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음성기호(IPA)는 이상한 도표와 기호들로 범벅되어 읽기조차 어려웠다. 위키류를 검색해보아도 어렵긴 매한가지였다. 한글로 적힌 전문용어라고 쉽진 않았다. 첫 느낌은 난데없이 양자역학 수식을 푸는 정도의 난이도였다. 잠시 모든 생각을 내려놓고 심각하게 고민했다. 정말 이런 공부가 필요할까?


 수십 년간 쌓여온 영어가 필요하다는 결핍감, 영어에 대해서 감을 잡았을지도 모른다는 애매모호한 기대감, 어차피 할 일은 없고 영어가 필요하다는 현실적인 사정 등이 없었다면 그 자리에서 포기했을 것이다. 하지만 영어가 너무 필요했기에 마음을 다잡고 자료 찾기에 몰두했다. 그리고 그렇게 언어학을 접하게 되었다. 


 엄밀하게 말하면 언어학이 아니라 언어학 중 음성학 파트였다. 일단, 언어학 개론서를 하나 집어서 음성학 부분만 읽어보기 시작했다. 여기서 읽었다는 것은 외웠다는 뜻이다. 언어학의 난이도는 너무 매우 지나치게 높아서 아무리 읽으려고 해도 읽히지 않는 수준이다. 전문용어도 어렵지만 언어현상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외국어의 언어 현상은 아무리 읽어도 이해하기 어렵고 와 닿지 않는다. 반면, 우리말의 언어 현상을 글로 읽고 이해하려는 것도 힘들었다. 입에서 잘 튀어나오는 말을 구태여 분석까지 하고 싶진 않다는 마음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언어학 관련 책을 읽고 있으면 자꾸 튕겨 나간다. 집중력이 유지되지 않고 그만 읽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아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Anki에 넣어서 싹 외워버렸다. 보통은 이해를 하고 외우는 경우가 많지만 이처럼 인연 맺기 힘든 학문은 부득이한 경우 외워서 이해하는 방법을 선택하는 편이 오히려 빠르다. 


 그렇게 하나를 외워서 기초를 닦았지만 뭔가 미진했다. 그래서 다른 책을 외웠는데, 앞서 외운 책과 내용이 다르다. 그 다음 책도 앞의 두 책과 내용이 서로 달랐다. 대혼란이었다. 상당 시간 동안 혼란에 빠졌고 이 혼란을 극복하기 위해서 여러 책들을 봐야만 했다. 덕분에 음성학 공부를 어렵게 하는 몇 가지 난관을 알게 되었다.


 우선, 유럽과 미국의 관계가 문제가 된다. 국제음성기호(IPA)는 유럽에서 영어의 소리를 표시하기 위해 시작되었다. 하지만 미국의 학자들은 국제음성기호를 무시하고 자신들이 사용하는 음성기호를 따로 만들었다. 이를 미국음성기호(APA : American phonetic Alphabet)라고 한다. 국제음성기호와 미국음성기호의 모양이 다르기 때문에 처음 음성학을 펼쳐 든 사람들은 서로 다른 기호에 혼란스럽지 않을 수 없다. 현재는 국제음성기호가 대세로 사용되는 것 같지만 여전히 많은 미국음성기호가 사용되고 그 외에 국내 사전의 발음기호 같은 다른 기호들도 같이 사용되고 있어서 초학자들은 혼란을 피하기 어렵다.


 또 다른 문제는 음성기호의 한계다. 음성기호는 모든 소리를 표시할 수 없다. 한국 사람들이 동일한 언어를 써도 말소리가 미묘하게 다른 것처럼 무한에 가까운 다양한 음성을 기호 몇 개로 표시할 수 있을 리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음성기호는 입술과 혀의 위치, 성대를 울리는지 여부, 얼마나 길게 소리를 내는지, 소리를 내는 방식 등으로 말소리를 정의한다. 


