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좋아하면 미치는 법이다. 영웅문을 보면서 난생 처음 겪은 강력한 쾌락은 바로 부작용을 동반했다. 다시 똑같은 감동을 느껴보고 싶은 욕심에 관련 작품을 찾아서 서울 시내를 전부 뒤졌다. 마치 금단증세에 시달리면서 약을 찾는 사람들이 이런 몰골이 아니었을까? 조금의 시간만 나면 교보문고나 종로서적 같은 대형서점을 방문해서 각종 무협지를 찾기 바빴다. , 이리 재미있었을까? 왜 이렇게 그 무협의 세계에 탐닉하게 되었을까? 앞서 영웅문의 그 심원한 깊이와 신필에 대한 찬양을 마구 늘어놓았지만 중학교 1학년에 이제 막 올라온 꼬맹이가 그 심원한 깊이를 어찌 알았겠는가? 각양각색의 인물들이 역사의 도도한 흐름과 함께하면서 희로애락을 보이면서 흘러가는 것이 큰 인상을 주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어려서부터 열심히 무공을 배워서 강해진다는 설정이 나를 매혹시킨 것이다.

 

어린 시절 많은 남자 아이들이 슈퍼맨을 동경한다. 보자기를 망토처럼 두르고 슈퍼맨이 된 기분을 내고 다니던 나와 친구들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하지만 슈퍼맨은 지구인이 아니다. 그저 외계인이기 때문에 슈퍼맨이 될 수 있었다. 그저 주어진 것이다. 슈퍼맨의 기분을 내는 그 누구도 우연이라도 슈퍼맨이 될 수는 없다. 역시, 인기 있는 슈퍼 히어로들인 스파이더맨이나 헐크, 후레쉬맨 같은 것들은 누구나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평생 다시 없을 우연들이 겹치면서 되거나 태어날 때부터 그냥 되는 것이다. 돌연변이 거미에게 물렸거나 남들은 다 죽는 방사능에 오염되었거나 이상한 약을 먹었거나 해야 한다. 결국, 선택된 사람들만 슈퍼 히어로가 된다. 그런데 김용의 소설에서 읽은 내용은 조금 달랐다. 거기에도 우연과 선택이라는 요소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슈퍼맨보다는 훨씬 수월하게 슈퍼 히어로가 될 수 있는 비법을 제시하고 있었다.

 

무협에 나오는 무공은 이전까지 서유기나 전우치전, 머털도사에서 나오는 도술과는 조금 달랐다. 도술은 그저 주문을 외우거나 특별한 물건을 휘두르면 결과가 바로 튀어나오는 것이지만 무협에 나오는 무공은 두발 자전거를 타기 위해서 연습하는 아이의 노력과 닮아있었다. 당연히 두발 자전거를 타기 위해 연습을 해본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숙련되고 발전하는 감각을 잘 알고 있다. 처음엔 무서웠지만 어느 순간 자신감이 붙고 자연스럽게 두발 자전거를 타게 된다. 그런데 무협의 고수들은 이 두발 자전거를 타는 수준을 높인다. 두발 자전거가 외발 자전거가 되고 외발 자전거를 하나의 밧줄 위에서 타고 있는 느낌이다. 슈퍼맨처럼 하늘을 날 수는 없지만 정말 미친 듯이 노력하고 연습하면 약간의 재능이 있다면 외발자전거를 탈 수 있을 것이다. 그에 이어서 외발자전거로 밧줄타기를 해볼 수 있을 것 같다. , 무협에서 제시하는 무공은 이러한 가능한 것들을 조금 과장하여 묘사하거나, 쉬운 재주들을 여러 개 섞어서 극한의 기예를 만드는 형식이었다. 또한, 힘을 강화시키기 위해서 고통스러운 훈련을 해야 하는 부분도 현실감을 강조해주었다.

