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의 포스팅에서 의식이나 생각이 그 자체의 규칙이 아닌 다른 욕구에 따라 일어나고 사라진다는 것을 발견하고 욕구가 전환될 때마다 찰나의 의식 끊김이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무엇이 바뀌었을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파국의 경험으로 인하여 하나의 통합적인 자아가 있다는 믿음이 깨졌고, 의식인지 자아인지 모를 것이 파편화되면서 나 자신이 더 이상 주체가 아닌 객체로서만 존재했다고 말해볼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파국 당시에는 상황을 객관적으로 크게 바라보고 사유하고 분석할 어떤 무엇이 남아있지 않았다. 


 보통, 무협지를 보면 주인공들은 자기 자신이라는 일관된 어떤 사람이 있다는 환상이 깨지면서 깨달음을 얻고 성장하지만 아쉽게도 현실 속의 나는 오히려 망가졌다. 자기 자신에 대한 통제력을 완전히 잃었기 때문이다. 

 

 흔히, 망상이란 것은 이렇다. 이것저것 게임도 하고 싶고, 나가서 놀고도 싶고, 친구를 보러 가고 싶기도 한데, 공부는 해야 하고 그런 마음의 갈등 속에서 자기도 모르게 현실을 도피하면서 빠져들다가 정신을 차리고 갑자기 빠져나오는 것이 망상이다. 파국을 경험하기 이전에 나의 망상도 이랬다. 많이 귀찮기는 했지만 그래도 경계선이 명확했고, 망상에 잠깐 빠지더라도 다시 원래대로 돌아올 수 있었다.


 하지만 파국 이후에는 그렇지 않았다. 더 이상 경계가 남아있지 않았고, 망상으로부터 돌아오기 힘들었다. 무엇보다 망상에서 정신을 차리면 원래대로 돌아오지만 내 경우에는 처음부터 정신이 차려져 있었다. 단지, 힘이 없었을 뿐이었다. 망상은 내가 보는 앞에서 태연히 내 몸을 움직였다. 


 망상은 항상 내가 좋아할 법한 내용들이었지만 항상 너무 노골적이고 너무 지나쳤다. 배가 고프면 폭식을 한다. 잘 체하는 몸이기 때문에 폭식을 하면 항상 그 다음날 발열, 오한, 두통 등의 체증에 시달리지만 먹을 때는 그런 생각을 전혀 하지 않는다. 아니, 머릿속에 그 공포가 떠오르지만 욕구가 이것을 찍어 누르는 것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성욕이 생기면 야동을 틀어넣고 성욕이 일어나지 않을 때까지 기계적으로 해소한다. 이것은 이미 성욕해소가 아니라 자기 파괴에 가까운 자해행위였고, 죽을 것 같고 머릿속에서 피곤과 고통을 호소하지만 역시 성욕에 의해 무시된다. 잠은 더 이상 잠이 오지 않을 때까지 자고 그 잠마저 대부분 야동과 액션영화에 가까운 꿈으로 범벅이어서 쉰다는 느낌은 없었다. 쾌락은 충분히 자기 파괴적이었다. 


 다음날 겪을 부작용이 눈에 선해서 욕구에 브레이크를 걸려고 해도, 그 때마다 욕구가 그 생각을 찍어 누르고 왜곡시키는 것을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욕구가 절제를 찍어누르는 감각은 다이어트를 하거나 금연을 할 때, 느끼는 감각과 비슷하다. 다이어트를 할 때, 식욕이 올라오면 그 욕구가 마음을 흔든다. 이것은 성경에서 보던 사탄과 비슷해서, 온갖 유혹을 만들어낸다. 단순히, 욕구 그 자체로 존재하지 않고, 생각이 같이 끌려나온다. 때론, 욕구 그 자체가 하나의 자아처럼 기능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할 정도다. 가령 다음과 같다. 


 다이어트를 할 때, 갑자기 라면을 먹고 싶은 마음이 강하게 든다. 유난히 욕구가 거세다. 그러면 다음과 같은 문답이 활성화된다. 

절제 : 참아야해!

