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학 수업을 들으면서 뇌를 구성하고 있는 신경세포에 대해서 처음 배웠다. 이를 통해서 많은 영감을 받았다. 


 그 영감의 하나는 2000년 당시 많은 비판을 받고 있었던 기계적 환원주의의 한계를 본 것이다. 당시 비판의 포인트는 기계적 환원주의가 모든 것을 단순한 것으로 분할함으로써 모든 인간적 가치를 훼손한다는 것이었는데 별로 동감하지는 못하다가 기계적 환원주의가 복잡성을 다루기 어려워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원래, 기계적 환원주의는 복잡한 것을 단순한 것으로 쪼개는 전략이다. 즉, 문제를 단순화하기 위한 전략인 것이다. 하지만 단순한 것들로 쪼갰는데 상호작용이 더 복잡해져 버리면 기계적 환원주의 전략은 실패하게 된다. 


 이러한 기계적 환원주의의 한계는 항상 쪼개는 것이 옳은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갖게 해주었다. 모든 사물과 현상은 다양한 층위를 가진다. 만일, 사람이라고 한다면 사회적 층위, 역사적 층위, 개인사적 맥락, 신체의 기능, 유전, 세포의 개별 행위 까지 수많은 층위로 이루어진다. 아무리 세포를 연구해도 사람의 사회적 층위나 역사적 층위를 알아내긴 어렵다. 이것들은 개별 세포의 합으로 설명할 수 없고, 그 위에 얹어진 것들이기 때문이다. 전체는 부분의 합보다 더 큰 무엇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더 단순한 것으로 쪼개어 연구하는 방법이 있다면 다 상위의 층위를 관찰하여 연구하고 이들을 상호 비교함으로써 보다 종합적이고 완전한 통찰로 나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그럼에도 이공계로서 기계적 환원주의는 여전히 유효한 전략이라고 생각한다. 단지, 이 복잡한 상호작용들을 체계적으로 분류하고 각각의 역할을 판단하는데 많은 시간과 노력, 그리고 비용이 들어갈 것으로 예상했다. 그리고 물리학이 통계물리학을 받아들이고, 양자역학이 확률적인 존재 양태라는 것을 받아들인 것처럼 새로운 이론 체계를 구축하고 유효한 관찰과 실험을 하는데 많은 난제가 있고 오랜 시간이 걸릴 것으로 예상했던 것뿐이다.


 또, 다른 하나는 뇌와 신체기관은 분리되지 않는다는 깨달음이었다. 우리의 신체와 뇌는 컴퓨터와 각종 디바이스처럼 전선으로 연결되어 꼈다 뺐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뇌가 신체 전반에 신경이라는 뿌리를 내리고 상호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더 정확한 모델이라는 개인적인 확신을 가지게 되었고 그렇게 들여다보기 시작하니, 손가락 끝에는 뇌가 있고, 뇌에는 손가락 끝이 존재하는 상호 반영이 즉각적으로 이루어지는 체계가 보이기 시작했다. 더 곰곰이 따져보니 뇌가 신체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체기관의 각 부위가 뇌라는 곳으로 모여서 연합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편이 보다 단순하고 명확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뇌가 신체의 모든 부위의 연합이라고 생각한다고 해서 뇌가 어떤 자체적인 역할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뇌에는 이성, 지능, 이타심 등 고등한 정신적 작용이 이루어지는 영역이 있을 것이다. 단지, 이 고등한 정신작용들은 신체의 모든 기관들의 ‘사이’에 있다고 생각할 뿐이다. 그리고 그 ‘사이’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 매우 중요한 것처럼 보였다. 


 이제 앞서의 주제로 돌아가 보자. 심리학 강의는 지능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서였다. 하지만 심리학은 지능이라는 것에 대한 납득할만한 설명을 해주는 것 같지 않았다. 그러다 신경세포를 보고 신체 기관 위주의 정신모델을 새롭게 상상하면서 인간의 고등한 정신작용과 지능이라는 것을 스스로 어느 정도 정의할 수 있게 되었다.


