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몽과 같은 환상과 어울리는 방법 - 03 심리적 문제와 직면하기



 불안감과 공포는 점점 구체화되고 빈번해졌다. 처음에는 등줄기에 소름이 돋는 수준이었다면 이제는 귀신이 뒤에 달라붙어서 속삭이는 수준으로 발전했다. 문제의 원인을 파악하기 위해서 신체적 이상이 있는지 살폈고, 일시적인 기력 저하인지도 실험해보았다. 이것저것 시도해본 결과 이 두 가지 모두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제 남은 것은 심리적 원인뿐이다.


 물론, 누군가 실제 귀신이 있어 이런 문제가 발생하는 것 아니냐는 식으로 반론할 수 있다. 내 경험상 이런 경우 전부 귀신은 아니었다. 오랜 기간 귀신, 악몽, 환상 등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찾아오는 친구였고 이들은 더할 나위 없는 존재감을 내뿜으며 나를 공포와 불안의 나락으로 떨어트리고 트라우마로 군림했다. 처음엔 완전히 패배해서 삶이 파괴되었지만 15년 정도 아등바등 이를 극복하기 위하여 노력하면서 방법을 개발하고 조금씩 상황이 개선되었고 결국, 대부분의 경우 진짜 귀신이 아니었다. 나 자신은 딱히 귀신을 부정하지 않지만 경험상 진짜 귀신이라고 판단할만한 경우는 없었기에 그런 가능성은 생각하지 않았다.


 심리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할 일은 그 문제와 직면하는 것이다. 직면한다는 것은 그 심리적 문제를 지금 여기에서 마주치는 것이다. 보통 심리적 문제를 직면하라고 하면 사람들은 갑자기 고독한 사색가가 되어 그 사건을 기억해내어 분석하려고 한다. 기억을 들여다보고 차분히 분석하는 것은 어느 경우에나 통용되는 무척 좋은 방법이지만 결코 직면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기억은 결코 경험이 아니기 때문이다. 

 

 담배를 피우고 싶은 흡연자의 경우를 떠올려 보자. 그 사람에게 담배를 피우지 말고 그저 그 담배의 맛을 기억해서 떠올리는 것으로 만족하라고 하면 그는 매우 어이가 없을 것이다. 만일, 그가 기억으로 그 맛을 생생하게 떠올린다면 담배에 대한 욕구가 사라지기는커녕 담배에 대한 욕구가 더 강렬해질 것이다. 담배에 불을 붙이고 깊게 들이마시는 순간 즉시 모든 욕구가 가라앉고 평온해진다. 하지만 기억으로는 아무리 용을 써도 그런 효과를 낼 수 없다. 이는 기억이 실제 생활에서의 체험을 그대로 불러오는 게 아니라 그저 욕구가 존재했다는 기억과 그 욕구가 해소되었다는 기억 정도만 환기시켜주기 때문이다. 즉, 욕구를 해소시킨 실체는 기억으로 재현할 수 없다. 따라서 기억은 결코 경험이 될 수 없다.


 물론, 어떤 경우에는 기억을 통하여 트라우마의 방아쇠를 당길 수 있다. 끔찍했던 과거를 떠올리려고 할 때마다 기분이 더러워지고, 불안해질 수 있다. 심하면 발작이 일어나거나 완전히 방어적으로 행동하여 모든 것을 피하고 잠수를 탈 수 있다. 이 때, 기억은 심리적 문제를 불러오기 위한 통로로서의 역할을 한 것일 뿐, 심리적 경험 자체가 아니라는 점을 주의해야 한다. 이를 혼동하면 엉뚱한 방법을 시도하게 된다. 가령, 지금과 같이 불안과 공포가 귀신으로 구현되는 상황을 생각해보자. 이 경우에는 귀신을 기억하기만 해도 불안과 공포가 엄습하고 순식간에 귀신이 생생하게 구현되기 시작한다. 기억과 분석을 통해서 이런 경험을 하게 되면 귀신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미신적 믿음을 질책한다. 스스로 귀신이 없다고 생각하면서 귀신을 떠올리고 이를 생생하게 느끼는 것이 모순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스스로에게 귀신이 없다고 중얼거리면서 자신의 잘못된 감각기관을 질책하고 이 귀신이 환상일 뿐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인다. 이는 심리적으로 안정감을 주긴 하지만 근본적인 원인을 제거한 것이 아니므로 다시 재발하게 된다. 믿음에 따라 거부된 귀신은 낯선 타인, 범죄자 등으로 본인의 믿음에 부합하는 형태로 계속 모습을 바꾸어 나타난다.


