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오감으로 지각되는 것을 정보로 인식한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당연한 이야기라 대부분 그러려니 한다. 인간이 오감으로 주위의 사물들과 교감한다는 것은 당연한 생각이다. 하지만 이 이야기를 뒤집어 보면 인간은 그 오감으로부터 주입되는 정보에 속수무책으로 노출되어 당하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잘 생각하지 않는다. 


잠시 자취하던 방의 위층이 옥상이었고 그 옥상에는 세탁을 할 수 있도록 세탁기들이 구비되어 있었다. 사람들은 저녁만 되면 세탁기를 돌렸는데 그럴 때마다 세탁기는 일정한 주기로 쿵쿵 소리를 내면서 돌았다. 그 쿵쿵 소리는 낮게 그리고 힘있게 울리면서 내 방과 공진했다. 다른 사람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런 규칙적인 소리가 계속 들려오면 큰 문제가 발생한다. 우연히 발생하는 불규칙한 소음이라면 어지간히 큰 소리 아니면 별로 신경쓰지 않지만 규칙적인 소리는 어느 순간부터 내 머리를 지배하기 시작한다. 그 규칙적인 주기를 머리가 자동으로 인식하고 그 주기에 동화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즉, 쿵 소리를 마음속으로 따라하면서 다음 쿵 소리가 규칙적인 주기를 준수하는지 계속 신경쓴다. 그래서 쿵 소리가 들린 후 다음 쿵 소리까지 긴장이 발생하고 계속 쿵 소리를 따라간다. 쿵 소리에 신경쓰느라 다른 것은 하나도 하지 못하게 된다. 마치 보도를 걸을 때 바닥에 깔린 규칙적인 타일을 따라 걷다보면 어느새 그 타일의 규칙성을 파악하고 그 규칙성이 준수되는지 신경쓰면서 그 타일 위에 걷는 내 발도 규칙성을 갖추면서 걷게 되는 것과 같다. 스스로 생각하기에 약간 강박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여튼, 세탁기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면 모든 활동이 강제로 정지되고 그 소리에 몰두하게 된다. 공부는 당연히 못하고, 글을 쓰거나 게시판을 둘러보는 등의 활동도 모두 하기 힘들어진다. 이 소리를 벗어나는 방법은 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크게 음악을 틀거나 매우 쉽게 몰입할 수 있을 정도로 자극적인 영상을 시청하는 것 외에는 집 밖으로 나가는 것 말고는 없었다. 이런 소리가 들렸을 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회피하거나 들리지 않도록 하는 것 말고는 없다. 소리가 들리면 그 소리에 종속된다.


사람은 정보를 무시할 수 없다. 가령, 눈앞에 절벽이 있는데 아무 걱정 없이 그 정보를 무시하고 절벽 밖으로 걸어갈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모든 사람들은 그 눈앞의 절벽을 인식하는한 그 절벽과 상호작용을 해야 한다. 절벽이 존재한다는 것을 끊임없이 두려워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그 절벽에 대해서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사람도 있다. 물론, 그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은 불필요한 걱정이나 두려움이 없다는 것이지 거기에 절벽이 있다는 것을 확실히 인지하고 있으면서 그 절벽 밖으로 떨어져 죽거나 부상당할 의도 없이 태연하게 걸어 나갈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또, 어떤 이는 생을 끝내겠다고 결심하고 뛰어내릴 수도 있고, 누군가를 밀쳐 떨어뜨리려고 할 수도 있다. 정보에 반응하는 내적이고 외적인 방식들은 매우 다를지라도 거기에 그것이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 절벽이 있기에 절벽을 인식하고 그것에 대한 스스로의 온갖 태도가 나온다. 다양한 방식으로 반응하지만 그 핵심에는 반드시 절벽이 있다는 것에 대한 인식이 있는 것이다. 


절벽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행동할 수밖에 없다는 말은 사람이 그 정보를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나는 사람이 정보를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을 인간의 “정보 종속성”이라고 지칭한다. 왜냐하면 정보가 제공되지 않았다면 모를까 마음은 정보가 제공되면 반드시 그 정보와 함께 일어나서 그것에 얽혀 전개되기 때문이다. 굳이 그것을 정보라고 표현하는 이유는 그것이 오감으로 지각된 사물일 수도 있고, 누군가의 이야기나 글일 수 있으며, 마지막으로 내면에서 올라온 마음의 소리일 수 있기 때문에 통틀어서 표현할 수 있는 단어가 정보이기 때문이다.


