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지의 재미있는 점은 미녀, 보석이나 황금, 절세보검 같은 것을 노리고 사람들이 분쟁하는 경우보다는 자신을 발전시키고 뭇 사람들 사이에서 우뚝 솟아날 수 있는 무술의 비급이나 영약을 찾는 경우가 더 많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 두 가지는 전부 내공과 연관이 있다. 무술의 비법을 전수하는 책이 무공비급이므로 무공비급을 통해서 무술을 익힐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무협의 세계에서 선호되는 무공비급은 이른바 신공비급이라고 하여 자신의 질적인 존재를 근본적으로 개선시킬 수 있는 종류의 지혜를 담은 책이다. 그리고 이러한 지혜는 단순히 추상적인 깨달음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현현한다. 경락이 되었든 근육의 구조가 되었든 효율적인 내공심법이 되었든 근본적인 현실적인 변화를 담보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근본적인 현실적인 변화는 내공의 변화로 나타난다.

 

2017년에 대한민국에서 유행하고 있는 무협과 김용의 무협에 나오는 내공은 그 개념이 완전히 다르다. 최근의 무협에서 보여주는 내공은 보유하고 있는 기(), , 에너지의 절대량을 의미한다. 그래서 기술을 구사하기 위하여 해당 에너지를 쓰고, 그 에너지가 고갈되고 나면 더 이상 그 기술을 쓸 수 없는 그런 개념이다. 이는 기존의 무협에 비해서 내공의 개념을 많이 단순화한 것에 가깝고, 사실상 자본주의화 되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현대 무협의 내공 개념에 가장 잘 상응하는 것이 경영에서 보여주는 비즈니스 모델이기 때문이다. 내공에서 기()는 현금이고 내공심법은 그 돈을 운용하여 그 돈을 불리는 개념에 가깝다. 불순하고 탁한 내공은 사파의 경우에는 사채로 끌어들인 돈이어서 기간 내에 상환하지 못하면 주화입마를 당할 수 있고, 마도의 경우에는 불법적인 살인, 강도, 약탈 등으로 번 돈에 가까워 언제 잡혀갈지 모르기 때문에 언제 주화입마를 당할지 알 수 없는 돈에 가깝다. 그렇다면 정순한 내공은 열심히 일해서 번 돈에 가깝다고 생각하면 된다. 따라서 정순한 내공은 열심히 노동해서 티끌만치 돈을 받는 것이니 당연히 모으기 어렵다. 물론, 신공비급이라고 하는 것들은 열심히 일해서 레버리지를 당겨서 몇 배로 모을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해준다. 최근의 무협에서 보여주는 내공은 기존의 무협에서 제시한 내공이라고 하는 것을 현대적인 내용에 따라서 변용한 것이다.

 

하지만 김용의 작품에서 읽은 내공은 그런 것이 아니다. 무슨 돈을 쌓듯이 저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변화된 그 무엇이다. 우선, 그것은 에너지라는 단순한 한 가지를 지칭하고 있지 않다. 기본적으로 자신의 내장과 생리 상태를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이라는 구체적인 지점에서 시작된다. 거기에 내부의 보이지 않는 근육의 구체적인 힘도 포함된다. 근육과 같은 구체적인 힘 외에 활기를 의미하기도 하는데 몸이 활기차게 움직이는 정도를 의미한다. 오늘날의 용어로 바꾼다면 신진대사 정도로 번역할 수 있는데, 무협에서의 활기는 단순한 신진대사가 아니라, 몸의 근원적인 생명력을 개선하는 것을 나타낸다. 그래서 몸이 날씨에 따라서 혹은 자연스러운 주기에 따라 어느 날은 몸이 찌뿌둥하고 어느 날은 활기차게 변하는 흐름을 극복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자연의 흐름에 순응하면서도 최적의 대응을 한다는 개념으로 자연스럽게 노화를 막는다는 개념까지 포함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은 인간이 태초부터 가지고 태어난 잠재력을 해방함으로써 가능해지는데 이 잠재력을 해방하기 위해서는 경락을 타통해야 한다. , 이 경락의 타통을 위해 기공(氣功)에서 말하는 기()가 필요한 것이다. 이 경락의 타통은 도교식, 유교식, 불교식의 다양한 방식이 있고, 이러한 방식은 어떤 형이상학적인 세계관을 전제하고 있지만 단순히 머리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몸에 해당 세계의 특성이 구현되는 것이다. , 무림인이 우주와 인간이 하나라는 사실을 깨달았으면 단순히 그런가 보다 하고 아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우주의 힘을 끌어다 쓸 수 있는 상태에 도달해야 진짜 깨달은 것으로 인정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가능한 이유를 경락의 타통과 내공의 증진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당연히 한계가 있다. 오늘날의 자본주의식 내공처럼 기()를 무한정 쌓아서 절대적인 존재가 되는 것과는 달리 당초 무협에서는 무공에서 동원할 수 있는 기의 양보다는 더 효율적이고 미세하고 교묘하게 조정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결국, 김용식 무협에서 내공을 구체적으로 정리하기 어려운 까닭은 한 인간의 드러나지 않지만 현실적으로 작용하는 모든 정신적 육체적 작용을 전부 내공으로 표현하기 때문이다. 결국, 무협의 등장인물들이 진정으로 추구하는 것은 자기 자신의 근본적 개선인 것이다.

