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항구조에 대한 개인적인 발견으로 시작되어서 신경세포에 영감을 받은 나는 큰 호기심을 가지고 책들을 뒤지기 시작했다. 인간의 추상적인 정신이란 결국, 인간의 구체적인 행위와 사상으로 나타나는 것이고 이는 이항구조와 같은 어떤 추상적인 구조의 형태로 나타날 것이라는 생각에 문학, 사상 등의 책을 읽고 그러한 추상적인 구조를 추가적으로 발견하고 싶었고, 발견된 구조를 통하여 인간을 총체적으로 이해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공부들은 바로 큰 벽에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 제대로 된 인문학 공부라는 것은 무시무시할 정도로 공부량이 많기 때문이다. 특히, 암기할 것이 너무 많고 외국어 소양도 충분해야 하는데 두 가지 전부 내가 할 수 없는 종류의 행위들이었다. 결국, 깊은 수준까지 제대로 공부는 하지 못하고 교양으로 이해가능한 수준의 책만 뒤적이기를 반복하면서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인문학 공부를 통해 원하는 것을 얻지는 못했지만 다량의 독서 경력은 생겼고 나름 인문학 쪽에 소양이 생겼다. 또, 그만큼 전공 공부를 놓아버렸기 때문에 탈출구를 고민하다가 고시를 생각했다. 안정적인 신분으로 나름 편하게 살면서 평생 독서나 연구를 하면서 살겠다는 안이한 생각이었다. 당연히, 고시는 실패했다. 암기가 안 되는 사람이 고시를 공부한다는 것이 코미디였다. 그런데 이 실패가 매우 치명적이었다. 


 고시 공부는 시작부터 난항이었다. 대학을 거치면서 공부하는 법을 전부 까먹은 것인지 공부라는 행위 자체가 되지 않았다. 책상 앞에 앉아있으면 잡념이 끊이질 않았다. 그래서 처음엔 인간관계를 끊었다. 친숙하게 노는 친구들이 전부 공부랑 담을 쌓고 있어서 한번 어우러질 때마다 1~2주일의 시간이 훅 날아갔기 때문에 결단을 내리고 인간관계를 정리하고 휴대폰도 없애버렸다. 하지만 인터넷이 남아있었다. 다른 관계를 모두 끊었더니 오히려 인터넷이 삶을 좌지우지 할 정도로 비중이 높아져버렸다. 인터넷 뉴스는 매일매일 자극적인 이야기를 전달해주고 홀로 심각하게 받아들여 밤마다 세상의 불의에 분노하고 좌절하느라 공부는 뒷전이었다. 세상에 대한 분노, 공부가 안되는 좌절감 등이 너무 고통스러울 때는,  생각을 잊게 해 줄 재미있는 영화나 게임을 찾아 인터넷을 헤매기도 했다. 결국, 내 잡념은 결국, 항상 인터넷으로 연결되었다.


 공부를 하다보면 꼭, 그 동안 전혀 신경 쓰지 않았던 다른 것이 하고 싶어진다. 꼭, 시험 전날 한창 바쁠 때, 엉뚱하게도 운동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고, 평소에는 전혀 관심이 없던 엉뚱한 이상한 책을 읽고 싶어진다. 고시 공부를 하는 기간도 내내 이런 엉뚱한 충동을 겪어야 했다. 당시, 책꽂이에 대략 10년쯤 있었던 칼릴 지브란의 우화집 《어느 광인의 이야기》가 있었다. 누군가 사와서 책꽂이에 꽂아놓은지 한참 지난 책이었고 한번도 펼쳐보지 않은 책이었다. 공부를 하다가 갑자기 이 우화집이 눈에 확 들어왔고 충동적으로 그것을 펼쳐 읽었다. 그리고 “자아가 허무함을 응시”하는 이야기에 꽂혀 버렸다. 공부를 하거나 길을 걷다가도 불현듯 “자아가 허무함을 응시”하는 것을 떠올리는 것이다. 


 시간은 흘러가고 자신에 대한 한심함과 자괴감이 이미 강해질대로 강해졌다.  결국, 공부가 손에 잡히지 않던 어느 날, 너무 많은 상상과 생각이 머릿속에 넘쳐흘러서 괴롭던 어느 날 망상을 뿌리째 잘라내고 싶다는 강력한 충동이 생겼다. 그 충동은 방법도 같이 제시했다. 그 방법이란 "허무함을 응시"하는 것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상한 충동이다. 여튼 당시 머릿속의 생각은 망상의 연쇄작용을 따라 올라가보면 "허무함"이 있을 것이라는 이상한 확신이었다. 망상을 뿔리째 잘라내고 싶었던 것인지 망상에 휘둘린 것인지 잘 구별이 가지 않는다.


