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8 유성음 박탈 경험

 

 

 음성학을 공부하면서 말소리를 자음이니 모음이니 분석하고 나누게 되었다. 덕분에 이론적으로 자음과 모음이 무엇인지 알았지만 그렇다고 손에 잡힐 듯이 와닿는 그런 개념은 아니었다. 하물며, 유성음과 무성음의 차이라는 것은 더더욱 막연한 이야기였다. 영어를 본능적인 수준에서 자연스럽게 사용하기 위해서는 유성음과 무성음을 자연스럽게 구분해서 듣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한국어 원어민으로 살아온 인생이 너무 길어서인지 아무리 들어도 유성음이 무엇이고 무성음이 무엇인지 잘 구별이 가지 않았다. 억지로 나눈다면 약간 연극적인 톤의 목소리가 유성음 같이 들리긴 했지만 확신하기 어려웠다.


 유성음을 의식적으로 내는 법을 익혀보려고 내 목의 성대 부분에 손을 대고 진동을 느껴보면서 말하는 연습을 해봤지만 일상적인 수준의 음량에서는 진동이 잘 느껴지지 않는다. 진동을 느끼려면 목소리를 최대한 높여야 하는데 그 정도부터는 이미 일상적인 말하기라기 보다는 무슨 연극 연습같아 어색했다. 이 경우 모음은 성대가 떨리는 것을 잘 느낄 수 있지만 유성 자음은 그렇지 않다. 자음은 워낙 짧게 발음되고 이어서 바로 모음의 진동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결국, 유성음을 내서 성대가 떨리는건지 모음으로 인한 진동인지를 구별하기 어려웠다. 물론, 모음도 유성음이지만 워낙 자연스럽게 나오는 소리라서 익힌다는 개념을 떠올리기 쉽지 않았다. 또, 영어에서 자음들이 무성음과 유성음으로 구분되는 것과 달리 모음은 전부 유성음이기 때문에 이를 별도로 익힐 이유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목이 쉬었다. 목이 쉬면 보통 말을 자제하고 따뜻한 차를 마시면서 회복에 집중해왔다. 그런데, 이번엔 조금 달랐다. 음성학 공부로 인하여 내 말소리가 제대로 발음되고 있는지 정확한 입모양과 혀위치를 두고 있는지 관찰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평소와 다른 내 말소리를 요모조모 뜯어보았다. 그리고 쉬어버린 내 말소리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말소리가 쉬었는지 아닌지는 누구나 들으면 안다. 그래도 특징들을 한 번 잡아보자. 일단, 목소리에 튜브 공기 빠지는 소리 즉, ‘ㅎ~ㅅ~’ 같은 소리가 마구 섞인다. 또, 소리가 크게 나오지 않는다. 힘을 줘서 강하게 발음하면 바람소리만 더 커지거나 목에 통증이 일어난다. 마지막으로 소리가 명료하지 않다. 이런 말소리는 소리가 작아 듣기도 힘들고 듣더라도 무슨 말인지 구별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성대가 떨리는 원리는 이렇다. 아래의 그림과 같이 성대가 맞물려 성문이 닫혀있는 상태에서 폐 속의 공기가 성문을 비집고 나오면 그 압력으로 성대가 진동하게 된다. 살짝 닫은 입술 사이로 공기를 밀어내면 입술이 부르르하고 떨리는 것과 같다.

 


 

  그런데 목이 쉬게 되면 아래의 그림처럼 성대가 부어오르고 성대에 작은 결절같은 것이 생긴다. 성대를 떨려면 위의 그림처럼 성대가 잘 맞물려 닫혀야 하는데 결절로 인하여 성문이 벌어지니 공기가 그 사이로 새어나간다. 이것이 작은 구멍으로 바람 빠지는 것 같은  ‘ㅎ~ㅅ~’ 하는 소리가 말소리에 섞이는 이유다. 게다가 성대가 붓고 무거워져서 평소보다 둔해지기 때문에 말을 하는데 힘은 더 들고 소리는 둔탁해진다. 


 

 이렇게 목이 쉰 상태에서 제대로 소리를 내려면 결절이 있는 상태에서도 성문이 닫힐 수 있도록 성대를 꽉 조여줘야 하고 부어서 두텁고 무거워진 성대를 움직일 수 있도록 숨을 강하게 내뱉어야 한다. 결국, 통증이 발생하고 무리한 움직임으로 성대의 손상은 더욱 심해질 수밖에 없게 된다.


 요점은 이것이다. 목이 쉬어버리면 성대를 떨 수 없다. 즉, 성대를 떠는 유성음을 전혀 쓸 수 없다는 말이다. 한창 유성음을 듣고 말하려고 발바둥치던 시기였다. 어떤 것을 이해하고 체감하는 방법은 그것과 열심히 접촉하고 이해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도 있지만 반대로 철저히 배제함으로써 그 빈자리를 파악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특히, 파악하기 미묘하고 혼란스러운 것들은 이런 방법이 상당히 잘 먹히는 법이다. 친구나 가족의 빈자리를 느끼고 나서야 자연스러웠던 일상이 어떻게 유지되는지 비로소 알게 되듯이 자연스럽게 나오던 유성음을 박탈되면 이 유성음의 사용에 대해서 어떤 통찰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미 어떻게든 유성음과 친해져보려고 노력했지만 별다른 성과가 없었기에 더 매력적이었다.

 

 그리고 그 기대는 제대로 작동했다. 


 첫 번째는 한국어에서 유성음이 사용되고 있다는 확신과 체감을 얻었다. 한국어에도 유성음이 많다. 대표적으로 모든 모음이 그렇고, ‘ㄴ, ㄹ, ㅁ’ 등의 자음도 유성음이다. 또, ‘ㄱ, ㄷ, ㅈ’ 같은 자음은 상황에 따라서 무성음일 때도 있고 유성음일 때도 있다. 하지만 이를 유성음으로 자각하고 쓴 것은 아니기 때문에 체감하기 어렵다. 따라서 구분해서 듣지도 말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목이 쉰 상태에서는 이 모든 유성음들 내려고 할 때마다 소리가 제대로 나지 않거나 목이 찢어지는 통증이 오기 때문에 체감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었다. 유성음 사용빈도만큼 내 말소리가 이상해지기 때문이다. 이 덕분에 유성음을 어디 이론 속의 소리가 아니라 내가 항상 내고 있는 소리 중 하나라는 친숙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다면 왜 유성음을 많이 사용하면서 이를 구분해서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것일까? 구분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이는 정신적으로 의미를 구분하는 음성적 단위인 '음소'의 개념을 다시 떠올려야 한다. 한국어가 유성음을 '음소'를 구분하는 기준으로 채택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한국어 원어민은 이 유성음을 딱히 구분하지 않는다. 물론, 귀가 예민한 사람들은 이를 구분한다. 하지만 나 같은 막귀는 전혀 그렇지 않다. 뇌가 자연스럽게 유성음 여부를 파악할 수 있도록 따로 훈련을 해줘야 한다. 다행히도 목이 쉬어 유성음이 박탈된 경험은 나같은 막귀도 해볼 수 있는 훈련 방법이 무엇인지 자연스럽게 알게 해주었다.


