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에는 무수히 많은 소리가 있지만 사람에겐 특별한 소리들이 있다. 그것은 말소리다. 왜 말소리는 특별한가? 말소리는 우리 머릿속에서 의미 작용을 일으키기 때문에 특별하다. 그리고 그 의미작용이 우리 정신의 핵심 중 하나이다. 


 말소리가 너무 특수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어떤 소리가 말소리처럼 들리면 그 말소리에 몰입한다. 예전에 자주 돌아다니던 괴담처럼 테이프를 거꾸로 돌렸을 때, 누군가의 메시지가 들린다고 말한 것처럼 사람들은 어디서든 말소리 비슷한 것이 들리면 소리의 세세한 내용은 사라지고 그 말소리의 내용에 집중하게 된다. 그 때부터 소리는 그저 말소리의 의미를 도와주는 장식 정도의 역할을 한다. 이것은 어디서든 의미를 찾으려는 사람의 본능이다. 그리고 말소리는 의미의 직접적 현현이다.


 말소리는 다른 소리와 매우 다르다. 자연의 소리는 감상이나 분석의 대상 등 외부의 대상일 뿐이다. 하지만 언어로 조직된 말소리는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리의 머릿속에 들어와 직접적으로 다양한 반응을 일으킨다. “사랑”이라는 말을 들으면 다양한 사랑이 떠오르고 사랑했던 사람과 자신이 하려는 사랑 등이 무수히 떠오른다. 욕설을 들으면 분노, 원망, 복수, 맞받아칠 욕 등이 떠오른다. 모든 것은 자동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에 욕설을 듣고 안들은 것으로 할 수 없다. 단지 피어오르는 분노와 온갖 상상들을 참거나 다른 방식으로 전환할 뿐이다. 좋은 말을 들으면 절로 마음이 좋아진다. 겉으로 너무 좋아하는 태를 나타내지 않기 위해서 얼굴 표정을 엄숙하게 지어야 한다. 그래서 언어는 단지 소리가 아니다. 소리의 형태로 전달될 뿐, 우리의 정신을 직접적으로 조작하는 일련의 코드다.


 그런데 수십 년간 영어를 언어로 공부하고 사용했지만 그것이 언어로 작동하지 않는다. 언어는 머릿속으로 바로 다이렉트로 꽂혀 작용을 일으켜야 하는데, 아쉽게도 영어는 그저 일련의 암호해독으로 사용된다. 단어를 찾고 이 단어의 한국어식 의미를 도출하고 단어들을 연결해서 가장 그럴 법한 해석을 찾는다. 그리고 그 해석이 완벽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에 한껏 위축된다. 한국어로 된 어려운 책을 읽을 때는 “뭐 이렇게 어렵게 썼어!”라고 책을 던지겠지만 영어로 된 쉬운 책을 읽어도 그저 해석이 올바른지 여부에 전전긍긍할 뿐이다. 


 왜 이런 차이가 나는지 궁금했고 이리저리 부딪히다 보니 어렴풋하게 입이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 이후는 입으로 하는 말의 주체가 입이라는 점을 검증하기 위한 과정이었다. Anki로 많은 한국어 문장들을 외웠고 이로 인하여 문체와 문장, 글쓰기의 디테일한 과정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덕분에 40년 만에 문장 맛을 보게 되었다. English-Restart를 입으로 따라하면서 영어가 편해지는 느낌을 받았고, 수십 번 본 미드나마 처음으로 자막 없이 볼 수 있게 해주었다. 자막 없이 본 미드는 그 공감과 감동의 깊이가 달랐다. 마지막으로 음성학 공부와 IPA 발음 연습을 통하여 그 동안 안 들리던 영어가 부드럽게 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로 인하여 처음으로 영어가 언어로써 직접적으로 머릿속에 꽂히는 느낌을 받았다.


 본격적으로 입을 이용하여 공부하고 연습하면서 평생 없었던 것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모두 언어와 관련된 심화된 부분이었다. 이공계에게 없었던 글과 문장에 대한 감수성, 외국어 등이다. 정신적으로 없었던 것들이 생겨난다면 없었던 새로운 신경이 배선된 것이라고 봐야하지 않을까? 하고 이공계는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입을 움직여 얻어지는 것들을 보면서 입의 운동을 통한 신경배선이 언어의 기초를 이루고 있다는 개인적인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물론, 입의 운동이 언어의 모든 것을 담당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단지, 입으로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이라면 뇌의 언어 중추는 당연히 입과 연결되어 있고, 입에서 생긴 신호를 다이렉트로 반영할 것이라고 추측할 뿐이다. 그리고 이제껏 겪어온 바는 이 가설이 완전히 틀린 가설은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런 관점 위에서 음성학은 마지막 화룡점정을 찍었다. 음성학은 소리의 알파벳이 있다는 점을 가리켜주었다. 마치 글자처럼 우리 머릿속에 들려오는 말소리를 자동으로 분류하고 조합하여 의미를 만들어내는 가장 기본적인 음성 알파벳이 머릿속에 있는 것이다. 자연에서 들려오는 소리들 중에서 이 소리의 알파벳이 언어적인 규칙에 따라 조합되면 말소리가 된다. 그리고 그 말소리는 단순한 소리가 아닌 머릿속에 직접적으로 작용하는 코드가 된다. 이 코드를 음성체계라고 부른다. 


