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포스팅한 미국 드라마를 자막 없이 보다가 생긴 의문점이 스스로 생각하기에 꽤 오묘하고 그 질문에 무언가 숨어있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에 이에 대한 해답을 나름 내보려고 노력했다. 제시된 의문점은 결국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잘 들리던 영어가 왜 갑자기 안 들리게 되고 영어가 안 들리는데 어째서 각각의 장면과 등장인물에 대한 공감은 강해지고, 반대로 익숙하던 스토리는 갑자기 조각조각 나서 서로 연결되지 않는가?
사람은 우선 아는 것을 총 동원하여 문제를 해결해보려고 하는 법이다. 그러니 이 문제점을 뭉뚱그려서나마 해결할 수 있는 것 같은 해답을 자동으로 찾게 되었다. 굉장히 익숙한 대답이 한 가지 떠올랐다. 브레히트 식의 낯설게 하기가 작동되어서 자막 없이 드라마를 본 순간 익숙했던 드라마가 낯설게 느껴지기 시작하고 원점에서 다시 이것을 보게 된 것이라는 대답이다. 아무래도 낯설게 하기가 익숙한 장면에서의 관객의 공감을 막고 이를 비틀어 원점에서 다시 그 장면을 보거나 새로운 관점으로 유도하는 것에 가까우니 내가 미국 드라마를 자막 없이 보면서 그것이 낯설어진 느낌을 느낀 것도 이와 관련이 전혀 없지는 않을 것이다. 또, 경험상 브레히트 식의 낯설게 하기 효과가 들어간 연극들을 보고 있으면 이야기로서의 기승전결을 체감하기 조금 어려웠다는 점이 이를 뒷받침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다른 점이 분명히 있다. 낯설게 하기는 익숙한 레토릭과 설정에 따라서 사람들이 자동적으로 최면처럼 공감하는 것을 막는 것에 가깝다. 따라서 공감을 억제하기 위하여 그러한 장면을 뒤틀어 그 장면을 낯설게 하게 하는 것이다. 평소 즐겨 시청하던 드라마 에피소드가 익숙해진 것은 당연하고 자막을 제거하면서 그것이 낯설어진 것도 아마 맞을 것이다. 하지만 나의 경우는 미국 드라마를 보면서 배우 개개인의 연기나 개별 장면에는 더 몰입하였고 더 공감하였다. 즉, 공감이 억제되지 않았고 오히려 매우 강하게 활성화되었다. 그리고 낯설게 하기가 들어간 연극은 어떤 공감과 감동의 기승전결은 없지만 이야기의 맥락은 매우 충실하게 살아 있다. 즉, 현재 보고 있는 극 속의 장면이 어떤 맥락에서 나왔는지에 대해서는 충분히 주지되는 바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내 미국 드라마 시청 경험은 그러한 맥락을 찾기 어려웠다. 만일, 전체적인 스토리를 거의 외우다시피 하지 않았다면 분명히 시청하는 도중에 갑자기 길을 잃고 내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 먹먹해지는 상항에 처했을 것이다.
의문점에 대한 해답으로 브레히트의 낯설게 하기 효과가 떠오른 것 말고는 아는 것이 없으니 답이 턱 막혔다. 그러다가 올리버 색스의 언어상실증(실어증) 사례가 뜬금없이 떠올랐다. 느닷없이 환자들이 병동에서 웃고 있는 장면이 계속 떠올라서 왜 그러나 파고들게 되었다.
올리버 색스의 언어 상실증 사례에 등장하는 실어증 환자들이 대통령의 거짓과 위선을 파악하는 것을 읽으면서 떠올린 것들은 친숙한 것들이었다. 즉, 인간 거짓말 탐지기에 가까운 사람들이 사람들의 몸짓이나 얼굴의 표정 등을 관찰해서 거짓말을 하는지 여부를 확인하는 것과 같은 것을 떠올린 것이다. 이런 모습은 라이 투 미 같은 미국 드라마에서 잘 보여주고 있다. 그 외에도 마술사들이 쇼에서 관객이 숨긴 보물을 찾기 위하여 숨긴 사람들의 미세한 신체반응을 유도하고 그를 통하여 물건을 찾는 모습 같은 것이 떠오르기도 했다. 그래서 이 사례를 읽으면서 실어증 환자들이 기본적으로 그러한 기술을 익힌 것처럼 생각하고 넘어갔다. 올리버 색스도 눈과 귀로 확인할 수 있는 단서를 이용하여 의사소통을 한다는 식으로 적었기에 그 사소한 단서가 내 머릿속으로는 앞서 언급한 인간 거짓말 탐지기나 마술사들이 활용하는 단서와 동일한 것처럼 여겨졌다.
그런데 마음을 가라앉히고 다시 원점에서 생각해보니 그들이 사용하는 단서와 그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미묘하지만 완전히 달랐다. 왜냐하면 실어증 환자들은 거짓을 파악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비언어적으로 대화와 의사소통도 했기 때문이다. 인간 거짓말 탐지기들은 상대가 하는 말을 듣고 그에 따른 반응을 보면서 거짓말 여부를 탐색한다. 즉, 의사소통은 언어로 이루어지고 그것을 뒷받침하는 다양한 단서들을 조합해서 거짓말 여부를 파악하는 것이다. 또, 마술사들은 그 사람과 신체를 맞대고 통제되지 않는 미세한 신체의 긴장을 통해서 이 관객이 보물을 숨긴 곳을 향할 때마다 맘속의 긴장이 신체에 미세하게 반영되는 것을 캐치하고 이를 이용하여 숨긴 물건의 위치를 찾아가는 것이다. 이 경우는 철저하게 계산되고 세팅된 상황이다. 즉, 그 상황에서만 적용할 수 있는 방법일 뿐, 언어를 모르면서도 일상생활에서 의사소통하고 대화하는 실어증 환자의 그것하고는 비교하기 어려운 것이다. 이렇게 비교해보고 나서야 올리버 색스의 언어상실증(실어증) 사례에 언급된 간단한 이야기들이 정말로 그렇게 간단한 것들이 아님을 깨닫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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