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ki로 문장 암기하기 6 한계 봉착
문장 암기는 정말 좋은 공부다. 글을 통째로 외우면 그 저자와 일치되는 충만한 경험을 할 수 있다. 당연히, 내면적으로 충만해지고 글에 대한 이해도 훨씬 깊어진다. 요즘, 책을 베끼는 필사를 추천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필사보다 암기가 더 풍부하고 깊은 독서를 경험하게 해준다. 물론, 암기가 필사보다 훨씬 고생스럽다.
암기는 어렵다. 암기하라고 하면 그 동안 지겨웠던 온갖 공부가 떠오를 수 있다. 하지만 일단 조금씩 익숙해지면 꽤나 빨리 암기력이 늘어나고 거부감도 줄어든다. 시험공부가 아닌 자기 자신의 공부를 위하여 맛을 들이기 시작하면 그 생생함과 깊은 이해에 중독될 수 있다. 물론, 그렇게 문장을 곱씹어 가면서 공부는 정말 배움 그 자체를 위한 공부인데 할 수 있는 사람은 많을 것 같지는 않다.
글을 곱씹기 시작하면서 독서 방식이 바뀌어 버렸다. 이전 독서 방식은 디테일보다는 글의 큰 흐름을 따라가는 식이었다. 그 만큼 대강대강 읽기에 정말 가볍고 빠르게 책을 읽었다. 300페이지 정도의 책을 기준으로 말하면 통속소설은 45분 정도면 읽었고, 조금 진지한 책이면 3시간 정도면 읽었다. 그저 큰 흐름을 따라가면서 읽는 독서 스타일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경우다. 그런데 이제는 문장 하나하나를 외울 때까지 곱씹는다. 곱씹으니 디테일이 하나하나 생생하게 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디테일에 숨어있는 세세한 지식과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느낌 등을 전부 누린다. 빠른 독서는 책을 빠르게 곁눈질 하게 해준다. 덕분에 흥미가 가는 분야를 재빠르게 읽어보고 호기심을 충족할 수 있다. 하지만 남는 것이 많지 않았다. 실은, 남는 게 없는지도 몰랐다. 대부분 지적인 허영심과 자랑하고 싶은 마음 마지막으로 호기심을 채우기 위한 독서였다. 그런데 곱씹어 외우고 되새기니 더 이상 가볍고 빠른 독서를 하지 않게 되었다. 남는 것이 없다는 생각에 시간 낭비라는 생각이 들고, 그렇게 읽을 시간에 한 구절이라도 더 곱씹고 싶기 때문이다.
물론, 책을 읽으면서 바로 곱씹지는 않는다. 책에서 조금이라도 괜찮아 보이는 문장이 나오면 Anki에 카드로 만들고, 해당 카드를 외우면서 곱씹는다. 주로 빈칸(Cloze deletion)을 만든다. 중요해 보이는 문장은 빈칸을 많이 뚫고 평범해 보이는 문장은 빈칸을 조금 만드는 식으로 조정해가면서 카드화 한다. 이렇게 책을 카드화해서 곱씹으면 꽤나 재미있는 경험을 할 수 있다. 일단, 책의 구절구절을 잘라서 곱씹어 외우므로 생각보다 쉽게 시작할 수 있다. 책은 두껍지만 카드에서 외울 내용은 한줌이기 때문이다. 카드식이므로 공부량 조절이 용이하다. 컨디션에 따라서 1~2개의 카드만 외워도 되고 3~40개의 카드를 외워도 된다. 그런데 외우다 보면 점점 기억력도 늘고, 정신적 체력도 붙어서 점점 많이 외우게 된다. 또, 카드 1개를 외우고 그 내용이 깊이 새겨지면 다음 내용이 궁금해서 더 분발하기도 한다. 게다가 책의 시작부터 차례대로 외어나가기 때문에 모호한 점이 거의 없다. 앞의 내용을 전부 외우고 이해했기 때문에 뒤에 제시된 내용을 보는데 항상 충실할 수밖에 없다. 외운 카드들은 알고리즘에 맞춰서 계속 복습으로 나오기 때문에 매일매일 책을 처음부터 가장 최근 읽는 부분까지 깊이 있게 읽는 모양새가 나온다. 그러니 책 전체의 맥락은 항상 머릿속에 현존하게 되고 책의 처음과 끝이 항상 일기관통하게 된다.
