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학 수업을 들으면서 뇌를 구성하고 있는 신경세포에 대해서 처음 배웠다. 이를 통해서 많은 영감을 받았다. 


 그 영감의 하나는 2000년 당시 많은 비판을 받고 있었던 기계적 환원주의의 한계를 본 것이다. 당시 비판의 포인트는 기계적 환원주의가 모든 것을 단순한 것으로 분할함으로써 모든 인간적 가치를 훼손한다는 것이었는데 별로 동감하지는 못하다가 기계적 환원주의가 복잡성을 다루기 어려워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원래, 기계적 환원주의는 복잡한 것을 단순한 것으로 쪼개는 전략이다. 즉, 문제를 단순화하기 위한 전략인 것이다. 하지만 단순한 것들로 쪼갰는데 상호작용이 더 복잡해져 버리면 기계적 환원주의 전략은 실패하게 된다. 


 이러한 기계적 환원주의의 한계는 항상 쪼개는 것이 옳은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갖게 해주었다. 모든 사물과 현상은 다양한 층위를 가진다. 만일, 사람이라고 한다면 사회적 층위, 역사적 층위, 개인사적 맥락, 신체의 기능, 유전, 세포의 개별 행위 까지 수많은 층위로 이루어진다. 아무리 세포를 연구해도 사람의 사회적 층위나 역사적 층위를 알아내긴 어렵다. 이것들은 개별 세포의 합으로 설명할 수 없고, 그 위에 얹어진 것들이기 때문이다. 전체는 부분의 합보다 더 큰 무엇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더 단순한 것으로 쪼개어 연구하는 방법이 있다면 다 상위의 층위를 관찰하여 연구하고 이들을 상호 비교함으로써 보다 종합적이고 완전한 통찰로 나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그럼에도 이공계로서 기계적 환원주의는 여전히 유효한 전략이라고 생각한다. 단지, 이 복잡한 상호작용들을 체계적으로 분류하고 각각의 역할을 판단하는데 많은 시간과 노력, 그리고 비용이 들어갈 것으로 예상했다. 그리고 물리학이 통계물리학을 받아들이고, 양자역학이 확률적인 존재 양태라는 것을 받아들인 것처럼 새로운 이론 체계를 구축하고 유효한 관찰과 실험을 하는데 많은 난제가 있고 오랜 시간이 걸릴 것으로 예상했던 것뿐이다.


 또, 다른 하나는 뇌와 신체기관은 분리되지 않는다는 깨달음이었다. 우리의 신체와 뇌는 컴퓨터와 각종 디바이스처럼 전선으로 연결되어 꼈다 뺐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뇌가 신체 전반에 신경이라는 뿌리를 내리고 상호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더 정확한 모델이라는 개인적인 확신을 가지게 되었고 그렇게 들여다보기 시작하니, 손가락 끝에는 뇌가 있고, 뇌에는 손가락 끝이 존재하는 상호 반영이 즉각적으로 이루어지는 체계가 보이기 시작했다. 더 곰곰이 따져보니 뇌가 신체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체기관의 각 부위가 뇌라는 곳으로 모여서 연합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편이 보다 단순하고 명확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뇌가 신체의 모든 부위의 연합이라고 생각한다고 해서 뇌가 어떤 자체적인 역할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뇌에는 이성, 지능, 이타심 등 고등한 정신적 작용이 이루어지는 영역이 있을 것이다. 단지, 이 고등한 정신작용들은 신체의 모든 기관들의 ‘사이’에 있다고 생각할 뿐이다. 그리고 그 ‘사이’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 매우 중요한 것처럼 보였다. 


 이제 앞서의 주제로 돌아가 보자. 심리학 강의는 지능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서였다. 하지만 심리학은 지능이라는 것에 대한 납득할만한 설명을 해주는 것 같지 않았다. 그러다 신경세포를 보고 신체 기관 위주의 정신모델을 새롭게 상상하면서 인간의 고등한 정신작용과 지능이라는 것을 스스로 어느 정도 정의할 수 있게 되었다.