 심리적 문제를 직면하려면 기억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귀신이 나타나 공포와 불안을 뇌 속에 주입하는 상황에 서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상황에서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이를 바라보는 것이 직면이다.


 심리적 문제와 직면하기 위하여 귀신의 공포가 극대화하는 상황을 만들어 본다. 어두운 밤 아무도 없는 집에서 불을 끄고 거의 헐벗은 몸으로 덥고 습한 바람을 맞는다. 무더운 습기가 피부를 덮으면서 피부에는 땀이 흐른다. 습기와 땀이 조금씩 맺히면서 불쾌함이 올라오고 온 몸이 질척질척 거리고 답답해진다. 간간이 불어오는 바람이 피부에 응결된 수분을 증발시키면 무더운 여름의 한 가운데 으스스한 한기가 더해진다. 몸은 더위에 힘들어하면서 땀을 흘리지만 으스스한 한기가 몸에 소름을 돋게 한다. 이렇게 더운데 몸이 으스스한 것은 귀신 때문이라는 근거없는 확신이 뇌리를 덮고 귀신의 존재를 불러온다. 어둠은 귀신의 존재를 더 또렷하게 강조하여 두려움을 키운다. 그리고 그 귀신은 다시 공포와 두려움을 일으켜 마음을 흔든다. 이 때, 마음에 휘둘리지 않고 일어나는 작용들을 차분히 바라본다. 

 

 우선 차분해야 한다. 일상에서 갑자기 공포와 두려움이 엄습하면 거기에 휘둘려 벌벌 떨게 된다. 눅눅하고 음습한 환경과 심리적 요인이 공포와 불안을 불러오고 그 공포와 불안은 귀신을 만들어 구체적으로 현현한다. 그리고 그 귀신이 다시 공포와 불안을 실체화하고 극대화하여 마음을 핀치로 몰아넣는다. 하지만 일어날 상황을 떠올려 보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안다면 이를 막을 수 있다. 공포와 두려움이 엄습해오면 휘둘리는 마음을 코끝으로 전환한다. 콧구멍에서 들락날락하는 숨을 구체적으로 느낀다. 코끝에 스치는 기류를 생생하게 느끼도록 집중하면 정신적 에너지는 공포와 두려움에서 코끝의 감각으로 방향을 틀게 된다. 그렇게 하면 공포와 불안을 형성하던 에너지가 코끝으로 이동하면서 귀신을 구체화하던 에너지가 약해진다. 귀신이 희미해지면 그로 인한 공포와 불안도 약해지게 된다. 여기에서 집중력을 더욱 강화하고 유지하면 귀신과 공포 그리고 불안을 완전히 잠재우고 온전히 명상에 들어서 마음을 쉬게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심리적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잠시 봉인하게 되므로 심리적 문제를 해결하는데 적합하지 않다. 따라서 마음의 주도권을 되찾아 차분해지는 정도에서 집중을 멈춘다. 


 마음의 주도권을 찾아왔으면 머릿속에서 활개치고 있는 귀신이나 막연한 불안과 공포를 약간 떨어져서 볼 수 있게 된다. 이 때, ‘본다’라고 하는 행위는 정확히 어떤 것일까? 이는 눈으로 본다는 의미가 아니라 조금 떨어져서 주의를 기울이는 행위다. 