 

이러한 현실감은 나도 주인공처럼 무예를 전수받아 강해지고 싶다는 욕구로 발전했다. 당연히 이 욕구는 학교에서 싸움도 못하고 공부도 잘 하지 못해 주목 받지 못하고 큰소리도 치지 못하고 사는 나의 열등감에 대한 반동이이기도 했다. 열등감은 정말 괴롭다. 무의식적으로 이미 스스로 스스로의 존재를 낮추고 비난하고 있는 것이 열등감이다. 그 고통이 너무나 크기 때문에 그것을 인정하기 어렵다. 오히려 그 반대로 행동하려고 한다. 내 경우는 희망을 썼던 것 같다. 영웅문에서 본 주인공처럼 비록 지금은 비루해도 스승님을 찾아서 무예를 익히고 나면 달라질 것이라고 스스로를 달래는 것이다.

 

무협의 핵심은 내공이다. 외공은 운동과 기예를 단련하는 것이고 내공은 그 내면에 폭발적인 에너지를 갖추는 것이다. 외공은 체육 시간에 열심히 하고 운동을 하면 얻을 수 있는 근육의 힘이지만 내공은 내면의 신비한 힘이고 내공이 있어야만 진정 강해질 수 있다. 하지만 내공을 수 있는 방법은 너무 뜬구름 잡는 식으로 설명해 놓아서 내공을 얻기 위한 방법을 찾거나 스승을 찾아야 했다.

 

어른들에게 무협의 세계처럼 나도 무술을 익히고 싶다고 하면 다들 표정이 이상해졌다. 슈퍼 히어로의 존재를 현실에서 완전히 부정한 것과는 달리 무술의 세계를 완전히 부정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별로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고 그런 세계를 어떻게 경험해야 하는지 잘 몰랐다. 지금 생각해보면 동양의 오랜 판타지로써 무협의 세계가 은연중 어딘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그 실체를 명확히 아는 사람도 없었고, 무술한다는 사람들에 대한 인식이 그다지 좋지 않았던 것 같다. 주위에 내공을 닦는 방법을 아는 사람이 없었고 반응도 별로 좋지 않아서 반쯤 포기하고 있었는데 친척 집에 갔다가 중국기공이라는 책을 보게 되었다. 기공(氣功)이라니 내공의 또 다른 표현이 아닌가? 잘은 모르겠지만 내공에 대해서 설명한 책들이 있을 것 같았다.




영웅문은 김용의 사조영웅전, 신조협려, 의천도룡기의 3개의 작품을 하나의 세트를 묶은 작품이다. 처음에는 영웅문을 읽고 무협이라는 장르가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관련 무협지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은 무협지의 즐거움은 아니었다. 와룡생(臥龍生)의 무협을 보면서 재미없다고 느꼈고, 국내 작가들이 쓴 무협지는 사춘기 소년들의 마음을 사정없이 끌어당기는 19금 컨텐츠로 무장하셨지만 영웅문의 즐거움에 비교할 수는 없었다.

 

결국, 영웅문의 즐거움을 다시 누리기 위해서 그 작가 김용의 작품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이 작가는 이미 절필 선언을 해버렸기 때문에 한정된 작품을 끊임없이 다시 읽는 수밖에 없었다. 절필하고 나서 중3이었던 시절 화산논검이라는 작품이 나왔는데, 이 작품이 김용의 작품인가 아닌가로 친구들과 처절하게 논쟁한 것이 아직도 생생하다.

 

중학교 1학년부터 군대를 가기 전까지 반복적으로 김용의 작품을 읽고 또 읽으면서 이 작품이 왜 이리 재미있는 것일까? 라는 의문이 항상 들었고, 읽을 때마다 그 필력에 감탄에 감탄을 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그 의문을 풀 수 있는 사건이 발생했다.

 

대학에 올라와서 교양으로 동양철학 수업을 들으면서 풍우란씨의 중국철학사를 읽게 되었다. 그런데 읽으면서 구절구절이 너무 친숙한 것이다. 수업 때문에 의무감으로 읽으려고 펼쳤던 책이 순식간에 읽혔다. 그리고 혹시나 하면서 다시 김용의 작품들을 살펴보았다. 중국철학이 영웅문에 그대로 녹아있었다.