 우선 인간의 고등한 정신작용과 지능은 인간의 조건 하에 있다. 인간의 고등한 정신적 능력은 신체 기관의 ‘사이’에 존재한다는 모델이므로 신체 기관이 있어야 그에 부수한 지능도 있는 것이다. 즉, 팔다리가 있으면 지능은 그 팔다리를 어떻게 움직여서 문제를 풀 것인지 알아낸다. 하지만 팔다리가 없으면 지능은 팔다리를 움직여서 문제를 해결한다는 생각 자체를 하지 못한다. 즉, 지능은 팔다리를 어떻게 움직일지 판단하는 지능인 셈이다. 팔다리가 선천적으로 없으면 팔다리를 어떻게 움직여서 어떻게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눈과 귀가 있고 기억이 있으므로 무엇을 보고 무엇을 들었는지 떠올리고 그 정보에 따라 지능이 작동한다. 선천적으로 시각이 없으면 본다는 것을 떠올릴 수 없고, 시각적 정보는 반영되지 않는다. 지능은 인간처럼 보고 듣고 움직일 수 형태를 가지고 인간의 한계를 그대로 반영한다.


 그러면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지금 현대과학의 정수들은 그렇게 손발을 움직이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추상성을 갖고 있지 않은가 하고 말이다. 양자역학의 반직관적이고 상상으로도 가능하지 않은 양상을 발견하고 계산할 수 있는 것은 신체적이고 인간적인 한계를 넘어선 것이 아닌가 하고 말이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문자와 기호 수식 등이 있어서 가능하다. 추상화된 것을 현실적인 것처럼 다루게 해주는 도구가 바로 문자와 기호, 수식 등이다. 물론, 이 문자와 수식을 넘어서서 작동하는 추상적인 정신활동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것이 문자나 수식 ‘사이’에서만 작동한다고 생각할 뿐이다. 


 문자는 인간의 짧은 기억을 극복하게 해준다. 7개 정도만 저장할 수 있는 작업 기억을 시각으로 보충해주어 매순간 모든 것을 한꺼번에 기억할 수 없는 인간의 부족함을 보충해준다. 수식은 엄격한 규칙을 적용함으로써 진리의 형태를 계산할 수 있게 해준다. 우리는 다양한 개념을 기호화하고 이를 수식으로 배열함으로써 다양한 진리를 발견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시청각적인 신호를 통해서 발생한다. 이러한 시각과 청각의 신호를 이용하여 기억을 보존하고 유지할 수 있는 문자와 수식이 없다면 고등한 정신작용과 지능은 지극히 찰나적으로만 존재할 것이다.


 신체기관의 ‘사이’에서는 오감과 기억이 연합되고 신호 정보를 추상화하고 방향성을 부여하는 작용이 일어나는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것이 바로 인간의 고등한 정신작용이 아닐까 추정된다. 그리고 그러한 작용 중 일부를 지능이라고 부르는 것 같다. 지능이라는 개념 자체가 근대 과학의 출현과 함께 예감, 본능, 직감 등 다른 다양한 정신적 작용과 구분하고 이상화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개념인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취사선택되는 정보가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현실 기반 증거일 때, 지능이라고 부르고, 자신의 경험을 기반으로 하면 예감이나 직감 등으로 부르는 것일 뿐 그 근본적인 작용방식이 달라 보이지는 않는다.


 신경세포를 보면서 받은 영감으로 이것저것 추론과 생각을 나열했지만 검증된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 스스로 생각한 가설들이 나름 괜찮아 보였기 때문에 보다 깊이 파고들어가고 싶었다. 하지만 신경세포 단위에서부터 연구해 올라가는 것은 앞서 설명한 것처럼 별 성과를 이루기 어려운 특히, 한국에서라면 더더욱 성과가 없을 것 같았고 그 과정도 매우 지루할 것 같았다. 


