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언어상실증 체험은 완전히 실패했지만 이 요상한 호기심 덕분에 자막 없이 드라마나 영화를 상당히 보게 되었다. 그리고 상당히 재미있는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자막 없이 드라마나 영화를 보기 시작한지 일주일 정도가 지나자 지친 나머지 대사가 많지 않은 액션 영화인 아이언맨 1편을 골라봤다. 이미 몇 번을 봤던 영화이기 때문에 그 스토리 라인을 알고 있어서 막막한 느낌은 덜 할 것이고, 자막 없이 보는 것과 자막을 보면서 보는 것이 어떻게 다른지 비교해보고 싶기도 했다. 영화가 재생되었고 아이언맨 토니의 비서 페퍼가 회사에 있는 악당의 노트북에 접속하여 거래내역을 몰래 다운을 받는 와중에 악당인 오베디아가 나타나자 페퍼가 긴장하면서 데이터를 저장한 USB를 빼돌리는 장면이 나타났다. 아래는 그 장면 중에 캡쳐한 화면이다.




위의 장면을 보면 페퍼역을 맡은 기네스 펠트로의 동공이 깨끗하게 보인다. 무슨 대단한 장면은 아니다. 솔직히, 아슬아슬한 상황에서 대치하는 이런 장면은 미국 영화에 너무나 많이 나와서 식상한 장면이고, 또, 영화의 스토리에 중대한 영향을 끼치는 장면도 아니다. 그냥 페퍼가 좀 위험해 보였다가 위기에서 무난히 탈출하는 장면일 뿐이다. 그래서 자막을 보면서 영화를 볼 때는 그냥 조금 긴장했다가 별 일 없다는 것을 안 이후로는 영화에서 그런 장면이 있었는지 조차 기억이 나지 않는 그런 장면일 뿐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뜬금없이 이 장면이 크게 다가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이유는 명백하게 동공 때문이었다.


어렸을 때 보았던 일본의 만화책에서 사람이 흥분할 때 동공이 확장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도박을 하는 갬블러들이 상대의 동공을 관찰하여 상대의 패를 읽는다는 이야기도 종종 들었다. 그리고 그 이후에도 각종 영화나 만화, 소설책 등에서 눈이 읽히지 않도록 선글라스를 하고 다니는 것을 묘사한 장면 같은 것이 있었다. 하지만 한국 사람들의 동공은 잘 보이지 않기 때문에 나에게 그러한 내용들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그런 이야기였다. 최대한 양보해서 그냥 허구적이고 만화적인 설정으로 거의 관찰하기 불가능한 것을 관찰할 정도로 관찰력이 좋은 특이한 사람이 있거나, 혹은 마술사들처럼 숙련된 도박사들은 그것을 관찰할 정도로 잘 훈련이 되어있는 것 정도로 생각한 것이다. 즉, 일상적으로 동공을 관찰해서 그 사람의 마음을 읽는 것은 일반인에게 거의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가끔씩 들려오는 ‘눈은 마음의 창’이고 하는 이야기도 솔직히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내가 관찰한 사람들의 눈에서 마음이 드러나는 것을 느껴본 적이 없었고 그저 눈에 초점이 있거나 없는 것을 확인하는 정도만 관찰되었기 때문이다. 


다시 위의 장면으로 돌아와 보면 페퍼의 눈동자 속의 동공은 매우 선명하게 보인다. 동양인의 검은 눈동자와 달리 푸른 눈은 조명 아래에서 그 동공이 너무나 선명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이 눈을 본 순간 갑자기 굉장히 많은 것들이 단박에 이해되기 시작했다. 동공이 이렇게나 잘 보일 정도면 아무리 얼굴에 포커페이스를 하고 있어도 그 동공은 모든 심리적 사건에 따라 확장하고 수축하므로 그 눈을 들여다보면 사람들은 그 사람의 속도 속속들이 들여다보게 될 것이다. 가령, 스캔들이 난 배우에게 스캔들 상대방으로 예상되는 이름을 제시하면 그 배우가 아무리 묵비권을 행사해도 이름을 들었을 때 그 동공이 확장되는 사람이 스캔들 상대방이라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눈이 드러난다는 것은 동공이 보이는 것이고 그것은 단순히 민낯에 이어 마음까지 속속들이 전부 까발려지게 되는 셈이다. 눈이 이토록 중요한 비밀을 마음껏 누설하기 때문에 눈이 가지는 의미는 동양과는 완전히 달라진다.


