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망상을 관찰하고 이 망상의 근원으로 올라가 뿌리째 뽑으려 했다가 파국을 맞이하는 이야기를 했다. 이 정신적 파국은 2004년에 있었고 2016년이 되어서야 스스로 어느 정도 치유되었다고 말할 정도가 되었다. 그리고 그 12년간 이 파국에 대한 경험은 내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반복적으로 재생되는 악몽이었다. 이미 많이 좋아졌다고 여겨지는 현재에도 언제 다시 그렇게 나락으로 떨어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여전히 남아있다. 그러니 이 파국이 어떻게 일어난 것이고 나에게 무슨 결과를 가져온 것인지 파악하려는 노력이 계속될 수밖에 없었다. 이번엔 그렇게 개인적으로 곱씹으면서 파악해본 파국의 근원과 양상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노파심에 말하지만 만일, 누군가 이 경험이 재미있다고 생각해서 이것을 따라하려고 한다면, 절대 그러지 않기 바란다. 내가 겪은 일이 나의 유전적, 환경적 요인 때문인지, 아니면 보편적으로 마주칠 수 있는 경험인지 알 수 없지만 구태여 10여년의 기간 동안 폐인이 될 불필요한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이 경험을 구태여 파국이라고 명명한 이유는 통제 불가능해진 삶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 경험을 경계로 하여 근본적인 정신적 변화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이 경험 이전과 이후의 나 자신은 전혀 다른 사람이라고 할 만한 변화였다. 즉, 단절이 발생한 것이다. 


 이 경험이 있기 전에도 다윈의 진화론과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에 열광하면서, 합리성과 이성이라는 신화에 도전하는 포스트모던적인 이야기들에 고개를 주억거리면서 동의했다. 즉, 인간이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라는 말이 전혀 옳지 않다고 생각한 셈이다. 그래서 효율 중심의 ‘경제적 동물’로서의 인간이나 모든 것이 통제되고 합리적으로 생각하는 ‘계몽적 인간’도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인간은 불합리하고 감정에 의해서 통제되는 ‘동물’의 하나라는 생각이 기본적으로 깔려 있었다.


 하지만 이런 모든 생각은 역설적이게 철저히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방식이라고 생각되는 방법으로 얻어낸 결과들이다. 진화론은 과학적 방법론과 광범위한 관찰이 적용되었고, 정신분석에서 프로이트는 건조할 정도로 철저하게 과학적 원인에 집착한다. 그것을 보고 전개되는 논의들도 대부분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라는 외피를 위하여 철저하게 논리성을 추구한다. 어쩌면 이는 이성과 합리성의 극단을 추구한 결과가 자기 부정으로 이어지는,  『괴델, 에셔, 바흐』 식으로 말하면 자기 부정에 도달할 정도로 고도의 이성과 합리성인 셈이다.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이성으로 관찰한 결과 인간에게는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이성이 없는 것 같다.”라는 패러독스에 가까운 결론에 도달하는 것이 만족스러웠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이는 입으로는 인간에게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이성이 없다.”라고 말하면서 지적인 허영심을 만족시키고, 은연중, 그 말을 하는 나 자신은 훈련받은 지식인으로서 “충분히 합리적이고 객관적이다.”라는 선민의식도 같이 즐겼던 것이 아닌가 싶다. 여하튼 입으로는 인간의 이성과 합리성을 부정하면서 추구하는 것은 바로 그 이성과 합리성이었다. 하지만 파국을 경험하고 난 이후에는 그냥 동물 레벨로 떨어져서 온갖 욕구에 매순간 꿈틀거리기에 바빴다.


 망상을 뿌리째 뽑으려는 의도 뒤에는 각종, 생각과 망상이 결국, 어떤 연쇄 반응에 의해서 일어났다는 가정이 있었다. 즉, 생각과 생각이 이어지면서 점차 망상으로 전개되고 그 망상에서 허우적대는 자신의 모습을 일종의 망상-모델로 떠올린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은연중 암묵적으로 전제하고 있었던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단 한가지의 근원적 망상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근원적 망상은 프로이트식으로 말하면 리비도일 것이고, 불교식으로 말하면 무명(無明)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바라봄으로써 그 경계를 뚫고 허무함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식의 모델은 칼릴지브란과 무협지의 합작이었던 것 같다. 아마도 항상 성욕에 관련된 잡념이 많이 나타나므로 프로이트를 같다 붙이고 거기에 주워들은 불교 상식과 무협지적 망상, 각종 형이상학적 모델을 짬뽕해서 얼기설기 만든 어떤 정신 모델을 은연중 신봉하고 있지 않았나 싶다. 