물론, 좋은 책을 공부해야 좋은 경험을 할 수 있다. 이 방식으로 공부와 독서를 하면서 좋은 책이 얼마나 드문지 절절이 체감할 수 있었다. 시중에서 명문이라고 추앙받던 책들도 이렇게 읽으면 오타, 비문, 앞뒤가 안 맞는 내용, 모호한 개념과 정의 등이 모두 드러난다. 특히, 최근 번역서들의 품질은 심각할 정도다. 가볍게 읽을 때는 아무런 문제도 없어 보인다. 하지만 진지하게 외울 생각으로 곱씹다보면, 도저히 읽을 수 없을 정도로 엉터리인 경우가 많다. 아무리 곱씹어도 기억에 잘 남지 않고, 어찌어찌 외워서 다시 기억해내려고 해도 문장이 심하게 변형되어 버린다. 게다가 내용도 알맹이가 없는 경우가 많았다.
이렇게 좋은 방법으로 마냥 즐겁게 공부하면 좋겠지만 조금씩 문제가 누적되기 시작했다.
공부를 하면서 세운 계획이 있었다. 동양학에 대한 호기심은 재빨리 명리학을 공부해 풀고 컴퓨터 과학과 프로그래밍을 본격적으로 공부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계획은 예상치 못한 부작용과 함께 철저하게 꼬이기 시작했다.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서 대형서점에서 대략 괜찮아 보이는 명리학 책을 집어 10개월 정도 열심히 외웠다. 그런데 다 외우고 보니 책이 엉터리였다. 중간부터 의심하기 시작했지만 오타나 실수일 것이라고 스스로를 타일렀다. 해당 분야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데다가 이미 많은 시간을 투자한 본전이 아까워 책이 엉터리라고 확증하기 어려웠다. 결국, 책을 끝까지 외우고 나서야 어쩔 수 없이 책이 엉터리라고 결론내릴 수 있었다. 허무했다. 불철주야 노력한 10개월이 너무나 지나치게 뼈가 시리도록 아까웠다. 그리고 호기심은 전혀 해결되지 않았다. 자신이 우주의 도를 깨우친 양 이야기하는 현대 명리학자의 책을 믿을 수 없어서 이번에는 고전을 골랐다. 역시, 통째로 외우다 보니 다 보인다. 번역은 납득하기 어렵고, 중간 중간 원문도 잘못 썼다. 결국, 직접 옥편을 뒤져가면서 번역을 해봤지만 한문이라는 것이 단지 한자를 안다고 해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만 절절이 깨닫고 말았다. 하지만 이미 명리학에 1년하고도 5개월이라는 시간을 투자했다. 너무 아깝다. 여전히 호기심은 해결되지 않았고 오기도 발동했다. 더 이상 실수하지 않고 제대로 공부할 방법을 찾아보았다. 앞서의 실패로 의심이 너무 많아져서 원문을 한문으로 직접 읽지 않는 한 납득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왔다. 게다가 원문을 읽어본 결과, 단지 한자만 알아서는 해석하기 어렵다. 한문의 서술 방식은 대부분 고전의 인용이기 때문에 결국, 사서삼경의 고전부터 한문을 체계적으로 공부해서 내공을 쌓아야 원문을 제대로 읽을 수 있다. 미친 짓이었다. 호기심 하나 해결하겠다고 10년 공부를 자처하는 셈이다.
명리학 공부가 원하는 성과가 없었다고 이야기했지만, 전혀 성과가 없지는 않다. 여전히 모호하고 납득하기 어렵지만 그 내용을 전부 외우고 있기 때문에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될 때마다 업데이트를 하고, 또, 현실에 적용하면서 단편적인 부분은 조금씩 깨우쳐지고 있다. 그리고 그 단편 덕분에 삶의 질을 꽤나 개선할 수 있었다.
