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지에 등장하는 고수가 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것이 나의 첫 번째 질문이었다. 그리고 이런 내용을 다루는 책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래서 그러한 책들을 탐욕스럽게 읽어댔다. 그런데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따라하거나 스승없이 수행하면 주화입마를 겪을 수 있다고 경고한다. 그러자 두 번째 질문이 튀어나왔다.

 

이 책이 말하는 내용을 어떻게 정확하게 이해할 것인가?

 

한문도 모르고, 배경이 되는 동양철학도 모른다. 일단, 한글로 번역된 책들을 찾아서 읽어본다. 너무 어려워 나에게 맞는 수준의 책을 골라서 읽는다. 수도 없이 책을 펼쳐보고 사보고 읽어본다. 그래도 이해하기 어렵다. 조금 다른 관점으로 말하고 있는 책을 읽어본다. 그랬더니 서로 말이 다르다. 누가 옳고 누가 그른가? 다시 질문이 나온다.

 

어떤 책은 믿을만 하고 어떤 책을 믿을 수 없을까?

 

어떤 것은 허황된 것 같고 어떤 것은 조금 현실성이 있어 보인다. 읽어본 책들을 현실 가능성, 근거 제시 등으로 신뢰할 수 있는지 판단해보고 신뢰 등급을 매긴다. 그리고 신뢰등급 수준에 따라서 서로 공통으로 지지하고 있는 사실과 서로 비난하는 사실을 나누어 가장 안전하게 공통으로 지지하고 있는 것 위주로 방법을 구축한다. 실행 방법에 있어서도 큰 부작용이 발생할 여지가 없다고 판단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실행하기 편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으로 나누어 방법을 구축한다. 결국, 이구동성으로 옳다고 말하는 바를 중심으로 실행할 수 있고 큰 부작용이 없을 것 같은 것으로 실행 플랜을 짠다. 그랬더니 갑자기 이 세계가 이해되며 결론에 도달한다.

 

그래서 기공류, 요가류, 명상류 등이 말하는 바는 결국, 심상(心象)의 구축이고 그 외의 내용들은 내 스스로의 욕망에 내가 휘둘리고 있구나 하는 결론에 도달한다.

 

이 모든 것은 스스로 생각하고 연구하는 과정이었다. 관련 내용을 친구들에게 이야기하면 비웃음 당하고 선생님들에게 말하면 이상한 눈으로 본다. 부모님은 걱정했고, 친척들은 괴짜에 천방지축이라고 생각했다. 결국, 혼자 할 수밖에 없었다. 세상 물정 모르는 중학생이 중2병스러운 집착과 탐욕으로 연구를 하니 연구의 동력은 충분했다. 겉으로는 객관적으로 파악하는 척 열심히 꾸며댔지만 속으로는 곧 무림이 고수가 되어서 그 결과를 보여주마 하는 어리석음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돈에 눈이 멀어 무슨 짓이든 마다하지 않는 어리석음처럼 나도 무림의 고수가 될 수 있다는 것에 눈이 멀어 사람들이 아무리 충고해도 그것을 듣지 않고 연구를 계속했다.

 

이것은 분명한 어리석음이었다. 현실적으로 무림의 고수가 있다면 사람들의 주목을 받을 것이고 알려질 것이 거의 분명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에서 유명한 무술가는 수십년의 고련 끝에 소의 뿔을 꺽은 최배달, 이소룡, 역도산 같은 이 뿐이었다. 물론, 그들의 무술도 어린 아이 눈에는 너무 대단해 보였지만 너무 어렵고 고된 길로 보였고, 그 때 당시의 현실에서는 도전할 수 없는 방법이었다. 친구들 어른들 모두 이러한 어리석음을 바로잡아 주려고 말했지만 스스로는 그럴수록 더 현실을 부정하고 연구를 계속했으니 완전히 탐욕에 물들어 눈이 어두워진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어리석었던 것은 분명하고 결과도 그다지 좋지 않았다. 특히, 이 때 잘못 배우고 내린 결론 때문에 20년간 체증에 시달려야 했지만 후회하느냐고 묻는다면 전혀 그렇지 않다고 대답할 것이다. 이것은 나의 첫 연구였다. 제대로 알기 위해서 노력하고 사색하고 연구하고 진위를 판단하고 실천해보고 하는 과정이 모두 동반되었다.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마다 그 희열에 기뻐했고 기대했던 바가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낙담하기도 했다. 비록 공부해야하는 중고등학교 시절이었지만 이 탐욕에 눈이 먼 어리석은 연구가 너무 재미있었다. 하루 종일 사색하고 가정하는 버릇이 생겼고 스스로의 머리와 눈으로 진위를 가리려고 노력해볼 수 있었다. 비록 원하는 만큼 좋은 결과를 맺지는 못하고 결과적으로 시간 낭비가 되기도 했지만 다른 친구들이 음악과 게임에 빠지듯이 나도 이러한 연구에 빠진 것이니 꼭 낭비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충분할 정도로 이득을 얻은 것 같다.