정보 종속성은 당연한 것들로 나타난다. 매력적인 이성을 보면 자기도 모르게 눈이 가고, 맛있는 것을 보면 침이 꿀떡 넘어가면서 먹고 싶은 마음이 생기고, 헤어진 옛 연인을 만나면 과거의 기억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것은 모두 그저 그것과 마주치기만 하면 자동으로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일들이다. 똥을 만나면 역하고, 향기로운 향에는 이끌리듯 이 모든 것이 저절로 자연스럽게 당연하다는 듯이 일어난다.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해서 이 과정을 의식하기 어렵다. 하지만 반대로 노력해보자. 노력해서 매력적인 이성을 만날 때마다 눈이 썩는 것 같고, 맛있는 것을 보기만 해도 역겹고, 헤어진 옛 연인을 볼 때마다 기억이 사라지면서 다시 처음부터 사귀듯 하게끔 노력으로 할 수 있는가? 보통은 할 수 없을 것이다. 만일, 그게 된다면 진화의 과정에서 일찍 탈락했을 것이다.


다이어트를 생각해보면 그 과정의 지독함과 지난함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다이어트는 평생 그냥 참는 것이다. 아무리 오랜 기간 다이어트를 한다고 해도 맛있는 것을 볼 때마다 토할 것 같이 역겹게 느끼게 되지 않는다. 다이어트를 그만둔 순간부터 즉시 식습관은 원상복귀한다. 만일, 식습관을 제어해서 맛있는 것을 맛없고 역겹게 느낄 수 있다면 모든 사람들이 쉽게 다이어트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거식증이라는 병적인 상태로 몰아넣을 정도의 압력이 필요하고 거식증에 걸린 순간부터는 삶이 다이어트보다 더한 지옥으로 변할 것이다. 당연히 쉽게 되지 않는다. 


정보에 반응하는 이 모든 자연스러운 과정은 인간의 생명체로서의 기능에 따라 이루어지는 부분도 있지만 또한, 경험이라는 사건을 통과해야 한다. 극단적인 경우는 마약과 같은 것이다. 그것이 좋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면 그저 호기심 정도였을 것이다. 호기심에 극단적으로 약한 것이 아니라면 평상시에 마약을 찾거나 마약을 찾아 돌아다니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마약에 중독되면 그 자극적인 경험은 그 때부터 끊임없는 갈증과 갈구를 낳고 일상생활 내내 그것을 찾아다닐 것이다. 경험이 없었다면 마약은 그저 “사람들이 너무 좋아해서 중독된다.”라고 하는 하나의 지식으로만 남았을 것이다. 


물론, 경험된 방식에 따라서 사람들은 다양한 반응을 보일 수 있다. 똑같은 상황, 사건, 사물이라도 누구는 좋아할 수 있고 누구는 싫어할 수 있다. 따라서 어떤 정보에 대하여 사람들의 반응이 달라지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위에서 이야기한 것은 이미 내 속에서 경험을 통해서 맛있다고 확립된 음식을 맛없다고 스스로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즉, 이미 사랑하는 사람을 외면하고, 이미 싫어하고 구역질 나는 똥에서 향기로운 냄새를 맡을 수는 없는 것이다. 경험을 통해 입맛대로 정보에 반응할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경험을 통해서 실제 그것을 체득하게 되고 해당 정보에 대하여 반응하는 모델이 완성되었다면 그것을 쉽게 수정하거나 변경할 수 없다는 것이다. 맛있는 것을 먹어본 경험이 있어야 그 맛을 그리워하게 되는 것이다. 맛있어 보이는 것일 뿐, 먹어보지 않은 것이라면 맛이 없을 것이라고 외면할 수도 있게 된다. 하지만 일단 맛있다고 자각하게 되면 그 때부터는 그렇게 부정할 수 없다. 마약에 중독되기 전이라면 삶을 건전하게 꾸려나가기 위해서 그것을 회피할 수 있지만, 마약에 중독된 후라면 회피가 불가능하고 그저 감내해야만 한다.


마약이나 낭떠러지와 같이 명백한 것이 아니더라도 정보 종속성은 분명히 존재한다. 로버트 치알디니의 『설득의 심리학』은 그러한 정보 종속성의 향연이다. 상대에게 호의를 베풀면 그 상대는 그 호의를 되돌려주어야 한다는 부담감을 느끼기 때문에 부탁을 거절하지 못한다는 상호성의 법칙, 스스로 한 행동의 일관성을 스스로 깰 수 없게 되는 일관성의 법칙, 군중심리나 외모 그리고 권위 등에 종속되는 인간의 행동 같은 것도 정보 종속성으로 설명이 된다. 여기서 제시된 모든 법칙은 이미 법칙이라고 불리는 시점에서 개인의 다양성과는 상관없이 사람들이 그 법칙에 종속되어 있음을 제시하고 있다.