 

영웅문 1부 사조영웅전에서 곽정은 이런 내공의 모습을 꽤 정확히 보여준다. 천성이 우직하고 영리하지 못해 스승이 가르치는 바를 잘 익히지 못하는 곽정은 사실 정직하고 성실한 것을 제외하면 가르치고 싶은 제자의 모습은 아니다. 하지만 지나가는 전진교의 도사에게 전진교의 토납술을 배우면서 갑자기 그동안 어려웠던 기예를 익히는 것이 수월해지는 것을 보여준다. , 토납술을 배우면서 정신적인 부분과 육체적인 부분에 있어서 모두 어떤 근본적인 변화가 발생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영약을 먹고 내공이 증진되면서 더 강력한 무술을 배울 수 있는 조건이 되고 더 강력한 신공비급인 구음진경을 익히면서 인간의 그릇과 가능성이 근본적으로 점점 넓어지게 된다.

 

지금은 이렇게 내공이니 기공이니 하는 개념을 전부 정리할 수 있지만 중학교 1학년 시절에는 아는 것 없이 그저 막연한 동경뿐이었다. 욕구는 강렬한데 그것을 찾을 방법을 전혀 모르고 괴로워하다가 친척 집에서 중국기공이라는 책을 발견한 것이다. 무협지에서는 무공비급을 발견한 주인공들이 게걸스럽게 책을 읽으면서 참오하는 내용이 나오는데 내가 딱 그랬다. ‘중국기공을 무공비급 마냥 정성을 다해서 읽은 것이다.

 

아쉽지만 중국기공은 몸이 건강해지기 위한 체조와 약간의 정신훈련, 그리고 마사지 하는 법 등을 소개하고 있을 뿐, 바위를 부수고 잠재력을 개발하고 하는 내용이 없었다. 3일 밤낮으로 연구해도 없었다. 무협지에 나오는 것처럼 행간에 어떤 숨겨진 뜻이 있어 이를 해석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지만 아무리 봐도 없었다. 그냥 건강을 위한 책이었다. 하지만 실망하지 않았다. 이런 무공비급이 시중에 유통되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서점을 뒤지다 보면 반드시 원하는 종류의 책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에 부풀었다. 그렇게 대형서점을 뒤졌고 처음 고른 책은 바로 소림 내공술이었다.

 

당시, 대형 서점에 가면 김정빈씨의 소설 에 이어 단() 시리즈가 유행하고 있었지만 다행스럽게도 그게 뭔지 당시에는 전혀 몰랐고 무협지와 무협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소림사(小林寺)는 잘 알고 있었기에 소림 내공술을 처음 구매하게 된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천행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나의 경우에는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한다. 어렸을 때나 나이를 먹은 지금이나 그건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가만히 있지 못하는 것은 과연 어떤 것일까? 몸의 에너지가 넘쳐서 움직이고 싶은데 그것을 제어했을 때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까? 답답해진다. 그리고 몸 여기저기의 근육이 부들거리면서 떨리고 정신적으로 무척 부산스러워 진다. 이런 경향이 강한 사람도 있고 약한 사람도 있지만 나는 정말 강한 사람이었다. 그야말로 한시도 가만히 있기 힘든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공부한다고 앉아있으면 상황은 보통 이렇게 흘러간다. 처음에는 몸을 비비꼬면서 꿈틀거리지만 이 상황을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하면 어떤 특이한 행동을 시작한다. 초등학교 4학년까지 나에게 그런 행위는 자신의 혀를 빠는 것이었다. 그러고 있으면 그냥 시간이 쏜살같이 지나간다. 물론, 그러고 있을 때는 주위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잘 인지하지 못한다. 큰 소리로 내 이름을 호명하거나 누구나 주목할만한 사건이 벌어지면 그것을 인지하지만 그 외의 일들은 꿈결처럼 조용히 지나간다. 지속적으로 혀를 빠는 습관으로 인하여 혀의 근육이 너무 발달해서 혀로 내 코를 핥을 수 있을 정도였다. 너무 크고 강력한 혀가 앞니를 밀어버렸고, 앞니가 크게 앞으로 돌출되어 나와서 치과 교정을 해야 했다. 치과 선생님은 혀가 앞니를 밀지 못하게 혀의 움직임을 구속하는 장치를 입안에 끼워넣었고 결국, 혀를 빠는 행위는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혀를 빠는 행위를 대체한 행위는 손톱으로 피부를 긁는 행위다. 왼손의 엄지손톱 끝을 살짝 다른 손톱으로 잘라서 뾰족한 부분을 만든다. 그리고 그 뾰족한 부분으로 피부를 긁는 것이다. 이것은 자해와는 다르다. 자해와는 달리 상처가 나거나 피를 흘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피부를 손톱으로 긁으면 그 부위가 무척 시원하게 느껴졌다. 이 행위가 혀를 빠는 행위보다 조금 나은 것이 적어도 손톱으로 피부를 긁으면서 책을 읽거나 공부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혀를 빠는 행위는 몰입도가 너무 높아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반면에 그나마 인간적인 생활이 가능해진 것이다. 하지만 흥미가 떨어지는 즉시, 이 행위에 1~2시간 씩 몰두하게 되므로 시간을 잡아먹는 것은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앉기만 하면 몸을 비비꼬거나 손톱을 긁으면서 스스로를 잊고 망아의 상태로 몰입해버리니 공부가 될 리가 없다. 앉아서 공부하는 시간을 분석해보면 1시간을 앉아 있을 때 30분은 몸을 비비꼬다가 30분은 손톱을 피부에 긁으면서 무아지경에 있거나 망상에 빠져있는 것으로 실제 공부하는 시간은 10분도 채 안 되는 것 같다. 주관적 느낌으로는 책의 제목을 읽고 일단, 앞으로 펼쳐질 재미없는 공부시간을 떠올리면서 이런 재미없는 행위를 해야 하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한다. 그리고 펼쳐질 지옥같은 공부시간을 상상하며 괴로워하다가 앉아있는 자신의 몸이 답답하다고 보내오는 신호에 짜증이 나고 마지막으로, 스트레스를 못이겨 정신적으로 퇴행해서 손톱을 피부에 긁으면서 멍하니 앉아있는 것이다.