 그래서 다른 것에 흥미를 가졌다. 그것은 종합적으로 사람을 바라보고 관찰하는 것, 즉 사람의 행위와 사상에 대한 관찰이었다. 우리의 고등한 정신작용이 신체기관의 ‘사이’에 존재한다는 생각의 또 다른 결론은 추상적인 정신만을 분리해서 관찰하는 것이 어렵고 동시에 그러한 모델로는 고등한 정신작용을 온전히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즉, 뇌라는 기관이 별도로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오감과 신체의 결합이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인간의 조건에 종속되어 있다. 따라서 인간의 행위와 사상을 관찰하는 것이 바로 곧 인간을 관찰하는 것이고 인간의 고등한 정신작용을 관찰하는 것이 된다. 중요한 것은 올바른 모델을 구축하기 위한 시행착오라는 생각이었다. 또, 추후 신경에 대한 환원주의적 연구가 좀 더 궤도에 오르게 되면 스스로 발견한 것들을 그것과 맞추어 봄으로써 보다 종합적인 통찰에 도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게다가, 이항관계의 발견과 같은 인간의 구조적인 특성을 발견하다 보면 보다 추상적인 단위에서 인간의 모델을 구축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심리도 강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의 이런 생각은 철학이나 인문학에 끌리던 마음을 정당화하기 위한 생각이 아니었나 싶다. 이공계 공부에 과학철학의 도움을 받은 이후 마음이 급격히 인문학 공부에 쏠렸고, 특히 정신분석이나 인간의 본질에 대한 인문학적인 연구에 마음이 쏠리면서 이공계 공부에는 별다른 흥미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여하튼, 신경세포를 보고 인간의 정신에 대한 가설을 스스로 만들고 이를 자화자찬 하면서 그 뒤 몇년간은 인간의 사상을 관찰한다고 인문학 독서에 푹 빠진 채 점점 현실과 동떨어진 자신만의 탐구의 세계로 들어가게 되었다. 물론, 현학적인 생각만 많아졌을 뿐 스스로 만족할만한 새로운 발견이나 발전이 이루어지진 않았다.

 앞의 포스팅에서는 신경세포 연구를 통해서 인간의 정신세계를 구현한다는 발상이 가진 한계에 대해서 이것저것 늘어놓았다. 하지만 그 이야기는 신경세포 연구가 불필요하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단지, 심리학 수업을 들었던 2000년경에는 신경세포 연구가 인간의 정신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만 있을 뿐 대단한 성과를 제시하지 않았고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수많은 난제를 보면서 환원주의적 방식의 한계를 느꼈다는 점을 이야기 했을 뿐이다. 


 심리학 교과서에 등장한 신경세포에 대한 지루한 설명이 인간의 정신에 대한 섹시한 설명을 해주지는 못했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가진 선입견을 깨고 굉장히 많은 영감을 받았다. 덕분에 이후의 개인적인 모색의 방향을 잡을 수 있는 계기가 되어 주었다.


우선, 깨닫게 된 것은 뇌와 신체의 분리 문제였다. 그 전에는 뇌와 신체를 분리해서 생각했다. 즉, 신체 기관 중 뇌가 인간의 주요한 정신적 역할을 담당하고, 신체는 그저 감각 정보를 올려주고, 뇌의 신호를 받아 행동으로 옮긴다는 정도의 단순한 도식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신경세포를 들여다보면서 그런 사고방식이 가진 문제도 같이 보이기 시작했다. 


 물론, 뇌에 모인 신경다발이 그 복잡한 작용으로 어떤 추상적인 정신을 구현해내는 것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부정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어디서 어디까지가 뇌인 것일까? 뇌와 나머지 신경계의 차이점은 그 연결망의 복잡성 차이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뇌와 다른 신경계가 다르다는 점은 충분히 인정할 수 있다. 어차피 그 신경계를 거슬러 올라가보면 결국, 그 종점에 뇌가 있고 우리는 뇌를 통하여 다양한 정보를 인식한다. 


