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엔 최면(hypnosis)에 대해서 간단히 이야기해보자. 최면도 인간의 정신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시사해주는 바가 많기 때문에 꼭 한번 들여다볼 필요가 있는 분야라고 생각한다. 아마도 최면이라고 하면 정신을 잃은 사람이 최면술사에게 조종을 당하는 장면이 떠오를 것이다. 평소라면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에 답하거나 무척 오래된 과거를 생생하게 기억하게 하거나 이상한 행동을 하게끔 하는 무언가 신비하고 것이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최면이다.


이러한 최면을 통하면 사람들을 마음껏 조종할 수 있을 것 같다. 가령, 특정 암시를 심어놓으면 신호에 맞춰서 다른 사람을 암살하게 한다거나 기밀을 빼돌리게 하는 등 사람을 도구로 쓸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해준다. 실제로 이러한 내용을 전개한 영화나 드라마도 상당수 있다. 그런 영화나 드라마를 볼 때 꼭 생각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나는 최면에 걸리지 말아야 하면서 속으로 최면을 걸리지 않을 방법을  강구해본다. 혹은, 최면에 걸린 척 하면서 적의 음모를 분쇄하는 것을 떠올려보기도 한다.


다행히,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이는 최면은 어떻게 도망갈 방법이 있을 것 같다. 가장 먼저는 최면술사를 경계하는 것이다. 실수로 최면술사의 음모에 빠지게 되면 최면으로부터 저항하면 될 것 같다. 가령, 최면을 걸 때는 일정하게 깜빡이는 빛이나 주기적으로 운동하는 진자 같은 것을 보게끔 하는데 그럴 때 눈치채고 보는 척 하면서 실제로는 그것을 보지 않는 것이다. 그러면서 최면에 걸린 것처럼 말없이 그것을 바라보는 척 하면, 최면술사가 이제 나를 유도하려 할 것이다. “몸이 이완됩니다. 몸이 편안해집니다.”와 같은 목소리가 들려오면 그에 맞추어 실제로 그렇게 느끼는 척 하면 최면술사를 속일 수 있을 것 같다. 여튼, 최면의 존재를 모르고 멋모르고 휘말릴 수는 있어도 최면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것을 경계하면 최면에 걸리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완전히 속수무책으로 당하지는 않을 것 같아 다행이다.


하지만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최면은 무대 최면의 일종이라고 한다. 즉,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하는 최면이다. 이러한 방식의 최면은 매우 오랫동안 있어왔고 조금 정형화된 최면의 방식이다. 최면은 무대에서만 사용되는 것이 아니다. 이미 프로이트 시절부터 심리치료의 방법으로 사용되었고 보다 나은 치료를 위하여 최면에 대한 연구는 계속 진행되어왔다. 당연히 그 이론이 정밀해지고 기술이 발전해왔다. 현대에 와서 밀턴 에릭슨 같은 사람들로 인하여 최면은 정형화된 형식을 벗고 그 근본적인 원리를 응용하여 일상적으로 다양한 분야에서 그것을 응용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현대의 최면은 보통 데이브 엘먼이 정의한 아래의 내용과 같이 소개된다.


“의식의 비판적 사고를 우회하여 받아들일만한 선택적 사고를 확립하는 것”


세상은 다양한 메시지를 보낸다. 메시지는 선언이 될 수도 있고, 정보가 될 수도 있고, 의견이 될 수도 있다. 공통적인 것은 그러한 메시지가 수용되면 그대로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가령, 사과를 손에서 놓으면 땅에 떨어질 것이라는 새삼 당연한 정보를 수용하게 되면, 그 때부터 이 정보에 어긋나는 것은 다른 카테고리에 묶이게 된다. 현실에서 누군가 사과를 손에 놓아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한다라고 주장한다면 거짓말이라고 여길 것이다. 그게 가능하다는 것을 보이기 시작하면 속임수가 있다고 믿거나 그것을 설명하기 위하여 엉뚱하게도 염동력이라는 것을 설정할 수 있다. 요컨대 받아들여진 진실은 최대한 고정되고 그 외부를 수정하게 된다. "개인의 인권은 존엄하다."라는 선언을 수용하게 되면, 개인의 인권을 침해하는 모든 행위에 대해서 비판하고 그것을 제거하기 위해 노력하게 된다. "회사원은 회사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해야 한다."라는 선언을 수용하게 되면 회사를 위하여 열과 성을 다하여 일하게 될 것이다. 메시지가 개인에게 수용되는 순간부터 메시지는 그 개인의 세계관, 가치관에 영향을 미치고 그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는 압력을 받게 된다. 따라서 이러한 메시지가 사람들 속에 아무런 여과없이 들어오게 되면, 사람들은 수많은 메시지 속에 매몰되어 버릴 것이다. 따라서 이것을 여과해줄 필터가 필요하다. 