 가령 영어의 /t/에 해당하는 음은 혀끝을 윗잇몸에 대고 성대를 진동시키지 않는 상태에서 소리를 파열시키는 소리다. 이렇게 하면 사람들마다 /t/ 음이 조금씩 다르지만 서로 알아듣는데 전혀 문제가 없게 된다. 그런데 한국 사람들에게 이런 발음을 하라고 하면 /t/가 아닌 /ㅌ/이 된다. 분명히 소리도 비슷하고 서로 알아듣는데 문제가 없지만 한국인은 /t/ 발음을 외국인의 버터 발음으로 느끼고 외국인은 한국인의 /ㅌ/을 한국 특유의 영어 발음이라고 생각한다. 즉, 서로 이질적으로 느낀다. 왜 그럴까? 이는 한국의 /ㅌ/ 음은 윗잇몸에서 이빨에 가까운 아래쪽에 혀를 대고, 영어의 /t/ 음은 그보다 조금 위에 혀를 대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어의 /t/ 소리는 좀 더 혀를 굴리는 소리가 되고 한국어의 /ㅌ/은 좀 더 혀를 곧게 뻗는 소리가 된다.


 영미권에서 번역된 음성학 책들은 주로 자신들의 영어 음성을 위주로 기술되기 때문에 이런 미묘한 차이를 발견하지 않는다. 오직 한국어를 베이스로 영어를 익힐 때의 발성 차이를 연구한 경우에만 이런 미묘한 차이를 찾아낸다. 이런 문제로 인하여 영어권에서 소개한 음성학 관련 책들이나 이를 참고한 책을 읽으면 오히려 굉장히 한국적인 발음을 익히게 된다. 다른 언어를 모국어에 가깝게 이해하려는 모국어 함정으로 인하여 영어의 발음을 한국어 발음으로 이해해버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확한 발음을 익히려면 한국어의 발음 방식과 영어의 발음 방식의 차이를 분명하게 구별해주는 책을 찾아야 한다.


 그 외에도 범람하고 있는 음성과 발음 관련 교재들이 너무 많다. 영국식 영어, 미국식 영어로 나뉘어서 발음을 가르치기도 하고 최근에는 변형 훈민정음을 이용한 발음연습까지 나와서 무얼 읽고 따라야 할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내 경우는 이것저것 참고하다가 이화여자대학교 오은진 교수의 『외국어 음성 체계』라는 책의 1장을 중심 텍스트로 삼았다. 이는 다른 이야기를 하는 국내 국어학자가 쓴 음성학 책과 미국의 언어학자가 쓴 음성학 책 등에서 음성학 파트를 전부 외우고 비교해서 선택한 것이다. 책들이 전개하는 서로 조금씩 다른 이론을 판단할 방법이 없었기에 유튜브 등에서 실제 발음하는 시청각 자료들을 보고, 내 스스로 서로 다른 책들의 방식에 따라 발음 연습을 하면서 비교하여 판단했다. 그 결과  『외국어 음성 체계』 1장의 내용이 내 발음이 왜 이모양이고, 저 외국인은 왜 제대로 발음하지 못하는지를 매우 명쾌하게 보여주었기 때문에 이 책을 영어 음성학 공부의 기준으로 선택했다.


 혹시나 해서 덧붙이면  『외국어 음성 체계』라는 책은 음성학 관련 다른 연구를 하는 책이다. 발음을 친절하게 알려주는 책이 전혀 아니다. 게다가 매우 재미없다. 이 책의 1장은 기존의 음성학에 관련된 논의들을 축약하고 있는데, 그 내용은 정말 좋지만 정말 재미없고 읽기 힘들다. 짧은 경험상 언어학자가 쓴 글에서 재미있는 글은 없었던 것 같다. 어쩌면 언어학자들은 글을 재미있게 쓸 수 없다는 보편원칙을 설정해도 좋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언어학자들은 글을 재미없게 쓰는 것 같다. 그런 언어학 관련 책들 중에서도 손에 꼽힐 정도로 『외국어 음성 체계』는 재미없다. 거의 실험보고서에 가깝고, 1장도 정말 축약에 축약을 거듭한 내용이라서 전혀 친절하지 않다. 그런데 무슨 인연인지 도서관에 갈 때마다 눈에 띄여서 읽어보고 덮기를 수십번은 반복하게 되었다. 결국, 읽기를 포기하고 Anki에 집어넣어 외워버렸다. 외울 때는 주로 중요한 문장 위주로 정리해서 외우는데 어찌나 축약을 잘 하셨는지 거의 토씨하나 빼지 않고 다 외워야 했다. 비록, 이 책과 인연이 닿아서 1장만 외우게 되었고 이로 인하여 이 책의 1장을 음성학 교재로 추천하고 있지만 읽기가 녹록치 않다는 점을 다시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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