욕구 : 이번엔 욕구가 유난히 심하네, 이 번 한번만 먹고 다시 절제하자.


절제 : 그러고 먹으면 다음번엔 “이미 다이어트를 망친 것 같으니, 일단 욕구는 채우고 보자.”라는 식으로 할 거면서 절대 먹지 않을거야.

욕구 : 하지만 이렇게 맛있어 보이는 라면을 먹지 않겠다고? 이런 소소한 즐거움도 누릴 수 없는 인생이 무슨 가치가 있어.


절제 : 한두 번 속는 줄 아나! 나중에 살 빼고 먹을거야!

욕구 : 네가 자꾸 실패한 것은 네 의지력이 약해서지 왜 자꾸 욕구를 탓하는 거야. 평생 욕구 없이 살 것도 아니면서. 욕구를 그렇게 노골적으로 부정하면 네 인생도 재미없을 거야. 그러니 같이 공존해야지. 그러니 ... (끝없는 이야기들)

 

 욕구는 절제하고자 하는 마음을 하나하나 논박한다. 위의 문답은 보통 “이 번 한번만”에서 무너지기 일쑤다. 하지만 계속 버티면 욕구는 설득하고 인신공격을 한다. 그 다음에도 버티면 욕구는 끊임없이 밑도끝도 없이 절제를 괴롭힌다. 결국, 절제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무너지고 욕구가 승리하는 상황이 연출된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에서 ‘절제’가 무너질 때 자존감에 심대한 타격이 가해진다. 그렇게 자존감이 몇 번 무너지면 더 이상 다이어트나 금연을 할 엄두가 나지 않게 된다. 


 내 파국의 경험이 무서운 것은 더 이상 욕구가 절제를 논파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냥 나타나서 노골적으로 욕구를 해소하고 잠시 쉬었다가 다시 나를 괴롭힌다. 그리고 나의 주체감, 내가 나라고 생각하는 감각은 항상 그 반대의 ‘절제’ 속에 있어서 욕구가 일어날 때마다 그 무기력함에 회의감, 한심함, 자괴감, 좌절 등을 느끼면서 자존감에 심대한 타격을 받았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는 내 스스로를 욕하는데서 쾌감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자신의 한심함을 경멸하고 욕하는 것이 상처난 곳의 딱지를 긁듯이 중독되는 쾌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욕구를 제어하는 방법은 더 큰 쾌락과 공포였다. 노골적이고 지나친 성욕의 범람은 전혀 즐겁지 않고 역겹다. 하지만 안하겠다고 스스로를 아무리 다그쳐도 씨알도 먹히지 않는다. 하지만 다른 쾌락의 추구로 전환하면 어느 정도 먹힌다. 나는 이를 만화방으로 옮겼다. 집의 모니터 앞에서 도망가기 위해서였다. 물론, 만화방에서의 욕구가 적절하다는 것은 아니었다. 기본으로 만화방에 머무는 시간이 20시간이었다. 지쳐서 쓰러질 때까지 만화책과 무협지를 보고 또 봤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이게 나쁜 방법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만화책이나 무협지나 성욕과 폭력에 대한 대리욕구인 것은 인터넷이나 야동과 다를 바 없지만, 어떻든 간에 착하고 좋은 뻔한 주인공들이었기 때문에 어떻게든 정상적인 가치관이나 긍정적인 가치관을 계속 머리에 새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다음은 공포였다. 아무리 욕구가 지나쳐도, 그 모든 것은 해본 것을 극대화하는 수준이었지 결코,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게 하지는 않았다. 아무리 성욕이 강해도, 범죄를 생각해본 적은 없었고, 타인에게 폐를 끼치는 상황으로 가지는 않았다. 그것은 도덕감 때문이라고 생각되지는 않았다. 오히려 공포였다. 낮아진 자존감이 그런 상황을 더 부추겼다. 폭력은 자신 없었고, 범죄로 돌아올 여파가 더 무서웠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 공포가 나에게 살길을 열어주었다. 