 우선 인간의 고등한 정신작용과 지능은 인간의 조건 하에 있다. 인간의 고등한 정신적 능력은 신체 기관의 ‘사이’에 존재한다는 모델이므로 신체 기관이 있어야 그에 부수한 지능도 있는 것이다. 즉, 팔다리가 있으면 지능은 그 팔다리를 어떻게 움직여서 문제를 풀 것인지 알아낸다. 하지만 팔다리가 없으면 지능은 팔다리를 움직여서 문제를 해결한다는 생각 자체를 하지 못한다. 즉, 지능은 팔다리를 어떻게 움직일지 판단하는 지능인 셈이다. 팔다리가 선천적으로 없으면 팔다리를 어떻게 움직여서 어떻게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눈과 귀가 있고 기억이 있으므로 무엇을 보고 무엇을 들었는지 떠올리고 그 정보에 따라 지능이 작동한다. 선천적으로 시각이 없으면 본다는 것을 떠올릴 수 없고, 시각적 정보는 반영되지 않는다. 지능은 인간처럼 보고 듣고 움직일 수 형태를 가지고 인간의 한계를 그대로 반영한다.


 그러면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지금 현대과학의 정수들은 그렇게 손발을 움직이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추상성을 갖고 있지 않은가 하고 말이다. 양자역학의 반직관적이고 상상으로도 가능하지 않은 양상을 발견하고 계산할 수 있는 것은 신체적이고 인간적인 한계를 넘어선 것이 아닌가 하고 말이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문자와 기호 수식 등이 있어서 가능하다. 추상화된 것을 현실적인 것처럼 다루게 해주는 도구가 바로 문자와 기호, 수식 등이다. 물론, 이 문자와 수식을 넘어서서 작동하는 추상적인 정신활동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것이 문자나 수식 ‘사이’에서만 작동한다고 생각할 뿐이다. 


 문자는 인간의 짧은 기억을 극복하게 해준다. 7개 정도만 저장할 수 있는 작업 기억을 시각으로 보충해주어 매순간 모든 것을 한꺼번에 기억할 수 없는 인간의 부족함을 보충해준다. 수식은 엄격한 규칙을 적용함으로써 진리의 형태를 계산할 수 있게 해준다. 우리는 다양한 개념을 기호화하고 이를 수식으로 배열함으로써 다양한 진리를 발견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시청각적인 신호를 통해서 발생한다. 이러한 시각과 청각의 신호를 이용하여 기억을 보존하고 유지할 수 있는 문자와 수식이 없다면 고등한 정신작용과 지능은 지극히 찰나적으로만 존재할 것이다.


 신체기관의 ‘사이’에서는 오감과 기억이 연합되고 신호 정보를 추상화하고 방향성을 부여하는 작용이 일어나는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것이 바로 인간의 고등한 정신작용이 아닐까 추정된다. 그리고 그러한 작용 중 일부를 지능이라고 부르는 것 같다. 지능이라는 개념 자체가 근대 과학의 출현과 함께 예감, 본능, 직감 등 다른 다양한 정신적 작용과 구분하고 이상화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개념인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취사선택되는 정보가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현실 기반 증거일 때, 지능이라고 부르고, 자신의 경험을 기반으로 하면 예감이나 직감 등으로 부르는 것일 뿐 그 근본적인 작용방식이 달라 보이지는 않는다.


 신경세포를 보면서 받은 영감으로 이것저것 추론과 생각을 나열했지만 검증된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 스스로 생각한 가설들이 나름 괜찮아 보였기 때문에 보다 깊이 파고들어가고 싶었다. 하지만 신경세포 단위에서부터 연구해 올라가는 것은 앞서 설명한 것처럼 별 성과를 이루기 어려운 특히, 한국에서라면 더더욱 성과가 없을 것 같았고 그 과정도 매우 지루할 것 같았다. 


