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지는 여전히 즐겨보고 있지만 무협으로 촉발된 기공이나 신비주의에 대한 탐닉과 연구는 4년 정도 내 인생을 휘어잡고 사라졌다. 중학교 1학년부터 고등학교 2학년까지 모든 에너지를 쏟아 부은 덕분에 얻은 것과 잃은 것이 있다. 그리고 이 때 얻었던 것과 잃었던 것이 오늘날까지의 내 인생을 거의 좌지우지한 것으로 보인다.

 

우선,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심상(心象)을 알게 되었다는 점이다.

 

주화입마에 대한 공포로 수행을 하지는 않고 다양한 신비류를 비교하면서 읽어보면서 이해하려고 노력하다보니 어떤 공통점을 찾을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심상(心象)이었다. 심상이라는 것은 일종의 심리적 모델이다. 하지만 단순한 심리적 모델처럼 머릿속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 현실에 부합하는 것이라는 확신을 얻었고 실제로 현실에 작용력을 가지고 있는 것을 말한다. 가령, “나쁜 짓을 하면 죽어서 지옥에 간다.”라는 말을 들으면 어떤 이는 무시하고, 어떤 이는 존중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한 심상이 구축된 사람은 나쁜 짓을 했다는 자각이 들면 바로 죄책감이 들고 지옥에 갈지 모른다는 공포가 작동한다. 그러한 심상이 이미 세계의 규칙으로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공류, 요가, 명상 등 대부분의 수행 전통은 먼저 몸을 차분하게 하고 마음을 완전히 가라앉히는 것을 기초로 하여 해당 전통의 형이상학적인 내용들을 정신적인 작용을 통하여 신체에 구현하고, 신체에 그것이 구현되는 것을 통하여 정신적인 작용이 현실에서 그 영향력을 확보함으로써 심상이 구축되도록 한다. 심상이 구축된 것은 기본적인 믿음이 발생한 것이고 해당 믿음을 기반으로 더 복잡한 심상을 구축하거나 더 강력한 심상을 구축하는 식으로 발전시킨다.

 

어떤 부위에 기, 프라나, 에너지 등이 모인다고 심상을 만들면 실제로 해당 부위가 뜨거워진다. 사실, 이것은 자연스러운 생리작용이다. 우리의 주의력이 몸의 어떤 부분을 떠올리면 우리의 몸은 해당 부위를 쓸 것이라고 생각해서 미리 그 부위를 활성화하기 위해 피를 보내고 그로 인하여 그 부위가 따뜻해지고 민감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공류, 요가, 신비주의 등의 대부분의 전통은 그것을 세상을 이루는 기(), 프라나, 에너지 등이 정신의 작용을 통하여 모인 것으로 해석한다. , 정신이 수행을 통하여 현실세계에 작용을 이룬 것이다. 작용이 성취되었기 때문에 우리의 정신은 정신의 념()을 통하여 기()가 작동한다는 심상이 성립되면서 신체와 정신이 상호확증을 통하여 공인되고 작동하기 시작한다. 그러면 이 심상을 대상으로 조작을 시작한다. 더 강력하게 정신작용을 일으켜보기도 하고 더 약하게 일으켜보기도 하면서 해당 정신작용을 컨트롤 할 수 있게 한다. 그러면 조금 더 복잡한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 이때, 각각의 수행전통은 각자의 형이상학적 모델에 따라서 다양한 방식을 취한다. 기공류에서는 단전으로 시작하고 요가는 차크라를 이용한다. 이렇게 되면 우리에게는 추상적으로만 보이는 실제 정신의 근육이 체계적으로 발달하고 또, 형이상학적이 믿음이 몸으로 체득되면서 그 사람을 둘러싼 세계가 총체적으로 변모하게 된다. , 천인합일을 이루거나. 범아일체를 이룩하게 되거나 신과 하나가 되는 등의 세계의 구축이 완료되는 것이다.