 하지만 망상 들여다보기를 반복하고 단기 기억상실을 몇 번 경험하면서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고통스럽게 알게 되었다. 


 우선, 하나의 망상을 확인하고 그 망상의 원인이 되는 생각을 보려고 했지만 보지 못했다. 하나의 망상을 잡아서 그것을 응시하면서 이 원인이 되는 망상을 보려고 할 때, 강하게 집중하면 의식이 날아갔고, 집중하지 못했을 때는 그저 망상 속에서 허우적대기만 했다. 하지만 들여다보기를 그만두고 일어난 상황을 곰곰이 곱씹어보면 망상 속에서 허우적댈 때나 의식이 날아가서 망상 한 가운데서 깰 때나 결국은 비슷했다. 현재 망상의 원인이라고 할 만한 앞서의 생각이나 망상을 발견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저 생각은 이 생각에서 다른 생각으로 비약하고 넘어갈 뿐이었다. 단지, 그 중간에 의식의 단절이 일어나는 것을 인식하느냐 인식하지 못하느냐의 차이만 있었을 뿐이었다. 이건 큰 충격이었다. 왜냐하면 생각의 근원이 다른 생각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관찰하는 의식은 그것을 전혀 감지하지 못했다. 그것을 감지하려고 하면 의식은 그대로 전원이 꺼져버렸고, 감지하려 하지 않았을 때는 생각의 도약을 은폐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생각이라는 것은 ‘연쇄’라는 말이 붙을 만큼 많은 생각들이 이어지는 것이 전혀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용출하는 욕구에 바로 달라붙은 작은 조각에 불과했다. 어떤 근원적인 망상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실재적인 성욕, 게임욕, 식욕, 명예욕이 생각의 근원에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욕구는 외부의 자극을 받았든 내부의 자극을 받았든 생각과 상관없이 촉발되었다. 가령, 성욕이 가장 대표적이다. 성욕이 용출할 때마다 그에 따른 의식적 생각이 형성된다. 다른 사람은 어떤지 알 수 없지만 스스로의 성욕을 추적했을 때 깨닫는 바가 있었다. 일단, 성욕은 생각을 통해서 일어나지 않는다. 매력적인 이성이 지나가면 그 이성을 눈과 몸이 따라가고 그 뒤에서 생각이 달라붙어서 그 행동의 이유를 만들어낸다. 그렇게 의식에서 만들어내는 이유는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는데, 결정적으로 반응보다 생각이 먼저 일어났다고 선후를 뒤바꿔 놓는다. 즉, 자신이 그 이성을 매력적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눈과 몸이 따라가고 있다는 것으로 뒤바꿔 놓는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이제 고개를 돌리고 내 일에 집중해야지라고 마음먹어 보려고 노력해보라. 일단, 그런 생각이 잘 들지도 않고, 억지로 그런 생각을 떠올려서 움직여보려고 하면 상당한 저항감과 온갖 핑계가 순식간에 떠오른다. 즉, 욕구가 우선이고 생각은 부수적이다.


 아마 위와 같은 상황을 많이 느껴보았을 것이다. 성욕, 게임, 담배, 식욕 등등이 용출할 때마다 자주 찾아오는 현상들이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자주 겪고 느낄 수 있는 것들이다. 하지만 이 상황의 이면에 욕구가 용출하기 이전 상황과의 불연속성이 있다는 점을 잘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지하철에서 책이나 스마트폰을 집중해서 보거나, 동행인에게 집중하고 있었을 수 있고 중요한 생각을 진행시키고 있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지나가는 이성에 의해서 성욕이 용출했을 때는 그 모든 것을 잊고 성욕으로 인한 생각과 제어에 몰두하게 된다. 그리고 그 과정은 자동적이고 불연속적이며, 갑자기 그 전에 무엇을 했는지 잊게 되는 찰나의 기억상실이 있다. 게임, 좋아하는 연인, 담배 등등 우리 주위에 우리를 지배하는 이 모든 것들은 비슷하게 작동한다. 


