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론적으로 말하면 완전언어상실증 체험은 당연히 실패했다. 완전언어상실증을 경험하고 거기에 익숙해지면서 새로운 지각체계가 형성되는 일은 없었다. 가능하다면 그것이 이상했을 것이다. 하지만 소득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완전언어상실증을 체험할 수는 없었지만 언어라는 것에 대하여 깨우치는 바가 실로 많았기 때문이다. 


완전언어상실증 체험이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상당히 명백하다. 완전언어상실증 환자들과 달리 언어 기능이 살아있기 때문에 언어가 없는 상황에 적응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언어 기능이 극대화되면서 작은 실마리 하나 놓치지 않고 그것을 언어적으로 해석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 완전언어상실증을 체험할 수는 없었지만 오히려 언어 기능을 하는 그 무엇을 체감할 수 있게 되었다.


미국 드라마를 자막 없이 볼 경우 정말 집중해서 보지 않으면 드라마를 본다는 행위가 잘 성립되지 않는다. 그저 평소 드라마 보듯이 마음을 풀고 드라마가 떠다 먹여주는 스토리를 골라먹듯이 건성으로 시청하면, 순식간에 모든 것이 무의미해지고 드라마로부터 튕겨나가서 드라마를 전혀 시청하지 않는 경우와 같아진다. 이 경우는 단순히 일상적으로 관심 없는 사물을 보는 것 같은 그런 무관심한 정도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밀어내는 힘이 작동하여 추방되고, 소외되며, 장벽이 처지는, 그래서 적극적으로 드라마에 정신적인 노동을 투사하고 싶지 않은 그런 배척과 추방이다. 이런 배척과 추방을 자각할 때마다 자막 없이 드라마를 보는 것이 얼마나 정신적으로 중노동인지 느끼게 된다. 그리고 이런 정신적 중노동을 느끼고 나서야 언어 기능이 살아 있는 사람에게 언어가 얼마나 편리하면서도 독재자스러운 수단인지 조금 자각할 수 있게 되었다. 언어 기능이 있는데도 적용할 수 없는 상황에 처했을 때의 스트레스를 어떻게 묘사해야 할까? 처음 직장에 입사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신입으로 첫날인데 직속 상사가 정말 심각한 얼굴로 정색하면서 내일까지 끝내야할 필수 과제를 떠넘겼을 때, 신입의 심정 정도일까? 아무것도 모르는 신입이 매우 중요하지만 능력 외의 업무를 맡았을 때 느끼는 부담감에서 책임감은 뺀 정도의 스트레스일 것 같다. 먹고사는 문제가 결합되지 않으면 결코 겪고 싶지 않은 스트레스 정도였다. 1시간을 전력을 다해서 공부하지만 이해가 전혀도 안 되는 막막함 정도였다. 막막함, 약한 좌절감, 답답함, 지루함도 같이 동반되니 생각해보면 생각할수록 짜증스러운 스트레스다. 


자막 없이 미국 드라마를 시청할 때, 이 감당하기 싫은 스트레스를 극복할 수 있을 만큼의 정신적 에너지가 소모된다. 할 때마다 의욕이 뚝뚝 떨어지고 힘들다. 완전언어상실증을 경험한다는 호기심과 경험에 대한 집착이 막막함과 좌절감을 어느 정도 막아주었지만 그럼에도 할 때마다 스트레스는 피할 수 없어 하루에 한편 이상 보기도 어려웠다. 이렇게 언어적인 기능이 살아있는 존재에게 언어적인 기능을 쓰지 못하는 상황이 주는 스트레스가 크다면 사람은 과연 언어적 기능을 쓸 수 있는 상황에서 언어적 기능을 끌 수 있을까? 뇌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이런 스트레스를 감당하기 보다는 언어 기능을 쓰려고 하는 것이 맞을 것 같고, 경험하기로도 언어적 기능을 쓰려는 강력한 욕구가 있었다. 그렇다고 언어적 기능을 의식적으로 끌 수 있는 방법을 아는 것도 아니므로 일상생활은 거의 대부분 언어 기능이 작동하고 그 언어 기능이 제시하는 바에 따라서 살 수 밖에 없을 것이라는 점을 추론할 수 있다.언어 기능이라는 것이 내 삶에 드리우는 그늘이 얼마나 넓은지 슬슬 실감되기 시작했다.