 그래서 다른 것에 흥미를 가졌다. 그것은 종합적으로 사람을 바라보고 관찰하는 것, 즉 사람의 행위와 사상에 대한 관찰이었다. 우리의 고등한 정신작용이 신체기관의 ‘사이’에 존재한다는 생각의 또 다른 결론은 추상적인 정신만을 분리해서 관찰하는 것이 어렵고 동시에 그러한 모델로는 고등한 정신작용을 온전히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즉, 뇌라는 기관이 별도로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오감과 신체의 결합이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인간의 조건에 종속되어 있다. 따라서 인간의 행위와 사상을 관찰하는 것이 바로 곧 인간을 관찰하는 것이고 인간의 고등한 정신작용을 관찰하는 것이 된다. 중요한 것은 올바른 모델을 구축하기 위한 시행착오라는 생각이었다. 또, 추후 신경에 대한 환원주의적 연구가 좀 더 궤도에 오르게 되면 스스로 발견한 것들을 그것과 맞추어 봄으로써 보다 종합적인 통찰에 도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게다가, 이항관계의 발견과 같은 인간의 구조적인 특성을 발견하다 보면 보다 추상적인 단위에서 인간의 모델을 구축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심리도 강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의 이런 생각은 철학이나 인문학에 끌리던 마음을 정당화하기 위한 생각이 아니었나 싶다. 이공계 공부에 과학철학의 도움을 받은 이후 마음이 급격히 인문학 공부에 쏠렸고, 특히 정신분석이나 인간의 본질에 대한 인문학적인 연구에 마음이 쏠리면서 이공계 공부에는 별다른 흥미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여하튼, 신경세포를 보고 인간의 정신에 대한 가설을 스스로 만들고 이를 자화자찬 하면서 그 뒤 몇년간은 인간의 사상을 관찰한다고 인문학 독서에 푹 빠진 채 점점 현실과 동떨어진 자신만의 탐구의 세계로 들어가게 되었다. 물론, 현학적인 생각만 많아졌을 뿐 스스로 만족할만한 새로운 발견이나 발전이 이루어지진 않았다.

나는 이공계인데 수학 성적이 가장 나쁘다. 솔직히 수학으로만은 전교1등을 해도 괜찮을 정도로 공부했지만 실제 성적은 평균보다는 조금 높은 수준에 불과하다. 사실, 이것은 수학에 대한 완벽하게 잘못된 접근이고 동시에 나 개인에게는 유일하게 가능한 접근법 때문에 발생한 일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나의 수학에 대한 접근법을 이야기해보고 싶다.

 

당시에는 본고사라고 해서 각 대학별로 수능 외의 시험을 각 대학별로 주관식 서술형으로 보던 때라서 문제의 난이도가 엄청나게 높았다. 게다가 해당 문제를 풀어낸 과정에 대하여 일일이 서술하고 그 과정이 합리적이어야만 답안을 정확하게 작성한 것으로 인정받았기 때문에 수학문제를 풀면서 논리를 어떻게 전개할 것인지도 고민해야만 하던 시절이었다. 학력고사가 없어지고 수능과 본고사로 시험방식이 대체됨에 따라서 국어와 영어, 그리고 수학의 중요성은 훨씬 더 높아지게 되었다.

 

수능이 나온 배경의 한 축에는 주입식 위주의 교육에서 단순히 암기하여 맞추는 학력고사가 아니라 창의적 교육을 하고 암기보다는 합리적인 추론과 창의적 생각을 유도할 수 있는 방식의 시험이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있었다. 그렇게 나온 것이 수능이었다. 당시 언론에서는 그러한 수능의 장점에 대해서 엄청나게 홍보하면서 주입식 교육과 암기 위주의 시험을 엄청나게 비판했기에 나도 당연히 그러한 대세에 따라서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에게는 수능이 학력고사보다 훨씬 유리했고 암기하는 것이 너무 싫었기 때문에 더더욱 그러한 언론의 홍보에 따라서 주입식 교육을 증오하고 암기를 격렬하게 배척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냥 대세에 따라서 생각하는 수준에서 멈췄으면 이익만 보고 끝낼 수 있었는데 거기서 누구도 가지 않는 한발을 더 나아가버리면서 문제가 생겨버렸다.

 

국사나 세계사의 역사 과목이나 생물, 지리 같은 과목들은 필연적으로 암기를 할 수 밖에 없다. 일단, 암기하는 것이 공부의 전부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물론, 오늘날에는 이야기를 만들고 생생하게 함으로써 이런 단순 암기에서 탈피하려고 하는 노력을 하지만 공부는 결국 암기의 형태로 마무리 된다. 그건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수학은 나에게 결코 암기의 대상이어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두 가지 요인 때문인데, 하나는 중학교 1학년 때 시계문제를 풀면서 직접 시계를 관찰하고 증명하고 풀어낸 것으로 인하여 수학에 대한 자신감과 함께 수학이라는 과목에 대한 심상도 같이 구축되었기 때문이다. , 나에게 수학은 지혜의 학문이었다. 사물을 관찰하거나 어떤 사실을 논리적으로 연역해서 이를 기반으로 증명하는 것이 내가 수학에 가진 심상이었다. 이때, 중요한 것은 논리적 추론과 사물에 대한 관찰이지 암기해서 문제를 푸는 것은 아니었다. 결국, 나에게 수학은 단순하고 기계적 반복과 정반대의 위치에 있어야 했다. 나의 이런 심상은 평소라면 그냥 그렇구나 하고 넘어갔을 일인데, 이미 다년간의 신비주의 연구 경험을 통해서 관련 자료를 찾고 이를 실행에 옮기는 것이 몸에 붙으면서 수학에서 암기라는 행위를 축출하는 과정을 실제로 수행하게 되었다.