 그것이 망상인지 충동인지 구분할 수는 없었다. 단지 괴로웠고, 평화가 필요했다. 모든 것의 연쇄작용을 따라 올라가서 그 망상의 근원을 보고 그것을 파괴하거나 제어하여 내면의 평화를 찾지 못하면 죽을 것 같았다. 어쩌면 "허무함"을 내면의 평화로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여하튼, 방바닥에 책상다리로 앉아서 스스로의 망상을 따라 올라가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망상을 하나하나 인식하려고 시도했다. 그리고 인식된 망상의 원인을 찾아 그 뿌리를 찾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망상은 항상 흘러넘쳤기에 망상을 인식하는 것은 쉬웠다. 망상은 인식하면 그 망상의 원인이 무엇인지 보려고 했다. 하지만 망상을 인식하고 그 원인을 찾으려는 순간 인식된 망상은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갑자기 망상이 없어지니 망상의 원인도 왜 찾아야 하는지 알 수 없게 되었다. 다시 정신을 가다듬고 망상을 다시 인식하려고 한다. 어라 조금 망상이 줄었다. 망상을 찾아 헤맨다. 다시 망상을 찾았다. 인식하고 그것의 원인을 궁구하려고 하는데 다시 망상도 사라지고 그 망상의 원인은 붕 떠버린다. 그리고 필름이 끊겼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모르겠지만 음란한 망상의 한 가운데서 의식을 자각한다. 음란한 망상이라고 구태여 말한 것은 일관된 것이 아니었지만 그 모든 것의 주제가 성행위나 폭력이었기 때문이다. 이야기처럼 서사나 내러티브가 있는 것은 아니고 그저 온갖 야동과 폭력 영화가 머릿속에서 한꺼번에 플레이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또, 음란하다고 생각한 이유는 머릿속의 영상이 어떻든 간에 거기에 투영되는 욕구가 너무 강하고 동물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무한반복이 몇 번이나 지나갔는지 알 수 없지만 멍하니 그 모든 것을 보고 들으면서 체험하다가 서서히 의식이 깨기 시작했다.


 의식이 깨어나는 순간을 뭐라고 설명해야할까? 의식이 깨어나기 이전의 체험이 전부 기억이 난다. 하지만 그 순간에 나는 방관자, 혹은 무기력한 정보의 수용자에 가까웠다. 어떤 역겨운 내용도 의도도 그저 스쳐지나가고 있었다. 길가의 돌멩이처럼 무력했다. 하지만 의식이 깨어나는 순간 이 모든 것이 조금씩 옅어졌다. 역겹다는 나의 느낌이 반영된 것일 수도 있다. 의식이 있기 전에는 그저 돌멩이 마냥 있었다면 의식이 생기면서 ‘나’라는 인식이 생기고 안정감이 돌아왔다. 통제가 가능해지는 느낌과 함께 안도감이 몰려왔고, 머릿속에서 무한 재생되고 있는 음란한 망상들이 인식되고 의식이 없는 동안 그런 음란한 망상들 속에 있었다는 기억이 떠오르면서 상황 인식이 형성되었다. 동시에 노출된 스스로의 욕망으로 인한 역겨움이 같이 떠밀려 왔다. 그리고 서서히 그런 망상들이 사라지고 안정된 현실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나는 필름이 끊긴 것을 전혀 몰랐다. 그저 지독하게 낯설고 강력한 상상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자신을 보았을 뿐이다. 앞서 망상을 인식하고 그 원인을 파악하려는 행위가 있었다는 것을 전혀 기억할 수 없었다. 의식이 깨어나고 한참 후에 기억을 되짚어 보고서야 망상을 인식하고 그 원인을 파악하려는 행위가 갑자기 종료되었다는 것을 알았을 뿐이고 그 다음은 아무런 기억이 없다. 눈을 떠보니 지독하게 낯설고 날것의 강력한 망상의 와중이었을 뿐이다. 즉, 단기적 기억상실에 가까운 단절이 일어난 것이다. 


