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정신구조가 2항 구조일 것이라는 막연한 직관 후에는 이를 설명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으로 생각되어 이것저것 책을 집어 보기 시작했다. 몇 가지 분야가 호기심을 이끌었는데, 주역, 논리학, 심리학이었다. 

    

주역은 음양의 이치라는 말의 원전이라고 할 수 있다. 2항 구조라는 것이 이분법이나 음양의 이치라는 말과 비슷했기에 주역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예전이었다면 주역을 종교적인 경전 수준의 믿음의 결과물로 여겼을 것이다. 따라서 음양의 이치라는 말도 딱히 부정하기 어려운 하나의 관점 정도로 생각했을 것이다.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있다는 말을 부정하긴 어렵기 때문이다. 그리고 너무 뻔한 말이기 때문에 아무런 가치도 느낄 수 없는 말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사람이 2항 구조로 지식의 체계를 구축하고, 2항 구조로 된 지식만 이해할 수 있다가설을 갖게 되면서 생각이 바뀌지 않을 수 없었다. 즉, 세상이 음양이 이치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사람이 2항 구조로 즉 음양의 이치로 되어 있기 때문에 세상을 음양의 이치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주역은 세상을 보는 인간의 2항적 구조를 선명하게 드러내는 귀중한 자료일지 모른다. 

   

그런 호기심 때문에 주역을 보았지만 막상 주역에는 음양에 대한 이야기가 거의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는 주역의 해설편인 계사전에 나오는데, 이를 중심으로 한나라의 많은 철학자들이 사상을 전개하면서 음양의 이치라는 것이 점점 중요하게 부각되고 그 철학적 개념이 심오해진다. 당시 내 한문 실력으로는 그런 내용들을 이해하기 어려웠고, 동양학 전체를 관통하기 위한 어마무시한 공부량이 요구되기 때문에 결국, 이성적이고 학문적인 접근은 포기하고 직접 사용해보기로 했다. 즉, 주역으로 점을 치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점(占) 치다가 계시 받아본 이야기에서 언급한 것처럼, 점(占)을 치면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황급하게 그만두게 되었다. 추후에도 조금씩 책을 읽어보기는 했지만 본격적인 공부를 한 것이 아니라서 겉핥기 수준을 넘어갈 수 없었다.

   

논리학 “괴델, 에셔, 바흐”를 말한다. “괴델, 에셔, 바흐”에 대해서는 한 번 언급한 적이 있으니 참고하기 바란다. 논리학을 공부한 적은 없지만 “괴델, 에셔, 바흐”의 내부에 간단한 논리학을 다루고 있고, 그 중심 주제가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였기 때문에, 논리적으로 어떻게 증명하는지는 몰라도, 그 정리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열심히 고민해 보았다.

   

“괴델, 에셔, 바흐”는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로 나타나는 인간 지성의 한계에 대해서도 논하고 있다. 아무리 합리적이고 뛰어난 시스템이라고 해도 그 한계가 있고 모든 진리를 증명할 수 없다는 논지였다. 이는 합리적으로 완벽하게 증명된 진리의 상아탑을 만들려고 했던 근대 과학에 대한 사형 선고였다. 즉, 인간의 학문은 제한적인 진리만을 엿볼 수 있다. 물론, 과학, 논리, 이성이 틀렸다는 것은 아니다. 단지 제한적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이런 내용들을 직관적으로 독자에게 전달하기 위해서 에셔와 바흐를 이야기하고 패러독스와 선문답으로 양념을 하고 있다. 

   

“괴델, 에셔, 바흐”의 내용이 인간이 구축한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세계의 한계를 지적하는 점이 우리의 인식이 2항 구조라는 틀에 제한을 받고 있다는 생각과 어느 정도 닿아 있다고 생각되면서 책에서 언급하고 있는 분야 중에서 어느 정도 이해가 가능한 부분들은 열심히 들여다보게 되었다. 그 때 특히 눈길을 끌었던 것은 불교였다. 저자가 패러독스선문답을 배치하여 보여줄려고 했던 바가 궁금하여 그것을 한참 찾게 되었지만 15년이 지난 최근에서야 불교를 제대로 공부하면서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되었다. 이는 나중에 이야기해보도록 하자.

   

또 다른 것은 인공지능이었다. "괴델, 에셔, 바흐"에서 소개된 내용 덕분에 인공 지능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왜냐하면 호기심을 가지고 인간이 어떻게 생각하고 작동하는지 생각하고 있는데 결국, 호기심이 되었든 진지한 연구가 되었든 발견된 내용들은 인공지능으로 구현될 때 가장 이상적인 구현이 되겠구나 하는 자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2항 구조나 인식의 한계나 이런 추상적인 내용들을 최종적으로 검증하기 위해서 사람을 대상으로 실험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튜링테스트처럼 인공지능으로 구현하고 그 인공지능이 얼마나 사람처럼 행동하는지 보고나서야 스스로 발견한 개념들을 확증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인공지능이라는 주제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인공지능을 살펴보려고 했지만 이 영역은 시작부터 큰 난관에 부딪혔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2000년대 초에는 지능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을 찾기 어려웠다. 지능이 무엇인지 수많은 학자들이 정의하고 논하고 있지만 누구나 납득할 수 있는 확실한 것이 없었다. 그러니 인공지능을 개발하는 사람들은 정체 불명의 것을 만들고 있는 셈이다. 문제가 해결될 리가 없어 보였다. 그래서 인간의 마음을 연구하는 심리학에서 지능을 어떻게 여기는지 들여다보게 되었다. 