 

우선, 나는 개성이 생기고 권위자가 되었다. 전교생 중에서 이런 분야를 잘 알고 있는 친구는 내가 유일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좋든 싫든 유일하다는 자신감으로 연결되었다.

 

두 번째로는 이 분야의 공부를 통해서 원하는 결과는 얻지 못했지만 부수적으로 얻은 기술들이 정말 많았다. 심상에 대한 이해를 통해서 공부하기 싫어하는 내 스스로를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명상과 여러 수행을 통해서 단기적으로나마 상당히 강력한 집중력을 쓸 수 있게 되었다. , 이미지 트레이닝 기술, 다독(多讀), 밤새기, 공부를 지속할 경우 발생하는 어깨의 통증과 허리 통증 다루기, 운동 방법, 그리고, 사람에 대한 나름의 이해가 쌓이면서 나의 불안한 기질과 산만함 등을 정면으로 꺾지 않고도 통제가 가능하게 되었다는 점도 큰 이득이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연구를 한다는 개념을 알게 되었던 점이 가장 컸다. 궁금한 것을 찾아보고 체계를 세워보고 진위를 가리고 하는 것이 너무 재미있었다. 물론, 그 방법은 전혀 과학적이지 않았기에 잘못된 결론에 도달했지만 그 잘못된 결론도 내가 열심히 머리 싸매고 고민해서 얻어낸 소중한 성과였고 당연히 사랑스러웠다. 단순히 책에서 읽은 것을 주장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살아 움직이는 지식들이 구축되었고 그러한 지식을 구축하는 것이 너무 즐거웠다. 이때부터 잘못된 방법으로나마 열심히 호기심을 탐구하고 진위를 최대한 가리고 연구하고 사색하는 버릇이 생기게 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평생 나의 정체성이 되었다.

 



무협지는 여전히 즐겨보고 있지만 무협으로 촉발된 기공이나 신비주의에 대한 탐닉과 연구는 4년 정도 내 인생을 휘어잡고 사라졌다. 중학교 1학년부터 고등학교 2학년까지 모든 에너지를 쏟아 부은 덕분에 얻은 것과 잃은 것이 있다. 그리고 이 때 얻었던 것과 잃었던 것이 오늘날까지의 내 인생을 거의 좌지우지한 것으로 보인다.

 

우선,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심상(心象)을 알게 되었다는 점이다.

 

주화입마에 대한 공포로 수행을 하지는 않고 다양한 신비류를 비교하면서 읽어보면서 이해하려고 노력하다보니 어떤 공통점을 찾을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심상(心象)이었다. 심상이라는 것은 일종의 심리적 모델이다. 하지만 단순한 심리적 모델처럼 머릿속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 현실에 부합하는 것이라는 확신을 얻었고 실제로 현실에 작용력을 가지고 있는 것을 말한다. 가령, “나쁜 짓을 하면 죽어서 지옥에 간다.”라는 말을 들으면 어떤 이는 무시하고, 어떤 이는 존중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한 심상이 구축된 사람은 나쁜 짓을 했다는 자각이 들면 바로 죄책감이 들고 지옥에 갈지 모른다는 공포가 작동한다. 그러한 심상이 이미 세계의 규칙으로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공류, 요가, 명상 등 대부분의 수행 전통은 먼저 몸을 차분하게 하고 마음을 완전히 가라앉히는 것을 기초로 하여 해당 전통의 형이상학적인 내용들을 정신적인 작용을 통하여 신체에 구현하고, 신체에 그것이 구현되는 것을 통하여 정신적인 작용이 현실에서 그 영향력을 확보함으로써 심상이 구축되도록 한다. 심상이 구축된 것은 기본적인 믿음이 발생한 것이고 해당 믿음을 기반으로 더 복잡한 심상을 구축하거나 더 강력한 심상을 구축하는 식으로 발전시킨다.