 망상의 근원으로 올라가 잡념의 원인을 파악하고 그것을 제거해보겠다는 의도를 가지고 이러한 일련의 일들을 수행했고, 그 결과는 실패였다. 그래서 다시 몇 번이고 시도했지만 항상 다락에 가까운 단기적 기억상실을 겪고 온갖 망상 속에서 깨어날 뿐이었다. 그리고 망상을 끊어보겠다는 의도와는 달리 망상은 오히려 늘어났고 그 힘도 더 강해졌다. 즉, 예전에는 잡념 수준으로 귀찮은 것에 불과했다면 이제는 거부하기 어려운 욕구가 되어 끊임없는 갈증을 선사했다. 


 원래, 잡념이 많아서 공부가 안 되는 상황에서 출발했다. 이때만 해도 모든 것은 어느 정도 건강했었다. 공부하기 싫어하는 학생이 책상 앞에 억지로 앉아서 지겨움에 몸을 비비꼬면서 망상에 빠지는 것에 가까웠다. 하지만 내가 망상의 근원을 파헤쳐보겠다고 앉아서 머릿속을 응시하면서 이 모든 것은 확연하게 병적인 것으로 악화되었다. 잡념에 불과했던 것들이 이제는 충동으로 바뀌어서 나를 제어하기 시작했다. 매순간 모든 욕구가 나를 파괴시킬 정도로 강하게 일어나기 시작했다. 성적인 욕구가 너무 강해져 낮이고 밤이고 잠을 잘 수 없었고, 감당하기 어려운 성욕이 가라앉기를 바라면서 하루 종일 야동만 보고 있어야만 했다. 지쳐 쓰러질 지경이 되어서도 머릿속에서 망상이 떠나질 않았다. 식욕도 너무 강해져서 고칼로리 음식 위주로 먹고 끊임없이 먹었다. 단맛이 역겹게 느껴지고 속이 물려도 식욕이 통제가 되지 않았다. 머릿속에서 각종 망상이 스테레오로 각성되어서 잠은 지쳐 쓰러질 지경이 되어야만 겨우 잠깐 눈을 붙일 수 있을 뿐이었다. 그것도 이상한 통증 때문에 수면 부족이 되기 일쑤였다. 담배는 줄담배로 피었고, 야동을 벗어나도 갈 수 있었던 곳은 만화방 정도였다. 무협지와 판타지의 단순한 대리 욕구로 머리를 도배해야만 가까스로 조금이나마 평화를 즐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조금씩 내가 미쳐가고 있구나 하는 자각이 몰려왔지만 방법이 없었다. 충동이 들 때마다 나는 너무나 무력하게 충동을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범죄는 저지르지 않았지만 그것은 이성적인 통제와 절제가 아니었다. 그저 그런 충동이 잘 일어나지 않았고, 범죄적인 충동이 있을 때마다 또 다른 충동인 공포가 나타나서 더 강한 충동에 따랐을 뿐이다. 즉, 타인을 상하게 하는 것에 대한 공포와 벌을 받고 싶지 않다는 공포가 있었기 때문에 범죄를 저지르지 않은 것이다.


 이제 더 이상 고시 공부가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그것 그대로 좌절이 되어서 나를 옭아매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매일매일 스스로에 대한 역겨움과 혐오감, 탐욕과 색욕, 식욕, 좌절, 공포 속에서 미친놈처럼 펄떡이다가 어느 순간 내가 진짜로 미친 것일지 모른다는 점을 깨달았다. 파국이었다.

 심리학 수업을 들으면서 뇌를 구성하고 있는 신경세포에 대해서 처음 배웠다. 이를 통해서 많은 영감을 받았다. 


 그 영감의 하나는 2000년 당시 많은 비판을 받고 있었던 기계적 환원주의의 한계를 본 것이다. 당시 비판의 포인트는 기계적 환원주의가 모든 것을 단순한 것으로 분할함으로써 모든 인간적 가치를 훼손한다는 것이었는데 별로 동감하지는 못하다가 기계적 환원주의가 복잡성을 다루기 어려워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원래, 기계적 환원주의는 복잡한 것을 단순한 것으로 쪼개는 전략이다. 즉, 문제를 단순화하기 위한 전략인 것이다. 하지만 단순한 것들로 쪼갰는데 상호작용이 더 복잡해져 버리면 기계적 환원주의 전략은 실패하게 된다. 