 우리의 손가락 끝을 생각해보자. 손가락 끝에 바늘을 찌르면 통증이 느껴진다. 그 통증은 어디에서 느껴질까? 그 통증을 우리가 의식하는 이유는 통증이 우리의 뇌에서 신호화되기 때문이다. 만일, 손가락이 잘려나갔다면 그 잘린 손가락에 바늘을 찌른다고 해서 우리가 통증을 느끼지 않는다. 오직 뇌와 신경으로 연결되어 있을 때만 그 통증을 느낄 수 있다.


 그것은 모든 부위가 마찬가지다. 뇌와 연결이 끊어진 부위는 전부 고깃덩어리에 불과하다. 뇌와 분리되어서 자체적으로 통증을 느끼거나 감각을 느끼는 신체 부위는 없다. 우리의 통증, 감각, 운동은 모두 뇌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뇌에서 손가락 끝까지 이어진 신경은 그냥 하나의 전선 정도에 불과하고 뇌는 그것을 중앙에서 처리하는 핵심적인 기관인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심리학 교과서에서 보여준 신경세포는 뇌의 신경세포나 신체 말단의 신경세포나 큰 차이가 없다. 그저 뇌의 신경세포는 더 많은 신경세포와 연결될 뿐이고, 손가락 끝의 신경세포는 더 적은 신경세포와 그 다음 여러 근육이나 표피에 연결된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이 손가락 끝의 신경을 다른 신경과 복잡하게 연결되게 만들 수 있다면 뇌처럼 될지도 모른다. 일례로 지극히 간단한 신호는 척수 반사 등으로 처리되기도 하므로 신경세포가 그저 신호를 전송하는 역할만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신경세포에 대해서 가장 흥미로웠던 점은 정보를 어떤 방식으로 처리하는지 알 수 없었다는 점이다. 손가락 끝의 감각을 처리하는 신경세포를 떠올려 보자. 신경세포는 척수를 통해서 뇌까지 이어지면서 점점 연결이 복잡해진다. 그 연결을 통하여 다양한 것들이 조정된다. 손가락과 손과 팔의 움직임이 총체적으로 연결되고 그에 따른 신체의 균형과 자세 등이 저절로 조정된다. 우리의 의식이 손가락 끝을 의식하고 있다면 손가락 끝의 느낌이나 촉감, 온도 등을 느끼고 의식할 수 있다. 손가락 끝에 있는 재질의 촉감을 느끼는 상황이라면 그러한 촉감의 적절성을 확인하고 그에 따른 고등한 정신작용도 같이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가령, 인테리어에 적합한 소재인지 단가가 어떤지를 판단할 수 있고, 어렸을 때, 느꼈던 어떤 감촉을 떠올릴지도 모른다.


 손가락 끝에서의 신경세포는 1개가 아니다. 여러 개가 섞여있고 상호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그것이 뇌까지 이어지는 경로에 무수히 많은 신경세포들이 종횡으로 연결된다. 신경세포들이 릴레이처럼 단락단락의 작은 선들을 길게 이어붙인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이 모든 신호들이 파편적이고 신호는 분산되어 다시 뇌에서 종합적으로 표상되어야 할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손가락 끝으로 물건을 만지면서, 단단함, 온도, 질감 등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약간의 집중력을 동원하면 그것들을 하나하나 분리해서 인지할 수 있다. 그것은 종합적이지 않다. 오히려 조립식으로 각각의 감각과 그 감각의 위치를 제시하고 이것을 통으로 묶어 경험하게 해준다.


