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9 무성 모음으로 유성음 경험

 

  이제 무성 모음을 듣고 발음해 볼 차례다. 물론, 무성 모음만 듣고 말하는 것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영어나 한국어 모두 무성 모음을 음소로 사용하지 않으므로 무성 모음 자체로는 아무런 쓸모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성 모음은 우리가 자연스럽게 사용하는 유성 모음을 보다 제대로 경험하게 해준다. 그리고 나아가 모음과 자음을 구분하지 않고 한 뭉터기로 발음하고 인지하는 습관을 가진 한국어 원어민이 이를 분리해서 들을 수 있는 경험을 유도해볼 수 있다.

 

 아직, 영어 모음을 따로 공부하지 않았으니 한국어 모음으로 연습한다. 무성 모음 조음을 통해 어디까지나 성대를 쓰는 법을 스스로 자각하기 위해 연습하는 것이므로 딱히 영어 모음으로 연습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다음은 차례대로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한국어 모음 와 이를 무성음화한  그리고 마지막으로  를 발음한 것이다.

 

IPA(국제음성기호)에서 무성음화된 음을 표시할 때 아래에 작은 동그라미를 붙여 표시한다. 이러한 표시를 구별기호(diacritic)이라고 부른다.

 

 

 요령은 간단하다. 가령, 한국어로 를 발음하고 그 상태에서 입 모양과 혀의 움직임을 그대로 둔 채, 성대를 떨지 않고 발음한다. 그리고 이어서  를 발음한다.


 성대를 떨지 않는다는 것을 어떻게 하는지 모르겠다면 목이 쉬었을 때를 떠올리거나 속삭이듯 말하는 상황을 떠올리면서 연습해본다. 그리고 이 상황에서 자신이 성대를 어떻게 쓰는지 느껴본다. 자주 사용하면서 의식적으로 성대를 쓰는 법을 몸에 익힌다.

 

 무성 모음 는 앞서 본 /h/와 소리가 비슷하다. 그래서 음소 /h/를 무성 모음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이 부분은 뒤에 다시 이야기할 것이다.

 

  무성 모음 의 소리가 유사하다고 느낄 수 있지만 연속으로 발음해보면 그 차이를 느낄 수 있다. 무엇보다도 는 두 개의 소리를 이어 붙인 것을 느낄 수 있다. 말소리의 파형도 두 개의 이질적인 파형이 접해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를 통해 자음과 모음이 별도로 들리는 감각을 익혀보도록 하자.

 

 듣다 보면 무성 모음의 소리가 매우 알아듣기 어렵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유성 모음과 연달아 들을 경우 비슷하게 들리기는 하지만 개별적으로 들을 경우 전부 숨소리 정도로만 들리기도 한다. 음을 잘 들어보면 숨소리와 유성음 특유의 쨍쨍한 소리가 대비되는 것을 느껴볼 수 있다. 유성음이 소리가 더 또렷하고 더 음량이 높다는 점도 확인할 수 있다.

 

 한국어의 다른 모음 /이, 에, 애, 으, 어, 우, 오/ 똑같은 연습을 해본다. 

 

 

 

 

 

 

 

 

 

 

 

 

 

 

 

 

 

 

 

 

 

 

 

 

 

 

 

 

 

Ankilog 학습파일

 

학습용 Anki 파일은 아래와 같습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아래의 Ankilog는 소리를 구분하여 듣는 연습을 위하여 만들었으니 소리를 들을 준비를 하시기 바랍니다.



Ankilog 파일:  009 무성모음으로 유성음 경험(오디오).apkg

 

수정 : 2020-04-04 한국어에서 무성 모음과 유성 모음은 서로 이음 관계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판단하여 기존에 음소로 표시한 유무성 모음들을 이음으로 표시함. 또,  발음 수정함(Ankilog도 같이 수정함)


 

 앞서 음성학을 통해서 발음을 공부하고 이를 통하여 간단하게 성과를 본 바를 이야기했다. 처음 음성학을 공부하고 발음을 연습할 때만 해도 큰 기대는 없었다. 그저 발음을 교정하고 IPA를 읽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수준이었다. 내용이 너무 어려웠지만 Anki는 그런 점에서 강점이 있다. 조금씩 조금씩 진도를 나가도 충분히 숙련되고 전에 공부했던 내용을 까먹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게 쌓이고 쌓여서 어찌 공부를 했다. 