 

방법은 간단했다. 수학 문제를 풀어보고 해당 문제를 풀었던 경험을 다 잊는 것이다. 그리고 그 문제를 원점에서 다시 푸는 것이다. 이런 유형의 문제는 이렇게 저렇게 푼다는 식의 유형을 외우지 말고 해당 문제를 최대한 다각도로 살펴보고 진지하게 고찰한 후 해당 개념의 정의부터 시작해서 구축해 나가는 식으로 공부하는 것이다. 나는 이 과정을 지혜의 단련이라고 생각했다. 이미 활용하기 시작한 심상을 이용해서 개념의 정의부터 근본적으로 생각하면서 어떤 문제를 모든 방향에서 차근차근 생각하는 훈련을 통해서 실제로 정신과 뇌를 훈련하고 개발한다고 생각했다. 더 어려운 문제를 풀면 풀수록 집중력과 뇌가 개발된다는 식의 심상을 구축했기 때문에 수학문제를 정말 탐욕스럽게 풀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그 심상에는 해당 문제를 전혀 외울 필요가 없다는 인식도 같이 프로그램 되었다.

 

눈치 빠른 분이라면 알겠지만, 이 실험은 정말 처참한 결과를 안겨주었다. 고등학교 3학년 내내 열정적으로 수학만 공부했고, 하나의 문제를 3일 밤낮을 붙잡고 고민해서 풀기도 했지만 대학입시에서 가장 성적이 안 좋은 과목은 수학이었다. 수능과 본고사 모두 최악의 결과를 받았다. 슬프지만 가장 좋은 성적을 받은 것은 국어였다. 아마도 거기에 재능이 있었나 보다.

 

사실, 실패는 이미 예견되어 있었다. 신비주의 연구에서와 마찬가지로 수학문제를 푸는 것과 관련된 책을 찾아서 읽어보기 시작했는데, 당시 스스로 골몰하던 문제에 대한 가장 밀접한 논의를 진행하고 있었던 책은 G. 폴리아의 어떻게 문제를 풀 것인가?라는 책이었다. 이 책의 주요 논지는 수학 문제를 풀 수 있는 만능키와 같은 방법론은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수학문제를 잘 풀기 위해서는 문제 유형을 외우고 이를 정복하는 과정을 통해서 점차적으로 쌓아나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암기와 문제유형에 대한 학습을 배제해야한다고 생각했던 나와는 정반대의 방법론인 셈이다. 하지만 어리석게도 나는 이를 이렇게 해석했다. “현재까지는 만능키와 같은 방법론이 개발되지 않았고 나중에 개발될 수는 있다. 그리고 그런 발견을 내가 해볼 수도 있다.”라는 식으로 전환해서 생각했다. 또한, 스스로 만들어낸 방법이 무협지에서 수련하듯이 정신과 뇌를 단련하는 개념에 가깝다 보니 수학문제를 통해서 해당 문제를 모든 방향에서 바라보고 근원적인 개념부터 구축해서 정신을 과하게 움직이는 훈련을 하는 것에 가깝다 보니 수학문제를 푸는 방법에 천착한 책의 내용을 어느 정도 외면해 버렸다. 그러면서 속으로는 이렇게 해서 시험을 잘 보겠다.”하는 오기도 같이 작동했으니 지금 다시 생각해보면 많이 어리석은 행태였던 것 같다.

 

그런데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망각하는 것이 가능할까? 처음에는 힘들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놀랍게도 망각이 되었다. 나중에는 똑같은 수학문제를 3분 안에 다시 봐도 문제를 어떻게 풀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당시에는 그냥 문제 풀이를 망각한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은 수학문제를 망각한 것이 아니다. 그냥 해당 문제를 기본적인 개념으로 축소하는 것에 골몰하다 보니, 그냥 기본 개념만 강화된 것이고 문제 유형을 외울 생각이 없으니 그 문제 유형이라는 생각의 틀이 만들어지지 않아서 그런 지식은 스쳐지나가 버린 것이다. 게다가 스스로 그런 문제의 유형이나 해법을 외우지 않겠다고 속으로 다짐하다 보니 그 쪽으로의 무의식적인 거부도 작동해서 사고의 틀도 왜곡된 것 같다.