 손가락 끝의 신경에서 보낸 신호는 어떤 형태로든 확정된 정보 단위를 전송해준다. 촉감이라면 그 촉감의 날 것의 정보를 뇌가 느낄 수 있게 된다. 거기에 다양한 정신적 작용과 신체 불수의근 조절이 덧붙여지더라도 이 날 것의 정보가 크게 왜곡되지는 않는다. 물론, 좋고 싫음과 관련 상황의 맥락에 따라서 정보가 왜곡되기는 하지만 그것은 이 날 것의 촉감을 다른 것과 조합하면서 생기는 문제이다. 그리고 그것이 다른 신경들이 연결되어 다양한 정보를 만들어내더라도 우리는 촉감을 분리해서 인지할 수 있다.


 이렇게 촉감이 그 자체로 분리되어 의식될 수 있다는 것은 비록 그것이 가닥가닥 끊어진 신경으로 연결되어 있을지라도 손가락 끝의 신경에서 보낸 신호가 중간에 흩어지지 않고 뇌에 그대로 연결되는 것으로 보였다. 단지, 뇌에서는 이렇게 들어오는 정보에 복잡한 연결을 통해서 더 복잡하고 고등한 작용을 촉발시키기는 하지만 그 자체로 고유의 정보가 우리의 뇌로 연결되는 것이다. 즉, 손가락 끝의 신경세포는 그대로 죽 이어져서 척수를 통해서 우리 뇌로 들어온다. 그리고 뇌의 내부에서도 이 신호는 다른 신호로 바뀌는 것이 아니라 해당 신경세포의 고유성이 변하지 않은 상태에서 다른 뇌의 신경세포와 연결되고 상호작용을 하는 것이다. 즉, 내가 상상한 것은 다음의 그림과 같은 모습이다.




 위의 그림은 검증되지 않은 나의 상상에 불과하다. 이 그림을 보면 손가락 끝에서 이어진 신경이 그대로 뇌 속으로 들어가 주욱 이어지고 있다. 즉, 가닥가닥 끊어진 짧은 신경을 엮어서 굵직한 신경줄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이 신경줄은 표피에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뇌 깊숙한 곳으로 꽂힌다. 다른 수많은 신경들이 이 신경줄의 중간 중간에 연결되어 신체를 조절하고 기억을 환기하며, 고등한 정신작용을 하지만 손가락 끝에서 이어진 신경은 그대로 고유하게 남아있다. 만일, 뇌와 손가락 끝을 연결한 신경이 그저 전선처럼 이어지는 것이라면 그 전선은 뇌로 넘어오는 시점에서 끝나야 하지만 이 신경은 어차피 뇌와 동일한 신경이고 따라서 문제없이 뇌 속으로 들어간다. 이렇게 보면 신경세포가 손가락 끝을 뇌에 연결해주는 것이 아니라, 뇌의 일부가 길게 촉수를 뻗어 손가락 끝까지 이어진 것이 더 맞는 설명처럼 느껴진다.


 그렇다. 내가 깨달은 것은 뇌가 신체의 각 부위에 촉수를 길게 뻗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런 설명이 몇 가지 주워들은 상황을 더 효과적으로 설명한다. 가령, 손가락이 잘린 사람을 생각해보자. 


 기존의 생각하던 방식은 뇌라는 기관이 있고 그 뇌와 각 신체 부위가 신경이라는 전선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식의 생각이었다. 마치 컴퓨터에 각종 전선으로 스마트폰이나 USB 저장소, 헤드셋 등 다양한 기기를 컴퓨터에 연결해서 쓰는 것과 마찬가지다. 따라서 그 연결이 끊어져도 컴퓨터 자체에는 큰 문제가 없다. 그저 연결이 끊어졌을 뿐이다. 다시 전선을 이어도 되고, 다른 것으로 바꿔 달수도 있다. 그렇다면 손가락이 잘려도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저 손가락이 없어졌을 뿐이고 신호가 더 이상 들어오지 않을 뿐이다. 조금 불편하겠지만 적응하면 될 일이다.


