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에 있어서 인상깊은 경험이야 한두개씩 있겠지만 이 블로그의 주제는 공부이므로 공부에 대한 경험담을 한 번 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 이야기를 해봅니다.


저는 국내 최고의 대학에 재수를 해서 들어갔는데, 제 주위의 친척이나 제 중고등학교 친구들은 제가 그곳에 들어갔다고 하면 대부분 경악을 합니다.


평소 제가 그렇게 공부를 잘하는 편이 아니었기 때문이지요.


저는 강남 8학군이긴 하지만 반에서 가장 높았던 성적도 정말 노력해서 대충 5등 정도 였던 것 같고 내신도 높지 않았습니다.


전교에서는 50등 권으로 진입했던 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지금의 내신 기준하고 달라서 현재랑 비교하면 어떨지 모르겠지만 당시 그 내신으로 그 대학을 지원한다는 일은 상상하기 어려웠지요.


첫 수능을 치고 그 대학에 면접을 갔을 때, 그 교수가 했던 말이 무척 인상깊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성적으로 여기를 지원할 생각을 했는가?" 라는 것이 교수가 면접시 했던 첫 질문이었습니다.


교수님의 어이없어 보이던 표정이 아직도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다음 해에 또 그 대학의 다른 과를 지원했는데 이번에는 합격했습니다. 



당시 재수생활을 떠올려 보면 지금 생각해도 신기한 마법같은 일이 벌어졌었습니다.


재수생활은 초6, 중3, 고3의 12년 동안 통학하면서 보냈던 저에게 매우 신기한 경험이었습니다.


학원을 다녀야 하긴 했지만 학원은 학교처럼 출석체크를 열심히 하지도 않고 선생님이 강압적이지도 않아서 학원에 빠져도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었죠.


그래서 학원을 간다고 말했지만 가지 않고 계속 놀러 다녔습니다.


대입에 떨어진 트라우마일까요? 아니면 갑자기 재수 생활이라는 낯선 환경에 적응하지 못한 부적응일까요? 무엇으로 설명해야할지 모르겠지만 당시 저는 뭔가 나사가 빠진 사람 같았습니다.


잠을 아무리 자도 또 자고 싶고, 의욕이 없었습니다. 


조금만 움직여도 피곤하고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고 몸이 움직이는게 정신적으로 매우 어색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삶을 통제할 힘이 없는 것처럼 부평초처럼 그저 상황에 휩쓸려 움직였지요.


당시, 일본의 코믹스 류 만화책이 대거 들어오면서 만화방이 많이 생겼는데, 의욕도 없는 상황에서 만화를 좋아하는 저로서는 거기에 푹 빠져서 살았습니다.


학원가 인근의 만화방을 뒤지면서 매일매일 쉬지 않고 하루 12시간 이상을 만화방에서 살았습니다. 


당시, 5천원을 주면 만화방이 영업을 종료할 때까지 만화책을 볼 수 있는 곳이 있었는데, 이곳에 아침 10시에 출근해서 저녁 10시에서 11시 사이에 나왔습니다. 


학원에 가서 공부 열심히 하라고 식비와 교통비로 만원 가량을 받았는데, 5천원은 만화방비로 내고 나머지 5천원으로 점심과 저녁을 싸구려 빵같은 것으로 허기만 달랬습니다.


교통비는 없으니 당연히 1시간 가량을 걸어서 만화방에 갔고 다시 만화방에서 집까지 걸어서 왔습니다. 


이런 생활을 매일매일 하루 12시간 이상씩 계속 했고, 정신적으로도 불안했던 것인지 어느 순간부터는 만화책의 몰입도가 무척 높아졌습니다.


정말 제가 만화책 속에서 살고 있는 느낌이었지요. 


당시 "슛"이라는 만화를 보면서 제가 필드에서 뛰는 느낌과 심장이 쿵쿵거리면서 뛰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저는 그 몰입이 너무 즐거운 동시에 제가 미쳐가고 있다는 느낌도 동시에 받았습니다.