 경험상 주의를 기울이면 심상이 보인다. 가령, 코를 스치는 숨을 ‘본다’라고 하면 실제로는 코를 스치는 숨을 눈으로 볼 수 없다. 하지만 코를 스치는 숨의 느낌에 가만히 주의를 기울이면 어느새 숨이 내 코 사이를 들락날락 거리는 모습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이는 머릿속으로 코를 들락날락 거리는 숨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 그림은 코에서 느껴지는 실제의 감각과 어우러져 실제로 눈으로 보는 것 같은 경험을 제공해준다. 이는 일상생활에서 많이 겪어볼 수 있는 현상이다. 무대 위에서 노래를 부르는 가수는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없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어떻게 보이는지 머릿속으로 그리고 그에 따라 퍼포먼스를 한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본다’라는 행위는 어떤 상황에 주의를 기울이면 그 상황에 대한 그림 또는 모델이 본능적으로 그려지고 이를 인식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추상적인 공포와 불안은 어떻게 볼 수 있을까? 차분히 주의를 기울이면 그려지는 그림이나 상황 모델을 본다. 공포와 불안을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다면 그것에 주의를 기울인다. 추상적인 공포와 불안을 직접적으로 느끼기 어렵다면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는 것에 주의를 집중한다. 즉, 으스스한 한기나 피부에 돋은 소름, 귀신의 환상 등 가장 강력하게 느껴지는 것에 주의를 기울인다. 무언가를 할 필요는 없다. 그저 공포나 불안 등에 휩쓸리지 않도록 고요하게 주의를 기울인다. 



악몽같은 환상과 어울리는 방법 - 02



 전쟁 같은 환상을 피해 거실에서 숙면을 취하고 난 뒤에는 아무런 일도 없었다. 여행은 순탄했고 지하에서 본 귀신과 묘실 체험도 하나의 무용담 마냥 여행의 이야깃거리가 되었을 뿐 어떠한 불길함도 없었다. 그리고 그렇게 잊혀졌다.


 여행이 끝나고 밀린 일을 바쁘게 처리하느라 정신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는데, 한 여름에 갑자기 등줄기에 소름이 올라왔다. 장마로 인한 습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넘어갔다. 그러다가 또 소름이 돋았는데, 이번엔 다이어트 삼아 하루 단식을 하던 중이라서 배고픔에 따른 우울감이 원인이라고 생각하고 넘어갔다. 장마로 인한 습기를 무척 싫어하는데, 거기에 다이어트로 인한 우울감이 겹쳐서 정신적 육체적으로 너무 취약한 상황이었다. 즉, 체력이 떨어져서 사소한 자극에도 과하게 반응하는 일시적인 현상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뒤에도 점점 상황이 심각해졌다. 


 한 번은 밤에 열린 틈으로 화장실 변기 위를 보다가 뜬금없이 거기에 귀신이 앉아있구나 하는 확신이 들면서 소름이 확 끼쳤다. 그 뒤로는 항상 뒤에 무언가 따라오고 있는 느낌을 받으면서 수시로 한기를 느끼게 되었다. 


 바쁜 일이 어느 정도 정리되고 쫓기던 심신도 조금 쉬었는데도 기가 허한 느낌, 귀신이 끊임없이 따라오는 느낌이 사라지지 않고 점점 빈번해졌다. 급기야는 불만 꺼도 그런 느낌에 사로잡히기 일쑤였다. 문제가 있다는 것을 깨닫고 이런 일이 생길 때마다 하던 과정을 밟기 시작했다.


 우선 신체적인 문제가 있는지 살펴봤다. 의사가 아니므로 병을 진찰할 순 없고 그저 신체에 고통, 불균형, 불편한 부분이 있는지 살펴봤다. 항상 있는 증세들만 있다. 어깨의 통증, 살찐 배의 더부룩함, 골반의 뒤틀림과 밤마다 찾아오는 불편한 감각 등은 항상 그대로 존재했던 그대로 여전했다. 이 증세들은 평생의 지병으로 어차피 병원에서도 해결하지 못한 문제들이므로 아무런 변화가 없다고 판단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이런 증세들이 충분히 괴롭지만 그렇다고 지금 상황을 더 악화시키는 요인이라고 생각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활력의 문제일 수 있다. 활력이 떨어지면 흔히 사람들이 말하는 기가 허해지는 느낌을 받게 된다. 그렇지 않아도 기가 허해지는 느낌을 계속 받아왔기에 조치를 취하기로 했다. 오랜 기간 스스로에게 실험하면서 깨달은 활력의 처방은 홍삼과 운동이다. 운동을 할 의욕과 에너지가 없는데 운동을 하면 운동을 시작하기도 어렵고 운동을 한다고 해도 활기가 도는 것이 아니라 몸이 아파오고 축나는 느낌이 든다. 이 때 잘 써먹는 것이 홍삼이다. 홍삼을 반티스푼 정도만 소량으로 먹어주면 반나절 정도는 각성이 되면서 활동적이 된다. 이렇게 활동적이 될 때, 운동을 하면 몸이 상쾌해지면서 활기를 끌어올릴 수 있게 된다. 