   

심리학은 기대하고 생각했던 것과 너무 많이 달랐다. 당시에는 오래된 행동주의 심리학이라는 구호와 함께, 심리학은 과학이 되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었다. 그래서 마음처럼 주관적이고 확증할 수 없는 것을 배제하고 오직 데이터만을 가지고 이야기해야 한다는 식의 내용이 주를 이루었다. 그래서 심리학인데 마음을 이야기하는 것이 금기인 이상한 학문이었다. 오직 겉으로 드러난 행동만을 데이터로 제시할 뿐 그 내부에 심리적으로 어떤 기전이 작동하는지 추론조차 할 수 없도록 제한되어 있었다. 심리학이 아니라 인간생태학이나 인간동물학이라는 표현을 쓰는게 더 맞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마음을 논해야할 자리에는 신경세포를 열심히 설명하고 있었지만 그 신경세포에 대한 설명이 마음에 대해서 무엇인가를 설명해주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저, 과학이기 때문에 가장 과학적인 신경세포로 환원시켜 인간의 마음을 설명하겠다는 원대한 포부로만 느껴졌다. 당시, 이러한 행동심리학에 대한 많은 반발이 있고 새로운 심리학을 구축하려는 과정도 진행되고 있다는 이야기도 들었지만 당시로서는 요원한 이야기였다.

   

심리학은 지능에 대해서도 만족할만한 정의를 내려주지 않았고 이해하기도 너무 낯선 학문이었다. 그래서 추후 마음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서 프로이트류의 정신분석학을 들여다보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아예 소득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심리학 교과서에서 처음으로 신경세포에 대해서 제대로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괴델 에셔 바흐라는 책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돌이켜 보면 20대 중반의 1년 정도 이 책을 열심히 읽었는데 그로부터 지금까지 대략 20년간 내 삶의 방향은 이 책과 직접 간접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여전히 잘 이해하지 못하는 책이기도 하다.

     

왜 읽기 시작했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어떤 선배의 펌프질로 읽기 시작했는데 읽자마자 총제적인 난관에 부딪혔다. 괴델 에셔 바흐는 당시 읽었던 다른 어떤 종류의 책으로부터도 겪어보지 못한 신기한 구성으로 방대한 분야를 통합한 책이다. 바흐의 일화로부터 시작해서 논리학, 수학, 컴퓨터 과학, 패러독스를 거쳐 에셔의 그림과, 현대 수학이 마주친 혁명적인 변화 그리고 불교의 선문답을 어우러지게 하면서 알고리즘과 생물학까지 통섭하고 있는 미친 책이다. 언급한 모든 분야에서 수박 겉핥기로 스쳐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해당 분야의 핵심을 전문적으로 간결하게 짚어나가고 있어서 배경지식이 없으면 거의 이해하기 어려운 수준의 난이도를 보여준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각각의 내용들이 따로 노는 것이 아니라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그 선배와 같이 이 책을 읽어보기로 했던 친구들은 대부분 정말 독서를 많이 했고 박학한 교양과 깊은 지성을 보여주는 사람이었지만 어디까지나 문과였기 때문에 수학, 논리학, 컴퓨터 부분에서 침묵할 수밖에 없었고, 바흐의 음악 이론은 모두가 꿀먹은 벙어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직관적으로 눈으로 보고 인식할 수 있는 에셔의 그림들과 그래도 어떻게든 알아들을 수 있고 몇 번 접해본 그리스의 패러독스, 불교의 선문답 위주로 책을 읽고 해석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독서 모임은 간단하게 한 번 읽는 수준으로 흐지부지 끝났지만 개인적으로 그 책을 계속 읽어 나갔다. 나름 독서를 좋아하는 편이지만 서사와 지식 위주의 독서를 했다면 이 괴델 에셔 바흐』를 읽는 경험은 간결하고 잘 짜여진 이야기와 조각조각 이어지는 사유의 흐름 속에서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근원적인 무언가를 묘사하고 있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면서도 조화로운 가운데 아름답다고 느꼈고 그 근원을 알고 싶은 강렬한 열망 때문에 책을 손에서 놓지 못했다.

