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를 하거나 글을 쓸 때가 되면, 그 동안 여상하게 마음속에서 흐르고 있던 많은 것들이 언어의 형태로 구체화되기 시작한다. 말을 하다보면 자신이 한 말에 소스라치게 놀라는 경우도 종종 있다. 자신이 몰랐던 것들이 갑자기 말로 튀어나오기도 하고, 강력한 공격성이나 집착이 표출되기도 한다. 그 많은 말들이 내 맘속에 있었다는 것이 신기하기도 하다. 아마도 마음 속에 있었던 것들이 언어화되기 전에는 어떻게 존재했는지 알 수 없었던 것 같은 느낌이다.


실제, 대화를 할 때 대화를 하고 있는 자신을 스스로 관찰해보면 할 말이 그냥 떠오르는 것을 종종 보게 된다. 인사말, 하고 싶은 농담이나, 오늘의 토픽 등등 하나하나 갑자기 튀어나온다. 성급한 사람이라면 이렇게 튀어나온 말들을 그대로 입으로 옮겨서 화를 자초하기도 하지만 조금만 신중한 사람이라면 그 말을 우선 속으로 되새겨보면서 큰 화를 불러올 말을 걸러내려고 한다. 


사실, 말뿐만 아니라 글도 대부분 자동으로 떠오르는 것이다. 소설 작가들의 창작 이야기를 보면 글이란 써지는 것이지 쓰는 것이 아니다. 이들이 작업하는 양상을 보면 이렇다. 우연히 좋은 소재와 영감이 떠오르면, 바쁘게 그것을 정리하여 글로 적어낸다. 그리고 작가는 첫 번째 독자로서 자신의 글을 읽고 그 글을 통해 새로운 느낌을 얻고 또 영감을 얻어 자신이 쓴 글을 또 발전시킨다. 좋은 점과 나쁜 점을 찾아내고 새롭게 변화시키면서 이를 다듬어 보고 다시 독자가 되어 글을 읽고 다시 다듬는 과정이 반복될 수록 글은 좋아진다. 결국, 좋은 작품은 뛰어난 예술적 창의성과 그것을 다듬고 그로 인하여 다시 영감을 얻는 과정의 수많은 반복에 다름 아니다. 이 때, 소설가는 결국 예술적 창의성이라는 어디선가 튀어나오는 것을 하염없이 기다리거나 영감의 원천을 얻기 위해 다양한 행동을 취하기도 한다. 


시나 소설 등의 글은 자리에 앉아서 끈덕지게 스스로와 교류하면서 쓰는 것이지만 대화는 조금 다르다. 시간에 쫓기고 즉각적이다. 이야기할 화제를 고르거나 말을 다듬을 시간이 글에 비해서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따라서 실수할 가능성도 높기 때문에 말이 빙빙 돌면서 상황을 파악하고 서로의 말에서 영감과 유대관계를 구축하면서 조금씩 내밀한 이야기를 하게 된다. 


덕분에 대화는 대화 당사자들이 서로 잘 알고 있는 또는 공감하고 있는 항상 주변에 현존하고 있는 것 또는 상황을 위주로 시작되는 경우가 많다. 가볍게는 누구나 느낄 수 있는 날씨로 공감을 하고 같이 겪은 즐겁고 힘든 일에 대한 공감을 표현하면서 공감과 유대관계를 구축하는 것이 대부분의 대화의 역할이다. 물론, 그런 공감 찾기 과정을 뛰어넘어 깊은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한두명에 불과할 것이고 대부분의 사람들과 하는 이야기는 소소한 농담 따먹기와 주변에 대한 공감 정도일 것이다. 그리고 서로가 공감할 수 없다면 대화는 없을 것이기 때문에 결국, 일상적인 대화란 대부분 대화 당사자들이 직접 마주치고 있는 현실에 대한 묘사와 공감 정도에 국한된다. 


이런 대화들은 자연스럽게 일어난다. 나와 저 친구의 관계가 이 정도에 불과하니 말을 조심하고 공감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해서만 이야기해야겠다고 계산하고 판단하면서 말하지 않는다. 실제로는 그냥 본능적으로 자신과 어울릴 수 있는지 없는지를 옳든 틀리든 규정한다. 자신과 어울릴 수 있을 것 같아 산변잡기로 주변의 공감할만한 것들을 던지다 보면 대화 당사자들은 서로 어울릴 수 있는지 없는지 여부가 금방 파악된다. 공감하는 것들이 많으면 서로 잘 통하는 사람들이고 그렇지 않으면 서로 잘 안 통하는 사람일 뿐이다.