 홍삼을 반티스푼 정도만 먹는 것은 경험을 통하여 익힌 것이다. 홍삼은 내 체질과 잘 안 맞는다. 그래서 평상시에 정량(한 티스푼)을 먹으면 하루 종일 두통에 시달린다. 그리고 식욕이 지나치게 늘어나 과식을 반복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홍삼의 부작용에 시달리지 않는 방법은 너무 피곤하거나 힘든 상황일 때 홍삼을 먹거나, 먹고나서 바로 상당한 강도로 운동을 하는 것이다. 이 때 반티스푼 정도로 정량의 반만 먹으면 거의 부작용이 없고 상당한 활력을 얻을 수 있다. 


 기가 허한 것을 보충하고 활기를 끌어올렸지만 여전히 으스스한 감각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심리적인 것이다. 심리적인 문제를 다루는 것은 상당히 어렵다. 이런 문제는 스스로 해결하기 보다는 정신과 의사나 심리상담사의 도움을 구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하지만 이 심리적 문제가 아직은 일상생활에 영향을 줄 정도로 강력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게다가 이미 다년간의 불안과 고통 속에서 심리적 문제를 다루는 방법을 어찌어찌 스스로 알아내 익혔기 때문에 먼저 스스로 구제를 시도해보기로 한다.


 처음부터 심리적 문제를 해결하는 방향으로 접근하지 않은 이유는 오랜 기간의 경험 때문이다. 누군가 말하기를 모든 마음의 문제는 그 원인이 대부분 몸에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이는 경험상 옳다. 더 정확히 말하면 삶을 힘들게 할 정도의 마음의 문제는 대부분 신체나 외부적인 상황에 그 원인이 있었다. 이런 문제를 명상이나 상담 등으로 해결하거나 자신의 마음의 문제라고 생각해서 버티면 고통을 해결할 수 없다. 가령, 혈압이 오르면 지속적으로 감정이 과잉되고 분노에 시달리기 쉽다. 이를 상담이나 명상 등의 방식으로 해결하려고 하면 일시적으로 분노를 완화할 수 있지만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다. 근본 원인이 남아있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치미는 분노에 결국 먹혀버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혈압이 문제라는 것을 알면 간단하게 조절할 수 있다. 따라서 심리적인 문제로 보이는 것들도 우선적으로 몸에 병이 있는지 혹은 노화에 따른 증세가 아닌지 확인하고 병을 치유하거나 영양제 등으로 신체의 문제를 방어하는 것이 먼저다. 


 물론, 모든 것이 신체의 문제일 뿐 심리적인 문제는 부차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진정으로 마음 자체의 문제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인식하기 어렵다. 그게 자신의 본질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만일, 누군가 조급한 성격 때문에 인생이 망한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보자. 외부에서 보기에 그 사람의 문제는 조급한 성격이다. 하지만 조급한 성격을 가진 본인은 이런 이야기를 들어도 어쩔 방법이 없다. 그런 성격이 자신의 본질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마치 물고기에게 물속에서 사는 것이 모든 원인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릴 것이다. 물론, 사람은 이성적으로 사고하여 자신의 조급한 성격이 문제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이를 바꿀려고 시도할 때마다 그렇게 사느니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하면서 포기할 사람이 태반일 것이다. 자신이 자신이 아니게 되는 참기 어려운 느낌이 치밀어 오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진정 심리적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정말 어렵다. 


 다만, 지금의 경우 마음의 구조를 개선하는 수준의 대공사가 아니라 일시적으로 발생한 이상 현상을 바로잡는 수준이므로 마음을 돌아보는 방법을 통하여 이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봤다. 