 이러한 기계적 환원주의의 한계는 항상 쪼개는 것이 옳은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갖게 해주었다. 모든 사물과 현상은 다양한 층위를 가진다. 만일, 사람이라고 한다면 사회적 층위, 역사적 층위, 개인사적 맥락, 신체의 기능, 유전, 세포의 개별 행위 까지 수많은 층위로 이루어진다. 아무리 세포를 연구해도 사람의 사회적 층위나 역사적 층위를 알아내긴 어렵다. 이것들은 개별 세포의 합으로 설명할 수 없고, 그 위에 얹어진 것들이기 때문이다. 전체는 부분의 합보다 더 큰 무엇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더 단순한 것으로 쪼개어 연구하는 방법이 있다면 다 상위의 층위를 관찰하여 연구하고 이들을 상호 비교함으로써 보다 종합적이고 완전한 통찰로 나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그럼에도 이공계로서 기계적 환원주의는 여전히 유효한 전략이라고 생각한다. 단지, 이 복잡한 상호작용들을 체계적으로 분류하고 각각의 역할을 판단하는데 많은 시간과 노력, 그리고 비용이 들어갈 것으로 예상했다. 그리고 물리학이 통계물리학을 받아들이고, 양자역학이 확률적인 존재 양태라는 것을 받아들인 것처럼 새로운 이론 체계를 구축하고 유효한 관찰과 실험을 하는데 많은 난제가 있고 오랜 시간이 걸릴 것으로 예상했던 것뿐이다.


 또, 다른 하나는 뇌와 신체기관은 분리되지 않는다는 깨달음이었다. 우리의 신체와 뇌는 컴퓨터와 각종 디바이스처럼 전선으로 연결되어 꼈다 뺐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뇌가 신체 전반에 신경이라는 뿌리를 내리고 상호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더 정확한 모델이라는 개인적인 확신을 가지게 되었고 그렇게 들여다보기 시작하니, 손가락 끝에는 뇌가 있고, 뇌에는 손가락 끝이 존재하는 상호 반영이 즉각적으로 이루어지는 체계가 보이기 시작했다. 더 곰곰이 따져보니 뇌가 신체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체기관의 각 부위가 뇌라는 곳으로 모여서 연합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편이 보다 단순하고 명확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뇌가 신체의 모든 부위의 연합이라고 생각한다고 해서 뇌가 어떤 자체적인 역할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뇌에는 이성, 지능, 이타심 등 고등한 정신적 작용이 이루어지는 영역이 있을 것이다. 단지, 이 고등한 정신작용들은 신체의 모든 기관들의 ‘사이’에 있다고 생각할 뿐이다. 그리고 그 ‘사이’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 매우 중요한 것처럼 보였다. 


 이제 앞서의 주제로 돌아가 보자. 심리학 강의는 지능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서였다. 하지만 심리학은 지능이라는 것에 대한 납득할만한 설명을 해주는 것 같지 않았다. 그러다 신경세포를 보고 신체 기관 위주의 정신모델을 새롭게 상상하면서 인간의 고등한 정신작용과 지능이라는 것을 스스로 어느 정도 정의할 수 있게 되었다.


 우선 인간의 고등한 정신작용과 지능은 인간의 조건 하에 있다. 인간의 고등한 정신적 능력은 신체 기관의 ‘사이’에 존재한다는 모델이므로 신체 기관이 있어야 그에 부수한 지능도 있는 것이다. 즉, 팔다리가 있으면 지능은 그 팔다리를 어떻게 움직여서 문제를 풀 것인지 알아낸다. 하지만 팔다리가 없으면 지능은 팔다리를 움직여서 문제를 해결한다는 생각 자체를 하지 못한다. 즉, 지능은 팔다리를 어떻게 움직일지 판단하는 지능인 셈이다. 팔다리가 선천적으로 없으면 팔다리를 어떻게 움직여서 어떻게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눈과 귀가 있고 기억이 있으므로 무엇을 보고 무엇을 들었는지 떠올리고 그 정보에 따라 지능이 작동한다. 선천적으로 시각이 없으면 본다는 것을 떠올릴 수 없고, 시각적 정보는 반영되지 않는다. 지능은 인간처럼 보고 듣고 움직일 수 형태를 가지고 인간의 한계를 그대로 반영한다.


 그러면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지금 현대과학의 정수들은 그렇게 손발을 움직이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추상성을 갖고 있지 않은가 하고 말이다. 양자역학의 반직관적이고 상상으로도 가능하지 않은 양상을 발견하고 계산할 수 있는 것은 신체적이고 인간적인 한계를 넘어선 것이 아닌가 하고 말이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문자와 기호 수식 등이 있어서 가능하다. 추상화된 것을 현실적인 것처럼 다루게 해주는 도구가 바로 문자와 기호, 수식 등이다. 물론, 이 문자와 수식을 넘어서서 작동하는 추상적인 정신활동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것이 문자나 수식 ‘사이’에서만 작동한다고 생각할 뿐이다. 