 나 자신의 망상을 들여다볼수록 내 생각이니 합리성이니 하는 것들이 그런 욕구에 붙어서 일어난다는 점이 명확하게 느껴졌고 욕구가 이동할 때, 내 생각도 그리고 그것을 감지하는 의식도 강제로 바로 이동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생각과 의식은 그야말로 곁다리에 불과하다. 욕구가 바뀌면 생각과 의식도 같이 점프하지만 의식은 그 변화를 인지하지 못하거나 알아도 그것을 속이고 연속적인 것처럼 은폐할 뿐이었다. 


 아무리 근대적이고 합리적인 인간상을 부정해 왔어도, 노력하고 경계하고 의식하면 어느 정도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겨왔던 것 같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나’라고 하는 어떤 일관되고 연속적이고 고유한 그 무엇이 있다고 여겨왔던 것 같다. 그리고 나는 스스로 그것들을 ‘의식’하고 있다는 암묵적인 믿음이 있었던 것 같다. 그렇지만 파국의 경험은 그 모든 것이 ‘의식’의 거짓말이라는 확신을 갖게 했다. 그리고 그 확신과 함께 나는 나 자신에 대한 모든 통제력을 상실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당시에는 이미 모든 것이 뜻대로 잘 되지 않는 심리적으로 힘든 시기였다. 그런데 그 동안 스스로 통제하고 일관된 ‘나’로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항상 욕구에 맞추어 생각하고 의식했을 뿐이라는 것을 깨닫고 스스로 통제되고 일관된 ‘나’가 조악한 환상이라는 것을 절감하면서 최후의 심리적 방어까지 무너졌던 것이 아닌가 싶다.

중고등학교에 공부한다고 독서실에 처박혀 있을 때는 회의주의적인 경향이 강했다. 세상에 의미있는 일 따위는 없고 그저 꾸역꾸역 살아갈 뿐이라고 생각했다. 공부만 하고 있으니 인생에 재미있는 것이 없고 따라서 만사에 회의적이고 염세적인 것은 당연해 보인다. 그렇다면 대학에 들어와서는 그렇지 않았을까? 아니다. 이제는 아주 논리적이고 당당하게 회의주의적인 철학자며 사상가들을 공부하면서 논리적으로 확고한 회의주의적 경향을 가지게 되었다.

 

90년대 대학은 회의주의적인 경향이 강했다. 그래서 대학에서 가르치는 것은 주로 의심하고 비판하라는 것이었다. 의심한다니 멋있지 않은가? 이미 갖고 있던 회의주의적 성향을 정말 멋진 쿨함으로 끌어올려줄 것 같지 않은가. 국가를 의심하고, 사회를 의심하고, 경제를 의심하고, 의도를 의심하고, 사람을 의심하라고 들었다. 멋있어 보였다. 하지만 이제 갓 대학에 들어온 신입생이 뭘 알겠는가. 이미 사람들이 의심한 내용들을 따라하는 수밖에 없다. 칸트나 데카르트 같이 모든 것을 의심하고 비판한 철학자도 있었고, 프로이트와 다윈처럼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신화를 밑바닥에서 무너뜨린 사람도 있었다. 현대의 신경과학이나 유전자학은 인간을 거의 기계나 컴퓨터처럼 다루고 있었다. 읽다 보니 도출되는 결론은 인간은 성욕으로 프로그래밍 된 원숭이에 불과하고 사회나 국가를 운영하기엔 너무 불완전해서 탐욕으로 매번 경제공황을 일으키고 최악의 정치 형태인 독재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는 운명론적인 좌절이었다. 그러니 이제는 열심히 사는 사람들을 모두 원숭이의 발정 정도로 치부하는 회의적인 태도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회의적인 성향이 더욱 강화됨에 따라서 아름답고 진정한 사랑, 정치적 선동, 선행, 혁명, 자아의 실현, 신뢰 따위를 전부 헛된 망상이라고 치부할 수 있게 되었지만 이런 회의주의적인 성향은 누군가 이런 것을 들이밀면서 하기 싫은 것을 권유할 때만 작동할 뿐이다.

