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문을 뗐다.


2019년 2월 8일에 천자문의 첫 포스팅을 올리면서 시작했고, 7월 17일에 마쳤으니 대략 반년이나 걸린 셈이다. 초등학생도 아니고 지긋한 나이가 돼서 천자문을 뗀 것이 무슨 자랑이겠느냐마는 그래도 마음이 쫄깃쫄깃한 것인지 싱숭생숭한 것인지 벅찬 것 같기도 하고 속이 시원한 것도 같다.


요즈음 같아서는 한문을 쓰는 경우도 많이 줄어서, 공부하는 사람이 많지 않겠지만 30년 전만 해도 한문은 꼭 뛰어넘어야 할 관문이었다. 그리고 그 시절 나는 절대로 그 관문을 넘지 못할 사람 중 하나였다. 다행히, 나만 그러한 관문을 뛰어넘지 못한 것은 아니어서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지만, 간혹, 천자문을 떼고 오는 친구들이 종종 있었다. 그리고 예외 없이 공부를 잘했던 것 같다.


그 시절 열심히 공부하는 친구들을 봐도 그랬고, 옛 이야기도 그렇고 무협지에서까지 모두 천자문으로 공부를 시작한다. 천자문은 문맹탈출의 기본이었고, 한자로 이루어진 학문의 시작이었다. 그쪽 공부를 한다고 하면 “천자문은 떼었냐?”라는 질문이 기본이었다. 따라서 천자문은 당연히 떼었어야 할 그 무엇이었다.


주입식 교육이 강조되던 어린 시절에도 천자문을 외운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무려, 1000자다. 천자를 외운다는 것은 어린 아이들에게 끔찍하게 어렵고 힘들어 보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 천자문은 한문 공부의 서두에 그 존재감만으로 많은 학생들을 좌절시켰다. 나 또한 당연히 1000자를 외워야 한다는 말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바로 그 자리에서 공부를 포기했다. 


그런데 이제 천자문을 모두 외웠다. 불현듯, 있는지도 몰랐던 어린 시절 가졌던 소소한 열등감이 나타났다가 해소되었다. 또, 천자문을 외울 수 없다고 믿었던 내 자신을 극복한 것에 대한 자긍심도 살짝 그 모습을 드러낸다. 아! 드디어 다 외웠다. 가슴이 살짝 벅차다.


천자문을 끝내서 가슴이 벅찬 것은 성취감도 있지만 그것보다는 천자문을 외는 것이 생각보다 너무 힘든 경험이었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을 끝마쳐서 너무 행복한 것도 있다. 힘들었다.


물론, 글자 하나하나를 익혀서 1000자를 익힌다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다. Anki는 그런 것에 잘 특화되어 있고, 시간이 걸릴 뿐, 차례대로 익히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럼 뭐가 어려웠을까?


일단, 천자문의 해석이다. 천자문의 해석을 책이나 인터넷에서 열심히 뒤져서 정리하다 보면, 이해할 수 없는 해석들이 중구난방인 경우가 너무 많다. 그리고 그러한 해석들이 솔직히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너무 확대해석하거나, 납득하기 어려운 해석도 종종 보이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스스로 해석하자니 아는 것이 너무 없다. 결국, 입으로 되뇌어 보면서 가장 적절해 보이는 최소한의 해석을 선택했지만 이 과정에서 상당한 좌절을 느끼게 되었다. 


두 번째는 천자문을 순서대로 외우는 것이다. 그냥 1000자를 외울 것이었으면 천자문을 외울 필요가 없다. 그냥 시중에서 “실용한자 1800자” 같은 것을 사서 외우면 될 것이다. 천자문을 공부하는 이유는 그 1000자를 모두 이어 하나의 거대한 글을 만들기 때문이다. 즉, 1000자를 순서대로 외우고 그 의미를 바로바로 생각하고 떠올릴 수 있게 해야 천자문을 공부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천자문을 공부하면 난이도가 무척 높아진다.


대략 400자까지는 순탄하게 외웠던 것 같다. 하지만 그 이후부터는 늘어나는 구절의 부담감이 켜켜이 쌓이기 시작했다. 매일 8글자 1구절이 늘어나면서 한 번에 전체 구절을 떠올리는 것이 점점 어려워졌다. 


옛날에 읽었던 책에서, 닌자들이 높이뛰기 위하여 나무를 심어놓고 그 나무를 매일 1000번씩 넘었다는 이야기를 본 적이 있었다. 그 나무가 높게 자라면서 닌자들의 높이뛰기도 같이 높아져 결국, 집도 뛰어넘을 수 있을 정도로 높게 뛸 수 있게 된다는 식의 이야기였다. 


천자문을 외우는 것은 이 높이뛰기 훈련과 비슷했다. 매일 암송하는 구절 1개가 늘어나면서 매일 한 번에 외울 수 있는 뇌용량을 조금씩이나마 늘리는 느낌이었다. 그렇다. 정말 수련을 하거나 운동을 하는 느낌이었다. 매일 한계 돌파를 하는 그런 운동 말이다. 덕분에 처음에는 천자문 포스팅과 다른 포스팅을 같이 블로그에 올렸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다른 포스팅은 전혀 못 올리고 천자문만 올리고 헉헉대기 일쑤였다. 솔직히, 블로그에 계속 올리는 것 아니었으면 천자문을 이렇게 빨리 끝내지는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또 천자문을 암기하면서 이런 생각도 들었다. 선조들이 천자문 공부를 꼭 처음에 시켰던 이유가 한자를 교육하는 목적도 있겠지만 그것보다 1000자를 외우고 떠올릴 수 있는 긴 호흡의 정신력과 암기력을 구축하여 공부의 기초를 다지기 위해서 이런 교육을 진행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었다. 내 스스로도 천자문을 외우면서 내 한계에 계속 부딪히는 고통을 맛보았고 덕분에 내 자신이 가진 정신적 근력이 늘어나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아마도, 초등학교 시절에 외웠으면 상당한 정신적 체력이 붙어서 이후 공부에 큰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천자문을 외우는 과정은 상당히 힘들고, 현실적으로 대단히 유용한 것은 아니어서 다른 사람들에게 도전해보라고 말하기는 어렵게 느껴진다. 그렇지만 해내면 상당한 성취감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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