 

이렇게 공부가 될 수 없으니 시험성적을 잘 받고 싶었던 나는 공부를 하기 위해서 아이디어를 강구하기 시작했다. 아니, 이것은 아이디어를 강구한 것이 아니라 그냥 발악한 것에 가까웠다. 자세를 바꿔보고 다리를 꼬아보고 하면서 신체를 구속해보기도 하고, 수시로 기지개를 키면서 정신을 차리려고 노력해보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효과는 전혀 없었다. 그래도 정신적으로 퇴행되는 것을 피하려고 하다보니 멍하니 앉아있지는 않게 되었고 반대로 몸의 답답한 감각은 계속 올라와서 조금만 힘들어져도 일어나서 움직이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몸을 움직일 때는 정신이 맑아지는데 앉으면 다시 고통을 참다가 일어나는 것이 전부였다. 그래서 그냥 앉는 것을 포기했다. 도저히 앉아서 공부가 되지 않으니 굳이 머리를 굴리는데 앉아있을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고 걷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때부터 공부의 효율이 붙기 시작했다. 이것저것 실험을 하다보니 걸으면서 공부하는 방법이 명확하게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그렇게 구체화된 방식은 아래와 같다.


우선책을 1페이지 가량 혹은 챕터 별로 잘게 쪼개서 집중해서 읽는다다 읽는데 2~3분이면 충분하다


그리고 책은 놓고 일어나서 걷는다걸으면서 그 읽었던 내용이 무엇이었는지 다시 떠올리려고 노력한다


걸으면서 관련 내용을 전부 떠올렸다고 생각하면 책으로 돌아와서 확인하면서 미심쩍은 부분이나 의심스러운 부분을 확인한다.


그리고 다시 걸으면서 복습처럼 떠올리고 해당 내용을 확정한 후 책의 다음 내용으로 넘어간다.


우선, 걷기 시작하니까 평소에 앉아서 공부할 때 느껴야 했던 신체의 답답한 느낌이 다 사라지고 스트레스를 거의 느끼지 않아도 되었다. 오히려 신체에 걷는다는 목적과 방법을 부여해서인지 난잡하게 비비꼬이던 몸이 정렬되고 걷는다는 목적을 충실하게 구현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게다가 몸을 세워서 걷기 위해서는 기본적인 주의력과 통제력이 항상 작동하고 있어야 한다. 덕분에 걷는 것만으로도 애써 노력할 필요 없이 주의력과 통제력이 자연스럽게 작동해서 어느 정도 이상의 집중력이 그대로 유지되었다. 몸이 피곤한 상태가 아니라면 졸음이나 지겨움 같은 장애요소가 나타나지 않아 공부를 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나 저항감이 굉장히 완화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또한, 걸음을 걷는 코스 동안 책을 보지 않고 해당 내용을 상기하려고 노력한 것이 지금 생각해보면 굉장히 많은 이득을 안겨 주었다. 책을 암기하지 않고 내용만 흝어본 다음에 그것을 떠올리려고 하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책을 암기한 것이 아니니 토씨하나 놓치지 않고 책을 달달 외울 수 있게 될 리는 없다. 오히려 반대다. 읽은 내용을 스스로 상상하고 구축하게 된다(물론, 이 때 스스로 이것을 할 수 있다고 계속 스스로를 북돋워야 한다.). 한 페이지의 짧은 구간의 이야기가 어떤 구조로 작성되어있는지 생각해보게 된다. 당장, 책을 보면서 확인할 수 없으니 머릿속으로 내가 떠올린 것이 논리적으로 맞는지 서로 비교하게 된다. , 잔머리를 굴려서 이건 이거하고 서로 안 맞으니까 이게 맞을 것 같아.” 따위의 논리적 추론을 시도하게 된다. 그래서 가장 적은 정신에너지를 들여서 해당 내용을 완전히 떠올리게 된다. 원하는 코스를 다 걷기 전까지는 스스로 생각해낸 것이 맞는지 틀린지 알 수 없으므로 미심쩍은 부분과 확신하는 부분에 대해서 계속 추론을 하면서 코스를 걷게 된다. 그리고 책이 나타났을 때 이것을 확인하고 싶은 욕구가 강하게 일어난다. 이런 과정을 거치고 나니 읽은 내용을 완전히 이해하고 암기할 수 있게 되었다(아쉽지만 요약이나 축약은 힘들다.).