 문자는 인간의 짧은 기억을 극복하게 해준다. 7개 정도만 저장할 수 있는 작업 기억을 시각으로 보충해주어 매순간 모든 것을 한꺼번에 기억할 수 없는 인간의 부족함을 보충해준다. 수식은 엄격한 규칙을 적용함으로써 진리의 형태를 계산할 수 있게 해준다. 우리는 다양한 개념을 기호화하고 이를 수식으로 배열함으로써 다양한 진리를 발견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시청각적인 신호를 통해서 발생한다. 이러한 시각과 청각의 신호를 이용하여 기억을 보존하고 유지할 수 있는 문자와 수식이 없다면 고등한 정신작용과 지능은 지극히 찰나적으로만 존재할 것이다.


 신체기관의 ‘사이’에서는 오감과 기억이 연합되고 신호 정보를 추상화하고 방향성을 부여하는 작용이 일어나는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것이 바로 인간의 고등한 정신작용이 아닐까 추정된다. 그리고 그러한 작용 중 일부를 지능이라고 부르는 것 같다. 지능이라는 개념 자체가 근대 과학의 출현과 함께 예감, 본능, 직감 등 다른 다양한 정신적 작용과 구분하고 이상화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개념인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취사선택되는 정보가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현실 기반 증거일 때, 지능이라고 부르고, 자신의 경험을 기반으로 하면 예감이나 직감 등으로 부르는 것일 뿐 그 근본적인 작용방식이 달라 보이지는 않는다.


 신경세포를 보면서 받은 영감으로 이것저것 추론과 생각을 나열했지만 검증된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 스스로 생각한 가설들이 나름 괜찮아 보였기 때문에 보다 깊이 파고들어가고 싶었다. 하지만 신경세포 단위에서부터 연구해 올라가는 것은 앞서 설명한 것처럼 별 성과를 이루기 어려운 특히, 한국에서라면 더더욱 성과가 없을 것 같았고 그 과정도 매우 지루할 것 같았다. 


 그래서 다른 것에 흥미를 가졌다. 그것은 종합적으로 사람을 바라보고 관찰하는 것, 즉 사람의 행위와 사상에 대한 관찰이었다. 우리의 고등한 정신작용이 신체기관의 ‘사이’에 존재한다는 생각의 또 다른 결론은 추상적인 정신만을 분리해서 관찰하는 것이 어렵고 동시에 그러한 모델로는 고등한 정신작용을 온전히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즉, 뇌라는 기관이 별도로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오감과 신체의 결합이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인간의 조건에 종속되어 있다. 따라서 인간의 행위와 사상을 관찰하는 것이 바로 곧 인간을 관찰하는 것이고 인간의 고등한 정신작용을 관찰하는 것이 된다. 중요한 것은 올바른 모델을 구축하기 위한 시행착오라는 생각이었다. 또, 추후 신경에 대한 환원주의적 연구가 좀 더 궤도에 오르게 되면 스스로 발견한 것들을 그것과 맞추어 봄으로써 보다 종합적인 통찰에 도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게다가, 이항관계의 발견과 같은 인간의 구조적인 특성을 발견하다 보면 보다 추상적인 단위에서 인간의 모델을 구축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심리도 강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의 이런 생각은 철학이나 인문학에 끌리던 마음을 정당화하기 위한 생각이 아니었나 싶다. 이공계 공부에 과학철학의 도움을 받은 이후 마음이 급격히 인문학 공부에 쏠렸고, 특히 정신분석이나 인간의 본질에 대한 인문학적인 연구에 마음이 쏠리면서 이공계 공부에는 별다른 흥미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여하튼, 신경세포를 보고 인간의 정신에 대한 가설을 스스로 만들고 이를 자화자찬 하면서 그 뒤 몇년간은 인간의 사상을 관찰한다고 인문학 독서에 푹 빠진 채 점점 현실과 동떨어진 자신만의 탐구의 세계로 들어가게 되었다. 물론, 현학적인 생각만 많아졌을 뿐 스스로 만족할만한 새로운 발견이나 발전이 이루어지진 않았다.

