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5 음소, 이음, 음성체계

 

 영어 음성학 공부를 하는 이유는 단지 멋들어져 보이는 발음을 갖고 싶어서가 아니다. 영어의 음성체계를 머릿속에 설치하여 자연스럽게 언어로써 영어를 습득하고 싶어서다. 그렇다면 그 음성체계라는 것은 무엇일까?

 

 세상에는 아마 사람 수만큼 다양한 말소리가 있을 것이다. 어떤 말소리들은 서로 비슷하고 어떤 말소리들은 서로 다르다. 언어는 이 무수한 말소리들을 분류하는데 서로 같은 소리와 다른 소리로 구분하는데 특히 소리에 따라서 의미를 구분할 수 있는지 여부를 중점적으로 따진다.

 

 가령, 우리에게 'ㅍ'과 'ㅂ'은 서로 다른 말소리다. 왜냐하면 '풀''불'로 초성 하나만 다르게 써도 의미가 서로 달라지기 때문이다. 물론, 한국어 원어민인 우리에게 너무 당연해 보이는 이야기다. 하지만 영어에서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영어에서 'ㅍ'은 'ㅂ'과 동일한 말소리다. 물론, 소리가 조금 다르게 난다는 점을 영어 원어민도 안다. 하지만 그것은 사소한 차이에 불과하다. 그냥 'ㅂ'발음할 때 숨소리가 섞여 조금 거칠게 발음된 것'ㅍ'일 뿐이다. 숨소리가 섞이는 이유야 강세에 따라 힘을 주었기 때문일 수도 있고, 말을 시작하면서 숨을 크게 내쉬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어쨌든 영어 원어민은 이 두개의 말소리를 서로 같은 음인 'p'로 생각하고 말한다. 그래서 우리가 '풀''불'의 차이점에 대해서 이야기해도 영어 원어민은 이 두 단어 모두 'pul'로 동일한 단어처럼 생각한다. 또, 같은 이유로 대한민국 여권에 씨는 Park으로 표기 되고 씨는 Paik으로 표기 된다.

 

 음소는 의미를 구분할 수 있다고 여겨지는 말소리의 단위를 말한다. 위의 예에서 우리에게 'ㅍ'과 'ㅂ'은 각각 서로 다른 하나의 음소다. 하지만 영어를 모국어로 하는 사람에게 'ㅍ'과 'ㅂ'은 별개의 음소가 아니라 하나의 음소에 속한 살짝 다르게 변형된 말소리일뿐이다. 이를 이음(異音)이라고 한다. 이음은 동일한 음소에 속하므로 이음들 끼리는 바꿔 사용해도 의미가 달라지지 않는다.  위의 예에서 알 수 있듯이 영어는 'ㅍ'에 해당하는 [] 'ㅂ'에 해당하는 [p]를 모두 /p/의 이음으로 본다. 그리고 음성체계는 수많은 말소리들과 이음이 음소로 분류되어 만들어진 체계를 말한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언어권별로 음소와 이음의 음성체계는 조금씩 다르다. 

(이제부터 음소를 표기할 때는 빗금으로 감싸서 /ㅍ/, /ㅂ/, /p/와 같이 적는다. 그리고 이음은 [], [p]와 같이 대괄호로 감싸서 표기한다.)

 

 그럼 이제 음소와 이음으로 구성된 음성체계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살펴보자.

 

 음소는 우리의 정신 속에서 실제 언어로써 작동하고 있는 말소리를 의미한다. 만일, 우리가 /미닫이/라고 말하려고 할 경우 머릿속으로는 /미닫이/로 말하고 있고 스스로 /미닫이/로 말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구개음화 때문에 [미다지]로 말소리가 나간다. 하지만 받아들이는 사람의 머릿속에는 /미닫이/로 찍힌다. 즉, 듣는 사람은 실제로 [미다지]로 들었어도 머릿속에선 /미닫이/로 자동 전환되어 언어로 이해된다. 즉, 언어에 의한 의사소통은 소리가 머릿속에서 적절한 음소로 전환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다.

 

 


 위의 사례에서는 한국인이 한국어의 이음을 인식하기 쉽지 않아 이해하기 쉽도록 구개음화 현상으로 예를 들었다. 마찬가지로 다양한 이음들도 자신이 속한 음소로 전환되어 머릿속에서 언어로 작동한다. 그런데 이러한 음성체계가 서로 다르면 이음들이 서로 다른 음소로 전환되기 때문에 모국어와 음성체계가 많이 다른 외국어를 배울 때 큰 혼란이 발생하게 된다.

 

 가령, 이음 [l], [r]은 한국어에서는 음소 /ㄹ/에 속하는 이음들이지만 영어에서는 각각 별개의 음소 /l//r/이다. 따라서 영어 원어민은 leaderreader를 구분하여 발음하고 이해하지만 한국어 원어민은 이를 구분하지 못하고 눈치를 보거나 문맥에 따라 추측해야 한다.

 

 또, 영어와 한국어의 음성 시스템이 서로 복잡하게 꼬인 경우도 있다. 한국어의 /ㅂ/[p], [b] 등을 이음으로 가지고 []는 이음으로 가지지 않는다. 반면 영어는 /p/, /b/가 별도의 음소로 구분되고 [] /p/의 이음으로 들어간다. 다음 그림과 같은 경우다.

 

 

 이렇게 소리들을 음소로 전환하는 음성체계가 서로 매우 다르면 또박또박 천천히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각자의 모국어에 따라서 서로 다른 음소로 전환되어 버리기 때문에 적절하게 음성을 주고받을 수 없게 된다. 그래서 의사소통을 원활하게 하려면 우선 음성체계를 맞추어 서로 주파수를 맞추는 과정이 선행되어야 한다.

 

Ankilog 학습파일


학습용 Anki 파일은 아래와 같습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Ankilog 파일: 005 음소, 이음, 음성체계.apkg


수정 : 2019-12-02 오전 2:25 문구를 다듬고 이음의 설명 부분 조금 보충함. Anki 파일의 이음 부분도 수정함

수정 : 2019-12-10 오후 2:30 발음기호 수정 [pʰ]으로 교체 Anki 부분은 수정사항 없음

004 분절음과 자음만 발음하기


 말소리는 자음모음으로 나누어진다. 모음은 “이, 에, 애, 으, 어, 아, 우, 오, …” 등을 말하고 자음은 모음이 아닌, “ㄱ, ㄴ, …” 등을 말한다. 말소리의 최소 단위는 이렇게 자음과 모음으로 나눌 수 있기 때문에 분절음(segment)라고 한다. 그래서 발음의 가장 기초적인 부분부터 차근차근 연습하려면 이 분절된 자음과 모음을 각각 개별적으로 소리 내는 법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런데 한국어는 항상 자음과 모음을 합쳐서 발음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모음은 개별적으로 발음되지만 자음은 반드시 모음과 합쳐서 소리를 내도록 되어있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어를 모국어로 하는 사람들에게 자음만 소리 내보라고 하면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소리내기 방식에 낯설어 하고 힘들어 하는 사람이 반드시 나오게 된다.

 

 이 때문에 영어를 습득함에 있어 상당한 장애를 가져올 수 있다. 가령, "strong"이라는 단어를 한국어 원어민은 "스트롱"이라고 발음한다.

 

한국말 "스트롱" 발음이다. 

 

영어  "strong"이다.

 

 어떤 차이가 느껴지는가 한국말의 "스트롱"은 각 글자가 또박또박 끊어지면서 세 글자가 비슷비슷하게 들린다. 하지만 영어의 "strong"은 소리가 부드럽게 연결되면서 리드미컬하게 들린다. 이는 한국어의 "스트롱"은 3음절로 발음되었고 영어의 "strong"은 1음절로 발음되었기 때문이다.

 

 한국인이라면 대부분 "스트롱"이라고 발음한다. 또, 영어 원어민이 이야기하는 것을 직접 들어도 "스트롱"으로 들린다.

 

 반대로 영어 원어민에게 한국인이 말하는 "스트롱"은 "sɯtɯlong"이라고 들린다. 여기서 “ɯ”는 한국어의 “”에 해당하는 음성기호다. 영어 원어민에게 우리의 "스트롱""strong"이 아닌 “sɯtɯlong”이라는 완전히 다른 단어다. 실제로 구글 번역기에 "스트롱"이라고 쓰면 이에 해당하는 영문 표기는 “seuteulong”으로 나온다.

 

 위에 제시된 소리를 음파의 파형으로 보면 이 차이가 명확하게 드러난다. 아래에는 영어 "strong"과 한국말 "스트롱"을 발음한 파형을 나타낸 그림이다. 각 파형에서 소리가 어떻게 나는지 아래에 해당 글자를 적어 놓았다.

