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어는 참 훌륭한 언어이다. 이 언어를 쓰면서 사는데 아무 지장이 없고 의사소통하는데도 아무런 지장이 없다. 오히려 그 복잡미묘한 표현의 우수성과 즐거움을 충분히 누리면서 살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충분히 좋은 언어생활을 누리고 있는데 영어 공부를 해야 하나?
영어를 언제 사용하고 있는 것일까? 따져보니 사용한 적이 거의 없다. 영어와 관계된 것이라고는 좋아하는 미드를 보는 것이지만 자막 덕분에 불편함 없이 충분히 잘 즐기고 있다. 가끔씩 영어로 된 문서를 읽긴 하지만 사전도 잘 되어 있고 번역 기술도 좋아져서 약간의 영어 문서를 읽는 데는 큰 지장이 없다. 그리고 영어로 된 문서를 읽는 경우가 거의 없다. 국내에 출판되는 양질의 책과 자료를 읽기에도 굉장히 많은 시간을 쓰고 있고 정말 좋은 영어 책들은 번역된다. 정말, 영어를 쓸 일이 없다.
영어를 열심히 공부하면 외국인 친구를 사귈 수 있다는 사람도 있지만, 한국인 친구도 잘 안 만드는데, 외국인 친구를 왜 만들어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게다가 대화할 공통의 화제를 만드는게 쉬울까? 서로의 문화를 조율하고 서로를 이해하고… 등등, 평생 같이 산 부부도 힘든 일을 외국인들하고 하라고? 사교적인 사람들이라면 가능하겠지만 나같이 비사교적인 사람은 생각만 해도 힘들고 귀찮고 부담스럽고 너무 힘들다. 그렇다고 딱히 친구를 원하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곰곰히 생각해보면 영어가 정말 필요한 경우는 비즈니스적인 경우인 것 같다. 업무상 뛰어난 능력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영어 성적을 제시하거나, 해외에서 비즈니스를 하는 경우에는 정말 필수적인 것이다. 결국, 스펙과 제한적인 해외 영업 말고는 거의 쓸 일이 없는 셈이다. 하지만 40대쯤 되면 토익성적이 스펙이 될 수는 없다. 또, 국내에서 한국말로 영업하는 것도 불편한데 더듬더듬한 영어로 영업을 뛰겠다는 생각이 과연 합리적인지는 잘 모르겠다.
평생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영어에 집착하는 것을 보았지만 사실 감흥이 별로 없었다. 영어를 잘 하면 당연히 좋겠지만 매일매일 공부하고 자책하고 열등감을 갖고 그러면서 영어를 공부해야할 만큼 영어가 필요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그 가시밭길을 걸어서 영어를 유의미하게 쓸 수준에 도달하는 것이 가능한지 그리고 영어를 유창하게 쓰게 되었을 때 그에 따른 이익이 충분히 있을지 미심쩍기 때문이다.
평생을 영어는 별로 필요없다는 생각으로 살다가 처음 영어 공부가 필요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 순간이 있었는데 바로 주식 투자를 시작하면서 부터다. 주식 투자를 하게 되면 온 세상의 일에 촉을 세우게 된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직접 간접으로 환율과 주식과 지수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그래서 국내외의 뉴스를 주의 깊게 들여다볼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러면서 몇 가지 사실에 눈뜨게 되었다. 우선, 국내의 각종 가십이나 뉴스를 신뢰해선 안된다. 어쩌면 그렇게 일관되게 뉴스와 주가의 방향이 반대로 갈 수 있는지 신기했다. 한창 올라가던 주식이 신문이나 뉴스에 소개되는 순간 주가는 곤두박질 치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신문이나 뉴스들이 소식이 늦고 사실을 검증하느라 뒷북을 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나중에는 주식을 조작하는 작전세력에 반드시 기자가 끼어있거나 공동작업을 하는 것이라는 심증을 갖게 되었다. 어떻게 아느냐고 묻는다면 증거는 없다. 그냥 반복되는 패턴과 소문들을 조합한 것이다. 그러다 보니 국내의 뉴스를 보면 손해가 발생한다라는 생각이 머리에 박혔다. 반면, 해외의 영어로 나오는 정보는 정말 그 양과 깊이가 대단했다. 물론, 영어로 된 뉴스가 국내의 주식에 대해서 언급하는 바는 없다. 하지만 국내의 지수나 국가적 가치에 대한 판단은 결국 글로벌한 투자동향에 좌우되었고 그것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해외의 뉴스를 직접 읽어보아야만 했다. 글로벌한 투자 동향에 대한 국내의 뉴스는 결국 해외 뉴스를 번역하여 한참 늦게 나오기 때문에 무조건 영어로된 원문을 읽어야만 했다. 버벅이면서 영어를 한자한자 더듬으면서 읽었을 때, 그 미묘한 맥락을 이해하기 어려웠을 때, 기자가 쓴 글로 기자의 생각과 신뢰도를 추정하기 어려웠을 때 처음으로 영어가 아쉬워졌다. 