     

괴델 에셔 바흐는 굉장히 다양한 분야를 심도있게 다루고 있지만 동시에 비슷한 이야기를 끊임없이 변주하고 있다. 그렇다 변주다. 비슷한 주제가 다른 방식으로 반복되는 것이다. 음악, 논리학, 생물학, 수학, 패러독스, 인공지능, 그림, 불교의 선문답이 마치 전혀 다른 이야기인 것처럼 심도 있게 펼쳐지지만 그 핵심에 어떤 비슷한 무엇인가가 다른 방식으로 펼쳐지고 있는 느낌을 준다. 그렇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책에서는 명시적으로 그것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 그저 상징적으로 영원한 황금 노끈이라고 말한다. 그 부분은 인간의 지성이 극대화 되는 부분이고 동시에 인간 지성의 한계가 노출되는 무한히 순환하는 어떤 뫼비우스의 띠 같은 느낌을 준다. 잘 모르니 계속 이렇게 감상적으로만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니 이 책을 이해하기 위해서 수학사와 현대 수학 그리고 논리학을 공부하기도 했다. 그리고 패러독스와 선불교의 선문답을 읽어보고 육조 혜능의 육조단경도 읽어보게 되었다. 덕분에 어떤 환상적인 비전을 그려볼 수 있게 되었는데 그것은 무한세계에 대한 어떤 동경 같은 것이었다.

       

칸토어의 무한 증명, 또, 튜링머신으로 그것을 증명한 튜링, 그들이 증명한 것은 오직 극도의 추상적인 사유와 그것을 뒷받침하는 지성으로만 도달할 수 있을 뿐 상상과 사유로 도달할 수 없는 아득하게 초월한 영역으로 그것이 무엇인지 그려보기도 힘든 영역이다. 마찬가지로 양자역학에서 말하고 있는 양자의 행동도 계산하고 증명은 가능하지만 직관적으로는 인식할 수 없다. 따라서 인간의 사유방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고 그저 계산을 통해서 확인하고 그 결과를 수용해야만 하는 기괴한 세계다. 마지막으로, 괴델은 논리적으로 정합적인 참인 명제들이 증명할 수 없다는 점을 증명한다. 이 무슨 말인가? 증명되지 않은 참인 명제라는 것은 실제로 참이지만 그것이 참인지 아닌지 증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그리스 시절에 제시된 패러독스를 통해서 다시 인간 지성의 한계를 다시 보여준다. 그리고 그것을 초월하기 위한 선불교적 시도를 보여주고 있다

    

결국, 20세기에 들어오면서 많은 분야에서는 혁명적인 발전과 동시에 어떤 지성의 한계에 봉착하게 된다. 지성 자체가 진리를 이해하기에는 부족함을 알게되는 지성, 진리의 극한에서 오히려 이해할 수 없는 진리에 도달해버린 지성이다. 그리고 그런 모순 상태, 참인지 거짓인지 증명할 수 없는 상태를 다시 어떤 절대적인 일관된 이성으로 뛰어넘으려고 하기 보다는 오히려 지성의 한계를 인정하고 역으로 그 절대적인 진리라는 것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보다 폭넓은 가능성과 다양성으로 나아가기 위한 준거로 받아들이자는 이야기로 해석했다.

           

이 책을 통해서 결국 지성이라는 것에 대해 정말 깊이 통찰하였고 덕분에 그 지성의 한계를 뼈저리게 체감할 수 있게 되었다. 덕분에 인간의 지성과 이성이 무한하고 항상 옳다는 식의 계몽주의적인 맹목적인 믿음을 거둘 수 있게 되었고 인간의 이성이 제한이 있고 부족한 것이라는 자각과 함께 인간의 지성과 지능을 설계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호기심이 생겨나게 되면서 이때 처음으로 인공지능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원래, 더글라스 호프스태터 본인도 인지심리학자로서 인간 정신의 구조나 지성의 본질에 대한 통찰, 그리고 인공지능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 책의 곳곳에서 인공지능에 대한 그의 통찰을 조금씩 읽어볼 수 있었다. 덕분에 나도 인공지능에 대해서 그리고 인간의 의식에 대한 철학적인 사유를 접하게 되었고 이러한 접근을 20년 동안 손에서 놓지 못하고 계속 지속하게 되었다. 

      

괴델 에셔 바흐를 처음 읽었던 당시에는 추상적인 느낌만 있는 수준이었지만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꼭 알아야 할 어떤 진리가 있다는 강력한 확신을 얻었고 그것을 알고 싶은 마음에 관련 공부에 몰두하게 되었다. 덕분에 꽤 오랜 기간 방황하기는 했지만 좋든 나쁘든 현재의 나에게 가장 중요한 자산 중 하나를 형성하게 되었다. 

     

덧붙이면 괴델 에셔 바흐』에서 선불교를 인용하는 장면이 많이 나온다. 이것은 저자가 지성의 한계를  지성의 미혹으로 해석하여 이것을 치료하는 방법으로 선불교의 지혜를 선문답을 통해서 말하고 싶어하는 것처럼 해석이 되었고 그 덕분에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불교에 다시 관심을 가지게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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