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너무나 힘들게 꼬여가고 있을 때, 매일 밤마다 악몽이 나를 엄습했었다. 검은 개의 악몽이었는데 불길한 검은색이라는 점과 개꿈이라는 점에서 꿈에서도 최악이었지만 깨어났을 때도 인생의 방향이 꼬일 것이라는 점을 강력하게 암시하는 여러모로 밥맛없는 악몽이었다. 원래, 꿈이란 것은 깨어나자마자 신기루처럼 사라져 기억이 희미해지는 법인데 대부분 악몽이 동일하게 검은 개와 함께 하는 꿈이었고 거의 매일 이 꿈에 시달리다 보니 점점 꿈의 디테일한 부분을 기억하기 시작했다. 


꿈의 내용은 항상 비슷했다. 불길한 검은 개가 검은 오라를 내뿜으면서 무섭게 쫒아온다. 공포와 불안, 마비된 이성으로 눈을 감고 도망간다. 공포가 심해 눈을 뜨지 못한다. 검은 개가 쫒아오고 무서워서 눈을 감고 도망가려고 하는데 땅이 나를 붙잡고 놔주질 않는다. 늪에 빠진 것 같이 발이 무겁고, 유사에 빠진 것 같이 나락으로 끌려가는 기분이며, 개미지옥에 빠진 것처럼 도망가고자 하는 나의 노력이 헛된 것처럼 느껴졌다. 마지막은 항상 검은 개가 나를 덮치면서 끝난다. 


이 악몽은 기분을 너무 우울하게 하기 때문에 이런 악몽을 꾼 날이면 괴로운 현실을 잊기 위하여 닥치고 쾌락에 몰두하며 뇌를 정지시키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악몽이 3년이나 반복되다 보면 그것을 들여보게 된다. 매번 꿈속에서의 공포와 불안, 절망감을 안고 깨어나자마자 꿈을 관찰하다 보니, 몇 가지 이상한 점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꿈이 완전히 말이 안되는 것이라는 점이었다. 나는 꿈속에서 공포와 두려움에 한 번도 눈을 뜨지 않았다. 그런데 검은 개를 본다. 어떻게 눈을 뜨지 않았는데 개를 볼 수 있었을까? 또, 현재 사막에 있는지 구덩이에 빠졌는지 늪에 빠졌는지 보지도 않고 확실하게 알고 있다. 사실, 꿈이 엉망진창으로 모순되고 비논리적이라는 점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과 꿈의 차이점을 통해서 몇가지 영감을 받을 수 있었기에 또, 악몽을 극복하고자 하는 마음에 문제를 파고들었다. 


현실은 모든 것이 정합적이고 총체적이어서 굴뚝에서 연기가 나면 그 굴뚝 아래에는 불을 붙이고 있을 것이라고 추정하면 대부분 옳다. 모든 것이 시공간의 제약을 받고 이치를 따르기 때문에 보통 하나를 보면 그 외 나머지도 대략 알 수 있다. 하지만 꿈은 그러한 정합성과 총체성이 약하기 때문에 모든 것이 불안하고 불안정하다. 하지만 꿈에서의 인식작용을 잘 살펴보면 한 가지를 알 수 있다. 즉, 꿈에서는 모든 것이 주어진다. 어떻게 눈을 감고 있는데 개를 보고 있는 것일까? 눈을 감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몸의 고유수용감각과 사물의 모습이 동시에 주어지기 때문에 눈을 감고 있어도 사물이 보이는 것이다. 개가 있고 그것을 눈으로 보았기 때문에 개를 보는 것이 현실의 논리라면 꿈에서는 개와 눈을 감는것이 각각 주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꿈에서는 증오하는 사람의 모습과 사랑이라는 감정이 동시에 주어지면 증오스러운 사람이 사랑스럽게 보이게 된다. 반대로 평소 예쁘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모습과 추하다는 느낌이 동시에 주어지면 사랑하는 사람이 추하게 느껴진다. 즉, 꿈에서는 정보가 직접적으로 주어지고 그 주어진 정보에 따라서 현실적으로 있을 수 없는 것들도 실재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나는 이 의식에 직접 주어지는 것이라는 부분이 무척 흥미롭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다시 올리버 색스의 신경증 환자들 사례를 보면서, 환상과 환청이 바로 우리에게 직접 주어진 것들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아내가 모자로 보이는 남자의 정신상태가 그랬다. 눈  앞의 노부인이 아내인 것도 알지만 동시에 모자라고 인식된다. 그냥 모자로만 보이는 것도 아니고 그냥 아내로만 보이는 것도 아니다. 아내인데도 모자인 현실에선 있을 수 없는 상황인 것이다. 그리고 그 모자를 쓰기 위해서 노력하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보여주는 것은 우리가 주어진 정보에 따라 그저 꼭두각시 인형처럼 끌려다닌다는 점이었다.


