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수학은 공부할수록 성적이 떨어지는 이상한 공부법을 실천했고 일상적으로는 열심히 무협지를 읽고 기공류와 신비주의의 세계를 연구했으니 고등학교에 올라와서 성적이 좋을 리가 없다. 하지만 그 와중에 공부를 거의 하지 않아도 발군의 성적이 나오는 영역이 있었으니 국사, 세계사, 한국지리 같은 과목과 수리에서 사회탐구 영역이 그것이었다.
세계사를 잘하는 이유는 사실 명확하다. 초등학교 시절 가장 열심히 읽었던 책이 『먼나라 이웃나라』였기 때문이다. 정말 즐겁게 읽었고 몇 번을 봤는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읽었다. 거의 처음으로 제대로 접한 만화책이어서인지 너무 좋아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덕분에 세계의 역사 흐름이 머릿속에 항상 있었고 전체 윤곽이 매우 잘 잡혀서 교과서를 펼쳤을 때 대부분 익숙하게 아는 내용이었다.
그 다음은 국사였는데 국사는 세계사와 달리 잘 몰랐고 그래서인지 세계사보다 국사가 훨씬 어렵게 느껴졌다. 그런데 어느 날인가 국사를 공부하면서 조선사를 기술하는 어떤 일정한 기술방식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즉, 교과서는 조선의 정치적인 세력을 위주로 기술하고 있고 그 외에 그 시대에 특이한 점이나 기억해야할 점 몇 가지를 얹어서 드러내는 식이었다. 시대상, 임금, 정치세력의 3가지가 주요한 카테고리였고 시대상을 근거로 임금과 정치세력의 변화를 논하는 방식이 주된 방식이었다. 이런 큰 틀이 자리 잡히면서 국사 교과서가 어떤 식으로 정리되어야 하는지 머리에 그 틀이 잡혔고 덕분에 공부도 무척 수월해졌다.
그 외에 한국지리와 사회탐구 쪽을 무척 잘했는데, 특히 사회탐구는 공부를 한 적이 없어도 항상 거의 만점에 가까운 점수를 받았다. 개인적으로 문제가 무척 쉽게 나온다고 생각했는데, 친구들과 대화해보니 내가 잘하는 것이었다. 내가 왜 지리와 사회탐구 영역에 뛰어난가를 고민해보니 그 원인은 중3에 만났던 선생님의 덕인 것 같다.
중학 시절에 사회라는 과목은 뜬구름 잡는 이야기였고, 그냥 밑줄 치고 암기하는 과목이다. 매 사회 시간은 그저 선생님이 시험에 나올 것이라고 하는 부분을 메모하고 밑줄 치는 것이 수업의 대부분이었다. 그 선생님은 중2에서도 사회를 가르쳤고 중3에서도 사회를 가르치셨는데 중2 때는 그러지 않았는데 중3 때는 어느 날인가부터 사회시간에 백지도를 준비해오라고 했다. 백지도는 아주 기본적인 구분만 되어 있는 표기가 거의 없는 지도(map)을 말하는데 백지도로만 만들어진 얇은 책을 문방구에서 팔았다. 그리고 수업시간에 해당 수업의 진도에 해당하는 내용을 전부 지도에 표기하도록 시켰다. 당시 백지도를 준비해오지 않는 학생들에게는 꽤 강하게 혼을 내셔서 모두들 굉장히 귀찮아하면서도 필사적으로 그 백지도를 준비했던 것 같다. 그 지도를 보면서 축척을 확인하고 방향을 확인하고 팔도와 나라 등의 모든 것을 크레파스로 칠하고 표기하고 예쁘게 꾸미게 하셨다. 그리고 제대로 했는지 안했는지 일일이 검사까지 전부 하셨고 숙제도 엄청 많이 내주었다.
