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파(邪派)의 공부법을 깨달았다고 바로 암기 과목을 잘하게 될 리는 없다. 물론, 깨달음의 추동력이 있으므로 어찌어찌 잘하게 될 수는 있다. 한 순간 꽂혀서 이렇게 하면 되겠구나!”라는 깨달음이 자생적으로 발생하면, 아르키메데스가 유레카를 외치면서 목욕탕에서 발가벗고 나올 수밖에 없게 만드는 획득한 아이디어를 실현해보려는 강력한 욕구도 같이 발생하기 때문에 강력하게 노력해볼 수 있는 힘이 발생하긴 한다.

 

하지만 그것이 실현되려면 한 가지 전제 조건이 필요하다. 그것은 바로 책을 읽는데 거부감이 없어야 한다는 점이다. 내가 깨달은 것은 시험공부에 맞춰서 책을 암기하는 방법이지 책을 읽는 방법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나는 책을 좋아하는 것을 넘어서 활자중독이다.

 

1970~80년대에 아이들이 놀만한 것은 많지 않았다. 지금처럼 스마트폰이 아이들의 눈을 사로잡지 않았다. 초등학교 시절엔 컴퓨터 게임이라고 할 만한 것이 나타나면서 아이들의 눈을 돌아가게 만들었지만 너무 비쌌기 때문에 눈으로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그래서 아이들은 밖에서 뛰어다니면서 놀았다. 공을 차고 놀이터에서 술래잡기하고, 싸우고, 팽이치기, 딱지치기, 땅따먹기 등을 하면서 시간 가는 줄 모르면서 논다. 솔직히, 단순한 컴퓨터 게임하고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재미있다. 하지만 반드시 친구가 있어야만 즐겁게 놀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친구가 잘 없었다.

 

친구가 많으려면 대범하고 활달하고 영민하고 등등 온갖 좋은 미사여구를 몸에 붙이고 있어야 한다. 그 다음으로 적당히 친구가 있으려면 말을 잘 듣고 눈치가 좋아야 한다. 이런 친구들은 친구가 많은 친구 옆에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친구가 없는 아이들은 보통 다른 아이들 기준으로 찌질한 친구들이다. 그리고 내가 바로 찌질한 아이였다. 겁이 많고 행동이 굼뜬데, 욕망은 많아서 남의 말도 잘 안 듣는 그런 아이였다.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모범적인 아이도 아니었고, 싸움을 잘하고 아이들을 리드하는 아이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그런 아이들과 친구가 되고 싶어서 눈치 빠르게 구는 아이도 아니었다. 겁이 많아서 모험과 같은 일에 끼어들지도 않고 친구들과의 싸움에도 끼어들지는 않으면서 욕심은 많아서 베풀지도 않았다. 그러니 날 끼워서 놀아주던 아이들도 나의 부족한 눈치와 굼뜬 행동에 답답해 하면서 다른 친구들과 놀게 되고 자연스럽게 나는 소외되었다.

 

아이들에게 지옥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내 경험으로 미루어 보면 40도가 넘는 고열에 쓰러져서 사경을 헤맨 적도 있고 뼈가 부러진 적도 있으며, 형들에게 맞는 공포의 순간도 있었고, 부모님이나 선생님에게 혼나는 순간도 있었지만 그러한 모든 고통보다는 무료한 것을 견딜 수가 없었다. 어린 시절은 시간이 정말 느리게 지나간다. 1시간이라는 시간이 정말 크게 느껴진다. 그나마도 무료함이 느껴지면 시간의 흐름은 거의 멈춰버린다. 그것은 숨이 막힐 것 같은 답답함이다. 그래서 부모님들이 항상 말하는 얌전히 있어!”라는 말은 지옥의 주문처럼 들렸다. 얌전히 있으라니 난 11초도 얌전히 있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움직이기만 하면 되는 것은 아니다. 당연히, 그 활동이 재미있어야 하고 흥미로워야 한다. 초등학생 시절에 어떤 활동이 재미있고 흥미로우려면 반드시 친구가 있어야 했다. 왜냐하면 친구는 무한한 즐거움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나에게 친구는 가뭄에 콩 나듯이 만날 수 있는 존재였다. 그러니 지옥을 탈출할 대체재가 있어야 했다.