악몽같은 환상과 어울리는 방법-01


 최근 가족 여행으로 대부도에 펜션을 빌려 1박을 했다. 날씨가 좋지 않아서 기대했던 활동들을 하지는 못했지만 다행히 펜션에 배치된 다양한 놀이 활동에 가족들은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그리고 밤이 되어 잠자리에 들 시간에 나는 지하에 위치한 방에서 홀로 자기로 했다.


 여행을 오기 전날 잠을 설쳤고, 여행 당일도 많은 활동으로 지쳐 비몽사몽한 상황이므로 어서 자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하지만 지하방에 눕자마자 뭔가 낯설었고, 불편했다. 눕자마자 으스스한 느낌이 밀려왔다. 등골이 오싹해지면서 잠이 확 달아났다. 그리고 앞에 귀신이 나타났다. 하얀 소복에 검은 머리의 귀신이 천장에서 내려다보면서 톱니같이 듬성듬성 난 날카로운 이빨을 혀로 핥고 있었다. 입의 가장자리를 따라서 핏줄기가 흐른다. 입으로 ‘여길 봐’라고 속삭이고 있는 것 같았다. 눈을 감고 있었는데도 너무 생생하게 펼쳐지는 상상에 소름이 끼쳤다. 이 상황에서 눈을 뜨면 그 귀신이 ‘드디어 나를 봤구나.’ 라고 말하면서 저주를 내릴 것 같았다. 숨막힐 듯한 공포가 엄습해왔다.


 귀신이 무엇을 기대했는지 알 수 없겠지만 나는 이런 환상과 악몽을 다루는데 이골이 나있다. 지난 10여 년간 이런 악몽과 환상을 진저리나게 많이 겪었기 때문이다. 거의 좌절과 절망으로 폐인이 되었다가 아득바득 다시 일상성을 회복하고 정상적인 생활로 돌아왔기 때문에 이런 식의 환상은 나락에 빠졌던 과거가 떠올라서 기분 나쁘기도 하지만 또, 그 익숙함에 반갑기도 한 것이었다.

 지하방에 나타난 귀신은 그 동안 겪은 환상과 악몽에 비추어 봐도 압도적으로 생생했다. 평소 겪던 것이 조악한 화질이었다면 이번에 겪은 것은 4K급 4D 영상 급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순간적으로 귀신의 공포에 압도당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나타나는 패턴이 항상 겪던 익숙한 것이었기 때문에 바로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화질이 아무리 좋아도 스토리는 뻔했기 때문이다.


 이런 환상은 악몽과 문법이 비슷해서 인과관계가 엉망진창으로 나타난다. 눈을 감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생생하게 눈앞에 보이고, 현실에서 일어나기 어려운 비현실적인 상황이 일어나는데 아무런 의문이 발생하지 않는다. 오직 생생한 공포만 느껴질 뿐이다. 공포는 착실하게 주입된다. 소복 입은 처녀 귀신같은 모양과 그로테스크한 톱니이빨이 전형적인 공포의 외형을 구성했고 거기에 공포의 아우라가 덧입혀져 귀신이 더없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눈을 감고 있음에도 보인다는 사실에 의문을 품자, 바로 눈을 뜨면 귀신이 공격할 것이라는 공포가 다시 주입된다. 마치 내가 눈을 뜰까봐 협박하는 것 같다. 익숙한 패턴이었다.


 악몽이었다면 잠을 깨고 마음을 추스르고 다시 상황을 정리하고 하는 등 귀찮은 과정을 겪으면 되지만 환상이었기 때문에 바로 조치를 취할 수 있었다. 머릿속에서 멋대로 전개되는 일련의 환상을 분산시키기 위하여 그저 코를 스치는 숨의 느낌에 집중한다. 숨의 느낌이 현실적으로 느껴지면서 점차 머릿속이 안정되기 시작한다. 환상이 잦아드는 것을 느끼면서 다시 잠을 청한다.