 두 번째로 어떤 훈련을 해야할지 알 수 있었다. 유성음 박탈 경험은 가장 쉬운 연습방법을 보여주었다. 말을 할 때 유성음이 나와야 하는 상황마다 목이 아프거나 기대하지 않던 바람 빠지는 소리가 들려오니 자연스럽게 성대의 움직임을 인지하게 되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어떻게든 평소처럼 소리를 내려고 하다보니 목의 성문이 열리면서 공기가 자연스럽게 유통되는 느낌과 성문을 닫고 소리를 내는 느낌을 구별할 수 있게 되었다. 무의식적으로는 이미 자연스럽게 하고 있는 행위들이었지만 의식적으로 이게 성문을 닫는 것이고 이게 성대를 떠는 것이구나 하는 자각을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이 훈련은 목이 쉬어야만 가능한 훈련이다.  득음할 것도 아닌데 매번 목이 쉬게 만드는 훈련을 하는 것은 지나치게 과한 연습으로 보였다. 일상 생활에도 지장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관찰을 통해 이것저것 체감하다가 불현듯 알게 되었다. 목이 쉬어서 유성음을 내지 못해야 하는데 어떻게든 모음이 발음되고 있었다. 통증 때문에 목구멍을 열심히 열고 소리를 내고 있었지만 여하간 성대의 떨림없이 모음 비스무레한 것이 발음되고 있었다. 성대가 떨리지 않는 모음이니 무성 모음이었다. 목이 쉬었을 때, 한 번 감각을 잡았더니 무성 모음을 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내 경우에는 귓속말을 하듯 목소리를 낮추겠다고 마음 먹거나 목이 쉬었을 때를 떠올리면서 흉내내면 자연스럽게 무성 모음이 나왔다. 그 감각을 최대한 살리면서 유성 모음과 무성 모음을 번갈아가면서 연습하니 성대의 움직임과 들리는 소리가 조금씩 어우러지면서 유성음과 무성음이 조금씩 감이 잡히기 시작했다.


 우리가 흔히 만들어내는 모음은 유성음이고 무성 모음은 매우 예외적이다. 그러다 보니 이 방법은 안 쓰는 말소리를 끌어들여 연습하는 것이기 때문에 불필요한 연습으로 느껴질 수 있다. 실제로 이런 방법을 제시하는 경우는 본 적이 없다. 하지만 영어를 사용하기 위해서 조음기관을 다시 훈련시켜야 하는 입장에서는 매우 효과적인 훈련 방법이 될 것으로 보인다. 특히,  무성 모음과 유성 모음은 확연히 구별된다. 그렇다는 것은 유성음과 무성음을 구별해서 듣기도 힘들어하고 구별해서 소리를 내기도 힘들어하는 나같은 한국어 원어민이 유성음과 무성음을 대조하면서 듣고 말하기를 처음 익히기에 가장 알맞은 연습이 바로 이 유성 모음과 무성 모음을 번갈아가면서 발음하고 듣는 연습이 아닐까 하고 추측해본다. 


 마지막으로 덧붙이자면 몇몇 학자들은 음소 /h/를 무성 모음이라고 부른다.  이 말을 처음엔 이해하지 못했다. 어째서 자음을 모음이라고 말하는 지 납득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음성학을 공부할 수록 음소 /h/가 무성 모음이라는 점이 납득이 되었고 한국어와 영어 음성체계가 가지는 본질적인 차이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음소 /h/가 다른 음에 섞이면 그 말소리는 유기음이 된다. 그리고 그 유기음은 항상 무성음이다. 음소 /h/가 유성음을 철저히 배제하는 듯한 느낌이다. 또, 영어와 한국어의 음성체계는 유성 여부에 따라서 음소를 나누는가 아니면 유기 여부에 따라서 음소를 나누는가로 서로 다른 기준을 선택한다. 마지막으로 영어에서 음소 /h/는 퇴조하고 사라져가는 소리다. 방언에 따라서는 전혀 발음하지 않는 경우도 있을 정도다. 이를 종합하면 한국어는 음소 /h/를 주요한 기준으로 선택하면서 음성체계에서 유성 여부는 기준으로 잡지 않았고, 영어는 유성 여부를 주요한 기준으로 선택하면서 음소 /h/를 버리는 것 같다는 인상이다.


 사실, 이런 개인적인 생각과 상관없이 한국어 원어민이 영어의 음성체계를 정확히 이해하려면 유기음과 유성음을 정확히 구분하고 인지해야 한다. 따라서 유성음을 구별하여 듣고 말하는 연습으로 무성 모음을 익혀서 유성음과 대조하면서 익히는 것이 효과적이고 동시에 앞으로 제시할 유기음들을 제대로 다루기 위해서라도 음소 /h/를 자음 중에서 가장 먼저 다루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다. 

 


Ankilog 학습파일


학습용 Anki 파일은 아래와 같습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Ankilog 파일: 경험담이므로 Ankilog는 없음


 


 앞의 포스팅에서 의식이나 생각이 그 자체의 규칙이 아닌 다른 욕구에 따라 일어나고 사라진다는 것을 발견하고 욕구가 전환될 때마다 찰나의 의식 끊김이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무엇이 바뀌었을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파국의 경험으로 인하여 하나의 통합적인 자아가 있다는 믿음이 깨졌고, 의식인지 자아인지 모를 것이 파편화되면서 나 자신이 더 이상 주체가 아닌 객체로서만 존재했다고 말해볼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파국 당시에는 상황을 객관적으로 크게 바라보고 사유하고 분석할 어떤 무엇이 남아있지 않았다. 


 보통, 무협지를 보면 주인공들은 자기 자신이라는 일관된 어떤 사람이 있다는 환상이 깨지면서 깨달음을 얻고 성장하지만 아쉽게도 현실 속의 나는 오히려 망가졌다. 자기 자신에 대한 통제력을 완전히 잃었기 때문이다. 

 

 흔히, 망상이란 것은 이렇다. 이것저것 게임도 하고 싶고, 나가서 놀고도 싶고, 친구를 보러 가고 싶기도 한데, 공부는 해야 하고 그런 마음의 갈등 속에서 자기도 모르게 현실을 도피하면서 빠져들다가 정신을 차리고 갑자기 빠져나오는 것이 망상이다. 파국을 경험하기 이전에 나의 망상도 이랬다. 많이 귀찮기는 했지만 그래도 경계선이 명확했고, 망상에 잠깐 빠지더라도 다시 원래대로 돌아올 수 있었다.