 

내가 스스로 의식적으로 그런 대체재를 찾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목마른 사람이 물을 마시면 허겁지겁 물을 목으로 넘기게 되듯이 언제든지 새로운 즐거움에 몸을 던질 준비는 되어있었다. 그리고 서유기를 만났다. 유치원 아이들이 보는 착하고 단순하고 악한 그런 캐릭터가 아닌 굉장히 복잡하고 다층적인 인물들이 모여서 천축까지 먼 거리를 여행하는 서유기는 꼬맹이의 상상력을 완전히 잡아먹어 버렸다. 신비한 도술과 요괴의 세계, 다양한 캐릭터, 사고뭉치 손오공에 대한 애정은 상상력을 완전히 폭발시켰다. 그 때부터 책은 재미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머리에 박혔다. 친구가 없어서 무료하게 되면, 책장으로 가서 보물을 찾는 기분으로 재미있을 것 같은 책을 찾는 것이 일이었다. 그리고 보물을 찾게 되면 그 날은 하루 종일 무료한 지옥에서 해방되어 완전 흥미로운 세계로 진입하게 되는 것이다.

 

솔직히, 재미있는 책을 좋아했지, 어려운 책이나 재미없는 교과서를 보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책을 읽으면서 머릿속으로 상상하는 상황이 계속되다보면 무엇이든 상상할 꺼리가 필요해진다. 서유기가 아무리 재미있어도 10번 이상 읽으면 지루해지는 법이다. 그러다 보면 조금 다르게 변주가 이루어진 작품을 찾게 된다. 서유기는 각종 환상기담의 세계로 나를 인도했고, 그러다가 환상기담의 패턴에 식상해지게 되면 조금 더 사실적인 모험담으로 넘어가게 된다. 어느 순간 각종 전기물을 읽다가 서부 세계로 넘어가서 총질에 열광하고 사실적인 것에 질리면 메르헨으로 넘어가는 등 끊임없는 여정이 시작된다. 그 와중에 이야기의 주변부에 등장하는 각종 사물과 철학이 머릿속에서 살아 숨쉬고 나의 세계는 조금씩 넓어져갔다.

 

찌질한 나와 달리, 많은 친구들이 책에서 시험문제가 나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성적이 좋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미 알고 있었고 지루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또한, 그들은 영리했기 때문에 더 큰 즐거움을 추구할 수 있었다. 바로, 친구들과 노는 것이었다. 그리고 책을 읽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았다. 당연히 더 큰 즐거움을 추구했고, 덕분에 우리 같은 아이들은 그런 친구들을 항상 부러워했다. 하지만 나는 고립되어 그런 즐거움을 추구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시험공부에 대한 깨달음을 얻었을 때, 그 아이디어가 너무 소중했다. 내가 힘들게 얻은 나의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하라고 주입한 것이 아니었다. 내가 알아내고 얻은 나의 것이었다. 완전히 자발적인 그리고 내 스스로에서 연유한 그것, 그것은 바로 처음으로 획득한 내 스스로에서 말미암은 것인 자유(自由)였다.

 

교훈 : 아이들도 스스로 무언가를 얻을 수 있다. 


공부를 사파(邪派)식으로 깨닫다.


초등학교 5학년 여름 중간고사에서 들은 친구의 한마디는 머릿속에서 천지개벽을 일으켰다. 모든 것이 모호하고 어떤 일에 대해서 파편화된 지식과 감상이 있지만 이것이 무엇인지 규정하기 어려운 그런 상황이 있다. 그리고 그 때의 나는 스스로 무엇을 모르는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순간순간 많은 궁금증들이 스쳐지나가긴 했다. , 수업을 하지 않는 체육에서 이론 문제가 나오는가? 선생님이 말하지 않은 내용들이 왜 시험문제에 나오는가? 다른 친구들과 나는 왜 성적이 다르게 나오는가? 이런 질문들이 나타날 때마다 그것을 열심히 파고들었다면 좋은 결과를 얻었겠지만 아쉽게도 그저 스쳐지나가는 궁금증들에 불과할 뿐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서 노력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하진 못했다.

 

그리고 책에 나오잖아라는 친구의 한 마디는 이 모든 것을 하나로 꿰는 마지막 한 조각이었다. 정말, 한 순간에 모든 것이 이해가 되어버렸다. 다음이 그 때 내가 이해한 것들이었다.

 

학교에서 교과서를 주는 이유를 몰랐다. 그저 무겁고, 읽어보면 좋을 것 같은 내용들이 있었지만 이것을 어떻게 연결시킬 수 없었다. 그런데 그 한마디로 교과서의 용도가 무엇인지 깨달았다. 선생님들은 교과서를 그냥 부연 설명하고 있을 뿐이었던 것이다. 선생님이 주가 되는 것이 아니라 교과서가 주가 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교과서를 공부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사실, 이 부분은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굉장히 잘못된 생각이지만 대한민국의 현실에는 너무 적확하게 작동했다. 교과서를 공부한다는 것은 상대방이 교과서를 기반으로 문제를 내면 그 문제를 맞추기 위한 것이었다. 그 방법이 어떻든 간에 교과서에서 낸 문제의 답은 그 교과서에 있는 내용이어야만 한다.