 매일 매일 온갖 욕구에 시달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자존감이 무너졌다. 하던 고시 공부는 실패와 다름없었기에 마찬가지로 사회적 자존감도 무너졌다. 스스로가 꿈틀거리는 벌레처럼 느껴졌을 때, 어떤 강사가 했던 말이 자꾸 머리에 떠올랐다. 


매년 고시촌에는 자살인지 아사인지 알 수 없는 사람들이 나타난다. 이들은 거듭된 실패 속에서 어느 날 삶의 의욕을 잃게 된다. 적극적으로 자살을 하겠다는 의욕도 없다. 그냥 고시원에 하루 종일 누워서 천장을 바라보고 있다. 반대로 살겠다는 의욕도 없어 아무 것도 먹지 않고 그저 누워만 있는다. 그러다가 굶어죽는 것이다.” 


 이 이야기가 남의 이야기로 들리지 않았다. 스스로 미쳐간다고 생각하면서 망가졌을 때, 그 망가짐이 심해졌을 때, 이 이야기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내가 그렇게 죽는 모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공포감이 내 절제력과 통제력을 잠시나마 원상복귀 시켜주었다. 그리고 그 짧은 시간이 이 상황에서 탈출할 방법을 찾을 유일한 시간이었다.

 앞서, 망상을 관찰하고 이 망상의 근원으로 올라가 뿌리째 뽑으려 했다가 파국을 맞이하는 이야기를 했다. 이 정신적 파국은 2004년에 있었고 2016년이 되어서야 스스로 어느 정도 치유되었다고 말할 정도가 되었다. 그리고 그 12년간 이 파국에 대한 경험은 내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반복적으로 재생되는 악몽이었다. 이미 많이 좋아졌다고 여겨지는 현재에도 언제 다시 그렇게 나락으로 떨어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여전히 남아있다. 그러니 이 파국이 어떻게 일어난 것이고 나에게 무슨 결과를 가져온 것인지 파악하려는 노력이 계속될 수밖에 없었다. 이번엔 그렇게 개인적으로 곱씹으면서 파악해본 파국의 근원과 양상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노파심에 말하지만 만일, 누군가 이 경험이 재미있다고 생각해서 이것을 따라하려고 한다면, 절대 그러지 않기 바란다. 내가 겪은 일이 나의 유전적, 환경적 요인 때문인지, 아니면 보편적으로 마주칠 수 있는 경험인지 알 수 없지만 구태여 10여년의 기간 동안 폐인이 될 불필요한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이 경험을 구태여 파국이라고 명명한 이유는 통제 불가능해진 삶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 경험을 경계로 하여 근본적인 정신적 변화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이 경험 이전과 이후의 나 자신은 전혀 다른 사람이라고 할 만한 변화였다. 즉, 단절이 발생한 것이다. 


 이 경험이 있기 전에도 다윈의 진화론과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에 열광하면서, 합리성과 이성이라는 신화에 도전하는 포스트모던적인 이야기들에 고개를 주억거리면서 동의했다. 즉, 인간이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라는 말이 전혀 옳지 않다고 생각한 셈이다. 그래서 효율 중심의 ‘경제적 동물’로서의 인간이나 모든 것이 통제되고 합리적으로 생각하는 ‘계몽적 인간’도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인간은 불합리하고 감정에 의해서 통제되는 ‘동물’의 하나라는 생각이 기본적으로 깔려 있었다.


 하지만 이런 모든 생각은 역설적이게 철저히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방식이라고 생각되는 방법으로 얻어낸 결과들이다. 진화론은 과학적 방법론과 광범위한 관찰이 적용되었고, 정신분석에서 프로이트는 건조할 정도로 철저하게 과학적 원인에 집착한다. 그것을 보고 전개되는 논의들도 대부분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라는 외피를 위하여 철저하게 논리성을 추구한다. 어쩌면 이는 이성과 합리성의 극단을 추구한 결과가 자기 부정으로 이어지는,  『괴델, 에셔, 바흐』 식으로 말하면 자기 부정에 도달할 정도로 고도의 이성과 합리성인 셈이다.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이성으로 관찰한 결과 인간에게는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이성이 없는 것 같다.”라는 패러독스에 가까운 결론에 도달하는 것이 만족스러웠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이는 입으로는 인간에게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이성이 없다.”라고 말하면서 지적인 허영심을 만족시키고, 은연중, 그 말을 하는 나 자신은 훈련받은 지식인으로서 “충분히 합리적이고 객관적이다.”라는 선민의식도 같이 즐겼던 것이 아닌가 싶다. 여하튼 입으로는 인간의 이성과 합리성을 부정하면서 추구하는 것은 바로 그 이성과 합리성이었다. 하지만 파국을 경험하고 난 이후에는 그냥 동물 레벨로 떨어져서 온갖 욕구에 매순간 꿈틀거리기에 바빴다.