 음성체계는 완결되어 닫혀 있다. 음성이 완결된 체계라는 말은 이렇게 생각하면 된다. 한국어를 사용하는 일반적인 한국인에게 어떤 소리를 들려주고 말로 옮기라고 하면 한국어로 옮기게 된다. 칠판을 긁는 소름끼치는 소리를 묘사하라고 하면 ‘끼~잉’ 이나 ‘ㄲ~ㄲ’같은 소리로 어떻게든 유사하게 소리를 내려고 하지만 그 소리 자체가 아니라 한국어로 변형된 소리를 낸다. 그 소리와 얼마나 유사하든 간에 그저 한국어 발음의 변형에 불과하다. 세상에는 무한하게 많은 소리가 다채롭게 있지만 한국인은 그런 모든 소리를 한국어의 음성체계로만 인식한다. 그리고 그 음성체계 밖의 소리는 인지하기 힘들다. 소리 그 자체야 들을 수 있고 감상할 수 있고 소리가 서로 다르다는 것을 느끼지만 결국, 언어로 나타낼 때는 한국어 소리로 나타내기 때문이다. 그 한국어 소리가 한국인의 머릿속에서 언어로써 활동할 수 있는 유일한 소리다.


 그런데 이렇게 완결된 음성체계가 각 언어권별로 다르다. 비슷한 곳도 있지만 매우 다른 곳도 존재한다. 특히, 한국어와 영어는 음성체계가 매우 달라서 서로의 언어를 듣고 이해하기 매우 어렵다. 따라서 한국인이 영어를 익히려면 한국어의 닫혀 있는 음성체계를 열고 새로운 음성체계를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그 음성체계가 장착되면 그제서야 마치 컴퓨터에 해당 언어팩이 설치되듯 의사소통이 가능해질 것이다. 단어와 문장은 그때부터 찾아도 늦지 않는다.


 그럼 이 음성체계를 어떻게 하면 받아들일 수 있을까? 아마도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재능이 있는 이라면 그저 듣기만 해도 받아들일 수 있겠지만 재능이 없다면 하나한 분석하고 따져가면서 공부하고 하나하나 훈련해야 한다. 그리고 내가 그 재능 없는 사람이다. 


 내 자신이 재능이 없기 때문에, 앞으로 전개할 Ankilog는 음성학 이론도 자세히 공부하고 동시에 발음도 충분히 많이 그리고 자세히 연습하려고 한다. 아마도 Ankilog가 빨리 나오지는 못할 것 같다. 한 번 공부했지만 그래도 저자들마다 의견이 달라서 이러한 내용들을 소화하고 그에 맞는 훈련과제를 만들어 Anki로 배포하는 과정이 녹록하게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도 정말 오래된 과제를 깔끔하게 날려버릴 절호의 기회가 왔다는 생각에 최선을 다해보려고 한다. 

 음성학 공부는 별 기대 없이 시작했다. 국제음성기호(IPA)를 읽어보겠다는 의도로 책을 펼쳐보았을 뿐이었다. 그런데 너무 전문적이고 어려워서 Anki로 외웠다. 그리고 일단, 외우기 시작하면 상황이 달라진다. 기존에 외운 것에 대한 이해 때문에 그 다음 공부가 쉬워지고, 투자한 시간과 정신력이 아까워서 그 다음 단계로 나아가게 된다. 그래서 시작한 김에 끝까지 공부하게 되었다. 물론, 전문적인 수준이 아니라 개론적인 수준에 불과하다.


