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미들의 말을 알아듣지 못해도 그들의 모습을 관찰하는데 전혀 문제가 없다. 자연은 아름답고 그 속의 다양한 동식물들은 아무런 말이 없어도 우리를 매혹시키고 빠져들게 한다. 그런데 드라마는 그 언어를 모르면 보는 것이 너무 괴롭고 힘들다. 어째서 이런 것일까? 처음에는 언어를 백지처럼 완전히 모르는 것은 아니니 어떤 언어적인 기능이 본능적으로 발동하고 또 다시 좌절되기 때문에 답답함과 좌절감이 온다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그 스스로 설정한 언어적인 기능에 대한 과대망상에 빠져서 ‘모든 것이 언어다’식의 얼버무리기 식의 결론에 도달했었다. 하지만 자연관찰에 몰입하게 되면서 그 언어적인 기능에 대한 과대망상에서 벗어나 다시 생각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우선, 언어가 있고 그것을 조금이나마 알아듣기 때문에 고통을 느낀다는 스스로의 가설을 검증해볼 필요가 있었다. 유사한 상황에 처해 보면 된다. 즉, 내가 모르는 언어를 말하는 외국인을 관찰하는 경우를 생각하면 된다. 자연관찰이지만 동시에 언어가 곳곳에서 튀어나온다. 평소, 지하철이나 버스를 탈 때 사람을 유심히 관찰하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라서 해답은 금방 튀어나왔다. 전혀 괴롭지도 않고 답답하지도 않다. 모르는 외국어도 그 의미를 몰라서 괴롭지는 않고 오히려 그 사람의 표정과 몸짓 그리고 음성이 어우러져서 들리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계속 시선을 주는 것으로 인한 무례가 아니라면 사람을 관찰하는데 있어서 어떤 장애도 느끼지 않는다. 어떤 이는 웅얼거리면서 말하기 때문에 외국어가 아니라도 그 사람이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알아들을 수 없을 것 같은 사람이 있고 누군가의 말은 모르는 외국어임에도 머릿속에 새겨질 만큼 또렷하고 아름답게 말하는 사람도 있다. 입고있는 옷과 손에 들고 있는 짐들은 그들이 일시적인 관광객인지 국내에 거주중인 것인지 알게 해주고, 표정과 목소리의 톤, 몸짓은 그들이 연인인지, 친구인지, 가족인지 알려준다. 잠깐의 관찰로도 상당히 많은 것을 알게 해준다. 이렇듯 외국인을 관찰할 경우 모르는 언어가 개입하고 있지만 전혀 고통스럽지고 괴롭지도 않으며 오히려 무척 흥미진진하다. 아무래도 언어적인 기능이 작동하고 다시 좌절하면서 고통을 겪는다는 가설은 폐기해야할 것 같다.


새로운 해답을 찾아 생각이 표류하다가 고통에 초점을 맞춰보게 되었다. 자막 없이 드라마를 볼 때 생기는 그 고통에 대해서는 앞서 포스팅한 미드를 자막 없이 보다가 생긴 의문점에 대하여 고찰함 2에서 명칭실어증과 개인적인 경험을 버무려서 명칭을 모르는 것에 대한 고통과 답답함을 언급했다. 이 경우 소설이나 텍스트 등 언어적 맥락 속에서 의미를 향유하다가 갑자기 나타난 이름 모를 기호 하나 때문에 무지의 벽에 부딪히고 답답해지면서 읽고 있던 맥락보다 지금 현재 눈앞의 기호 하나를 모른다는 맥락에 매몰되어서 전체 맥락이 단절되고 갑자기 글에 대한 흥미도 급격하게 사라지는 그러한 고통을 말했다. 그리고 그 고통과 답답함은 마치 자신의 위치와 맥락을 잃고 길을 잃었을 때 생기는 당혹감 또는 갑작스러운 급격한 시공간적 변화로 현재 자신의 상황을 납득하기 어려운 비현실감과 매우 닮아있다고 했다.


그렇다. 우리는 납득하기 어려운 갑작스러운 변화를 겪게 되면 그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심리적 타격을 입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언어적 맥락과 현실적 맥락이 전부 동일하다. 앞서 명칭실어증에서 모르는 기호에 마주쳤을 때는 언어적 맥락이 꼬이면서 심리적 타격을 입힌 것이라면 자고 있는 사이에 본인도 모르게 대한민국에서 몽고로 옮겨진 사람이 겪는 심리적 고통은 현실적 맥락이 꼬이면서 심리적 타격을 입는 것이다. 


