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를 떠올리면 1+12가 된다는 것은 매우 의심스러운 사실이었다. 진흙으로 만든 공 2개를 겹치면 더 큰 진흙공 1개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1개의 사과를 5개로 쪼개면 5개의 사과조각이 되지만 숫자만 가지고 보면 1=5가 된다. 이런 다양한 사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1+1이 반드시 2가 된다고 가르칠 때마다 나는 그것을 인정할 수 없었다. 이런 불만을 어머니에게 말하면 어머니는 내가 유난을 떤다고 생각했고 항상 받아들이라고 종용하기 일쑤였다. 그래서 결국, 나는 학교에는 1+1이 반드시 2가 되는 이유를 알 수 없는 규칙이 있다고 생각했다. , 일종의 게임 규칙처럼 학교에서 물어볼 때, 1+1은 반드시 2라고 답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이때부터 세상에는 내가 모르는 암묵적인 규칙이 있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었다. 그건 마치 이것과 같았는데 현실에선 거리에서 돈을 주웠을 때 그 돈을 찾아주는 사람이 거의 없음에도 도덕 시험지에는 그 돈을 찾아준다고 기입하게끔 되어있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 학교에서 가르친 것은 현실적으로 납득할 수 있는 상식이나 진리와는 상관없이 학교의 규칙대로 말하고 따르는 법을 익히는 사람을 원한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러니 공부를 하고 학문을 한다는 것이 스스로의 생각을 구체화하고 발전시키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규칙을 받아들여서 이를 응용해서 잘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처럼만 느껴졌다.

 

그러다가 대학에 들어가서 수학사 관련 책을 읽다가 알게 된 것인데, 원래 지식의 구조가 그랬다. , 가장 완벽한 논리적 정합성을 갖춘 증명된 지식도 그 밑바닥에는 증명하기 어려운 어떤 주어진 사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처음부터 당연하다는 듯이 암묵적으로 사실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가령, 유클리드 기하학의 전제는 완벽한 평면이다. 그런 완벽한 평면에서는 평행하는 두 직선이 서로 마주치지도 않고, 삼각형의 세 각의 합은 반드시 180도를 이룬다. 하지만 지구 표면처럼 동그란 구면을 전제로 한다면 평행하는 두 직선은 끝에서 만나고 삼각형의 세 각의 합은 180도 보다 커진다

 

1+12가 되는 것도 이러한 암묵적인 전제가 있다. 그것은 어떤 기준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 1을 기준으로 볼 때, 2가 되는 것이다. 진흙공 2개를 겹치면 진흙공 1개가 되지만 당초 진흙공 1개를 기준으로 보면 2개 분량인 셈이다. 사과 1개를 기준으로 볼 때, 사과를 5개로 쪼개면 각 사과 조각은 원래의 1개의 사과를 기준으로 볼 때 1/5개의 사과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기준이라는 말을 매번 집어넣지 않으니 나처럼 머리가 나쁜 사람은 1+1=2를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물론, 기준이 바뀌면 계산식도 바뀐다. 만일, 우리가 기준을 개체의 개수로 바꾼다면 각각 1개씩 2개의 개체가 합해져서 다시 1개의 개체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1+1=1이 되고 5=1이 될 수도 있다. 그것은 우리가 지금 숫자로 세는 것이 어떤 기준을 따르는 지를 명확히 한다면 아이들하고 같이 다양한 방식의 숫자 세기를 해볼 수 있을 것이다. 

 

가끔 이런 날이 있다. 뜬금없이 오랫동안 묵혀서 이젠 그 존재조차 희미해진 문제가 뜬금없이 생각나고 갑작스럽게 문제가 해결되어 버리는 날이다. 이 뜬금없는 축복이 기꺼워 글을 쓴다. 물론, 이 글은 당시의 내가 납득할지도 모르는 설명이다. 버트란드 러셀이나 화이트헤드의 복잡하고 어려운 논리적 증명과는 관계가 없으니 행여나 오해가 없었으면 좋겠다.

 

마지막으로 재미있는 것은 1+12가 되는 것에 항상 의문을 가졌음에도 이 규칙을 기반으로 다음 단계인 곱하기로 넘어가 구구단을 외우게 되었을 때에는 이러한 의문을 풀고 싶은 욕구가 사라져 버린 것이다. 오히려, 그냥 1+12가 되는 세상이어야 한다고 생각해버렸다. 왜냐하면 구구단을 힘들게 공부하고 나니 그것이 근본적으로 불안한 기반 위에 있는 것이라는 생각 자체가 큰 부담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모든 것을 의심하던 소년이 이번에는 그 사실을 부정당할까봐 편집증적으로 그것을 방어하게 되었다.

 

살다보니 공부하는 과정이 매번 그런 식이었다. 납득하기도 어렵고 이해하기도 어려운 것을 툴툴거리면서 공부하다가 그것을 응용하여 이것저것 사용할 수 있는 수준이 되어버리니 그 납득하기 어려운 점이라는 부분을 애써 지워버리고 무마하는 과정의 반복이었던 것이다. 이제라도 먼 옛날의 의문점 하나를 풀어서 다행이다. 

처음 내가 해오던 공부 방식을 쓰게 된 것은 사주팔자 때문이었다.

 

머리는 좋지만 학업 성적이 좋지는 않다.

 

이 말이 맞나 안맞나 생각해보면서 스스로의 삶을 뒤돌아 본 것이다. 그리고 사주에서 말한 내용이 틀리지 않았지만 주위 환경과 스스로의 성격이 결합되어서 그것을 뒤틀었고 결국은 기적 같은 일이 벌어져 버렸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운이 엄청나게 좋았던 것 같다.

 

사주에서 말한 대로 머리는 나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리고 역마가 있어서 몸과 마음이 너무 분주하고 산만했던 것도 맞는 것 같다. 게다가 자기 본위로 살고 인내심도 없고 흥미도 빨리빨리 바뀌며 치밀하지 못하고 항상 즉흥적이라는 것도 맞는 것 같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학업 성적이 좋지 못했을 것이라고 인정하게 되는 점은 공부를 잘 하려고 공부하는 것이 항상 불가능했다는 것이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좋은 성적을 받고 부모님에게 인정받고 선생님에게 인정받고 친구들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구는 항상 있었다. 따라서 공부를 잘하고 싶은 욕구가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공부해보려고 책상 앞에 앉으면 몸과 마음은 이성을 완전히 무시한다. 정말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다이어트나 금연을 시도해본 사람은 알 것이다. 이성이라는 것이 신체에서 오는 신호와 무의식적 욕구에 얼마나 휘둘리는지 말이다. 그렇게 휘둘리다 보면 다이어트나 금연을 포기하게 된다. 시도할 때마다 좌절의 경험이 그 사람의 자존감을 깎기 때문이다. 공부도 마찬가지다. 공부를 시도해보지만 놀고 싶고, 공부하기 싫은 마음 때문에 공부가 되지 않는다. 그러다 보면 몸은 비비꼬이고 정신은 가출한다. 시간은 낭비되고 고통은 늘어나고 그러다 보면 공부하고 싶을 리가 없다.

 

그러니 사주에서 한 예측이 마냥 틀리지는 않은 것 같다. 내가 생각해도 위에서 언급한 특성을 가진 사람이 공부를 잘 하고 좋은 대학에 갈 수 있을 것이라고 전혀 믿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거기엔 반전의 요소가 있었다. 그것은 나의 어리석음과 탐욕이 무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아쉽게도 나는 어리석은 사람이다. 그래서 나의 위치를 객관적으로 보지 못한다. , 자기중심성이 강하고 자기만의 세계에서 사는 사람에 가깝다. 그러니 공부에서 말하는 등수나 성적을 스스로에 대한 지표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윗사람들이 가르치고 인도하는 대로 따라가지도 않았고 완전히 혼자서 놀았다. 당연히, 스스로를 차분히 발전시켜 나갈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러한 어리석음 덕분에 외부의 사건이나 평가에 흔들리지도 않았다. 오히려 넓은 시야가 없었기 때문에 선입견도 없었다. 스스로 어떤 운명일 것이라고 미리 예단하지 않을 수 있었고 스스로의 가능성에 대해서 의심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정말 맞는 이야기라고 생각되면 그것을 그냥 받아들일 수 있었다. 물론, 그러다 보니 무협지에 빠져서 꿈속에서 살다가 신비주의나 기공류도 연구하고 못하는 수학에 열을 올리면서 공부할수록 성적이 나빠지는 신기한 공부법도 시도하는 등 공부하는 학생으로서는 엄청나게 시간낭비를 했지만 스스로에겐 충실하게 모험을 시도하면서 살 수 있었다.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허황된 연구와 모험에 그렇게 오랫동안 매달려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때로는 허황되어 보이는 곳에서 고난과 시련을 통해야만 얻을 수 있는 것들이 있다. 내가 얻은 것들도 그런 것들이다.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추상적인 경험과 사람에 대한 이해를 얻을 수 있었다. 그것이 인생에 유리한 것인가 하면 꼭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하지만 스스로에게 만족할만한 것이긴 하다.

 

두 번째로는 탐욕이다. 탐욕스럽기 때문에 먹는 것도 좋아하고 단 것을 좋아한다. 오랫동안 씹으면서 느낄 수 있는 깊은 풍미 같은 것은 잘 모르겠다. 그냥 바로 달고 짠 것을 먹고 싶다. 탐욕이 슬픈 것은 결과를 즉각 얻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눈앞에 있는 것에 집착하여 큰 것을 놓치게 한다. 하지만 탐욕에는 한 가지 장점이 있다. 그것은 뛰어들게 한다는 것이다. 내가 탐욕하는 것, 내 이성이 아닌 몸과 무의식이 탐욕하는 것을 알게 되면 오히려 이것은 상당히 쓸만한 무기가 된다. 허황되어 보이고 어리석어 보이는 모험을 어찌어찌 마무리하여 자기 자신을 조금 이해하게 되었고 심상을 구축하면서 스스로를 유도하는 방법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이 탐욕은 정말 쓸만한 무기가 되었다. 어리석음과 탐욕의 조합으로 다음과 같은 심상을 구축했다.


신체의 모든 기관을 어렵게 쓰고다양한 방식으로 쓸수록 많이 발전할 것이다

 

이 심상에서 발전의 부분이 매우 명확해야 한다. 당시의 나에게 이 발전의 부분은 무협지적 상상력과 만화책 그리고 기공류 따위의 논증이 결합되어 현실적이고 명백한 사실처럼 느꼈다. 그래서 실제로 해당 기관을 쓸수록 발전하는 느낌을 정말로 받았다. 그렇게 진심으로 믿었기에 뇌를 10년 정도 학대에 가까운 수준으로 과용하면 천재가 되거나 초능력이 생길 가능성이 있다고 진지하게 믿었다(지금 생각하면 너무 웃긴다.). 그리고 공부를 열심히 해서 죽는 경우는 많지 않으니 그렇게 믿어도 별다르게 부작용이 있진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용례는 이렇다.

