란하게 구사되는 전문용어들이 어차피 모르는 단어들인데 왜 한국어 자막으로 볼 때에는 괜찮고 자막 없이 영어로 볼 때에는 너무나 낯설고 정신을 사납게 하는 단어로 변하는가 하는 문제였다. 즉, 이때의 관심사는 어차피 모르는 것은 똑같은데 한국어 자막으로 볼 때는 마치 내가 그 단어를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그냥 넘어가는 것이다. 반면, 자막 없이 영어로 들을 때는 그 단어가 어디서 시작해서 어디로 끝나는지도 파악할 수 없는 그저 엉망진창이었다. 


처음 이 문제를 궁금하게 여겼을 때에는 모르는 단어를 한국어의 체계에서는 이해할 수 있는데 모르는 외국어의 체계에서는 이해할 수 없다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즉, 내가 의식하지 못하는 언어적 체계가 있고 그러한 언어적 체계 안에서 단어들이 설명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것은 일정부분 사실이고 추후 이 문제를 다룰 예정이다. 하지만 좀 더 주의 깊게 살펴보니 외국어를 몰라서 생긴 부분과 별도로 고민해볼 문제가 있었다.


다시 말하지만 전문용어를 이해한다는 것은 힘들다. 관련 배경지식을 알고 실제로 적용해보면서 힘들게 하나하나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겨우, 드라마 한편을 보면서 수많은 전문용어를 자연스럽게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느낀다. 모르고 넘어갈 때는 그렇지만 호흡을 가다듬고 주의 깊게 살펴보면 대단히 신기한 현상이었다. 어떻게 그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그리고 그것은 진짜로 알고 있는 것일까? 그 안다는 것의 범위는 어디까지인가? 등등의 수많은 질문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기 시작했다.


자막이 있다고 하지만 어떻게 뜻 모르는 단어들을 들으면서 아무런 문제없이 드라마를 즐기는 것일까? 다행히 상당히 빠르게 이것에 대한 답을 낼 수 있었다. 드라마 자체가 어려운 의학용어를 쓰기 때문에 당연히 의학에 문외한인 일반 시청자들은 그것을 알아들을 수 없다. 시청자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용어를 남발하면 드라마가 재미있을 수 없는 법이다. 따라서 드라마 제작자는 일반인들이 즐겁게 시청할 수 있도록 영상과 대사가 자연스럽게 이 의학용어가 무슨 의미인지 꼭 필요한 부분은 설명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즉, 바이러스가 신체 곳곳에서 퍼지는 영상, 기생충이 세포 조직을 넘나드는 영상 등을 직접 제공하여 시청자들이 직관적으로 자연스럽게 해당 의학용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따라서 모르는 의학용어라고 해도 자연스럽게 이해가 되면서 스토리가 전개되는 것이다.


하지만 황색포도상구균(Staphylococcus aureus) 감염(infection)이라는 자막과 함께 무언가 노란 기류 같은 것들이 세포들 사이로 퍼지는 영상을 본다고 내가 그것을 이해했을까? 당연히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황색포도상구균(Staphylococcus aureus)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그것이 어디서 생겨나 어떻게 사멸하는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자연스럽게 그것을 이해했다고 생각하고 아무런 궁금증이나 답답함 없이 넘어간다. 이상한 일이다.


아마도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은 누구나 알고 있는 이런 문제를 왜 제시하는지 의아해할지도 모르겠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현상이 무엇인지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저 이야기에 필요한 부분만 맥락에 따라 피상적으로 이해하고 넘어가는 것이 일상에서 너무 당연한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단어마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수준의 이해를 갖추어야 하거나 또는 그러한 부가 설명을 붙여서 말을 해야 한다고 하면 그 번거로움이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간략하게 말하고 듣는 사람들은 맥락에 따라서 자연스럽게 이해하고 넘어간다. 알면 아는 만큼 모르면 모르는 대로 무심하게 이해하거나 단정하고 넘어가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렇게 일상다반사인 일들을 갑자기 문제제기하는 것은 실은 나의 의문은 반전된 의문이기 때문이다. 만일, 영상이 없었다면 어땠을까? 황색의 기류가 퍼지는 영상 없이 황색포도상구균(Staphylococcus aureus) 감염(infection)이라는 말을 듣게 되면 그냥 드라마의 맥락에 따라서 어느 정도 이해가 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상당히 많은 노력이 필요할 것이고 드라마를 보려고 한 것이지 환자의 병을 토론하려고 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금세 흥미를 잃고 드라마를 끌 것이다. 그런데 그 영상이 들어감으로써 시청자는 문제의 황색포도상구균(Staphylococcus aureus) 감염(infection)이라는 말을 듣고 흥미진진하게 여긴다. 영상으로 인하여 황색포도상구균(Staphylococcus aureus) 감염(infection)이 무엇인지 진실로 이해한 것도 아닌데 말이다.