이 방식이 훈련되기 시작하면서 중학생쯤 되었을 때는 머릿속으로 책의 전개를 쭉 이어서 하나의 이미지로 만들어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해당 이미지를 머릿속에서 반복적으로 돌리면서 공부를 했다. 나는 이것을 이미지 트레이닝이라고 불렀다. 이 이미지 트레이닝의 효과는 정말 좋아서 하다보면 책의 내용들이 꿰어지면서 머릿속에서 살아 움직이게 되었다. 그 때 스스로 내가 이것을 공부했고 알고 있구나 하는 것을 자각할 수 있엇다. 다른 친구들은 교과서를 끊임없이 베끼고 읽고 또 읽으면서 공부했는데 그렇게 암기하는 것보다 훨씬 효율이 좋았다.

 

지금에 와서 다시 생각해보면 혀를 빨거나 손톱으로 피부를 긁는 행위들은 모두 일종의 유아 퇴행현상이었다. 결국, 가만히 앉아있는 것에 너무 스트레스를 받아서 그 자리에서 바로 퇴행해버린 것이다. 이런 퇴행은 내 인생에서 굉장히 큰 마이너스 요소였다. 결국, 스트레스를 극복하지 못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정말 이상적인 것은 이러한 퇴행현상을 완전히 극복하는 것이지만 그게 그리 쉬울 리가 없다. 아니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오히려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서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아쉽게도 많은 손해를 보게 될 수도 있다. 정확한 이유를 알고 극복할 방법과 자원이 준비되어 있다면 시도해볼 수 있지만 정확한 원인도 모르고 시도해서 실패할 경우 스스로의 자존감에 큰 타격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나는 이러한 퇴행현상을 극복할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 그저 바로 내일 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받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하는가?라는 질문에만 집중했고 내가 가지고 있던 근본적인 문제점을 파악하고 이를 극복하고자 하지는 않았다. 일단, 그게 퇴행현상이고 나쁜 것이고 극복해야할 것이고 이런 생각 자체가 없었다. 그냥 내일 시험인데 어떻게 해야하나 발을 동동 구르면서 1차원적으로 아이답게 방법을 강구했을 뿐이다. 만일, 그 때 공부를 방해하는 요소들을 추려서 극복하고 나서 공부를 하자고 했다면 아마도 공부를 전혀 하지 못했을 것이다. 지금 40이 넘는 시점까지도 이 습관인지 기질인지 모를 것들은 여전히 잘 남아서 막강한 파워를 자랑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이것을 먼저 고치려고 했다면 인생이 헤어날길 없는 미궁으로 빨려들어갔을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나는 그것을 건드려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어찌나 다행인지!

 

퇴행현상을 고치지 않고 오히려 내 삶의 전제조건으로 받아들이고 공부하는 방법을 강구함으로써 걸어다니면서 공부하는 방법을 몸에 붙일 수 있었고, 그 덕분에 이미지 트레이닝이라는 기술을 얻었다. 이 이미지 트레이닝은 평생을 줄기차게 써먹은 기술이다. 만일, 계속 앉아서 공부할 생각을 했다면 평생 교과서를 연습장에 받아쓰면서 손가락으로 익숙하게 숙련이 될 때까지 반복하는 식의 공부를 해야만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퇴행 덕분에 머리로 공부할 수 있게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이것이야말로 전화위복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어린 아이에게 가장 힘든 일은 무료함이다. 물론, 질병, 가난, 가정 폭력 등과 같은 일이 더 힘들고 지옥 같은 일인 것은 자명하지만 이런 일은 스스로 극복할 수 없는 일이어서 그저 어머니 품속에 파고드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 하지만 무료함은 그렇지 않다. 무료함, 심심함은 가장 좋아하는 엄마의 품속에서도 느끼게 되고, 그 엄마의 품속에서 벗어나게 하는 동기가 된다.

 

사람은 심심한 것을 극심한 고통으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이것은 극심한 고통이다. 실제로 사람을 고문하는 고문술에도 비슷한 종류가 있다. 사람에게 주어지는 모든 자극을 차단하면 정신적으로 붕괴한다는 것으로 매우 잔인한 고문술이기도 하다. 슈테판 츠바이크의 단편소설 체스를 보면 독방에 갇힌 주인공이 정신을 유지하기 위하여 체스에 몰입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아무것도 없는 순백의 방에서 정신이 붕괴되는 것을 느끼고는 머릿속으로 체스판을 그리고 끊임없이 체스를 두고 복기하는 장면이 나온다. 나는 이 장면에서 나의 어린 시절 무료함에 미쳐서 날뛰었던 나의 경험을 떠올렸다.

