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몽같은 환상과 어울리는 방법-01


 최근 가족 여행으로 대부도에 펜션을 빌려 1박을 했다. 날씨가 좋지 않아서 기대했던 활동들을 하지는 못했지만 다행히 펜션에 배치된 다양한 놀이 활동에 가족들은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그리고 밤이 되어 잠자리에 들 시간에 나는 지하에 위치한 방에서 홀로 자기로 했다.


 여행을 오기 전날 잠을 설쳤고, 여행 당일도 많은 활동으로 지쳐 비몽사몽한 상황이므로 어서 자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하지만 지하방에 눕자마자 뭔가 낯설었고, 불편했다. 눕자마자 으스스한 느낌이 밀려왔다. 등골이 오싹해지면서 잠이 확 달아났다. 그리고 앞에 귀신이 나타났다. 하얀 소복에 검은 머리의 귀신이 천장에서 내려다보면서 톱니같이 듬성듬성 난 날카로운 이빨을 혀로 핥고 있었다. 입의 가장자리를 따라서 핏줄기가 흐른다. 입으로 ‘여길 봐’라고 속삭이고 있는 것 같았다. 눈을 감고 있었는데도 너무 생생하게 펼쳐지는 상상에 소름이 끼쳤다. 이 상황에서 눈을 뜨면 그 귀신이 ‘드디어 나를 봤구나.’ 라고 말하면서 저주를 내릴 것 같았다. 숨막힐 듯한 공포가 엄습해왔다.


 귀신이 무엇을 기대했는지 알 수 없겠지만 나는 이런 환상과 악몽을 다루는데 이골이 나있다. 지난 10여 년간 이런 악몽과 환상을 진저리나게 많이 겪었기 때문이다. 거의 좌절과 절망으로 폐인이 되었다가 아득바득 다시 일상성을 회복하고 정상적인 생활로 돌아왔기 때문에 이런 식의 환상은 나락에 빠졌던 과거가 떠올라서 기분 나쁘기도 하지만 또, 그 익숙함에 반갑기도 한 것이었다.

 지하방에 나타난 귀신은 그 동안 겪은 환상과 악몽에 비추어 봐도 압도적으로 생생했다. 평소 겪던 것이 조악한 화질이었다면 이번에 겪은 것은 4K급 4D 영상 급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순간적으로 귀신의 공포에 압도당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나타나는 패턴이 항상 겪던 익숙한 것이었기 때문에 바로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화질이 아무리 좋아도 스토리는 뻔했기 때문이다.


 이런 환상은 악몽과 문법이 비슷해서 인과관계가 엉망진창으로 나타난다. 눈을 감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생생하게 눈앞에 보이고, 현실에서 일어나기 어려운 비현실적인 상황이 일어나는데 아무런 의문이 발생하지 않는다. 오직 생생한 공포만 느껴질 뿐이다. 공포는 착실하게 주입된다. 소복 입은 처녀 귀신같은 모양과 그로테스크한 톱니이빨이 전형적인 공포의 외형을 구성했고 거기에 공포의 아우라가 덧입혀져 귀신이 더없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눈을 감고 있음에도 보인다는 사실에 의문을 품자, 바로 눈을 뜨면 귀신이 공격할 것이라는 공포가 다시 주입된다. 마치 내가 눈을 뜰까봐 협박하는 것 같다. 익숙한 패턴이었다.


 악몽이었다면 잠을 깨고 마음을 추스르고 다시 상황을 정리하고 하는 등 귀찮은 과정을 겪으면 되지만 환상이었기 때문에 바로 조치를 취할 수 있었다. 머릿속에서 멋대로 전개되는 일련의 환상을 분산시키기 위하여 그저 코를 스치는 숨의 느낌에 집중한다. 숨의 느낌이 현실적으로 느껴지면서 점차 머릿속이 안정되기 시작한다. 환상이 잦아드는 것을 느끼면서 다시 잠을 청한다.