 사람이 너무 굶으면 머리가 멍해지고 점점 단순해진다. 사람의 정신도 결국, 에너지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에너지가 매우 한정적이기 때문에 우리는 가장 필요한 정신 활동에 에너지를 쓴다. 이 원리를 응용하면 환상을 금방 제거할 수 있게 된다. 즉, 지금처럼 환상에 시달리고 있는 상황에서 다른 행위로 에너지를 돌리는 것이다. 그 행위로 쏠리는 에너지가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환상을 구동하는데 필요한 에너지가 없어지므로 환상은 힘을 잃고 잦아들다가 결국 사라지게 된다. 물론, 환상을 일으키는 다른 기저 요인이 없을 때 이야기다.


 내 경우 잘 사용하는 방법은 코를 스쳐지나가는 숨의 감각에 집중하는 것이다. 불교식 명상을 훈련해왔기 때문에 이 감각으로 에너지를 모으는 데 익숙하고 이 감각이 매우 중립적이어서 번뇌를 털어버리고 다시 수면하는데 적합하기 때문이다. 중립적이라는 표현은 자극적이지 않다는 말이다. 즉, 공포와 불안을 이기기 위하여 술을 마시거나 매우 자극적인 컨텐츠를 보는 등의 중립적이지 않은 행위는 지금 당장은 공포와 불안을 잠재울 수 있지만 욕망이 자극되고 정신이 각성된다. 이는, 지금 당장 수면에 장애를 주고 장기적으로 욕망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공포와 불안을 더 자극하는 결과를 낳기 때문에 부정적인 악순환을 초래한다. 


 이렇게 코를 스쳐지나가는 숨의 감각에 집중하면서 환상이 잦아들기 시작했다. 4K급 화질의 4D로 보던 귀신의 화질이 흑백화면 마냥 조악해지다가 잊혀졌다. 마음이 평온해지면서 다시 잠을 청하면서 숨에 집중하던 마음을 풀었다. 그리고 그 순간 다시 공포와 불안이 튀어나왔다. 


 갑자기 지하에 잠들었다는 점이 머릿속에 퍼뜩 떠올랐다. 머릿속에 끊임없이 ‘지하’, ‘지하’, ‘지하’ 라는 메아리가 들어차기 시작하더니 순식간에 내가 지금 관 짝에 들어가 지하에 묻혔구나 하는 확신이 굳혀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몸이 딱 맞는 관에 누운 것 마냥 불편하게 조이기 시작하면서 환상이 사실인 것처럼 몸을 구속했다. 다시 찾아온 환상은 환상 그 자체와 더불어 신체 구속이 발생하는 업그레이드 된 버전이었다. 환상이 너무 빠르고 강렬하여 순식간에 신체와 정신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환상이 공포를 불러오고 신체적 불편함이 그 공포를 실체화시켰다. 그래서 참지 못하고 일어나 불을 켰다. 


 기본적으로 불을 키면 환상이 가라앉는 경향이 있지만 이 환상은 그렇지 않았다. 불을 켜니 숙박시설 특유의 몰개성적인 벽지와 삭막한 풍경이 보였다. 낯설고 지루한 공간이다. 생동감을 느낄 수 없는 풍경과 눅눅하고 음습한 느낌은 묘실을 떠오르게 했다. 수천년 동안 단 하나의 변화도 없는 삭막하고 정적인 공간이다. 그러고 보니 이미 수천년간 이 낯설고 지루한 공간에서만 살아왔다는 자각이 떠올랐다. 그리고 다시 수만년은 더 이 공간에서 박제된 채 있어야 한다는 자각과 함께 토할 것 같은 고독감이 밀려온다. 마음이 무너졌다. 통제가 사라지면서 다시 귀신이 부활했다. 더 생생해진 느낌이었다. 


 호흡을 통해서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있지만 매우 위태위태했다. 이미 무너진 정신의 한 자락을 겨우 붙잡고 있었을 뿐이었기 때문이다. 정신을 가다듬고 다시 집중하려고 했지만 쉽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바로 알 수 있었다. 