 

이러한 심상에 대해서 알게 되면서, 처음에는 기공류 수행이 완전히 거짓이라고 생각하기도 했지만 조금 더 머리가 굵어지면서 형이상학적인 세계관을 논외로 치고 생각해보면 이 방법이 매우 효과적인 방법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간단한 사례로 이런 것이 있다. 매일 힘들게 육체노동을 하는 사람들이 운동부족에 시달리는 경우가 있다. 물리적으로 보면 육체노동과 운동은 동일한 행동인데, 어째서 운동부족의 증세를 보이는 것일까? 그것은 심상이 다르기 때문이다. 육체노동은 힘들고 하고싶지 않고 돈을 받는 일이다. 반면에, 운동은 상쾌하고 자족적이며 하고싶은 일이고 그 피드백은 더 쾌적해진 나의 몸이다. 따라서 기대하는 것이 다르고 임하는 자세가 다르다. 그 때 발생하는 육체의 생리적 기전이 달라질 수 있다. 가령, 운동을 할 때면 마음이 즐겁고 안정감을 느끼기 때문에 신체에 내재된 에너지를 더 쓰는 방향으로 대사가 이루어지지만 육체노동을 할 때는 불안하고 생존이 걸려 있어서 신체 에너지를 덜 쓰는 방향으로 작동할 수도 있다. 즉, 심상이 구축된 방향으로 피드백이 이루어진다. 따라서 좋은 심상을 구축하면 그에 따른 이득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형이상학적 전통에 대해서 완전히 신뢰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경험적인 지식과 지혜의 축적이 없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이를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다. 한의학만 해도 그 작동 기전을 명확히 알 수 없지만 실제로 작동한다. 그것은 환자가 한의학적인 심상을 구축한 것이 아님에도 플라시보 효과라고 치부하기는 어려울 정도로 현실적인 치유효과를 가지고 있다. 물론, 돌팔이가 많은 것은 별개로 치고 말이다. 따라서 한의학적인 체계에 따라 심상을 구축하는 기공류도 심상을 제외하고도 다양한 효과와 작용력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스승을 구할 수 없었고,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하고 그저 따라하다가 주화입마에 걸리기 싫었던 나는 어느 순간부터 이 모든 것에 공통된 것이 심상(心象)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려운 형이상학적인 체계를 제외한다면 그리고 심상을 다룰 줄 안다면 구태여 복잡한 기공이나 요가 같은 것을 구태여 할 필요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저 현대의 과학과 상식을 이용하여 심상을 구축하면 된다. , 현대 생활을 잘하는 수행을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면 몇십년씩 토굴에 박혀 수행하지 않아도 현실 생활도 더 잘 되고 수행도 잘 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심상이라는 것은 결국 마음먹는 것이다. 세상이 결국, 마음먹은 대로 이루어질 것이라는 확신이 생겼고 그렇지 못한 것은 내가 제대로 심상을 구축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자각이 생겼기에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자각도 같이 생겼다.

 