멋진 주인공의 몸놀림을 몸으로 재현하는 느낌이 생생했지만 동시에 이런 감각, 현실과 전혀 구분되지 않아서 소름이 끼친 것입니다.


역설적이지만 만화책이 더더욱 좋아진 시점에 경계심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가끔, 친구들과 같이 만화방을 가면 친구들은 5시간 정도가 지나면 힘들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면서 정말 지친 표정으로 나가자고 하지요. 


하지만 저는 12시간 동안 내리 집중해서 만화책을 보았습니다. 


결국, 그 만화방의 만화를 전부 보고 다시 또 봤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슬슬 제 상태가 무언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계속 받았습니다.


시험삼아 만화방을 안가보려고 시도해보았습니다만 이미 상황은 중독으로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벌써 6월인데 공부는 전혀 하지 않고 있고, 만화책 중독이란 듣도보도 못한 일을 겪고 있으니 위기감이 고조되기 시작했습니다.


만화방에서 걸어서 집으로 올 때, 가끔씩 보이던 이상한 사람들, 혼잣말을 하고 집도 절도 없어보이는 사람들이 남일처럼 여겨지지 않았습니다.


인생에 있어 낙오한다는 말이 피부로 와닿았습니다. 


하지만 만화책과 만화방은 저의 삶을 뿌리째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만화책 중독이란 말이 있을 줄은 저도 몰랐지만 실제로 그러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전형적인 중독 증상과 금단 증상을 겪었기 때문이지요.


책상 앞에 앉아서 공부하려고 하면 5분만 지나도 손발이 부르르 떨렸습니다. 


사진으로 찍은 듯한 만화책의 영상이 머릿속에서 자동으로 플레이 되고 의식이 날아갑니다. 


정신차려보면 만화방에서 만화책을 보고 있고 그 사이의 기억이 사라져 있습니다. 


이 정도 되면 소름이 끼칩니다. 아 이미 망해버린 인생이구나 싶었습니다. 


괜히 술에 취해 자동차 밑에 들어가신 분이 안쓰러워져서 집까지 부축해주고, 푼돈이나마 적선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악전고투를 시작한게 7월이었습니다. 


7월까지는 공부를 전혀 하지 않았지요. 그저 암담한 재수생활이었습니다.


스스로를 통제하기 위해서 여러가지 방법을 강구해보기 시작했습니다. 


우선, 만화방에서 가장 먼 지역의 인기 없는 독서실을 찾았습니다. 


여기서 정말 운이 좋았는지 독서실이 인기가 없어서 큰 독서실의 방에 사람이 저 혼자였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만화는 저를 괴롭혔습니다. 공부라는 것을 할 수가 없었지요.


아무리 참고 이를 악물고 해도 어느새 정신차려보면 만화책을 보고 있었습니다. 


결국, 저는 포기했습니다.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만화책에 대한 생각을 멈출 수도 없었고 행동을 통제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좌절과 스스로의 한심함에 책상에 코를 박고 한 5분 잤습니다. 


자고 일어나니 욕구가 가라앉아 있었습니다. 


물론, 5분 후에는 다시 만화책에 대한 욕구가 생겨서 튀어나가긴 했지만 처음으로 욕구가 가라앉은 것입니다. 


그 때부터 잠을 자기 시작했습니다. 


1분, 2분, 5분 등 잠깐이라도 의식을 끊었습니다. 


만화방을 갈 욕구만 가라앉는다면 몇시간을 자도 좋고 1분을 자도 좋았습니다. 


그렇게 한달 동안 조금만 욕구가 생겨도 잠을 자니 드디어 조금씩 만화방을 통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저는 더욱더 잤습니다.


그리고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저는 7월에 독서실에 들어가서 9월초까지 만화책 중독하고 싸움의 연속이었습니다. 