 

한국말 "스트롱"의 말소리 파형

 

 

 

 

 

 

영어 "strong"의 말소리 파형

 

 

 

 

 

 

 말소리 파형을 보면 모음이 올 때마다 진폭이 커지면서 크게 부풀어 오르는 것을 볼 수 있다. 진폭이 클 수록 소리가 커진다. 따라서 실제로 말소리에서 가장 크게 들리고 현저하게 들리는 음이 바로 모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른 자음에 비해서 모음의 소리가 크므로 다른 자음들은 모음에 얹혀지는 모양새다. 그래서 보통 모음으로 진폭이 크게 부풀어 오른 구간을 구분된 음절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영어의 "strong"은 크게 부푼 파형이 하나밖에 없다. 반면, 한국어의 파형은 크게 부푼 파형이 3곳이 있다. 즉, 영어는 1음절인데 한국어는 3음절로 발음한 것이다.

 

또, 한국말 "스트롱"은 중간 중간 모음 ‘으(ɯ)’에 해당하는 음이 끼어들고 있지만 영어는 ‘으(ɯ)’ 없이 자음들이 바로 붙어서 발음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한국어 원어민이 영어의 마디마디에 모음을 넣어서 이렇게 음절을 늘리는 식으로 발음하는 것을 듣는 영어 원어민의 느낌은 아마도 일본어 원어민이 한국어의 “~습니다.”를 “~스므니다.”로 한 음절을 늘려 발음하는 것을 듣는 한국어 원어민의 느낌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자음만 발음하는 것은 개별 자음을 익히기 위해서도 필요하지만 음성/음운론적으로도 음절이나 언어 구조 등 많은 부분과 연결된다. 따라서 처음에 이 부분을 무시하고 넘어가면 한국어 습관에 의하여 혼란이 일어날 수 있다고 판단하여 가장 처음에 이 주제를 꺼내들었다. 앞으로 개별 자음의 연습을 하면서 자음만 소리 내는 법도 같이 익혀보도록 하자.

Ankilog 학습파일


학습용 Anki 파일은 아래와 같습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Ankilog 파일: 004 분절음과 자음만 발음하기.apkg

 내 음성학 공부는 그냥 언어학 교과서에서 음성학 부분을 통째로 외운 것에 불과하다. 그러다 보니 언어에서 사용되는 음성의 특성에 집중되어 있지 어떤 언어를 습득하는데 필요한 모든 부분을 세밀하게 다루고 있지 않다. 따라서 이제 영어를 본격적으로 익히려고 하는 시점에서는 영어 습득을 위한 음성학 과정을 따로 찾아봐야만 했다. 그리고 넘쳐나는 수많은 책들 사이에서 공부할 방향과 커리큘럼을 선택해야만 하는 상황이 되었다.


 찾아보니 학자들이나 교육기관에서 영어 습득을 위한 음성학 공부를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커리큘럼은 상향식과 하향식이 있다. 상향식은 영어의 개별 음성의 발음부터 시작해서 음절, 강세, 억양 등으로 점차 확장시키는 방법이다. 반대로 하향식은 억양으로 유려하게 말을 시작하고 그 다음 개별 음성과 발음을 습득하는 방향으로 학습을 진행시켜 나간다. 그리고 최근에는 하향식 방법이 유행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첫 번째 방식인 상향식 커리큘럼은 전통적인 방식이다. 발음 하나하나를 세세하게 잡아서 연습하고 그것을 조금씩 늘려간다. 그렇게 발음과 음절, 강세, 억양 등을 단계적으로 습득해 나간다. 이 방법은 매우 세세하게 언어를 차분하게 배울 수 있게 해준다. 하지만 지루하고 힘든 과정이다.


 두 번째 방식인 하향식 커리큘럼은 우선 언어와 친숙해지는 것이 목적이다. 우선 말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문화권 내의 친구들과 어떻게든 말할 수 있도록 하고 그럼으로써 일상생활에서 함께 해당 언어를 사용하여 빠르게 익히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상향식과 하향식은 모두 장단점이 있다.


 상향식은 잘 준비되어 있고 검증되어 있다. 게다가 이론적으로도 잘 정비되어 있다. 그래서 이런 훈련을 제대로 받으면 언어에 대한 재능과 상관없이 교육의 성과가 어느 정도 보장된다. 반면, 언어의 이론적 습득이 지루할 수 있고, 실제 언어를 사용하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교육받는 사람이 성실하고 인내심도 많아야 한다.


 하향식은 빠르고 경제적이다. 발음을 습득하긴 어렵지만 억양은 상대적으로 쉽다. 그리고 억양을 따라하고 이해할 수 있으면 어느 정도 의사소통이 된다. 영어와 한국어가 억양 언어이기 때문에 억양으로 의문, 감탄, 조롱, 경멸, 분노 등의 다채로운 감정을 표현할 수 있고, 이러한 감정 위주의 의사소통을 기반으로 언어 특유의 리듬을 익힐 수 있게 된다. 무엇보다 의사소통의 시작에 방점을 둠으로써 단순히 학교나 교육기관에서의 언어 습득에서 벗어나 원어민들과의 의사소통을 서툴게나마 시작할 수 있게 된다. 그러면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자연스럽게 언어를 쓸 일이 많아지고 살아있는 언어를 습득하게 된다. 하지만 일단 언어를 공부하는 사람이 외향적이고 재능이 있다면 빠르게 습득이 가능하지만 내성적이거나 언어의 재능이 약한 사람은 큰 효과를 보기 어렵다. 개인적으로 이 방법은 단기로 체류하는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한국어를 가르치는 사람들로부터 각광을 받기 시작한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상향식과 하향식 방법의 장단점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장단점을 살펴본 결과 Ankilog로 전개할 음성학 공부는 세 가지 이유로 상향식 방식을 선택하기로 결정했다.


 일단, 내 스스로 공부하는 것이기 때문에 나에게 적합한 방식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다. 일단 의사소통을 할 수 있게 하는 하향식 방식은 비사교적이고 다른 사람과 영어로 말할 일이 없는 나 같은 사람에게는 별로 효과가 없다. 게다가 재능이 없는 나 같은 사람은 아무리 많은 영어에 노출되더라도 그저 간단한 말 몇 마디 배우고 그 말로 전부 의사소통하게 될 뿐 보다 나은 스피커가 되지는 못한다. 이 점은 내 모국어인 한국어 실력을 보면 매우 명확해진다. 음성학 공부를 하고 나서야 한국어 발음이 좋아진 나 같은 사람에게 하향식 방법은 효과적으로 작용할 것 같지 않다. 


 두 번째는 한국의 특수한 상황이다. 많은 한국인이 영어를 매우 잘한다. 단지, 말하고 들을 수 없을 뿐이다. 내 개인적인 경험이기 때문에 보편적으로 적용된다고 확신할 수는 없지만 일단 발음을 익히고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면서 기존에 수험용으로 공부한 영어들이 쓸모없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큰 도움이 되고 있다. 기존에 눈으로 손으로 익혀놓은 단어들은 대부분 알아들을 수 있고 쉬운 문장은 자연스럽게 들리게 되었다. 따라서 많은 한국인 성인들은 간단히 발음만 익혀도 자신감이 붙어 급속하게 발전할 가능성이 있다. 이럴 경우 상향식 방식이 가장 효율적인 방식이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상향식 방법이 Anki로 접근하기 쉽다. 영어 음성학 공부는 개별음-음절-강세-억양을 익히는 것인데, 개별음, 음절, 강세는 수월하게 카드화하기 좋다. 하지만 억양을 카드화하기는 조금 어려워 보인다. 게다가 Anki는 지루한 기초 개념 학습을 수월하게 해준다는 점을 고려하면 Anki로 공부할 때는 상향식 방식에 가장 적합하다고 판단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이유로 본 Ankilog는 개별음-음절-강세-억양 순으로 기초개념부터 차근차근히 상향식으로 학습해나가려고 한다.  Anki의 강점이 지루하고 재미없는 과정을 꾸준히 묵묵히 외우면서 나아갈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Anki로는 지루한 개념 학습과 훈련의 과정을 짜투리 시간에, 이동 중에, 화장실에서, 틈틈이 소화하도록 한다. 그리고 그 외로 영어 사용자 친구를 사귀거나 미드나 영화를 보면 된다. 그러면 어느 새 영어 실력이 크게 발전할 것으로 기대한다.

 자연에는 무수히 많은 소리가 있지만 사람에겐 특별한 소리들이 있다. 그것은 말소리다. 왜 말소리는 특별한가? 말소리는 우리 머릿속에서 의미 작용을 일으키기 때문에 특별하다. 그리고 그 의미작용이 우리 정신의 핵심 중 하나이다. 


