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너무 많은 사람들이 반복한 이야기라 지루하지만 그래도 한국의 영어 공부는 문법에서 출발했기에 이에 대해서 먼져 따져보아야 할 것 같다.
90년대 고등학교에서 공부를 할 때는 영어 공부라는 것이 문법을 공부하고 그 문법에 따라서 영어를 합리적인 규칙에 따라서 말하는 것이다. 당연히 영어를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그냥 영어를 계속 듣게 하면 영어를 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아니므로 최소한 영어의 뜻을 알기 위해서라도 이를 자신의 모국어로 설명해주는 문법의 도움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론적으로 생각해보면 영어의 모든 규칙을 알고 이를 적절히 적용한다면 완벽하게 그 언어를 구사할 수 있지 않겠는가?
우선 여기서 궁금한 것은 인간의 언어를 일련의 규칙으로 정립할 수 있을까? 하는 점이다. 정립할 수 있다면 이미 우리 시대에 말을 하는 기계들이 나타났을 것이고 모든 외국어 공부는 필요없어졌을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일련의 규칙에 따라서 번역이 되기 때문이다. 당연히 번역기가 만들어졌을 것이고 그 번역기는 모든 언어를 완벽하게 번역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알다시피 그런 기계는 없다. 이제 딥러닝이나 이런 것을 이용하여 일상적인 회화를 겨우 번역하는 수준이다. 그리고 수많은 석학들은 여전히 언어에 달라붙어서 그 규칙을 이것저것 찾아보는 정도다. 그러니 현재까지론 문법으로 어떤 언어의 모든 규칙을 규정할 수 없다.
두 번째는 문법으로 어떤 언어를 기계적으로 번역할 수 없는 것은 알겠지만 그래도 문법을 공부함으로써 그 언어를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므로 문법을 되도록 많이 알고 그것에 숙달되는 것이 꼭 나쁜 것은 아니지 않을까 하는 점이다. 문법이 어느 정도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문법이 지나치게 상세하고 그 규칙이 많다면 점점 고려해야할 문법이 많아지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문법을 일일이 판단하고 적용하려 한다면 당연히 말이 튀어나오지 않게 된다. 문법을 1개만 아는 사람이라면 그 1개의 문법에 맞는지만 따지면 되지만 100개의 문법을 아는 사람은 그 100개의 문법에 맞는지 전부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당연히 말할 타이밍에 문법을 고려해야 하니 말을 할 기회를 놓치기 일쑤일 수밖에 없다. 또, 자신이 모르는 수많은 문법을 고려하면 언제 틀릴지 모르므로 말은 더더욱 조심스러워질 수밖에 없다. 독해도 마찬가지다. 글을 읽으면서 글의 논리적 구조만 보는 것이 아니라 해당 글이 어떤 문법에 맞는지 틀리는지 일일이 검증하면서 봐야하니 독해도 더뎌지고 그 언어로 된 책을 읽기 싫어질 수밖에 없다.
어느 날 한국이 아닌 영어권에서는 문법을 어떻게 공부하는지 궁금해져서 열심히 구글링을 해봤다. 그리고 문법에 대한 두 가지 접근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첫 번째 접근 방식은 second language로 영어를 공부하는 사람들을 가르치기 위한 문법이었다. 주로, 가장 기본적인 영어를 가르치고 일상생활에 필요한 영어를 어떻게 쓸 수 있는지 설명하고 연습할 수 있는 방식이었다.
두 번째는 이미 영어를 매우 잘 쓰는 원어민들이 영어를 공적으로 세련되게 전문적으로 쓰기 위하여 공부하는 문법이었다. 기자, 정치권의 대변인, 아나운서, 글쓰는 사람들이 영어를 다듬기 위하여 문법을 공부하는 것이었다.
즉, 영어를 전혀 못하는 사람들이 처음으로 영어를 알기 위해서 필요한 수준의 문법이 있고, 실제로 영어를 잘 쓰는 사람들이 자신의 영어를 공적으로 세련되게 사용하거나 전문적으로 사용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제공되는 문법 교육이 있는 것이다. 그 어느 문법도 영어의 모든 규칙을 제정하고 있지 않다. 그냥 초심자는 사용할 수 있는 언어를 제공하고 있고, 전문가에게는 자주 하는 실수를 지적하는 것이다. 즉, 문법이 보조적인 역할과 제한적인 역할로 사용되고 있을 뿐이다. 특히, 세련된 영어 사용자들을 위한 문법은 언어를 가다듬고 절제하기 위한 수단이므로 이미 영어 원어민 수준의 영어 실력을 전제로 깔고 들어가니 우리 같이 영어를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배우기에는 시기상조인 문법이다.
따라서 초심자 수준의 문법을 자유롭게 쓸 수 있게 되면, 자주 쓰고 문화에 익숙해지고 사람들과 대화하면서 숙련된 영어 사용자가 되고 난 후에 세련된 문법이 필요한 셈이다. 그런데 한국의 문법은 초심자의 문법도 고급 영어 사용자의 문법도 아닌 그저 모든 문법이다. 즉, 문법은 영어를 배우기 위한 첫 가교 역할을 하고 영어를 잘 쓰게 되면 이를 다듬는 역할을 하는 것인데, 문법 위주의 영어 교육은 이러한 구분 없이 영어를 문법 공부로 대체해버리는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90년대식으로 문법으로 영어를 공부한다는 것은 영어라는 언어를 합리적으로 분석하는 언어학에 가깝지 영어 자체를 할 수 있게 하는 방법은 아니었던 것 같다. 물론, 문법이 전혀 필요없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영어권의 문법 교육처럼 영어를 처음 배울 때와 숙련된 영어 사용자가 되고 난 후에 이를 다듬을 때 필요한 것이지 영어의 전부는 아닌 것이다. 특히 문법을 아무리 잘 공부해도 잘 듣고 말하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는 점은 거의 확실했다. 90년대에는 이런 문제의식은 많았던 것 같지만 이런 문제의식을 극복할 방안이 마땅한 것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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