 망상을 뿌리째 뽑으려는 의도 뒤에는 각종, 생각과 망상이 결국, 어떤 연쇄 반응에 의해서 일어났다는 가정이 있었다. 즉, 생각과 생각이 이어지면서 점차 망상으로 전개되고 그 망상에서 허우적대는 자신의 모습을 일종의 망상-모델로 떠올린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은연중 암묵적으로 전제하고 있었던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단 한가지의 근원적 망상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근원적 망상은 프로이트식으로 말하면 리비도일 것이고, 불교식으로 말하면 무명(無明)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바라봄으로써 그 경계를 뚫고 허무함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식의 모델은 칼릴지브란과 무협지의 합작이었던 것 같다. 아마도 항상 성욕에 관련된 잡념이 많이 나타나므로 프로이트를 같다 붙이고 거기에 주워들은 불교 상식과 무협지적 망상, 각종 형이상학적 모델을 짬뽕해서 얼기설기 만든 어떤 정신 모델을 은연중 신봉하고 있지 않았나 싶다. 


 하지만 망상 들여다보기를 반복하고 단기 기억상실을 몇 번 경험하면서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고통스럽게 알게 되었다. 


 우선, 하나의 망상을 확인하고 그 망상의 원인이 되는 생각을 보려고 했지만 보지 못했다. 하나의 망상을 잡아서 그것을 응시하면서 이 원인이 되는 망상을 보려고 할 때, 강하게 집중하면 의식이 날아갔고, 집중하지 못했을 때는 그저 망상 속에서 허우적대기만 했다. 하지만 들여다보기를 그만두고 일어난 상황을 곰곰이 곱씹어보면 망상 속에서 허우적댈 때나 의식이 날아가서 망상 한 가운데서 깰 때나 결국은 비슷했다. 현재 망상의 원인이라고 할 만한 앞서의 생각이나 망상을 발견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저 생각은 이 생각에서 다른 생각으로 비약하고 넘어갈 뿐이었다. 단지, 그 중간에 의식의 단절이 일어나는 것을 인식하느냐 인식하지 못하느냐의 차이만 있었을 뿐이었다. 이건 큰 충격이었다. 왜냐하면 생각의 근원이 다른 생각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관찰하는 의식은 그것을 전혀 감지하지 못했다. 그것을 감지하려고 하면 의식은 그대로 전원이 꺼져버렸고, 감지하려 하지 않았을 때는 생각의 도약을 은폐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생각이라는 것은 ‘연쇄’라는 말이 붙을 만큼 많은 생각들이 이어지는 것이 전혀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용출하는 욕구에 바로 달라붙은 작은 조각에 불과했다. 어떤 근원적인 망상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실재적인 성욕, 게임욕, 식욕, 명예욕이 생각의 근원에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욕구는 외부의 자극을 받았든 내부의 자극을 받았든 생각과 상관없이 촉발되었다. 가령, 성욕이 가장 대표적이다. 성욕이 용출할 때마다 그에 따른 의식적 생각이 형성된다. 다른 사람은 어떤지 알 수 없지만 스스로의 성욕을 추적했을 때 깨닫는 바가 있었다. 일단, 성욕은 생각을 통해서 일어나지 않는다. 매력적인 이성이 지나가면 그 이성을 눈과 몸이 따라가고 그 뒤에서 생각이 달라붙어서 그 행동의 이유를 만들어낸다. 그렇게 의식에서 만들어내는 이유는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는데, 결정적으로 반응보다 생각이 먼저 일어났다고 선후를 뒤바꿔 놓는다. 즉, 자신이 그 이성을 매력적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눈과 몸이 따라가고 있다는 것으로 뒤바꿔 놓는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이제 고개를 돌리고 내 일에 집중해야지라고 마음먹어 보려고 노력해보라. 일단, 그런 생각이 잘 들지도 않고, 억지로 그런 생각을 떠올려서 움직여보려고 하면 상당한 저항감과 온갖 핑계가 순식간에 떠오른다. 즉, 욕구가 우선이고 생각은 부수적이다.