메시지를 여과해주는 필터가 바로 의식의 비판적 사고다.  이 비판적 사고는 사려깊은 숙고를 통해서 작동할 수도 있고, 단순히 슬쩍 보고 거부하거나 수용하는 본능적이고 직관적인 판단이 될 수도 있다. 의식의 비판적 사고의 수준이 어떻게 되었든 간에 개인의 상황과 맥락, 사회문화계급적 상황, 가치관, 세계관 등에 따라서 결국, 해당 메시지를 수용할 것인지 거부할 것인지 결정하는 과정을 통해 개인은 자신을 사회적 메시지로부터 적절하게 보호하고 일관성과 개성이라는 것을 만들어 나간다. 


의식의 비판적 사고라는 용어는 무척 합리적인 사고인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앞서 이야기했듯이 그 비판적 사고의 수준은 깊은 숙고에서 본능적이 직관적인 판단까지 천차만별이다. 그리고 그 비판적 사고라는 것은 개인의 입맛대로 바꿀 수 있는 그 무엇도 아니다. 오히려 내부로부터 그냥 그대로 나오는 우리 자신 그 자체다. 그래서 자기 파멸적인 메시지만 수용하는 사람은 자신이 한심하거나 못난 사람이라는 메시지를 적극적으로 수용한다. 인종차별주의자는 인종차별의 정당성을 말하는 메시지를 적극 수용한다. 또, 다이어트를 하는 사람은 해당 음식을 먹으면 안된다고 스스로를 비난하면서 그것을 먹어야할 정당한 이유를 찾는 등 분열된 메시지를 수용할 것이다. 


이러한 비판적 사고를 우회하는 까닭은 최면이 보통 그 사람이 자연스럽게 당연히 하는 것들을 하라고 권유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보통이라면 하지 않을 일을 하게끔 하는 도구이기 때문이다. 특히, 우울증 극복, 다이어트, 편식하는 습관 교정 등에서는 개인의 비판적 의식이 장애물로 작동하는 경우가 있다. 즉, 자기 파멸적인 메시지만 수용하는 사람이 긍정적이 되려고 노력하는 상황을 생각해보자. 그는 여기저기서 들은 내용들을 실천해볼 수 있다. 햇빛을 본다거나 규칙적인 생활습관을 하고, 긍정적인 관계를 만들고 등등 여러가지를 수행할 것이다. 하지만 본인의 비판적 의식이 자기 파멸적인 내용을 주로 메시지로 수용하기 때문에 습관적으로 자신을 비난하고 우울해질 근거를 찾게 된다. 당연히 그런 계획들을 실천하는 것이 어리석어 보이고 불필요해 보이게 된다. 하지만 주위에서 자신이 변하길 원하는 사람들 때문에 억지로 흉내를 내게 된다. 하지만 본인이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니 성공할 수 없다. 계획한 긍정적인 습관은 계속 좌초되고 그 좌초됨으로 인하여 다시 절망하는 과정이 반복되면서 오히려 더 상황이 심각해질 수 있다. 이런 경우 그 비판적 의식이 문제가 되므로 을 우회해서 긍정적인 메시지를 주입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선택적 사고는 메시지 그 자체를 확고하게 굳히는 것을 말한다. 보통, 비판적 사고를 우회하면 메시지가 수용된다. 하지만 비판적 사고가 아니더라도 메시지가 온전히 수용되는 것을 방해하는 요소들이 있다. 만일, 최면을 통하여 우울증 환자에게 긍정적인 메시지를 수용시킨다 하면, 일시적으로는 기분이 좋아지겠지만 본인을 한심하게 생각하고 비난하는 성향과 충돌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리고 보통은 기존의 성향이 다시 튀어나오면서 긍정적인 메시지를 지우게 된다. 따라서 긍정적인 메시지를 수용시키면서 기존의 부정적인 메시지를 무시하게끔 만들어야 한다. 즉, 우리가 현실에서 자신이 원하는 것만 보고 원하지 않는 것은 무시하게 하는 확증편향적 사고를 선택적 사고라고 하는데, 그러한 확증편향이 발생하여 부정적인 메시지를 무시하게끔 만들어야만 그 최면에 의해서 심어진 긍정적인 메세지가 온전히 역할을 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최면은 심은 메세지에 대한 믿음을 구축하여 선택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선택적 사고를 확립함으로써 이루는 것이다.