 

어떤 부위에 기, 프라나, 에너지 등이 모인다고 심상을 만들면 실제로 해당 부위가 뜨거워진다. 사실, 이것은 자연스러운 생리작용이다. 우리의 주의력이 몸의 어떤 부분을 떠올리면 우리의 몸은 해당 부위를 쓸 것이라고 생각해서 미리 그 부위를 활성화하기 위해 피를 보내고 그로 인하여 그 부위가 따뜻해지고 민감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공류, 요가, 신비주의 등의 대부분의 전통은 그것을 세상을 이루는 기(), 프라나, 에너지 등이 정신의 작용을 통하여 모인 것으로 해석한다. , 정신이 수행을 통하여 현실세계에 작용을 이룬 것이다. 작용이 성취되었기 때문에 우리의 정신은 정신의 념()을 통하여 기()가 작동한다는 심상이 성립되면서 신체와 정신이 상호확증을 통하여 공인되고 작동하기 시작한다. 그러면 이 심상을 대상으로 조작을 시작한다. 더 강력하게 정신작용을 일으켜보기도 하고 더 약하게 일으켜보기도 하면서 해당 정신작용을 컨트롤 할 수 있게 한다. 그러면 조금 더 복잡한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 이때, 각각의 수행전통은 각자의 형이상학적 모델에 따라서 다양한 방식을 취한다. 기공류에서는 단전으로 시작하고 요가는 차크라를 이용한다. 이렇게 되면 우리에게는 추상적으로만 보이는 실제 정신의 근육이 체계적으로 발달하고 또, 형이상학적이 믿음이 몸으로 체득되면서 그 사람을 둘러싼 세계가 총체적으로 변모하게 된다. , 천인합일을 이루거나. 범아일체를 이룩하게 되거나 신과 하나가 되는 등의 세계의 구축이 완료되는 것이다.

 

이러한 심상에 대해서 알게 되면서, 처음에는 기공류 수행이 완전히 거짓이라고 생각하기도 했지만 조금 더 머리가 굵어지면서 형이상학적인 세계관을 논외로 치고 생각해보면 이 방법이 매우 효과적인 방법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간단한 사례로 이런 것이 있다. 매일 힘들게 육체노동을 하는 사람들이 운동부족에 시달리는 경우가 있다. 물리적으로 보면 육체노동과 운동은 동일한 행동인데, 어째서 운동부족의 증세를 보이는 것일까? 그것은 심상이 다르기 때문이다. 육체노동은 힘들고 하고싶지 않고 돈을 받는 일이다. 반면에, 운동은 상쾌하고 자족적이며 하고싶은 일이고 그 피드백은 더 쾌적해진 나의 몸이다. 따라서 기대하는 것이 다르고 임하는 자세가 다르다. 그 때 발생하는 육체의 생리적 기전이 달라질 수 있다. 가령, 운동을 할 때면 마음이 즐겁고 안정감을 느끼기 때문에 신체에 내재된 에너지를 더 쓰는 방향으로 대사가 이루어지지만 육체노동을 할 때는 불안하고 생존이 걸려 있어서 신체 에너지를 덜 쓰는 방향으로 작동할 수도 있다. 즉, 심상이 구축된 방향으로 피드백이 이루어진다. 따라서 좋은 심상을 구축하면 그에 따른 이득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형이상학적 전통에 대해서 완전히 신뢰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경험적인 지식과 지혜의 축적이 없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이를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다. 한의학만 해도 그 작동 기전을 명확히 알 수 없지만 실제로 작동한다. 그것은 환자가 한의학적인 심상을 구축한 것이 아님에도 플라시보 효과라고 치부하기는 어려울 정도로 현실적인 치유효과를 가지고 있다. 물론, 돌팔이가 많은 것은 별개로 치고 말이다. 따라서 한의학적인 체계에 따라 심상을 구축하는 기공류도 심상을 제외하고도 다양한 효과와 작용력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스승을 구할 수 없었고,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하고 그저 따라하다가 주화입마에 걸리기 싫었던 나는 어느 순간부터 이 모든 것에 공통된 것이 심상(心象)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려운 형이상학적인 체계를 제외한다면 그리고 심상을 다룰 줄 안다면 구태여 복잡한 기공이나 요가 같은 것을 구태여 할 필요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저 현대의 과학과 상식을 이용하여 심상을 구축하면 된다. , 현대 생활을 잘하는 수행을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면 몇십년씩 토굴에 박혀 수행하지 않아도 현실 생활도 더 잘 되고 수행도 잘 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심상이라는 것은 결국 마음먹는 것이다. 세상이 결국, 마음먹은 대로 이루어질 것이라는 확신이 생겼고 그렇지 못한 것은 내가 제대로 심상을 구축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자각이 생겼기에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자각도 같이 생겼다.