앞의 포스팅에서는 과학과 이성에 대한 종교적인 나의 태도가 어떻게 변화했는지 이야기했다. 기존에는 객관적인 현상을 합리적인 이성으로 분석하고 수학적으로 제시한 것만 과학으로 인정하고 그 외의 것은 과학이 아닌 것으로 구분했다. 과학은 과학대로 과학이 아닌 것은 과학이 아닌 것 그대로 읽고 공부하고 향유할 수 있지만 내 기준에 과학적이지 않은 확률이나 통계, 실험식 같은 것들을 과학이랍시고 제시될 때면 무척이나 거부감이 생겨 공부를 포기할 지경에 이르렀다. 하지만 과학사와 과학철학 등의 도움으로 선입견을 깨고, 과학이 단순한 진리가 아니라 인간이 진리를 찾기 위해 최선을 다한 몸부림이라는 시각으로 볼 수 있게 되면서 그러한 거부감을 극복하게 되었다. 그 덕분에 1년 정도 후에 다시 전공 공부를 시작할 수 있게 되었는데 특히, 화학 공부를 가능하게 해주었다.

    

화학은 정말 공부하기 싫어하는 과목이었다. 수학이나 물리학 교과서에서 볼 수 있는 정합성과 아름다움을 화학에서 찾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우선 명칭부터 그렇다. 화학 교과서를 보면 화학에서 화합물에 체계적인 명칭을 부여하는 방법을 가르쳐주지만 정작 교과서에서는 그 이름을 잘 쓰지 않는다. 관습적으로 사용하던 이름들이 너무 많아서 그 이름이 혼용되어 헷갈리기 일쑤였다. 또, 법칙이나 이론 등이 제시되지만 너무 제한적으로만 사용된다. 가령, 결합을 구성하는 Octet rule이니 결합법칙이니 각종 법칙을 제시하지만 실은 잘 맞는 몇몇 화합물이 있을 뿐이고 예외는 너무 많다. 그런데 왜 예외인지는 아리송하다. 그러다 보니 공부를 하다가 이론이 이해가 된다 싶으면, 그 이론이 잘 적용되지 않는 상황을 마주치게 되고 혼란에 빠지는 과정이 반복된다. 결국, 이해를 포기하고 성적을 내기 위하여 닥치는 대로 암기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과학을 진리의 교시라고 생각하지 않고,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하나하나 구축해나가는 인간의 몸부림이라고 본다면 상황은 조금 달라진다. 수학 교과서를 보면 마치 진리의 계시처럼 정리와 증명이 나오고 예제들이 나온다. 이런 정리나 증명이 왜 필요한지는 이야기가 없다. 학생은 그냥 공부해야만 한다. 물리학은 그보다 조금 나아서 현실에서 볼 수 있는 현상을 제시하면서 그 원리를 설명해준다. 하지만 앞에 원리와 현실에서의 적용 정도를 제외하면 그 뒤는 그저 수학이다. 하지만 화학은 물리학이나 수학과 그 결이 상당히 다르다. 온갖 시행착오의 흔적이 화석처럼 곳곳에 남아있기 때문이다. 진리의 계시라고 생각하기에는 너무나 예외가 많은 이론들이 끊임없는 실패의 역사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면서도 조금 더 나은 이론이 등장하지만 과거의 이론을 완전히 폐기하지는 않는다. 어느 정도의 설명력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화학은 이런 방식인 것일까? 왜냐하면 기본적으로 복잡성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화학이 다루고 있는 복잡성은 2가지로 구분해서 볼 수 있다. 하나는 원소의 식별이고 다른 하나는 원소들 간의 상호작용이다.

   

