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아이에게 가장 힘든 일은 무료함이다. 물론, 질병, 가난, 가정 폭력 등과 같은 일이 더 힘들고 지옥 같은 일인 것은 자명하지만 이런 일은 스스로 극복할 수 없는 일이어서 그저 어머니 품속에 파고드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 하지만 무료함은 그렇지 않다. 무료함, 심심함은 가장 좋아하는 엄마의 품속에서도 느끼게 되고, 그 엄마의 품속에서 벗어나게 하는 동기가 된다.
사람은 심심한 것을 극심한 고통으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이것은 극심한 고통이다. 실제로 사람을 고문하는 고문술에도 비슷한 종류가 있다. 사람에게 주어지는 모든 자극을 차단하면 정신적으로 붕괴한다는 것으로 매우 잔인한 고문술이기도 하다. 슈테판 츠바이크의 단편소설 『체스』를 보면 독방에 갇힌 주인공이 정신을 유지하기 위하여 체스에 몰입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아무것도 없는 순백의 방에서 정신이 붕괴되는 것을 느끼고는 머릿속으로 체스판을 그리고 끊임없이 체스를 두고 복기하는 장면이 나온다. 나는 이 장면에서 나의 어린 시절 무료함에 미쳐서 날뛰었던 나의 경험을 떠올렸다.
일상이 안정되면 이제는 심심함에 몸서리친다. 물론, 고문하듯이 강제적으로 자극이 끊어진 것은 아니지만, 아쉽게도 재미있어 보이는 것은 모두 금지되었다. 친구와 진흙 위에서 구르지도 못하고 동네 뒷산에서 서바이벌을 즐길 수도 없고 재미있는 게임도 즐길 수 없다. 접시를 깨고, 유리창에 돌을 던져 시원하게 부서지는 모습이 보고 싶지만 엄마가 감시하고 있다. 그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앉아서 숨 쉬는 것뿐이다. 보통,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 무료함에 정신이 나갈 듯 아득해지다가 본능적으로 이상한 놀이를 만든다. 파괴 본능이 앞설 때는 상상인지 백일몽인지 알 수 없는 가운데에서 악독한 마왕을 쳐부수거나 대량의 기물파괴를 한 후, 본인이 슈퍼맨 마냥 사람들에게 우러러 받들어지는 느낌을 즐기면서 히죽 웃기도 한다. 그리고 주위의 모든 것을 새로 평가하기 시작한다. 갑자기 책장 위의 조형물이 이상하게 생긴 것 같아서 갖고 놀고, 주위의 모든 것을 미친 듯이 갖고 놀기 시작한다. 이때의 경험으로 볼 때, 창의성을 발현시키고 싶다면 사람을 엄청나게 지루하게 만들면 된다. 그러면 광기에 가까운 창의성이 곳곳에 나타날 것이다. 괜히, 지루하기 그지없는 뉴질랜드에서 온갖 창의적인 발명과 발견이 이루어진 것이 아닌 것 같다.
나는 유난히 정신이 산만하고 가만히 앉아있지 못하는 아이였다. 모든 친척들이 이구동성으로 가장 정신 사나운 사람으로 나를 꼽았으니 아마도 객관적으로도 매우 정신 사나운 아이였던 것 같다. 나는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했고, 가만히 있는 것은 정말 끔직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가만히 앉아있으면 몸의 곳곳에서 이상한 감각이 나타나서 나를 미치게 했다. 고통스러운 느낌은 아니고 마치 좀이 쑤시는 것 같은 느낌으로 바로 일어나서 뛰게 만들고 싶은 느낌이었다. 그런 느낌은 지금도 많이 남아있는데 특히 밤에 잘 때 발생하는 하지불안 증후군의 느낌과 거의 흡사하다. 이런 감각이 고통스러운 것은 아니지만 정말 사람을 불편하게 만들고 그 느낌이 지속되면 고통스러워 진다. 그러니 몸과 마음이 전부 개별적으로 무료하고 가만히 있는 것을 참지 못했으니 가만히 앉아있는 것은 온 세상의 모든 기운을 모아서 버티는 것에 가까웠고 1시간만 앉아있어도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로 탈진하기 일쑤였다.