고등학교 2학년 당시의 나는 심상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수행 전통을 대체할만한 형이상학적인 체계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정신적인 성숙도가 높은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스스로 생각하고 움직여야겠다는 자각을 얻는 정도에 그쳤다. 그리고 공부를 함에 있어 그 동기를 강화하고 집중력을 온전히 발휘하는 용도 정도로만 사용했다. 원래, 심상은 생각한 바가 현실에 구현됨으로서 생명력을 얻게 되기 때문에 그러한 과정을 상세하게 절대적인 믿음을 가지고 설계해야 한다. 하지만 그러한 체계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제대로 사용할 수 없었다. 그저 공부를 통하여 집중하는 훈련을 하고 그것을 통해서 어떤 정신적 경지를 높여야겠다는 막연한 기대로 공부에 대한 거부감을 지우고 동기를 유발한 정도에 불과하다. , 암기를 할 때, 머릿속에 이미지를 선명하게 띄우는 훈련이라고 생각했고 그로 인하여 암기과목의 성적이 매우 좋았는데 딱, 그 정도 수준이었다. 보다 근본적인 개선을 이루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심상(心象)은 논리적인 과정이라기보다는 어떤 믿음이나 신앙과 같은 신뢰가 작동해야 구축된다. 가장 좋은 방법은 스스로 현실에서 부딪치면서 얻는 것이지만 원하는 현실을 상상으로 구축한다고 심상이 생기는 것이 아니므로 그러한 현실에 처하는 것이 쉽지 않다. 아마도 어떤 분야에 일하는 직장인들은 자신이 해당 분야에 들어와서 일할 때와 그렇지 않을 때의 차이에 놀랄 것이다. 해당 분야의 현실에 처하면서 구축된 심상이 사람을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이러한 협소한 심상이 아니라 초월적이고 범용적인 심상은 신앙과 믿음이 필요하다. 따라서 신실하게 믿는 종교가 있는 것도 아니고 어떤 확고한 세계관과 가치관이 정립되지 못한 학생이 심상을 활용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당시에는 심상을 통하여 기대했던 이익을 다 얻지 못했고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고 생각했지만 오늘날에는 스스로 심상을 찾음으로써 그나마 상당히 많은 이익을 얻었다는 생각이 든다. 심상을 알게 된 이후로 집이나 학교에서 그다지 좋은 대우를 받지 않았음에도 단 한 번도 스스로 나아가는 것을 의심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문제가 생기면 스스로의 심상을 고치려했고, 그게 옳든 그르든 간에 나에게는 긍정적으로 작동했다. 그리고 모든 어려운 일을 스스로 긍정적으로 뒤틀 수 있었다. 밤새워 공부하는 것도 도전이고, 학교에서 두들겨 맞는 것도 좋은 경험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기에 현실적으로는 매우 바보 같지만 개인적으로는 가고자 하는 길로 돌진할 수 있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영웅문은 김용의 사조영웅전, 신조협려, 의천도룡기의 3개의 작품을 하나의 세트를 묶은 작품이다. 처음에는 영웅문을 읽고 무협이라는 장르가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관련 무협지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은 무협지의 즐거움은 아니었다. 와룡생(臥龍生)의 무협을 보면서 재미없다고 느꼈고, 국내 작가들이 쓴 무협지는 사춘기 소년들의 마음을 사정없이 끌어당기는 19금 컨텐츠로 무장하셨지만 영웅문의 즐거움에 비교할 수는 없었다.

 

결국, 영웅문의 즐거움을 다시 누리기 위해서 그 작가 김용의 작품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이 작가는 이미 절필 선언을 해버렸기 때문에 한정된 작품을 끊임없이 다시 읽는 수밖에 없었다. 절필하고 나서 중3이었던 시절 화산논검이라는 작품이 나왔는데, 이 작품이 김용의 작품인가 아닌가로 친구들과 처절하게 논쟁한 것이 아직도 생생하다.

 

중학교 1학년부터 군대를 가기 전까지 반복적으로 김용의 작품을 읽고 또 읽으면서 이 작품이 왜 이리 재미있는 것일까? 라는 의문이 항상 들었고, 읽을 때마다 그 필력에 감탄에 감탄을 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그 의문을 풀 수 있는 사건이 발생했다.

 

대학에 올라와서 교양으로 동양철학 수업을 들으면서 풍우란씨의 중국철학사를 읽게 되었다. 그런데 읽으면서 구절구절이 너무 친숙한 것이다. 수업 때문에 의무감으로 읽으려고 펼쳤던 책이 순식간에 읽혔다. 그리고 혹시나 하면서 다시 김용의 작품들을 살펴보았다. 중국철학이 영웅문에 그대로 녹아있었다.