물리학이나 수학과 달리, 화학은 원소를 식별해야 한다. 지금이야 원자론과 주기율표가 연구되고 양자역학으로 이러한 원소들을 체계적으로 식별해낼 수 있지만 화학의 여명기에는 얼마나 많은 원소가 있는지 몰랐고, 그 원소의 구조는 더 몰랐기에 원소를 식별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다. 원소를 단일한 에테르로 환원시키는 사람, 지수화풍의 4가지 원소로 귀결시키는 사람. 신이나 정령으로 해석하는 사람 등 다양한 해석이 있었고, 이 해석들을 검증할 방법이 없었기에 화학은 연금술과 같이 각종 신비가 버무려진 중구난방의 기술이 될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화학의 용어체계가 그렇게 난잡한 것은 원자론과 분자론이 나오기 이전부터 연금술, 의약 제조, 산업 같은 분야에서 기술적인 연구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각각의 분야는 재료의 출처, 관련 현상, 사용되는 목적, 형이상학적인 의미 등으로 이름을 만들어냈다. 같은 원소들이 여러 가지 다른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고 다른 원소들이 같은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리고 산업 현장의 기술은 당시의 기술을 그대로 이어받아 현대에도 쓰이는 경우가 있어서 해당 명칭을 폐기하기도 어렵다. 원소를 눈으로 볼 수 없기 때문에 오직, 현상을 통해서만 해당 원소의 존재를 유추해볼 수밖에 없다. 수소 같은 원소는 금속에 강산을 섞었을 때 나오는 폭발하는 기체로 발견되었지만 그것이 물을 만드는 원소와 어떻게 같은지 알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사람들은 특별한 현상이 있을 때마다 그 현상을 일으키는 원소를 상상하여 유추하는 식으로 원소를 식별했기에 실험방법이 발전하고 원자론이 등장하여 증명될 때까지 원소의 식별은 굉장히 많은 혼란과 함께 했다. 덕분에 화학은 연금술이나 특정 화합물을 만드는 기술의 단계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다. 

    

그 다음 복잡성은 상호작용의 복잡성이다. 원소는 분자 상태로 존재하지 순수하게 원자 상태로 존재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순수하게 탄소를 모아서 순수하게 수소원자와 결합시킬 수 없다. 따라서 화학 작용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탄소가 포함된 화합물과 수소가 포함된 화합물을 반응시켜야 한다. 가장 간단한 화합물을 합성할 때에도 불순물을 완전히 제거하기 어렵고 다양한 부산물을 같이 봐야만 한다. 거기에 용매가 되는 물질까지 고려하면 변수가 너무 많다. 그래서 약한 상호작용은 무시하고 주된 상호작용 위주로 판단할 수밖에 없다. 다양한 변수가 작용하지 않도록 실험을 하고 그 실험을 기반으로 하여 다른 화학작용을 분석한다. 이런 과정이 반복되면서 점점 화학의 이론체계가 정비되고 오늘날의 마법같은 화학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화학적 개체인 원소를 식별하고 그 원소들 간의 상호작용을 규명하려는 화학의 역사를 따라가면서 나는 화학 그 자체보다는 화학 탐구의 과정에 더 집중하게 되었다. 그리고 어떤 형식이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원소의 식별에서는 같은 것과 다른 것의 2가지 항목으로 식별이 이루어진다. 다양한 화합물이 색깔, 밀도, 질량, 상(phase), 반응 등의 다양한 요소로 분류되면서 공통점과 차이점을 찾아서 원소의 분류가 이루어지기 시작한다. 이렇게 분류된 원소들은 서로 별개의 요소로 상호작용을 해야 하는 관계가 된다. 상호작용은 원소와 해당 시스템, 원소와 다른 원소의 상호작용으로 각각의 경우도 항상 2항 관계를 기본으로 해석한다. 그리고 이러한 2항 관계가 정밀하게 파악되면 그 관계를 기반으로 하여 다른 원소와의 2항 관계를 해석하게 된다. 물론, 매우 복잡한 다수의 원소들 간의 상호작용을 분석한 경우도 많다. 하지만 이런 경우는 기본적으로 2개체 간의 상호 작용을 면밀히 파악하고 있고, 이러한 상호작용이 다른 원소들과 복합적으로 상호작용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서만 가능하다. 그리고 서로 다른 2개체가 할 수 있는 상호작용은 서로 당기느냐 서로 밀쳐내느냐는 2가지로 나뉜다. 아마도 서로 아무런 작용도 하지 않는다라는 선택지가 있다고 주장하고 싶은 사람이 있겠지만 그것은 서로 밀쳐내고 당기는 것 두 상호작용이 서로 팽팽한 경우라고 생각하면 된다.

    

2항 관계로 들여다보기 시작하니 화학만 2항 관계로 해석을 하고 있지 않았다. 물리도 2항 관계였다. 서로 다른 물질 2개의 상호 작용이 물리다. 수학도 함수에는 등호(=)나 부등호(>, >=, <, <=)가 항상 1개다. 변수가 몇 개이든 항상 두 가지 값을 비교하는 2항 관계인 것이다. 화학에서 화합물의 상호작용을 분석하는 틀은 개별 분자들 간의 상호작용을 분석하든지 분자와 전체 공정의 상호작용을 분석하든지 역시 기본적으로 2항 관계로 분석한다. 사람이 어떤 집단과의 관계를 판단하는 것도 사람과 개별 사람 간의 관계를 분석하고, 사람과 집단으로 뭉뚱그려진 사람과 관계를 분석한다. 역시 2항 관계다. 