 원래의 조급한 성격이라면 공부를 하면서 바로바로 블로그에 올렸겠지만 이 경우에 확신이 없었다. 발음과 언어가 어떤 상관이 있을까? 하는 의문 말이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매우 큰 효과가 있을 것 같았다. Anki를 통해서 다른 공부를 할 때, 입으로 하는 말이 지식에 얼마나 큰 효과가 있는지 매번 느꼈기 때문이다. 입으로 문장을 곱씹을 때마다 그 지식을 직접 체험하는 것 같고 의미를 재발견하니 입이 내 정신에 미치는 영향이 대단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조들이 그렇게 소리내어 낭독하는 공부를 중요시 여겼나 싶었다. 또, 입으로 하는 말은 입으로 하는 행위므로 당연히 말하고 발음하는 연습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춤을 잘 추고 싶으면 몸을 움직여 춤을 춰야 하고 그림을 그리고 싶으면 손을 써서 그림을 연습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언어를 익히고 싶다면 입을 열심히 써서 언어를 익혀야 한다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나를 포함하여 발음이 형편없는 사람들이 많은데 한국어를 못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발음이 안 좋아도 한국어를 익혔고 생활하는데 전혀 지장이 없다. 그런데 굳이 발음을 연습해야 하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결국, 스스로 실행해 보면서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당연하지만 생소한 분야에 생소한 연습 과정 때문에 언어학자들의 글처럼 매우 지루하고 힘든 공부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각오했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너무 모르고 살던 분야라서 그럴까? 얻는 바가 굉장히 많았다. 


 우선, 한국어 발음이 좋아졌다. 어린 시절 치아 교정 때문인지 발음이 좋지 않았다. 게다가 자주 쓰는 발음인 ""를 ""로 발음했다. 발음 연습을 위해서 혀를 놀리고 입술을 오므리는 등 입 운동을 하면서 각종 음성기호를 발음해본다. 그리고 그 발음이 내 한국어 발음과 어떻게 다른지 확인하는 과정이 반복되면서 발전하라는 영어 발음이 아니라 우선 내 자신의 한국어 발음이 개선되었다. 안 좋은 습관을 많이 고칠 수 있었고 좀 더 또박또박 이야기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런 과정 끝에서는 ""를 ""로 발음할 수 있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발음이 교정된 것이다.


 그 다음은 어린 시절의 궁금증을 풀게 되었다. 어린 시절에 국어 교과서에 있는 표현 중에 이런 것이 있다. 


 “가 골기퍼야!”

 “가 골기퍼야!”


 “”와 “”가 서로 다른 두 문장이다. 그런데 글로 써놓으면 의미를 파악할 수 있지만 말로는 전혀 구별이 되지 않았다. 어린 시절에는 이게 항상 궁금했다. 누군가 “가”라고 말하면 그것이 “가”라고 말한 것인지 “가”라고 말한 것인지 항상 궁금했고 문맥과 행동에 따라서 의미를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내 자신도 이를 구별해서 말할 수 없었기에 결국 “가”라는 말은 피하고 “가”로 바꿔서 말했다.


 그런데 한국인의 음성 습관을 연구한 결과에서 보니 나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많은 사람들이 “”와 “”를 구별하지 못하고 또 이를 구별해서 발음할 수도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정확히는 한국에서 “”와 “”가 서로 융합되어 “”가 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더 이상 “가”를 알아듣지 못하니 “가”라고 말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실제 발음은 이렇게 되었다. 사람들이 “가”라고 말할 때는 실제 발음은 “가”다. 그리고 기존의 “가”는 보통 “가”로 바꿔서 말하게 되었다. “” 발음이 없어진 것이다. 이렇게 어린 시절 묵혀두었던 오랜 궁금증이 해결되었고 나아가서 이제는 어색하게나마 “가”라고 발음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외에도 일본어의 특이성을 배워 일본인의 발음이 왜 그런지도 알게 되었고 한글의 우수성도 새삼 절감하게 되었지만 역시 가장 중요한 것은 들리지 않던 영어가 자연스럽게 들린다는 사실이었을 것이다. 사실, 그냥 들리는 것이 아니다. 소리가 선명하게 구분되어 말을 알아듣는 느낌이 아니다. 그보다는 상대가 입술과 혀를 이렇게 써서 소리를 낸다는 것을 아는 느낌에 가깝다. 즉, 상대의 소리 내는 방식을 나도 어느새 비슷하게 따라하고 아 이 소리구나 하고 알게 되는 느낌에 가까웠다. 