 

일상이 안정되면 이제는 심심함에 몸서리친다. 물론, 고문하듯이 강제적으로 자극이 끊어진 것은 아니지만, 아쉽게도 재미있어 보이는 것은 모두 금지되었다. 친구와 진흙 위에서 구르지도 못하고 동네 뒷산에서 서바이벌을 즐길 수도 없고 재미있는 게임도 즐길 수 없다. 접시를 깨고, 유리창에 돌을 던져 시원하게 부서지는 모습이 보고 싶지만 엄마가 감시하고 있다. 그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앉아서 숨 쉬는 것뿐이다. 보통,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 무료함에 정신이 나갈 듯 아득해지다가 본능적으로 이상한 놀이를 만든다. 파괴 본능이 앞설 때는 상상인지 백일몽인지 알 수 없는 가운데에서 악독한 마왕을 쳐부수거나 대량의 기물파괴를 한 후, 본인이 슈퍼맨 마냥 사람들에게 우러러 받들어지는 느낌을 즐기면서 히죽 웃기도 한다. 그리고 주위의 모든 것을 새로 평가하기 시작한다. 갑자기 책장 위의 조형물이 이상하게 생긴 것 같아서 갖고 놀고, 주위의 모든 것을 미친 듯이 갖고 놀기 시작한다. 이때의 경험으로 볼 때, 창의성을 발현시키고 싶다면 사람을 엄청나게 지루하게 만들면 된다. 그러면 광기에 가까운 창의성이 곳곳에 나타날 것이다. 괜히, 지루하기 그지없는 뉴질랜드에서 온갖 창의적인 발명과 발견이 이루어진 것이 아닌 것 같다.

 

나는 유난히 정신이 산만하고 가만히 앉아있지 못하는 아이였다. 모든 친척들이 이구동성으로 가장 정신 사나운 사람으로 나를 꼽았으니 아마도 객관적으로도 매우 정신 사나운 아이였던 것 같다. 나는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했고, 가만히 있는 것은 정말 끔직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가만히 앉아있으면 몸의 곳곳에서 이상한 감각이 나타나서 나를 미치게 했다. 고통스러운 느낌은 아니고 마치 좀이 쑤시는 것 같은 느낌으로 바로 일어나서 뛰게 만들고 싶은 느낌이었다. 그런 느낌은 지금도 많이 남아있는데 특히 밤에 잘 때 발생하는 하지불안 증후군의 느낌과 거의 흡사하다. 이런 감각이 고통스러운 것은 아니지만 정말 사람을 불편하게 만들고 그 느낌이 지속되면 고통스러워 진다. 그러니 몸과 마음이 전부 개별적으로 무료하고 가만히 있는 것을 참지 못했으니 가만히 앉아있는 것은 온 세상의 모든 기운을 모아서 버티는 것에 가까웠고 1시간만 앉아있어도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로 탈진하기 일쑤였다.

 

당연히 공부가 잘 될 리 없다. 앉아서 아무런 자극 없이 무료함에 시달리는 것도 싫은데 하고 싶은 놀이를 모두 금지당하고 하고 싶지 않은 공부를 하라고 하면 더 죽을 맛이었다. 그리고 앉아서 문제를 풀면서 몸을 이리저리 꼬다보면 보다 못한 어머니가 가만히 좀 있으라면서 구박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몸을 가만히 있는 것이 너무 싫다 보니 자꾸 지우개를 식탁 밑에 떨어뜨리고 그것을 주우면서 몸을 움직이고 어머니가 안보는 틈을 타서 책 모서리에 움직이는 그림을 그리고, 지우개질을 해서 나온 가루를 뭉쳐서 고무공을 만드는 행위에 집중하기도 했다. 하지만 여전히 재미있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정신적으로 더 이상 견디지 못하면 퇴행을 하게 되었던 것 같다. 처음에는 스스로의 혀를 빨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마치 어머니 젖을 빠는 것 같은 행위인데 스스로의 혀를 살짝 내밀고 그 혀를 빠는 것이다. 그렇게 빨다보면 정신이 가출했다고 돌아오곤 했다. 그저 시간이 지나갔을 뿐 무엇을 했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이 혀를 빠는 행위로 인해서 앞니가 앞으로 돌출되어 나오기 시작하는 바람에 치과 교정을 해야했다. 결국, 혀를 빠는 것은 금지되었고 그래서 손톱으로 피부를 긁는 버릇이 생겼다. 손톱 끝을 살짝 날카롭게 찢어 그 부분으로 피부를 긁다보면 그 감각에 정신이 집중되면서 스트레스가 풀리는 것이었다. 당연히, 이 행위도 하고 있으면 몇시간이고 집중할 수 있지만 그 동안 정신은 먼 곳으로 가출하게 된다.

 

책 읽는 것을 좋아해도 책상에 앉아서 읽지는 못했다그저 누워서 끊임없이 자세를 바꿔가면서 책을 읽었다. 그것이 아무리 재미있는 책이라도 신체가 끊임없이 움직이라고 신호를 보내기 때문에 책을 읽다보면 방구석구석까지 몸을 돌리면서 끊임없이 몸을 비비 꼬면서 책을 읽었다. 다행히도 책이 흥미로우면 몸을 비비꼬면서 온전히 책을 읽을 수 있었다. 하지만 책이 흥미롭지 않으면 몸을 비비꼬면서 책을 던져버리기 일쑤였다.