11월이 수능인데 거의 공부를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잠을 계속 끊어서 자다 보니 머리가 맑아지는 것입니다. 


이 부분이 마법같은 부분인데, 머리가 맑아지니 공부의 효율이 미친듯이 올라가기 시작했습니다. 


책을 보는 집중력이 올라갔고 집중력이 올라가니 바로바로 내용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책을 한번 보고 그대로 외우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수능 전까지 3개월 동안 교재들을 딱 한번 다 보았는데 전부 이해하고 외어버렸습니다. 


그 때 처음으로 머리가 맑아진다는 것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게 되었습니다.


그건 정말 말로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로 어마어마한 것이었고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습니다. 


한 번 보면 이해하고, 한 번 보면 사진처럼 명확하게 기억하는 천재들의 이야기를 실제 삶에서 체험해본 것입니다. 


지금은 아니지만 당시 저는 분명히 천재라는 표현을 감히 써볼 수 있었습니다. 


저는 그때에 이르러서야 인간의 가능성이 무한하다는 말을 믿게 되었습니다. 


당연히, 수능은 제 역사상 가장 높은 점수를 받았고 당당히 최고의 대학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첫번째 수능 성적을 본 교수가 저 같은 성적을 가진 사람이 지원했다고 어이없어 했다면, 두번째 수능 성적을 본 교수님은 이 성적으로 자신의 과를 지원해줘서 고맙다고 했으니 재미있는 일입니다. 



저는 이 마법을 머리가 맑아지는 방법이라고 부릅니다. 


저야 만화책 중독이라는 절망으로부터 도망가고자 하는 절박함이 가장 중요한 동기가 되었고, 독서실의 큰 공간에 저 혼자였기 때문에 행동에 거침이 없고 신경에 거슬리는 것 없이 저 자신에게 완전히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공부는 만화책의 대척점에 있는 것으로 인식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만화책 중독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좌절감이 큰 만큼 이에 대한 대안으로써 공부를 꼭 필요하고 중요한 것으로 인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제반 조건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스스로 그 행위에 납득하고 실행했다는 것입니다. 


누군가 시켜서 1분 5분 단위로 끊어서 자면 의미가 없습니다. 


자기 자신의 욕구가 올라오는 시점에 자고 일어나서는 다른 욕구는 다 가라앉아도 공부에 대한 욕구는 남아있어야 했으니까요.


누군가가 자기자신의 욕구가 올라오는 시점을 특정해줄 수 없으니까요.


하지만 스스로 납득하고 제반 조건을 갖추어 실행할 수만 있다면 통제된 환경에서 거의 90% 정도 머리가 맑아지고 천재라는 것을 경함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대학에 들어가서 이 경험을 설명하기 위한 다양한 내용을 찾아보았고 스스로 이론을 구축한 바도 있지만 그것은 가설에 불과하니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 



뒷 이야기를 말씀드리자면 저는 이 방법을 무척 신뢰해서 자신있게 고시에 도전했습니다. 


하지만 이 방법은 책상에 엎드려서 짧게 자는 것이 핵심인데 그 때부터 이상하게 엎드려서 잠을 잘 수 없게 되었습니다. 


엎드리는 순간부터 머리가 땡기고 누군가 머리를 조이는 듯한 느낌을 받기 시작했지요.


결국, 이 느낌은 엎드려서 자는 것 뿐만 아니라 누워서 잘 때도 오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잠을 잘 수 없게 되었고 잠을 자는 것이 아니라 더 이상 깨어있지 못하고 쓰러지게 되었습니다. 


당연히, 불면증이 생겼고 삶이 철저히 파괴되고 망가지기 시작했습니다. 


많은 노력 끝에 원인을 파악하고 제거했지만 트라우마가 남아서인지 엎드리기만 하면 각성이 높아지게 되어 여전히 잠을 자지 못합니다. 


물론, 이 방법을 이젠 사용할 수 없게 되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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