 말소리가 너무 특수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어떤 소리가 말소리처럼 들리면 그 말소리에 몰입한다. 예전에 자주 돌아다니던 괴담처럼 테이프를 거꾸로 돌렸을 때, 누군가의 메시지가 들린다고 말한 것처럼 사람들은 어디서든 말소리 비슷한 것이 들리면 소리의 세세한 내용은 사라지고 그 말소리의 내용에 집중하게 된다. 그 때부터 소리는 그저 말소리의 의미를 도와주는 장식 정도의 역할을 한다. 이것은 어디서든 의미를 찾으려는 사람의 본능이다. 그리고 말소리는 의미의 직접적 현현이다.


 말소리는 다른 소리와 매우 다르다. 자연의 소리는 감상이나 분석의 대상 등 외부의 대상일 뿐이다. 하지만 언어로 조직된 말소리는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리의 머릿속에 들어와 직접적으로 다양한 반응을 일으킨다. “사랑”이라는 말을 들으면 다양한 사랑이 떠오르고 사랑했던 사람과 자신이 하려는 사랑 등이 무수히 떠오른다. 욕설을 들으면 분노, 원망, 복수, 맞받아칠 욕 등이 떠오른다. 모든 것은 자동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에 욕설을 듣고 안들은 것으로 할 수 없다. 단지 피어오르는 분노와 온갖 상상들을 참거나 다른 방식으로 전환할 뿐이다. 좋은 말을 들으면 절로 마음이 좋아진다. 겉으로 너무 좋아하는 태를 나타내지 않기 위해서 얼굴 표정을 엄숙하게 지어야 한다. 그래서 언어는 단지 소리가 아니다. 소리의 형태로 전달될 뿐, 우리의 정신을 직접적으로 조작하는 일련의 코드다.


 그런데 수십 년간 영어를 언어로 공부하고 사용했지만 그것이 언어로 작동하지 않는다. 언어는 머릿속으로 바로 다이렉트로 꽂혀 작용을 일으켜야 하는데, 아쉽게도 영어는 그저 일련의 암호해독으로 사용된다. 단어를 찾고 이 단어의 한국어식 의미를 도출하고 단어들을 연결해서 가장 그럴 법한 해석을 찾는다. 그리고 그 해석이 완벽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에 한껏 위축된다. 한국어로 된 어려운 책을 읽을 때는 “뭐 이렇게 어렵게 썼어!”라고 책을 던지겠지만 영어로 된 쉬운 책을 읽어도 그저 해석이 올바른지 여부에 전전긍긍할 뿐이다. 


 왜 이런 차이가 나는지 궁금했고 이리저리 부딪히다 보니 어렴풋하게 입이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 이후는 입으로 하는 말의 주체가 입이라는 점을 검증하기 위한 과정이었다. Anki로 많은 한국어 문장들을 외웠고 이로 인하여 문체와 문장, 글쓰기의 디테일한 과정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덕분에 40년 만에 문장 맛을 보게 되었다. English-Restart를 입으로 따라하면서 영어가 편해지는 느낌을 받았고, 수십 번 본 미드나마 처음으로 자막 없이 볼 수 있게 해주었다. 자막 없이 본 미드는 그 공감과 감동의 깊이가 달랐다. 마지막으로 음성학 공부와 IPA 발음 연습을 통하여 그 동안 안 들리던 영어가 부드럽게 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로 인하여 처음으로 영어가 언어로써 직접적으로 머릿속에 꽂히는 느낌을 받았다.


 본격적으로 입을 이용하여 공부하고 연습하면서 평생 없었던 것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모두 언어와 관련된 심화된 부분이었다. 이공계에게 없었던 글과 문장에 대한 감수성, 외국어 등이다. 정신적으로 없었던 것들이 생겨난다면 없었던 새로운 신경이 배선된 것이라고 봐야하지 않을까? 하고 이공계는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입을 움직여 얻어지는 것들을 보면서 입의 운동을 통한 신경배선이 언어의 기초를 이루고 있다는 개인적인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물론, 입의 운동이 언어의 모든 것을 담당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단지, 입으로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이라면 뇌의 언어 중추는 당연히 입과 연결되어 있고, 입에서 생긴 신호를 다이렉트로 반영할 것이라고 추측할 뿐이다. 그리고 이제껏 겪어온 바는 이 가설이 완전히 틀린 가설은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런 관점 위에서 음성학은 마지막 화룡점정을 찍었다. 음성학은 소리의 알파벳이 있다는 점을 가리켜주었다. 마치 글자처럼 우리 머릿속에 들려오는 말소리를 자동으로 분류하고 조합하여 의미를 만들어내는 가장 기본적인 음성 알파벳이 머릿속에 있는 것이다. 자연에서 들려오는 소리들 중에서 이 소리의 알파벳이 언어적인 규칙에 따라 조합되면 말소리가 된다. 그리고 그 말소리는 단순한 소리가 아닌 머릿속에 직접적으로 작용하는 코드가 된다. 이 코드를 음성체계라고 부른다. 


 음성체계는 완결되어 닫혀 있다. 음성이 완결된 체계라는 말은 이렇게 생각하면 된다. 한국어를 사용하는 일반적인 한국인에게 어떤 소리를 들려주고 말로 옮기라고 하면 한국어로 옮기게 된다. 칠판을 긁는 소름끼치는 소리를 묘사하라고 하면 ‘끼~잉’ 이나 ‘ㄲ~ㄲ’같은 소리로 어떻게든 유사하게 소리를 내려고 하지만 그 소리 자체가 아니라 한국어로 변형된 소리를 낸다. 그 소리와 얼마나 유사하든 간에 그저 한국어 발음의 변형에 불과하다. 세상에는 무한하게 많은 소리가 다채롭게 있지만 한국인은 그런 모든 소리를 한국어의 음성체계로만 인식한다. 그리고 그 음성체계 밖의 소리는 인지하기 힘들다. 소리 그 자체야 들을 수 있고 감상할 수 있고 소리가 서로 다르다는 것을 느끼지만 결국, 언어로 나타낼 때는 한국어 소리로 나타내기 때문이다. 그 한국어 소리가 한국인의 머릿속에서 언어로써 활동할 수 있는 유일한 소리다.


 그런데 이렇게 완결된 음성체계가 각 언어권별로 다르다. 비슷한 곳도 있지만 매우 다른 곳도 존재한다. 특히, 한국어와 영어는 음성체계가 매우 달라서 서로의 언어를 듣고 이해하기 매우 어렵다. 따라서 한국인이 영어를 익히려면 한국어의 닫혀 있는 음성체계를 열고 새로운 음성체계를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그 음성체계가 장착되면 그제서야 마치 컴퓨터에 해당 언어팩이 설치되듯 의사소통이 가능해질 것이다. 단어와 문장은 그때부터 찾아도 늦지 않는다.


 그럼 이 음성체계를 어떻게 하면 받아들일 수 있을까? 아마도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재능이 있는 이라면 그저 듣기만 해도 받아들일 수 있겠지만 재능이 없다면 하나한 분석하고 따져가면서 공부하고 하나하나 훈련해야 한다. 그리고 내가 그 재능 없는 사람이다. 


 내 자신이 재능이 없기 때문에, 앞으로 전개할 Ankilog는 음성학 이론도 자세히 공부하고 동시에 발음도 충분히 많이 그리고 자세히 연습하려고 한다. 아마도 Ankilog가 빨리 나오지는 못할 것 같다. 한 번 공부했지만 그래도 저자들마다 의견이 달라서 이러한 내용들을 소화하고 그에 맞는 훈련과제를 만들어 Anki로 배포하는 과정이 녹록하게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도 정말 오래된 과제를 깔끔하게 날려버릴 절호의 기회가 왔다는 생각에 최선을 다해보려고 한다. 

 앞서 음성학을 통해서 발음을 공부하고 이를 통하여 간단하게 성과를 본 바를 이야기했다. 처음 음성학을 공부하고 발음을 연습할 때만 해도 큰 기대는 없었다. 그저 발음을 교정하고 IPA를 읽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수준이었다. 내용이 너무 어려웠지만 Anki는 그런 점에서 강점이 있다. 조금씩 조금씩 진도를 나가도 충분히 숙련되고 전에 공부했던 내용을 까먹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게 쌓이고 쌓여서 어찌 공부를 했다. 