 아마 위와 같은 상황을 많이 느껴보았을 것이다. 성욕, 게임, 담배, 식욕 등등이 용출할 때마다 자주 찾아오는 현상들이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자주 겪고 느낄 수 있는 것들이다. 하지만 이 상황의 이면에 욕구가 용출하기 이전 상황과의 불연속성이 있다는 점을 잘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지하철에서 책이나 스마트폰을 집중해서 보거나, 동행인에게 집중하고 있었을 수 있고 중요한 생각을 진행시키고 있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지나가는 이성에 의해서 성욕이 용출했을 때는 그 모든 것을 잊고 성욕으로 인한 생각과 제어에 몰두하게 된다. 그리고 그 과정은 자동적이고 불연속적이며, 갑자기 그 전에 무엇을 했는지 잊게 되는 찰나의 기억상실이 있다. 게임, 좋아하는 연인, 담배 등등 우리 주위에 우리를 지배하는 이 모든 것들은 비슷하게 작동한다. 


 나 자신의 망상을 들여다볼수록 내 생각이니 합리성이니 하는 것들이 그런 욕구에 붙어서 일어난다는 점이 명확하게 느껴졌고 욕구가 이동할 때, 내 생각도 그리고 그것을 감지하는 의식도 강제로 바로 이동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생각과 의식은 그야말로 곁다리에 불과하다. 욕구가 바뀌면 생각과 의식도 같이 점프하지만 의식은 그 변화를 인지하지 못하거나 알아도 그것을 속이고 연속적인 것처럼 은폐할 뿐이었다. 


 아무리 근대적이고 합리적인 인간상을 부정해 왔어도, 노력하고 경계하고 의식하면 어느 정도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겨왔던 것 같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나’라고 하는 어떤 일관되고 연속적이고 고유한 그 무엇이 있다고 여겨왔던 것 같다. 그리고 나는 스스로 그것들을 ‘의식’하고 있다는 암묵적인 믿음이 있었던 것 같다. 그렇지만 파국의 경험은 그 모든 것이 ‘의식’의 거짓말이라는 확신을 갖게 했다. 그리고 그 확신과 함께 나는 나 자신에 대한 모든 통제력을 상실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당시에는 이미 모든 것이 뜻대로 잘 되지 않는 심리적으로 힘든 시기였다. 그런데 그 동안 스스로 통제하고 일관된 ‘나’로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항상 욕구에 맞추어 생각하고 의식했을 뿐이라는 것을 깨닫고 스스로 통제되고 일관된 ‘나’가 조악한 환상이라는 것을 절감하면서 최후의 심리적 방어까지 무너졌던 것이 아닌가 싶다.

이번엔 최면(hypnosis)에 대해서 간단히 이야기해보자. 최면도 인간의 정신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시사해주는 바가 많기 때문에 꼭 한번 들여다볼 필요가 있는 분야라고 생각한다. 아마도 최면이라고 하면 정신을 잃은 사람이 최면술사에게 조종을 당하는 장면이 떠오를 것이다. 평소라면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에 답하거나 무척 오래된 과거를 생생하게 기억하게 하거나 이상한 행동을 하게끔 하는 무언가 신비하고 것이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최면이다.