    

그렇다면 3가지 개체간의 복합적인 상호작용을 동시에 분석하지 않는 것일까? 물리학에는 3체 문제라는 꽤나 오래된 난제가 있다. 서로 만유인력으로 상호작용하는 3개의 물체들이 매순간 상호간에 중력이 어떻게 작용하고 위치가 어떻게 되며, 앞으로 어떻게 움직일 것인지를 예측하는 문제인데, 일반적인 해법을 구할 수 없다고 알려져 있다. 2개의 물체일 경우에는 만유입력 법칙으로 간단하게 일반적인 해법을 유도할 수 있다. 하지만 3개가 되면 그것이 불가능해지는 것이다. 나는 이부분에서 수학이 2항의 형식이 아닌 3항의 형식이였으면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해보았지만 마치 4차원을 사람이 상상할 수 없듯이 3항간의 관계를 다루는 수학이라는 것을 상상하기 어려웠다. 만일, 인간이 3항간의 관계를 다루는 수학을 가지고 있었다면 과학의 양상은 지금과는 차원이 달랐을지도 모르겠다. 

    

여기서 한 가지 의심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나는 여태껏 과학자들이 발견한 것이 진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대부분 2항 관계로 지식이 전개된다. 너무 광범위하게 2항 관계가 보인다. 인간사도 대부분 2항 관계로 일어난다. 사람들의 만남과 헤어짐, 어떤 집단과 친한지 적대적인지, 남자와 여자, 어른과 아이, 하늘과 땅, 삶과 죽음 등 끊임없이 2항 관계가 전개된다. 이것은 이 우주가 2항 관계로 만들어졌다는 뜻일까? 아마도 음양론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그렇게 말할 것이다. 하지만 그 2항 관계에 의한 해석은 끝없이 해석만 있고 오류투성이에 가끔은 완전히 잘못된 해석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모든 것을 2항 관계로 환원시킨다. 하늘과 땅 사이에는 산도 있고 구름도 있고 새도 있지만 하늘과 땅이다. 남자와 여자 사이에는 다양한 성소수자와 무성, 양성이 있지만 여전히 남녀다. 마치 2항 관계로 해석해야 한다는 강박이 있는 것 같다. 2항 관계를 넘어서 보려고 해보지만 3체 문제는 일반 해를 구할 수 없고, 3항간의 관계를 다루는 방법은 상상되지 않는다. 3항은 안되는 것이다.

   

나는 이쯤에서 생각을 반전해볼 수 있었다. 세상이 모두 노랗게 보인다면 세상이 노란 것이 아니라 내 눈에 노란 물이 들거나 노란 렌즈를 착용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더 상식적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람의 지성이 닿아있는 과학과 학문 그리고 인간사까지 전부 2항 관계가 개입된다면 어쩌면 세상이 2항 구조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사람이 2항 구조로 인식하고 판단하도록 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더 타당하지 않을까? 개인적으로는 이 생각이 이치에 맞는 것처럼 느껴졌다. 때마침 신경(neuron) 관련 내용을 접할 기회가 있었는데, 인체의 신경 시스템도 좌뇌와 우뇌, 중심과 말엽 등의 2항 구조로 설명하는 것을 보면서 과학자들이 인간 인식의 구조적 특성 때문에 신경시스템을 2항 구조로 나누어 판단하는 것이든 아니면 실제로 인간의 신경시스템이 명백한 2항 구조로 설계되었든 결국 2항 구조로 수렴된다고 생각했다. 

   

아무도 증명하지 않았고 아무도 옳다고 말하지 않은 사람의 2항 구조를 혼자서 발견하고 개인적으로 확신하게 되면서 내 관심사는 과학보다는 사람과 인간에 대한 궁금증으로 반전될 수밖에 없었다. 과학이 진리의 계시가 아니라 인간이 가진 어떤 지식의 틀의 반영이라고 자각하면서 과학을 인간의 흔적인 인문(人文)으로 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원래는 인간의 오류와 대비되는 과학적 지식을 숭상해왔지만 과학 속에서 인간을 발견하니 인간에 대해 통찰하는 것이 더 근원적인 통찰을 도달할 수 있는 길로 보이기 시작했다. 덕분에 내 관심사는 과학에서 문학, 역사, 철학 등 온갖 인문학으로 뻗쳐나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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