 원래의 조급한 성격이라면 공부를 하면서 바로바로 블로그에 올렸겠지만 이 경우에 확신이 없었다. 발음과 언어가 어떤 상관이 있을까? 하는 의문 말이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매우 큰 효과가 있을 것 같았다. Anki를 통해서 다른 공부를 할 때, 입으로 하는 말이 지식에 얼마나 큰 효과가 있는지 매번 느꼈기 때문이다. 입으로 문장을 곱씹을 때마다 그 지식을 직접 체험하는 것 같고 의미를 재발견하니 입이 내 정신에 미치는 영향이 대단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조들이 그렇게 소리내어 낭독하는 공부를 중요시 여겼나 싶었다. 또, 입으로 하는 말은 입으로 하는 행위므로 당연히 말하고 발음하는 연습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춤을 잘 추고 싶으면 몸을 움직여 춤을 춰야 하고 그림을 그리고 싶으면 손을 써서 그림을 연습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언어를 익히고 싶다면 입을 열심히 써서 언어를 익혀야 한다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나를 포함하여 발음이 형편없는 사람들이 많은데 한국어를 못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발음이 안 좋아도 한국어를 익혔고 생활하는데 전혀 지장이 없다. 그런데 굳이 발음을 연습해야 하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결국, 스스로 실행해 보면서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당연하지만 생소한 분야에 생소한 연습 과정 때문에 언어학자들의 글처럼 매우 지루하고 힘든 공부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각오했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너무 모르고 살던 분야라서 그럴까? 얻는 바가 굉장히 많았다. 


 우선, 한국어 발음이 좋아졌다. 어린 시절 치아 교정 때문인지 발음이 좋지 않았다. 게다가 자주 쓰는 발음인 ""를 ""로 발음했다. 발음 연습을 위해서 혀를 놀리고 입술을 오므리는 등 입 운동을 하면서 각종 음성기호를 발음해본다. 그리고 그 발음이 내 한국어 발음과 어떻게 다른지 확인하는 과정이 반복되면서 발전하라는 영어 발음이 아니라 우선 내 자신의 한국어 발음이 개선되었다. 안 좋은 습관을 많이 고칠 수 있었고 좀 더 또박또박 이야기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런 과정 끝에서는 ""를 ""로 발음할 수 있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발음이 교정된 것이다.


 그 다음은 어린 시절의 궁금증을 풀게 되었다. 어린 시절에 국어 교과서에 있는 표현 중에 이런 것이 있다. 


 “가 골기퍼야!”

 “가 골기퍼야!”


 “”와 “”가 서로 다른 두 문장이다. 그런데 글로 써놓으면 의미를 파악할 수 있지만 말로는 전혀 구별이 되지 않았다. 어린 시절에는 이게 항상 궁금했다. 누군가 “가”라고 말하면 그것이 “가”라고 말한 것인지 “가”라고 말한 것인지 항상 궁금했고 문맥과 행동에 따라서 의미를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내 자신도 이를 구별해서 말할 수 없었기에 결국 “가”라는 말은 피하고 “가”로 바꿔서 말했다.


 그런데 한국인의 음성 습관을 연구한 결과에서 보니 나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많은 사람들이 “”와 “”를 구별하지 못하고 또 이를 구별해서 발음할 수도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정확히는 한국에서 “”와 “”가 서로 융합되어 “”가 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더 이상 “가”를 알아듣지 못하니 “가”라고 말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실제 발음은 이렇게 되었다. 사람들이 “가”라고 말할 때는 실제 발음은 “가”다. 그리고 기존의 “가”는 보통 “가”로 바꿔서 말하게 되었다. “” 발음이 없어진 것이다. 이렇게 어린 시절 묵혀두었던 오랜 궁금증이 해결되었고 나아가서 이제는 어색하게나마 “가”라고 발음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외에도 일본어의 특이성을 배워 일본인의 발음이 왜 그런지도 알게 되었고 한글의 우수성도 새삼 절감하게 되었지만 역시 가장 중요한 것은 들리지 않던 영어가 자연스럽게 들린다는 사실이었을 것이다. 사실, 그냥 들리는 것이 아니다. 소리가 선명하게 구분되어 말을 알아듣는 느낌이 아니다. 그보다는 상대가 입술과 혀를 이렇게 써서 소리를 낸다는 것을 아는 느낌에 가깝다. 즉, 상대의 소리 내는 방식을 나도 어느새 비슷하게 따라하고 아 이 소리구나 하고 알게 되는 느낌에 가까웠다. 


 그리고 이렇게 상대의 말을 입으로 따라할 수 있다는 점은 더 깊은 공감을 끌어낸다. 조금 세게 다문 입술, 강렬한 강세와 미묘한 강세, 절도 있게 움직이는 혀와 흐느적거리면서 움직여 발음을 뭉개는 혀 등은 매우 미묘한 느낌을 전달해준다. 이런 발화의 경험은 매우 기본적인 감정 상태를 공유하게 해준다. 그런 소리를 낼 때의 심리 상태가 그 소리를 따라하는 내 자신에게서도 일어나기 때문이다. 미묘한 부분을 바로 느낄 수 있다는 점은 의사소통을 하고 있다는 확신으로 이어졌다. 영어를 들으면 아는 단어일 경우 바로 소통한다는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상대의 말소리가 내 자신의 발화 경험을 일으키기 시작하고 나서야 이제야 영어를 언어로 받아들이는 느낌이다. 이제 영어를 들어도 크게 거부감이 들지 않는다. 여전히 못 알아듣지만 예전만큼 막막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냥 단어를 알면 바로 알아듣겠구나 하는 것들이 점차 많아졌다. 이 길이 제대로된 길인 것 같다.


 이제껏 진행한 음성학 공부는 일반 언어학의 관점에서 전개된 음성학이어서 간략하고 추상적이다. 영미권에서 시작된 학문이라서 영어를 많이 사례로 올리고 있지만 그래도 영어를 익히기 위하여 필요한 사항들을 전개하는 음성학은 아닌 것이다. 하지만 발음을 시작으로 입말을 구축하고 이어서 문법으로 다듬는 공부 방식이 매우 효과적이고 빠른 길이라는 점을 어느 정도 확신하게 되었기에 이제는 제대로 영어 공부를 해보려고 한다. 다양한 예제와 사례, 숙달을 위한 훈련 과제 등을 활용하여 지금까지의 맛보기식 간단한 연습이 아니라 숙련된 영어 사용을 위한 훈련을 해보려고 한다. 다음부턴 Ankilog로 올릴 수 있도록 하겠다. 



 음성학 공부는 별 기대 없이 시작했다. 국제음성기호(IPA)를 읽어보겠다는 의도로 책을 펼쳐보았을 뿐이었다. 그런데 너무 전문적이고 어려워서 Anki로 외웠다. 그리고 일단, 외우기 시작하면 상황이 달라진다. 기존에 외운 것에 대한 이해 때문에 그 다음 공부가 쉬워지고, 투자한 시간과 정신력이 아까워서 그 다음 단계로 나아가게 된다. 그래서 시작한 김에 끝까지 공부하게 되었다. 물론, 전문적인 수준이 아니라 개론적인 수준에 불과하다.


 외국의 발음을 연습할 때 부딪치는 문제는 그 발음을 들을 수 없다는 점이다. 소리로는 듣는다. 하지만 언어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유튜브에서 한국어를 공부하는 외국인들 영상을 찾아보면 좋은 예시들을 보여준다. 우리가 ‘공’하고 발음하면 영어 원어민은 ‘콩’하고 따라한다. 그 차이를 잘 인지하지 못한다. 우리가 다른 언어를 배울 때도 똑같은 문제가 발생한다. 그들에게 당연한 소리의 차이를 우리는 전혀 느끼지 못한다. 따라서 아무리 소리를 따라하려고 해도 잘 되지 않는다. 영어로 ‘they’를 발음하면 우리는 ‘데이’로 이해한다. 그래서 우리가 ‘데이’라고 발하면 영어 원어민은 ‘tey'로 듣고 우리의 발음을 이상하게 생각한다. 이렇게 서로 소리체계가 다르면 서로 소리를 이해할 수 없게 된다. 이를 모국어 함정이라고 한다. 상대의 소리를 나의 소리체계로 번역하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다.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저 원어민의 발음을 듣고 따라하기를 반복하면 나아진다고 생각할까? 일부 발전하는 사람도 분명히 있다. 하지만 나처럼 소리에 둔감하고 원래 발음까지 어눌한 사람은 듣고 따라하기로는 전혀 발전이 없다. 오히려 모국어 함정에 빠져서 왜곡된 발음이 그대로 굳어버리게 된다. 모국어가 없다면 아기처럼 해당 언어를 빠르게 배울 수 있다. 하지만 모국어가 이미 정착되었다면 어렵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모국어 함정을 피해서 듣지 못하는 것을 듣고 내지 못하는 소리를 낼 수 있을까? 