주어지는 것을 단순히 정보라고만 말하는 것 조금 적합하지 않은 것 같다. 왜냐하면 주어지는 이 정보는 어떤 행동의 방향성을 같이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는 그 자리에서 합리적으로 상황을 조율하지 않는다. 즉, 아내이고 모자이기 때문에 아내인지 모자인지 분별하거나, 잘 모르겠으면 아무것도 안한다거나, 또는 그 상황 자체를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기계적으로 눈앞의 모자를 쓰려고 할 뿐이다. 모자라는 정보는 반드시 그 모자를 당장 써야겠다는 충동을 같이 가져온다. 영화 ‘뷰티풀 마인드’에서 내쉬는 빅브라더에 대한 환상에 시달린다. 그 영화를 보면서 내내 가진 의문은 이 빅브라더들이 환상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면 이제부터는 그냥 무시하면 되는 것 아닌가? 하는 것이었다. 마치 우리가 일상에서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을 무시하고 없는 것처럼 여기듯이 말이다. 하지만 내쉬는 환상과 환청을 따르지 않기 위해서 끊임없이 그것이 환상인지 아닌지 분석해야만 했고 동시에 충동을 억제해야만 했다. 즉, 눈앞에 아내를 모자로 보는 순간 그 모자를 써야겠다는 강력한 충동이 따른다. 내쉬가 본 빅브라더도 끊임없이 내쉬로 하여금 암호를 해독하고 이것을 비밀로 유지하게끔 하는 충동이 발생한다. 실제 임상에서도 환상과 환청이 증세로 나타나면 그 사람을 거의 지배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특히, 환청은 극단적인 이상행동을 불러오는 경우가 많아 매우 주의하는 것으로 알고있다. 충동에 사로잡힌 사람은 그 충동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전심전력으로 사력을 다해야만 겨우 충동을 억제할 수 있다. 


나의 악몽도 결국, 주어진 정보들의 칵테일이었다. 처음에는 검은 개가 쫓아와서 불안하고 공포스러웠던 것으로 생각했지만 곰곰이 생각하다보니 어느 순간부터 이게 그렇게 논리적인 선후관계로 연결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납득하게 되었다. 즉, 그저 같이 주어진 것이었다. 그 꿈은 일종의 환상이고 꿈에서 느낀 공포와 불안은 바로 환상을 본 사람들이 느끼는 충동처럼 나를 사로잡는 충동이었던 셈이다. 


이렇게 정보와 그에 따른 행동을 일으키게 하는 충동이 동시에 주어지는 것이 꿈이나 정신적인 문제에 시달리는 사람에게만 있을까? 그럴 리가 없다. 정신적으로 건강하고 괜찮은 사람도 어느 순간 이상한 판단을 내리거나 말도 안 되는 짓을 하고 돌이켜 생각하면서 자신이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는지 경악하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 그런 경우를 우리는 그저 컨디션이 안 좋았다거나 착각했거나 하고 말하면서 일시적인 것으로 치부하지만 명백히 정상인들도 그러한 주어지는 정보와 충동의 지배를 벗어나기 어렵다는 것을 보여준다. 