직장에서 만난 친구 중에 조금 내향적인 것으로 판단되는 친구가 있었는데, 어쩌다 대화를 해본 결과 그 친구의 대화를 도저히 따라갈 수 없었다. 그 친구가 갑자기, 시카고에서 유행하는 피자를 이야기하면서 웃었는데, 왜 웃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고, 내가 멀뚱멀뚱하게 있으니 그 친구는 다급히 자리를 파하고 가버렸다. 아마도 우리는 서로 대화하기 어려운 사람으로 서로를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대화를 하면서 모든 말들은 즉석에서 만들어진다. 이전부터 익숙하게 사용해서 입에 붙은 말들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말들은 전부 그 자리에서 만들어진다. 그러다 보니 명사가 잘 사용되지 않는다. 정확하게 말하면 모두가 공감할 수 없는 상황이나 이 자리에 없는 자신만의 무엇을 말하지 않고 눈앞에 있거나 이미 모두에게 중요한 상황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게 된다. 이런 것들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라서 그것을 지칭하는 말들은 대부분 대명사이다. 마치 볼드모트처럼 사람들은 이름을 회피하고 그저 ‘그’라고만 지칭하는 것이다. 표현력이 뛰어난 사람은 설명도 대부분 시연 위주로 한다. “그가 이렇게 했어.”라고 말하면서 몸으로 그의 행동을 보여주거나 표정을 흉내내거나 한다. 사용하는 언어는 대부분 간단하고 바로 얼마 전에 보고 들었거나 지금 눈앞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들을 주로 사용한다.


언어는 그 모든 것에 있어 조금은 부가적이다. 가령, 내가 자주 사용하는 컵이 다른 사람의 컵과 비슷해서 서로 계속 그것을 교환하면서 쓰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할 때면 이렇게 이야기할 수도 있다. “이게 A의 컵이야. 이게 내 컵이고, 비슷하지, 알고보니 비슷한 컵을 서로 계속 교환하면서 썼어!”라고 컵을 보여주면서 이야기하는 경우를 떠올려 보자. 우리는 언어를 이용해서 컵 두개로 이야기를 만들어 내고 있다. 이 때, 실제의 컵이 언어에 엮이면서 현실과 분리되지 않고 그것을 끈끈하게 이어서 서로 연관된 현실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것은 현실임과 동시에 언어화되어 존재하게 된다.


일상적인 대화를 관찰하다보면, 어떤 사물, 어떤 상황, 어떤 인물들이 분류되면서 언어화되는 것을 본다. 사물은 간단하다. 대부분 다른 것과 구분되는 지점이 명확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황은 어떨까? 직장 상사가 말도 안되는 이유로 직원들을 트집잡고 군기잡고 소리지르면서 상황을 짜증나게 만들면, 모든 직원들은 휴게실로 몰려가서 그 상사를 씹는다. 이 때, 그 복잡한 상황은 단순히 “그 상황”이라는 말로 하나의 개체로 묶여버린다. 그 상황을 겪은 모든 이들이 그것에 공감하고 있기 때문에 딱히 구체적으로 설명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의 정신세계는 그러한 개체를 간단히 만들어 버린다.


하지만 직장상사의 이야기는 단위를 어떻게 쪼개느냐에 따라서 굉장히 다른 이야기로 변질된다. 직장상사의 분노의 원인으로 이야기가 좁혀지면 화살이 그 분노의 원인을 제공한 다른 사람에게 넘어갈 수 있다. 자신이나 그 직장상사나 내리갈굼의 동일한 피해자로 만들어낼 수도 있고, 그 직장상사의 분노를 유발시킨 다른 직원에게 화살이 날아갈 수도 있다. 이 모든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직장상사를 규탄하는 것으로 상황이 묶인 것은 그 직장상사에 대한 기존의 쌓여온 경험을 통해 사람들에게 이 문제는 직장상사가 나쁜 것이라는 인식이 자리를 잡았기 때문일 것이다.