 하지만 파국 이후에는 그렇지 않았다. 더 이상 경계가 남아있지 않았고, 망상으로부터 돌아오기 힘들었다. 무엇보다 망상에서 정신을 차리면 원래대로 돌아오지만 내 경우에는 처음부터 정신이 차려져 있었다. 단지, 힘이 없었을 뿐이었다. 망상은 내가 보는 앞에서 태연히 내 몸을 움직였다. 


 망상은 항상 내가 좋아할 법한 내용들이었지만 항상 너무 노골적이고 너무 지나쳤다. 배가 고프면 폭식을 한다. 잘 체하는 몸이기 때문에 폭식을 하면 항상 그 다음날 발열, 오한, 두통 등의 체증에 시달리지만 먹을 때는 그런 생각을 전혀 하지 않는다. 아니, 머릿속에 그 공포가 떠오르지만 욕구가 이것을 찍어 누르는 것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성욕이 생기면 야동을 틀어넣고 성욕이 일어나지 않을 때까지 기계적으로 해소한다. 이것은 이미 성욕해소가 아니라 자기 파괴에 가까운 자해행위였고, 죽을 것 같고 머릿속에서 피곤과 고통을 호소하지만 역시 성욕에 의해 무시된다. 잠은 더 이상 잠이 오지 않을 때까지 자고 그 잠마저 대부분 야동과 액션영화에 가까운 꿈으로 범벅이어서 쉰다는 느낌은 없었다. 쾌락은 충분히 자기 파괴적이었다. 


 다음날 겪을 부작용이 눈에 선해서 욕구에 브레이크를 걸려고 해도, 그 때마다 욕구가 그 생각을 찍어 누르고 왜곡시키는 것을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욕구가 절제를 찍어누르는 감각은 다이어트를 하거나 금연을 할 때, 느끼는 감각과 비슷하다. 다이어트를 할 때, 식욕이 올라오면 그 욕구가 마음을 흔든다. 이것은 성경에서 보던 사탄과 비슷해서, 온갖 유혹을 만들어낸다. 단순히, 욕구 그 자체로 존재하지 않고, 생각이 같이 끌려나온다. 때론, 욕구 그 자체가 하나의 자아처럼 기능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할 정도다. 가령 다음과 같다. 


 다이어트를 할 때, 갑자기 라면을 먹고 싶은 마음이 강하게 든다. 유난히 욕구가 거세다. 그러면 다음과 같은 문답이 활성화된다. 

절제 : 참아야해!

욕구 : 이번엔 욕구가 유난히 심하네, 이 번 한번만 먹고 다시 절제하자.


절제 : 그러고 먹으면 다음번엔 “이미 다이어트를 망친 것 같으니, 일단 욕구는 채우고 보자.”라는 식으로 할 거면서 절대 먹지 않을거야.

욕구 : 하지만 이렇게 맛있어 보이는 라면을 먹지 않겠다고? 이런 소소한 즐거움도 누릴 수 없는 인생이 무슨 가치가 있어.


절제 : 한두 번 속는 줄 아나! 나중에 살 빼고 먹을거야!

욕구 : 네가 자꾸 실패한 것은 네 의지력이 약해서지 왜 자꾸 욕구를 탓하는 거야. 평생 욕구 없이 살 것도 아니면서. 욕구를 그렇게 노골적으로 부정하면 네 인생도 재미없을 거야. 그러니 같이 공존해야지. 그러니 ... (끝없는 이야기들)

 

 욕구는 절제하고자 하는 마음을 하나하나 논박한다. 위의 문답은 보통 “이 번 한번만”에서 무너지기 일쑤다. 하지만 계속 버티면 욕구는 설득하고 인신공격을 한다. 그 다음에도 버티면 욕구는 끊임없이 밑도끝도 없이 절제를 괴롭힌다. 결국, 절제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무너지고 욕구가 승리하는 상황이 연출된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에서 ‘절제’가 무너질 때 자존감에 심대한 타격이 가해진다. 그렇게 자존감이 몇 번 무너지면 더 이상 다이어트나 금연을 할 엄두가 나지 않게 된다. 


 내 파국의 경험이 무서운 것은 더 이상 욕구가 절제를 논파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냥 나타나서 노골적으로 욕구를 해소하고 잠시 쉬었다가 다시 나를 괴롭힌다. 그리고 나의 주체감, 내가 나라고 생각하는 감각은 항상 그 반대의 ‘절제’ 속에 있어서 욕구가 일어날 때마다 그 무기력함에 회의감, 한심함, 자괴감, 좌절 등을 느끼면서 자존감에 심대한 타격을 받았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는 내 스스로를 욕하는데서 쾌감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자신의 한심함을 경멸하고 욕하는 것이 상처난 곳의 딱지를 긁듯이 중독되는 쾌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욕구를 제어하는 방법은 더 큰 쾌락과 공포였다. 노골적이고 지나친 성욕의 범람은 전혀 즐겁지 않고 역겹다. 하지만 안하겠다고 스스로를 아무리 다그쳐도 씨알도 먹히지 않는다. 하지만 다른 쾌락의 추구로 전환하면 어느 정도 먹힌다. 나는 이를 만화방으로 옮겼다. 집의 모니터 앞에서 도망가기 위해서였다. 물론, 만화방에서의 욕구가 적절하다는 것은 아니었다. 기본으로 만화방에 머무는 시간이 20시간이었다. 지쳐서 쓰러질 때까지 만화책과 무협지를 보고 또 봤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이게 나쁜 방법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만화책이나 무협지나 성욕과 폭력에 대한 대리욕구인 것은 인터넷이나 야동과 다를 바 없지만, 어떻든 간에 착하고 좋은 뻔한 주인공들이었기 때문에 어떻게든 정상적인 가치관이나 긍정적인 가치관을 계속 머리에 새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다음은 공포였다. 아무리 욕구가 지나쳐도, 그 모든 것은 해본 것을 극대화하는 수준이었지 결코,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게 하지는 않았다. 아무리 성욕이 강해도, 범죄를 생각해본 적은 없었고, 타인에게 폐를 끼치는 상황으로 가지는 않았다. 그것은 도덕감 때문이라고 생각되지는 않았다. 오히려 공포였다. 낮아진 자존감이 그런 상황을 더 부추겼다. 폭력은 자신 없었고, 범죄로 돌아올 여파가 더 무서웠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 공포가 나에게 살길을 열어주었다. 


 매일 매일 온갖 욕구에 시달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자존감이 무너졌다. 하던 고시 공부는 실패와 다름없었기에 마찬가지로 사회적 자존감도 무너졌다. 스스로가 꿈틀거리는 벌레처럼 느껴졌을 때, 어떤 강사가 했던 말이 자꾸 머리에 떠올랐다. 


매년 고시촌에는 자살인지 아사인지 알 수 없는 사람들이 나타난다. 이들은 거듭된 실패 속에서 어느 날 삶의 의욕을 잃게 된다. 적극적으로 자살을 하겠다는 의욕도 없다. 그냥 고시원에 하루 종일 누워서 천장을 바라보고 있다. 반대로 살겠다는 의욕도 없어 아무 것도 먹지 않고 그저 누워만 있는다. 그러다가 굶어죽는 것이다.” 