 

당연히 이런 망각의 영향 때문에 당연히 부작용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어떤 문제를 간단하게 풀다가도 5분 후에 보면 어떻게 풀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으니 다시 푼다. 그런데 이번에는 3일 밤낮을 집중해도 풀리지 않는다. 이러니 매일 매일의 컨디션에 따라서 수학문제가 쉽게 풀리기도하고 어렵게 풀리기도 한다. 그래서 공부를 아무리 열심히 해도 시험 당일 컨디션이 좋지 않거나 이상한 생각에 사로잡혀 버리면 간단한 문제도 못풀기 일쑤였다. 그리고 망각하는 것이 무의식적 억압으로 작동한 것인지 어떤 문제를 쉽게 풀게 되면 그 문제를 다시 풀 때 그 방법은 잘 떠오르지 않았다. 이것은 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덕분에 문제 풀이를 많이 할수록 수학성적이 떨어지는 역설적인 상황이 나타났다. , 문제풀이를 기억하지 않겠다는 스스로의 생각이 억압으로 작동하면서 자승자박의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 두 번째 모험으로 인해서 얻은 것은 슬프지만 객관적으로는 부작용말고는 없다. 공부할수록 성적이 떨어지는 공부법이라니 이런 희극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회되지는 않는다. 경제학적인 사고방식으로 그 시간에 제대로 된 공부를 했다면 얼마나 좋은 성적을 얻고 스스로 발전했겠는가를 따지는 기회비용을 들이대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난 오히려 반대로 그러한 호기심과 열정을 꺾지 않아서 다행이었다고 생각한다. 그 호기심과 열정을 꺾었으면 당연히 게임과 친구, 만화책 등에 몰두했지 공부하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런 시행착오가 아깝다는 식의 생각을 못했기 때문에 스스로 완전 연소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실패와 성공은 모두 나만의 유일한 경험이 되어주었고 스스로의 정체성이 되어주어서 내가 스스로의 비루한 삶이라도 온전히 그 삶의 주인이 되게 해주었다.




무협지에 등장하는 고수가 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것이 나의 첫 번째 질문이었다. 그리고 이런 내용을 다루는 책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래서 그러한 책들을 탐욕스럽게 읽어댔다. 그런데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따라하거나 스승없이 수행하면 주화입마를 겪을 수 있다고 경고한다. 그러자 두 번째 질문이 튀어나왔다.

 

이 책이 말하는 내용을 어떻게 정확하게 이해할 것인가?

 

한문도 모르고, 배경이 되는 동양철학도 모른다. 일단, 한글로 번역된 책들을 찾아서 읽어본다. 너무 어려워 나에게 맞는 수준의 책을 골라서 읽는다. 수도 없이 책을 펼쳐보고 사보고 읽어본다. 그래도 이해하기 어렵다. 조금 다른 관점으로 말하고 있는 책을 읽어본다. 그랬더니 서로 말이 다르다. 누가 옳고 누가 그른가? 다시 질문이 나온다.

 

어떤 책은 믿을만 하고 어떤 책을 믿을 수 없을까?

 

어떤 것은 허황된 것 같고 어떤 것은 조금 현실성이 있어 보인다. 읽어본 책들을 현실 가능성, 근거 제시 등으로 신뢰할 수 있는지 판단해보고 신뢰 등급을 매긴다. 그리고 신뢰등급 수준에 따라서 서로 공통으로 지지하고 있는 사실과 서로 비난하는 사실을 나누어 가장 안전하게 공통으로 지지하고 있는 것 위주로 방법을 구축한다. 실행 방법에 있어서도 큰 부작용이 발생할 여지가 없다고 판단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실행하기 편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으로 나누어 방법을 구축한다. 결국, 이구동성으로 옳다고 말하는 바를 중심으로 실행할 수 있고 큰 부작용이 없을 것 같은 것으로 실행 플랜을 짠다. 그랬더니 갑자기 이 세계가 이해되며 결론에 도달한다.

 

그래서 기공류, 요가류, 명상류 등이 말하는 바는 결국, 심상(心象)의 구축이고 그 외의 내용들은 내 스스로의 욕망에 내가 휘둘리고 있구나 하는 결론에 도달한다.