이러한 최면을 통하면 사람들을 마음껏 조종할 수 있을 것 같다. 가령, 특정 암시를 심어놓으면 신호에 맞춰서 다른 사람을 암살하게 한다거나 기밀을 빼돌리게 하는 등 사람을 도구로 쓸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해준다. 실제로 이러한 내용을 전개한 영화나 드라마도 상당수 있다. 그런 영화나 드라마를 볼 때 꼭 생각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나는 최면에 걸리지 말아야 하면서 속으로 최면을 걸리지 않을 방법을  강구해본다. 혹은, 최면에 걸린 척 하면서 적의 음모를 분쇄하는 것을 떠올려보기도 한다.


다행히,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이는 최면은 어떻게 도망갈 방법이 있을 것 같다. 가장 먼저는 최면술사를 경계하는 것이다. 실수로 최면술사의 음모에 빠지게 되면 최면으로부터 저항하면 될 것 같다. 가령, 최면을 걸 때는 일정하게 깜빡이는 빛이나 주기적으로 운동하는 진자 같은 것을 보게끔 하는데 그럴 때 눈치채고 보는 척 하면서 실제로는 그것을 보지 않는 것이다. 그러면서 최면에 걸린 것처럼 말없이 그것을 바라보는 척 하면, 최면술사가 이제 나를 유도하려 할 것이다. “몸이 이완됩니다. 몸이 편안해집니다.”와 같은 목소리가 들려오면 그에 맞추어 실제로 그렇게 느끼는 척 하면 최면술사를 속일 수 있을 것 같다. 여튼, 최면의 존재를 모르고 멋모르고 휘말릴 수는 있어도 최면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것을 경계하면 최면에 걸리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완전히 속수무책으로 당하지는 않을 것 같아 다행이다.


하지만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최면은 무대 최면의 일종이라고 한다. 즉,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하는 최면이다. 이러한 방식의 최면은 매우 오랫동안 있어왔고 조금 정형화된 최면의 방식이다. 최면은 무대에서만 사용되는 것이 아니다. 이미 프로이트 시절부터 심리치료의 방법으로 사용되었고 보다 나은 치료를 위하여 최면에 대한 연구는 계속 진행되어왔다. 당연히 그 이론이 정밀해지고 기술이 발전해왔다. 현대에 와서 밀턴 에릭슨 같은 사람들로 인하여 최면은 정형화된 형식을 벗고 그 근본적인 원리를 응용하여 일상적으로 다양한 분야에서 그것을 응용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현대의 최면은 보통 데이브 엘먼이 정의한 아래의 내용과 같이 소개된다.


“의식의 비판적 사고를 우회하여 받아들일만한 선택적 사고를 확립하는 것”


세상은 다양한 메시지를 보낸다. 메시지는 선언이 될 수도 있고, 정보가 될 수도 있고, 의견이 될 수도 있다. 공통적인 것은 그러한 메시지가 수용되면 그대로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가령, 사과를 손에서 놓으면 땅에 떨어질 것이라는 새삼 당연한 정보를 수용하게 되면, 그 때부터 이 정보에 어긋나는 것은 다른 카테고리에 묶이게 된다. 현실에서 누군가 사과를 손에 놓아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한다라고 주장한다면 거짓말이라고 여길 것이다. 그게 가능하다는 것을 보이기 시작하면 속임수가 있다고 믿거나 그것을 설명하기 위하여 엉뚱하게도 염동력이라는 것을 설정할 수 있다. 요컨대 받아들여진 진실은 최대한 고정되고 그 외부를 수정하게 된다. "개인의 인권은 존엄하다."라는 선언을 수용하게 되면, 개인의 인권을 침해하는 모든 행위에 대해서 비판하고 그것을 제거하기 위해 노력하게 된다. "회사원은 회사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해야 한다."라는 선언을 수용하게 되면 회사를 위하여 열과 성을 다하여 일하게 될 것이다. 메시지가 개인에게 수용되는 순간부터 메시지는 그 개인의 세계관, 가치관에 영향을 미치고 그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는 압력을 받게 된다. 따라서 이러한 메시지가 사람들 속에 아무런 여과없이 들어오게 되면, 사람들은 수많은 메시지 속에 매몰되어 버릴 것이다. 따라서 이것을 여과해줄 필터가 필요하다. 