 이 이야기가 남의 이야기로 들리지 않았다. 스스로 미쳐간다고 생각하면서 망가졌을 때, 그 망가짐이 심해졌을 때, 이 이야기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내가 그렇게 죽는 모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공포감이 내 절제력과 통제력을 잠시나마 원상복귀 시켜주었다. 그리고 그 짧은 시간이 이 상황에서 탈출할 방법을 찾을 유일한 시간이었다.

 앞서, 망상을 관찰하고 이 망상의 근원으로 올라가 뿌리째 뽑으려 했다가 파국을 맞이하는 이야기를 했다. 이 정신적 파국은 2004년에 있었고 2016년이 되어서야 스스로 어느 정도 치유되었다고 말할 정도가 되었다. 그리고 그 12년간 이 파국에 대한 경험은 내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반복적으로 재생되는 악몽이었다. 이미 많이 좋아졌다고 여겨지는 현재에도 언제 다시 그렇게 나락으로 떨어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여전히 남아있다. 그러니 이 파국이 어떻게 일어난 것이고 나에게 무슨 결과를 가져온 것인지 파악하려는 노력이 계속될 수밖에 없었다. 이번엔 그렇게 개인적으로 곱씹으면서 파악해본 파국의 근원과 양상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노파심에 말하지만 만일, 누군가 이 경험이 재미있다고 생각해서 이것을 따라하려고 한다면, 절대 그러지 않기 바란다. 내가 겪은 일이 나의 유전적, 환경적 요인 때문인지, 아니면 보편적으로 마주칠 수 있는 경험인지 알 수 없지만 구태여 10여년의 기간 동안 폐인이 될 불필요한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이 경험을 구태여 파국이라고 명명한 이유는 통제 불가능해진 삶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 경험을 경계로 하여 근본적인 정신적 변화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이 경험 이전과 이후의 나 자신은 전혀 다른 사람이라고 할 만한 변화였다. 즉, 단절이 발생한 것이다. 


 이 경험이 있기 전에도 다윈의 진화론과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에 열광하면서, 합리성과 이성이라는 신화에 도전하는 포스트모던적인 이야기들에 고개를 주억거리면서 동의했다. 즉, 인간이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라는 말이 전혀 옳지 않다고 생각한 셈이다. 그래서 효율 중심의 ‘경제적 동물’로서의 인간이나 모든 것이 통제되고 합리적으로 생각하는 ‘계몽적 인간’도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인간은 불합리하고 감정에 의해서 통제되는 ‘동물’의 하나라는 생각이 기본적으로 깔려 있었다.


 하지만 이런 모든 생각은 역설적이게 철저히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방식이라고 생각되는 방법으로 얻어낸 결과들이다. 진화론은 과학적 방법론과 광범위한 관찰이 적용되었고, 정신분석에서 프로이트는 건조할 정도로 철저하게 과학적 원인에 집착한다. 그것을 보고 전개되는 논의들도 대부분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라는 외피를 위하여 철저하게 논리성을 추구한다. 어쩌면 이는 이성과 합리성의 극단을 추구한 결과가 자기 부정으로 이어지는,  『괴델, 에셔, 바흐』 식으로 말하면 자기 부정에 도달할 정도로 고도의 이성과 합리성인 셈이다.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이성으로 관찰한 결과 인간에게는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이성이 없는 것 같다.”라는 패러독스에 가까운 결론에 도달하는 것이 만족스러웠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이는 입으로는 인간에게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이성이 없다.”라고 말하면서 지적인 허영심을 만족시키고, 은연중, 그 말을 하는 나 자신은 훈련받은 지식인으로서 “충분히 합리적이고 객관적이다.”라는 선민의식도 같이 즐겼던 것이 아닌가 싶다. 여하튼 입으로는 인간의 이성과 합리성을 부정하면서 추구하는 것은 바로 그 이성과 합리성이었다. 하지만 파국을 경험하고 난 이후에는 그냥 동물 레벨로 떨어져서 온갖 욕구에 매순간 꿈틀거리기에 바빴다.


 망상을 뿌리째 뽑으려는 의도 뒤에는 각종, 생각과 망상이 결국, 어떤 연쇄 반응에 의해서 일어났다는 가정이 있었다. 즉, 생각과 생각이 이어지면서 점차 망상으로 전개되고 그 망상에서 허우적대는 자신의 모습을 일종의 망상-모델로 떠올린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은연중 암묵적으로 전제하고 있었던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단 한가지의 근원적 망상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근원적 망상은 프로이트식으로 말하면 리비도일 것이고, 불교식으로 말하면 무명(無明)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바라봄으로써 그 경계를 뚫고 허무함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식의 모델은 칼릴지브란과 무협지의 합작이었던 것 같다. 아마도 항상 성욕에 관련된 잡념이 많이 나타나므로 프로이트를 같다 붙이고 거기에 주워들은 불교 상식과 무협지적 망상, 각종 형이상학적 모델을 짬뽕해서 얼기설기 만든 어떤 정신 모델을 은연중 신봉하고 있지 않았나 싶다. 


 하지만 망상 들여다보기를 반복하고 단기 기억상실을 몇 번 경험하면서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고통스럽게 알게 되었다. 


 우선, 하나의 망상을 확인하고 그 망상의 원인이 되는 생각을 보려고 했지만 보지 못했다. 하나의 망상을 잡아서 그것을 응시하면서 이 원인이 되는 망상을 보려고 할 때, 강하게 집중하면 의식이 날아갔고, 집중하지 못했을 때는 그저 망상 속에서 허우적대기만 했다. 하지만 들여다보기를 그만두고 일어난 상황을 곰곰이 곱씹어보면 망상 속에서 허우적댈 때나 의식이 날아가서 망상 한 가운데서 깰 때나 결국은 비슷했다. 현재 망상의 원인이라고 할 만한 앞서의 생각이나 망상을 발견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저 생각은 이 생각에서 다른 생각으로 비약하고 넘어갈 뿐이었다. 단지, 그 중간에 의식의 단절이 일어나는 것을 인식하느냐 인식하지 못하느냐의 차이만 있었을 뿐이었다. 이건 큰 충격이었다. 왜냐하면 생각의 근원이 다른 생각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관찰하는 의식은 그것을 전혀 감지하지 못했다. 그것을 감지하려고 하면 의식은 그대로 전원이 꺼져버렸고, 감지하려 하지 않았을 때는 생각의 도약을 은폐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생각이라는 것은 ‘연쇄’라는 말이 붙을 만큼 많은 생각들이 이어지는 것이 전혀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용출하는 욕구에 바로 달라붙은 작은 조각에 불과했다. 어떤 근원적인 망상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실재적인 성욕, 게임욕, 식욕, 명예욕이 생각의 근원에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욕구는 외부의 자극을 받았든 내부의 자극을 받았든 생각과 상관없이 촉발되었다. 가령, 성욕이 가장 대표적이다. 성욕이 용출할 때마다 그에 따른 의식적 생각이 형성된다. 다른 사람은 어떤지 알 수 없지만 스스로의 성욕을 추적했을 때 깨닫는 바가 있었다. 일단, 성욕은 생각을 통해서 일어나지 않는다. 매력적인 이성이 지나가면 그 이성을 눈과 몸이 따라가고 그 뒤에서 생각이 달라붙어서 그 행동의 이유를 만들어낸다. 그렇게 의식에서 만들어내는 이유는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는데, 결정적으로 반응보다 생각이 먼저 일어났다고 선후를 뒤바꿔 놓는다. 즉, 자신이 그 이성을 매력적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눈과 몸이 따라가고 있다는 것으로 뒤바꿔 놓는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이제 고개를 돌리고 내 일에 집중해야지라고 마음먹어 보려고 노력해보라. 일단, 그런 생각이 잘 들지도 않고, 억지로 그런 생각을 떠올려서 움직여보려고 하면 상당한 저항감과 온갖 핑계가 순식간에 떠오른다. 즉, 욕구가 우선이고 생각은 부수적이다.