 외국의 발음을 연습할 때 부딪치는 문제는 그 발음을 들을 수 없다는 점이다. 소리로는 듣는다. 하지만 언어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유튜브에서 한국어를 공부하는 외국인들 영상을 찾아보면 좋은 예시들을 보여준다. 우리가 ‘공’하고 발음하면 영어 원어민은 ‘콩’하고 따라한다. 그 차이를 잘 인지하지 못한다. 우리가 다른 언어를 배울 때도 똑같은 문제가 발생한다. 그들에게 당연한 소리의 차이를 우리는 전혀 느끼지 못한다. 따라서 아무리 소리를 따라하려고 해도 잘 되지 않는다. 영어로 ‘they’를 발음하면 우리는 ‘데이’로 이해한다. 그래서 우리가 ‘데이’라고 발하면 영어 원어민은 ‘tey'로 듣고 우리의 발음을 이상하게 생각한다. 이렇게 서로 소리체계가 다르면 서로 소리를 이해할 수 없게 된다. 이를 모국어 함정이라고 한다. 상대의 소리를 나의 소리체계로 번역하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다.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저 원어민의 발음을 듣고 따라하기를 반복하면 나아진다고 생각할까? 일부 발전하는 사람도 분명히 있다. 하지만 나처럼 소리에 둔감하고 원래 발음까지 어눌한 사람은 듣고 따라하기로는 전혀 발전이 없다. 오히려 모국어 함정에 빠져서 왜곡된 발음이 그대로 굳어버리게 된다. 모국어가 없다면 아기처럼 해당 언어를 빠르게 배울 수 있다. 하지만 모국어가 이미 정착되었다면 어렵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모국어 함정을 피해서 듣지 못하는 것을 듣고 내지 못하는 소리를 낼 수 있을까? 


 음성학은 말소리를 설명할 때, 우리가 소리를 낼 때 사용하는 혀나 입술 등의 기관의 움직임으로 설명한다. 성대를 떠는가? 혀의 위치는 어디인가? 입술은 어떤 모양을 하는가? 코로 공기가 흘러가는가? 파열인가 마찰인가? 숨소리가 많은가? 등으로 소리를 묘사한다. 그리고 음성 연습은 전부 혀와 입술 그리고 성대 등을 움직이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이렇게 연습을 하면 일단 소리를 낼 수 있다.


 연습을 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처음엔 they의 /ðeɪ/ 발음을 들으면 우리말의 /데이/로 들었다. 지금은 /ðeɪ/로 들린다. 어떻게 들리는 걸까? 처음에는 이렇게 저렇게 발음하라는 말을 따라 해도 잘 들리지 않는다. /ð/를 발음할 때, 혀를 윗니에 살짝 대고 소리를 내보내라고 해도 그냥 /ㄷ/이랑 비슷하게 들린다. 하지만 /ð/와 함께 /d/와 /t/의 발음을 같이 연습하다 보면 조금씩 차이가 몸에 새겨진다. 세 음이 모두 성대 입과 혀가 다르게 움직이기 때문에 그 움직임의 차이에 따라서 어떻게 음이 달라지는지 구분되기 시작한다. 이렇게 서로서로의 음이 구별되기 시작하면 그제서야 비로소 음이 들려온다. /ðeɪ/가 /데이/로 들리지 않고 /ðeɪ/ 그 자체로 들리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 때, 개별 음의 연습만으로는 되지 않는다. 다른 음과 비교를 통해서 그 음의 차이를 인지해야 소리가 명확해진다. 


 개인적인 가설은 이렇다. 우리가 발성기관을 다르게 써서 다른 소리를 내는 연습을 한다.  그런데 귀에는 똑같아 보이는 소리가 들린다. 그러면 뇌는 현재 발성기관의 움직임과 소리를 동시에 비교하게 된다. /ð/, /d/, /t/를 각자의 발성 방식에 따라서 발음한다. 그러면 처음엔 우리 귀에는 /ㄷ/으로 들린다. 하지만 각각의 발성방식은 다르다. 따라서 이 소리를 듣는 뇌의 입장에서는 발성 방식이 다르기 때문에 그 차이에 따라서 소리를 구별하려든다. 성대가 진동되는지 여부에 따른 차이나 숨소리를 섞었을 때의 차이 등을 면밀하게 구별하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구분된 소리에 대한 신경 배선이 이루어지면 그 때부터는 /ð/, /d/, /t/, /ㄷ/를 구별하여 듣고 발음할 수 있게 된다. 즉, 서로의 소리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 구별함으로써 음성이 체계화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구분되면서 비로소 상대의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된다. 


 이제 영어 듣기가 상당히 편해졌다. 내 발음이 좋은지는 모르겠지만 영어를 들을 때 생기는 이질감이 상당부분 사라졌다. 이제 음성 기호가 어느 정도 머릿속에 장착이 되어서 해당 소리를 그대로 머릿속으로 옮겨주는 느낌이다. 이렇게 장착이 되고 나니 예전에 얼마나 힘들게 들었는지 알게 되었다. 영어 단어를 들을 때, 정확한 소리를 듣지 못하니 영어를 한글로 전환해서 문맥에 따라 비교하고 그에 맞는 단어를 찾아 영어로 다시 쓰는 과정이 머릿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머리가 핑핑 도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이러니 영어 듣기가 그리 힘들었고 미드를 보다가 모르는 단어 하나가 나오면 그대로 멘붕에 빠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 정확한 음성 기호가 어느 정도 장착 되니 자연스럽게 말소리를 듣는 게 조금씩 가능해졌다. 영어가 자연스럽게 들리는 경험은 꽤나 신세계였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