 

- 이렇게 어려운 문제를 풀면 나의 뇌가 더욱 발달하게 될 것이다.

- 창의적이고 복잡한 행위를 수행할수록 뇌의 가능성과 퍼포먼스가 올라간다.

 

초능에 가까운 능력을 얻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비현실적인 기대와 이런 기대를 실천해도 현실적으로 부작용 따위는 없을 것이라는 계산이 결합해서 만들어진 심상은 어리석음과 탐욕을 현실적인 기준으로 조형한 심상이다. 덕분에 무조건 이득을 보는 행위라는 생각으로 수학에 골몰할 수 있었다. 물론, 수학 공부는 할수록 성적이 떨어졌지만 말이다. 그리고 시험 전날 밤새고 괴로워하면서 공부하는 것을 상당히 즐겁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정신적 피로감을 일종의 성과로 판단하고 즐겼기 때문이다. 물론, 비현실적인 기대가 이루어지는 일은 없었다. 그리고 아마도 그대로 흘러갔으면 그냥 자기 발전에 매몰된 바보로 끝났을 것으로 거의 확신한다.

 

내가 구체적이고 눈앞의 욕망에 충실하기 때문에 초능에 가까운 능력에 대한 욕심을 이용하여 심상을 구축해도 현실적 욕망 앞에서는 그냥 무너지는 경우가 많다. 심상 덕분에 전혀 하지 않았을 공부를 하기는 했지만 대단히 잘한 것은 아니다. , 대단한 끈기와 뚝심이 있는 것도 아니고 유혹에도 무척 약하기 때문에 심상의 작동이 그렇게 수월한 것은 아니다. 단지, 시험전날이나 정말 어려운 문제를 앞에 두었을 때처럼 꼭 공부해야 할 순간에 공부를 할 수 있게 해주는 정도였다. 그런데 재수시절을 거치면서 내 속에 삶에서 실패할지 모른다는 구체적이고 명확한 공포가 자리 잡으면서 공부를 해야겠다는 지향성이 구체적으로 형상화되기 시작했다. 거기에 어머니가 어느 날 당시 느끼기에는 상당한 액수의 상금을 걸면서 나의 탐욕에 드라이브를 걸었다. 이 공포와 욕망이 일으킨 추동력 앞에서 현실적인 모든 소소한 욕망은 힘을 잃었고 덕분에 나는 재수시절 기적 같은 경험을 통하여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사주의 추론은 매우 정확했다. 하지만 그 결과는 그저 추론에 불과했다. 많은 경우 맞았을 법한 그 예측은 현실의 무한한 변화를 완전히 추정해내진 못했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나는 운이 좋아서 좋은 대학을 갔다. 이 말을 하고 싶었던 것 같다. 사주가 추정해낸 나의 특성도 내가 얻고 싶어서 얻은 것이 아니다. 그냥 그렇게 태어난 것이다. 나의 탐욕과 어리석음도 극복된 것이 아니다. 내가 잘나서 좋은 대학을 간 것이 아니다. 우연과 우연이 마주쳤고 그 때 만났던 사람들과 책들과 각종 사건이 내 인생의 방향을 뒤틀었다. 나는 원하는 방향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이기 때문에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인생을 뒤튼 것이 아니다. 그냥 뒤틀어진 것이다. 그리고 운이 좋아서 얻은 결과를 스스로 잘났기 때문에 또는 열심히 노력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그렇다고 우리가 운명대로 흘러간다고 말하고 싶지도 않다. 단지, 우리에게는 많은 조건들이 있는 것 같다. 나에게 주어진 조건은 딴짓의 운명, 즉물적인 탐욕, 나쁘지 않은 머리, 비현실적이고 허황된 것에 대한 욕구, 어리석음, 인간적인 찌질함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거기에서 발바둥치고 있는 내가 있었다. 그리고 발바둥치면서 내린 결론은 차라리 뛰어드는 것이 낫다는 것이다. 탐욕스러운 나를 부정하고 탐욕을 부정하는데 시간을 쏟느니 탐욕을 이용해서 그 결과는 좋은 것으로 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낫다.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스스로의 모습이 찌질하다고 느끼면서 그것을 바꿔보려고 노력하는 것도 좋지만 그 찌질함을 책을 읽는 기회로 바꾸는 것이 낫다. 허황된 것을 부정할 수 있다면 좋지만 항상 머리 한켠에 그런 생각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뛰어들어서 졸업하고 나오는 것이 낫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졸업이 된다. 어리석은 짓을 자꾸 반복하다 보면 지혜가 무엇인지 보이기도 한다. 탐욕을 이용하다 보면 갑자기 탐욕이 그냥 욕구가 되고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변하기도 한다. 찌질함을 기회로 이용하다 보면 그 찌질함이 사실은 개성이 되기도 한다. 단 한순간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산만함은 창의성과 추동력으로 변하기도 한다. 그러니 객관적인 기준에 따라 살아보려고 용을 써보다가 안되면 자기 자신의 조건을 이해하고 그것을 적극 이용하는 과정으로 나아가보길 조심스럽게 추천한다.



기말시험이 내일로 다가왔다. 당연히 평소에 공부는 전혀 하지 않았다. 오늘 밤을 꼴딱 새면 어찌어찌 성적은 나올 것 같다. 이제부터 공부해야겠다.

 

이렇게 생각을 하고 공부를 시작하려고 하면 갑자기 시험과목이 아닌 다른 과목을 공부하거나 엉뚱한 책을 읽고 싶거나 어떤 끝내주는 영감이 생기면서 시험공부를 하기 어려웠던 경험을 해본 적 있는가?

 

난 있다. 아니 항상 그래왔다. 시험 전날이 되어 더 이상 게으름 피우지 말고 밤을 새워서라도 공부를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하려고 하면, 갑자기 딴짓을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이다. 만화책이나 무협지를 보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이야 쉬고 싶고 놀고 싶은 마음이 있으니 그러려니 하지만 갑자기 너무나 뜬금없이 물구나무서기를 숙련되게 하고 싶은 마음이 들거나, 평생 쓰지 않던 소설에 대한 착상이 떠오르면서 소설을 쓰고 싶거나, 평소 어려워서 보지도 않던 전문서적에 대한 탐구심이 넘치게 되는 현상은 분명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너무나 이상한 일이다.

 

이런 성향이 나만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드물게 나타나는 성향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존 페리의 미루기의 기술을 읽어보니 이러한 현상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상당수 있는 것 같아 위로가 되었다. 존 페리는 미루기의 기술에서 이런 식으로 일을 미루는 습관을 가지고 있는 자신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이러한 미루기를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방법을 설명한다. 그것은 미루기를 극복하려고 노력하는 시도 보다는 미루기를 인정하고 받아들여서 이를 오히려 합리적으로 이용하라는 것이다. 이를 존 페리는 합리적 미루기 주의자라고 불렀다. 그리고 합리적 미루기 주의자로서도 많은 일을 해낼 수 있다고 말한다. 물론, 미루기 습관이 없는 사람은 더 많은 일을 효율적으로 할 수 있겠지만 말이다. 위트가 넘치는 문장과 일상에서의 스스로의 단점을 수용하고 이를 인생의 즐거움과 생산성으로 전환하는 지혜가 빛나는 책이니 여러분들도 꼭 한번 읽어보기를 권한다. 특히, 미루기의 습관이 있으신 분들은 정말로 꼭 읽어보기를 권한다.

 

존 페리는 할 일을 미루고 다른 일을 하는 것을 미루기라고 했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이것을 딴짓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 딴짓은 나처럼 인생을 피해가려는 성향을 가진 사람에게는 필수적으로 동반되는 것이다.

 

나는 수업시간에 선생님의 강의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평생 딴짓을 해왔다. 기본적으로 졸고, 무협지와 만화책을 보고 하는 것은 청소년기의 욕구에 따라서 그럴 수 있지만 공부를 해도 딴 공부를 했다. 내가 학교를 다닐 때에는 국어, 영어, 수학이 가장 주요한 과목이었고 다른 암기 과목은 시험을 보게 되어서야 암기하는 것이니 이런 시간에 딴짓을 하거나 국영수를 공부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런 짓을 국어 시간에는 영어를, 영어 시간에는 수학을 공부하는 식으로 했다. 선생님의 강의가 재미없고 내 진도를 나가야 하기 때문에 그렇게 했다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나는 그렇게만 공부가 가능했다. , 딴짓만이 내가 평소에 공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흔히, 우리는 사람들이 합리적인 목적과 목표를 세우고 그에 따라 합리적인 행동을 할 것이라고 기대한다. 그래서 교육하는 방식도 대부분 그러하다. 우선, 아이들에게 공부를 잘하면 어떤 이득이 있는지 이야기해준다. 그렇게 아이들에게 목적을 갖고 목표를 세우게 한다. 그 다음에는 이러한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할 일을 제시해주고 이를 하도록 강하게 종용한다.

 

아쉽지만 보통 목적과 목표를 세우는 일부터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아이들 입장에서는 목적과 목표가 너무 추상적이다. 커서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 존경 받는 것, 모두 추상적이다. 40대가 되어버린 나도 그런 추상적인 목표는 세우지 않는다. 그런 목적을 세우고 목표를 만들어도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한 과정에 들어가게 되면 추상적으로 세웠던 목적과 목표는 그저 추상적인 것에 머물고 현실적이고 실제적인 목적이 생기게 된다. 그것은 바로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하고 있는 이 모든 빌어먹을 고통스러운 일들을 빨리 끝내고 쉬고 싶다는 목적이다. 그리고 더 이상 이런 고통을 자초하지 않을 인생을 살고 싶은 욕구로 가득차게 된다. 정말 모든 요건이 우연히 잘 맞아서 공부가 되고 공부를 통하여 스스로 이득을 얻고 그 이득에 만족하는 선순환을 구축하는 학생들을 제외한다면 대부분의 학생들은 이 추상적인 목표를 향해서 달리는 것의 고통에 질려서 쉬고 싶게 된다. 그리고 여기서 학생들은 다시 두 가지 부류로 나뉜다. 첫 번째 부류는 쉬고 다시 그 목적을 생각하면서 목표를 향해 달려나가는 친구들이다. 합리적으로 예상할 수 있는 정상적인 친구들이고 시간을 들여서 열심히 하다 보면 결국, 공부를 어느 정도 잘하게 된다. 하지만 두 번째 부류는 그렇지 않다. 고통에 질린 나머지 자신의 목적을 돌아보게 된다. 그리고 그 목적의 공허함과 현실적인 고통 사이의 괴리를 발견한다.