그렇다면 현대 최면은 어떻게 이루어질까? 보통은 우리가 흔히 보는 것처럼 피시술자의 의식이 마비되는 트랜스 상태를 유도하여 원하는 선택적 메시지를 심는다. 즉, 무대최면에서 자주 보는 것과 유사하다. 그런데, 최면에 잘 걸리지 않아 트랜스 상태로 유도하기 어려운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은 예전이라면 최면을 걸 수 없었겠지만 현대 최면은 구태여 트랜스 상태를 유도하지 않고 말 그대로 의식을 우회하여 메시지를 심으려고 한다. 


의식이라는 것은 한 번에 하나만 집중할 수 있다. 의식의 초점 아래에 있는 것이 의식의 대상이 되고 그 외의 다른 정보는 배경으로 받아들이지만 전체적으로는 하나만 대상이 된다. 소매치기들은 한 번에 한 가지만 의식할 수 있는 인간의 속성을 이용한다. 보통 두 사람이 한 팀이 되어서 소매치기를 한다. 한 사람이 목표가 되는 사람과 먼저 부딪히거나 시비를 붙어서 그 사람의 주의를 끈다. 사람의 의식은 한 번에 한 가지만 처리할 수 있으므로 시비를 붙거나 강하게 충돌할 경우 모든 주의가 시비를 붙은 사람이나 충돌에 쏠리게 된다. 그 때, 다른 사람이 몰래 다가가 지갑을 집어간다. 평소라면 소매치기가 지갑을 집어가는 것을 의식했을 테지만 주의가 다른 것에 쏠려있기 때문에 그것을 거의 눈치채지 못하거나 뒤늦게 눈치채게 된다. 


현대 최면의 방법은 소매치기들보다 교묘하게 의식을 우회하여 메시지를 심는다. 가령, 낮은 자존감과 자기 비하에 빠진 사람에게 위로를 하면서 “당신은 착하고 훌륭한 사람입니다.”라고 이야기한다면 보통 자학에 빠진 사람들은 그 말을 빈말이나 거짓말로 여기면서 부정할 것이다. 하지만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반복해서 들려준다면 어떨까? 밑줄을 친 부분을 이야기할 때마다 탁자를 두드리거나 손바닥을 치면서 자연스럽게 강조하면서 말한다.


당신은 1990년에 착하고 훌륭한 부모님 밑에서 태어난 사람입니다.”


표면적인 메시지는 이 사람의 부모님이 착하고 훌륭하다는 것이므로 이 사람이 부모님을 좋아한다면 이 것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잠재적인 메시지는 “당신은 착하고 훌륭한 사람입니다.”이다. 이 사람의 의식은 표면적인 메시지에 주목하여 그것에 집중하지만 잠재적인 메시지는 의식을 우회하여 그에게 전달된다. 의식이 마비되는 트랜스 상태를 유도할 수 없으므로 효율이 좋지는 않지만 반복을 통하여 의식을 우회하는 메시지를 계속 전달할 수 있다. 성공적으로 메시지가 전달되면 그 사람은 약간의 자존감 회복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것은 무척 단순화된 설명이다. 


이제 현대 최면의 정의를 살펴보았고, 현대 최면의 정의를 통하여 의식이 마비되는 트랜스 상태가 아닌 상황에서도 최면이 어느 정도 가능함을 간단하게 단순화하여 설명해보았다. 그런데 이러한 현대 최면에 대해서 살펴보니 영감을 자극하는 바가 있다. 의식을 우회하여 전달되는 메시지라는 것이 과연 최면만 있는 것 같지 않고 의식과 수용이라는 주제도 매우 흥미롭다. 무엇보다도 기존에 생각하고 있던 최면에 저항하는 방법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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