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리 베르그손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과 상관없는 결론


 본 서평은 아주 오래 전에 읽은 책을 기억을 더듬어가며 추억하기 때문에 신뢰할만한 서평이라고 볼 수는 없다.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은 2004년 쯤 읽었던 것 같다. 약 15년 전에 읽은 셈이다. 


 이 책을 읽게 된 계기가 조금 씁쓸한데, 당시 파국을 맞은 내 자신 때문에 행동이 통제가 되지 않으면서 ‘나’라는 주체가 환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파국 이전에는 나 자신을 스스로 통제하고 다독이며 산다고 생각했다면, 파국 이후에는 알 수 없는 깊은 곳, 즉, 무의식이나, 번뇌, 운명 같은 것이 내 의식을 조작한다는 생각에 빠져 있었다. 


 내 의식을 조작하는 것, 가령, 꿈에 대해서 설명했을 때(링크), 가령, “눈을 감고 있는데, 개의 모습을 본다.”라는 모순적인 정보들이 그대로 유효하게 작동하는 것을 깨달으면서, 의식은 주어진 정보들 사이에서만 유효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사과’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사과를 제대로 떠올릴 수 있다면 다행이겠지만,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처럼 모자라고 주어지면 우리는 아내를 머리에 쓰려고 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런 것들을 나는 어디에서 나타났는지 알 수 없는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이라고 불렀다. 


 그러다가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이라는 책을 서점에서 보았으니 내가 어찌 이 책을 읽지 않을 수 있겠는가? 뭐, 결론적으로 큰 도움은 되지 않았다. 


 앙리 베르그손은 대중적으로 유명한 분은 아니지만 철학사에서 종종 매우 중요한 인물로 튀어나온다. 현대 철학의 기초를 낳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것 같기도 하고 생의 철학이라는 말도 들어봤지만 솔직히 그 내용을 잘 모른다. 그리고 책을 읽었을 때도,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지 잘 모르겠다는 인상만 강하게 받았다. 생각해보면 이분만 어렵지는 않다. 프랑스 철학자들의 글은 항상 너무 난해하고 어려웠던 것 같다. 


 난해한 내용과 번역투의 어투로 거의 이해하지 못했던 책임에도 오래된 기억 속에 이 책이 중요하게 남아있는 이유는 한 가지 이야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람이 근육에 힘을 준다고 생각하고 행동할 때 실제로 어떻게 구현되는지를 설명한 내용이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사람이 어떤 근육에 힘을 강하게 주면, 그 근육이 더 강한 힘을 내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부위에서 힘을 준다.”라는 내용이다. 가령, 손으로 꽉 쥐는 힘, 악력을 생각해보자. 처음 힘을 줄 때는 손가락과 손아귀에 힘을 준다. 하지만 조금 더 강하게 힘을 주려고 하면 손목이 밖으로 꺾이고, 그 다음은 팔꿈치와 어깨 그리고 마지막에는 다리까지 힘이 빡 들어간다. 즉, 우리가 손을 더 강하게 쥐려고 하면, 점점 힘이 들어가는 부위가 많아진다. 어떤 근육 하나에 더 강하게 힘을 준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그 근육 주변의 다른 근육들이 같이 수축하는 것이다. 이를 질적인 것과 양적인 것의 혼동이라는 식으로 설명하고 있었던 것 같다. 


 이 이야기를 기억하는 이유는 이와 똑같은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무술가들이다. 벽 너머로 사람을 치거나, 극단적으로 짧은 거리에서 강한 파워를 내는 타격법인 발경을 설명할 때 무술가들이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한다. 이들의 이야기는 이렇다. 타격을 넣을 때, 강하게 치고 싶은 마음에 힘을 주려고 하면 오히려 속도가 느려지고 타격이 약해진다는 것이다. 가령, 주먹을 뻗는 근육에 힘을 주려고 하면, 주먹을 당기는 근육도 같이 힘이 들어가서 실제로는 주먹을 뻗는 속도가 둔중해지고 체력 소모는 심해진다. 그래서 무술가들은 필요없는 힘인 졸력(拙力)을 빼는 훈련을 한다. 비슷하지 않은가?


