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ki 문장 암기하기 9 - 문장 형해화 현상


단순 암기를 통해 글과 문장으로 곱씹어 외우는 방식을 어느 정도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면서 주목하게 된 현상이 있는데, 문장 형태로 흡수된 지식이 어느 순간 부터 그 문장을 떠올리기 힘들어지는 현상이다.  즉, 문장의 형태가 점점 사라지는 것이다. 나는 이것을 '문장 형해화'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 문장 형해화 현상을 통하여 내 머릿속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결정적으로 감을 잡을 수 있었다. 


문장 암기는 처음에는 문장을 정확히 암송하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진다. 반복적으로 읽다보면 문장의 리듬과 호흡이 정리되면서 의미가 분명해진다. 그리고 지식은 문장 형태로 하나의 지식 흐름을 만들어낸다. 즉, 명사들이 동사와 서술어로 일정한 관계를 맺는다. 


가령, 다음과 같은 문장을 외운다고 생각해보자. 


辛(매울 신)은 얼굴에 죄목을 새기는 날카로운 도구의 모양으로 죄수나 노예 또는 고통의 의미로 사용되었는데, 의미가 확대되어 '맵다, 쓰다' 등의 뜻으로 사용됨


 처음에는 아는 것이 없으니 잘 외워지고 그 의미가 점점 선명해진다. 입으로 문장을 외울 때마다 ‘송곳’의 이미지를 떠올리고, 송곳을 이용한 다양한 상황을 떠올린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는 문장을 입으로 외워도 아무런 감흥이 없게 된다. 그저 문장을 제대로 외우고 있는지 확인만 하고 넘어간다. 그렇게 수개월 동안 익숙하게 외운 문장은 갑자기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 내용은 명확하게 떠오르지만 문장은 떠오르지 않는다. 송곳과 송곳이 사용되는 다양한 상황만 떠오르고 문장은 실종되어 버린다.


 문장이 형해화되는 이유 머릿속에 들어온 지식들이 기존의 지식들과 서로 섞이기 때문이다. 단순 지식과 다르게 문장은 문장 내 개별 지식들이 서로 다양한  관계를 맺는 형식이다. 문장을 외울 때는 이러한 개별 지식들이 머릿속으로 들어오면서 문장에서의 관계 맺기와 동일한 관계 맺기를 시도하게 된다. 즉, 신경들이 상호 연결되고 활성화된다. 신경들이 긴밀하게 연계될 수록 기억은 명확해지고 입체적이며 살아있게 되므로, 문장 암기로 외운 지식은 머릿속에 효율적으로 정착하게 된다. 덕분에  앵무새처럼 문장을 외우면서 의미를 되새기면 그에 상응하여 신경들이 서로 연결되고, 연결이 강화된다. 하지만 이 모든 작용은 우선 우리가 외운 문장이라는 형태에 철저하게 의존한다.


 처음에는 문장을 문장 전체로 뭉뚱그려 외운다. 문장은 문장의 주제를 형성하는 틀 역할을 한다. 문장을 반복하여 되새기면, 문장을 구성하고 있는 개별 지식들이 의식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처음엔 문장의 주제를 머릿속에서 의미화했지만, 그 다음엔 문장 속의 개별 지식과 주제와의 관계로 초점이 이동한다. 전체는 부분으로 쪼개지고 우리는 전체라는 맥락 속에서 해당 부분을 파악하게 된다. 그리고 이제는 주제를 이러한 부분들의 총합으로 인식하게 된다. 지식의 초점이 문장을 구성하고 있는 개별 지식으로 이동하는 것이다. 


 가령, 다음과 같은 문장을 외운다고 생각해보자. 


무상이나 고나 무아를 봄으로 해서 존재일반에 염오하게 되고, 존재일반에 대한 탐욕이 빛바래게 되고, 그래서 해탈하게 되고, 해탈하게 되면 태어남은 다했다는 해탈의 지혜가 생긴다.


 위 문장은 초기 불교에서 해탈에 도달하는 과정을 간략하게 나타낸 문장이다. 처음에 이 문장을 외울 때, 모르는 단어가 너무 많았다. ‘무상’, ‘무아’ 등의 단어는 특히 명확한 뜻을 알지 못했다. 그래서 이러한 단어들은 이 문장 내에서 추론할 수 있는 의미만을 가졌다. 공부가 이어지면서, 위의 단어들을 서술하는 다른 문장들을 외웠고 덕분에 의미가 조금씩 분명해지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 벌어질까? 처음에 위의 문장은 “해탈의 과정”이라는 프레임 속에서 단어들을 위치시켰다. 무상이니 무아니 하는 말은 이해하기 어렵지만 해탈 과정에서 무상과 무아를 보아야 한다는 점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 상태에서 공부를 진행하여 무상, 무아 등 어려운 단어들을 이해하게 되면 왜 해탈하려면 무상과 무아를 봐야 하는지 납득하게 된다. 상황이 변한다. 해탈 과정의 부속으로만 파악했던 무상과 무아였지만 지금은 반대로 무상과 무아의 개념을 통해 필연적으로 이 문장의 주제에 도달하게 된다. 그러면 이 문장은 해체된다. 무상과 무아의 개념을 알기 때문에 위의 문장은 당연한 것이 되어버리고 그나마 남아 있는 맥락도 무상이나 무아에 대한 지식으로 흡수되어 버린다. 문장 자체를 기억하는 것이 더 이상 새로운 의미나 함의를 보여주지 않으므로 구태여 힘들게 기억을 유지하지 않게 된다. 또, 무상이나 무아에 대한 개념으로 문장의 맥락 흡수되면서 머릿속에서 무상이나 무아의 개념이 살아 움직이게 되었다. 


 이는 문장 암기만의 독특한 현상은 아니다. 모방을 통한 학습 사례들을 보면 대부분, 비슷한 과정을 거친다. 가령, 그림을 베껴그리면서 익힐 때는 처음에는 그대로 따라하면서 최대한 모사한다. 하지만 반복하다 보면, 전체의 구도와 부분의 구도가 이해되기 시작하고 무슨 도구를 쓰며 어떻게 손을 움직여야 하는지 체감하게 된다. 베끼기는 그림 그 자체가 그 그림을 구성하고 있는 여러 요소를 통찰하고 받아들일 수 있게 해준다. 그리고 이런 요소들을 익히고 나면 이제 더 이상 그림을 베낄 이유가 사라진다. 익숙해진 기술과 구도 등을 통해 이를 응용할 수 있게 된다. 이는 글쓰기, 프로그래밍, 음악 등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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