동공이 잘 보이는 이들에게 눈을 드러내는 것은 자신의 속마음을 가감없이 드러내는 것이다. 말로 설명하지 않아도 사람들은 그 눈을 보고 그 사람이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무엇에 반응하는지 알게 된다. 이들은 당연히 친애의 감정도 눈으로 나누게 된다. 상대의 눈을 서로 응시하면서 말하는 것이 당연한 습관인 것이다. 그것은 비즈니스를 하는 관계라면 서로 속이는 것이 없다는 신뢰의 보증이 될 것이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가까이서 서로의 눈을 보면서 대화하는 것이 서로의 영혼이 손에 닿을 듯이 잡히는 그런 느낌일 것이다. 또, 눈에 너무나 많은 비밀이 드러나므로 공적인 자리에 노출될 때는 선글라스를 끼게 된다. 그것이 자신의 프라이버시 노출을 막아주는 최후의 방벽이 되기 때문이다. 


내 경우에는 타인의 얼굴을 볼 때, 보는 것은 표정이다. 그래서 얼굴을 전체적으로 관찰하고 눈이나 코 등 특정 부위를 별도로 응시하는 경우는 잘 없다. 눈이 마주치긴 하지만 바로 피한다. 눈을 똑바로 마주 대할 때, 차분히 응시하는 것은 약간 무례하게 느껴지고 남자들 사이라면 싸움까지 날 수 있는 사항이기 때문이다. 한국인의 눈은 눈매와 눈빛의 강약으로 정신이 집중되어 있는지 산만한지 정도는 보여주지만 어느 정도 꾸밀 수 있는 부분이고 보통은 딱히 많은 것을 알려주지 않는다. 동공은 거의 보이지 않고 열심히 관찰해서 보더라도 그 동공이 이전에 비해서 확장되었는지 축소되었는지를 알려면 정말 눈만 바라보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정도로 뚫어지게 눈을 바라보면 무례하게 느끼고 굉장히 불편해할 것이다.


하지만 동공이 선명하게 잘 드러난다면 얼굴을 볼 때 가장 먼저 눈부터 보는 것이 너무 당연할 수밖에 없다. 눈을 드러냄으로써 상대에게 자신이 진실됨을 보여주는 것이 선행하는 예의이기 때문이다. 눈을 가린다는 것은 진심으로 마주할 생각이 없다는 뜻이다. 눈을 보인다는 것은 숨기는 것 없이 당당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니 서로 얼굴을 볼 때 가장 먼저 확인하는 것이 눈이고 눈을 보면서 이야기하는 것이 전혀 무례하지 않다. 반대로 눈을 가리는 것이 무례하다. 많은 서양인들이 동양인들을 샤이(shy) 하다고 말하는 것도 이 눈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눈을 가리지는 않는데 눈을 피하기 때문에 부끄러워한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들의 시선처리도 눈에서 외부로 확장되므로 화장은 눈을 강조하는 눈 화장이 발달하고 화장의 가장 핵심적인 부위도 눈이다. 옷의 색깔도 눈의 색깔에 맞춰서 코디한다. 반면, 동양인들은 전체적인 윤곽 위주로 꾸미고 눈의 중요성은 상대적으로 떨어진다. 서양인들의 화장을 볼 때마다 그 과한 눈 화장이 이상했는데 이제는 납득이 가는 것이다. 그리고 왜 서양인들은 그렇게 선글라스를 선호하면서도 안경은 싫어하는지도 납득하게 되었다. 서구권에서 미남미녀들이 자신의 배우자를 묘사하면서 눈이 너무 아름다웠다고 말하는 것도 배우자의 장점이 그것밖에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것이면 충분했기 때문인 것이다. 


동공이 잘 보이는 눈이 보여주는 맥락은 사회생활로도 확산된다. 타인의 진실성에 대한 확신을 눈을 보면서 할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이들에게 타인에 대한 신뢰는 훨씬 직접적이다. 동양인은 상대방을 판단함에 있어서 신분, 사는 환경, 현재 모습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서 추정해야 하지만 이들은 기본적으로 눈을 통해서 확인하게 된다. 눈을 통해서 확보하는 신뢰는 단순히 추상적인 신뢰가 아니고 그의 진실성을 그 자리에서 확인하는 정도의 매우 구체적인 신뢰가 된다. 또한, 구체적인 그 사람에 대한 신뢰이고 그 집단이나 소속된 환경에 대한 신뢰가 아니다. 따라서 그들은 상대적으로 그러한 집단이나 환경으로부터 거리를 둘 수 있게 된다. 따라서 그 자리에서 눈을 마주쳐서 신뢰감을 확인하고 신뢰하고 그렇지 않으면 신뢰하지 않는다. 반면, 동양인이라면 어떤 사람과 관계를 맺으려면 그에 따른 다양한 보증이 필요하고 그것을 판단함에 있어 그 사람의 신분과 소속 환경 등이 중요한 판단의 기준이 된다. 따라서 사람을 사귀는 것도 바로 그 사람을 사귀는 것 보다는 같은 교회를 다니는 중산층의 한국어 사용자를 사귀는 것과 같다. 즉, 사람 그 자체가 아니라 어떤 사회적 환경에 소속되는 것에 가깝다. 