 

주인공들이 처하게 되는 상황은 고사에서 인용되는 경우가 상당수 보였고, 등장인물들은 역사적인 격동기를 사는 사람들임과 동시에 각 개인이기도 했다. 그래서 애국, 애민, 공정함과 명예 등의 공적인 가치를 추구하면서도 각 개인의 욕망과 영달을 추구하기도 하고, 자신만의 가치를 추구하기도 하면서 그러한 공적인 가치들이 개인적 친분과 사랑, ()과 끊임없이 대립하고 있다. 유교적이고 민족적인 양심과 공의를 등에 짊어지고 나아가면서, 노장적이고 도가적인 가치로 속세를 벗어나 은거하면서 그 내면의 욕망과 투장하기도 하고, 불교적인 깨달음으로 돌아가기도 하는 등, (), (), ()가 역사 속에 처한 인간의 나아가야할 당위와 친구간의 우정, 남녀간의 애정과 어우러져 장대한 조화를 그리고 있었다.

 

, 각종 무술의 초식의 이름과 성격은 단순한 모양을 흉내낸 것에서 깊은 철학적 이치를 포함하는 것 까지 그 층계와 깊이에 따라서 다양한 양상으로 이름을 붙이고 있다. 가령, 개방의 호신무공인 항룡십팔장의 초식명은 주역 건괘의 효사(爻辭)였고 초식을 겨루고 이치를 겨루는 것은 사실은 아름다운 한시(漢詩)를 녹여낸 경우가 많았다. 말싸움을 하는 장면에서도 각종 고사와 궤변이 동원되고 제자백가의 하나인 명가(名家)백마는 말이 아니다.’가 자연스럽게 녹아 있는 부분은 정말 감탄밖에 나오지 않았다.

 

결국, 김용의 작품은 무협이면서 동시에 등장인물들은 시대적 배경과 자신이 속한 곳에서 나아가야할 바를 찾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키기 위하여 노력하면서 그 다양한 가치를 삶과 밀접하게 연결된 다양한 철학의 이치로 형상화한 무()로 극복하려고 하는 의지를 보여주고 그것이 어떻게 결론 나는지 까지 자연스럽게 이어짐으로써 삶의 명쾌한 이치까지 보여준다.

 

김용의 작품 한줄한줄이 거의 대부분 고전과 경전에서 인용하였으면서 전혀 서로 거부감 없이 연결되어 다양한 가치와 인간의 군상을 묘사하고 있다. 그런데 이 모든 내용이 전혀 어색하지 않고 중국철학을 전혀 모르는 사람도 아무런 부담없이 즐겁게 즐길 수 있게 글을 썼으니 어찌 신필(神筆)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런 책이었으니 책이 마약처럼 사람을 중독시킬 수 있는 것이다. 그 모든 철학이 역사와 지리, 사람과 자연스럽게 조화되어 재미있는 이야기로 엮였으니 어린 마음에 읽어도 전혀 부담없이 재미있었고, 작가의 깊은 내공의 편린을 공유하면서 마약같은 쾌감을 맛보게 되어 처음 읽으면서도 그대로 매료되어 버린 것이다. 그리고 읽으면 읽을수록 그 속에 담기 그 깊은 맛이 어우러져 나오니 인생의 깊이가 같이 깊어지는 맛도 있어 책을 손에서 놓을 수가 없었다.

 

참고로, 고등학교 1학년에서 만난 같은 반 친구 중에 전교에서 놀고 있는 우등생 친구와 친하게 지냈다. 원래 좋은 것은 나누면 그 즐거움이 배가 된다고 했기에 그 친구에게 영웅문을 소개시켜 주었다. 물론, 속으로 영웅문을 보느라 눈이 벌개지는 친구를 기대하는 마음도 있었다. 그리고 순리대로 그 친구는 김용의 작품을 모두 읽었고 성적도 동반하여 떨어졌다. 하지만 그 친구는 고2말부터는 성적이 오히려 올랐고, 결국, 서울대에 바로 합격했다. 그 친구가 나에게 남긴 말이 정말 명언이었다.

 

영웅문 덕분에 글의 즐거움을 알았고 집중력이 개발되었다.

재미있는 책을 읽느라 매일 앉아있다 보니 공부하는게 더 쉬워졌다.