 

그렇다면 선생님들이 수업시간에 설명하는 것은 무엇인가? 선생님은 어차피 교과서에서만 시험문제를 낼 수밖에 없지만 그 중 어떤 시험문제를 낼 지는 선생님의 선택사항이다. 결국, 본인의 수업을 잘 듣는 아이들이 좋은 성적을 가질 수 있도록 시험문제를 어떻게 낼 것이라고 끊임없이 힌트를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선생님의 수업을 잘 듣고 메모를 하면 그 부분만 공부를 해도 100점 만점에 80점 이상은 나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 80점인가? 시험문제를 하나의 선생님이 내는 것이 아니라 여러 선생님이 같이 제출하는 경우가 많고, 어떤 선생님은 자신의 수업을 잘 들은 학생들 중에서도 더 잘하는 아이를 구별하기 위하여 일부러 자신이 가리키지 않은 부분에서 내기도 하고 단순히 심술을 부리기도 한다.

 

하지만 선생님들이 어떤 변덕을 부리든 간에 교과서 내에서만 시험을 내기 때문에 교과서에서 나올법한 내용들을 전부 알고 있으면 선생님의 수업 같은 것은 전혀 신경쓸 필요가 없게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교과서를 공부해야 하는가? 그것은 간단하다. 문제를 내보면 된다. 친구를 하나 붙잡고 교과서를 보면서 문제 내기를 해서 더 많이 맞히는 쪽이 이기는 것으로 내기를 하자고 하면 공부 좀 하는 친구들은 대부분 한다고 한다. 그러면 교과서를 보면서 친구한테 문제를 내보는 것이다. 서로 내기에서 이기기 위해서 열심히 문제를 내다보면 어느 순간 바로 이런 것이 문제가 되어 나온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내기가 과열되면 과열될수록 더 열심히 교과서를 외우고 암기하게 된다. 문제는 더 치사해지고 교묘해진다. 그러다보면 이런 문제가 나오겠구나 하는 감각이 숙달되게 된다.

 

이 깨달음은 정말 컸다. 모든 조각이 모여서 완성된 지식을 갖춘 것은 그 때가 처음이었다. 이 때부터 이 체계는 스스로 성장하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시험공부를 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떠오르고 필요한 수단과 방법이 바로바로 떠오르게 되었다. 시험문제가 제출되는 원리와 그에 따른 대응 방법이 자연스럽게 이해가 되어버린 것이다. 아마도 처음으로 지식을 갖추는 것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기 시작한 시점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처음으로 어떤 것을 이해한 경험이 아닐까 싶다.


물론, 이 경험은 마냥 좋은 것은 아니다. 위에 언급한 내가 깨달은 내용은 그야말로 시험공부에 한정된 생각이고 어떤 발전적인 양상을 갖추진 못했다. 지금이라면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선생님의 수업은 선생님 본인이 생각하는 해당 과목의 개요이자 포인트이고 하나의 관점을 형성하고 있다고 말이다. 하지만 당시에는 오히려 선생님을 완전히 무시하게 되었다. 깨달음 이후에는 선생님이 진도를 뽑기 위하여 수업을 할 때 해당 수업을 들은 적이 단 한번도 없다. 어차피 교과서를 공부하는게 부차적인 선생님의 수업을 듣는 것보다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깨달음의 두번째 문제는 공부를 시험을 보는 것으로 한정지은 것이다. 즉, 공부는 시험 때 하는 것이기 때문에 평소에는 전혀 공부를 하지 않았다. 그래서 모든 지식은 그저 시험을 보는데만 쓰여지고 그대로 소모되어 버렸다. 또, 시험을 보는 방식으로만 책을 보기 때문에 책을 축약하고 중심적인 생각을 파악하고 하는 공부의 가장 기본이 무시되어 버렸다. 오히려, 시험문제를 악의적으로 낼 것이라는 생각만 강해져서, 그리고 친구랑 내기에서 이기기 위해서 가장 지엽적이고 가장 알 필요 없고 파악하기 어려운 것을 찾는 식으로 공부해버리게 되었다. 결국, 이 공부 방식은 그저 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내기 위해서 암기하기 위한 공부일 뿐 그 이상의 아무런 효용이 없었다. 


그래서 나의 공부방식은 완전히 사파(邪派)인 것이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