조금 더 미세하게 들어가게 되면 나는 내가 사물을 어떻게 인지하고 반응하는지 모른다. 그저 주어질 뿐이다. 눈앞에 있는 사과를 어떻게 사과라고 인지하냐고 물어본다면 눈앞에 있는 사과를 보면서 사과라고 주어지기 때문이라고 밖에는 대답할 수 없다. 그저 ‘사과’라는 이름과 맛과 향이 떠오르면 그것을 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만일 잘못된 지식을 가지고 있다면 어떻게 될까? 가령, 사과는 강력한 독성이 있어서 먹으면 백설공주처럼 잠들게 된다고 믿는다면 사과를 먹으려 하지 않을 것이고, 사과를 먹이려는 사람이 자신을 죽이려고 한다고 믿을 것이다. 이런 경우라면 올바른 지식을 제공하고 증명하면 되겠다. 하지만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사람처럼 사과를 모자로 착각한다면 그는 의심없이 사과를 머리에 쓰려고 할 것이다. 


이렇게 의식에 직접 주어지는 것들을 살피게 되면서 인간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취약한 기반에 있는지 절감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혼자서 짱구를 굴리면서 스스로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양 하고 있지만 실은 그렇게 여기도록 주어진 것일 뿐일지도 모른다. 이렇게 생각하니 자유라는 말은 허황되게 느껴지고 주체라는 말은 꿈속의 망상처럼 느껴질지 모르겠다. 누군가의 선동에 의해서 아니면 운명의 장난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들에 우리는 끊임없이 꼭두각시의 춤을 추게 되는 존재일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이러한 위험성은 항상 우리 곁에 상존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주어지는 것들을 통해서 역설적으로 자유라는 것이 제한적으로 가능함을 깨닫게 된다. 


우리는 주위의 모든 것으로부터 정보가 주어진다. 컵을 보면 컵이 떠오르고, 컴퓨터를 보면 컴퓨터가 떠오른다. 발 아래에 천길 낭떠러지가 펼쳐져 있으면 떨어질지 모른다는 공포가 절로 나타나고 그것을 무시하고 지나가기 무척 어렵다. 이렇게 의식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주위의 사물들이 어떻게 존재하고 무엇을 해야하고 피해야 하는지 주어지기 때문에 현실에 안정적으로 적응할 수 있는 것이다. 만일, 매순간 그러한 정보를 의식적으로 취사선택해야 한다면 어땠을까? 주의력이 부족하거나 다른 것에 정신이 팔려서 사고를 내는 많은 사람들이 훌륭한 견본이 되어줄 것이다. 이들은 자동차 추돌사고, 대형 인재를 일으키는데, 한 순간의 주의력 부재 때문에 그런 일들이 일어난다. 사람들은 까딱 방심하면 옥상과 낭떠러지를 무시하고 밖으로 한걸음 내딛을 것이고 스스로를 절제하지 못해 탐욕으로 인한 범죄가 만연할 것이다. 따라서 이 주어지는 것들이 우리의 자유라는 것을 부정하는 것처럼 말했지만 실은 이 주어지는 것들이 적절하게 작동함으로써 우리의 삶이 보다 안정적인 기반 위에 서 있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따라서 주어지는 것들을 그저 무시하는 것은 결코 해법이 될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할까?


주어지는 것들은 자동적으로 주어진다. 그 자동이라는 것이 우리가 쌓아온 삶의 개인사와 시공간적 상황, 시대정신 등에 복합적으로 영향을 받아서 자동으로 주어지는 것이긴 하지만 일단 그렇게 주어지는 것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하지만 앞에 무엇이 나타나건  자동으로 주어지는 것들이 나타나기 때문에, 처음 의식에 주어지는 것에서 충동을 흘려보내고 그 주어지는 것을 외면하지 않고 바라보고 있으면 그 주어진 것을 대상으로 다시 자동으로 새로운 것이 주어진다. 마찬가지로 충동을 참아내고 가만히 보고 있으면 주어지는 것은 끊임없이 영원한 연쇄 운동을 시작하게 된다. 그러면 충동은 점점 약해지고 그 주어지는 것들은 점점 지혜롭게 변하게 된다. 즉, 생각을 정련하는 셈이다.