 

가령, 누군가 나를 설득하기 위해서 이렇게 말한다.

 

“A씨는 너무 훌륭한 것 같아. 그분은 누구랑 진정한 사랑을 했고, 많은 선행을 하신 분이라서 믿을 수 있어, 그 분이 지금 세계 평화를 위해 기금을 모으고 있어 너도 여기에 기부도 하고 활동도 같이하자.”

 

이런 자리에서 말을 할 때, “응 그렇구나, 미안 최근 바빠서정도로 거절하면 계속 달라붙어서 설득을 시도하기 때문에 무척 피곤해진다. 상대방을 단호하게 거절하면서 동시에 적대적인 상황으로 가지 않기 위해서 범우주론적 회의적인 경향을 스스로에게 포장한다.

 

그래, 과연 인간이란 존재가 아무런 이익도 없이 선행을 베풀 수 있을까? 진정한 사랑이라니? 사춘기도 지났는데 이제 그런 상상의 세계에서 나와서 현실을 보는게 좋다고 생각해. 인간은 근본적으로 발정난 원숭이에 불과하고 불완전한 존재야.”

 

이렇게 이야기하면 상대방은 그냥 흔히 볼 수 있는 겉멋이 잔뜩 든 염세주의 똘아이구나 정도로 생각하고 가거나 토론을 하려고 한다. 하지만 이미 토론의 주제는 A라는 사람에 대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존재에 대한 추상적인 토론으로 바뀌기 때문에 서로가 마음 상할 일은 많지 않다. 게다가 이미 그런 회의주의적인 성향을 정당화하는 근거를 잔뜩 가지고 있기 때문에 상대가 나를 설득할 방법은 거의 없고 오히려 설득 당할 가능성이 더 높게 된다.

 

나의 회의주의적인 성향은 보통 이렇게 싫어하는 일을 피하고 엉뚱한 일에 끌려다니는 것을 막기 위해서 주로 사용되었으니 진정한 회의주의자라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거나 사람들에게 실망하고, 혹은 스스로 부끄러운 일이 있을 때마다 세상이 우울해지고 세상의 모든 의미와 가치가 빛바래는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된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내뱉었던 회의주의자적인 말들이 거부할 수 없는 진리처럼 다가오는 것을 피할 수는 없었다.

 

오랫동안 믿었던 가치가 사실은 허황된 것이라는 점을 조금씩 느꼈으면서도 그것을 필사적으로 부정하고, 믿었던 사람들에게 실망하고 힘이 빠지고 있으면서도 그렇지 않다고 스스로를 기만하게 되는 일이 종종 있다. 나도 그렇다. 필사적으로 부정해 오다가 어느 순간 그 부정을 더 이상 할 수 없게 되는 시점이 나타난다. 어느 유난히 조용하고 평온한 밤이 바로 그런 상황이었다. 뜬금없이 몰아닥치는 상념 속에서 갑자기 스스로를 기만해 왔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깨닫게 된다.

 

믿었던 것에 배신당하는 느낌이 너무 싫었었기 때문일까? 이솝 우화의 여우가 어차피 저 포도는 시고 맛없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나도 스스로의 상처 받은 마음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하여 어차피 인간이란 존재는 인간은 성욕으로 프로그래밍 된 원숭이에 불과하고 그런 인간들이 말하는 가치와 의미는 결국 허상이고 망상이거나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거짓으로 꾸며댄 것들에 불과하다고 진심으로 생각했다. , 거기에 확신을 얻고 싶었기 때문에 이 세상 모든 가치와 의미를 적극적으로 부정하기 시작했다.