 

주인공들이 처하게 되는 상황은 고사에서 인용되는 경우가 상당수 보였고, 등장인물들은 역사적인 격동기를 사는 사람들임과 동시에 각 개인이기도 했다. 그래서 애국, 애민, 공정함과 명예 등의 공적인 가치를 추구하면서도 각 개인의 욕망과 영달을 추구하기도 하고, 자신만의 가치를 추구하기도 하면서 그러한 공적인 가치들이 개인적 친분과 사랑, ()과 끊임없이 대립하고 있다. 유교적이고 민족적인 양심과 공의를 등에 짊어지고 나아가면서, 노장적이고 도가적인 가치로 속세를 벗어나 은거하면서 그 내면의 욕망과 투장하기도 하고, 불교적인 깨달음으로 돌아가기도 하는 등, (), (), ()가 역사 속에 처한 인간의 나아가야할 당위와 친구간의 우정, 남녀간의 애정과 어우러져 장대한 조화를 그리고 있었다.

 

, 각종 무술의 초식의 이름과 성격은 단순한 모양을 흉내낸 것에서 깊은 철학적 이치를 포함하는 것 까지 그 층계와 깊이에 따라서 다양한 양상으로 이름을 붙이고 있다. 가령, 개방의 호신무공인 항룡십팔장의 초식명은 주역 건괘의 효사(爻辭)였고 초식을 겨루고 이치를 겨루는 것은 사실은 아름다운 한시(漢詩)를 녹여낸 경우가 많았다. 말싸움을 하는 장면에서도 각종 고사와 궤변이 동원되고 제자백가의 하나인 명가(名家)백마는 말이 아니다.’가 자연스럽게 녹아 있는 부분은 정말 감탄밖에 나오지 않았다.

 

결국, 김용의 작품은 무협이면서 동시에 등장인물들은 시대적 배경과 자신이 속한 곳에서 나아가야할 바를 찾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키기 위하여 노력하면서 그 다양한 가치를 삶과 밀접하게 연결된 다양한 철학의 이치로 형상화한 무()로 극복하려고 하는 의지를 보여주고 그것이 어떻게 결론 나는지 까지 자연스럽게 이어짐으로써 삶의 명쾌한 이치까지 보여준다.

 

김용의 작품 한줄한줄이 거의 대부분 고전과 경전에서 인용하였으면서 전혀 서로 거부감 없이 연결되어 다양한 가치와 인간의 군상을 묘사하고 있다. 그런데 이 모든 내용이 전혀 어색하지 않고 중국철학을 전혀 모르는 사람도 아무런 부담없이 즐겁게 즐길 수 있게 글을 썼으니 어찌 신필(神筆)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런 책이었으니 책이 마약처럼 사람을 중독시킬 수 있는 것이다. 그 모든 철학이 역사와 지리, 사람과 자연스럽게 조화되어 재미있는 이야기로 엮였으니 어린 마음에 읽어도 전혀 부담없이 재미있었고, 작가의 깊은 내공의 편린을 공유하면서 마약같은 쾌감을 맛보게 되어 처음 읽으면서도 그대로 매료되어 버린 것이다. 그리고 읽으면 읽을수록 그 속에 담기 그 깊은 맛이 어우러져 나오니 인생의 깊이가 같이 깊어지는 맛도 있어 책을 손에서 놓을 수가 없었다.

 

참고로, 고등학교 1학년에서 만난 같은 반 친구 중에 전교에서 놀고 있는 우등생 친구와 친하게 지냈다. 원래 좋은 것은 나누면 그 즐거움이 배가 된다고 했기에 그 친구에게 영웅문을 소개시켜 주었다. 물론, 속으로 영웅문을 보느라 눈이 벌개지는 친구를 기대하는 마음도 있었다. 그리고 순리대로 그 친구는 김용의 작품을 모두 읽었고 성적도 동반하여 떨어졌다. 하지만 그 친구는 고2말부터는 성적이 오히려 올랐고, 결국, 서울대에 바로 합격했다. 그 친구가 나에게 남긴 말이 정말 명언이었다.

 

영웅문 덕분에 글의 즐거움을 알았고 집중력이 개발되었다.

재미있는 책을 읽느라 매일 앉아있다 보니 공부하는게 더 쉬워졌다.

무협지를 읽은 덕분에 글을 읽는 속도가 빨라졌다.

 

덕분에 언어영역 같은 과목에서 발군의 성적을 내고 바로 서울대로 갔다. 나도 동일한 덕을 봤기에 아이들에게 김용의 작품을 읽으라고 이야기하는 편이다. 몰입독서와 책과 가까워지는데 정말 훌륭한 역할을 해줄 것이다.