완전언어상실증과 언어적 맥락의 상실이라는 것에 천착한 나머지 드라마를 자막 없이 보면서 겪는 고통도 언어적 맥락이 꼬이면서 발생하는 것이라고 전제하고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언어적 맥락이 꼬일 때 뿐만 아니라 현실적인 맥락이 꼬일 때도 비슷한 고통을 겪을 수 있다. 


그럼 다시 질문으로 돌아가보자. 드라마와 자연 관찰의 차이는 무엇일까? 어째서 자연 관찰은 언어 없이 가능한데, 드라마는 힘든 것일까? 이렇게 두 가지 서로 다른 상황을 대조하는 질문을 하니 갑자기 깨닫게 되는 바가 있었다. 딱따구리를 발견했을 때, 딱따구리의 맥락은 무척 뜬금 없었지만 이로 인한 혼란은 없었다. 딱따구리가 나무에 날아왔다는 것 그 자체로 자명하고 그 외에 별도의 맥락이 주어질 필요도 이유도 없었다. 그리고 그 딱따구리는 날아와서 나무를 두들기다가 날아갔다. 딱따구리의 생태, 종의 종류, 서식지 등을 모른다고 해서 또는, 딱따구리의 의사를 모른다고 해서 아무런 고통이나 답답함을 느끼지 않고 오히려 몰입해서 그것을 관찰한다. 이것과 드라마 시청의 차이는 무엇일까?


자연 관찰은 일종의 현실이다. 현실은 드라마와 달리 수많은 엉뚱하고 알 수 없는 맥락들이 섞여있다. 서로 상관없는 사람들이 매일매일 마주치고 또 그것을 스쳐지나간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은 현실적인 경험세계라는 맥락을 갖고 있고 사람들은 그것에 익숙해져 있다. 그리고 그 현실적 경험세계라는 맥락은 시간적 공간적 한계 내에서 물리법칙에 따라 연속적으로 벌어지는 현상을 보여준다. 그래서 조금 신기하거나 일상적이지 않은 일이 있어도 순식간에 적응하고 그것을 받아들이게 된다. 반면, 드라마의 맥락은 어떠한가? 우리는 신이라도 되는 것 마냥 전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거의 동시에 관찰하고 그 사람만의 사적인 장소에서 그를 엿보면서 관음증을 즐긴다. 1초전에는 뉴욕 맨하탄의 커피샵에서 노닥거리는 연인들을 보다가 그 다음 1초 후에는 사하라 사막의 한 가운데에서 낙타를 몰고 있는 남자를 보게 된다. 현실에서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스스로 제정신인지 의심할 것이다. 하지만 드라마를 보면서 그것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다. 왜 그럴까? 그것은 드라마가 실은 언어적 질서를 통하여 구축된 가상세계이기 때문이다. 드라마는 시나리오에서 나온다. 그리고 그 시나리오는 결국 글이다. 하얀 노트 위에 글로 작성된 것을 배우들이 연기하고 영상을 덧칠한 것에 불과하다. 그래서 그것이 아무리 현실처럼 보여도 결국, 배우들의 대사로 연결된 한편의 문학인 것이다. 그리고 배우의 연기와 배경의 사실성 등은 그 문학을 더욱 현실처럼 보이게 만드는 장치일 뿐이지 현실 그 자체는 아니다. 


따라서 집중해서 드마라를 보게 되면, 현실적 맥락에 충실한 상황이 전개될 때에는 자연스레 관찰이 이루어지고 고통스럽지도 않게 된다. 하지만 다음 순간 장면이 확 바뀐다. 또, 다른 인물들이 나오고 도시에서 시골로 바다에서 사막으로 완전히 다른 상황이 전개된다. 관찰하는 사람은 갑자기 변한 이 상황을 받아들이려고 노력하지만 쉽지 않다. 그리고 내용은 계속 전개되고 있다. 현실적 맥락은 이미 꼬였다. 물론, 용을 써서 바로 이전 맥락을 놓아버리고 다시 현재의 상황에 집중해서 관찰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의 뇌는 그런 상황에 익숙하지 않다. 한두 번은 어찌 노력해서 적응해도 그것이 반복될 때마다 우리의 정신은 피곤해지고 집중력은 떨어지게 된다. 결국, 길을 잃고 답답함과 고통에 매몰되고 더 이상 드라마를 보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현실적 맥락이 꼬이는 이유는 그 현실적 맥락의 전환을 언어적 맥락을 통하여 전달하고 있는데 그것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드라마에 대한 순수한 자연관찰은 처음부터 성립할 수 없었다. 드라마는 처음부터 언어적인 산물이었고 그 사이에 있는 배우와 소품으로 이루어진 영상들도 현실적인 요소처럼 보이지만 잘 통제된 언어적 배치들일 뿐이기 때문이다.