주어지는 것들 사이에서 가장 올바르고 최적의 생각과 행동을 하고 싶다면 행동을 멈추고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생각을 끊임없이 정련해야만 한다. 다행히 우리가 아내를 모자로 착각하는 비극에 빠진 것이 아니고 사물을 제대로 인지할 수 있고 충동을 제어할 수 있다면 충동을 흘려보내고 생각을 지속하여 최적의 생각과 행동을 끌어낼 수 있다. 물론, 많은 시간을 소모하게 될 것이다. 가령, 영화 ‘뷰티풀 마인드’에서 내쉬는 자신에게 말을 거는 사람을 마주칠 때 그것이 환상인지 아닌지 검증한다. 주위의 사람들이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을 보고 있는지 물어보고 주위의 상황을 종합적으로 환상인지 아닌지 여부를 판단한다. 그리고 환상이라고 판단되면 그것을 멀리한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내쉬처럼 잠시 멈춰서 생각을 조금 더 끌어내면 된다. 연인이 또래의 이성이랑 행복하게 웃으며 지나가는 것을 우연히 봤다면 대부분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연인이 바람을 핀다.’일 것이고 당장 연인을 추궁하고 분노를 쏟아내고 싶은 충동이 발생하게 된다. 하지만 잠시 멈춰서 충동을 흘려보내고 그 생각을 찬찬히 바라보고 있으면 조금씩 생각이 옅어지면서 여러 생각이 떠오를 수 있다. 새롭게 주어지는 생각들은 연인의 친한 친구나 선배에 대한 이야기일 수도 있고 업무상 접대로 누군가를 만난다는 이야기가 떠오를지도 모른다. 그런 식으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지나가게 하다 보면 가장 개연성이 높은 시나리오를 생각이 수렴되고 이를 단계적으로 검증하여 가장 지혜로운 행동을 할 수 있게 된다. 즉, 가장 훌륭한 생각과 행동을 하고 싶다면 멈추고 그만두면 된다. 비록 우리가 주어지는 것들에 의해서 필연적으로 조작되지만 우리에게는 주어지는 것들을 참아냄으로써 그 주어지는 것들을 극복하고 가장 지혜롭고 뛰어난 생각과 행동으로 연결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자유라는 말은 스스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말이다. 즉, 내가 하고 싶어서 하고 멈추고 싶어서 멈추는 것이다. 오직, 스스로만이 이유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들을 살펴 보니 내가 하고 싶어서 한다고 여기는 그것은 내가 하고 싶도록 밑도 끝도 없이 주어지는 프로그래밍처럼 느껴진다. 또, 내가 멈추고 싶어서 멈추지만 역시 그것도 내 스스로 멈춘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도록 프로그래밍 된 것 같다는 느낌을 준다. 이렇게 보면 자유는 불가능할 것 같고 인간은 꼭두각시에 불과한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이 모든 제한에도 불구하고 단 한 가지 자유가 보장되어 있다. 그것은 충동을 가라앉히고 좀 더 지혜로워질 수 있는 자유다. 총의 방아쇠를 당기고 싶은 충동이 강하게 일어날 때, 그것을 당기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지그시 바라보며 충동은 흘려보내고 생각은 지그시 바라보는 그러한 자유다. 이 자유는 느리고 답답하기 때문에,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구속이라고 여길 수 있는 그런 자유지만, 인간이 언제나 그 자리에서 자신의 인생을 전체를 통해 얻어낸 최고의 지혜로 행동할 수 있다는 점에서 운명의 희롱을 벗어날 수 있는 단 하나의 역설적인 자유인 셈이다.