 

고통스러운 현실과 추상적인 목적과 그 목표에 대한 괴리를 메우는 방식도 다시 두 가지로 나뉜다. 첫 번째는 목적을 부정하고 새로운 목적을 찾는 것이다. 이들은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를 외치면서 지금의 현실에 충실하려고 하고 현재의 자신에게 충만함을 가져다 주는 행위를 추구하여 매순간 충만함을 기반으로 삶을 대안을 모색하게 된다. 그렇다고 이런 친구들이 현재의 고통을 모두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공허하지 않은 목적과 목표를 찾아 다시 열정이 일어나면 다시 일어나서 움직이게 된다. 하지만 목적을 찾지 못하면 현재의 쾌락에 머물러있게 된다. 두 번째는 목적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러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현재의 고통이 너무 커 보이고 따라서 불공정한 거래인 것 같은 마음에 실제로 하지 않는다. 최악의 경우다. 새로운 것을 모색하지도 않고, 기존의 체계에 들어가지도 않는다. 그냥 경계선에서 아무렇게나 쓰러져 있는 것이다.

 

내가 바로 이 최악의 경우였다. 공부를 잘 해야 성공할 수 있고, 돈도 벌고, 대우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고, 그런 것을 원하므로 목적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미래에 대우받지 못하고 돈도 없는 삶이라는 것을 구체적으로 느끼지 못하니 현재에 고통을 감수할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다. 머리로는 열심히 공부해야 하고 열정을 불태워야 하고 하는 것을 알지만 내 몸은 절대로 그렇게 움직이지 않는다. 자극적인 것에 눈이 돌아가고 몸은 계속 움직이려고 한다. 그리고 놀고 나면 죄책감과 무력감이 엄습한다. 이러다 보면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지고 자존감이 낮아진다. 하지만 아무리 한심하게 느껴져도 몸과 나의 무의식은 그저 노느라 바쁘다.

 

절대로 고통을 감수하지 않고 제멋대로인 몸과 무의식은 통제가 되지 않는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할까? 자유롭게 노는 시간이거나 통제가 거의 없는 상황에서는 놀아야 하니 전혀 공부할 수 없다. 여기까지는 대부분 비슷하다. 그래서 통제된 상황이 만들어져야 공부를 하는데, 아쉽게도 통제된 상황에 놓이면 그 상황에 순응해서 공부를 하는 사람들과 달리 나는 그 통제된 상황에서 비로소 한 가지 잘 정제된 욕망이 나타난다. 그것은 이 통제된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욕망이다. 하지만 육체는 이미 통제되어 있으니 정신적으로나마 그 상황을 벗어나려고 몸부림치게 된다. 그래서 현실을 보지 않고 다른 것에 집중하려고 한다. 거기에 현재 수업과 다른 교과서가 있으면 그 교과서를 열심히 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수학시간에 영어를 보고, 국어 시간에 수학을 공부하고 있는 것이다.

 

당연히 수업시간에 수업을 열심히 듣는 것이 가장 효율적인 공부법이다. 앞에서 선생님이 온갖 시청각 교재를 제공하고 있고, 판서하고 설명하고 있으니 이를 열심히 듣고, 보고 공부하는 것이 오감에 입체적인 효과를 부여하여 가장 효과적인 공부법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그러한 공부가 전혀 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내가 그랬다. 나는 이중삼중으로 설계를 해야만 했다. 그리고 공부를 함에 있어서 절대 공부가 목적이면 공부를 할 수 없었다. 이 공부가 딴짓이 될 때에만 현재의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구가 있을 때에만 그 탈출구로 다른 교과서가 있을 때에만 그것을 읽고 공부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내 공부는 단 한번도 현실에 존재하지 않았다. 오직 현실을 벗어나기 위한 목적으로만 공부가 된다는 것은 공부법도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패턴의 발견 덕분에 어떻게든 공부가 가능해지긴 했다. 멘탈이 약하기 때문에 공부가 중요하고 이것을 잘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그 때부터는 그 상황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몸부림만 남게 된다. 그래서 일단, 다른 상황을 설정해야 한다. 지금 바로 현재에 만족할 수 있는 상황을 설정해야 한다. 평소에는 수업시간에 다른 공부를 하거나 하는 방식으로 공부를 하게 된다. 하지만 시험 때에는 시험에 대한 강력한 압박 덕분에 오히려 공부하기 더 편하다. 공부를 한다는 것 보다는 내일 시험에서 좋은 점수를 받아야 한다는 구체적인 목표가 서고 시험공부를 하게 되면 오히려 시험의 부담이 조금씩 줄어드는 느낌이 좋아서 빨리 해방을 맞이하기 위하여 공부하는 편이었다.

 

당연히, 수업시간만 공부해서는 부족하다. 자율학습을 할 때 공부를 해야하는데 이것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신비주의류나 기공류의 연구 덕분에 스스로를 관찰하고 심상이라는 것을 구축하게 되면서 스스로 믿는 심상을 스스로에게 부과하면서 공부가 가능해졌다. 주로, 수학 공부와 연구였지만 결국, 성공을 위한 공부라는 것을 뒤로 제치고 지금 당장 자신의 발전을 위한 연습이라는 것으로 구체화시키는데 어느 정도 성공할 수 있었다.

 

나와 비슷한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멘탈이 약한 사람들 혹은 무의식적 욕망이 너무 강한 사람들은 자신을 관찰해서 어떤 상황을 만들어야 스스로 할 수 있는지 생각해보아야 한다. 하지만 좌절하지 말고 자신을 잘 관찰해보길 바란다. 구하면 얻어질 것이다.



좋아하는 수학은 공부할수록 성적이 떨어지는 이상한 공부법을 실천했고 일상적으로는 열심히 무협지를 읽고 기공류와 신비주의의 세계를 연구했으니 고등학교에 올라와서 성적이 좋을 리가 없다. 하지만 그 와중에 공부를 거의 하지 않아도 발군의 성적이 나오는 영역이 있었으니 국사, 세계사, 한국지리 같은 과목과 수리에서 사회탐구 영역이 그것이었다.

 

세계사를 잘하는 이유는 사실 명확하다. 초등학교 시절 가장 열심히 읽었던 책이 먼나라 이웃나라였기 때문이다. 정말 즐겁게 읽었고 몇 번을 봤는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읽었다. 거의 처음으로 제대로 접한 만화책이어서인지 너무 좋아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덕분에 세계의 역사 흐름이 머릿속에 항상 있었고 전체 윤곽이 매우 잘 잡혀서 교과서를 펼쳤을 때 대부분 익숙하게 아는 내용이었다.

 

그 다음은 국사였는데 국사는 세계사와 달리 잘 몰랐고 그래서인지 세계사보다 국사가 훨씬 어렵게 느껴졌다. 그런데 어느 날인가 국사를 공부하면서 조선사를 기술하는 어떤 일정한 기술방식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 교과서는 조선의 정치적인 세력을 위주로 기술하고 있고 그 외에 그 시대에 특이한 점이나 기억해야할 점 몇 가지를 얹어서 드러내는 식이었다. 시대상, 임금, 정치세력의 3가지가 주요한 카테고리였고 시대상을 근거로 임금과 정치세력의 변화를 논하는 방식이 주된 방식이었다. 이런 큰 틀이 자리 잡히면서 국사 교과서가 어떤 식으로 정리되어야 하는지 머리에 그 틀이 잡혔고 덕분에 공부도 무척 수월해졌다.

 

그 외에 한국지리와 사회탐구 쪽을 무척 잘했는데, 특히 사회탐구는 공부를 한 적이 없어도 항상 거의 만점에 가까운 점수를 받았다. 개인적으로 문제가 무척 쉽게 나온다고 생각했는데, 친구들과 대화해보니 내가 잘하는 것이었다. 내가 왜 지리와 사회탐구 영역에 뛰어난가를 고민해보니 그 원인은 중3에 만났던 선생님의 덕인 것 같다.

 

중학 시절에 사회라는 과목은 뜬구름 잡는 이야기였고, 그냥 밑줄 치고 암기하는 과목이다. 매 사회 시간은 그저 선생님이 시험에 나올 것이라고 하는 부분을 메모하고 밑줄 치는 것이 수업의 대부분이었다. 그 선생님은 중2에서도 사회를 가르쳤고 중3에서도 사회를 가르치셨는데 중2 때는 그러지 않았는데 중3 때는 어느 날인가부터 사회시간에 백지도를 준비해오라고 했다. 백지도는 아주 기본적인 구분만 되어 있는 표기가 거의 없는 지도(map)을 말하는데 백지도로만 만들어진 얇은 책을 문방구에서 팔았다. 그리고 수업시간에 해당 수업의 진도에 해당하는 내용을 전부 지도에 표기하도록 시켰다. 당시 백지도를 준비해오지 않는 학생들에게는 꽤 강하게 혼을 내셔서 모두들 굉장히 귀찮아하면서도 필사적으로 그 백지도를 준비했던 것 같다. 그 지도를 보면서 축척을 확인하고 방향을 확인하고 팔도와 나라 등의 모든 것을 크레파스로 칠하고 표기하고 예쁘게 꾸미게 하셨다. 그리고 제대로 했는지 안했는지 일일이 검사까지 전부 하셨고 숙제도 엄청 많이 내주었다.

 

당시에는 다른 사회 선생님들은 전혀 이런 것을 시키지 않는데 이 선생님만 시킨다고 원성이 자자했고 솔직히 많이 귀찮고 부답되었다. 당연히 선생님이 좋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백지도에 이것저것 예쁘게 그림을 그리는 것이 남자애의 입장으로서는 뭔가 안 어울리고 간지러운 것 같아서 대충 해버리기 일쑤였다. 그럴 때마다 선생님은 거의 세어 버린 목소리로 크게 화를 냈다. 그 목소리가 너무 히스테릭하게 느껴져서 마치 사람들이 칠판에 손톱을 긁을 때 나는 소리처럼 소름이 끼치면서 거부감을 줬다. 당시 느끼기에는 이상한 짓을 하는 말 그대로 미친 여자였다.