실어증 체험과 영어에 대한 호기심은 당분간 사그라들었다. 막연하게 괴물같은 언어 기능을 상정하는 식의 얼버무리기식 결론에 도달했다는 것은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 결론의 옳고 그름이 문제가 아니라 그 결론으로는 옳고 그름을 검증하기도 어렵고 무언가 새로운 영감을 얻기도 어렵다는 것에 가깝다. 그렇게 흥미가 떨어지고 관심이 사라졌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아파트 단지 앞 공터에서 딱따구리 같은 것을 보았다. 딱따구리를 실물로 본 것은 처음이었고 또, 그것이 아무리 산 아래에 있는 집이라고 해도 아파트 단지에 나타난 것이 너무나 신기해서 가는 길을 멈추고 그 딱따구리가 날아올라 사라질 때까지 하염없이 그것을 관찰하면서 사진을 찍고 동영상을 촬영했다. 딱따구리의 출현은 갑작스러웠고 그 사소한 몸짓 하나하나를 보는 것이 신기하고 즐거웠다. 전혀 계획하지 않은 새로운 것과 조우하는 신선한 경험이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딱따구리 관찰은 정말 즐거웠다. 아무 생각 없이, 어떠한 이유도 목적도 없이 그저 그 딱따구리가 신기해서 보는 행위를 한 것이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하물며 디지털이 아닌 맨 눈으로 무엇인가를 보는 경험도 너무 오래간만이었다. 덕분에 어렸을 적 아날로그 시절 추억으로 빛바랜 사진처럼 남아있던 각종 자연관찰에 대한 기억이 생생하게 살아나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 산이나 들에 가면 재미있는 것이 널려 있었다. 잠자리, 메뚜기, 물고기, 하늘소, 개구리, 뱀 등 신기한 곤충이나 생물을 잡으러 가는 것이 가장 즐거웠고 이들이 하는 행동을 차분히 보는 것도 매우 좋아했다. 물론, 너무 좋아서 하염없이 죽치고 앉아서 관찰할 정도로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여유로운 시간이면 자연스레 질릴 때까지 눈앞의 곤충이나 생물의 동작 하나하나에 흠뻑 몰두했었다. 어떠한 언어도 발화되지 않았지만 전혀 지루하지 않았고 매순간이 충실하고 충만했다. 자연스럽게 몰입이 되었고 자연스럽게 빠져들었다. 인기 있는 장난감이나 맛있는 과자처럼 짜릿하고 흥분되지는 않았지만 평소에는 좋아 죽는 그런 것들도 시골의 산과 들에서 마주치는 수많은 신기한 것들이 주는 경이로움 앞에서는 매력이 반감되었다. 꽃잎 위에서 사냥을 위해 웅크리고 있는 사마귀를 발견하면 그 사마귀가 숨죽이고 있는 모양에 따라 같이 숨죽이고 앉아서 사냥에 성공할 때까지 몇 시간씩 기다리기도 하고 손가락만한 말벌이 주는 위압감에 도망가 보기도 한다. 이 때의 나는 수많은 생명들 속에서 매우 충만했다. 그리고 그러한 모든 충만한 경험에서 언어는 없었다. 언어 없이 매우 충만했고 모든 것과 교감하고 있었다. 


이 모든 경험에서 언어의 역할은 거의 없었다. 오히려 언어는 경험에 몰두하는데 방해였기에 말을 줄이고 그 행동 하나하나를 세밀하게 보기 위해서 더 집중했었다. 이제 자연관찰에서 언어 기능의 개입은 없다고 전제해본다. 그런 관점에서 보니 언어 기능이 개입하지 않은 사례들이 무수하게 떠오른다. 만일 앞서 내린 결론에서처럼 언어 기능이 모든 인지 기능의 배후에서 작동하고 있다고 본다면, 당연히 뛰어난 화가는 자신의 그림을 언어로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고, 뛰어난 피아니스트는 자신의 연주를 언어로 설명할 수 있으며, 뛰어난 운동선수는 자신의 퍼포먼스를 언어로 완벽하게 설명할 수 있다는 것과 같다. 하지만 이런 사람들은 결코 언어적인 것을 잘 사용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언어적인 것을 거추장스러워 한다. 화가는 그림으로 피아니스트는 연주로 자신의 예술성을 드러내려고 하지 그것을 말로 드러내려고 하지 않는다. 말은 작품 위에 얹어질 뿐이지 그 알맹이가 될 수 없다. 또, 좌뇌와 우뇌에 대한 통속적인 이야기들도 떠오른다. 언어적 기능은 좌뇌의 일부에서만 작동할 따름이다. 이제 생각이 다시 반전되었다. 언어 기능이 모든 인지 기능의 배후에서 작동하고 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이제 앞서 내렸던 얼버무리기식 결론이 잘못되었음을 이제는 확실히 깨달을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면 다시 문제가 대두된다. 어째서 자막 없이 드라마를 보는 것은 자연관찰과 달리 고통스러울까? 아마도 문제 설정을 다시 해야할 것 같다.