메시지를 여과해주는 필터가 바로 의식의 비판적 사고다.  이 비판적 사고는 사려깊은 숙고를 통해서 작동할 수도 있고, 단순히 슬쩍 보고 거부하거나 수용하는 본능적이고 직관적인 판단이 될 수도 있다. 의식의 비판적 사고의 수준이 어떻게 되었든 간에 개인의 상황과 맥락, 사회문화계급적 상황, 가치관, 세계관 등에 따라서 결국, 해당 메시지를 수용할 것인지 거부할 것인지 결정하는 과정을 통해 개인은 자신을 사회적 메시지로부터 적절하게 보호하고 일관성과 개성이라는 것을 만들어 나간다. 


의식의 비판적 사고라는 용어는 무척 합리적인 사고인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앞서 이야기했듯이 그 비판적 사고의 수준은 깊은 숙고에서 본능적이 직관적인 판단까지 천차만별이다. 그리고 그 비판적 사고라는 것은 개인의 입맛대로 바꿀 수 있는 그 무엇도 아니다. 오히려 내부로부터 그냥 그대로 나오는 우리 자신 그 자체다. 그래서 자기 파멸적인 메시지만 수용하는 사람은 자신이 한심하거나 못난 사람이라는 메시지를 적극적으로 수용한다. 인종차별주의자는 인종차별의 정당성을 말하는 메시지를 적극 수용한다. 또, 다이어트를 하는 사람은 해당 음식을 먹으면 안된다고 스스로를 비난하면서 그것을 먹어야할 정당한 이유를 찾는 등 분열된 메시지를 수용할 것이다. 


이러한 비판적 사고를 우회하는 까닭은 최면이 보통 그 사람이 자연스럽게 당연히 하는 것들을 하라고 권유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보통이라면 하지 않을 일을 하게끔 하는 도구이기 때문이다. 특히, 우울증 극복, 다이어트, 편식하는 습관 교정 등에서는 개인의 비판적 의식이 장애물로 작동하는 경우가 있다. 즉, 자기 파멸적인 메시지만 수용하는 사람이 긍정적이 되려고 노력하는 상황을 생각해보자. 그는 여기저기서 들은 내용들을 실천해볼 수 있다. 햇빛을 본다거나 규칙적인 생활습관을 하고, 긍정적인 관계를 만들고 등등 여러가지를 수행할 것이다. 하지만 본인의 비판적 의식이 자기 파멸적인 내용을 주로 메시지로 수용하기 때문에 습관적으로 자신을 비난하고 우울해질 근거를 찾게 된다. 당연히 그런 계획들을 실천하는 것이 어리석어 보이고 불필요해 보이게 된다. 하지만 주위에서 자신이 변하길 원하는 사람들 때문에 억지로 흉내를 내게 된다. 하지만 본인이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니 성공할 수 없다. 계획한 긍정적인 습관은 계속 좌초되고 그 좌초됨으로 인하여 다시 절망하는 과정이 반복되면서 오히려 더 상황이 심각해질 수 있다. 이런 경우 그 비판적 의식이 문제가 되므로 을 우회해서 긍정적인 메시지를 주입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선택적 사고는 메시지 그 자체를 확고하게 굳히는 것을 말한다. 보통, 비판적 사고를 우회하면 메시지가 수용된다. 하지만 비판적 사고가 아니더라도 메시지가 온전히 수용되는 것을 방해하는 요소들이 있다. 만일, 최면을 통하여 우울증 환자에게 긍정적인 메시지를 수용시킨다 하면, 일시적으로는 기분이 좋아지겠지만 본인을 한심하게 생각하고 비난하는 성향과 충돌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리고 보통은 기존의 성향이 다시 튀어나오면서 긍정적인 메시지를 지우게 된다. 따라서 긍정적인 메시지를 수용시키면서 기존의 부정적인 메시지를 무시하게끔 만들어야 한다. 즉, 우리가 현실에서 자신이 원하는 것만 보고 원하지 않는 것은 무시하게 하는 확증편향적 사고를 선택적 사고라고 하는데, 그러한 확증편향이 발생하여 부정적인 메시지를 무시하게끔 만들어야만 그 최면에 의해서 심어진 긍정적인 메세지가 온전히 역할을 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최면은 심은 메세지에 대한 믿음을 구축하여 선택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선택적 사고를 확립함으로써 이루는 것이다.