 너무 리얼한 환상이기는 하지만 일상에서 번뇌를 다루다 보면 이 환상이 상당히 보편적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어떤 일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기대, 욕망, 공포, 불안 등의 기저에는 인식하기 어려운 미세한 환상들이 실제로 작동한다. 이런 환상들을 들여다볼 수 있게 되면 그 순간부터 그 환상에 대한 통제력을 상당부분 되찾을 수 있다. 이게 불교 명상의 가장 기본적인 원리다. 하지만 일시적으로 튀어나오는 환상이나 번뇌를 인식하고 이를 제거할 때에는 보통 그 기저 원인은 이미 사라지고 그 작용만 남아 있는 경우가 많다. 가령, 내 경우 PC방에 놀러가야지 하는 욕망이 나타나면 대략 6시간 전쯤에 그 번뇌의 씨앗이 심어진다. 그리고 대략 6시간 후나 PC방에 갈 수 있는 상황이 형성되면 번뇌는 일어나 작동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 경우 이 욕망을 통제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PC방에 가고자 하는 마음에 쏠린 에너지를 분산시키고 몰입된 마음을 들여다보면 대부분 해결된다.


 하지만 번뇌의 원인이 끊임없이 작동하는 경우는 그렇지 않다. 가령, 배고픔을 생각해보자. 배가 고프면 몸은 끊임없이 먹을 것을 요구한다. 배고픔은 실제의 허기와 허기로 인한 탐욕, 욕망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에 대한 불만과 분노 등을 일으킨다. 정신을 집중한다면 허기로 인한 탐욕과 분노 등을 어느 정도 막을 수 있다. 하지만 허기는 그대로 남는다. 집중력이 무너지는 순간 다시 허기로부터 탐욕과 분노 등이 올라온다. 정신력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결국, 무너지게 된다. 물론, 고도의 수행을 통해서 확신을 갖추었다면 이를 극복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일반인이 그렇게까지 하기는 어렵다. 이 경우 가장 합리적인 선택은 적절하게 먹는 것이다. 그래서 다이어트가 어렵다.


 두 번째 환상을 보면서 이제 어떤 기저 원인이 실시간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마도 습기로 인한 축축함, 에어컨의 작동으로 인한 한기, 창문 하나 없는 밀폐된 공간, 지하라는 점이 맞물려 번뇌를 끊임없이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거기에 지친 체력과 수면에 들면서 마음이 무저항 상태로 놓이게 되는 것도 원인으로 보였다. 이를 하나하나 들여다보면서 극복할 수도 있지만 바로 포기했다. 기저 원인이 없다면 가능하겠지만 이미 계속 작동하는 원인이 있다면 총하나 들고 홀로 백만 대군을 상대로 싸우는 격이고 작은 제방 하나로 홍수를 막겠다고 설치는 격이기 때문이다. 수행이라고 생각하고 싸워볼 수도 있겠지만 이미 지치고 힘든 상황인데다가 다음 날은 또 운전을 해야 하기 때문에 잠을 자야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미 중요한 급소를 찔려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이 환상은 이미 내 약점을 찔렀다. 그것은 생사관이었다. 개인적으로 죽음 이후에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이런 점에서 불교도가 아니다). 그래서 죽는 과정은 싫지만 죽음 자체에 대한 두려움은 없다. 그저 죽음이 영원에 가까운 휴식이라면 찰나의 삶 동안은 충만하게 살고 미련 없이 가는 것이 가장 좋다고 생각할 뿐이다. 이것이 내 삶의 모델이다. 그런데 이 환상은 나를 사후세계에 영원의 시간 동안 유폐했다. 죽으면 끝이라는 생각이 삶의 큰 버팀목 중 하나였나 보다. 사후세계의 영원한 유폐라는 환상은 물밀 듯이 밀려오는 고독과 비애로 내 정신을 무너뜨렸다. 결국, 통제력을 잃고 환상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악몽과 환상에 숙련된 환자로서 재빨리 패배를 인정하고 방을 벗어났다. 방을 벗어나 1층 거실에서 눕자 모든 환상이 사라졌다. 마음속에 불안감과 공포는 남았지만 더 이상 기저원인이 작동하지 않아서 큰 문제는 되지 않았다. 오히려 몸과 마음이 너무 지친 나머지 꿈도 꾸지 않고 꿀잠을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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