 음성학은 말소리를 설명할 때, 우리가 소리를 낼 때 사용하는 혀나 입술 등의 기관의 움직임으로 설명한다. 성대를 떠는가? 혀의 위치는 어디인가? 입술은 어떤 모양을 하는가? 코로 공기가 흘러가는가? 파열인가 마찰인가? 숨소리가 많은가? 등으로 소리를 묘사한다. 그리고 음성 연습은 전부 혀와 입술 그리고 성대 등을 움직이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이렇게 연습을 하면 일단 소리를 낼 수 있다.


 연습을 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처음엔 they의 /ðeɪ/ 발음을 들으면 우리말의 /데이/로 들었다. 지금은 /ðeɪ/로 들린다. 어떻게 들리는 걸까? 처음에는 이렇게 저렇게 발음하라는 말을 따라 해도 잘 들리지 않는다. /ð/를 발음할 때, 혀를 윗니에 살짝 대고 소리를 내보내라고 해도 그냥 /ㄷ/이랑 비슷하게 들린다. 하지만 /ð/와 함께 /d/와 /t/의 발음을 같이 연습하다 보면 조금씩 차이가 몸에 새겨진다. 세 음이 모두 성대 입과 혀가 다르게 움직이기 때문에 그 움직임의 차이에 따라서 어떻게 음이 달라지는지 구분되기 시작한다. 이렇게 서로서로의 음이 구별되기 시작하면 그제서야 비로소 음이 들려온다. /ðeɪ/가 /데이/로 들리지 않고 /ðeɪ/ 그 자체로 들리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 때, 개별 음의 연습만으로는 되지 않는다. 다른 음과 비교를 통해서 그 음의 차이를 인지해야 소리가 명확해진다. 


 개인적인 가설은 이렇다. 우리가 발성기관을 다르게 써서 다른 소리를 내는 연습을 한다.  그런데 귀에는 똑같아 보이는 소리가 들린다. 그러면 뇌는 현재 발성기관의 움직임과 소리를 동시에 비교하게 된다. /ð/, /d/, /t/를 각자의 발성 방식에 따라서 발음한다. 그러면 처음엔 우리 귀에는 /ㄷ/으로 들린다. 하지만 각각의 발성방식은 다르다. 따라서 이 소리를 듣는 뇌의 입장에서는 발성 방식이 다르기 때문에 그 차이에 따라서 소리를 구별하려든다. 성대가 진동되는지 여부에 따른 차이나 숨소리를 섞었을 때의 차이 등을 면밀하게 구별하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구분된 소리에 대한 신경 배선이 이루어지면 그 때부터는 /ð/, /d/, /t/, /ㄷ/를 구별하여 듣고 발음할 수 있게 된다. 즉, 서로의 소리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 구별함으로써 음성이 체계화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구분되면서 비로소 상대의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된다. 


 이제 영어 듣기가 상당히 편해졌다. 내 발음이 좋은지는 모르겠지만 영어를 들을 때 생기는 이질감이 상당부분 사라졌다. 이제 음성 기호가 어느 정도 머릿속에 장착이 되어서 해당 소리를 그대로 머릿속으로 옮겨주는 느낌이다. 이렇게 장착이 되고 나니 예전에 얼마나 힘들게 들었는지 알게 되었다. 영어 단어를 들을 때, 정확한 소리를 듣지 못하니 영어를 한글로 전환해서 문맥에 따라 비교하고 그에 맞는 단어를 찾아 영어로 다시 쓰는 과정이 머릿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머리가 핑핑 도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이러니 영어 듣기가 그리 힘들었고 미드를 보다가 모르는 단어 하나가 나오면 그대로 멘붕에 빠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 정확한 음성 기호가 어느 정도 장착 되니 자연스럽게 말소리를 듣는 게 조금씩 가능해졌다. 영어가 자연스럽게 들리는 경험은 꽤나 신세계였다.



 국제음성기호(IPA)는 이상한 도표와 기호들로 범벅되어 읽기조차 어려웠다. 위키류를 검색해보아도 어렵긴 매한가지였다. 한글로 적힌 전문용어라고 쉽진 않았다. 첫 느낌은 난데없이 양자역학 수식을 푸는 정도의 난이도였다. 잠시 모든 생각을 내려놓고 심각하게 고민했다. 정말 이런 공부가 필요할까?


 수십 년간 쌓여온 영어가 필요하다는 결핍감, 영어에 대해서 감을 잡았을지도 모른다는 애매모호한 기대감, 어차피 할 일은 없고 영어가 필요하다는 현실적인 사정 등이 없었다면 그 자리에서 포기했을 것이다. 하지만 영어가 너무 필요했기에 마음을 다잡고 자료 찾기에 몰두했다. 그리고 그렇게 언어학을 접하게 되었다. 


 엄밀하게 말하면 언어학이 아니라 언어학 중 음성학 파트였다. 일단, 언어학 개론서를 하나 집어서 음성학 부분만 읽어보기 시작했다. 여기서 읽었다는 것은 외웠다는 뜻이다. 언어학의 난이도는 너무 매우 지나치게 높아서 아무리 읽으려고 해도 읽히지 않는 수준이다. 전문용어도 어렵지만 언어현상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외국어의 언어 현상은 아무리 읽어도 이해하기 어렵고 와 닿지 않는다. 반면, 우리말의 언어 현상을 글로 읽고 이해하려는 것도 힘들었다. 입에서 잘 튀어나오는 말을 구태여 분석까지 하고 싶진 않다는 마음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언어학 관련 책을 읽고 있으면 자꾸 튕겨 나간다. 집중력이 유지되지 않고 그만 읽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아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Anki에 넣어서 싹 외워버렸다. 보통은 이해를 하고 외우는 경우가 많지만 이처럼 인연 맺기 힘든 학문은 부득이한 경우 외워서 이해하는 방법을 선택하는 편이 오히려 빠르다. 


 그렇게 하나를 외워서 기초를 닦았지만 뭔가 미진했다. 그래서 다른 책을 외웠는데, 앞서 외운 책과 내용이 다르다. 그 다음 책도 앞의 두 책과 내용이 서로 달랐다. 대혼란이었다. 상당 시간 동안 혼란에 빠졌고 이 혼란을 극복하기 위해서 여러 책들을 봐야만 했다. 덕분에 음성학 공부를 어렵게 하는 몇 가지 난관을 알게 되었다.


 우선, 유럽과 미국의 관계가 문제가 된다. 국제음성기호(IPA)는 유럽에서 영어의 소리를 표시하기 위해 시작되었다. 하지만 미국의 학자들은 국제음성기호를 무시하고 자신들이 사용하는 음성기호를 따로 만들었다. 이를 미국음성기호(APA : American phonetic Alphabet)라고 한다. 국제음성기호와 미국음성기호의 모양이 다르기 때문에 처음 음성학을 펼쳐 든 사람들은 서로 다른 기호에 혼란스럽지 않을 수 없다. 현재는 국제음성기호가 대세로 사용되는 것 같지만 여전히 많은 미국음성기호가 사용되고 그 외에 국내 사전의 발음기호 같은 다른 기호들도 같이 사용되고 있어서 초학자들은 혼란을 피하기 어렵다.


 또 다른 문제는 음성기호의 한계다. 음성기호는 모든 소리를 표시할 수 없다. 한국 사람들이 동일한 언어를 써도 말소리가 미묘하게 다른 것처럼 무한에 가까운 다양한 음성을 기호 몇 개로 표시할 수 있을 리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음성기호는 입술과 혀의 위치, 성대를 울리는지 여부, 얼마나 길게 소리를 내는지, 소리를 내는 방식 등으로 말소리를 정의한다. 


 가령 영어의 /t/에 해당하는 음은 혀끝을 윗잇몸에 대고 성대를 진동시키지 않는 상태에서 소리를 파열시키는 소리다. 이렇게 하면 사람들마다 /t/ 음이 조금씩 다르지만 서로 알아듣는데 전혀 문제가 없게 된다. 그런데 한국 사람들에게 이런 발음을 하라고 하면 /t/가 아닌 /ㅌ/이 된다. 분명히 소리도 비슷하고 서로 알아듣는데 문제가 없지만 한국인은 /t/ 발음을 외국인의 버터 발음으로 느끼고 외국인은 한국인의 /ㅌ/을 한국 특유의 영어 발음이라고 생각한다. 즉, 서로 이질적으로 느낀다. 왜 그럴까? 이는 한국의 /ㅌ/ 음은 윗잇몸에서 이빨에 가까운 아래쪽에 혀를 대고, 영어의 /t/ 음은 그보다 조금 위에 혀를 대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어의 /t/ 소리는 좀 더 혀를 굴리는 소리가 되고 한국어의 /ㅌ/은 좀 더 혀를 곧게 뻗는 소리가 된다.