 

이런 상황들은 공부에 대한 개념이 전혀 서있지 않았을 때야 그저 공부를 하지 않아도 상관없었지만 사파(邪派)의 공부법을 깨닫고 시험 성적이 잘 나왔으면 하는 마음이 생겼다. , 내가 스스로 갖고 있던 시험에 대한 왜곡된 입자으로 인하여 사악한 교사가 학생들을 괴롭히기 위하여 시험 문제를 제출하고 이런 시험을 학생이 당당하게 극복하는 승부처럼 생각했기 때문에 시험이 있을 때마다 아드레날린이 분비되었다. , 어머니한테 자랑하고 당당하게 용돈을 요구할 수 있는 순간이었기 때문에 걸린 보상도 커서 시험 성적을 좋게 나오겠다는 의욕으로 충만했다. 

 

특이한 것이 그저 읽는 책은 몸을 비비꼬면서 읽어도 상관이 없지만 교과서는 몸을 비비꼬면서 읽을 수가 없었다. 너무 재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암기할 것을 고르고 암기하는 행위는 고도의 정신적 행위였다. 이 때, 사용되는 에너지가 있어서인지 다른 곳으로 정신이 분산되면 암기하는 것이 어렵게 느껴지곤 했다. 그래서 몸을 비비꼬면서 공부하는 것이 힘들었다. 그래서 속으로 몸을 비비꼬지 않으려고 하면 바로 손톱을 세워서 피부를 긁기 시작했다. 이렇게 되면 공부는 더 이상 문제가 아니었다. 몸을 비비 꼬는 것은 약간 자족적인 행위다. 나가서 마구 뛰고 싶은데 그러지 못하니 욕구를 달래는 과정인 것이다. 그러다가 더 이상 버티지 못하면 손톱을 세워서 피부를 긁는다. 그리고 그 느낌에 중독된다. 정말 재미있는 책을 읽을 때는 책에서 전개되는 흥미진진한 내용 때문에 그런 행위에 몰입하는 것이 책에 몰입하는 것 같은 효과를 주기도 한다. 하지만 공부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냥 어느 순간 더 이상 공부를 하지 않고 그 행위에 몰두하고 있는 것이다. 




사파(邪派)의 공부법을 깨달았다고 바로 암기 과목을 잘하게 될 리는 없다. 물론, 깨달음의 추동력이 있으므로 어찌어찌 잘하게 될 수는 있다. 한 순간 꽂혀서 이렇게 하면 되겠구나!”라는 깨달음이 자생적으로 발생하면, 아르키메데스가 유레카를 외치면서 목욕탕에서 발가벗고 나올 수밖에 없게 만드는 획득한 아이디어를 실현해보려는 강력한 욕구도 같이 발생하기 때문에 강력하게 노력해볼 수 있는 힘이 발생하긴 한다.

 

하지만 그것이 실현되려면 한 가지 전제 조건이 필요하다. 그것은 바로 책을 읽는데 거부감이 없어야 한다는 점이다. 내가 깨달은 것은 시험공부에 맞춰서 책을 암기하는 방법이지 책을 읽는 방법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나는 책을 좋아하는 것을 넘어서 활자중독이다.

 

1970~80년대에 아이들이 놀만한 것은 많지 않았다. 지금처럼 스마트폰이 아이들의 눈을 사로잡지 않았다. 초등학교 시절엔 컴퓨터 게임이라고 할 만한 것이 나타나면서 아이들의 눈을 돌아가게 만들었지만 너무 비쌌기 때문에 눈으로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그래서 아이들은 밖에서 뛰어다니면서 놀았다. 공을 차고 놀이터에서 술래잡기하고, 싸우고, 팽이치기, 딱지치기, 땅따먹기 등을 하면서 시간 가는 줄 모르면서 논다. 솔직히, 단순한 컴퓨터 게임하고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재미있다. 하지만 반드시 친구가 있어야만 즐겁게 놀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친구가 잘 없었다.

 

친구가 많으려면 대범하고 활달하고 영민하고 등등 온갖 좋은 미사여구를 몸에 붙이고 있어야 한다. 그 다음으로 적당히 친구가 있으려면 말을 잘 듣고 눈치가 좋아야 한다. 이런 친구들은 친구가 많은 친구 옆에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친구가 없는 아이들은 보통 다른 아이들 기준으로 찌질한 친구들이다. 그리고 내가 바로 찌질한 아이였다. 겁이 많고 행동이 굼뜬데, 욕망은 많아서 남의 말도 잘 안 듣는 그런 아이였다.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모범적인 아이도 아니었고, 싸움을 잘하고 아이들을 리드하는 아이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그런 아이들과 친구가 되고 싶어서 눈치 빠르게 구는 아이도 아니었다. 겁이 많아서 모험과 같은 일에 끼어들지도 않고 친구들과의 싸움에도 끼어들지는 않으면서 욕심은 많아서 베풀지도 않았다. 그러니 날 끼워서 놀아주던 아이들도 나의 부족한 눈치와 굼뜬 행동에 답답해 하면서 다른 친구들과 놀게 되고 자연스럽게 나는 소외되었다.