 아마 위와 같은 상황을 많이 느껴보았을 것이다. 성욕, 게임, 담배, 식욕 등등이 용출할 때마다 자주 찾아오는 현상들이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자주 겪고 느낄 수 있는 것들이다. 하지만 이 상황의 이면에 욕구가 용출하기 이전 상황과의 불연속성이 있다는 점을 잘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지하철에서 책이나 스마트폰을 집중해서 보거나, 동행인에게 집중하고 있었을 수 있고 중요한 생각을 진행시키고 있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지나가는 이성에 의해서 성욕이 용출했을 때는 그 모든 것을 잊고 성욕으로 인한 생각과 제어에 몰두하게 된다. 그리고 그 과정은 자동적이고 불연속적이며, 갑자기 그 전에 무엇을 했는지 잊게 되는 찰나의 기억상실이 있다. 게임, 좋아하는 연인, 담배 등등 우리 주위에 우리를 지배하는 이 모든 것들은 비슷하게 작동한다. 


 나 자신의 망상을 들여다볼수록 내 생각이니 합리성이니 하는 것들이 그런 욕구에 붙어서 일어난다는 점이 명확하게 느껴졌고 욕구가 이동할 때, 내 생각도 그리고 그것을 감지하는 의식도 강제로 바로 이동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생각과 의식은 그야말로 곁다리에 불과하다. 욕구가 바뀌면 생각과 의식도 같이 점프하지만 의식은 그 변화를 인지하지 못하거나 알아도 그것을 속이고 연속적인 것처럼 은폐할 뿐이었다. 


 아무리 근대적이고 합리적인 인간상을 부정해 왔어도, 노력하고 경계하고 의식하면 어느 정도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겨왔던 것 같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나’라고 하는 어떤 일관되고 연속적이고 고유한 그 무엇이 있다고 여겨왔던 것 같다. 그리고 나는 스스로 그것들을 ‘의식’하고 있다는 암묵적인 믿음이 있었던 것 같다. 그렇지만 파국의 경험은 그 모든 것이 ‘의식’의 거짓말이라는 확신을 갖게 했다. 그리고 그 확신과 함께 나는 나 자신에 대한 모든 통제력을 상실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당시에는 이미 모든 것이 뜻대로 잘 되지 않는 심리적으로 힘든 시기였다. 그런데 그 동안 스스로 통제하고 일관된 ‘나’로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항상 욕구에 맞추어 생각하고 의식했을 뿐이라는 것을 깨닫고 스스로 통제되고 일관된 ‘나’가 조악한 환상이라는 것을 절감하면서 최후의 심리적 방어까지 무너졌던 것이 아닌가 싶다.

 이항구조에 대한 개인적인 발견으로 시작되어서 신경세포에 영감을 받은 나는 큰 호기심을 가지고 책들을 뒤지기 시작했다. 인간의 추상적인 정신이란 결국, 인간의 구체적인 행위와 사상으로 나타나는 것이고 이는 이항구조와 같은 어떤 추상적인 구조의 형태로 나타날 것이라는 생각에 문학, 사상 등의 책을 읽고 그러한 추상적인 구조를 추가적으로 발견하고 싶었고, 발견된 구조를 통하여 인간을 총체적으로 이해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공부들은 바로 큰 벽에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 제대로 된 인문학 공부라는 것은 무시무시할 정도로 공부량이 많기 때문이다. 특히, 암기할 것이 너무 많고 외국어 소양도 충분해야 하는데 두 가지 전부 내가 할 수 없는 종류의 행위들이었다. 결국, 깊은 수준까지 제대로 공부는 하지 못하고 교양으로 이해가능한 수준의 책만 뒤적이기를 반복하면서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인문학 공부를 통해 원하는 것을 얻지는 못했지만 다량의 독서 경력은 생겼고 나름 인문학 쪽에 소양이 생겼다. 또, 그만큼 전공 공부를 놓아버렸기 때문에 탈출구를 고민하다가 고시를 생각했다. 안정적인 신분으로 나름 편하게 살면서 평생 독서나 연구를 하면서 살겠다는 안이한 생각이었다. 당연히, 고시는 실패했다. 암기가 안 되는 사람이 고시를 공부한다는 것이 코미디였다. 그런데 이 실패가 매우 치명적이었다. 


 고시 공부는 시작부터 난항이었다. 대학을 거치면서 공부하는 법을 전부 까먹은 것인지 공부라는 행위 자체가 되지 않았다. 책상 앞에 앉아있으면 잡념이 끊이질 않았다. 그래서 처음엔 인간관계를 끊었다. 친숙하게 노는 친구들이 전부 공부랑 담을 쌓고 있어서 한번 어우러질 때마다 1~2주일의 시간이 훅 날아갔기 때문에 결단을 내리고 인간관계를 정리하고 휴대폰도 없애버렸다. 하지만 인터넷이 남아있었다. 다른 관계를 모두 끊었더니 오히려 인터넷이 삶을 좌지우지 할 정도로 비중이 높아져버렸다. 인터넷 뉴스는 매일매일 자극적인 이야기를 전달해주고 홀로 심각하게 받아들여 밤마다 세상의 불의에 분노하고 좌절하느라 공부는 뒷전이었다. 세상에 대한 분노, 공부가 안되는 좌절감 등이 너무 고통스러울 때는,  생각을 잊게 해 줄 재미있는 영화나 게임을 찾아 인터넷을 헤매기도 했다. 결국, 내 잡념은 결국, 항상 인터넷으로 연결되었다.