 영미권에서 번역된 음성학 책들은 주로 자신들의 영어 음성을 위주로 기술되기 때문에 이런 미묘한 차이를 발견하지 않는다. 오직 한국어를 베이스로 영어를 익힐 때의 발성 차이를 연구한 경우에만 이런 미묘한 차이를 찾아낸다. 이런 문제로 인하여 영어권에서 소개한 음성학 관련 책들이나 이를 참고한 책을 읽으면 오히려 굉장히 한국적인 발음을 익히게 된다. 다른 언어를 모국어에 가깝게 이해하려는 모국어 함정으로 인하여 영어의 발음을 한국어 발음으로 이해해버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확한 발음을 익히려면 한국어의 발음 방식과 영어의 발음 방식의 차이를 분명하게 구별해주는 책을 찾아야 한다.


 그 외에도 범람하고 있는 음성과 발음 관련 교재들이 너무 많다. 영국식 영어, 미국식 영어로 나뉘어서 발음을 가르치기도 하고 최근에는 변형 훈민정음을 이용한 발음연습까지 나와서 무얼 읽고 따라야 할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내 경우는 이것저것 참고하다가 이화여자대학교 오은진 교수의 『외국어 음성 체계』라는 책의 1장을 중심 텍스트로 삼았다. 이는 다른 이야기를 하는 국내 국어학자가 쓴 음성학 책과 미국의 언어학자가 쓴 음성학 책 등에서 음성학 파트를 전부 외우고 비교해서 선택한 것이다. 책들이 전개하는 서로 조금씩 다른 이론을 판단할 방법이 없었기에 유튜브 등에서 실제 발음하는 시청각 자료들을 보고, 내 스스로 서로 다른 책들의 방식에 따라 발음 연습을 하면서 비교하여 판단했다. 그 결과  『외국어 음성 체계』 1장의 내용이 내 발음이 왜 이모양이고, 저 외국인은 왜 제대로 발음하지 못하는지를 매우 명쾌하게 보여주었기 때문에 이 책을 영어 음성학 공부의 기준으로 선택했다.


 혹시나 해서 덧붙이면  『외국어 음성 체계』라는 책은 음성학 관련 다른 연구를 하는 책이다. 발음을 친절하게 알려주는 책이 전혀 아니다. 게다가 매우 재미없다. 이 책의 1장은 기존의 음성학에 관련된 논의들을 축약하고 있는데, 그 내용은 정말 좋지만 정말 재미없고 읽기 힘들다. 짧은 경험상 언어학자가 쓴 글에서 재미있는 글은 없었던 것 같다. 어쩌면 언어학자들은 글을 재미있게 쓸 수 없다는 보편원칙을 설정해도 좋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언어학자들은 글을 재미없게 쓰는 것 같다. 그런 언어학 관련 책들 중에서도 손에 꼽힐 정도로 『외국어 음성 체계』는 재미없다. 거의 실험보고서에 가깝고, 1장도 정말 축약에 축약을 거듭한 내용이라서 전혀 친절하지 않다. 그런데 무슨 인연인지 도서관에 갈 때마다 눈에 띄여서 읽어보고 덮기를 수십번은 반복하게 되었다. 결국, 읽기를 포기하고 Anki에 집어넣어 외워버렸다. 외울 때는 주로 중요한 문장 위주로 정리해서 외우는데 어찌나 축약을 잘 하셨는지 거의 토씨하나 빼지 않고 다 외워야 했다. 비록, 이 책과 인연이 닿아서 1장만 외우게 되었고 이로 인하여 이 책의 1장을 음성학 교재로 추천하고 있지만 읽기가 녹록치 않다는 점을 다시 말한다. 



 영어 발음을 어떻게 익혀야 할까? 라고 인터넷에 질문하면 IPA가 나타난다. IPA는 국제음성기호(International Phonetic Alphabet)인데 소리를 표시하기 위한 알파벳이라고 할 수 있다. 영어 단어를 사전에서 찾으면 붙어있는 발음기호 같은 것이다. 그런데 이 IPA가 처음 생긴 이유가 재미있다. 영어를 글로 옮겼을 때의 알파벳과 발음이 크게 달라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음성 기호를 만든 것이 시작이다.


 영어의 역사에서 이 문제는 매번 지적된다. 영어 사용자가 여러 지역에서 급격하게 늘어나면서 언어가 변형되기 시작했다. 방언이 발달했고, 외래어들이 그대로 영어 단어로 유입되어 변천되면서 철자는 그대로 남고 발음이 변형되거나 발음은 남고 철자가 변형된다. 단어의 철자와 발음을 통합하고 정리하려는 노력이 중간 중간 있었지만 대세에는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했고 오히려 또 다른 변형된 철자와 발음을 만들어내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했다. 그래서 일부 언어학자들은 영어가 표의문자화 되었다고 생각한다. 알파벳을 말소리 그대로 읽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이기 때문에 영어권 사람들이 영어권 사람들을 위하여 출판한 문법책들을 보면 철자(spell)를 쓰는 것에 대한 이야기가 반드시 나온다. 하물며 오랫동안 출판 교정을 담당하는 사람들의 수기를 읽어봐도 철자를 제대로 쓰지 못하고 틀린 이야기들이 심심찮게 나온다. 그래서 영어 사용자들도 자신들의 언어가 너무 복잡하고 이상하다고 말한다. 


 중고등학교 때가 생각난다. 영어 단어는 철자(spell)만 보고 발음할 수 없어서 발음 기호를 따로 봐야 했다. 쓰는 법과 읽는 법이 달랐다. 어쩌면 그냥 외우면 될 일이지만 당시의 나는 이 불일치가 너무 불편하고 짜증났다. 이건 나만 그런 것은 아닌 것 같다. 친구들 중에는 영어 읽는 법을 자기 식으로 바꿔서 읽는 친구도 있었다. 어차피 시험에는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그 친구는 좋은 성적으로 승승장구하다가 영어 듣기 시험이 중요하게 대두되면서 영어 공부를 손 놓게 되었다.


 그런데 이런 발음과 알파벳의 불일치 때문에 영어권 사람들은 글을 쓸 일이 없다면 입말 위주로 편한 단어를 써서 의사소통을 한다. 철자는 따로 공부해야 하니까, 역시 쓰기 편한 단어들 위주로 쓴다. 이들이 철자를 공부할 필요를 느끼는 경우는 그야말로 제대로 글을 쓰거나 연설을 하려고 할 때이다. 이런 상황이기 때문에 영어권의 문맹률도 상당히 높게 나온다. 그런데 우리는 정반대다. 영어 발음은 입으로 한두 번 굴려보지만 그것보다는 철자가 더 중요하다. 그래서 조금 영어공부 했다고 하는 이들은 철자를 틀리는 경우는 거의 없다. 영어권 사람들은 입말을 위주로 익히고 한국인들은 글 위주로 익히는 것이다. 간혹 유튜브를 볼 때, 영어권 사람들이 한국 수능 문제를 풀면서 어려워하는 경우가 발생하는 이유도 자신들이 쓰는 영어에서 잘 안 쓰는 단어들 위주로 나오기 때문이다. 그들 입장에서는 난이도를 높이기 위하여 난해한 글 위주로 익히는 한국의 교육 문화가 이상할 것이다. 언어 그 자체가 아니라 시험 성적을 위한 언어 공부라는 변종이기 때문이다.


 영어의 발음과 철자의 불일치는 나 같이 이런 사소한 불일치를 거슬려 하는 사람에겐 큰 장애였다. 분명히, 표음문자라고 들었는데 왜 소리와 철자가 일관되지 않을까? 한글처럼 비슷해야 하지 않은가? 등으로 생각하면서 궁금해 했다. 그리고 매번 영어공부를 할 때마다 발음과 철자 사이에 내재된 원리를 찾기에 바빠 정작 영어 공부는 등한시했다. 이해할 수 없고 해결할 수 없는 수수께끼 때문에 영어를 아무리 공부해도 근본적으로 이것은 이해할 수 없는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단지, 시험을 위해서 숙련시켰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공부하고 20년 가까이 지나서 그 때의 의문을 풀게 되었다. 원어민들도 영어를 쓰면서 이런 불편함을 겪고 있고 철자를 발음하는 무슨 규칙이 있지 않고 그저, 복잡하게 섞여버린 잡탕이라는 점을 깨달아서 불편함이 사라진 것이다. 