 

그런데 중3 시절에는 전혀 느끼지 못했지만 수능 모의고사를 보면서 내 감각이 다른 친구들과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지리와 연관된 사회탐구의 지문이 나에게는 자연스럽게 상황을 인지하고 답을 제시해주는 것처럼 느껴졌다. 지독하게 간단한 추리만 하면 자연스럽게 답을 알게 된다고 생각했는데 많은 친구들이 사회탐구의 지리와 관련된 지문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고 어떤 내용을 알고 있어도 잘 응용이 안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가령, “낙농업은 대도시를 주요 수요처로 삼고 있기 때문에 그 근교에서 발달한다.”라는 말을 외우고 있지만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가령, 근교가 어디까지인지 모르고 낙농업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왜 대도시가 수요처인지도 모르는 것이다. 사실, 이런 내용은 글로 보면 당연히 모른다. 글을 보고 사회과 부도나 지리부도를 봐서 익혀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지도로 나타내면 지극히 간단한 내용을 말로 부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글로 연애를 배우고 글로 미묘한 예술을 배우는 것 같이 교과서만 봐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하지만 중3 시절 만난 선생님 때문에 매주 두 개의 백지도를 전부 그려야 하는 과제를 만났기에 해당 지도가 전부 친숙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 뒤로 백지도를 그리거나 하지 않았지만 지리에 관한 내용은 교과서에서 글로만 봐도 무슨 의미인지 바로 파악이 되었고 사회탐구에서도 지문만 보면 지도 위에서 대충 답이 도출되었다. 다시, 생각해보면 그 백지도를 예쁘게 그리는 숙제가 머릿속에 기본적인 지도라는 틀을 만들어 주었고 덕분에 지리 관련 공부를 할 수 있는 기초가 만들어진 것이다. 그리고 기초가 있었기 때문에 수업에서 듣거나 교과서를 보는 것만으로도 자연스럽게 실력이 발전한 것이다. 그런 기초가 없었다면 흥미를 잃고 공부를 하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무의미한 암기로만 그쳤을 공부가 기초가 생김으로써 너무나 쉽고 수월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기초는 내 일생에 걸쳐서 더 쉽게 역사적 사건을 이해하고 그 상호작용을 알게 해주었을 것이며 지리와 관련된 많은 일들에서 무형의 이익을 주었을 것이다. 아마도 세계사와 국사 공부가 수월했던 것의 밑바탕에는 그 지도에 대한 기초적인 이해가 자리하고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그 선생님이 만들어주신 기초가 준 이익은 무궁무진했다.

 

젊은 여선생님이 백지도를 그리게 하는 과제를 내주고 그것을 일일이 검사하고 아이들을 단속했던 것은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나 힘든 일이었다. 아이들의 노골적인 짜증이나 불만스러운 눈빛을 수없이 마주쳤을 것이다. 그럼에도 아이들에게 백지도 숙제를 하지 않는 아이들을 다그치다가 목이 쉬어서 히스테릭한 목소리가 나왔을 것이다. 다른 사회 선생님들이 하지 않는 과제를 왜 내주냐면서 하지 말라는 압박도 받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선생님은 꿋꿋하게 이것을 해야 한다고 강단 있게 아이들을 몰아붙였고 이 백지도 숙제를 왜 해야 하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던 나같은 학생도 기초를 형성할 수 있게 하셨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 때 처음으로 스승을 만났던 것 같다.

 

선생님이 포기하지 않아주셔서 너무나 감사하다.

 

요즘에는 백지도를 국토교통부에서 바로 다운로드할 수 있다. 아래의 링크를 타고 들어가면 국토교통부의 백지도 다운로드가 가능하니 많이 이용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http://dokdo.ngii.go.kr/child/contents/contentsView.do?rbsIdx=33



나는 이공계인데 수학 성적이 가장 나쁘다. 솔직히 수학으로만은 전교1등을 해도 괜찮을 정도로 공부했지만 실제 성적은 평균보다는 조금 높은 수준에 불과하다. 사실, 이것은 수학에 대한 완벽하게 잘못된 접근이고 동시에 나 개인에게는 유일하게 가능한 접근법 때문에 발생한 일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나의 수학에 대한 접근법을 이야기해보고 싶다.

 

당시에는 본고사라고 해서 각 대학별로 수능 외의 시험을 각 대학별로 주관식 서술형으로 보던 때라서 문제의 난이도가 엄청나게 높았다. 게다가 해당 문제를 풀어낸 과정에 대하여 일일이 서술하고 그 과정이 합리적이어야만 답안을 정확하게 작성한 것으로 인정받았기 때문에 수학문제를 풀면서 논리를 어떻게 전개할 것인지도 고민해야만 하던 시절이었다. 학력고사가 없어지고 수능과 본고사로 시험방식이 대체됨에 따라서 국어와 영어, 그리고 수학의 중요성은 훨씬 더 높아지게 되었다.

 

수능이 나온 배경의 한 축에는 주입식 위주의 교육에서 단순히 암기하여 맞추는 학력고사가 아니라 창의적 교육을 하고 암기보다는 합리적인 추론과 창의적 생각을 유도할 수 있는 방식의 시험이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있었다. 그렇게 나온 것이 수능이었다. 당시 언론에서는 그러한 수능의 장점에 대해서 엄청나게 홍보하면서 주입식 교육과 암기 위주의 시험을 엄청나게 비판했기에 나도 당연히 그러한 대세에 따라서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에게는 수능이 학력고사보다 훨씬 유리했고 암기하는 것이 너무 싫었기 때문에 더더욱 그러한 언론의 홍보에 따라서 주입식 교육을 증오하고 암기를 격렬하게 배척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냥 대세에 따라서 생각하는 수준에서 멈췄으면 이익만 보고 끝낼 수 있었는데 거기서 누구도 가지 않는 한발을 더 나아가버리면서 문제가 생겨버렸다.

 

국사나 세계사의 역사 과목이나 생물, 지리 같은 과목들은 필연적으로 암기를 할 수 밖에 없다. 일단, 암기하는 것이 공부의 전부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물론, 오늘날에는 이야기를 만들고 생생하게 함으로써 이런 단순 암기에서 탈피하려고 하는 노력을 하지만 공부는 결국 암기의 형태로 마무리 된다. 그건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수학은 나에게 결코 암기의 대상이어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두 가지 요인 때문인데, 하나는 중학교 1학년 때 시계문제를 풀면서 직접 시계를 관찰하고 증명하고 풀어낸 것으로 인하여 수학에 대한 자신감과 함께 수학이라는 과목에 대한 심상도 같이 구축되었기 때문이다. , 나에게 수학은 지혜의 학문이었다. 사물을 관찰하거나 어떤 사실을 논리적으로 연역해서 이를 기반으로 증명하는 것이 내가 수학에 가진 심상이었다. 이때, 중요한 것은 논리적 추론과 사물에 대한 관찰이지 암기해서 문제를 푸는 것은 아니었다. 결국, 나에게 수학은 단순하고 기계적 반복과 정반대의 위치에 있어야 했다. 나의 이런 심상은 평소라면 그냥 그렇구나 하고 넘어갔을 일인데, 이미 다년간의 신비주의 연구 경험을 통해서 관련 자료를 찾고 이를 실행에 옮기는 것이 몸에 붙으면서 수학에서 암기라는 행위를 축출하는 과정을 실제로 수행하게 되었다.

 

방법은 간단했다. 수학 문제를 풀어보고 해당 문제를 풀었던 경험을 다 잊는 것이다. 그리고 그 문제를 원점에서 다시 푸는 것이다. 이런 유형의 문제는 이렇게 저렇게 푼다는 식의 유형을 외우지 말고 해당 문제를 최대한 다각도로 살펴보고 진지하게 고찰한 후 해당 개념의 정의부터 시작해서 구축해 나가는 식으로 공부하는 것이다. 나는 이 과정을 지혜의 단련이라고 생각했다. 이미 활용하기 시작한 심상을 이용해서 개념의 정의부터 근본적으로 생각하면서 어떤 문제를 모든 방향에서 차근차근 생각하는 훈련을 통해서 실제로 정신과 뇌를 훈련하고 개발한다고 생각했다. 더 어려운 문제를 풀면 풀수록 집중력과 뇌가 개발된다는 식의 심상을 구축했기 때문에 수학문제를 정말 탐욕스럽게 풀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그 심상에는 해당 문제를 전혀 외울 필요가 없다는 인식도 같이 프로그램 되었다.

 

눈치 빠른 분이라면 알겠지만, 이 실험은 정말 처참한 결과를 안겨주었다. 고등학교 3학년 내내 열정적으로 수학만 공부했고, 하나의 문제를 3일 밤낮을 붙잡고 고민해서 풀기도 했지만 대학입시에서 가장 성적이 안 좋은 과목은 수학이었다. 수능과 본고사 모두 최악의 결과를 받았다. 슬프지만 가장 좋은 성적을 받은 것은 국어였다. 아마도 거기에 재능이 있었나 보다.

 

사실, 실패는 이미 예견되어 있었다. 신비주의 연구에서와 마찬가지로 수학문제를 푸는 것과 관련된 책을 찾아서 읽어보기 시작했는데, 당시 스스로 골몰하던 문제에 대한 가장 밀접한 논의를 진행하고 있었던 책은 G. 폴리아의 어떻게 문제를 풀 것인가?라는 책이었다. 이 책의 주요 논지는 수학 문제를 풀 수 있는 만능키와 같은 방법론은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수학문제를 잘 풀기 위해서는 문제 유형을 외우고 이를 정복하는 과정을 통해서 점차적으로 쌓아나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암기와 문제유형에 대한 학습을 배제해야한다고 생각했던 나와는 정반대의 방법론인 셈이다. 하지만 어리석게도 나는 이를 이렇게 해석했다. “현재까지는 만능키와 같은 방법론이 개발되지 않았고 나중에 개발될 수는 있다. 그리고 그런 발견을 내가 해볼 수도 있다.”라는 식으로 전환해서 생각했다. 또한, 스스로 만들어낸 방법이 무협지에서 수련하듯이 정신과 뇌를 단련하는 개념에 가깝다 보니 수학문제를 통해서 해당 문제를 모든 방향에서 바라보고 근원적인 개념부터 구축해서 정신을 과하게 움직이는 훈련을 하는 것에 가깝다 보니 수학문제를 푸는 방법에 천착한 책의 내용을 어느 정도 외면해 버렸다. 그러면서 속으로는 이렇게 해서 시험을 잘 보겠다.”하는 오기도 같이 작동했으니 지금 다시 생각해보면 많이 어리석은 행태였던 것 같다.

 

그런데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망각하는 것이 가능할까? 처음에는 힘들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놀랍게도 망각이 되었다. 나중에는 똑같은 수학문제를 3분 안에 다시 봐도 문제를 어떻게 풀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당시에는 그냥 문제 풀이를 망각한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은 수학문제를 망각한 것이 아니다. 그냥 해당 문제를 기본적인 개념으로 축소하는 것에 골몰하다 보니, 그냥 기본 개념만 강화된 것이고 문제 유형을 외울 생각이 없으니 그 문제 유형이라는 생각의 틀이 만들어지지 않아서 그런 지식은 스쳐지나가 버린 것이다. 게다가 스스로 그런 문제의 유형이나 해법을 외우지 않겠다고 속으로 다짐하다 보니 그 쪽으로의 무의식적인 거부도 작동해서 사고의 틀도 왜곡된 것 같다.