 그리고 이렇게 상대의 말을 입으로 따라할 수 있다는 점은 더 깊은 공감을 끌어낸다. 조금 세게 다문 입술, 강렬한 강세와 미묘한 강세, 절도 있게 움직이는 혀와 흐느적거리면서 움직여 발음을 뭉개는 혀 등은 매우 미묘한 느낌을 전달해준다. 이런 발화의 경험은 매우 기본적인 감정 상태를 공유하게 해준다. 그런 소리를 낼 때의 심리 상태가 그 소리를 따라하는 내 자신에게서도 일어나기 때문이다. 미묘한 부분을 바로 느낄 수 있다는 점은 의사소통을 하고 있다는 확신으로 이어졌다. 영어를 들으면 아는 단어일 경우 바로 소통한다는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상대의 말소리가 내 자신의 발화 경험을 일으키기 시작하고 나서야 이제야 영어를 언어로 받아들이는 느낌이다. 이제 영어를 들어도 크게 거부감이 들지 않는다. 여전히 못 알아듣지만 예전만큼 막막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냥 단어를 알면 바로 알아듣겠구나 하는 것들이 점차 많아졌다. 이 길이 제대로된 길인 것 같다.


 이제껏 진행한 음성학 공부는 일반 언어학의 관점에서 전개된 음성학이어서 간략하고 추상적이다. 영미권에서 시작된 학문이라서 영어를 많이 사례로 올리고 있지만 그래도 영어를 익히기 위하여 필요한 사항들을 전개하는 음성학은 아닌 것이다. 하지만 발음을 시작으로 입말을 구축하고 이어서 문법으로 다듬는 공부 방식이 매우 효과적이고 빠른 길이라는 점을 어느 정도 확신하게 되었기에 이제는 제대로 영어 공부를 해보려고 한다. 다양한 예제와 사례, 숙달을 위한 훈련 과제 등을 활용하여 지금까지의 맛보기식 간단한 연습이 아니라 숙련된 영어 사용을 위한 훈련을 해보려고 한다. 다음부턴 Ankilog로 올릴 수 있도록 하겠다. 



 국제음성기호(IPA)는 이상한 도표와 기호들로 범벅되어 읽기조차 어려웠다. 위키류를 검색해보아도 어렵긴 매한가지였다. 한글로 적힌 전문용어라고 쉽진 않았다. 첫 느낌은 난데없이 양자역학 수식을 푸는 정도의 난이도였다. 잠시 모든 생각을 내려놓고 심각하게 고민했다. 정말 이런 공부가 필요할까?


 수십 년간 쌓여온 영어가 필요하다는 결핍감, 영어에 대해서 감을 잡았을지도 모른다는 애매모호한 기대감, 어차피 할 일은 없고 영어가 필요하다는 현실적인 사정 등이 없었다면 그 자리에서 포기했을 것이다. 하지만 영어가 너무 필요했기에 마음을 다잡고 자료 찾기에 몰두했다. 그리고 그렇게 언어학을 접하게 되었다. 


 엄밀하게 말하면 언어학이 아니라 언어학 중 음성학 파트였다. 일단, 언어학 개론서를 하나 집어서 음성학 부분만 읽어보기 시작했다. 여기서 읽었다는 것은 외웠다는 뜻이다. 언어학의 난이도는 너무 매우 지나치게 높아서 아무리 읽으려고 해도 읽히지 않는 수준이다. 전문용어도 어렵지만 언어현상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외국어의 언어 현상은 아무리 읽어도 이해하기 어렵고 와 닿지 않는다. 반면, 우리말의 언어 현상을 글로 읽고 이해하려는 것도 힘들었다. 입에서 잘 튀어나오는 말을 구태여 분석까지 하고 싶진 않다는 마음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언어학 관련 책을 읽고 있으면 자꾸 튕겨 나간다. 집중력이 유지되지 않고 그만 읽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아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Anki에 넣어서 싹 외워버렸다. 보통은 이해를 하고 외우는 경우가 많지만 이처럼 인연 맺기 힘든 학문은 부득이한 경우 외워서 이해하는 방법을 선택하는 편이 오히려 빠르다. 