상황이 단위로 쪼개지고 그 단위에 따라서 언어화 되는 것은 너무나 자동적이고 익숙한 일들이다. 다양한 상황과 사물들이 마치 그것이 당연하다는 듯이 단위로 쪼개어져 인식된다. 앞서, 언어가 구사되는 법 01에서 정확히 알지도 못하는 전문 용어를 단순히 몇가지 키워드가 일치하는 영상을 통해서 매칭되고 그것을 그대로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 고민을 하면서 뜬금없이 비약을 하게 되었다. 즉, 언어라는 것이 인간이 인지하는 여러가지가 자연스럽게 반영되어 장전되었다가 자동으로 발사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그러한 비약이었다. 그렇게 의심하게 된 것의 배경이 이 일반적인 대화에 대한 관찰이었다.

밀란 쿤데라의 농담은 지금으로부터 20년 전 1998년에 읽었고 그 이후 밀란 쿤데라의 책은 전부 읽어보게 되었다. 밀란 쿤데라의 다른 책은 거의 기억에 남아있지 않고 단편적인 인상만 남아있는 수준에 불과하지만 농담만은 여전히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20년이 지나도 당시에 읽으면서 받았던 충격이 종종 환기된다는 점에 종종 스스로 놀라게 된다.

 

20년 전 읽은 책이니 세세한 부분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도 기억은 많이 왜곡되었을 것이고 스스로 미화하거나 덧붙인 이야기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농담을 다시 읽고 기억을 바로잡고 서평을 쓰고 싶지는 않았다. 20년 동안 끈질기게 남아있는 것이 무엇인지 쓰고 싶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굉장히 많은 인물들의 디테일한 상황이 펼쳐지고 각자의 생각과 고민이 어우러지면서 전개된다. 하지만 거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 중 거의 중심인물로 보이는 등장인물이 루드비크인데, 그는 젊었을 때 공산주의 학생회 같은 곳에서 활동했는데 항상 유쾌하고 유머감각이 있는 친구였다. 하지만 그의 유쾌한 농담은 당시 경직된 공산주의의 경건함과 잘 맞지 않았다. 결국당시 리더였던 학생회장과 여자친구는 그가 한 농담이 자본주의적인 천박함을 드러낸 것이고 이를 교화할 필요가 있다는 취지의 고발을 했고 그 결과 수용소 같은 곳에 들어가 인생이 망가졌다.


그를 고발한 학생회장은 당시 공산당에서 승승장구했고 지금은 명망있는 교수가 되어서 성공한 인생을 살고 있었다. 루드비크는 수용소를 나와 자신을 고발한 학생회장에게 복수하기 위해서 그의 아내를 유혹한다. 

 

각자의 생각과 고민 속에서 사람들은 전통 마을 축제에 모이게 된다. 루드비크는 학생회장의 아내와 잠자리를 갖고 다정하게 팔짱을 끼고 학생회장 곁을 지나간다. 하지만 지금은 교수가 된 학생회장은 그의 부인이나 그가 파멸에 이르게 한 루드비크에 관심이 없다. 그는 옆에 20대의 젊은 여대생과 팔짱을 끼고 축제를 즐길 뿐이다.

 

기억이 정확한지는 모르겠지만 대략 이런 이야기였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이 충격적이었다. 학생회장에게 복수하기 위해서 그의 아내와 잠자리를 가진 루드비크는 그 학생회장의 옆에서 팔짱을 끼고 있는 20대의 젊은 여대생을 보면서 오히려 그 학생회장을 부러워한다. 학생회장은 예전의 경직된 모습은 없고 여유롭고 성공한 모습으로 인생을 즐기고 있는데, 자신은 복수해 보겠다고 아등바등 발악하면서 젊고 아름다운 여대생과 비교되는 늙은 부인과 잠자리를 한 것이다. 이러니 오히려 스스로 더 비참해지는 것이다.

 

그러면서 갑자기 상념에 빠진다. 정치적인 이데올로기에 몰두하여 모두가 경건하고 보수적인 시절 농담 한 마디로 인하여 수용소에 들어가 인생이 망가진 자신의 이야기를 미국인처럼 옷차림이 개방적이고 당당한 젊은 여학생에게 말한다면 그 여학생은 어떻게 생각할까? 아마도 상식적으로 일어나기 어려운 그런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겠느냐며 옛 사람들이 하는 농담 정도로 듣고 말 것이라고 생각한다.