 

아이들에게 지옥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내 경험으로 미루어 보면 40도가 넘는 고열에 쓰러져서 사경을 헤맨 적도 있고 뼈가 부러진 적도 있으며, 형들에게 맞는 공포의 순간도 있었고, 부모님이나 선생님에게 혼나는 순간도 있었지만 그러한 모든 고통보다는 무료한 것을 견딜 수가 없었다. 어린 시절은 시간이 정말 느리게 지나간다. 1시간이라는 시간이 정말 크게 느껴진다. 그나마도 무료함이 느껴지면 시간의 흐름은 거의 멈춰버린다. 그것은 숨이 막힐 것 같은 답답함이다. 그래서 부모님들이 항상 말하는 얌전히 있어!”라는 말은 지옥의 주문처럼 들렸다. 얌전히 있으라니 난 11초도 얌전히 있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움직이기만 하면 되는 것은 아니다. 당연히, 그 활동이 재미있어야 하고 흥미로워야 한다. 초등학생 시절에 어떤 활동이 재미있고 흥미로우려면 반드시 친구가 있어야 했다. 왜냐하면 친구는 무한한 즐거움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나에게 친구는 가뭄에 콩 나듯이 만날 수 있는 존재였다. 그러니 지옥을 탈출할 대체재가 있어야 했다.

 

내가 스스로 의식적으로 그런 대체재를 찾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목마른 사람이 물을 마시면 허겁지겁 물을 목으로 넘기게 되듯이 언제든지 새로운 즐거움에 몸을 던질 준비는 되어있었다. 그리고 서유기를 만났다. 유치원 아이들이 보는 착하고 단순하고 악한 그런 캐릭터가 아닌 굉장히 복잡하고 다층적인 인물들이 모여서 천축까지 먼 거리를 여행하는 서유기는 꼬맹이의 상상력을 완전히 잡아먹어 버렸다. 신비한 도술과 요괴의 세계, 다양한 캐릭터, 사고뭉치 손오공에 대한 애정은 상상력을 완전히 폭발시켰다. 그 때부터 책은 재미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머리에 박혔다. 친구가 없어서 무료하게 되면, 책장으로 가서 보물을 찾는 기분으로 재미있을 것 같은 책을 찾는 것이 일이었다. 그리고 보물을 찾게 되면 그 날은 하루 종일 무료한 지옥에서 해방되어 완전 흥미로운 세계로 진입하게 되는 것이다.

 

솔직히, 재미있는 책을 좋아했지, 어려운 책이나 재미없는 교과서를 보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책을 읽으면서 머릿속으로 상상하는 상황이 계속되다보면 무엇이든 상상할 꺼리가 필요해진다. 서유기가 아무리 재미있어도 10번 이상 읽으면 지루해지는 법이다. 그러다 보면 조금 다르게 변주가 이루어진 작품을 찾게 된다. 서유기는 각종 환상기담의 세계로 나를 인도했고, 그러다가 환상기담의 패턴에 식상해지게 되면 조금 더 사실적인 모험담으로 넘어가게 된다. 어느 순간 각종 전기물을 읽다가 서부 세계로 넘어가서 총질에 열광하고 사실적인 것에 질리면 메르헨으로 넘어가는 등 끊임없는 여정이 시작된다. 그 와중에 이야기의 주변부에 등장하는 각종 사물과 철학이 머릿속에서 살아 숨쉬고 나의 세계는 조금씩 넓어져갔다.

 

찌질한 나와 달리, 많은 친구들이 책에서 시험문제가 나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성적이 좋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미 알고 있었고 지루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또한, 그들은 영리했기 때문에 더 큰 즐거움을 추구할 수 있었다. 바로, 친구들과 노는 것이었다. 그리고 책을 읽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았다. 당연히 더 큰 즐거움을 추구했고, 덕분에 우리 같은 아이들은 그런 친구들을 항상 부러워했다. 하지만 나는 고립되어 그런 즐거움을 추구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시험공부에 대한 깨달음을 얻었을 때, 그 아이디어가 너무 소중했다. 내가 힘들게 얻은 나의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하라고 주입한 것이 아니었다. 내가 알아내고 얻은 나의 것이었다. 완전히 자발적인 그리고 내 스스로에서 연유한 그것, 그것은 바로 처음으로 획득한 내 스스로에서 말미암은 것인 자유(自由)였다.

 

교훈 : 아이들도 스스로 무언가를 얻을 수 있다. 


공부를 사파(邪派)식으로 깨닫다.


초등학교 5학년 여름 중간고사에서 들은 친구의 한마디는 머릿속에서 천지개벽을 일으켰다. 모든 것이 모호하고 어떤 일에 대해서 파편화된 지식과 감상이 있지만 이것이 무엇인지 규정하기 어려운 그런 상황이 있다. 그리고 그 때의 나는 스스로 무엇을 모르는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순간순간 많은 궁금증들이 스쳐지나가긴 했다. , 수업을 하지 않는 체육에서 이론 문제가 나오는가? 선생님이 말하지 않은 내용들이 왜 시험문제에 나오는가? 다른 친구들과 나는 왜 성적이 다르게 나오는가? 이런 질문들이 나타날 때마다 그것을 열심히 파고들었다면 좋은 결과를 얻었겠지만 아쉽게도 그저 스쳐지나가는 궁금증들에 불과할 뿐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서 노력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하진 못했다.

 

그리고 책에 나오잖아라는 친구의 한 마디는 이 모든 것을 하나로 꿰는 마지막 한 조각이었다. 정말, 한 순간에 모든 것이 이해가 되어버렸다. 다음이 그 때 내가 이해한 것들이었다.