또, 타인에 대한 판단이 매순간 얼굴을 마주 대할 때마다 담백하게 이루어지므로 인간관계가 상당히 깔끔해진다.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이 분명하게 보이기 때문에 설득은 금방 끝나고 곧바로 상대에게 자신이 의견을 억지로 강요하거나 그냥 설득을 포기해야 한다. 눈에 대한 그들의 그러한 의사소통을 모르는 동양인의 입장에서 보면 이해하기가 어려워진다. 실은 그들은 이미 동양인이라면 모든 예의를 내려놓고 술 먹으면서 쌍욕하고 이리저리 흔들고 하는 모든 과정을 거쳐서 상대방이 정말로 어떻게 생각하는지 납득하는 과정을 그냥 눈빛 한번 마주침으로 끝낸 셈이다. 그러니 그들은 미련 없이 떠나는 것이다. 그런데 동양인들은 그런 과정을 거치지 않는 그들을 보면서 정이 없고 메마르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또, 눈 푸른 서양인들은 동양인들이 눈동자만 확인해도 알 수 있는 과정을 쓸데없이 괴롭게 술을 먹고 망가지는 과정을 통해서 서로 친해진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눈을 드러내는 것은 상호적인 과정이다. 이들은 눈으로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하고 또, 그에 따른 강력한 공감으로 서로 묶이기 때문에 쉽게 그것을 드러내지 않는다. 불쾌한 사람들에게 자신의 그런 속내를 들키고 싶지 않을 것이고 누군가 무례하게 자신의 가장 중요한 영역을 흙발로 침투하는 것을 참지 못할 것이다. 당연히. 정말 이상한 사람들과 공감하면 자신에게 심대한 악영향을 줄 수도 있고 고통을 느낄 수도 있다. 따라서 눈을 쉽게 노출하지 않고 이야기의 맥락에 따라서 상대의 진실성을 확인할 필요가 있을 때만 제한적으로 서로 눈빛을 교환하게 된다. 또, 타인과 교감함에 있어 서로 교감하는 관계와 그렇지 않은 관계가 매우 명백하게 구분될 수밖에 없다. 반면, 동양인들은 그런 관계에 무덤덤하고 자신이 노출된다는 불안감이 없기 때문에 얇지만 넓게 관계를 이룬다. 또, 당연히 서로 교감을 할 수 있도록 동공이 잘 보이는 눈을 선호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런 눈일 경우 교감이 이루어지면서 자연스럽게 관계가 깊이 진전될 수 있을 것이다. 반면, 동공이 잘 보이지 않는 눈이라면 교감이 진행되지 않게 될 것이고 상대방의 생각을 알 수 없어 이를 두려워하게 될 것이다. 또는 두려워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자신들의 의사소통의 가장 확실한 기반이 되는 눈의 소통이 어려운 사람과 맺는 친교에서 자신이 원하는 수준의 공감을 이루기는 어려울 것이다. 물론, 용감한 사람들은 친교를 맺겠지만 그에 따른 다양한 예의와 의사소통 방식을 새로 익힐만큼 부지런하고 영민해야 하고 친교를 맺는다 하더라도 상당히 제한적이 될 가능성이 높다. 지금에 와서는 검은 눈을 자주 마주치기 때문에 많이 완화되었겠지만 그들의 사회에서 과거 검은 눈이 상당히 많은 배척을 받거나 오해를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지금까지는 위의 장면에서 페퍼의 동공을 본 순간 떠오른 것들을 나열한 것이다. 당연히 개인의 생각에 불과하므로 위에 열거한 것들이 일부는 과장되었고 일부는 사실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모든 것이 설명되고 아귀가 딱딱 들어맞는 것 같기 때문에 지금은 그들의 삶과 행동의 저변에 그러한 경향성이 있을 것이라고 개인적으로 확신하게 되었다. 생각해보면 미국 영화나 드라마에서 눈동자를 강조하는 장면은 드문 것이 아니다. 아주 노골적으로 눈동자만 보여주는 영화도 상당했던 것 같다. 아마 위의 장면도 일부러 눈을 강조한 장면이었을 것이다. 즉, 그들은 눈에 대한 것들을 자연스럽게 서로 이해하고 있기에 영화에서 그런 장면을 수시로 배치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이제 처음으로 그게 무엇인지를 체감하고 깨닫게 된 것이다. 그리고 자막을 쓰지 않고 영화나 드라마를 보기 시작한지 일주일만에 처음으로 미국 사람의 가장 기본적인 삶의 전제에 마주쳐 그것을 이해한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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