 

당연히 이런 망각의 영향 때문에 당연히 부작용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어떤 문제를 간단하게 풀다가도 5분 후에 보면 어떻게 풀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으니 다시 푼다. 그런데 이번에는 3일 밤낮을 집중해도 풀리지 않는다. 이러니 매일 매일의 컨디션에 따라서 수학문제가 쉽게 풀리기도하고 어렵게 풀리기도 한다. 그래서 공부를 아무리 열심히 해도 시험 당일 컨디션이 좋지 않거나 이상한 생각에 사로잡혀 버리면 간단한 문제도 못풀기 일쑤였다. 그리고 망각하는 것이 무의식적 억압으로 작동한 것인지 어떤 문제를 쉽게 풀게 되면 그 문제를 다시 풀 때 그 방법은 잘 떠오르지 않았다. 이것은 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덕분에 문제 풀이를 많이 할수록 수학성적이 떨어지는 역설적인 상황이 나타났다. , 문제풀이를 기억하지 않겠다는 스스로의 생각이 억압으로 작동하면서 자승자박의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 두 번째 모험으로 인해서 얻은 것은 슬프지만 객관적으로는 부작용말고는 없다. 공부할수록 성적이 떨어지는 공부법이라니 이런 희극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회되지는 않는다. 경제학적인 사고방식으로 그 시간에 제대로 된 공부를 했다면 얼마나 좋은 성적을 얻고 스스로 발전했겠는가를 따지는 기회비용을 들이대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난 오히려 반대로 그러한 호기심과 열정을 꺾지 않아서 다행이었다고 생각한다. 그 호기심과 열정을 꺾었으면 당연히 게임과 친구, 만화책 등에 몰두했지 공부하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런 시행착오가 아깝다는 식의 생각을 못했기 때문에 스스로 완전 연소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실패와 성공은 모두 나만의 유일한 경험이 되어주었고 스스로의 정체성이 되어주어서 내가 스스로의 비루한 삶이라도 온전히 그 삶의 주인이 되게 해주었다.




무협지에 등장하는 고수가 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것이 나의 첫 번째 질문이었다. 그리고 이런 내용을 다루는 책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래서 그러한 책들을 탐욕스럽게 읽어댔다. 그런데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따라하거나 스승없이 수행하면 주화입마를 겪을 수 있다고 경고한다. 그러자 두 번째 질문이 튀어나왔다.

 

이 책이 말하는 내용을 어떻게 정확하게 이해할 것인가?

 

한문도 모르고, 배경이 되는 동양철학도 모른다. 일단, 한글로 번역된 책들을 찾아서 읽어본다. 너무 어려워 나에게 맞는 수준의 책을 골라서 읽는다. 수도 없이 책을 펼쳐보고 사보고 읽어본다. 그래도 이해하기 어렵다. 조금 다른 관점으로 말하고 있는 책을 읽어본다. 그랬더니 서로 말이 다르다. 누가 옳고 누가 그른가? 다시 질문이 나온다.

 

어떤 책은 믿을만 하고 어떤 책을 믿을 수 없을까?

 

어떤 것은 허황된 것 같고 어떤 것은 조금 현실성이 있어 보인다. 읽어본 책들을 현실 가능성, 근거 제시 등으로 신뢰할 수 있는지 판단해보고 신뢰 등급을 매긴다. 그리고 신뢰등급 수준에 따라서 서로 공통으로 지지하고 있는 사실과 서로 비난하는 사실을 나누어 가장 안전하게 공통으로 지지하고 있는 것 위주로 방법을 구축한다. 실행 방법에 있어서도 큰 부작용이 발생할 여지가 없다고 판단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실행하기 편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으로 나누어 방법을 구축한다. 결국, 이구동성으로 옳다고 말하는 바를 중심으로 실행할 수 있고 큰 부작용이 없을 것 같은 것으로 실행 플랜을 짠다. 그랬더니 갑자기 이 세계가 이해되며 결론에 도달한다.

 

그래서 기공류, 요가류, 명상류 등이 말하는 바는 결국, 심상(心象)의 구축이고 그 외의 내용들은 내 스스로의 욕망에 내가 휘둘리고 있구나 하는 결론에 도달한다.

 

이 모든 것은 스스로 생각하고 연구하는 과정이었다. 관련 내용을 친구들에게 이야기하면 비웃음 당하고 선생님들에게 말하면 이상한 눈으로 본다. 부모님은 걱정했고, 친척들은 괴짜에 천방지축이라고 생각했다. 결국, 혼자 할 수밖에 없었다. 세상 물정 모르는 중학생이 중2병스러운 집착과 탐욕으로 연구를 하니 연구의 동력은 충분했다. 겉으로는 객관적으로 파악하는 척 열심히 꾸며댔지만 속으로는 곧 무림이 고수가 되어서 그 결과를 보여주마 하는 어리석음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돈에 눈이 멀어 무슨 짓이든 마다하지 않는 어리석음처럼 나도 무림의 고수가 될 수 있다는 것에 눈이 멀어 사람들이 아무리 충고해도 그것을 듣지 않고 연구를 계속했다.

 

이것은 분명한 어리석음이었다. 현실적으로 무림의 고수가 있다면 사람들의 주목을 받을 것이고 알려질 것이 거의 분명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에서 유명한 무술가는 수십년의 고련 끝에 소의 뿔을 꺽은 최배달, 이소룡, 역도산 같은 이 뿐이었다. 물론, 그들의 무술도 어린 아이 눈에는 너무 대단해 보였지만 너무 어렵고 고된 길로 보였고, 그 때 당시의 현실에서는 도전할 수 없는 방법이었다. 친구들 어른들 모두 이러한 어리석음을 바로잡아 주려고 말했지만 스스로는 그럴수록 더 현실을 부정하고 연구를 계속했으니 완전히 탐욕에 물들어 눈이 어두워진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어리석었던 것은 분명하고 결과도 그다지 좋지 않았다. 특히, 이 때 잘못 배우고 내린 결론 때문에 20년간 체증에 시달려야 했지만 후회하느냐고 묻는다면 전혀 그렇지 않다고 대답할 것이다. 이것은 나의 첫 연구였다. 제대로 알기 위해서 노력하고 사색하고 연구하고 진위를 판단하고 실천해보고 하는 과정이 모두 동반되었다.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마다 그 희열에 기뻐했고 기대했던 바가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낙담하기도 했다. 비록 공부해야하는 중고등학교 시절이었지만 이 탐욕에 눈이 먼 어리석은 연구가 너무 재미있었다. 하루 종일 사색하고 가정하는 버릇이 생겼고 스스로의 머리와 눈으로 진위를 가리려고 노력해볼 수 있었다. 비록 원하는 만큼 좋은 결과를 맺지는 못하고 결과적으로 시간 낭비가 되기도 했지만 다른 친구들이 음악과 게임에 빠지듯이 나도 이러한 연구에 빠진 것이니 꼭 낭비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충분할 정도로 이득을 얻은 것 같다.

 

우선, 나는 개성이 생기고 권위자가 되었다. 전교생 중에서 이런 분야를 잘 알고 있는 친구는 내가 유일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좋든 싫든 유일하다는 자신감으로 연결되었다.

 

두 번째로는 이 분야의 공부를 통해서 원하는 결과는 얻지 못했지만 부수적으로 얻은 기술들이 정말 많았다. 심상에 대한 이해를 통해서 공부하기 싫어하는 내 스스로를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명상과 여러 수행을 통해서 단기적으로나마 상당히 강력한 집중력을 쓸 수 있게 되었다. , 이미지 트레이닝 기술, 다독(多讀), 밤새기, 공부를 지속할 경우 발생하는 어깨의 통증과 허리 통증 다루기, 운동 방법, 그리고, 사람에 대한 나름의 이해가 쌓이면서 나의 불안한 기질과 산만함 등을 정면으로 꺾지 않고도 통제가 가능하게 되었다는 점도 큰 이득이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연구를 한다는 개념을 알게 되었던 점이 가장 컸다. 궁금한 것을 찾아보고 체계를 세워보고 진위를 가리고 하는 것이 너무 재미있었다. 물론, 그 방법은 전혀 과학적이지 않았기에 잘못된 결론에 도달했지만 그 잘못된 결론도 내가 열심히 머리 싸매고 고민해서 얻어낸 소중한 성과였고 당연히 사랑스러웠다. 단순히 책에서 읽은 것을 주장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살아 움직이는 지식들이 구축되었고 그러한 지식을 구축하는 것이 너무 즐거웠다. 이때부터 잘못된 방법으로나마 열심히 호기심을 탐구하고 진위를 최대한 가리고 연구하고 사색하는 버릇이 생기게 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평생 나의 정체성이 되었다.

 



기공류 등 신비의 세계를 파헤친 결과 얻은 또 하나는 자기 계발서를 발견한 것이다. 정확히는 자기 계발서라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한 것이다.

 

, 자기 계발서는 나의 욕망이 현현된 것이고 거기에 심상이 사용되었다는 것을 이해한 것이다.

 

중학교 1학년인 나에게 자기 계발서는 무공비급처럼 보였다. “○○○을 하시면 ○○○이 됩니다.”라는 단순하고 명확한 구조는 어린 아이라도 이해할 수 있다. “삼시 세끼를 들깨로 120일간 먹으면 몸을 날릴 수 있습니다.”와 같은 문구는 얼마나 이해하기 쉬운가. 그저 그대로 하면 된다. 특히, 내공류나 기공류의 이해하기 어려운 이야기들보다 훨씬 쉽게 다가오는 친절한 무공비급처럼 보였다. ‘3시간 수면법을 읽고 하루 3시간만 수면하면 하루 21시간의 시간을 적극 활용할 수 있을 것 같았고, 타인의 심리를 읽는 법, 여자 꼬시는 법, 사기치는 법, 안마하는 법 등 온갖 책을 읽고 가능한 경우에는 시도도 해보았다. 신비주의 계열도 많이 읽어봐서 점성학부터 연금술까지 열심히 읽어 봤다.

 

자기 계발서는 항상 어느 시대에나 있어왔다. 사람들을 성공시키고 뛰어난 능력을 주고 온갖 신비한 능력을 갖추게 해준다. 이 모든 자기 계발서가 허황된 것은 아닐 것이다. 오랫동안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온 자기 계발서도 있고 허황되어 보이고 믿을 수 없는 자기 계발서도 있다. 하지만 자기 계발서를 읽는 사람의 마음은 대부분 허황되기 마련이다. 왜냐하면 자기 계발서라고 하는 것은 자신이 모르는 분야, 부족한 부분을 채우기를 바라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결핍에 대한 반작용으로 욕망이 발생할 때 평소에 책을 읽지 않는 사람들도 자기 계발서를 읽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게 된다. 하지만 부족한 것이 없을 때는, 자신의 일에 바빠서 그러한 자기 계발서를 들추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자기 계발서에 빠지는 많은 사람들이 맹목적이고 어리석어 보이는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이다.