 공부를 하다보면 꼭, 그 동안 전혀 신경 쓰지 않았던 다른 것이 하고 싶어진다. 꼭, 시험 전날 한창 바쁠 때, 엉뚱하게도 운동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고, 평소에는 전혀 관심이 없던 엉뚱한 이상한 책을 읽고 싶어진다. 고시 공부를 하는 기간도 내내 이런 엉뚱한 충동을 겪어야 했다. 당시, 책꽂이에 대략 10년쯤 있었던 칼릴 지브란의 우화집 《어느 광인의 이야기》가 있었다. 누군가 사와서 책꽂이에 꽂아놓은지 한참 지난 책이었고 한번도 펼쳐보지 않은 책이었다. 공부를 하다가 갑자기 이 우화집이 눈에 확 들어왔고 충동적으로 그것을 펼쳐 읽었다. 그리고 “자아가 허무함을 응시”하는 이야기에 꽂혀 버렸다. 공부를 하거나 길을 걷다가도 불현듯 “자아가 허무함을 응시”하는 것을 떠올리는 것이다. 


 시간은 흘러가고 자신에 대한 한심함과 자괴감이 이미 강해질대로 강해졌다.  결국, 공부가 손에 잡히지 않던 어느 날, 너무 많은 상상과 생각이 머릿속에 넘쳐흘러서 괴롭던 어느 날 망상을 뿌리째 잘라내고 싶다는 강력한 충동이 생겼다. 그 충동은 방법도 같이 제시했다. 그 방법이란 "허무함을 응시"하는 것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상한 충동이다. 여튼 당시 머릿속의 생각은 망상의 연쇄작용을 따라 올라가보면 "허무함"이 있을 것이라는 이상한 확신이었다. 망상을 뿔리째 잘라내고 싶었던 것인지 망상에 휘둘린 것인지 잘 구별이 가지 않는다.


 그것이 망상인지 충동인지 구분할 수는 없었다. 단지 괴로웠고, 평화가 필요했다. 모든 것의 연쇄작용을 따라 올라가서 그 망상의 근원을 보고 그것을 파괴하거나 제어하여 내면의 평화를 찾지 못하면 죽을 것 같았다. 어쩌면 "허무함"을 내면의 평화로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여하튼, 방바닥에 책상다리로 앉아서 스스로의 망상을 따라 올라가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망상을 하나하나 인식하려고 시도했다. 그리고 인식된 망상의 원인을 찾아 그 뿌리를 찾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망상은 항상 흘러넘쳤기에 망상을 인식하는 것은 쉬웠다. 망상은 인식하면 그 망상의 원인이 무엇인지 보려고 했다. 하지만 망상을 인식하고 그 원인을 찾으려는 순간 인식된 망상은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갑자기 망상이 없어지니 망상의 원인도 왜 찾아야 하는지 알 수 없게 되었다. 다시 정신을 가다듬고 망상을 다시 인식하려고 한다. 어라 조금 망상이 줄었다. 망상을 찾아 헤맨다. 다시 망상을 찾았다. 인식하고 그것의 원인을 궁구하려고 하는데 다시 망상도 사라지고 그 망상의 원인은 붕 떠버린다. 그리고 필름이 끊겼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모르겠지만 음란한 망상의 한 가운데서 의식을 자각한다. 음란한 망상이라고 구태여 말한 것은 일관된 것이 아니었지만 그 모든 것의 주제가 성행위나 폭력이었기 때문이다. 이야기처럼 서사나 내러티브가 있는 것은 아니고 그저 온갖 야동과 폭력 영화가 머릿속에서 한꺼번에 플레이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또, 음란하다고 생각한 이유는 머릿속의 영상이 어떻든 간에 거기에 투영되는 욕구가 너무 강하고 동물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무한반복이 몇 번이나 지나갔는지 알 수 없지만 멍하니 그 모든 것을 보고 들으면서 체험하다가 서서히 의식이 깨기 시작했다.


 의식이 깨어나는 순간을 뭐라고 설명해야할까? 의식이 깨어나기 이전의 체험이 전부 기억이 난다. 하지만 그 순간에 나는 방관자, 혹은 무기력한 정보의 수용자에 가까웠다. 어떤 역겨운 내용도 의도도 그저 스쳐지나가고 있었다. 길가의 돌멩이처럼 무력했다. 하지만 의식이 깨어나는 순간 이 모든 것이 조금씩 옅어졌다. 역겹다는 나의 느낌이 반영된 것일 수도 있다. 의식이 있기 전에는 그저 돌멩이 마냥 있었다면 의식이 생기면서 ‘나’라는 인식이 생기고 안정감이 돌아왔다. 통제가 가능해지는 느낌과 함께 안도감이 몰려왔고, 머릿속에서 무한 재생되고 있는 음란한 망상들이 인식되고 의식이 없는 동안 그런 음란한 망상들 속에 있었다는 기억이 떠오르면서 상황 인식이 형성되었다. 동시에 노출된 스스로의 욕망으로 인한 역겨움이 같이 떠밀려 왔다. 그리고 서서히 그런 망상들이 사라지고 안정된 현실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나는 필름이 끊긴 것을 전혀 몰랐다. 그저 지독하게 낯설고 강력한 상상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자신을 보았을 뿐이다. 앞서 망상을 인식하고 그 원인을 파악하려는 행위가 있었다는 것을 전혀 기억할 수 없었다. 의식이 깨어나고 한참 후에 기억을 되짚어 보고서야 망상을 인식하고 그 원인을 파악하려는 행위가 갑자기 종료되었다는 것을 알았을 뿐이고 그 다음은 아무런 기억이 없다. 눈을 떠보니 지독하게 낯설고 날것의 강력한 망상의 와중이었을 뿐이다. 즉, 단기적 기억상실에 가까운 단절이 일어난 것이다. 


 망상의 근원으로 올라가 잡념의 원인을 파악하고 그것을 제거해보겠다는 의도를 가지고 이러한 일련의 일들을 수행했고, 그 결과는 실패였다. 그래서 다시 몇 번이고 시도했지만 항상 다락에 가까운 단기적 기억상실을 겪고 온갖 망상 속에서 깨어날 뿐이었다. 그리고 망상을 끊어보겠다는 의도와는 달리 망상은 오히려 늘어났고 그 힘도 더 강해졌다. 즉, 예전에는 잡념 수준으로 귀찮은 것에 불과했다면 이제는 거부하기 어려운 욕구가 되어 끊임없는 갈증을 선사했다. 