페퍼의 눈동자에 드러난 선명한 동공을 보고 새로운 사실을 깨닫게 되는 그런 즐거운 경험은 겨우 한 번에 불과했다. 그 한번을 제외하면 자막 없이 드라마를 보는 도전은 전부 설명하기 어려운 답답함과 정신적 괴로움을 주는 지옥의 경험의 계속이었을 뿐이다. 이런 경험이 계속 반복 되니 정신적으로 지치고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실제로 드라마를 자막 없이 보는 것을 연이어 지속하지는 못하고 한 편을 보고 쉬면서 정신적인 에너지가 차오를 때까지 기다렸다가 마음을 다잡고 다시 한 편씩 보는 식이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부터 왜 이렇게 고통스럽고 괴롭고 정신적으로 답답해지는지 그 원인을 찾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언어를 알아듣지 못하는 상황을 일부러 만들었으니 바로 그 언어를 알아듣지 못하는 상황이 고통의 원인인 것은 명백해 보인다. 그런데 단순히 언어가 문제의 원인이라고 단정짓기는 조금 어렵게 느껴졌는데 이와 매우 대조되는 상황이 있기 때문이이다. 가련, 일종의 자연관찰을 하는 상황이다. 개미의 행동에 흥미를 느껴서 지그시 그것을 관찰할 때, 개미들과 의사소통을 못해서 괴롭지는 않다. 자막 없이 보는 드라마를 보는 것이나 개미들의 행동을 관찰하는 것은 전부 의사소통이 되지 않고 언어적인 어떤 기능의 도움을 받지 못한다는 점에서  마찬가지인 것처럼 생각되었다. 그런데 왜 드라마는 괴롭고, 자연관찰은 괴롭지 않은 것일까?


이에 대해서 처음 떠올린 해답은 자연관찰은 개미와 의사소통을 기대하거나 개미가 말을 걸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으므로 언어를 쓰겠다는 기대가 없고 따라서 언어 기능이 작동하지 않았지만 드라마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비록, 영어를 완전히 알아들을 수는 없어도 전혀 못 알아듣는 것은 아니다. 한두 마디 정도 아는 단어가 들려오게 되고 그것을 기반으로 언어 기능이 작동하게 되고 또 그것이 좌절되면서 알아들을 수 없다는 답답함이 밀려오고 그것이 쌓이면서 지독하게 괴로운 경험이 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렇다면 그런 기대를 접으면 언어기능을 작동시키지 않을 수 있을지 모른다. 마치, 인간을 동물 관찰하듯 관찰했던 동물학자나 전혀 미지의 부족을 연구하는 인류학자처럼 스스로 속한 고유문화에 의한 선입견을 내려놓고 관찰하듯이 관찰하면 언어 기능을 잠시 가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즉, 자연관찰을 하듯 드라마 속의 인물들과 상황들을 찬찬히 관찰하고 언어도 이미 알고 있는 문법이나 실제 철자 같은 것을 배제하고 그냥 들리는 구어(口語)대로 인식하려고 노력한다면 언어 기능을 없이 드라마를 보는 것이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완전언어상실증 환자들이 세상을 자연관찰 하듯이 보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기대감을 가지고 다시 드라마를 시청했다. 몇 번을 도전해 보았지만 그 언어 기능은 꺼지지 않았고 자막 없이 드라마를 보는 경험은 항상 고통스럽고 답답했다. 