무협지를 읽은 덕분에 글을 읽는 속도가 빨라졌다.

 

덕분에 언어영역 같은 과목에서 발군의 성적을 내고 바로 서울대로 갔다. 나도 동일한 덕을 봤기에 아이들에게 김용의 작품을 읽으라고 이야기하는 편이다. 몰입독서와 책과 가까워지는데 정말 훌륭한 역할을 해줄 것이다.

 

몇 마디 첨언하자면 최근에 다시 나온 김용의 작품은 한글 전용세대를 위하여 모든 것을 한글로 풀어서 나왔다. 개인적으로 한글 전용에 찬성하는 편이지만 김용의 작품은 한자어의 맛을 한껏 살린 것이어서 입에서 자연스럽게 노는 맛이 있다. 그런데 그것을 한글로 옮기니 개인적으로 무척 촌스럽게 느껴진다. 마치 한시(漢詩)를 한글로 옮겨서 읽는 것과 같은 이상한 느낌이었다. 되도록 고려원에서 나왔던 예전 책이나 한자어를 적절하게 사용하는 작품으로 읽기를 권한다. 그리고 최근 유행하는 판타지 소설이나 무협을 추천하진 않는다. 개인적으로는 좋아하지만 글의 깊은 맛을 알게 하는 첫 몰입독서로서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영웅문을 읽으면 모든 것이 잘될 것이라는 식의 이야기는 아니다. 그것이 대단한 책이고 한번 읽어볼 가치가 충분하다 못해 넘치는 책이라고 생각하여 이야기하는 것이니 즐겨주시기 바란다.



나의 독서 경험은 크게 3단계로 발전되어온 것 같다. 우선은 처음으로 독서에 입문한 것이고 그 다음은 쾌락의 독서로 책에서 즐거움을 찾았던 시기였다. 마지막은 최근인데 지식을 흡수하고 스스로를 바꾸기 위해서 하는 독서다. 앞에서 처음으로 독서에 입문한 시기에 대해서 언급한 바가 있다. 그것은 서유기로 시작되었고 각종 위인전과 동화로 확장되었다. 이 시기에 독서는 재미있는 것이었지만 약간 부차적인 것이었다. 왜냐하면 친구들이 놀자고 하면 책을 내팽개치고 나가서 놀았고, 책보다 재미있는 것을 열심히 찾던 시기이기 때문이다. 워낙 친구들이 안 놀아줘서 책을 많이 읽기는 했지만 친구들과 노는 것보다 재미있지는 않았다하지만 두 번째 단계인 쾌락의 독서로 넘어갔을 때에는 친구보다 책이 더 중요했다. 사실, 이것을 독서라고 부를 수 있는지 잘 모르겠다. 내가 본 것은 무협지와 만화책이기 때문이다. 오늘날은 어떤지 모르지만 내가 중학생이었을 때는 아이들이 만화책을 좋아하는 것은 참 당연한 일이지만 무협지를 보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았다. 그래서 만화책 이야기는 빼고 무협지에 대해서 이야기 해보려고 한다.

 

무협지를 스스로 찾아서 본 것은 아니다. 초등학교 6학년을 졸업하고 중학교로 넘어가기 전 겨울에 무협지를 처음 보게 되었는데 어머니의 강권에 못 이겨 보게 되었다. 어머니는 친구 아들이 영웅문이라는 무협지를 본다는 것을 알고 그렇게 두껍고 깨알 같은 글로 쓰여진 소설책을 읽는 친구 아들을 보고 부러워하면서 자신의 아들도 그런 책을 봤으면 하는 마음에 권유했다(무협지를 권유한 것에 대해서 어머니는 지금까지도 후회하고 계신다.).