 사람이 너무 굶으면 머리가 멍해지고 점점 단순해진다. 사람의 정신도 결국, 에너지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에너지가 매우 한정적이기 때문에 우리는 가장 필요한 정신 활동에 에너지를 쓴다. 이 원리를 응용하면 환상을 금방 제거할 수 있게 된다. 즉, 지금처럼 환상에 시달리고 있는 상황에서 다른 행위로 에너지를 돌리는 것이다. 그 행위로 쏠리는 에너지가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환상을 구동하는데 필요한 에너지가 없어지므로 환상은 힘을 잃고 잦아들다가 결국 사라지게 된다. 물론, 환상을 일으키는 다른 기저 요인이 없을 때 이야기다.


 내 경우 잘 사용하는 방법은 코를 스쳐지나가는 숨의 감각에 집중하는 것이다. 불교식 명상을 훈련해왔기 때문에 이 감각으로 에너지를 모으는 데 익숙하고 이 감각이 매우 중립적이어서 번뇌를 털어버리고 다시 수면하는데 적합하기 때문이다. 중립적이라는 표현은 자극적이지 않다는 말이다. 즉, 공포와 불안을 이기기 위하여 술을 마시거나 매우 자극적인 컨텐츠를 보는 등의 중립적이지 않은 행위는 지금 당장은 공포와 불안을 잠재울 수 있지만 욕망이 자극되고 정신이 각성된다. 이는, 지금 당장 수면에 장애를 주고 장기적으로 욕망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공포와 불안을 더 자극하는 결과를 낳기 때문에 부정적인 악순환을 초래한다. 


 이렇게 코를 스쳐지나가는 숨의 감각에 집중하면서 환상이 잦아들기 시작했다. 4K급 화질의 4D로 보던 귀신의 화질이 흑백화면 마냥 조악해지다가 잊혀졌다. 마음이 평온해지면서 다시 잠을 청하면서 숨에 집중하던 마음을 풀었다. 그리고 그 순간 다시 공포와 불안이 튀어나왔다. 


 갑자기 지하에 잠들었다는 점이 머릿속에 퍼뜩 떠올랐다. 머릿속에 끊임없이 ‘지하’, ‘지하’, ‘지하’ 라는 메아리가 들어차기 시작하더니 순식간에 내가 지금 관 짝에 들어가 지하에 묻혔구나 하는 확신이 굳혀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몸이 딱 맞는 관에 누운 것 마냥 불편하게 조이기 시작하면서 환상이 사실인 것처럼 몸을 구속했다. 다시 찾아온 환상은 환상 그 자체와 더불어 신체 구속이 발생하는 업그레이드 된 버전이었다. 환상이 너무 빠르고 강렬하여 순식간에 신체와 정신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환상이 공포를 불러오고 신체적 불편함이 그 공포를 실체화시켰다. 그래서 참지 못하고 일어나 불을 켰다. 


 기본적으로 불을 키면 환상이 가라앉는 경향이 있지만 이 환상은 그렇지 않았다. 불을 켜니 숙박시설 특유의 몰개성적인 벽지와 삭막한 풍경이 보였다. 낯설고 지루한 공간이다. 생동감을 느낄 수 없는 풍경과 눅눅하고 음습한 느낌은 묘실을 떠오르게 했다. 수천년 동안 단 하나의 변화도 없는 삭막하고 정적인 공간이다. 그러고 보니 이미 수천년간 이 낯설고 지루한 공간에서만 살아왔다는 자각이 떠올랐다. 그리고 다시 수만년은 더 이 공간에서 박제된 채 있어야 한다는 자각과 함께 토할 것 같은 고독감이 밀려온다. 마음이 무너졌다. 통제가 사라지면서 다시 귀신이 부활했다. 더 생생해진 느낌이었다. 


 호흡을 통해서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있지만 매우 위태위태했다. 이미 무너진 정신의 한 자락을 겨우 붙잡고 있었을 뿐이었기 때문이다. 정신을 가다듬고 다시 집중하려고 했지만 쉽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바로 알 수 있었다. 