 그렇게 하나를 외워서 기초를 닦았지만 뭔가 미진했다. 그래서 다른 책을 외웠는데, 앞서 외운 책과 내용이 다르다. 그 다음 책도 앞의 두 책과 내용이 서로 달랐다. 대혼란이었다. 상당 시간 동안 혼란에 빠졌고 이 혼란을 극복하기 위해서 여러 책들을 봐야만 했다. 덕분에 음성학 공부를 어렵게 하는 몇 가지 난관을 알게 되었다.


 우선, 유럽과 미국의 관계가 문제가 된다. 국제음성기호(IPA)는 유럽에서 영어의 소리를 표시하기 위해 시작되었다. 하지만 미국의 학자들은 국제음성기호를 무시하고 자신들이 사용하는 음성기호를 따로 만들었다. 이를 미국음성기호(APA : American phonetic Alphabet)라고 한다. 국제음성기호와 미국음성기호의 모양이 다르기 때문에 처음 음성학을 펼쳐 든 사람들은 서로 다른 기호에 혼란스럽지 않을 수 없다. 현재는 국제음성기호가 대세로 사용되는 것 같지만 여전히 많은 미국음성기호가 사용되고 그 외에 국내 사전의 발음기호 같은 다른 기호들도 같이 사용되고 있어서 초학자들은 혼란을 피하기 어렵다.


 또 다른 문제는 음성기호의 한계다. 음성기호는 모든 소리를 표시할 수 없다. 한국 사람들이 동일한 언어를 써도 말소리가 미묘하게 다른 것처럼 무한에 가까운 다양한 음성을 기호 몇 개로 표시할 수 있을 리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음성기호는 입술과 혀의 위치, 성대를 울리는지 여부, 얼마나 길게 소리를 내는지, 소리를 내는 방식 등으로 말소리를 정의한다. 


 가령 영어의 /t/에 해당하는 음은 혀끝을 윗잇몸에 대고 성대를 진동시키지 않는 상태에서 소리를 파열시키는 소리다. 이렇게 하면 사람들마다 /t/ 음이 조금씩 다르지만 서로 알아듣는데 전혀 문제가 없게 된다. 그런데 한국 사람들에게 이런 발음을 하라고 하면 /t/가 아닌 /ㅌ/이 된다. 분명히 소리도 비슷하고 서로 알아듣는데 문제가 없지만 한국인은 /t/ 발음을 외국인의 버터 발음으로 느끼고 외국인은 한국인의 /ㅌ/을 한국 특유의 영어 발음이라고 생각한다. 즉, 서로 이질적으로 느낀다. 왜 그럴까? 이는 한국의 /ㅌ/ 음은 윗잇몸에서 이빨에 가까운 아래쪽에 혀를 대고, 영어의 /t/ 음은 그보다 조금 위에 혀를 대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어의 /t/ 소리는 좀 더 혀를 굴리는 소리가 되고 한국어의 /ㅌ/은 좀 더 혀를 곧게 뻗는 소리가 된다.


 영미권에서 번역된 음성학 책들은 주로 자신들의 영어 음성을 위주로 기술되기 때문에 이런 미묘한 차이를 발견하지 않는다. 오직 한국어를 베이스로 영어를 익힐 때의 발성 차이를 연구한 경우에만 이런 미묘한 차이를 찾아낸다. 이런 문제로 인하여 영어권에서 소개한 음성학 관련 책들이나 이를 참고한 책을 읽으면 오히려 굉장히 한국적인 발음을 익히게 된다. 다른 언어를 모국어에 가깝게 이해하려는 모국어 함정으로 인하여 영어의 발음을 한국어 발음으로 이해해버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확한 발음을 익히려면 한국어의 발음 방식과 영어의 발음 방식의 차이를 분명하게 구별해주는 책을 찾아야 한다.


 그 외에도 범람하고 있는 음성과 발음 관련 교재들이 너무 많다. 영국식 영어, 미국식 영어로 나뉘어서 발음을 가르치기도 하고 최근에는 변형 훈민정음을 이용한 발음연습까지 나와서 무얼 읽고 따라야 할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내 경우는 이것저것 참고하다가 이화여자대학교 오은진 교수의 『외국어 음성 체계』라는 책의 1장을 중심 텍스트로 삼았다. 이는 다른 이야기를 하는 국내 국어학자가 쓴 음성학 책과 미국의 언어학자가 쓴 음성학 책 등에서 음성학 파트를 전부 외우고 비교해서 선택한 것이다. 책들이 전개하는 서로 조금씩 다른 이론을 판단할 방법이 없었기에 유튜브 등에서 실제 발음하는 시청각 자료들을 보고, 내 스스로 서로 다른 책들의 방식에 따라 발음 연습을 하면서 비교하여 판단했다. 그 결과  『외국어 음성 체계』 1장의 내용이 내 발음이 왜 이모양이고, 저 외국인은 왜 제대로 발음하지 못하는지를 매우 명쾌하게 보여주었기 때문에 이 책을 영어 음성학 공부의 기준으로 선택했다.