 동양의 무술가에게 들은 이야기를 서양의 철학자로부터 들었더니 무척 신선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동양과 서양을 철저히 분리해서 생각하고 있었다. 즉, 동양 특유의 주관적이고 상호적인 세계관과 서양 특유의 객관주의적 개체적 세계관을 대립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셈이다. 그래서 동양의 발경법을 들었을 때, 내 머릿속에서는 저절로 기(氣), 음양오행론, 천인감응 같은 것들이 떠올라 막연하고 추상적인 자연스러운 움직임 같은 것을 상상했다. 즉, 천지에 감응하여 흐느적거리면서 춤을 추는 무희같은 것을 떠올린 셈이다. 그런데 뜬금없이 베르그손으로부터 이를 생리적으로 분석한 이야기를 듣게 되니 저절로 작동하던 선입견이 사라지면서 무술가들의 발경법이 근육의 생리를 정확히 파악하고 설명하고 있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매우 분석적이고 진지하며 효과적이었다. 


 눈을 뜬 기분이었다. 그 뒤로 흥미가 생겨 많은 책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서양의 연금술, 신비주의 등은 동양의 영향을 받은 티가 심하게 났다. 종교와 오컬트적인 세계관이 맹위를 펼쳤고, 과학자들은 탄압을 받았었다. 이게 근대 이전이다. 서양은 근대 이전에는 오늘날 말하는 동양과 거의 비슷했다. 근대화를 거치면서 연금술과 미신을 배격하던 그들의 계몽 운동이 성공하면서 음지로 들어갔을 뿐이었다. 그리고 연금술과 미신으로 점철되었던 과거 서구의 모습을 동양에 그대로 투영하고 있었다. 


 역으로 동양은 생각보다 더 오늘날 말하는 서구적이었다. 인도와 중국, 아랍의 문명은 찬란했고, 무슨 비논리적이고 신화적이고 주관적인 그런 것이 아닌 논증과 경험을 통하여 납득할만한 지혜들을 전하고 있었다. 물론, 주술과 오컬트, 연금술 등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 비합리성을 파악하고 비난하는 지식인들이 중심이 되어 이를 절제하고 있었다. 그들의 논술을 읽어보면 그 면밀하고 구체적인 논증에 오늘날의 지식으로도 설득당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을 읽고, 엉뚱하게 동양을 재발견했다. 이는 사소하지만 굉장히 큰 변화였다. 이러한 태도 변화가 있고 나서야 진정으로 동양의 지혜에 귀를 기울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불교의 큰 지혜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알게 되었고, 중국의 한의학이나 음양오행론을 어떻게 써야하는지 조금이나마 감을 잡을 수 있었다. 고대에도 경제와 사물의 법칙을 궁구한 천재들의 지혜가 지금도 유효하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신세계였다. 새롭게 발견된 오래된 신세계를 탐구하고 싶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번역된 책들은 솔직히 읽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수학은 거의 번역된 것이 없고, 천문학과 의학 등은 너무 중구난방이었다. 번역은 이해하기 힘들었고, 번역서에는 역자의 개인적인 관점이 심하게 반영된 경우도 많았다. 결국, 원서를 직접 읽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지만, 솔직히 엄두가 나지 않아 포기했다. 그저 번역서만 조금씩 흝어보다가 말았다.


 그러나 Anki를 알게 되면서 공부가 시작되었다. 목적은 구장산술(九章算術) 같은 수학이나 기술서, 천문학 같은 책을 원문으로 직접 읽고 이를 블로그로 소개하는 것이다.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거기까지 가는데 상당한 시간이 걸리겠지만 무려, 15년 전 해보고 싶었던 것을 시도한다는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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