당시에는 다른 사회 선생님들은 전혀 이런 것을 시키지 않는데 이 선생님만 시킨다고 원성이 자자했고 솔직히 많이 귀찮고 부답되었다. 당연히 선생님이 좋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백지도에 이것저것 예쁘게 그림을 그리는 것이 남자애의 입장으로서는 뭔가 안 어울리고 간지러운 것 같아서 대충 해버리기 일쑤였다. 그럴 때마다 선생님은 거의 세어 버린 목소리로 크게 화를 냈다. 그 목소리가 너무 히스테릭하게 느껴져서 마치 사람들이 칠판에 손톱을 긁을 때 나는 소리처럼 소름이 끼치면서 거부감을 줬다. 당시 느끼기에는 이상한 짓을 하는 말 그대로 미친 여자였다.
그런데 중3 시절에는 전혀 느끼지 못했지만 수능 모의고사를 보면서 내 감각이 다른 친구들과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지리와 연관된 사회탐구의 지문이 나에게는 자연스럽게 상황을 인지하고 답을 제시해주는 것처럼 느껴졌다. 지독하게 간단한 추리만 하면 자연스럽게 답을 알게 된다고 생각했는데 많은 친구들이 사회탐구의 지리와 관련된 지문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고 어떤 내용을 알고 있어도 잘 응용이 안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가령, “낙농업은 대도시를 주요 수요처로 삼고 있기 때문에 그 근교에서 발달한다.”라는 말을 외우고 있지만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가령, 근교가 어디까지인지 모르고 낙농업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왜 대도시가 수요처인지도 모르는 것이다. 사실, 이런 내용은 글로 보면 당연히 모른다. 글을 보고 사회과 부도나 지리부도를 봐서 익혀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지도로 나타내면 지극히 간단한 내용을 말로 부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글로 연애를 배우고 글로 미묘한 예술을 배우는 것 같이 교과서만 봐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하지만 중3 시절 만난 선생님 때문에 매주 두 개의 백지도를 전부 그려야 하는 과제를 만났기에 해당 지도가 전부 친숙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 뒤로 백지도를 그리거나 하지 않았지만 지리에 관한 내용은 교과서에서 글로만 봐도 무슨 의미인지 바로 파악이 되었고 사회탐구에서도 지문만 보면 지도 위에서 대충 답이 도출되었다. 다시, 생각해보면 그 백지도를 예쁘게 그리는 숙제가 머릿속에 기본적인 지도라는 틀을 만들어 주었고 덕분에 지리 관련 공부를 할 수 있는 기초가 만들어진 것이다. 그리고 기초가 있었기 때문에 수업에서 듣거나 교과서를 보는 것만으로도 자연스럽게 실력이 발전한 것이다. 그런 기초가 없었다면 흥미를 잃고 공부를 하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무의미한 암기로만 그쳤을 공부가 기초가 생김으로써 너무나 쉽고 수월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기초는 내 일생에 걸쳐서 더 쉽게 역사적 사건을 이해하고 그 상호작용을 알게 해주었을 것이며 지리와 관련된 많은 일들에서 무형의 이익을 주었을 것이다. 아마도 세계사와 국사 공부가 수월했던 것의 밑바탕에는 그 지도에 대한 기초적인 이해가 자리하고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그 선생님이 만들어주신 기초가 준 이익은 무궁무진했다.
젊은 여선생님이 백지도를 그리게 하는 과제를 내주고 그것을 일일이 검사하고 아이들을 단속했던 것은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나 힘든 일이었다. 아이들의 노골적인 짜증이나 불만스러운 눈빛을 수없이 마주쳤을 것이다. 그럼에도 아이들에게 백지도 숙제를 하지 않는 아이들을 다그치다가 목이 쉬어서 히스테릭한 목소리가 나왔을 것이다. 다른 사회 선생님들이 하지 않는 과제를 왜 내주냐면서 하지 말라는 압박도 받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선생님은 꿋꿋하게 이것을 해야 한다고 강단 있게 아이들을 몰아붙였고 이 백지도 숙제를 왜 해야 하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던 나같은 학생도 기초를 형성할 수 있게 하셨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 때 처음으로 스승을 만났던 것 같다.
선생님이 포기하지 않아주셔서 너무나 감사하다.
요즘에는 백지도를 국토교통부에서 바로 다운로드할 수 있다. 아래의 링크를 타고 들어가면 국토교통부의 백지도 다운로드가 가능하니 많이 이용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http://dokdo.ngii.go.kr/child/contents/contentsView.do?rbsIdx=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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