 IPA와 관련된 영어 역사를 살펴보면서 영어 훈련의 방향 하나를 깨닫게 되었다. 그건 우선 이해하기 어려운 철자(spell)를 제거하고 모든 단어를 음성기호로 바꿔서 훈련하면 철저히 입으로 하는 영어를 구축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아이디어였다. 생각해보면 매번 글로 쓰여진 영어 위주로 학습을 하기 때문에 발음을 제쳐두고 눈으로 알파벳 영단어를 보게 된다. 발음이 같아도 글자가 다르니 그냥 별 생각 없이 단어를 구별한다. 리듬과 액센트도 고려할 필요가 없다. 의미단위로 분절되어 있는 단어를 하나하나 분석하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 말소리는 이어져 있고 변형된다. 이를 전부 음성기호로 표시하면 의미단위가 아니라 소리단위로 영어를 볼 수 있을 것이고 이에 익숙해질 수 있다. 게다가 이럴 경우 원어민들조차 질색하는 철자에서 오는 혼란을 겪을 이유가 없게 되기 때문에 학습 효율도 높아지게 된다. 


 일단, 괜찮은 생각으로 보였다. 어떤 언어든지 입말이 언어의 주를 이루고 글은 입말을 다듬고 형식화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치상 입말 위주로 공부하는 방식이 옳고 제대로 가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이미 문법과 철자에 능숙한 사람이라면 입말만 트여도 기존의 수험식 영어 공부를 통해 머리로만 알던 지식들도 입으로 능숙하게 옮길 수 있게 될 것으로 기대되었다. 이 아이디어는 나를 고무시켰다. 어쩌면 무척 재미있는 결과를 이끌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몸을 달아오르게 했다. 


 아이디어에 고양되어 IPA의 도표를 들여다보았다. 하지만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기괴한 전문용어의 향연과 이해할 수 없는 도표 그리고 이상한 기호들이었다. 이해해보려고 끙끙대면서 읽어보지만 이해할 수 없다는 점만 확신하게 만들어주는 도표였다. 막다른 골목이었다.






 영어는 머리로 학습하는 것이 아니라 입과 귀로 훈련해야할 기술이라는 관점에 서서 영어 교재들을 살펴보면 모두 하나같이 발음을 먼저 이야기 한다. 그리고 이 발음을 올바르게 하는 방법을 이야기 해주는데 매우 간단하다. 원어민이 발음한 것을 따라서 발음한다. 그리고 그 둘을 비교한다. 이 과정을 스스로 발음한 것과 원어민이 발음한 것이 똑같아 질 때까지 반복하면 된다. 


 절대 음감을 가졌다거나, 소리에 대한 감수성이 뛰어난 사람들이라면 이런 방법으로 가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에게는 이해하기도 실천하기도 어려운 방법이었다. 이미 영절하식 영어 공부를 시도할 때, 깨달았기 때문이다. 안 들리는 발음은 계속 안 들린다. 그런데 안 들리는 발음을 따라하고 비교하라고 하니 답답할 따름이다. 모든 책들이 이런 방법을 강조하니 아무래도 문제가 있는 쪽은 내 쪽인 것 같다. 하긴, 원래 음악을 어려워하고 소리에 민감하지 않은 편이라 그럴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도 안되는 방법을 시도할 순 없었다. 또, 내 영어 공부의 목적은 책과 기사를 읽는 것이다. 영어 시험에서 좋은 점수를 받거나 영어로 대화하는 데는 전혀 관심이 없다. 그런데 대화할 때에나 쓸모 있어 보이는 발음을 별로 가능성 없어 보이는 방법으로 익히라고 하니 거부감이 들었다. 


 발음에서 영어 훈련에 대한 관심을 접으려고 했지만, 번역 문제가 터지기 시작했다. Anki로 책을 통째로 외우다 보니 그저 책을 간단하게 읽어내릴 때완느 다르게 책에 있는 대부분의 문제를 면밀히 파악하게 된다. 오타, 오기, 그리고 이상한 문장들을 전부 발견하고 이것을 수정하려고 끙끙거린다. 특히, 기술 관련 서적들은 슬플 정도로 오류가 많았다. 노골적으로 잘못된 정보가 적혀 있는 경우도 많고, 말을 얼버무리거나 두루뭉술 넘어가는 경우가 많았다. 구글 번역기의 여파인지 예전에는 보기 힘든 이상한 역어체와 이상한 번역도 종종 마주치게 된다. 이들은 그저 슥 지나가듯 읽을 때는 제대로 번역된 느낌을 준다. 그런데 한자한자 곱씹어 보면 비문이거나 인간으로서 수용하기 어려운 기묘한 문장인 경우가 많다. 기술 관련 번역서들은 온통 지뢰밭인 경우가 많다. 원작자가 글 재주가 없는 경우가 많고, 번역자가 해당 기술에 무지한 비전공자이거나 반대로 전공자이지만 글 재주가 없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여기에 구글 번역기를 얹으면 화룡점정이다. 언뜻 읽으면 서툴게 번역된 느낌을 주지만 제대로 읽으면 읽을수록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는 의미의 미로를 완성시킨다. 결국, 번역서를 원서와 하나하나 비교하면서 읽거나 원서 그자체로 읽게 된다.


 영어와 마주치는 시간이 점점 늘어난다. 번역된 책을 읽으려고 해도 어디서 엉뚱한 오역이 나타날지 몰라 결국 원서를 봐야 한다. 매번 모르는 단어만 찾아보고 어떻게든 의미를 맞춰보고 넘어가는 식의 책 읽기가 싫다. 쓰여진 글의 의미를 찾지만 언어로써 의사소통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 아니라 의미를 이리저리 배치해 보면서 딱 맞는 한국어를 찾는 과정이다. 누군가에게 전해들은 풍경 마냥 자신 없는 투로 “제주도가 아름답다.”라고 말하는 느낌이다. 그렇다고 영어 실력이 느는 것도 아니다. 그냥 한국어에 영어 단어를 좀 더 사용할 수 있을 뿐이다. 시간은 시간대로 소모되고 투입된 시간과 노력 대비 얻는 것도 적다. 마지막으로 독서 경험이 최악이다. 읽다가 조금이라도 모르는 단어나 구문이 나오면 이리저리 뒤져보다가 호흡이 끊기면서 몰입하지 못하기 일쑤다. 이렇게 문제가 쌓이다 보니 차라리 영어를 어떻게든 익히는 것이 훨씬 경제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무리 영어를 익혀야 한다고 해도 무슨 팁 던져주는 듯이 “이렇게 읽으세요.” 하는 식의 발음 학습들이 발음을 제대로 설명하는 것 같지도 않고 그 내용을 신뢰하기도 어려웠다. 이런 경우 방법은 하나뿐이다. 시중에 나오는 학습서를 뒤지지 말고 좀 더 전문적인 학술 영역으로 들어가서 자료를 찾는 것이다. 당연히 새로운 개념과 내용을 익혀야 하는 귀찮은 길이지만 그나마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자료를 생산하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이거 하기 싫어서 영어 공부 안 하려고 했던건 데 결국, 이 방법밖에 남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눈물을 머금고 관련 영역을 찾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는 언어학을 공부하기 시작했고 결국, 음성학이라는 마이너해 보이는 분야를 발견했다.



 호기심에 영미권의 문법책을 보면서 신기한 것을 보게 되었다. 영미권의 문법책은 우선 철자를 제대로 쓰는 법, 잘 틀리는 스펠링부터 지적하고 흔한 실수들, 주어와 술어를 일치시키기 등등 소소한 팁들로 가득 차 있다. 거기에는 말을 만들고 조립하는 내용들이 많지 않다. 반대로 말을 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다듬어서 좀 더 품격 있는 영어를 쓸 수 있게 할까 하는 내용들 위주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것이다. 한국어를 하는데 문법이 필요하지 않다. 자연스럽게 알고 익힌다. 그렇지만 말이나 글로 먹고 사는 사람들은 정확하게 전달되고 격조있게 보이려고 한다. 그 때, 문법이 필요하다. 문법은 자연스럽게 나오는 언어들을 좀 더 정련된 방식으로 조직하여 목적에 충분히 부응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할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선 입말이 있어야 문법도 그 역할을 할 수 있다. 자연스러운 언어 공부는 먼저 언어를 몸에 붙이고 그 다음에 문법을 익히는 것이 맞을 듯하다.