나는 여기서 비약하여 한 가지 영감을 받았다. 그것은 뜬금없게도 언어라는 것이 인간이 인지하는 여러 가지가 자연스럽게 반영되어 장전되었다가 자동으로 발사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이다. 너무 뜬금없는 이야기이긴 하다. 

드라마가 결국 언어적 구조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니 많은 것들이 설명되기 시작한다. 앞서 이 모든 이야기가 출발했던 의문점을 제시한 바 있다. 미국 드라마를 자막 없이 보다가 생긴 의문점에서 출발함이라는 포스팅에서 처음으로 제시했던 질문들이다. 이 포스팅에서는 거의 외우다시피 할 만큼 자주 봤던 미국 드라마를 자막 없이 봤는데 전부 외우고 있던 드라마의 스토리는 전혀 생각나지 않고 거의 들린다고 여겼던 영어는 전혀 들리지 않으면서 드라마는 완전히 낯설었던 경험을 말하면서 발생한 의문들을 다음과 같이 질문했었다. 


거의 외우다시피 해서 익숙했던 드라마 에피소드가 왜 이리 낯설게 느껴찌는가?


그리고 잘 들리던 영어가 왜 갑자기 안 들리게 되는 것인가?


마지막으로 영어가 안 들리는데 어째서 각각의 장면과 등장인물에 대한 공감은 더 강해지고, 반대로 익숙하던 스토리는 갑자기 조각나서 서로 연결되지 않는가?



이 모든 것의 대답은 처음부터 명백하고 단순했다. 바로 언어의 부재가 바로 그 답이다. 하지만 위의 질문들은 언어의 부재를 통하여 언어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알고 싶었던 것이기 때문에 이 대답은 좀 더 심화될 필요가 있다. 


자막과 함께 드라마를 봤을 때, 인식구조는 자막에서 영상과 소리로 넘어간다. 즉, 자막을 먼저 확인하고 그 확인된 자막의 내용을 영상이나 소리와 일치하는지 확인한다. 자막이 말소리와 동기화(sync)가 맞지 않을 때, 드라마를 보기가 얼마나 불편한지 느껴봤다면 이를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자막이 말소리와 동기화가 되면 그 때부터는 자막의 내용이 하나의 언어적 구조물로써 작동하면서 이야기가 성립되고 드라마의 말소리와 영상은 그 이야기에 실제감과 몰입감을 부여한다. 반면, 언어를 직접 들으면서 보는 드라마는 영상을 보는 와중에 소리를 듣기 때문에 영상과 소리가 동시에 존재한다. 이 경우 소리가 언어적 구조를 형성하고 이 언어적 구조는 영상과 동시에 인지된다. 자막이 있는지 없는지에 따른 차이는 결국 정보량의 차이로 이어진다. 자막과 함께 보는 경우는 자막을 먼저 확인하기 때문에 주요 영상의 누락이 축적되고 영상을 길고 세세하게 살펴볼 시간이 부족하다. 또, 말소리에서 직접 전달될 수 있는 억양과 발음에 따른 미묘한 감정 표현, 그 캐릭터의 출신지역이나 성장환경 등에 대한 직접적인 느낌 등이 모두 사라지고 그저 자막으로만 나타나게 된다. 이는 조금 과장되게 말하면, 자막으로 드라마를 보는 것은 시나리오에 영상과 배우의 목소리를 첨부하면서 글을 읽는 것과 같고 자막 없이 보는 것은 입체적인 공감을 통하여 충실하게 이야기에 몰입하는 것이 된다.