 

구체적인 방법을 가르쳐주는 ‘How to’ 시리즈 같은 매뉴얼이 아니라 정신적이고 추상적인 것을 다루는 기공류나 연금술, 신비주의 등은 정말 오래된 자기 계발서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자기 계발서는 언어적 한계를 가지고 있다. 그러다 보니 비유를 사용하고 약간 두루뭉술하게 넘어가는 경우가 많다. 이런 내용을 보면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과 그것을 얻기 위하여 해야할 절차 등을 자신이 알고 있는 세계관과 가치관으로 자연스럽게 전환하여 상상한다. 저자는 그저 독자가 그러한 상상력을 발현할 수 있도록 처음에 욕망을 자극하고 어느 정도 가능해 보이는 절차를 상상해서 제시하고 마지막으로 몇 가지 성공사례를 보여주면 나머지는 독자가 알아서 빠져든다.

 

그런데 그러한 방법이나 내용이 상당 부분 개연성 있게 제시되는 경우가 많다. 잘 알려진 사례로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닌자들이 높이 뛰기 위한 기술을 수행하는 방법이라고 하는데 이 방법을 따르면 어지간한 집들 정도는 가볍게 뛰어오를 수 있게 된다고 하는 능력을 익히는 방법이다. 이 기술은 초능력 같은 것을 준다는 자기 계발서의 핵심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방법은 간단하고 명확하다. 핵심은 나무 묘목을 마당에 심고 매일 천 번이고 만 번이고 그 묘목을 뛰어넘는 훈련을 하는 것이다. 나무 묘목은 천천히 커진다. 따라서 사람이 매일 열심히 훈련을 하면 그 나무 묘목이 자라는 속도에 맞추어 뛰는 능력이 성장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나무는 작은 초가집 정도는 뛰어넘게 자란다. 그러므로 사람들의 능력도 집을 뛰어넘을 수 있을 만큼 커진다.

 

여기에서 사람들에게 구축하려고 하는 심상(心象)이 보이는가?

 

묘목이 낮게 땅위에 모습만 보인 상태일 경우에는 사람은 당연히 뛰어넘을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을 읽은 사람은 그것을 뛰어넘는 자신의 상태를 당연히 긍정할 수 있다. 그리고 매일 열심히 연습한다면 그 구체적인 연습량이나 발전 정도에 대해서 잘 모르지만 나무 묘목이 매일 0.1밀리미터 정도 올라가는 수준이라면 가능하겠지 하는 식의 등식이 성립된다. 따라서 사람은 나무의 성장속도에 따라서 스스로의 점프 실력을 늘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나무가 집보다 커짐으로써 사람의 점프 실력도 자연스럽게 집보다 높이 뛸 수 있게 된다.

 

실제로는 따져야할게 더 많다. 첫 번째는 훈련량이 얼마나 되어야 하며, 매일 훈련을 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대두되고 두 번째는 인간의 발전 한계에 대해서 생각해보아야 한다. 하지만 그런 모든 것을 문학적인 표현을 이용하여 뛰어넘어 버렸다.

 

, 첫 번째로 묘목을 뛰어넘을 수 있다고 말하는 부분에서 한번 동의하게 되고, 두 번째 구절에서 그 묘목이 적당히 낮다고 스스로 전제하면서 당연히 그 묘목이 커지는 속도에 따라서 일정하게 발전하는 자신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기 때문에 동의하게 된다. 그리고 그 동의가 그야말로 해당 명제에 대한 동의이므로 그냥 나무가 집보다 커진다면 사람의 점프실력도 그냥 집보다 높게 뛸 수 있는 것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동의하게 되면 내 머릿속에 등록된 심상은 충분히 노력한다면 극히 작은 정도의 발전을 언제나 이룩할 수 있다.”가 된다. 이러한 심상은 사실 본인이 가진 욕망 즉, “높이 뛰고 싶다.”라는 욕망을 이루기 위해서 스스로 구축한 것이고 그 이면에는 인정 욕구와 성적인 욕구도 아마 동반될 것이다. 사실, 이것 자체로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냥 이런 심상을 이용해서 다른 영역에서 스스로 노력할 수 있다면 오히려 노력하게 하고 발전하게 해주는 좋은 심상이 된다. 하지만 진짜로 집보다 높이 뛰겠다고 노력하게 되면 좌절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좌절이 심상의 긍정적인 면까지 파괴하게 되고 인생이 헝클어지게 된다.

 

그래서 이제는 자기 계발서를 볼 때, 그 자기 계발서를 고른 나의 욕망에 대해서 생각해본다. 당연히 내가 낚인 것이라는 생각을 전제로 깔고 보게 된다. 그러면 예외 없이 너는 할 수 있다라는 식의 응원을 본다. 이 부분은 천천히 즐긴다. 현실에서 나를 칭찬해주는 사람이 없으니 자기 계발서에서라도 가능하다고 말해주니 참 다행이다. 미약하나마 자존감을 추스릴 계기가 되어준다. 그리고 읽는다. 역시 나의 욕망을 자극하니 짜릿하고 흥분된다. 큰 바위를 쪼개고 몸을 자유롭게 움직이면서 집을 뛰어넘는 자신을 생각해본다. 누구보다 뛰어난 능력으로 일을 쾌도난마로 해결하는 본인의 모습도 상상해본다. 책에서는 그런 자신이 가능하다고 연신 다독여준다. 잠시 고조된 자존감과 함께 그렇게 하겠다고 스스로 다짐하면서 방법을 찾는다. 방법을 실천하는 자신을 생각해본다. 거듭 생각하다 보면 거기에 구축된 심상이 보인다. 많이 읽다 보니 어느 순간 패턴이 보이는 것이다.

 

자기 계발서의 기본 패턴은 마음먹은 대로 할 수 있어”, “조금만 노력하면 될거야”, “너의 잠재력을 믿어봐라는 식으로 자신의 가능성을 믿고 나아가면 뭐든지 할 수 있다는 심상을 기본으로 깔고 들어간다. 이것을 설득하는 과정은 대부분 원효대사의 모든 것이 마음이 만들어낸 것이다.”와 같은 패턴이고 이것을 적극적으로 설득한다. 이 부분은 제일 좋아하는 심상이지만 현실에서는 구축하기 어려우므로 자기 계발서를 통해서 고양시킬 수밖에 없었다. 자기 계발서에서는 저마다 근거를 가지고 저마다의 방식으로 이 심상을 강조하기 때문에 볼 때마다 새로운 재미가 있고 새로운 관점으로 나에게 이 심상을 제공해주었다. 이 맛에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색다른 재미를 주는 자기 계발서를 찾는 것에 중독되어버리기도 했다.

 

그 다음 즐길 거리는 그들이 제시하는 방법이다. 가능할 것 같은 방법을 제시하기도 하지만 너무 어렵기도 하고 너무 많은 시간이 필요하기도 하다. 때로는 전혀 불가능해 보이는 방법을 제시하는 경우도 많다. 그것은 그대로 재미있다. 그야말로 병맛의 최고봉이기 때문이다. 현실에서는 마주치기 어렵거나 수행하기 어려운 방식이지만 동시에 가능할 것 같다고 상상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는 것이 쉽다고 생각되는가? 나는 그것도 나름 문학창작이라고 생각한다.

 

언젠가는 축지법을 쓰는 방법을 해설한 책을 봤는데, 몸을 완벽한 오각형을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 우주가 알아서 축지를 일으켜 준다나? 너무 재미있었다. 완벽한 오각형은 대단한 떡밥 아닌가? 누구도 그 사람의 자세가 완벽한 오각형이라고 말해줄 수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누구나 한번쯤은 해볼법한 쉬운 해결책이고 또, 동시에 객관적으로 완벽하지 않다고 부정하기 좋은 방법이다. 하지만 그런 것을 믿고 실제로 오각형을 만들려고 버둥대는 내 모습을 생각해보면 너무 웃긴다. 게다가 이런 것을 진짜 축지법을 쓰는 방법이라고 제시하는 사람들을 생각해보면서 역시 세상은 넓다.”라고 생각하게 된다. 이런 류의 책들은 점점 창의적인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중학교 2학년 때 보았던 책에서는 축지법을 익히기 위해서는 보폭을 늘려야 한다고 했는데 이제는 완벽한 오각형이라니 아마도 이러한 떡밥은 개연성 위주의 방법을 버리고 신비주의 방식으로 바꾼 것 같다. 다음에는 어떤 방법이 등장할지 내심 기대가 된다. 그러한 방법을 설득력 있게 제시하는 것도 대단한 창작이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시도해보지 않을 테지만 정말 시도해보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하면 그것은 그대로 인정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렇다. 결론적으로 나는 자기 계발서를 이해함과 동시에 그 자기 계발서 읽기에 중독되었다. 이것은 무협과는 다른 읽는 재미가 있고, 때로는 내 정신을 정말 판타지로 옮겨주기 때문에 무척 즐겨 읽었다. 물론, 실행은 조금밖에 하지 않았다. 정말이다.




무협지는 여전히 즐겨보고 있지만 무협으로 촉발된 기공이나 신비주의에 대한 탐닉과 연구는 4년 정도 내 인생을 휘어잡고 사라졌다. 중학교 1학년부터 고등학교 2학년까지 모든 에너지를 쏟아 부은 덕분에 얻은 것과 잃은 것이 있다. 그리고 이 때 얻었던 것과 잃었던 것이 오늘날까지의 내 인생을 거의 좌지우지한 것으로 보인다.

 

우선,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심상(心象)을 알게 되었다는 점이다.

 

주화입마에 대한 공포로 수행을 하지는 않고 다양한 신비류를 비교하면서 읽어보면서 이해하려고 노력하다보니 어떤 공통점을 찾을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심상(心象)이었다. 심상이라는 것은 일종의 심리적 모델이다. 하지만 단순한 심리적 모델처럼 머릿속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 현실에 부합하는 것이라는 확신을 얻었고 실제로 현실에 작용력을 가지고 있는 것을 말한다. 가령, “나쁜 짓을 하면 죽어서 지옥에 간다.”라는 말을 들으면 어떤 이는 무시하고, 어떤 이는 존중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한 심상이 구축된 사람은 나쁜 짓을 했다는 자각이 들면 바로 죄책감이 들고 지옥에 갈지 모른다는 공포가 작동한다. 그러한 심상이 이미 세계의 규칙으로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공류, 요가, 명상 등 대부분의 수행 전통은 먼저 몸을 차분하게 하고 마음을 완전히 가라앉히는 것을 기초로 하여 해당 전통의 형이상학적인 내용들을 정신적인 작용을 통하여 신체에 구현하고, 신체에 그것이 구현되는 것을 통하여 정신적인 작용이 현실에서 그 영향력을 확보함으로써 심상이 구축되도록 한다. 심상이 구축된 것은 기본적인 믿음이 발생한 것이고 해당 믿음을 기반으로 더 복잡한 심상을 구축하거나 더 강력한 심상을 구축하는 식으로 발전시킨다.