 너무 리얼한 환상이기는 하지만 일상에서 번뇌를 다루다 보면 이 환상이 상당히 보편적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어떤 일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기대, 욕망, 공포, 불안 등의 기저에는 인식하기 어려운 미세한 환상들이 실제로 작동한다. 이런 환상들을 들여다볼 수 있게 되면 그 순간부터 그 환상에 대한 통제력을 상당부분 되찾을 수 있다. 이게 불교 명상의 가장 기본적인 원리다. 하지만 일시적으로 튀어나오는 환상이나 번뇌를 인식하고 이를 제거할 때에는 보통 그 기저 원인은 이미 사라지고 그 작용만 남아 있는 경우가 많다. 가령, 내 경우 PC방에 놀러가야지 하는 욕망이 나타나면 대략 6시간 전쯤에 그 번뇌의 씨앗이 심어진다. 그리고 대략 6시간 후나 PC방에 갈 수 있는 상황이 형성되면 번뇌는 일어나 작동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 경우 이 욕망을 통제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PC방에 가고자 하는 마음에 쏠린 에너지를 분산시키고 몰입된 마음을 들여다보면 대부분 해결된다.


 하지만 번뇌의 원인이 끊임없이 작동하는 경우는 그렇지 않다. 가령, 배고픔을 생각해보자. 배가 고프면 몸은 끊임없이 먹을 것을 요구한다. 배고픔은 실제의 허기와 허기로 인한 탐욕, 욕망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에 대한 불만과 분노 등을 일으킨다. 정신을 집중한다면 허기로 인한 탐욕과 분노 등을 어느 정도 막을 수 있다. 하지만 허기는 그대로 남는다. 집중력이 무너지는 순간 다시 허기로부터 탐욕과 분노 등이 올라온다. 정신력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결국, 무너지게 된다. 물론, 고도의 수행을 통해서 확신을 갖추었다면 이를 극복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일반인이 그렇게까지 하기는 어렵다. 이 경우 가장 합리적인 선택은 적절하게 먹는 것이다. 그래서 다이어트가 어렵다.


 두 번째 환상을 보면서 이제 어떤 기저 원인이 실시간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마도 습기로 인한 축축함, 에어컨의 작동으로 인한 한기, 창문 하나 없는 밀폐된 공간, 지하라는 점이 맞물려 번뇌를 끊임없이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거기에 지친 체력과 수면에 들면서 마음이 무저항 상태로 놓이게 되는 것도 원인으로 보였다. 이를 하나하나 들여다보면서 극복할 수도 있지만 바로 포기했다. 기저 원인이 없다면 가능하겠지만 이미 계속 작동하는 원인이 있다면 총하나 들고 홀로 백만 대군을 상대로 싸우는 격이고 작은 제방 하나로 홍수를 막겠다고 설치는 격이기 때문이다. 수행이라고 생각하고 싸워볼 수도 있겠지만 이미 지치고 힘든 상황인데다가 다음 날은 또 운전을 해야 하기 때문에 잠을 자야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미 중요한 급소를 찔려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이 환상은 이미 내 약점을 찔렀다. 그것은 생사관이었다. 개인적으로 죽음 이후에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이런 점에서 불교도가 아니다). 그래서 죽는 과정은 싫지만 죽음 자체에 대한 두려움은 없다. 그저 죽음이 영원에 가까운 휴식이라면 찰나의 삶 동안은 충만하게 살고 미련 없이 가는 것이 가장 좋다고 생각할 뿐이다. 이것이 내 삶의 모델이다. 그런데 이 환상은 나를 사후세계에 영원의 시간 동안 유폐했다. 죽으면 끝이라는 생각이 삶의 큰 버팀목 중 하나였나 보다. 사후세계의 영원한 유폐라는 환상은 물밀 듯이 밀려오는 고독과 비애로 내 정신을 무너뜨렸다. 결국, 통제력을 잃고 환상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악몽과 환상에 숙련된 환자로서 재빨리 패배를 인정하고 방을 벗어났다. 방을 벗어나 1층 거실에서 눕자 모든 환상이 사라졌다. 마음속에 불안감과 공포는 남았지만 더 이상 기저원인이 작동하지 않아서 큰 문제는 되지 않았다. 오히려 몸과 마음이 너무 지친 나머지 꿈도 꾸지 않고 꿀잠을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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