이 정보 종속성이라는 개념은 꽤나 유용하다. 왜냐하면 상황을 올바르게 볼 수 있게 해주고 동시에 잘못된 해법을 피해서 제대로된 해법을 제시해주기 때문이다. 만일, 매일 지나가는 길목에 구역질나는 똥이 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아마도 똥을 피해 다른 길을 가거나 똥이 그 길목에 놓이는 이유를 찾아서 해결하려고 할 것이다. 그렇다면 다이어트를 하는 사람이 지나가는 길목에 평소 좋아하던 맛있는 빵집이나 음식점이 있다면 어떻게 할까? 알고 지내던 많은 사람들은 결국, 빵이나 음식을 먹고 자제력 없는 자신을 탓했다. 이건 마치 똥을 보고 구역질 한다고 스스로를 탓하는 것과 똑같다. 음식점이나 빵집을 볼 때마다 우리는 그 정보로부터 끊임없이 식욕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물론, 자제력을 발휘할 수도 있고, 열심히 외면할 수 있지만 그 과정은 결핍을 낳고 결핍은 다시 불행을 낳는다. 이 모든 것은 저절로 자연스럽게 불가피하게 일어나는 현상이다. 그 좋아하는 음식점과 빵집이라는 정보가 나타나면 거기에 그냥 종속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정보 종속성을 자각하는 사람이라면 똥을 피해서 가듯이, 맛있는 음식점이나 빵집을 피해서 다녀야 한다. 정보에 노출되지 않음으로써 스스로를 방어하는 것이다. 그곳을 피해 다니지 않은 자신의 어리석음을 탓할 수는 있겠지만 음식점이나 빵집을 보면서 식욕이 돌았다고 스스로를 탓하는 것은 똥을 향기롭게 느끼지 못한다고 스스로를 탓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올바르게 보지 못하고 잘못된 자기비하를 초래하며 자존감을 떨어뜨리는 보다 어리석은 행동인 것이다. 


하지만 수많은 상황을 전부 피할 수 없다. 항상 사건은 일어나고 세상은 부조리하게 느껴진다. 학원을 빼먹고 PC방으로 놀러가는 아들을 보고 분노가 일어났다면 그 뒤부터는 동일한 상황에서 계속 화가 치민다. 무섭게 호통치면서 질타하는 상사에게 두려움이 일어났다면 그 뒤부터는 그 상사가 입만 열어도 끔찍하고 두려워진다. 장시간의 노동 끝에 막걸리 한 잔에서 즐거움을 찾는 습관이 있다면 노동 후에 항상 막걸리가 그리워진다. 트라우마가 되었든 자신도 모르게 하는 습관이 되었든 한 번 결정된 것은 변하지 않고 반복된다. 그리고 그런 것들이 세상에 널려있어서 피해갈 수가 없다. 정보 종속성은 이런 상황에도 도움이 된다.


정보 종속성을 이해하게 되면 일어나는 모든 것에 저절로 마음을 빼앗기는 일을 막을 수 있게 된다. 스스로 의도했는지 여부와 상관없이 화나는 상황에 처하면 화가 나게 되고, 즐거운 상황에 처하면 즐거운 기분이 된다. 어제 원하는 대학에 입학해서 날아갈 듯이 행복했는데 다음날 삶의 목표가 없어졌다는 공허감에 우울해지기도 한다. 오늘 신기했던 장난감은 내일 바로 싫증나고 오늘 첨단 유행을 달렸던 옷들은 다음 시즌 유행에 뒤쳐진 퇴물이 된다. 이 모든 변덕에는 “나 자신”이 없다. 내가 화내는 것이 아니다. 그저 그 상황에 저절로 반응하고 있을 뿐인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보통 이런 상황을 마주치면 모든 원인을 자신에게 돌려 자책한다. 내가 너무 유행을 좇고 있거나 탐욕스럽거나, 소심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스스로를 바꾸려고 자신의 탐욕을 꾸짖고 소심함을 한심하게 여기면서 스스로를 비난한다. 하지만 정보 종속성은 그런 자책이 똥의 냄새가 향기롭다고 진심으로 생각하려고 노력하는 것과 다름없다는 것을 알려준다. 애시당초 잘못된 노력인 것이다. 이러한 잘못된 연관관계를 만들지 않게 되면 많은 감정들이 날아간다. 죄책감, 자책감, 한심함, 스스로에 대한 경멸, 자랑, 자만 등이 모두 그저 반응하는 것에 스스로를 원인으로 파악하면서 따라붙는 2차적 감정이다. 그리고 우리의 지혜를 가로막는 장애물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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