 

어떤 부위에 기, 프라나, 에너지 등이 모인다고 심상을 만들면 실제로 해당 부위가 뜨거워진다. 사실, 이것은 자연스러운 생리작용이다. 우리의 주의력이 몸의 어떤 부분을 떠올리면 우리의 몸은 해당 부위를 쓸 것이라고 생각해서 미리 그 부위를 활성화하기 위해 피를 보내고 그로 인하여 그 부위가 따뜻해지고 민감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공류, 요가, 신비주의 등의 대부분의 전통은 그것을 세상을 이루는 기(), 프라나, 에너지 등이 정신의 작용을 통하여 모인 것으로 해석한다. , 정신이 수행을 통하여 현실세계에 작용을 이룬 것이다. 작용이 성취되었기 때문에 우리의 정신은 정신의 념()을 통하여 기()가 작동한다는 심상이 성립되면서 신체와 정신이 상호확증을 통하여 공인되고 작동하기 시작한다. 그러면 이 심상을 대상으로 조작을 시작한다. 더 강력하게 정신작용을 일으켜보기도 하고 더 약하게 일으켜보기도 하면서 해당 정신작용을 컨트롤 할 수 있게 한다. 그러면 조금 더 복잡한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 이때, 각각의 수행전통은 각자의 형이상학적 모델에 따라서 다양한 방식을 취한다. 기공류에서는 단전으로 시작하고 요가는 차크라를 이용한다. 이렇게 되면 우리에게는 추상적으로만 보이는 실제 정신의 근육이 체계적으로 발달하고 또, 형이상학적이 믿음이 몸으로 체득되면서 그 사람을 둘러싼 세계가 총체적으로 변모하게 된다. , 천인합일을 이루거나. 범아일체를 이룩하게 되거나 신과 하나가 되는 등의 세계의 구축이 완료되는 것이다.

 

이러한 심상에 대해서 알게 되면서, 처음에는 기공류 수행이 완전히 거짓이라고 생각하기도 했지만 조금 더 머리가 굵어지면서 형이상학적인 세계관을 논외로 치고 생각해보면 이 방법이 매우 효과적인 방법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간단한 사례로 이런 것이 있다. 매일 힘들게 육체노동을 하는 사람들이 운동부족에 시달리는 경우가 있다. 물리적으로 보면 육체노동과 운동은 동일한 행동인데, 어째서 운동부족의 증세를 보이는 것일까? 그것은 심상이 다르기 때문이다. 육체노동은 힘들고 하고싶지 않고 돈을 받는 일이다. 반면에, 운동은 상쾌하고 자족적이며 하고싶은 일이고 그 피드백은 더 쾌적해진 나의 몸이다. 따라서 기대하는 것이 다르고 임하는 자세가 다르다. 그 때 발생하는 육체의 생리적 기전이 달라질 수 있다. 가령, 운동을 할 때면 마음이 즐겁고 안정감을 느끼기 때문에 신체에 내재된 에너지를 더 쓰는 방향으로 대사가 이루어지지만 육체노동을 할 때는 불안하고 생존이 걸려 있어서 신체 에너지를 덜 쓰는 방향으로 작동할 수도 있다. 즉, 심상이 구축된 방향으로 피드백이 이루어진다. 따라서 좋은 심상을 구축하면 그에 따른 이득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형이상학적 전통에 대해서 완전히 신뢰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경험적인 지식과 지혜의 축적이 없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이를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다. 한의학만 해도 그 작동 기전을 명확히 알 수 없지만 실제로 작동한다. 그것은 환자가 한의학적인 심상을 구축한 것이 아님에도 플라시보 효과라고 치부하기는 어려울 정도로 현실적인 치유효과를 가지고 있다. 물론, 돌팔이가 많은 것은 별개로 치고 말이다. 따라서 한의학적인 체계에 따라 심상을 구축하는 기공류도 심상을 제외하고도 다양한 효과와 작용력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스승을 구할 수 없었고,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하고 그저 따라하다가 주화입마에 걸리기 싫었던 나는 어느 순간부터 이 모든 것에 공통된 것이 심상(心象)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려운 형이상학적인 체계를 제외한다면 그리고 심상을 다룰 줄 안다면 구태여 복잡한 기공이나 요가 같은 것을 구태여 할 필요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저 현대의 과학과 상식을 이용하여 심상을 구축하면 된다. , 현대 생활을 잘하는 수행을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면 몇십년씩 토굴에 박혀 수행하지 않아도 현실 생활도 더 잘 되고 수행도 잘 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심상이라는 것은 결국 마음먹는 것이다. 세상이 결국, 마음먹은 대로 이루어질 것이라는 확신이 생겼고 그렇지 못한 것은 내가 제대로 심상을 구축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자각이 생겼기에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자각도 같이 생겼다.

 

고등학교 2학년 당시의 나는 심상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수행 전통을 대체할만한 형이상학적인 체계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정신적인 성숙도가 높은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스스로 생각하고 움직여야겠다는 자각을 얻는 정도에 그쳤다. 그리고 공부를 함에 있어 그 동기를 강화하고 집중력을 온전히 발휘하는 용도 정도로만 사용했다. 원래, 심상은 생각한 바가 현실에 구현됨으로서 생명력을 얻게 되기 때문에 그러한 과정을 상세하게 절대적인 믿음을 가지고 설계해야 한다. 하지만 그러한 체계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제대로 사용할 수 없었다. 그저 공부를 통하여 집중하는 훈련을 하고 그것을 통해서 어떤 정신적 경지를 높여야겠다는 막연한 기대로 공부에 대한 거부감을 지우고 동기를 유발한 정도에 불과하다. , 암기를 할 때, 머릿속에 이미지를 선명하게 띄우는 훈련이라고 생각했고 그로 인하여 암기과목의 성적이 매우 좋았는데 딱, 그 정도 수준이었다. 보다 근본적인 개선을 이루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심상(心象)은 논리적인 과정이라기보다는 어떤 믿음이나 신앙과 같은 신뢰가 작동해야 구축된다. 가장 좋은 방법은 스스로 현실에서 부딪치면서 얻는 것이지만 원하는 현실을 상상으로 구축한다고 심상이 생기는 것이 아니므로 그러한 현실에 처하는 것이 쉽지 않다. 아마도 어떤 분야에 일하는 직장인들은 자신이 해당 분야에 들어와서 일할 때와 그렇지 않을 때의 차이에 놀랄 것이다. 해당 분야의 현실에 처하면서 구축된 심상이 사람을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이러한 협소한 심상이 아니라 초월적이고 범용적인 심상은 신앙과 믿음이 필요하다. 따라서 신실하게 믿는 종교가 있는 것도 아니고 어떤 확고한 세계관과 가치관이 정립되지 못한 학생이 심상을 활용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당시에는 심상을 통하여 기대했던 이익을 다 얻지 못했고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고 생각했지만 오늘날에는 스스로 심상을 찾음으로써 그나마 상당히 많은 이익을 얻었다는 생각이 든다. 심상을 알게 된 이후로 집이나 학교에서 그다지 좋은 대우를 받지 않았음에도 단 한 번도 스스로 나아가는 것을 의심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문제가 생기면 스스로의 심상을 고치려했고, 그게 옳든 그르든 간에 나에게는 긍정적으로 작동했다. 그리고 모든 어려운 일을 스스로 긍정적으로 뒤틀 수 있었다. 밤새워 공부하는 것도 도전이고, 학교에서 두들겨 맞는 것도 좋은 경험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기에 현실적으로는 매우 바보 같지만 개인적으로는 가고자 하는 길로 돌진할 수 있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무협, 무술, 내공, 기공에 관심을 갖는다는 것은 정말 위험한 일이다. 시중에 돌아다니는 책을 보다 보면 어느 것이 사실이고 어느 것이 거짓인지 거의 알기 어렵다. 하지만 이 세계를 들여다보게 되는 사람들 대부분이 무협이나 무술 그리고 내공이나 기공이 있었으면 하는 마음을 갖고 그런 세계를 엿보기 시작한다. 그렇게 들여다 본 그곳은 그 사람의 욕망이 그대로 투영된 세계를 보여준다. 강력한 무술을 닦고 싶다고 하면 강력해 보이는 무술이 나타날 것이고, 초능력을 얻고 싶으면 강력한 초능력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 나타날 것이다. 불로장생의 비술부터 천인합일의 경지까지 인간이 얻고자 원하는 대부분의 것이 가능하다고 말하는 세계가 눈앞에 펼쳐진다. 당연히, 그 사람은 자신의 욕망이 이루어질 것 같은 이 무한한 가능성의 세계에 빠져들 수밖에 없다.

 

하지만 아무리 사람이 바라는 것을 제시해주는 세계라고 해도 뭘 알아야 반응하는 법이고 그대로 따라할 수 있는 여건이 되어야 수행할 수 있는 것이다. 처음 소림 내공술을 읽으면서 이제 나도 무림의 고수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에 희희낙락 하면서 페이지를 넘기는 와중에 어떤 글귀가 내 눈에 콕 박혔다. 조금이라도 실수하여 익히면 주화입마 증세가 나타날 수 있으니 완전히 알고 깨닫고 수행을 할 것이며 스승을 찾아 도움을 받으라는 경고문이다. 여기서 주화입마(走火入魔)에서 주화(走火)는 온 몸에 불()이 달린다는 뜻으로 지랄병을 의미하고 입마(入魔)는 귀신들린 것으로 미치는 것을 의미하니 어린 마음에는 인생 종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그 경고문은 정말 자주 등장하기 때문에 수행의 실패는 바로 주화입마(走火入魔)라는 등식이 생길 정도였다. 처음의 희희낙락한 마음은 이제 사라지고 위기감이 엄습해온다. 잘못 익히면 인생을 종칠 수 있는데 계속 익힐 수 있을까? 스승을 구해보려고 했지만 어머니는 당연히 집에서 공부나 하라고 하셨다. 어디 가서 스승을 찾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결국, 혼자서 해봐야 하는데 잘못되면 인생을 종친다고 하니 신중해지지 않을 수 없다. 슬프지만 무림의 고수가 되보고 싶다는 욕망이 너무 강렬했기 때문에 이 분야를 더 이상 들여다보지 않는다는 옵션은 없었다.

 

이제부터는 탐구가 시작되었다. 오늘날처럼 인터넷이 되지도 않고 주위에 물어볼 어른도 없었기 때문에 대형서점에서 필요해 보이는 책들을 닥치는 대로 읽어가면서 연구할 수밖에 없었다. 나의 욕망은 당장 하늘을 날고 바위를 깨부수게 해주는 시리즈의 책들(의 완성, 의 실상, 神功)을 원했지만 이미 주입된 주화입마(走火入魔)에 대한 공포로 인해 내가 스스로 보고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의 책 위주로 살펴보고 이론적으로 검증해보려고 노력하게 되었다. (이 부분은 정말 운이 좋았다고 생각하는데 시리즈의 책들(의 완성, 의 실상, 神功)은 주화입마에 대한 경고문이 거의 없고 너무나 쉽게 선도를 성취하여 초능력을 얻을 수 있는 것처럼 묘사되어 있었다. 아마도 앞서 다른 것들을 먼저 접하지 않았으면 그대로 따라하면서 상당한 부작용을 얻었을 것이다.) 이런 종류의 책을 광범위하게 읽다보면 저자들이 서로서로 논박하고 있어서 어느 순간부터 의심이 강력하게 들게 된다. 어떤 사람은 고행에 가까울 정도로 호흡을 멈추게 하는 훈련을 시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호흡을 멈춰선 안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을 쓰는 법을 강조하는 사람도 있고, 명상 위주로 흐르는 사람도 있다. 신체의 동작이 동반된 훈련을 강조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가부좌로 앉아있어야 한다는 사람도 있다.