 그렇다면 입말은 어떻게 완성해야 할까? 듣고 따라하면 된다. 그렇게 반복연습을 하고 어느 정도 이상 공부량이 쌓이면 자연스럽게 입말은 완성된다. 영어 공부를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전해지는 이야기 중에 이런 말이 있다. “영어로 꿈을 꾸게 되면 언어가 장착된 것이다.”라는 말이다. 실제로 친척 중에 이런 현상을 겪은 사람이 있었는데 이상해 보이는 영어를 자랑스럽게 말하고 그것을 외국인이 잘 받아줘서 놀란 기억이 있다. 그런데 입말의 완성에는 큰 난관이 있다. 그건 음성체계가 다르다는 점이다. 


 언어에서 사용되는 말소리는 실제 소리와 다르다. 가령, 개가 짖는 것을 보면, 나라와 상관없이 개들은 비슷하게 짖는다. 하지만 그것을 나타내는 말소리는 다르다. 우리는 ‘멍멍’, 독일은 ‘바우바우’, 러시아는 ‘가우가우’, 일본은 ‘왕왕’처럼 다르게 표시하고 다르게 발음한다. 이는 언어에서 사용되는 소리가 자연의 소리를 그대로 옮긴 것이 아니라 그저 흉내만 내는 소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라들 마다 저마다의 음성체계에 따라서 소리를 유사해 보이는 말소리로 옮긴다. 


 그러면 음성체계가 다를 경우 어떤 문제가 발생할까? 존에게 ‘배트맨’에 대해서 신나게 이야기했을 때, 존은 한 참을 듣다가 내가 배트맨이 박쥐처럼 날아다니는 모습을 묘사하고 나서야 알았다는 듯이 'bat man'이라고 말했다. 그는 내가 말한 ‘배트맨’을 ‘bat man’이 아니라 ‘pet men’으로 듣고 어리둥절해 하고 있었다. 박쥐 인간이 아니라 애완동물을 다루는 사람에 대해서 이야기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음성학을 들여다보고 나서야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알게 되었다. 영어 원어민에게 우리의 ‘ㅂ’ 발음은 ‘p’에 가깝다. 그래서 여권을 보면 박씨는 ‘Park’씨이고, 백씨는 ‘Paik’이다. 우리 귀에는 ‘b’가 ‘ㅂ’에 더 가까워 보인다. 하지만 영어 원어민들은 목의 성대를 울리는지 아닌지를 민감하게 인지하기 때문에 우리가 말하는 ‘ㅂ’를 'p'로 받아들인다. 내가 ‘배트맨’에서 목의 성대를 울리면서 ‘ㅂ’을 발음했다면 존도 알아들었을 것이다. 


 또, ‘배트맨’을 ‘pet men’으로 알아들었을 때 존은 ‘애’를 전부 ‘e’로 들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건 우리 언어의 변화 때문이다. 연구에 따르면 ‘애’와 ‘에’의 발음이 우리에게 있었지만 현재는 전부 ‘에’로 융합되고 있다. 즉, ‘애’와 ‘에’를 구별하여 인식하거나 발음하지 못하고 전부 ‘에’로 발음한다. 그래서 이제는 ‘네가’라고 더 이상 말하지 않고 ‘니가’라고 말하게 된다. ‘네가’와 ‘내가’가 말소리로 구별되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나는 ‘배트맨’이라고 말하려고 했지만 실제 한국어 발음은 ‘베트멘’이라고 한 셈이다. 


 존과 나는 같은 언어를 말한다고 했지만 실은 전혀 다르게 듣고 있었다. 음성 체계가 다르니 의사소통이 근본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마치 이런 느낌이다. 내가 ‘배트맨’이라고 발음하는 것은 키보드에서 한글로 ‘배트맨’이라고 적는 것과 같다. 상대는 한글 자판이 아니라 영어자판만 있어서 영어 알파벳 'qoxmaos'로 알아듣게 된다. 당연히, 상대는 이해하지 못한다. 나는 영어를 하고 있지만 상대는 그것을 들을 때마다 어색해하고 어이없어하며 의문스러워 하니 내 자신이 영어를 제대로 한다는 확신이 생기지 않는다.


 더 슬픈 것은 우리는 이러한 말소리 차이에 대해서 알기도 어렵고 극복하기도 어렵다는 점이다. 언어의 말소리는 일종의 대표소리라서 비슷하게 들리는 음들을 하나의 언어음으로 묶어서 생각한다. 따라서 모국어가 있는 사람들은 세상의 소리를 특정 말소리로 뭉뚱그려서 인식한다. 그래서 한국인이 영어를 배우려고 하면 영어의 소리를 한글에 맞춰 인식하기 때문에 영어의 말소리들이 이상해진다. 그래서 아무리 내가 존이 말하는 ‘bat man’을 정확하게 흉내내보지만 나오는 말은 ‘배트맨’이 된다. 이를 모국어 함정이라고 하는데, 모국어의 음성체계 때문에 외국어의 음성체계가 왜곡되어버리는 현상이다. 따라서 절대음감 같이 소리를 미세하게 구별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음성체계의 왜곡으로 인하여 제대로 외국어를 받아들이기 어렵게 된다. 


 그런데 말소리를 정확하게 익히는 것이 중요한가? 모국어 발음이 형편없는 사람들은 어디에나 있다. 이런 사람들도 안 좋은 발음의 모국어를 이용하여 사는데 문제가 없다. 그런데 굳이 외국인인 한국인이 정확한 발음을 지켜야할까? 당연히 중요하다.


 일단, 언어의 본질인 의사소통을 생각한다면 당연히 정확한 말소리는 중요하다. 기껏 영어를 배워놓고 의사소통이 잘 되지 않는다면 얼마나 큰 손해인가? 하지만 그럼 점 외에도 제2외국어로 영어를 공부하는 사람에겐 정확한 말소리는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정확하게 발음할 수 있어야 정확하게 들을 수 있고 정확하게 상대의 언어경험을 공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정확하게 발음할 수 있다 함은 정확하게 입과 혀를 움직이고 성대를 진동시킬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은 겪어봐야 그 미묘한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 가령, 군대 생활이 얼마나 짜증나는지 아무리 이야기해도 어떤 이는 관심이 없고 어떤 이는 군대를 동경하기도 한다. 하지만 같이 군대를 다녀온 친구들은 눈만 마주치고 대략 ‘군대’라는 말만 해도 어느새 공감 모드가 되어 듣게 된다. 마찬가지로 언어를 발화하는 것도 같은 경험이다. 왜 ‘파티(party)’가 ‘파뤼’로 발음되는지에 대해서 언어학에서 방언이 어떻고 지역이 어떻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한다. 하지만 실제 ‘파티’를 제대로 발음하다보면 왜 ‘파뤼’라고 발음하는지 느낌이 온다. '파티'라고 발음하면 마지막까지 각 잡고 긴장하며 발음하는 느낌을 준다. 하지만 '파뤼'라고 발음하면 긴장을 풀고 즐기는 마음이 되면서 개방되는 느낌, 캐주얼한 느낌을 준다. 이런 느낌을 받고 경험이 쌓이면 언제 '파티'라고 말하고 언제 '파뤼'라고 말해야 할지 감이 온다.


 발음 연습을 하다보면 정확한 발음과 그 발음의 미묘한 변형, 강세, 억양 등이 결합되어 언어의 맛이 살아나고, 입에 착 달라붙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발화 경험이 쌓이면 상대의 말이 단순히 사전에서 찾은 대응하는 의미가 아니라 내가 그 자리에서 상대의 말을 경험하듯 공감하게 해주는 공통의 언어가 된다. 단순히 상대가 내뱉은 단어 ‘I love you.’를 ‘나 사랑해 너’로 번역하는 게 아니라 지금 이 데이트 자리에서 서로의 감정이 오가는 모든 상황을 ‘I love you’로 공감한다.


 결국, 영어를 공부하려면 우선, 입말을 정복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 시작으로 정확한 발음과 음성체계를 구축하는 일이 필요하다. 음성체계가 구축되면 이제 스스로 발음하듯 상대의 말을 들을 수 있게 된다. 이 때부터는 영어를 정확히 듣고 발화할 수 있어 유튜브나 미드를 이용해서 영어 공부를 하거나 외국인과 대화하면서 자연스럽게 영어가 발전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이런 토대가 없다면 매순간 자막을 보면서 단어를 확인하고 그 단어를 한글화된 발음으로 다시 뭉뚱그려서 익혀야 한다. 언어 경험이 축적된 것이 아니라 단순히 의미 찾기와 해석의 조합을 연습하는 것에 불과하므로 매번 머리를 싸매고 에너지를 집중해야 한다. 피곤한 일이다. 그렇게 에너지를 쏟아도 언어 경험의 미묘한 내용들은 전부 놓치게 된다. 무엇을 해야 할지는 꽤 명백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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