 

루드비크의 상념이 정확히 그런 상념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 속에는 그렇게 남아있다. 그리고 그 뒤의 이야기는 어떻게 끝났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밀란 쿤데라는 그 특유의 위트나 그 문체의 여유로움으로 자신만의 독특한 세계를 구축한 것으로 깊은 인상을 주었던 작가이다. 하지만 농담은 쿤데라 특유의 여유롭고 방관자적인 관조가 잘 느껴지지 않는 작품이었다. 아마도 쿤데라의 다른 소설을 읽고 농담을 읽었다면 기대했던 여유와 위트를 찾지 못해 당황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농담은 가장 쿤데라적인 위트와 유머감각이 넘치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 소설 전체가 하나의 커다란 농담이기 때문이다.

 

농담에서 농담은 곳곳에 등장한다. 루드비크를 파멸에 이르게 한 농담은 사건의 결정적 분기점으로 작동한다. 작가는 각종 아이러니한 상황을 제시하면서 유머감각을 은근히 드러내고 있다. 하지만 이 모든 농담은 마지막 장면에서 결정적 클라이막스에 도달한다.

 

가장 달콤하고 통쾌했어야할 복수의 순간에 루드비크는 학생회장의 옆에 있는 젊은 여자를 보면서 오히려 그를 부러워하고 스스로 비참해진다. 무슨 통찰이나 자신에 대한 성찰을 통하여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젊고 개방적이면서 아름다운 여자가 학생회장 옆에 있다는 것만으로 자신에 대해 성찰하고 자신의 시대를 통찰하게 되는 것이 무슨 농담 같은 상황이다. 인생의 가장 좋았을 시기를 수용소에서 갇혀 노동을 해야 했고 거의 가진 것 없이 꿈도 희망도 없이 사회에 다시 내던져지고 다시 복수를 하는 서사에서 주인공 루드비크는 나름 그 자신의 서사가 있는 등장인물이었다. 사소한 실수로 숙청당했건, 사상적 차이로 숙청당했건 나름 자신의 비극 속에서 삶을 살아가는 주체적인 등장인물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학생회장 옆에 있는 여성의 매력으로 인하여 한 순간에 무의미하고 쓸모없는 일들로 무화되었다는 점이 내가 생각한 작가의 첫 번째 치명적인 농담이었다. 그리고 읽었을 당시에는 속으로는 참 등장인물이 여자를 밝히는 속물정도로 생각했지만 실은 절대적으로 공감해서 20년 동안 기억 속에 남아있다는 점이 나로서는 두 번째 농담이었다.

 

마지막은 농담은 루드비크와 학생회장 등이 각자의 생각과 고민 속에서 아등바등 살면서 했던 선택들이 당사자의 입장이 아닌 다음 세대가 볼 때에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일들이라는 점이다. 소설 속의 등장인물들은 매순간 자신의 상황 속에서 존재의 이유와 존재 형식을 끊임없이 자문한다. 독자로서 그것을 읽을 때에는 그 등장인물이 그럴 수밖에 없겠구나 하고 동의하게 된다. 그런데 정작 주인공인 루드비크는 젊은 여대생을 보고 갑자기 제 3자의 입장에서 시대와 인생을 통찰하면서 그 동안 아등바등 살았던 자신의 무겁고 질척거리던 인생을 한갖 농담으로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인생이 한갖 농담으로 전환되는 이 농담은 나에게 뼈를 때리는 아픔을 주면서도 갑자기 그동안 지고 있었던 삶의 무게를 한갖 농담으로 보게 해주었다. 겨우 농담 한번 하고 싶은 것을 참지 못해서 수용소로 간 루드비크나 친구가 겨우 농담한 것을 참지 못해서 수용소로 보낸 학생회장이나 옆에서 그냥 보기에는 무슨 농담같은 일이고 모든 분노와 증오가 예쁘고 어린 여대생에게 인정받을 수 있다면 거짓말처럼 사라질 것 같은 것도 농담같은 일이다. 마치 스스로가 큰 서사의 주인공인양 스스로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을 끊임없이 역설하지만 실은 자신의 상황에 매몰되어서 비극의 주인공으로 스스로 생각하지만 옆에서 보기에는 그저 희극인 것이다.

 

당시, 무용담처럼 내려오는 선배들의 학생운동 이야기들, 군대 이야기들, 역사들이 소설 농담에 겹쳐졌다. 그리고 내가 매몰되어 있던 삶이 이 이야기에 겹쳐졌다. 내 삶의 이야기들도 결국 술자리에서 풀어놓는 농담같은 것이 될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저 그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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