잘 들린다고 생각했던 영어들은 주로 짤막한 대사들인데 이들이 잘 들린다고 생각했던 이유는 자막 읽기에 숙련되었고 그 자막을 거의 통째로 외우다시피 했기 때문이다. 자막이 머릿속에 해당 언어의 뜻을 이미 전개시켜 놓았고 그 다음 대사를 듣게 되거나 혹은 대사를 듣는 동시에 자막을 확인하기 때문에 그것을 사후적으로 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는 대사의 길이로도 확인해볼 수 있었는데, 단어의 개수가 한 두 단어일 때는 자막과 배우의 대사를 일치시킬 수 있기 때문에 이를 영어가 들린다고 생각하지만 대사의 길이가 늘어나면 영어는 무시하고 자막만 보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자막을 보는 동안은 영상도 보지 못하게 된다. 여하튼, 자막을 통해 영어를 들을 수 있다는 인식의 오류가 생긴 것이기 때문에 자막이 사라진 순간 잘 들린다고 착각했던 영어 안 들리게 되는 것이다. 


자막이 없어져서 영어가 들리지는 않게 되었지만 오히려 직접 드라마의 영상을 눈으로 보고 대사를 듣게 된다. 자막이 있었을 때는 자막이 들어야할 것과 보아야할 것을 가이드 해주었지만 동시에 보고 듣는 것에 할애할 시간을 빼앗고 해석의 방향을 미리 제시하기 때문에 주마간산 하는 식으로 드라마를 보게끔 했다. 자막이 없기 때문에 오히려 날 것으로 영상과 소리를 직접 해석하게 되는 것이다. 당연히 풍부한 비언어적 표현들이 자연스럽게 인식되고 그로 인하여 공감이 이루어진다. 하지만 이러한 공감은 언어로 인식되지 못했기 때문에 종합적인 인지를 구성하지 못하고 단지, 각 장면에서 제공하는 다양한 정서적 요소나 캐릭터에 대한 미묘한 공감과 애정으로만 남게 된다. 대사와 같은 언어의 형태로 전달되고 공감되지 못한 그러한 인지들은 매우 제한적인 역할을 하기 때문에 이들은 기억하기도 쉽지 않고 기억을 환기하기도 쉽지 않으며 접한 정보를 가공하여 새로운 정보를 만들기도 쉽지 않다. 따라서 자막 없이 모르는 언어의 드라마를 시청한 느낌은 현저하게 느낀 장면과 정서 몇 가지로 축약되고 하나의 이야기로 성립하지 않는다. 


게다가 드라마가 현실과는 달리 언어적 구조물이기 때문에 언어적으로 인식되는 정황을 통하여 이야기의 영상과 소리가 시공간을 도약하면서 정신없이 변화하기 때문에 언어가 없을 경우 시청자를 고통스럽게 만든다. 언어가 영상과 소리의 널뛰기를 매개해서 드라마를 성립시켜 주는 것인데 그러한 언어를 알아듣지 못하고 자막도 사용하지 않으면 드라마가 하나의 연속체가 아니라 전혀 상관없는 것들의 일관성 없는 묶음 같은 것이 되기 때문에 하나의 이야기로 성립되는 것은 더 어려워진다. 이에 대해서는 고통의 원인에 대해서 포스팅한 것을 참조하기 바란다.


결국, 일련의 실어증 체험으로 자막 없이 미국드라마를 본 것에 대한 의문점은 모두 풀었다. 실어증을 체험하는 것에는 실패했고, 드라마를 자연관찰하듯이 보는 것도 실패했다. 하지만 이런 체험을 통해서 그 동안 이론적으로 듣기만 했던 다양한 것들을 실제 체험으로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었고 자막을 통해서 어떻게 드라마를 보고 있는지도 명확하게 알게 되었다. 다음에는 이 경험을 바탕으로 체감하게 된 '언어'에 대해서 이야기해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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