 

개인적으로 책을 좋아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런 책이나 다 읽는 것은 아니다. 마음이 끌려야 독서는 시작되는 것이다. 당시까지 읽었던 책의 역사를 간략하게 짚어보면 각종 그림책에서 출발해서 서유기에서 폭발했고 계림문고에서 나온 문고판 150권 정도를 읽다가 먼 나라 이웃나라에 푹 빠져서 읽다가 메르헨 시리즈의 동화와 조금 더 성숙한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에이브 시리즈를 읽고 있었다. 하지만 무협지라는 장르는 처음 접해보는 장르였다. 책은 두껍고, 글자는 작아서 보는 것도 부담되었고 겉표지도 이상한 옷을 입은 아저씨가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는 모습이어서 거부감이 더 심했다. 하지만 중학교로 넘어가기 전 중심부위의 표피를 제거하는 수술을 했기 때문에 친구들과 어울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고 어머니가 직접 책을 빌려와서 손에 쥐어주면서 읽어보라고 강력하게 권유해서 별다른 생각없이 페이지를 넘겨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신세계가 펼쳐졌다. 어머니는 총 3부의 영웅문 중에서 11권만 빌려왔는데 첫 페이지를 열고 2시간 만에 숨도 쉬지 않고 다 읽었다. 그리고 저녁 9시쯤에 2권을 빌리기 위해서 어머니의 친구 집을 찾아가서 문을 두드렸다. 어머니 친구 분이 많이 당황스러워 하셨다.

 

아마도 태어나서 지금까지 겪어본 쾌락 중에서 가장 강렬한 쾌감을 맛 본 것이 무협지 영웅문을 읽었을 때 얻었던 쾌감이었던 것 같다. 쾌감이라는 측면만 본다면 불가능해 보였던 대학입시를 성공했을 때의 성취감, 좋아하는 여자 친구와 깊은 사랑을 나누었을 때의 충족감과 쾌감, 갑자기 많은 액수의 공돈이 생겼을 때의 쾌감도 비교할 수 없는 순수하고 강렬하면서도 그 여운마저 사랑스러운 쾌감이었다. 독서를 하면서 몰입되는 경우는 많이 있었지만 이만큼 몰입된 경험은 그 때가 처음이었고 거의 마지막이었던 것 같다.

 

영웅문에 대한 몰입 경험을 어떻게 묘사해야 할까? 처음 책을 펼칠 때는 그냥 읽기 시작했다. 무엇을 기대한 것도 아니지만 글을 읽다 보면 글을 읽고 있다는 의식적 행위가 점점 희미해지고 글의 내용이 점점 살아서 스스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무림의 고수들이 저마다 보여주는 재주가 머릿속에서 자연스럽게 그려지고 주인공의 심상이 손에 잡힐 것 같이 느껴지면서 주인공이 웃을 때는 내 마음도 웃고, 주인공이 울 때는 내 가슴도 찢어진다. 각각의 인물들은 스스로 실체화되어서 희로애락을 같이 한다. 드높은 무학의 이치가 알 듯 말 듯 내 마음 속에 스치면서 아쉬움을 낳고 상황의 공교로움과 무학의 이치와 거대한 역사의 흐름이 거대한 세계가 흐르는 법칙의 조각을 살짝 내비치고 삶의 무상함과 그 찬란한 아름다움이 동시에 사무치게 느껴지면 마음을 격동하게 한다. 마음과 다르게 흘러가는 상황과 그 필연성에 울고 웃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사람들의 마음을 응원하면서 어느새 대단원의 끝이 다가왔다. 책을 덮으면서 다시 나의 호흡과 아픈 팔과 뻣뻣한 목 등 육체가 느껴지고 현실에 돌아오면서 이 현실의 지루함과 하찮음이 절실하게 느껴졌다. 현실보다 생생하게 살아있는 그 격동과 감동을 다시 맛보고 싶은 나머지 마치, 낙원에서 쫓겨난 사람처럼 다시 허겁지겁 영웅문의 세계로 들어가기 위하여 책을 처음부터 다시 읽는다.