 하지만 보통 신체가 절단된 사람들은 어떤 근본적인 영혼의 상실감을 호소하는 경우가 많다. 또, 심한 경우는 잘려나간 부위에서 통증이나 가려움 등을 느끼는 환지통으로 인하여 정신적으로 고통 받는 경우도 있다. 이런 경우는 뇌와 신체를 나누는 방식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하지만 뇌의 일부가 길게 촉수를 뻗은 것이라고 판단하면 상당히 명쾌하게 설명된다. 신체 말단의 신경세포까지 뇌의 확장이므로 신체의 손실은 바로 뇌의 손실이 된다. 따라서 절단은 단순히 전선이 끊어진 것이 아니다. 뇌 자체가 끊어진 것이다. 뇌 자체가 끊어졌으니 뇌는 결손된 부위의 공백을 상실로 느끼는 것이다. 또, 결손된 부위의 말단에서 신호가 발생했을 때, 뇌는 그것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부위에서 발생한 것이라고 자동적으로 해석해버리는 것이다. 즉, 팔꿈치 아래가 절단되었다고 가정하면 팔꿈치 말단 부분의 신경은 원래대로라면 절단된 부위에 연결된 신경이다. 그런데 이 신경에서 신호가 발생하게 되면, 뇌는 그것을 기존에서처럼 이미 없어진 팔에서 발생한 신호로 해석하는 것이다. 물론, 이것들은 모두 검증되지 않는 가설이지만 훨씬 더 담백하게 설명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설명이 옳다고 가정한다면 팔이나 다리가 절단된 사람들이 보여주는 환지통이나 절단의 근본적 상실감은 사지에 뻗은 신경들이 임의적인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자리에 필연적으로 있어야 할 신경들임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그것은 USB 단자처럼 끼었다 빼는 것이 아니다. 처음부터 하나로 설계된 것이고 한번 정착되면 일부 예외를 제외하면 기계적으로 그렇게 밖에 작동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환지통이나 깊은 상실감은 잘린 팔에 해당하는 뇌의 신경세포가 재 배선되어 다른 역할을 하게 될 때까지 끝없이 이어질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생각하기 시작하면 뇌라는 것이 조금 다르게 보이기 시작한다. 손가락 끝에는 뇌가 있고 손가락 끝까지 촉수를 뻗은 뇌의 영역에는 그 손가락이 있게 된다. 그리고 그것이 한 세트가 된다. 눈에는 뇌가 있고 눈에 촉수를 뻗은 뇌의 영역에는 그 눈이 있게 된다. 코도, 입도, 촉감도, 신체 부위도 모든 부분에 뇌가 있게 되고 또 반대로 촉수를 뻗은 영역에는 그 해당 부위가 있게 된다. 신체기관에 촉수를 뻗은 뇌는 신체기관을 뇌에 담게 되고 그 신체기관에는 뇌가 존재하게 되는 셈이다. 그리고 그렇게 신체기관과 그 뇌의 부분이 한 세트로 작동한다. 한 세트를 이루는 뇌의 부분과 신체기관은 서로 묶여서 신호를 주고받으면서 하나의 단위를 이룬다. 신체기관이 없어지면 뇌의 부분은 끊임없이 신호를 갈구하면서 오작동을 일으키게 될 것이다. 이렇게 보면 이제 뇌는 두개골 안에 있는 중앙처리장치가 아니다. 오히려  여러 신체기관이 접합된 부위이고 신체의 모든 부위를 축약해서 모아놓은 미니어쳐에 가깝다.