 혹시나 해서 덧붙이면  『외국어 음성 체계』라는 책은 음성학 관련 다른 연구를 하는 책이다. 발음을 친절하게 알려주는 책이 전혀 아니다. 게다가 매우 재미없다. 이 책의 1장은 기존의 음성학에 관련된 논의들을 축약하고 있는데, 그 내용은 정말 좋지만 정말 재미없고 읽기 힘들다. 짧은 경험상 언어학자가 쓴 글에서 재미있는 글은 없었던 것 같다. 어쩌면 언어학자들은 글을 재미있게 쓸 수 없다는 보편원칙을 설정해도 좋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언어학자들은 글을 재미없게 쓰는 것 같다. 그런 언어학 관련 책들 중에서도 손에 꼽힐 정도로 『외국어 음성 체계』는 재미없다. 거의 실험보고서에 가깝고, 1장도 정말 축약에 축약을 거듭한 내용이라서 전혀 친절하지 않다. 그런데 무슨 인연인지 도서관에 갈 때마다 눈에 띄여서 읽어보고 덮기를 수십번은 반복하게 되었다. 결국, 읽기를 포기하고 Anki에 집어넣어 외워버렸다. 외울 때는 주로 중요한 문장 위주로 정리해서 외우는데 어찌나 축약을 잘 하셨는지 거의 토씨하나 빼지 않고 다 외워야 했다. 비록, 이 책과 인연이 닿아서 1장만 외우게 되었고 이로 인하여 이 책의 1장을 음성학 교재로 추천하고 있지만 읽기가 녹록치 않다는 점을 다시 말한다. 



 영어 발음을 어떻게 익혀야 할까? 라고 인터넷에 질문하면 IPA가 나타난다. IPA는 국제음성기호(International Phonetic Alphabet)인데 소리를 표시하기 위한 알파벳이라고 할 수 있다. 영어 단어를 사전에서 찾으면 붙어있는 발음기호 같은 것이다. 그런데 이 IPA가 처음 생긴 이유가 재미있다. 영어를 글로 옮겼을 때의 알파벳과 발음이 크게 달라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음성 기호를 만든 것이 시작이다.


 영어의 역사에서 이 문제는 매번 지적된다. 영어 사용자가 여러 지역에서 급격하게 늘어나면서 언어가 변형되기 시작했다. 방언이 발달했고, 외래어들이 그대로 영어 단어로 유입되어 변천되면서 철자는 그대로 남고 발음이 변형되거나 발음은 남고 철자가 변형된다. 단어의 철자와 발음을 통합하고 정리하려는 노력이 중간 중간 있었지만 대세에는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했고 오히려 또 다른 변형된 철자와 발음을 만들어내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했다. 그래서 일부 언어학자들은 영어가 표의문자화 되었다고 생각한다. 알파벳을 말소리 그대로 읽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이기 때문에 영어권 사람들이 영어권 사람들을 위하여 출판한 문법책들을 보면 철자(spell)를 쓰는 것에 대한 이야기가 반드시 나온다. 하물며 오랫동안 출판 교정을 담당하는 사람들의 수기를 읽어봐도 철자를 제대로 쓰지 못하고 틀린 이야기들이 심심찮게 나온다. 그래서 영어 사용자들도 자신들의 언어가 너무 복잡하고 이상하다고 말한다. 


 중고등학교 때가 생각난다. 영어 단어는 철자(spell)만 보고 발음할 수 없어서 발음 기호를 따로 봐야 했다. 쓰는 법과 읽는 법이 달랐다. 어쩌면 그냥 외우면 될 일이지만 당시의 나는 이 불일치가 너무 불편하고 짜증났다. 이건 나만 그런 것은 아닌 것 같다. 친구들 중에는 영어 읽는 법을 자기 식으로 바꿔서 읽는 친구도 있었다. 어차피 시험에는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그 친구는 좋은 성적으로 승승장구하다가 영어 듣기 시험이 중요하게 대두되면서 영어 공부를 손 놓게 되었다.