 원래, 잡념이 많아서 공부가 안 되는 상황에서 출발했다. 이때만 해도 모든 것은 어느 정도 건강했었다. 공부하기 싫어하는 학생이 책상 앞에 억지로 앉아서 지겨움에 몸을 비비꼬면서 망상에 빠지는 것에 가까웠다. 하지만 내가 망상의 근원을 파헤쳐보겠다고 앉아서 머릿속을 응시하면서 이 모든 것은 확연하게 병적인 것으로 악화되었다. 잡념에 불과했던 것들이 이제는 충동으로 바뀌어서 나를 제어하기 시작했다. 매순간 모든 욕구가 나를 파괴시킬 정도로 강하게 일어나기 시작했다. 성적인 욕구가 너무 강해져 낮이고 밤이고 잠을 잘 수 없었고, 감당하기 어려운 성욕이 가라앉기를 바라면서 하루 종일 야동만 보고 있어야만 했다. 지쳐 쓰러질 지경이 되어서도 머릿속에서 망상이 떠나질 않았다. 식욕도 너무 강해져서 고칼로리 음식 위주로 먹고 끊임없이 먹었다. 단맛이 역겹게 느껴지고 속이 물려도 식욕이 통제가 되지 않았다. 머릿속에서 각종 망상이 스테레오로 각성되어서 잠은 지쳐 쓰러질 지경이 되어야만 겨우 잠깐 눈을 붙일 수 있을 뿐이었다. 그것도 이상한 통증 때문에 수면 부족이 되기 일쑤였다. 담배는 줄담배로 피었고, 야동을 벗어나도 갈 수 있었던 곳은 만화방 정도였다. 무협지와 판타지의 단순한 대리 욕구로 머리를 도배해야만 가까스로 조금이나마 평화를 즐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조금씩 내가 미쳐가고 있구나 하는 자각이 몰려왔지만 방법이 없었다. 충동이 들 때마다 나는 너무나 무력하게 충동을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범죄는 저지르지 않았지만 그것은 이성적인 통제와 절제가 아니었다. 그저 그런 충동이 잘 일어나지 않았고, 범죄적인 충동이 있을 때마다 또 다른 충동인 공포가 나타나서 더 강한 충동에 따랐을 뿐이다. 즉, 타인을 상하게 하는 것에 대한 공포와 벌을 받고 싶지 않다는 공포가 있었기 때문에 범죄를 저지르지 않은 것이다.


 이제 더 이상 고시 공부가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그것 그대로 좌절이 되어서 나를 옭아매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매일매일 스스로에 대한 역겨움과 혐오감, 탐욕과 색욕, 식욕, 좌절, 공포 속에서 미친놈처럼 펄떡이다가 어느 순간 내가 진짜로 미친 것일지 모른다는 점을 깨달았다. 파국이었다.

인생에 있어서 인상깊은 경험이야 한두개씩 있겠지만 이 블로그의 주제는 공부이므로 공부에 대한 경험담을 한 번 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 이야기를 해봅니다.


저는 국내 최고의 대학에 재수를 해서 들어갔는데, 제 주위의 친척이나 제 중고등학교 친구들은 제가 그곳에 들어갔다고 하면 대부분 경악을 합니다.


평소 제가 그렇게 공부를 잘하는 편이 아니었기 때문이지요.


저는 강남 8학군이긴 하지만 반에서 가장 높았던 성적도 정말 노력해서 대충 5등 정도 였던 것 같고 내신도 높지 않았습니다.


전교에서는 50등 권으로 진입했던 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지금의 내신 기준하고 달라서 현재랑 비교하면 어떨지 모르겠지만 당시 그 내신으로 그 대학을 지원한다는 일은 상상하기 어려웠지요.


첫 수능을 치고 그 대학에 면접을 갔을 때, 그 교수가 했던 말이 무척 인상깊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성적으로 여기를 지원할 생각을 했는가?" 라는 것이 교수가 면접시 했던 첫 질문이었습니다.


교수님의 어이없어 보이던 표정이 아직도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다음 해에 또 그 대학의 다른 과를 지원했는데 이번에는 합격했습니다. 



당시 재수생활을 떠올려 보면 지금 생각해도 신기한 마법같은 일이 벌어졌었습니다.


재수생활은 초6, 중3, 고3의 12년 동안 통학하면서 보냈던 저에게 매우 신기한 경험이었습니다.


학원을 다녀야 하긴 했지만 학원은 학교처럼 출석체크를 열심히 하지도 않고 선생님이 강압적이지도 않아서 학원에 빠져도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었죠.


그래서 학원을 간다고 말했지만 가지 않고 계속 놀러 다녔습니다.


대입에 떨어진 트라우마일까요? 아니면 갑자기 재수 생활이라는 낯선 환경에 적응하지 못한 부적응일까요? 무엇으로 설명해야할지 모르겠지만 당시 저는 뭔가 나사가 빠진 사람 같았습니다.


잠을 아무리 자도 또 자고 싶고, 의욕이 없었습니다. 


조금만 움직여도 피곤하고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고 몸이 움직이는게 정신적으로 매우 어색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삶을 통제할 힘이 없는 것처럼 부평초처럼 그저 상황에 휩쓸려 움직였지요.


당시, 일본의 코믹스 류 만화책이 대거 들어오면서 만화방이 많이 생겼는데, 의욕도 없는 상황에서 만화를 좋아하는 저로서는 거기에 푹 빠져서 살았습니다.


학원가 인근의 만화방을 뒤지면서 매일매일 쉬지 않고 하루 12시간 이상을 만화방에서 살았습니다. 


당시, 5천원을 주면 만화방이 영업을 종료할 때까지 만화책을 볼 수 있는 곳이 있었는데, 이곳에 아침 10시에 출근해서 저녁 10시에서 11시 사이에 나왔습니다. 


학원에 가서 공부 열심히 하라고 식비와 교통비로 만원 가량을 받았는데, 5천원은 만화방비로 내고 나머지 5천원으로 점심과 저녁을 싸구려 빵같은 것으로 허기만 달랬습니다.


교통비는 없으니 당연히 1시간 가량을 걸어서 만화방에 갔고 다시 만화방에서 집까지 걸어서 왔습니다. 


이런 생활을 매일매일 하루 12시간 이상씩 계속 했고, 정신적으로도 불안했던 것인지 어느 순간부터는 만화책의 몰입도가 무척 높아졌습니다.


정말 제가 만화책 속에서 살고 있는 느낌이었지요. 


당시 "슛"이라는 만화를 보면서 제가 필드에서 뛰는 느낌과 심장이 쿵쿵거리면서 뛰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저는 그 몰입이 너무 즐거운 동시에 제가 미쳐가고 있다는 느낌도 동시에 받았습니다.


멋진 주인공의 몸놀림을 몸으로 재현하는 느낌이 생생했지만 동시에 이런 감각, 현실과 전혀 구분되지 않아서 소름이 끼친 것입니다.


역설적이지만 만화책이 더더욱 좋아진 시점에 경계심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가끔, 친구들과 같이 만화방을 가면 친구들은 5시간 정도가 지나면 힘들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면서 정말 지친 표정으로 나가자고 하지요. 


하지만 저는 12시간 동안 내리 집중해서 만화책을 보았습니다. 


결국, 그 만화방의 만화를 전부 보고 다시 또 봤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슬슬 제 상태가 무언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계속 받았습니다.