 

이 모든 것은 스스로 생각하고 연구하는 과정이었다. 관련 내용을 친구들에게 이야기하면 비웃음 당하고 선생님들에게 말하면 이상한 눈으로 본다. 부모님은 걱정했고, 친척들은 괴짜에 천방지축이라고 생각했다. 결국, 혼자 할 수밖에 없었다. 세상 물정 모르는 중학생이 중2병스러운 집착과 탐욕으로 연구를 하니 연구의 동력은 충분했다. 겉으로는 객관적으로 파악하는 척 열심히 꾸며댔지만 속으로는 곧 무림이 고수가 되어서 그 결과를 보여주마 하는 어리석음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돈에 눈이 멀어 무슨 짓이든 마다하지 않는 어리석음처럼 나도 무림의 고수가 될 수 있다는 것에 눈이 멀어 사람들이 아무리 충고해도 그것을 듣지 않고 연구를 계속했다.

 

이것은 분명한 어리석음이었다. 현실적으로 무림의 고수가 있다면 사람들의 주목을 받을 것이고 알려질 것이 거의 분명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에서 유명한 무술가는 수십년의 고련 끝에 소의 뿔을 꺽은 최배달, 이소룡, 역도산 같은 이 뿐이었다. 물론, 그들의 무술도 어린 아이 눈에는 너무 대단해 보였지만 너무 어렵고 고된 길로 보였고, 그 때 당시의 현실에서는 도전할 수 없는 방법이었다. 친구들 어른들 모두 이러한 어리석음을 바로잡아 주려고 말했지만 스스로는 그럴수록 더 현실을 부정하고 연구를 계속했으니 완전히 탐욕에 물들어 눈이 어두워진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어리석었던 것은 분명하고 결과도 그다지 좋지 않았다. 특히, 이 때 잘못 배우고 내린 결론 때문에 20년간 체증에 시달려야 했지만 후회하느냐고 묻는다면 전혀 그렇지 않다고 대답할 것이다. 이것은 나의 첫 연구였다. 제대로 알기 위해서 노력하고 사색하고 연구하고 진위를 판단하고 실천해보고 하는 과정이 모두 동반되었다.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마다 그 희열에 기뻐했고 기대했던 바가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낙담하기도 했다. 비록 공부해야하는 중고등학교 시절이었지만 이 탐욕에 눈이 먼 어리석은 연구가 너무 재미있었다. 하루 종일 사색하고 가정하는 버릇이 생겼고 스스로의 머리와 눈으로 진위를 가리려고 노력해볼 수 있었다. 비록 원하는 만큼 좋은 결과를 맺지는 못하고 결과적으로 시간 낭비가 되기도 했지만 다른 친구들이 음악과 게임에 빠지듯이 나도 이러한 연구에 빠진 것이니 꼭 낭비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충분할 정도로 이득을 얻은 것 같다.

 

우선, 나는 개성이 생기고 권위자가 되었다. 전교생 중에서 이런 분야를 잘 알고 있는 친구는 내가 유일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좋든 싫든 유일하다는 자신감으로 연결되었다.

 

두 번째로는 이 분야의 공부를 통해서 원하는 결과는 얻지 못했지만 부수적으로 얻은 기술들이 정말 많았다. 심상에 대한 이해를 통해서 공부하기 싫어하는 내 스스로를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명상과 여러 수행을 통해서 단기적으로나마 상당히 강력한 집중력을 쓸 수 있게 되었다. , 이미지 트레이닝 기술, 다독(多讀), 밤새기, 공부를 지속할 경우 발생하는 어깨의 통증과 허리 통증 다루기, 운동 방법, 그리고, 사람에 대한 나름의 이해가 쌓이면서 나의 불안한 기질과 산만함 등을 정면으로 꺾지 않고도 통제가 가능하게 되었다는 점도 큰 이득이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연구를 한다는 개념을 알게 되었던 점이 가장 컸다. 궁금한 것을 찾아보고 체계를 세워보고 진위를 가리고 하는 것이 너무 재미있었다. 물론, 그 방법은 전혀 과학적이지 않았기에 잘못된 결론에 도달했지만 그 잘못된 결론도 내가 열심히 머리 싸매고 고민해서 얻어낸 소중한 성과였고 당연히 사랑스러웠다. 단순히 책에서 읽은 것을 주장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살아 움직이는 지식들이 구축되었고 그러한 지식을 구축하는 것이 너무 즐거웠다. 이때부터 잘못된 방법으로나마 열심히 호기심을 탐구하고 진위를 최대한 가리고 연구하고 사색하는 버릇이 생기게 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평생 나의 정체성이 되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