 지금까지의 생각은 가설과 상상으로 전개했고, 전혀 증명되지 않은 이야기들이다. 2000년경에 생각한 것들이라서 지금 어디까지 오류로 판명되었을지 잘 모르겠다. 또, 뇌의 작용이나 신경 등을 매우 단순화한 생각이고 주로 감각이나 지각에 해당하는 부분만 고려한 생각이다. 어차피 정신적인 작용을 탐구대상으로 했을 때, 그 외의 부분의 윤곽을 그려본 것이다.  그럼에도 스스로 열심히 생각하고 무척 재미있게 발견한 것들이라서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검증되지도 않은 이야기를 열심히 하는 이유는 이 개인적인 발견이 이공계 학도에서 철학과 정신분석 등으로 삶의 궤적을 변화시킨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다음엔 그 이야기를 해보자.

사람의 정신구조가 2항 구조일 것이라는 막연한 직관 후에는 이를 설명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으로 생각되어 이것저것 책을 집어 보기 시작했다. 몇 가지 분야가 호기심을 이끌었는데, 주역, 논리학, 심리학이었다. 

    

주역은 음양의 이치라는 말의 원전이라고 할 수 있다. 2항 구조라는 것이 이분법이나 음양의 이치라는 말과 비슷했기에 주역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예전이었다면 주역을 종교적인 경전 수준의 믿음의 결과물로 여겼을 것이다. 따라서 음양의 이치라는 말도 딱히 부정하기 어려운 하나의 관점 정도로 생각했을 것이다.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있다는 말을 부정하긴 어렵기 때문이다. 그리고 너무 뻔한 말이기 때문에 아무런 가치도 느낄 수 없는 말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사람이 2항 구조로 지식의 체계를 구축하고, 2항 구조로 된 지식만 이해할 수 있다가설을 갖게 되면서 생각이 바뀌지 않을 수 없었다. 즉, 세상이 음양이 이치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사람이 2항 구조로 즉 음양의 이치로 되어 있기 때문에 세상을 음양의 이치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주역은 세상을 보는 인간의 2항적 구조를 선명하게 드러내는 귀중한 자료일지 모른다. 

   

그런 호기심 때문에 주역을 보았지만 막상 주역에는 음양에 대한 이야기가 거의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는 주역의 해설편인 계사전에 나오는데, 이를 중심으로 한나라의 많은 철학자들이 사상을 전개하면서 음양의 이치라는 것이 점점 중요하게 부각되고 그 철학적 개념이 심오해진다. 당시 내 한문 실력으로는 그런 내용들을 이해하기 어려웠고, 동양학 전체를 관통하기 위한 어마무시한 공부량이 요구되기 때문에 결국, 이성적이고 학문적인 접근은 포기하고 직접 사용해보기로 했다. 즉, 주역으로 점을 치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점(占) 치다가 계시 받아본 이야기에서 언급한 것처럼, 점(占)을 치면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황급하게 그만두게 되었다. 추후에도 조금씩 책을 읽어보기는 했지만 본격적인 공부를 한 것이 아니라서 겉핥기 수준을 넘어갈 수 없었다.

   

논리학 “괴델, 에셔, 바흐”를 말한다. “괴델, 에셔, 바흐”에 대해서는 한 번 언급한 적이 있으니 참고하기 바란다. 논리학을 공부한 적은 없지만 “괴델, 에셔, 바흐”의 내부에 간단한 논리학을 다루고 있고, 그 중심 주제가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였기 때문에, 논리적으로 어떻게 증명하는지는 몰라도, 그 정리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열심히 고민해 보았다.

   

“괴델, 에셔, 바흐”는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로 나타나는 인간 지성의 한계에 대해서도 논하고 있다. 아무리 합리적이고 뛰어난 시스템이라고 해도 그 한계가 있고 모든 진리를 증명할 수 없다는 논지였다. 이는 합리적으로 완벽하게 증명된 진리의 상아탑을 만들려고 했던 근대 과학에 대한 사형 선고였다. 즉, 인간의 학문은 제한적인 진리만을 엿볼 수 있다. 물론, 과학, 논리, 이성이 틀렸다는 것은 아니다. 단지 제한적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이런 내용들을 직관적으로 독자에게 전달하기 위해서 에셔와 바흐를 이야기하고 패러독스와 선문답으로 양념을 하고 있다. 