드라마나 영황의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서 열심히 집중해서 보기 시작하면 아니나 다를까 언어적인 능력이 발동한다. 조금씩 알아듣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중국어가 되었든 스페인어가 되었든 결국, 캐릭터의 이름과 중요 아이템의 명칭을 먼저 알게 되고 그것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해석하기 시작한다. 물론, 해석이 될 리가 없으니 막히고 무척 답답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언어적인 기능은 막무가내로 작동한다. 차라리 언어적인 기능이 꺼지고 있는 그대로 사물을 볼 수 있다면 스트레스를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그냥 TV 속 이야기를 그냥 잘 이해하지 못하겠구나 하고 인식하고 넘어가면 될 일인데 짜증날 정도의 스트레스가 발동하고 정신적으로 피곤해진다. 그렇게 드라마는 맥락 없는 몇 가지 이미지만 머리에 남아 미완의 찝찝하고 답답한 기분과 함께 끝나게 된다. 이 쯤 되면 언어적 기능이 참 좋은 기능이면서도 다른 가능성을 차단하는 독재자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이러한 언어 기능의 독재성에 마주치면서 드디어 개념과 언어가 지혜를 막는다는 불교의 가르침이 구체적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라캉이 왜 언어에 의해서 인간이 소외된다고 말했는지도 조금 감을 잡게 되었다.


결국, 완전언어상실증 환자처럼 비언어적인 상황에 적응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이 경험 덕분에 언어 기능이 얼마나 강력한지 체감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 언어 기능에 대한 몇 가지 디테일한 측면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소득이 없지는 않은 셈이다. 다음부터는 이 언어 기능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미드를 자막 없이 본 그 고약하고 힘들었던 경험이 실은, 완전언어상실증을 체험한 것이라고 생각하니 생각이 급전환하여 확대되기 시작했다. 일단,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을 경험할 수 있게된 셈이라서 그 경험이 비록 고약하긴 하더라도 흥미로워졌다. 물론, 그것은 완전언어상실증 환자가 겪는 것과 같지는 않을 것이다. 팔이 잘려서 없어진 사람의 절망감과 팔을 임시로 묶어놓아서 쓸 수 없는 사람의 답답함이 같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상태를 유지하다 보면 팔이 잘려서 없어진 사람이 일상에서 부딪히는 다양한 상황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더 오래 묶어두면 팔이 없는 상태에 적응하는 것도 동일해질 것이다. 물론, 언어능력이 살아있는 나로서는 완전언어상실증을 체화하기 보다는 오히려 언어를 알아듣게 될 가능성이 높겠지만 말이다. 


중요한 것은 완전언어상실증 환자들이 그 상황에 적응했다는 점이다. 영어도 모르면서 미국 드라마를 자막 없이 봤을 때 느꼈던 그 고약함과 답답함을 완전언어상실증 환자들이 매순간 느꼈다면 감정을 표현하는 능력은 살아있는 그들은 매순간 그 에너지 고갈과 답답함 우울함을 호소했을 것이다. 하지만 어디에도 그런 이야기가 없다. 오히려 이들은 대통령의 연설을 보고 웃을 정도로 유쾌한 면도 있다. 물론, 너무 심심한 나머지 웃을 수 있는 곳에서는 언제든지 웃는 것일지도 모른다. 여튼 그들은 웃을 힘을 갖고 잘 살아있다. 그렇다면 그렇게 적응한 방식은 어떤 것일까? 언어 없이 세상을 본다는 것은 어떤 경험일까?


많은 종교적 전통에서 언어 이전의 경험에 대해서 말한다. 불교에서는 깨달음을 이야기하면서 개념에 속지 않고 세상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생각과 사색과 언어가 사라진 곳에서 있는 그대로 현상과 마주치는 경험에 대해서 자주 말한다. 혹은 도덕경에서 자주 인용되는 말로 설명하는 순간 더 이상 도(道)가 아닌 도(道)도 있다. 이 모든 내용들이 상당히 피상적이고 약간은 신비적으로 치장된 것들이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내용들을 접하고 있을 때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어떤 신비를 떠올리면서 언어 이전의 원초적 경험 같은 것을 희구해보기도 했었다. 언어 이전의 경험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살짝이나마 체험해볼 수 있다니 가슴이 두근두근하다. 사실, 이것뿐만이 아니다. 현대 철학의 큰 줄기 중 하나인 언어에 대한 다양한 접근을 확인해볼 수 있는 순간이기도 하다. 


또, 올리버 색스가 언급한 것과 같은 완전언어상실증 환자들이 보여주는 인간에 대한 통찰, 음성의 높낮이, 표정, 몸짓, 버릇, 태도 등 비언어적인 의사소통의 수단들에 눈을 뜰 수 있는 계기가 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시중에서 유통되고 있는 바디랭귀지, NLP, 얼굴 읽기 등에 눈을 뜨고 드라마 멘탈리스트의 주인공 같은 재주의 신빙성 여부를 직접적으로 체감해볼 수 있는 좋은 기회인 셈이다.


자막 없이 모르는 언어로 된 드라마나 영화를 보는 것이 가질지도 모르는 다양한 가능성을 생각하니 그 지옥같은 경험이 다시 해보고 싶어지게 되었다. 어쩌면 그 비언어적인 고통이라는 관문을 넘어서 그 상황에 적응했을 때 새로운 가능성이 열릴 수도 있지 않겠는가? 속에서는 사실 그것을 경험할 가능성이 크지는 않지만 그래도 납득될 때까지 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나는 호기심때문에 열정적으로 실어증 체험이라는 비언어적 지옥에 다시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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