 

학교에서 교과서를 주는 이유를 몰랐다. 그저 무겁고, 읽어보면 좋을 것 같은 내용들이 있었지만 이것을 어떻게 연결시킬 수 없었다. 그런데 그 한마디로 교과서의 용도가 무엇인지 깨달았다. 선생님들은 교과서를 그냥 부연 설명하고 있을 뿐이었던 것이다. 선생님이 주가 되는 것이 아니라 교과서가 주가 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교과서를 공부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사실, 이 부분은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굉장히 잘못된 생각이지만 대한민국의 현실에는 너무 적확하게 작동했다. 교과서를 공부한다는 것은 상대방이 교과서를 기반으로 문제를 내면 그 문제를 맞추기 위한 것이었다. 그 방법이 어떻든 간에 교과서에서 낸 문제의 답은 그 교과서에 있는 내용이어야만 한다.

 

그렇다면 선생님들이 수업시간에 설명하는 것은 무엇인가? 선생님은 어차피 교과서에서만 시험문제를 낼 수밖에 없지만 그 중 어떤 시험문제를 낼 지는 선생님의 선택사항이다. 결국, 본인의 수업을 잘 듣는 아이들이 좋은 성적을 가질 수 있도록 시험문제를 어떻게 낼 것이라고 끊임없이 힌트를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선생님의 수업을 잘 듣고 메모를 하면 그 부분만 공부를 해도 100점 만점에 80점 이상은 나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 80점인가? 시험문제를 하나의 선생님이 내는 것이 아니라 여러 선생님이 같이 제출하는 경우가 많고, 어떤 선생님은 자신의 수업을 잘 들은 학생들 중에서도 더 잘하는 아이를 구별하기 위하여 일부러 자신이 가리키지 않은 부분에서 내기도 하고 단순히 심술을 부리기도 한다.

 

하지만 선생님들이 어떤 변덕을 부리든 간에 교과서 내에서만 시험을 내기 때문에 교과서에서 나올법한 내용들을 전부 알고 있으면 선생님의 수업 같은 것은 전혀 신경쓸 필요가 없게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교과서를 공부해야 하는가? 그것은 간단하다. 문제를 내보면 된다. 친구를 하나 붙잡고 교과서를 보면서 문제 내기를 해서 더 많이 맞히는 쪽이 이기는 것으로 내기를 하자고 하면 공부 좀 하는 친구들은 대부분 한다고 한다. 그러면 교과서를 보면서 친구한테 문제를 내보는 것이다. 서로 내기에서 이기기 위해서 열심히 문제를 내다보면 어느 순간 바로 이런 것이 문제가 되어 나온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내기가 과열되면 과열될수록 더 열심히 교과서를 외우고 암기하게 된다. 문제는 더 치사해지고 교묘해진다. 그러다보면 이런 문제가 나오겠구나 하는 감각이 숙달되게 된다.

 

이 깨달음은 정말 컸다. 모든 조각이 모여서 완성된 지식을 갖춘 것은 그 때가 처음이었다. 이 때부터 이 체계는 스스로 성장하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시험공부를 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떠오르고 필요한 수단과 방법이 바로바로 떠오르게 되었다. 시험문제가 제출되는 원리와 그에 따른 대응 방법이 자연스럽게 이해가 되어버린 것이다. 아마도 처음으로 지식을 갖추는 것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기 시작한 시점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처음으로 어떤 것을 이해한 경험이 아닐까 싶다.


물론, 이 경험은 마냥 좋은 것은 아니다. 위에 언급한 내가 깨달은 내용은 그야말로 시험공부에 한정된 생각이고 어떤 발전적인 양상을 갖추진 못했다. 지금이라면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선생님의 수업은 선생님 본인이 생각하는 해당 과목의 개요이자 포인트이고 하나의 관점을 형성하고 있다고 말이다. 하지만 당시에는 오히려 선생님을 완전히 무시하게 되었다. 깨달음 이후에는 선생님이 진도를 뽑기 위하여 수업을 할 때 해당 수업을 들은 적이 단 한번도 없다. 어차피 교과서를 공부하는게 부차적인 선생님의 수업을 듣는 것보다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깨달음의 두번째 문제는 공부를 시험을 보는 것으로 한정지은 것이다. 즉, 공부는 시험 때 하는 것이기 때문에 평소에는 전혀 공부를 하지 않았다. 그래서 모든 지식은 그저 시험을 보는데만 쓰여지고 그대로 소모되어 버렸다. 또, 시험을 보는 방식으로만 책을 보기 때문에 책을 축약하고 중심적인 생각을 파악하고 하는 공부의 가장 기본이 무시되어 버렸다. 오히려, 시험문제를 악의적으로 낼 것이라는 생각만 강해져서, 그리고 친구랑 내기에서 이기기 위해서 가장 지엽적이고 가장 알 필요 없고 파악하기 어려운 것을 찾는 식으로 공부해버리게 되었다. 결국, 이 공부 방식은 그저 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내기 위해서 암기하기 위한 공부일 뿐 그 이상의 아무런 효용이 없었다. 


그래서 나의 공부방식은 완전히 사파(邪派)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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