그렇다면 현대 최면은 어떻게 이루어질까? 보통은 우리가 흔히 보는 것처럼 피시술자의 의식이 마비되는 트랜스 상태를 유도하여 원하는 선택적 메시지를 심는다. 즉, 무대최면에서 자주 보는 것과 유사하다. 그런데, 최면에 잘 걸리지 않아 트랜스 상태로 유도하기 어려운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은 예전이라면 최면을 걸 수 없었겠지만 현대 최면은 구태여 트랜스 상태를 유도하지 않고 말 그대로 의식을 우회하여 메시지를 심으려고 한다. 


의식이라는 것은 한 번에 하나만 집중할 수 있다. 의식의 초점 아래에 있는 것이 의식의 대상이 되고 그 외의 다른 정보는 배경으로 받아들이지만 전체적으로는 하나만 대상이 된다. 소매치기들은 한 번에 한 가지만 의식할 수 있는 인간의 속성을 이용한다. 보통 두 사람이 한 팀이 되어서 소매치기를 한다. 한 사람이 목표가 되는 사람과 먼저 부딪히거나 시비를 붙어서 그 사람의 주의를 끈다. 사람의 의식은 한 번에 한 가지만 처리할 수 있으므로 시비를 붙거나 강하게 충돌할 경우 모든 주의가 시비를 붙은 사람이나 충돌에 쏠리게 된다. 그 때, 다른 사람이 몰래 다가가 지갑을 집어간다. 평소라면 소매치기가 지갑을 집어가는 것을 의식했을 테지만 주의가 다른 것에 쏠려있기 때문에 그것을 거의 눈치채지 못하거나 뒤늦게 눈치채게 된다. 


현대 최면의 방법은 소매치기들보다 교묘하게 의식을 우회하여 메시지를 심는다. 가령, 낮은 자존감과 자기 비하에 빠진 사람에게 위로를 하면서 “당신은 착하고 훌륭한 사람입니다.”라고 이야기한다면 보통 자학에 빠진 사람들은 그 말을 빈말이나 거짓말로 여기면서 부정할 것이다. 하지만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반복해서 들려준다면 어떨까? 밑줄을 친 부분을 이야기할 때마다 탁자를 두드리거나 손바닥을 치면서 자연스럽게 강조하면서 말한다.


당신은 1990년에 착하고 훌륭한 부모님 밑에서 태어난 사람입니다.”


표면적인 메시지는 이 사람의 부모님이 착하고 훌륭하다는 것이므로 이 사람이 부모님을 좋아한다면 이 것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잠재적인 메시지는 “당신은 착하고 훌륭한 사람입니다.”이다. 이 사람의 의식은 표면적인 메시지에 주목하여 그것에 집중하지만 잠재적인 메시지는 의식을 우회하여 그에게 전달된다. 의식이 마비되는 트랜스 상태를 유도할 수 없으므로 효율이 좋지는 않지만 반복을 통하여 의식을 우회하는 메시지를 계속 전달할 수 있다. 성공적으로 메시지가 전달되면 그 사람은 약간의 자존감 회복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것은 무척 단순화된 설명이다. 


이제 현대 최면의 정의를 살펴보았고, 현대 최면의 정의를 통하여 의식이 마비되는 트랜스 상태가 아닌 상황에서도 최면이 어느 정도 가능함을 간단하게 단순화하여 설명해보았다. 그런데 이러한 현대 최면에 대해서 살펴보니 영감을 자극하는 바가 있다. 의식을 우회하여 전달되는 메시지라는 것이 과연 최면만 있는 것 같지 않고 의식과 수용이라는 주제도 매우 흥미롭다. 무엇보다도 기존에 생각하고 있던 최면에 저항하는 방법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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