시험삼아 만화방을 안가보려고 시도해보았습니다만 이미 상황은 중독으로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벌써 6월인데 공부는 전혀 하지 않고 있고, 만화책 중독이란 듣도보도 못한 일을 겪고 있으니 위기감이 고조되기 시작했습니다.


만화방에서 걸어서 집으로 올 때, 가끔씩 보이던 이상한 사람들, 혼잣말을 하고 집도 절도 없어보이는 사람들이 남일처럼 여겨지지 않았습니다.


인생에 있어 낙오한다는 말이 피부로 와닿았습니다. 


하지만 만화책과 만화방은 저의 삶을 뿌리째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만화책 중독이란 말이 있을 줄은 저도 몰랐지만 실제로 그러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전형적인 중독 증상과 금단 증상을 겪었기 때문이지요.


책상 앞에 앉아서 공부하려고 하면 5분만 지나도 손발이 부르르 떨렸습니다. 


사진으로 찍은 듯한 만화책의 영상이 머릿속에서 자동으로 플레이 되고 의식이 날아갑니다. 


정신차려보면 만화방에서 만화책을 보고 있고 그 사이의 기억이 사라져 있습니다. 


이 정도 되면 소름이 끼칩니다. 아 이미 망해버린 인생이구나 싶었습니다. 


괜히 술에 취해 자동차 밑에 들어가신 분이 안쓰러워져서 집까지 부축해주고, 푼돈이나마 적선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악전고투를 시작한게 7월이었습니다. 


7월까지는 공부를 전혀 하지 않았지요. 그저 암담한 재수생활이었습니다.


스스로를 통제하기 위해서 여러가지 방법을 강구해보기 시작했습니다. 


우선, 만화방에서 가장 먼 지역의 인기 없는 독서실을 찾았습니다. 


여기서 정말 운이 좋았는지 독서실이 인기가 없어서 큰 독서실의 방에 사람이 저 혼자였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만화는 저를 괴롭혔습니다. 공부라는 것을 할 수가 없었지요.


아무리 참고 이를 악물고 해도 어느새 정신차려보면 만화책을 보고 있었습니다. 


결국, 저는 포기했습니다.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만화책에 대한 생각을 멈출 수도 없었고 행동을 통제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좌절과 스스로의 한심함에 책상에 코를 박고 한 5분 잤습니다. 


자고 일어나니 욕구가 가라앉아 있었습니다. 


물론, 5분 후에는 다시 만화책에 대한 욕구가 생겨서 튀어나가긴 했지만 처음으로 욕구가 가라앉은 것입니다. 


그 때부터 잠을 자기 시작했습니다. 


1분, 2분, 5분 등 잠깐이라도 의식을 끊었습니다. 


만화방을 갈 욕구만 가라앉는다면 몇시간을 자도 좋고 1분을 자도 좋았습니다. 


그렇게 한달 동안 조금만 욕구가 생겨도 잠을 자니 드디어 조금씩 만화방을 통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저는 더욱더 잤습니다.


그리고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저는 7월에 독서실에 들어가서 9월초까지 만화책 중독하고 싸움의 연속이었습니다. 


11월이 수능인데 거의 공부를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잠을 계속 끊어서 자다 보니 머리가 맑아지는 것입니다. 


이 부분이 마법같은 부분인데, 머리가 맑아지니 공부의 효율이 미친듯이 올라가기 시작했습니다. 


책을 보는 집중력이 올라갔고 집중력이 올라가니 바로바로 내용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책을 한번 보고 그대로 외우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수능 전까지 3개월 동안 교재들을 딱 한번 다 보았는데 전부 이해하고 외어버렸습니다. 


그 때 처음으로 머리가 맑아진다는 것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게 되었습니다.


그건 정말 말로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로 어마어마한 것이었고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습니다. 


한 번 보면 이해하고, 한 번 보면 사진처럼 명확하게 기억하는 천재들의 이야기를 실제 삶에서 체험해본 것입니다. 


지금은 아니지만 당시 저는 분명히 천재라는 표현을 감히 써볼 수 있었습니다. 


저는 그때에 이르러서야 인간의 가능성이 무한하다는 말을 믿게 되었습니다. 


당연히, 수능은 제 역사상 가장 높은 점수를 받았고 당당히 최고의 대학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첫번째 수능 성적을 본 교수가 저 같은 성적을 가진 사람이 지원했다고 어이없어 했다면, 두번째 수능 성적을 본 교수님은 이 성적으로 자신의 과를 지원해줘서 고맙다고 했으니 재미있는 일입니다. 



저는 이 마법을 머리가 맑아지는 방법이라고 부릅니다. 


저야 만화책 중독이라는 절망으로부터 도망가고자 하는 절박함이 가장 중요한 동기가 되었고, 독서실의 큰 공간에 저 혼자였기 때문에 행동에 거침이 없고 신경에 거슬리는 것 없이 저 자신에게 완전히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공부는 만화책의 대척점에 있는 것으로 인식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만화책 중독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좌절감이 큰 만큼 이에 대한 대안으로써 공부를 꼭 필요하고 중요한 것으로 인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제반 조건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스스로 그 행위에 납득하고 실행했다는 것입니다. 


누군가 시켜서 1분 5분 단위로 끊어서 자면 의미가 없습니다. 


자기 자신의 욕구가 올라오는 시점에 자고 일어나서는 다른 욕구는 다 가라앉아도 공부에 대한 욕구는 남아있어야 했으니까요.


누군가가 자기자신의 욕구가 올라오는 시점을 특정해줄 수 없으니까요.


하지만 스스로 납득하고 제반 조건을 갖추어 실행할 수만 있다면 통제된 환경에서 거의 90% 정도 머리가 맑아지고 천재라는 것을 경함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대학에 들어가서 이 경험을 설명하기 위한 다양한 내용을 찾아보았고 스스로 이론을 구축한 바도 있지만 그것은 가설에 불과하니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 



뒷 이야기를 말씀드리자면 저는 이 방법을 무척 신뢰해서 자신있게 고시에 도전했습니다. 


하지만 이 방법은 책상에 엎드려서 짧게 자는 것이 핵심인데 그 때부터 이상하게 엎드려서 잠을 잘 수 없게 되었습니다. 


엎드리는 순간부터 머리가 땡기고 누군가 머리를 조이는 듯한 느낌을 받기 시작했지요.


결국, 이 느낌은 엎드려서 자는 것 뿐만 아니라 누워서 잘 때도 오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잠을 잘 수 없게 되었고 잠을 자는 것이 아니라 더 이상 깨어있지 못하고 쓰러지게 되었습니다. 


당연히, 불면증이 생겼고 삶이 철저히 파괴되고 망가지기 시작했습니다. 


많은 노력 끝에 원인을 파악하고 제거했지만 트라우마가 남아서인지 엎드리기만 하면 각성이 높아지게 되어 여전히 잠을 자지 못합니다. 


물론, 이 방법을 이젠 사용할 수 없게 되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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