 

당시 배운 바에 따라서 세상에 믿고 따를만한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일들이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선행은 사회의 구조적인 결함을 손바닥으로 가리면서 빈민들에게 정신적 위로를 하기 위한 가식의 수단으로 보였고, 열정과 혁명은 발정난 사람들이나 스스로에게 취한 사람들의 과대망상적이고 낭만적인 몽상으로 보였다. 종교는 감언이설로 사람들을 현혹하는 사기로 보였다. 열심히 일하는 사람은 자본주의의 노예에 불과하고, 돈 많은 부자는 그 돈에 대한 집착으로 전전긍긍하는 궁색하고 인색한 노인네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웃기는 것은 세상에 뭔가 의미 있는 일들을 하나같이 무가치한 일들로 증명하면 점차 삶이 더 우울해질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반대로 그런 생각을 깊이 할수록 점점 마음이 오히려 편해지고 밝아진다는 것이었다. 왜 그런 것일까?

 

그 의미가 문제였다. 마음속에서 모든 것이 평등하게 무의미하고 무가치해진 순간 한 가지를 깨달았다. 어차피 모두 무의미하다면 이 세상에 어떤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진정한 가치와 의미라는 것이 없다면 오히려 내 스스로 원하는 의미와 가치를 설정해도 된다. 그것도 무의미하겠지만 어차피 세상에 무슨 진정한 의미와 가치라는 것이 없다면 차라리 내 스스로 의미와 가치를 만드는 것이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

 

비록, 길가에 흐드러지게 피어난 이름 모를 잡초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모든 사람들이 아름답다고 말하는 장미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과 아무런 차이가 없다.

 

세계의 평화를 위해 내전 지역으로 가서 탱크 앞에 뛰어드는 것도 멋있겠지만 지나가다가 누군가 떨어뜨린 지갑을 주어서 주인을 찾아주는 것도 이미 그 의미에 충실하다.

 

모든 의미를 부정하니 이제 스스로 의미와 가치를 만들 수 있게 되었고 다시 돌아보면서 내가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다시 찾아보니 이번에는 앞에서 부정했던 모든 것들이 내 속에서 다시 생생하게 살아나기 시작했다. 아마도 처음으로 내 스스로 세상하고 마주친 느낌이었다. 선행은 기분이 좋고 나에게 의미가 있다. 그것으로 족했다. 열정은 진정 의미와 가치를 부여할 때 생기는 것이므로 값진 것이었다. 그것이 실패하고 그저 일종의 구애행동으로만 남았어도 그렇게 다시 일어난다는 것으로도 해보지 않은 것보다 훨씬 나았다. 무모한 사람들, 이상을 향해 뛰어가는 사람들, 자신의 이익만 돌아보는 사람들 모두 자기 자신이 만들어낸 의미를 향해 가고 있는 것이었다. 그들은 성공할 수도 실패할 수도 있지만 여기에 앉아서 속으로는 온갖 욕망이 있으면서 그 사람들을 평가만 하고 있는 나보다는 나았다. 나도 그렇게 의미를 만들고 살아 움직여서 실패도 성공도 내 스스로 감당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무엇을 하든 나에게 의미가 있다면 그것으로 족했기에 모든 것을 할 수 있었다. 더 이상 여기에 어떤 의미가 있다고 말하는 사상가나 대단한 선배와 어르신이 필요 없어졌다.

 

이것은 처음으로 스스로 발견한 역설이다. 솔직히 다시 생각해보면 그야말로 현학적이고 세상물정 모르는 생각으로 가득했던 대학시절의 이야기지만 삶이 힘들 때마다 이때를 다시 돌이켜 보게 되는 역설이다. 사회적으로 비루하고 인정받지 못해도, 남보다 늦게 가는 것 같고, 잘못된 인생을 사는 것 같아도 이때 떠올렸던 생각을 다시 해본다. 그러면 지금 내가 제대로 길을 가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게 된다. 혹시나, 누군가의 말을 듣고 이상한 명예와 자격지심으로 엉뚱한 옷을 입으려고 용을 쓰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내 스스로 가치와 의미를 생생하게 부여하고 있는지 여부를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세계에서 최고의 부와 명예를 누려도 스스로 가치와 의미를 부여할 수 없다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생생하게 알려준 것이다. 물론, 나는 부와 명예를 밝히기 때문에 세계 최고의 부와 명예에 매우 높은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고 기꺼이 누릴 것이지만 말이다.


그리고 이 때부터 정말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막 살기 시작했다. 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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