당연히 공부가 잘 될 리 없다. 앉아서 아무런 자극 없이 무료함에 시달리는 것도 싫은데 하고 싶은 놀이를 모두 금지당하고 하고 싶지 않은 공부를 하라고 하면 더 죽을 맛이었다. 그리고 앉아서 문제를 풀면서 몸을 이리저리 꼬다보면 보다 못한 어머니가 가만히 좀 있으라면서 구박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몸을 가만히 있는 것이 너무 싫다 보니 자꾸 지우개를 식탁 밑에 떨어뜨리고 그것을 주우면서 몸을 움직이고 어머니가 안보는 틈을 타서 책 모서리에 움직이는 그림을 그리고, 지우개질을 해서 나온 가루를 뭉쳐서 고무공을 만드는 행위에 집중하기도 했다. 하지만 여전히 재미있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정신적으로 더 이상 견디지 못하면 퇴행을 하게 되었던 것 같다. 처음에는 스스로의 혀를 빨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마치 어머니 젖을 빠는 것 같은 행위인데 스스로의 혀를 살짝 내밀고 그 혀를 빠는 것이다. 그렇게 빨다보면 정신이 가출했다고 돌아오곤 했다. 그저 시간이 지나갔을 뿐 무엇을 했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이 혀를 빠는 행위로 인해서 앞니가 앞으로 돌출되어 나오기 시작하는 바람에 치과 교정을 해야했다. 결국, 혀를 빠는 것은 금지되었고 그래서 손톱으로 피부를 긁는 버릇이 생겼다. 손톱 끝을 살짝 날카롭게 찢어 그 부분으로 피부를 긁다보면 그 감각에 정신이 집중되면서 스트레스가 풀리는 것이었다. 당연히, 이 행위도 하고 있으면 몇시간이고 집중할 수 있지만 그 동안 정신은 먼 곳으로 가출하게 된다.
책 읽는 것을 좋아해도 책상에 앉아서 읽지는 못했다. 그저 누워서 끊임없이 자세를 바꿔가면서 책을 읽었다. 그것이 아무리 재미있는 책이라도 신체가 끊임없이 움직이라고 신호를 보내기 때문에 책을 읽다보면 방구석구석까지 몸을 돌리면서 끊임없이 몸을 비비 꼬면서 책을 읽었다. 다행히도 책이 흥미로우면 몸을 비비꼬면서 온전히 책을 읽을 수 있었다. 하지만 책이 흥미롭지 않으면 몸을 비비꼬면서 책을 던져버리기 일쑤였다.
이런 상황들은 공부에 대한 개념이 전혀 서있지 않았을 때야 그저 공부를 하지 않아도 상관없었지만 사파(邪派)의 공부법을 깨닫고 시험 성적이 잘 나왔으면 하는 마음이 생겼다. 또, 내가 스스로 갖고 있던 시험에 대한 왜곡된 입자으로 인하여 사악한 교사가 학생들을 괴롭히기 위하여 시험 문제를 제출하고 이런 시험을 학생이 당당하게 극복하는 승부처럼 생각했기 때문에 시험이 있을 때마다 아드레날린이 분비되었다. 또, 어머니한테 자랑하고 당당하게 용돈을 요구할 수 있는 순간이었기 때문에 걸린 보상도 커서 시험 성적을 좋게 나오겠다는 의욕으로 충만했다.
특이한 것이 그저 읽는 책은 몸을 비비꼬면서 읽어도 상관이 없지만 교과서는 몸을 비비꼬면서 읽을 수가 없었다. 너무 재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암기할 것을 고르고 암기하는 행위는 고도의 정신적 행위였다. 이 때, 사용되는 에너지가 있어서인지 다른 곳으로 정신이 분산되면 암기하는 것이 어렵게 느껴지곤 했다. 그래서 몸을 비비꼬면서 공부하는 것이 힘들었다. 그래서 속으로 몸을 비비꼬지 않으려고 하면 바로 손톱을 세워서 피부를 긁기 시작했다. 이렇게 되면 공부는 더 이상 문제가 아니었다. 몸을 비비 꼬는 것은 약간 자족적인 행위다. 나가서 마구 뛰고 싶은데 그러지 못하니 욕구를 달래는 과정인 것이다. 그러다가 더 이상 버티지 못하면 손톱을 세워서 피부를 긁는다. 그리고 그 느낌에 중독된다. 정말 재미있는 책을 읽을 때는 책에서 전개되는 흥미진진한 내용 때문에 그런 행위에 몰입하는 것이 책에 몰입하는 것 같은 효과를 주기도 한다. 하지만 공부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냥 어느 순간 더 이상 공부를 하지 않고 그 행위에 몰두하고 있는 것이다.
<관련 포스팅>
03_내가 해오던 공부방식(사파(邪派)식 공부를 깨닫다.)
06_내가 해오던 공부방식_온몸이 뒤틀리는 경험_01 ☜ 지금 여기
07_내가 해오던 공부 방식_온 몸이 뒤틀리는 경험_02
12_내가 해오던 공부방식_무협의_세계로_03_모험의_결론
14_내가 해오던 공부 방식_무협_05_자기 계발서 중독
16_내가 해오던 공부 방식_어떻게 문제를 풀 것인가?
'어떻게 공부할까?' 카테고리의 다른 글
08_내가 해오던 공부 방식_쾌락독서 (0) | 2017.11.20 |
---|---|
07_내가 해오던 공부 방식_온 몸이 뒤틀리는 경험_02 (0) | 2017.11.18 |
05_내가 해오던 공부방식_탈출의 수학 (0) | 2017.11.14 |
04_내가 해오던 공부방식_자유(自由) (0) | 2017.11.13 |
03_내가 해오던 공부방식(사파(邪派)식 공부를 깨닫다.) (0) | 2017.11.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