 

이것은 마약 같은 쾌감이었고 책을 덮고 있으면 그 금단증세도 빨리 왔다. 그래서 영웅문을 읽고 또 읽었고 총 318권의 책을 대략 300번은 읽은 것 같다. 당연히 처음 읽었을 때의 감동을 다시 맛보진 못했다. 그러니 다시 그런 감동을 줄 수 있는 작품을 찾기 시작했고 엄청난 집착으로 영웅문의 작가 김용의 작품을 모두 찾아 읽었다.

 

추후, 만화, 애니메이션, 영화 등이 나와서 유행했지만, 솔직히 독서의 몰입 경험에 비하면 솔직히 너무 약했다. 어린 마음에 왜 이런 차이가 있는지 열심히 분석한 적이 있는데, 지금도 그 분석결과와 동일하게 생각한다. 이것은 글과 그림, 영상이라는 매체의 차이 때문이다. 히로인의 외모를 설명할 때, 글은 몇 가지 특징만으로 그녀를 묘사할 뿐 그녀의 외모와 매력이 묘사하는 사람의 마음속에 느껴지는 바를 그대로 공감시킨다. 하지만 영상 매체나 그림은 그녀의 외모를 보여주고 그녀의 매력에 공감하길 바란다. 당연히 좋고 싫음이 발생한다. 만화책을 보는 사람들이 대부분 그림체를 고르면서 보는 이유도 그림에 공감해야만 즐거움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잘 쓴 글은 그렇지 않다. 마음에서 마음으로 바로 그 본질적인 경험이 이전된다. 나는 글의 묘사를 읽으면서 글쓴이의 심정에 공감하면서 그 심정에 상응하는 이상적인 히로인을 맘속에 그리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글을 읽는 사람들은 화자의 주요한 감정에 반응하면서 글의 의도를 느끼면서 글에서 보여주지 않고 제시하지 않는 여백을 자신만의 심상으로 가득 채운다. 반면, 영화나 만화나 드라마 같은 것들은 심상을 전부 제시하고 있어 주인공의 외모가 마음에 안 들고, 고증이 안 맞고, 연기가 엉망이고 등등을 따지면서 보기 때문에 시청자는 오히려 해당 내용을 즐기기 위해서 통과해야할 것들이 많다.

 

, 글로 잘 쓰여진 것은 몰입하기도 다른 매체에 비해서 쉽고, 그 풍부함도 다른 매체에 비해서 더 크다. 물론, 디테일한 사실이나 복잡한 내용을 동시에 보여주는 것이 어렵다는 단점도 있지만 즐긴다는 측면에서는 독서만한 것이 없다. 물론, 독서는 훈련되어야 한다. 그 훈련이라는 것은 책에 몰입할 수 있도록 글을 읽는데 거부감이 없고 상상력을 맘껏 발휘할 준비가 되는 것으로 충분하다. 무슨, 요약하고 축약하고 그런 훈련은 공부의 기술이지 독서의 기술은 아니다.

 

한 번 마약을 맛본 사람들은 끊임없이 마약을 찾게 된다. 마찬가지로 몰입독서의 쾌감을 제대로 맛 본 사람은 다시 똑같은 경험을 하고 싶어 재미있는 책을 열심히 찾게 된다. 내가 그랬다. 이전까지는 그저 심심할 때 무료함을 참지 못하고 읽는 것이 책이었다면 이젠 눈에 불을 켜고 광적인 집착으로 재미있는 책을 찾게 되었다. 이 경험은 정말 중요한데, 이후로 모든 책을 볼 때마다 이 책이 정말 재미있는 보물일지 모른다는 기대심리가 생겼기 때문이다. 그런 기대심리 때문에 책을 볼 때마다 무언가 재미있는 것이 있을 것 같고, 정말 훌륭한 생각이 있을 것 같아 그것을 확인하는 기대심리로 책을 읽게 되었다. 


영웅문은 대단한 작품이고 김용은 신필이라고 불리우는 사람이다. 지금, 돌이켜 생각하면 무협지를 보는 것이 재미있는 것이 아니라 그 책이 '영웅문'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독서 경험이었다. 다음 이야기는 이 영웅문에 대한 이야기로 해보아야겠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