 

진실이 무엇인지 검증할 방법이 없었지만 주화입마(走火入魔) 없이 뭔가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었던 나는 가장 소극적인 방법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일단, 계속 해당 분야의 책을 읽으면서 연구를 지속하는 한편, 최소한의 공통점을 찾고, 가장 안전한 방법을 선정해보기로 한 것이다. , 누군가가 위험하다고 말하는 방식은 전부 폐기했다. 그래서 일단, 호흡을 멈추는 방식의 수행을 전부 폐기했다.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방식이 조금이라도 있는 것은 전부 하지 않았다. 이해할 수 있는 만큼만 진도를 나가기로 했다.

 

이런 기준으로 수행법을 분류한 결과 이른바 안전해 보이는 나만의 방식을 결정할 수 있었다.

 

계속 관련 내용을 공부한다.

이완 훈련을 지속적으로 하여 숙련도를 올린다.

호흡을 최대한 길게 숨을 내쉬고 들이쉬도록 연습하되 호흡을 멈추지는 않는다.

()를 모으고 움직이고 하는 내용은 하는 방법을 모르므로 포기한다.

스승 없이 익힐 수 없는 역복식 호흡약을 이용한 훈련차력 같은 것은 포기한다.

마음을 고요하게 하는 훈련으로 호흡을 세는 훈련을 한다.


그리고 점차 공부를 해나가면서 기공이나 신비주의 전통에서 수행을 통해서 구축하려고 하는 핵심은 결국 심상(心象)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물론, 그 심상이라는 것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정도의 단순한 심상이 아니라 거의 존재 자체를 던질 수 있는 수준의 강력한 심상을 말하고 내 신체에 국한될 경우에는 현실적으로 현현할 정도의 절대적인 지배력을 발휘하는 심상을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이 있는 사람이 이러한 심상을 구축하는데 유리하고 신앙이 없다면 형이상학적인 학문의 뒷받침이라도 받아야 강력한 심상을 구축할 수 있다.

 

심상이라는 결론에 도달하는데 대략 4년 정도가 소요되었다. 나의 중학시절은 중2병적인 증세와 함께 시작되어 어떤 분야를 미친 듯이 파고들면서 끝났고 그 모험은 대략 고2가 되었을 때 어느 정도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게 된 것이다. 이것은 나의 첫 번째 완결된 모험이었고, 이 모험은 나에게 무척 큰 자산과 어마어마한 부작용을 동시에 안겨주었다. 



무협지의 재미있는 점은 미녀, 보석이나 황금, 절세보검 같은 것을 노리고 사람들이 분쟁하는 경우보다는 자신을 발전시키고 뭇 사람들 사이에서 우뚝 솟아날 수 있는 무술의 비급이나 영약을 찾는 경우가 더 많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 두 가지는 전부 내공과 연관이 있다. 무술의 비법을 전수하는 책이 무공비급이므로 무공비급을 통해서 무술을 익힐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무협의 세계에서 선호되는 무공비급은 이른바 신공비급이라고 하여 자신의 질적인 존재를 근본적으로 개선시킬 수 있는 종류의 지혜를 담은 책이다. 그리고 이러한 지혜는 단순히 추상적인 깨달음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현현한다. 경락이 되었든 근육의 구조가 되었든 효율적인 내공심법이 되었든 근본적인 현실적인 변화를 담보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근본적인 현실적인 변화는 내공의 변화로 나타난다.

 

2017년에 대한민국에서 유행하고 있는 무협과 김용의 무협에 나오는 내공은 그 개념이 완전히 다르다. 최근의 무협에서 보여주는 내공은 보유하고 있는 기(), , 에너지의 절대량을 의미한다. 그래서 기술을 구사하기 위하여 해당 에너지를 쓰고, 그 에너지가 고갈되고 나면 더 이상 그 기술을 쓸 수 없는 그런 개념이다. 이는 기존의 무협에 비해서 내공의 개념을 많이 단순화한 것에 가깝고, 사실상 자본주의화 되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현대 무협의 내공 개념에 가장 잘 상응하는 것이 경영에서 보여주는 비즈니스 모델이기 때문이다. 내공에서 기()는 현금이고 내공심법은 그 돈을 운용하여 그 돈을 불리는 개념에 가깝다. 불순하고 탁한 내공은 사파의 경우에는 사채로 끌어들인 돈이어서 기간 내에 상환하지 못하면 주화입마를 당할 수 있고, 마도의 경우에는 불법적인 살인, 강도, 약탈 등으로 번 돈에 가까워 언제 잡혀갈지 모르기 때문에 언제 주화입마를 당할지 알 수 없는 돈에 가깝다. 그렇다면 정순한 내공은 열심히 일해서 번 돈에 가깝다고 생각하면 된다. 따라서 정순한 내공은 열심히 노동해서 티끌만치 돈을 받는 것이니 당연히 모으기 어렵다. 물론, 신공비급이라고 하는 것들은 열심히 일해서 레버리지를 당겨서 몇 배로 모을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해준다. 최근의 무협에서 보여주는 내공은 기존의 무협에서 제시한 내공이라고 하는 것을 현대적인 내용에 따라서 변용한 것이다.

 

하지만 김용의 작품에서 읽은 내공은 그런 것이 아니다. 무슨 돈을 쌓듯이 저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변화된 그 무엇이다. 우선, 그것은 에너지라는 단순한 한 가지를 지칭하고 있지 않다. 기본적으로 자신의 내장과 생리 상태를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이라는 구체적인 지점에서 시작된다. 거기에 내부의 보이지 않는 근육의 구체적인 힘도 포함된다. 근육과 같은 구체적인 힘 외에 활기를 의미하기도 하는데 몸이 활기차게 움직이는 정도를 의미한다. 오늘날의 용어로 바꾼다면 신진대사 정도로 번역할 수 있는데, 무협에서의 활기는 단순한 신진대사가 아니라, 몸의 근원적인 생명력을 개선하는 것을 나타낸다. 그래서 몸이 날씨에 따라서 혹은 자연스러운 주기에 따라 어느 날은 몸이 찌뿌둥하고 어느 날은 활기차게 변하는 흐름을 극복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자연의 흐름에 순응하면서도 최적의 대응을 한다는 개념으로 자연스럽게 노화를 막는다는 개념까지 포함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은 인간이 태초부터 가지고 태어난 잠재력을 해방함으로써 가능해지는데 이 잠재력을 해방하기 위해서는 경락을 타통해야 한다. , 이 경락의 타통을 위해 기공(氣功)에서 말하는 기()가 필요한 것이다. 이 경락의 타통은 도교식, 유교식, 불교식의 다양한 방식이 있고, 이러한 방식은 어떤 형이상학적인 세계관을 전제하고 있지만 단순히 머리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몸에 해당 세계의 특성이 구현되는 것이다. , 무림인이 우주와 인간이 하나라는 사실을 깨달았으면 단순히 그런가 보다 하고 아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우주의 힘을 끌어다 쓸 수 있는 상태에 도달해야 진짜 깨달은 것으로 인정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가능한 이유를 경락의 타통과 내공의 증진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당연히 한계가 있다. 오늘날의 자본주의식 내공처럼 기()를 무한정 쌓아서 절대적인 존재가 되는 것과는 달리 당초 무협에서는 무공에서 동원할 수 있는 기의 양보다는 더 효율적이고 미세하고 교묘하게 조정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결국, 김용식 무협에서 내공을 구체적으로 정리하기 어려운 까닭은 한 인간의 드러나지 않지만 현실적으로 작용하는 모든 정신적 육체적 작용을 전부 내공으로 표현하기 때문이다. 결국, 무협의 등장인물들이 진정으로 추구하는 것은 자기 자신의 근본적 개선인 것이다.

 

영웅문 1부 사조영웅전에서 곽정은 이런 내공의 모습을 꽤 정확히 보여준다. 천성이 우직하고 영리하지 못해 스승이 가르치는 바를 잘 익히지 못하는 곽정은 사실 정직하고 성실한 것을 제외하면 가르치고 싶은 제자의 모습은 아니다. 하지만 지나가는 전진교의 도사에게 전진교의 토납술을 배우면서 갑자기 그동안 어려웠던 기예를 익히는 것이 수월해지는 것을 보여준다. , 토납술을 배우면서 정신적인 부분과 육체적인 부분에 있어서 모두 어떤 근본적인 변화가 발생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영약을 먹고 내공이 증진되면서 더 강력한 무술을 배울 수 있는 조건이 되고 더 강력한 신공비급인 구음진경을 익히면서 인간의 그릇과 가능성이 근본적으로 점점 넓어지게 된다.

 

지금은 이렇게 내공이니 기공이니 하는 개념을 전부 정리할 수 있지만 중학교 1학년 시절에는 아는 것 없이 그저 막연한 동경뿐이었다. 욕구는 강렬한데 그것을 찾을 방법을 전혀 모르고 괴로워하다가 친척 집에서 중국기공이라는 책을 발견한 것이다. 무협지에서는 무공비급을 발견한 주인공들이 게걸스럽게 책을 읽으면서 참오하는 내용이 나오는데 내가 딱 그랬다. ‘중국기공을 무공비급 마냥 정성을 다해서 읽은 것이다.

 

아쉽지만 중국기공은 몸이 건강해지기 위한 체조와 약간의 정신훈련, 그리고 마사지 하는 법 등을 소개하고 있을 뿐, 바위를 부수고 잠재력을 개발하고 하는 내용이 없었다. 3일 밤낮으로 연구해도 없었다. 무협지에 나오는 것처럼 행간에 어떤 숨겨진 뜻이 있어 이를 해석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지만 아무리 봐도 없었다. 그냥 건강을 위한 책이었다. 하지만 실망하지 않았다. 이런 무공비급이 시중에 유통되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서점을 뒤지다 보면 반드시 원하는 종류의 책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에 부풀었다. 그렇게 대형서점을 뒤졌고 처음 고른 책은 바로 소림 내공술이었다.

 

당시, 대형 서점에 가면 김정빈씨의 소설 에 이어 단() 시리즈가 유행하고 있었지만 다행스럽게도 그게 뭔지 당시에는 전혀 몰랐고 무협지와 무협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소림사(小林寺)는 잘 알고 있었기에 소림 내공술을 처음 구매하게 된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천행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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