처음 한두 번 15분 정도까지는 어찌어찌 집중해서 관찰이 되는 것 같았지만 그 이후엔 정신력이 방전되어 퍼져버리고 다시 고통과 답답함이 몰려왔다. 아무리 정신을 가다듬고 의식적으로 언어를 쓰지 않고 자연 그대로의 관찰을 하려고 한다고 스스로 되새기면서 몇 번의 도전을 했지만 고통은 전혀 경감되지 않았다.  어째서 드라마도 하나의 현상일 뿐인데 자연 현상처럼 관찰할 수 없는 것일까? 언어 기능을 잠시 꺼두어 이 고통과 답답함을 물리치겠다는 계획이 계속 좌절되면서 언어 기능이라는 것이 내 의지로 작동여부를 결정할 수 없는, 스스로 작동하면서 내 삶을 지배하는 그 무엇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언어 기능을 끄려는 노력이 축적될 때마다 그 실패로 인한 절망감도 축적되었고 어느 순간 부터는 이 언어 기능이 나에게 고통을 주는 점점 괴물처럼 무섭게 느껴지면서 오히려 생각이 반전되기 시작했다. 자연 현상의 관찰에는 언어가 개입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것이 반전되어서 오히려 의식하지 못하는 수준에서 언어적인 개입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닐까 의심하기 시작했다. 즉, 언어 기능은 무의식적이거나 의식적이거나 항상 작동하고 있으며 모든 감각에 의한 지각과 이러한 지각이 맥락 속에서 자신의 의미를 가지는 것은 전부 언어적인 기능이 개입된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을 확장하기에 이르렀다. 즉, 자연 관찰을 할 때 언어적 개입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신경 레벨의 밑바닥에서 언어적인 프로세스를 거치기 때문에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일 뿐 실제로는 완전히 언어 기능에 따라 작동하는 것일지 모른다는 의심을 가지게 된 것이다. 


이런 결론은 약간 친숙한 결론이었다. 정신분석이나 언어철학 등에서는 인간의 정신이 결국, 언어의 총체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논증하려는 다양한 시도를 보여왔다. 또, 언어에 국한되지는 않았지만 언어와 개념이 허상에 불과하고 중생들은 그 허상에 매여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불교의 공(空) 사상이나 꿈과 구별되지 않는 현실을 의미하는 장자의 호접지몽 같은 것도 맥락상 연결되는 바가 있다. 친숙한 결론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런 결론으로 스스로를 유도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원래, 이런 식의 결론을 좋아했기에 여기에서 만족해야 하는데, 조금 납득이 가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우선, 우스운 점은 이 언어기능이라는 말은 그냥 임의로 만들어낸 실체가 없는 말이라는 점이다. 막연하게 언어 기능이라는 것이 있겠지 하고 생각하고 붙인 말인데 어느 순간부터 이 말에 다양한 것들이 붙어서 개념이 살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제는 스스로 살아 움직이면서 나를 지배하는 무서운 그 무엇이 된 것이다. 그런데 정작 언어 기능이 무엇이냐라고 물어본다면 나는 전혀 그것을 규정할 수 없었다. 그냥 그런 기능인 것이다. 이런 상황은 찬찬히 생각해보면 결국, 스스로 대충 만든 단어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이상한 개념이 되어 이제는 나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니 그야말로 불교에서 말하는 개념이라는 허상에 얽매여 있는 꼴이다


밑도 끝도 없이 사람을 지배하고 운용하면서 고통을 주기도 하는 하지만 그 실체를 알 수 없는 언어 기능이란 것을 상정해버리게 되면 인간이란 그저 언어 그 자체의 단말(terminal)이 되어 버린다. 삶의 실제적인 것이라고 생각되던 모든 것이 그냥 일종의 언어에 의한 환상처럼 되어 버리고, 결국, 언어에 의해서 인간이 조직되고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식의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영화나 환상 소설 등에서 수십번 우려먹은 듯한 흔해빠진 결론이고, 인간의 하찮음과 부족함을 강조하면서 묘한 만족감을 느낄 뿐 그 외에 소득은 없는, 무언가 초월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열심히 생각을 전개한 보람도 없이 그냥 알 수 없음이라고 얼버무리는 그런 결론이었다. 


하지만 이 결론은 상당기간 내 스스로가 좋아하는 형태의 결론이었다. 우주의 광활함 앞에서 먼지처럼 작은 스스로의 존재를 느끼고 세상의 위대함에 흠뻑 젖으면서 자뻑에 빠지는 자기만족적인 결론이었다. 이번에 그런 식의 결론이 좋지 않다는 자각을 처음 얻기는 했지만 오랫동안 이런 식의 결론을 좋아하다 보니 이 마음에 들지 않고 납득할 수 없는 결론이 머릿속을 차지하고 나오지 않았다. 이 상황을 돌파할 다른 생각이 나지 않았다. 막다른 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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