마지막으로 나의 악몽은 결국, 수면무호흡 때문이었다. 숨을 쉬지 못하고 숨이 부족하니 몸은 내가 뛰고 있다고 여긴 것이다. 하지만 몸이 뛰고 있어야 하는데 몸은 잠자리에 누워있으뿐이고 몸이 무거우니 사막이나 늪에 빠져서 몸이 움직이지 않는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그것이 당시 상황의 암울함과 고민과 겹쳐지면서 검은 개에게 쫓기는 악몽을 만들었고 이 수면무호흡과 악몽은 내 삶의 질을 더 나락으로 떨어뜨려 정신적 좌절과 불안을 심화시켰고 이는 다시 과식과 잘못된 생활습관을 심화시키면서 수면무호흡이 심화되는 악순환으로 이어졌다. 그렇게 수년간 동일한 내용의 악몽에 시달리게 된 것이다. 내가 이 악몽의 연쇄를 극복하고 원인을 찾아 해결할 수 있게 된 것도 공포와 불안 좌절에 매몰되는 것을 멈추고 자학적인 충동을 흘려버릴 수 있게 되면서 이 모든 것을 외면하지 않고 끌려다니지도 않고 관찰할 수 있게 되면서 부터였다. 조금만 빨리 깨달았으면 악몽의 시간을 많이 줄일 수 있었을 것이다. 

중고등학교에 공부한다고 독서실에 처박혀 있을 때는 회의주의적인 경향이 강했다. 세상에 의미있는 일 따위는 없고 그저 꾸역꾸역 살아갈 뿐이라고 생각했다. 공부만 하고 있으니 인생에 재미있는 것이 없고 따라서 만사에 회의적이고 염세적인 것은 당연해 보인다. 그렇다면 대학에 들어와서는 그렇지 않았을까? 아니다. 이제는 아주 논리적이고 당당하게 회의주의적인 철학자며 사상가들을 공부하면서 논리적으로 확고한 회의주의적 경향을 가지게 되었다.

 

90년대 대학은 회의주의적인 경향이 강했다. 그래서 대학에서 가르치는 것은 주로 의심하고 비판하라는 것이었다. 의심한다니 멋있지 않은가? 이미 갖고 있던 회의주의적 성향을 정말 멋진 쿨함으로 끌어올려줄 것 같지 않은가. 국가를 의심하고, 사회를 의심하고, 경제를 의심하고, 의도를 의심하고, 사람을 의심하라고 들었다. 멋있어 보였다. 하지만 이제 갓 대학에 들어온 신입생이 뭘 알겠는가. 이미 사람들이 의심한 내용들을 따라하는 수밖에 없다. 칸트나 데카르트 같이 모든 것을 의심하고 비판한 철학자도 있었고, 프로이트와 다윈처럼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신화를 밑바닥에서 무너뜨린 사람도 있었다. 현대의 신경과학이나 유전자학은 인간을 거의 기계나 컴퓨터처럼 다루고 있었다. 읽다 보니 도출되는 결론은 인간은 성욕으로 프로그래밍 된 원숭이에 불과하고 사회나 국가를 운영하기엔 너무 불완전해서 탐욕으로 매번 경제공황을 일으키고 최악의 정치 형태인 독재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는 운명론적인 좌절이었다. 그러니 이제는 열심히 사는 사람들을 모두 원숭이의 발정 정도로 치부하는 회의적인 태도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회의적인 성향이 더욱 강화됨에 따라서 아름답고 진정한 사랑, 정치적 선동, 선행, 혁명, 자아의 실현, 신뢰 따위를 전부 헛된 망상이라고 치부할 수 있게 되었지만 이런 회의주의적인 성향은 누군가 이런 것을 들이밀면서 하기 싫은 것을 권유할 때만 작동할 뿐이다.

 

가령, 누군가 나를 설득하기 위해서 이렇게 말한다.