글과 문장을 곱씹고 외우는 공부는 살아서 움직인다. 단편적인 지식이 그저 지식 토막일 뿐이라면 곱씹는 공부는 지식 그 자체가 정착되고 활용되는 토대를 만든다. 마치, 망치를 보면서 “망치 = 못을 박는 기구”라고 아는 것이 단편적인 지식이라면, 곱씹는 공부는 망치를 들고 간단한 탁자를 만들어보는 실습에 가깝다. 그리고 그렇게 탁자를 만들고 나면 망치를 이용하여 이것저것 만들어 볼 수 있다. 손재주가 있는 사람이라면 영감을 얻고 목공으로 발전할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곱씹어 외우는 공부를 하면 머릿속에 정착된 지식과 자연스럽게 익힌 활용법으로 인하여 그 지식이 스스로 외부와 감응하고 영감을 준다. 명리학도 마찬가지다.
명리학 공부에서 원하는 바를 얻지 못했지만 책 전체를 외움으로써 세상을 바라보는 명리학자의 관점을 약간이나마 곁눈질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익힌 지식들이 알아서 60갑자 별로 매년, 매달, 매일, 매시를 관찰하고 사람들을 보고 관찰한다. 이제껏 생각지도 못한 관점을 얻었고, 그 관점이 상당히 마음에 든다. 또, 정답인지는 모르지만 이것저것 스스로 시도하면서 정말 조금씩 얻는 바가 있다. 덕분에 지병을 고치는 방법도 찾아냈고, 인간관계도 좋아지는 등 삶의 질이 확연하게 개선되기도 했다. 스스로 얻은 바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잘 관찰해보면 실은 꽤나 얻는 바가 있었다.
이렇게 되면 공부를 멈출 수가 없다. 머릿속에서 공부를 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설프게 알고 넘어가지 말고 제대로 정리하고 다음 단계로 나아가라는 내면의 목소리가 커진다. 호기심은 더 왕성해지고 유혹의 목소리까지 들려오기 시작한다. 한문을 사서삼경의 뿌리부터 공부하면 나중에 명리학뿐만 아니라 동양의 기술, 한의학, 풍수지리 등의 다방면으로 쉽게 나아갈 수 있고, 나이 먹고 그 기술로 밥벌이 정도는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속삭인다. 결국,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한문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했다. 부수한자에 이어 천자문을 마치고 지금은 문법책 한 권을 외우기 시작했다.
매사가 이런 식이다. 명리학을 잠깐 보려고 했는데 한문부터 공부하기 시작했고, 영어는 음성학부터 공부하기 시작한다. 컴퓨터 공부는 원리를 궁금해 하다가 물리학 공부부터 하게 될 것 같다. 게다가 최근에는 재능이 없고 인연도 없다고 생각했던 글쓰기까지 공부가 확장되고 있다. 물론, 다 공부하면 좋다. 하지만 공부하고 싶은 내용은 계속 늘어나는데 공부를 할 수 있는 한계는 꽤나 명백하다. 이러니 욕구불만에 시달리게 된다.
어서 빨리, 명리학의 비밀을 알고 싶은데, 겨우 천자문을 공부하기 시작했을 때의 막막함이란 상당하다. 구상하고 있는 프로그램을 설계하고 싶은데, 전자기학 교과서를 펼칠 때마다 조급함이 몰려온다. 블로그에 글을 올리려는데, 문장들이 너무 유치하고 어설퍼서 글을 쓰지 못한다. 무언가 근본적으로 개선되고 좋아지고 있다. 대단하고 훌륭하다. 하지만 너무 시간이 걸린다. 하고 싶은 것은 저 멀리 산봉우리에서 펄럭이고 있는데, 뛰어가지 못하고 차분하게 한발자국씩만 움직이는 기분이 든다. 문제를 해결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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