그리고 영어로 된 뉴스들이 다음날이나 바로 그 다음날 국내에 번역되면서 입맛대로 왜곡하거나 이상하게 번역되어 나오는 것을 보면서 정확한 정보를 얻기 위해선 반드시 영어를 알아야 하는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슬프지만 주식 투자는 망했고, 해외 뉴스를 보면서 연구할 일이 사라지면서 다시 영어에 대한 관심이 식으려고 했지만 이번에는 조악하게 번역한 책들이 다시 한번 영어의 필요성을 환기시켜 주었다. 사람들이 주목하는 베스트셀러나 대작들은 충분히 멋진 번역가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책을 번역해준다. 하지만 마이너한 분야의 책들은 정말 번역의 질이 좋지 않다. 전문 번역가는 해당 분야를 잘 모르기 때문에 번역이 어렵고, 해당 분야의 전문가들은 번역의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글을 살리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더구나 최근에는 구글 번역기가 좋다는 이야기가 많아져서인지 번역을 이것으로 하는 사람들이 정말 많아진 듯하다. 나도 개인적으로 Anki 매뉴얼을 번역하면서 구글 번역기를 사용했는데, 이 구글 번역기가 상당히 악질적이라고 느꼈다. 초창기 구글 번역기는 번역을 못하는 것이 너무 명확했다. 누가 봐도 못한 번역이기 때문에 그 부분은 다시 번역한다. 하지만 최근의 구글 번역기는 조금 달라졌다. 얼핏 보기에는 무언가 문장이 잘 성립하고 있는 것처럼 보여 잘 번역된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잘 들여다보면 정말 이상한 문장이 완성되어있다. 마치 문장이 아닌 비문을 교묘하게 만들어 삽입하는 것 같은 느낌이다. 한참을 읽어봐야 이 문장이 정말 이상하구나 하고 느낄 수 있을 정도로 교묘하다. 그래서 이런 점을 인지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그냥 구글 번역기를 돌리고 대략적인 손질만 해서 출판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 것 같다. 그리고 그런 책들은 대부분 마이너한 취향의 책들이다. 이런 경우가 몇번이나 반복되면서 어느 날은 책을 읽다가 차라리 원서로 보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이후 영어 공부를 조금 시도해보았고 몇 가지 중요한 변화의 계기도 생겨서 영어 수준이 조금 올라가게 되었다. 덕분에 정말 좋아하는 미드 시리즈를 자막 없이 보게 되었다. 물론, 자막 없이 미드를 볼 수준이라서가 아니라 그 미드를 거의 20번 이상 봤기 때문에 내용을 전부 알고 있어서 자막 없이 봤을 뿐이다. 그리고 그 동안 미드를 제대로 보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무려 20번 이상을 반복하면서 보았던 미드인데도 자막 없이 보니 마치 처음 보는 것처럼 낯설고 신기했다. 배우의 표정이나 목소리, 억양 등 그 모든 표현이 생생하게 보이면서 더욱 뛰어난 몰입감과 즐거움을 주었던 것이다. 그 동안 스스로 미드를 보았다고 생각했지만 실은 자막을 본 것에 불과했던 셈이다.
영어를 잘 하면 좋은 점에 대해서 하나 둘씩 체감하면서 영어를 잘하는 것이 단순히 업무적인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깨닫게 되었다. 영어를 알면 보다 양질의 객관적인 정보를 얻을 수 있고 전 세계의 최고의 석학들이 제공하는 논문을 자유롭게 읽을 수 있으며, 방대한 문학과 드라마를 절절하게 즐길 수 있게 된다. 뿐만 아니라 영어를 무시할 때는 보지 못했지만 영어를 보고 익히기 시작하면서 그 동안 몰랐었던 다양한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방대하고 훌륭한 양질의 자료와 인프라, 새로운 시도들, 각 대학 홈페이지에서 제공하는 노벨상 수상자의 직강들 영어를 잘 쓸 수 있다면 전 세계와 소통할 수 있고 전 세계에서 가장 양질의 자료를 볼 수 있으며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정보를 획득하게 되는 셈이다.
인터넷의 발달과 더불어 전 세계에 자유롭게 접속할 수 있는 현재에 영어는 단순히 외국인과 대화하는 수단에 머물지 않는다. 이제 영어는 세계의 정보에 접속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소양이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소양이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삶은 크게 달라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영어가 없어도 잘 살 수 있지만 영어를 잘 하게 되면 보다 넓은 세계를 보게 되고 보다 많은 기회를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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