 

“A씨는 너무 훌륭한 것 같아. 그분은 누구랑 진정한 사랑을 했고, 많은 선행을 하신 분이라서 믿을 수 있어, 그 분이 지금 세계 평화를 위해 기금을 모으고 있어 너도 여기에 기부도 하고 활동도 같이하자.”

 

이런 자리에서 말을 할 때, “응 그렇구나, 미안 최근 바빠서정도로 거절하면 계속 달라붙어서 설득을 시도하기 때문에 무척 피곤해진다. 상대방을 단호하게 거절하면서 동시에 적대적인 상황으로 가지 않기 위해서 범우주론적 회의적인 경향을 스스로에게 포장한다.

 

그래, 과연 인간이란 존재가 아무런 이익도 없이 선행을 베풀 수 있을까? 진정한 사랑이라니? 사춘기도 지났는데 이제 그런 상상의 세계에서 나와서 현실을 보는게 좋다고 생각해. 인간은 근본적으로 발정난 원숭이에 불과하고 불완전한 존재야.”

 

이렇게 이야기하면 상대방은 그냥 흔히 볼 수 있는 겉멋이 잔뜩 든 염세주의 똘아이구나 정도로 생각하고 가거나 토론을 하려고 한다. 하지만 이미 토론의 주제는 A라는 사람에 대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존재에 대한 추상적인 토론으로 바뀌기 때문에 서로가 마음 상할 일은 많지 않다. 게다가 이미 그런 회의주의적인 성향을 정당화하는 근거를 잔뜩 가지고 있기 때문에 상대가 나를 설득할 방법은 거의 없고 오히려 설득 당할 가능성이 더 높게 된다.

 

나의 회의주의적인 성향은 보통 이렇게 싫어하는 일을 피하고 엉뚱한 일에 끌려다니는 것을 막기 위해서 주로 사용되었으니 진정한 회의주의자라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거나 사람들에게 실망하고, 혹은 스스로 부끄러운 일이 있을 때마다 세상이 우울해지고 세상의 모든 의미와 가치가 빛바래는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된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내뱉었던 회의주의자적인 말들이 거부할 수 없는 진리처럼 다가오는 것을 피할 수는 없었다.

 

오랫동안 믿었던 가치가 사실은 허황된 것이라는 점을 조금씩 느꼈으면서도 그것을 필사적으로 부정하고, 믿었던 사람들에게 실망하고 힘이 빠지고 있으면서도 그렇지 않다고 스스로를 기만하게 되는 일이 종종 있다. 나도 그렇다. 필사적으로 부정해 오다가 어느 순간 그 부정을 더 이상 할 수 없게 되는 시점이 나타난다. 어느 유난히 조용하고 평온한 밤이 바로 그런 상황이었다. 뜬금없이 몰아닥치는 상념 속에서 갑자기 스스로를 기만해 왔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깨닫게 된다.

 

믿었던 것에 배신당하는 느낌이 너무 싫었었기 때문일까? 이솝 우화의 여우가 어차피 저 포도는 시고 맛없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나도 스스로의 상처 받은 마음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하여 어차피 인간이란 존재는 인간은 성욕으로 프로그래밍 된 원숭이에 불과하고 그런 인간들이 말하는 가치와 의미는 결국 허상이고 망상이거나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거짓으로 꾸며댄 것들에 불과하다고 진심으로 생각했다. , 거기에 확신을 얻고 싶었기 때문에 이 세상 모든 가치와 의미를 적극적으로 부정하기 시작했다.

 

당시 배운 바에 따라서 세상에 믿고 따를만한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일들이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선행은 사회의 구조적인 결함을 손바닥으로 가리면서 빈민들에게 정신적 위로를 하기 위한 가식의 수단으로 보였고, 열정과 혁명은 발정난 사람들이나 스스로에게 취한 사람들의 과대망상적이고 낭만적인 몽상으로 보였다. 종교는 감언이설로 사람들을 현혹하는 사기로 보였다. 열심히 일하는 사람은 자본주의의 노예에 불과하고, 돈 많은 부자는 그 돈에 대한 집착으로 전전긍긍하는 궁색하고 인색한 노인네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웃기는 것은 세상에 뭔가 의미 있는 일들을 하나같이 무가치한 일들로 증명하면 점차 삶이 더 우울해질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반대로 그런 생각을 깊이 할수록 점점 마음이 오히려 편해지고 밝아진다는 것이었다. 왜 그런 것일까?