 

고등학교 2학년 당시의 나는 심상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수행 전통을 대체할만한 형이상학적인 체계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정신적인 성숙도가 높은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스스로 생각하고 움직여야겠다는 자각을 얻는 정도에 그쳤다. 그리고 공부를 함에 있어 그 동기를 강화하고 집중력을 온전히 발휘하는 용도 정도로만 사용했다. 원래, 심상은 생각한 바가 현실에 구현됨으로서 생명력을 얻게 되기 때문에 그러한 과정을 상세하게 절대적인 믿음을 가지고 설계해야 한다. 하지만 그러한 체계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제대로 사용할 수 없었다. 그저 공부를 통하여 집중하는 훈련을 하고 그것을 통해서 어떤 정신적 경지를 높여야겠다는 막연한 기대로 공부에 대한 거부감을 지우고 동기를 유발한 정도에 불과하다. , 암기를 할 때, 머릿속에 이미지를 선명하게 띄우는 훈련이라고 생각했고 그로 인하여 암기과목의 성적이 매우 좋았는데 딱, 그 정도 수준이었다. 보다 근본적인 개선을 이루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심상(心象)은 논리적인 과정이라기보다는 어떤 믿음이나 신앙과 같은 신뢰가 작동해야 구축된다. 가장 좋은 방법은 스스로 현실에서 부딪치면서 얻는 것이지만 원하는 현실을 상상으로 구축한다고 심상이 생기는 것이 아니므로 그러한 현실에 처하는 것이 쉽지 않다. 아마도 어떤 분야에 일하는 직장인들은 자신이 해당 분야에 들어와서 일할 때와 그렇지 않을 때의 차이에 놀랄 것이다. 해당 분야의 현실에 처하면서 구축된 심상이 사람을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이러한 협소한 심상이 아니라 초월적이고 범용적인 심상은 신앙과 믿음이 필요하다. 따라서 신실하게 믿는 종교가 있는 것도 아니고 어떤 확고한 세계관과 가치관이 정립되지 못한 학생이 심상을 활용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당시에는 심상을 통하여 기대했던 이익을 다 얻지 못했고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고 생각했지만 오늘날에는 스스로 심상을 찾음으로써 그나마 상당히 많은 이익을 얻었다는 생각이 든다. 심상을 알게 된 이후로 집이나 학교에서 그다지 좋은 대우를 받지 않았음에도 단 한 번도 스스로 나아가는 것을 의심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문제가 생기면 스스로의 심상을 고치려했고, 그게 옳든 그르든 간에 나에게는 긍정적으로 작동했다. 그리고 모든 어려운 일을 스스로 긍정적으로 뒤틀 수 있었다. 밤새워 공부하는 것도 도전이고, 학교에서 두들겨 맞는 것도 좋은 경험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기에 현실적으로는 매우 바보 같지만 개인적으로는 가고자 하는 길로 돌진할 수 있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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