 그런데 이런 발음과 알파벳의 불일치 때문에 영어권 사람들은 글을 쓸 일이 없다면 입말 위주로 편한 단어를 써서 의사소통을 한다. 철자는 따로 공부해야 하니까, 역시 쓰기 편한 단어들 위주로 쓴다. 이들이 철자를 공부할 필요를 느끼는 경우는 그야말로 제대로 글을 쓰거나 연설을 하려고 할 때이다. 이런 상황이기 때문에 영어권의 문맹률도 상당히 높게 나온다. 그런데 우리는 정반대다. 영어 발음은 입으로 한두 번 굴려보지만 그것보다는 철자가 더 중요하다. 그래서 조금 영어공부 했다고 하는 이들은 철자를 틀리는 경우는 거의 없다. 영어권 사람들은 입말을 위주로 익히고 한국인들은 글 위주로 익히는 것이다. 간혹 유튜브를 볼 때, 영어권 사람들이 한국 수능 문제를 풀면서 어려워하는 경우가 발생하는 이유도 자신들이 쓰는 영어에서 잘 안 쓰는 단어들 위주로 나오기 때문이다. 그들 입장에서는 난이도를 높이기 위하여 난해한 글 위주로 익히는 한국의 교육 문화가 이상할 것이다. 언어 그 자체가 아니라 시험 성적을 위한 언어 공부라는 변종이기 때문이다.


 영어의 발음과 철자의 불일치는 나 같이 이런 사소한 불일치를 거슬려 하는 사람에겐 큰 장애였다. 분명히, 표음문자라고 들었는데 왜 소리와 철자가 일관되지 않을까? 한글처럼 비슷해야 하지 않은가? 등으로 생각하면서 궁금해 했다. 그리고 매번 영어공부를 할 때마다 발음과 철자 사이에 내재된 원리를 찾기에 바빠 정작 영어 공부는 등한시했다. 이해할 수 없고 해결할 수 없는 수수께끼 때문에 영어를 아무리 공부해도 근본적으로 이것은 이해할 수 없는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단지, 시험을 위해서 숙련시켰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공부하고 20년 가까이 지나서 그 때의 의문을 풀게 되었다. 원어민들도 영어를 쓰면서 이런 불편함을 겪고 있고 철자를 발음하는 무슨 규칙이 있지 않고 그저, 복잡하게 섞여버린 잡탕이라는 점을 깨달아서 불편함이 사라진 것이다. 


 IPA와 관련된 영어 역사를 살펴보면서 영어 훈련의 방향 하나를 깨닫게 되었다. 그건 우선 이해하기 어려운 철자(spell)를 제거하고 모든 단어를 음성기호로 바꿔서 훈련하면 철저히 입으로 하는 영어를 구축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아이디어였다. 생각해보면 매번 글로 쓰여진 영어 위주로 학습을 하기 때문에 발음을 제쳐두고 눈으로 알파벳 영단어를 보게 된다. 발음이 같아도 글자가 다르니 그냥 별 생각 없이 단어를 구별한다. 리듬과 액센트도 고려할 필요가 없다. 의미단위로 분절되어 있는 단어를 하나하나 분석하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 말소리는 이어져 있고 변형된다. 이를 전부 음성기호로 표시하면 의미단위가 아니라 소리단위로 영어를 볼 수 있을 것이고 이에 익숙해질 수 있다. 게다가 이럴 경우 원어민들조차 질색하는 철자에서 오는 혼란을 겪을 이유가 없게 되기 때문에 학습 효율도 높아지게 된다. 


 일단, 괜찮은 생각으로 보였다. 어떤 언어든지 입말이 언어의 주를 이루고 글은 입말을 다듬고 형식화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치상 입말 위주로 공부하는 방식이 옳고 제대로 가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이미 문법과 철자에 능숙한 사람이라면 입말만 트여도 기존의 수험식 영어 공부를 통해 머리로만 알던 지식들도 입으로 능숙하게 옮길 수 있게 될 것으로 기대되었다. 이 아이디어는 나를 고무시켰다. 어쩌면 무척 재미있는 결과를 이끌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몸을 달아오르게 했다. 


 아이디어에 고양되어 IPA의 도표를 들여다보았다. 하지만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기괴한 전문용어의 향연과 이해할 수 없는 도표 그리고 이상한 기호들이었다. 이해해보려고 끙끙대면서 읽어보지만 이해할 수 없다는 점만 확신하게 만들어주는 도표였다. 막다른 골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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