 

그 의미가 문제였다. 마음속에서 모든 것이 평등하게 무의미하고 무가치해진 순간 한 가지를 깨달았다. 어차피 모두 무의미하다면 이 세상에 어떤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진정한 가치와 의미라는 것이 없다면 오히려 내 스스로 원하는 의미와 가치를 설정해도 된다. 그것도 무의미하겠지만 어차피 세상에 무슨 진정한 의미와 가치라는 것이 없다면 차라리 내 스스로 의미와 가치를 만드는 것이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

 

비록, 길가에 흐드러지게 피어난 이름 모를 잡초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모든 사람들이 아름답다고 말하는 장미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과 아무런 차이가 없다.

 

세계의 평화를 위해 내전 지역으로 가서 탱크 앞에 뛰어드는 것도 멋있겠지만 지나가다가 누군가 떨어뜨린 지갑을 주어서 주인을 찾아주는 것도 이미 그 의미에 충실하다.

 

모든 의미를 부정하니 이제 스스로 의미와 가치를 만들 수 있게 되었고 다시 돌아보면서 내가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다시 찾아보니 이번에는 앞에서 부정했던 모든 것들이 내 속에서 다시 생생하게 살아나기 시작했다. 아마도 처음으로 내 스스로 세상하고 마주친 느낌이었다. 선행은 기분이 좋고 나에게 의미가 있다. 그것으로 족했다. 열정은 진정 의미와 가치를 부여할 때 생기는 것이므로 값진 것이었다. 그것이 실패하고 그저 일종의 구애행동으로만 남았어도 그렇게 다시 일어난다는 것으로도 해보지 않은 것보다 훨씬 나았다. 무모한 사람들, 이상을 향해 뛰어가는 사람들, 자신의 이익만 돌아보는 사람들 모두 자기 자신이 만들어낸 의미를 향해 가고 있는 것이었다. 그들은 성공할 수도 실패할 수도 있지만 여기에 앉아서 속으로는 온갖 욕망이 있으면서 그 사람들을 평가만 하고 있는 나보다는 나았다. 나도 그렇게 의미를 만들고 살아 움직여서 실패도 성공도 내 스스로 감당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무엇을 하든 나에게 의미가 있다면 그것으로 족했기에 모든 것을 할 수 있었다. 더 이상 여기에 어떤 의미가 있다고 말하는 사상가나 대단한 선배와 어르신이 필요 없어졌다.

 

이것은 처음으로 스스로 발견한 역설이다. 솔직히 다시 생각해보면 그야말로 현학적이고 세상물정 모르는 생각으로 가득했던 대학시절의 이야기지만 삶이 힘들 때마다 이때를 다시 돌이켜 보게 되는 역설이다. 사회적으로 비루하고 인정받지 못해도, 남보다 늦게 가는 것 같고, 잘못된 인생을 사는 것 같아도 이때 떠올렸던 생각을 다시 해본다. 그러면 지금 내가 제대로 길을 가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게 된다. 혹시나, 누군가의 말을 듣고 이상한 명예와 자격지심으로 엉뚱한 옷을 입으려고 용을 쓰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내 스스로 가치와 의미를 생생하게 부여하고 있는지 여부를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세계에서 최고의 부와 명예를 누려도 스스로 가치와 의미를 부여할 수 없다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생생하게 알려준 것이다. 물론, 나는 부와 명예를 밝히기 때문에 세계 최고의 부와 명예에 매우 높은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고 기꺼이 누릴 것이지만 말이다.


그리고 이 때부터 정말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막 살기 시작했다. ㅜㅜ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