   

“괴델, 에셔, 바흐”의 내용이 인간이 구축한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세계의 한계를 지적하는 점이 우리의 인식이 2항 구조라는 틀에 제한을 받고 있다는 생각과 어느 정도 닿아 있다고 생각되면서 책에서 언급하고 있는 분야 중에서 어느 정도 이해가 가능한 부분들은 열심히 들여다보게 되었다. 그 때 특히 눈길을 끌었던 것은 불교였다. 저자가 패러독스선문답을 배치하여 보여줄려고 했던 바가 궁금하여 그것을 한참 찾게 되었지만 15년이 지난 최근에서야 불교를 제대로 공부하면서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되었다. 이는 나중에 이야기해보도록 하자.

   

또 다른 것은 인공지능이었다. "괴델, 에셔, 바흐"에서 소개된 내용 덕분에 인공 지능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왜냐하면 호기심을 가지고 인간이 어떻게 생각하고 작동하는지 생각하고 있는데 결국, 호기심이 되었든 진지한 연구가 되었든 발견된 내용들은 인공지능으로 구현될 때 가장 이상적인 구현이 되겠구나 하는 자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2항 구조나 인식의 한계나 이런 추상적인 내용들을 최종적으로 검증하기 위해서 사람을 대상으로 실험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튜링테스트처럼 인공지능으로 구현하고 그 인공지능이 얼마나 사람처럼 행동하는지 보고나서야 스스로 발견한 개념들을 확증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인공지능이라는 주제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인공지능을 살펴보려고 했지만 이 영역은 시작부터 큰 난관에 부딪혔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2000년대 초에는 지능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을 찾기 어려웠다. 지능이 무엇인지 수많은 학자들이 정의하고 논하고 있지만 누구나 납득할 수 있는 확실한 것이 없었다. 그러니 인공지능을 개발하는 사람들은 정체 불명의 것을 만들고 있는 셈이다. 문제가 해결될 리가 없어 보였다. 그래서 인간의 마음을 연구하는 심리학에서 지능을 어떻게 여기는지 들여다보게 되었다. 

   

심리학은 기대하고 생각했던 것과 너무 많이 달랐다. 당시에는 오래된 행동주의 심리학이라는 구호와 함께, 심리학은 과학이 되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었다. 그래서 마음처럼 주관적이고 확증할 수 없는 것을 배제하고 오직 데이터만을 가지고 이야기해야 한다는 식의 내용이 주를 이루었다. 그래서 심리학인데 마음을 이야기하는 것이 금기인 이상한 학문이었다. 오직 겉으로 드러난 행동만을 데이터로 제시할 뿐 그 내부에 심리적으로 어떤 기전이 작동하는지 추론조차 할 수 없도록 제한되어 있었다. 심리학이 아니라 인간생태학이나 인간동물학이라는 표현을 쓰는게 더 맞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마음을 논해야할 자리에는 신경세포를 열심히 설명하고 있었지만 그 신경세포에 대한 설명이 마음에 대해서 무엇인가를 설명해주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저, 과학이기 때문에 가장 과학적인 신경세포로 환원시켜 인간의 마음을 설명하겠다는 원대한 포부로만 느껴졌다. 당시, 이러한 행동심리학에 대한 많은 반발이 있고 새로운 심리학을 구축하려는 과정도 진행되고 있다는 이야기도 들었지만 당시로서는 요원한 이야기였다.

   

심리학은 지능에 대해서도 만족할만한 정의를 내려주지 않았고 이해하기도 너무 낯선 학문이었다. 그래서 추후 마음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서 프로이트류의 정신분석학을 들여다보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아예 소득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심리학 교과서에서 처음으로 신경세포에 대해서 제대로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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