 

몇 마디 첨언하자면 최근에 다시 나온 김용의 작품은 한글 전용세대를 위하여 모든 것을 한글로 풀어서 나왔다. 개인적으로 한글 전용에 찬성하는 편이지만 김용의 작품은 한자어의 맛을 한껏 살린 것이어서 입에서 자연스럽게 노는 맛이 있다. 그런데 그것을 한글로 옮기니 개인적으로 무척 촌스럽게 느껴진다. 마치 한시(漢詩)를 한글로 옮겨서 읽는 것과 같은 이상한 느낌이었다. 되도록 고려원에서 나왔던 예전 책이나 한자어를 적절하게 사용하는 작품으로 읽기를 권한다. 그리고 최근 유행하는 판타지 소설이나 무협을 추천하진 않는다. 개인적으로는 좋아하지만 글의 깊은 맛을 알게 하는 첫 몰입독서로서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영웅문을 읽으면 모든 것이 잘될 것이라는 식의 이야기는 아니다. 그것이 대단한 책이고 한번 읽어볼 가치가 충분하다 못해 넘치는 책이라고 생각하여 이야기하는 것이니 즐겨주시기 바란다.



나의 독서 경험은 크게 3단계로 발전되어온 것 같다. 우선은 처음으로 독서에 입문한 것이고 그 다음은 쾌락의 독서로 책에서 즐거움을 찾았던 시기였다. 마지막은 최근인데 지식을 흡수하고 스스로를 바꾸기 위해서 하는 독서다. 앞에서 처음으로 독서에 입문한 시기에 대해서 언급한 바가 있다. 그것은 서유기로 시작되었고 각종 위인전과 동화로 확장되었다. 이 시기에 독서는 재미있는 것이었지만 약간 부차적인 것이었다. 왜냐하면 친구들이 놀자고 하면 책을 내팽개치고 나가서 놀았고, 책보다 재미있는 것을 열심히 찾던 시기이기 때문이다. 워낙 친구들이 안 놀아줘서 책을 많이 읽기는 했지만 친구들과 노는 것보다 재미있지는 않았다하지만 두 번째 단계인 쾌락의 독서로 넘어갔을 때에는 친구보다 책이 더 중요했다. 사실, 이것을 독서라고 부를 수 있는지 잘 모르겠다. 내가 본 것은 무협지와 만화책이기 때문이다. 오늘날은 어떤지 모르지만 내가 중학생이었을 때는 아이들이 만화책을 좋아하는 것은 참 당연한 일이지만 무협지를 보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았다. 그래서 만화책 이야기는 빼고 무협지에 대해서 이야기 해보려고 한다.

 

무협지를 스스로 찾아서 본 것은 아니다. 초등학교 6학년을 졸업하고 중학교로 넘어가기 전 겨울에 무협지를 처음 보게 되었는데 어머니의 강권에 못 이겨 보게 되었다. 어머니는 친구 아들이 영웅문이라는 무협지를 본다는 것을 알고 그렇게 두껍고 깨알 같은 글로 쓰여진 소설책을 읽는 친구 아들을 보고 부러워하면서 자신의 아들도 그런 책을 봤으면 하는 마음에 권유했다(무협지를 권유한 것에 대해서 어머니는 지금까지도 후회하고 계신다.).

 

개인적으로 책을 좋아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런 책이나 다 읽는 것은 아니다. 마음이 끌려야 독서는 시작되는 것이다. 당시까지 읽었던 책의 역사를 간략하게 짚어보면 각종 그림책에서 출발해서 서유기에서 폭발했고 계림문고에서 나온 문고판 150권 정도를 읽다가 먼 나라 이웃나라에 푹 빠져서 읽다가 메르헨 시리즈의 동화와 조금 더 성숙한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에이브 시리즈를 읽고 있었다. 하지만 무협지라는 장르는 처음 접해보는 장르였다. 책은 두껍고, 글자는 작아서 보는 것도 부담되었고 겉표지도 이상한 옷을 입은 아저씨가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는 모습이어서 거부감이 더 심했다. 하지만 중학교로 넘어가기 전 중심부위의 표피를 제거하는 수술을 했기 때문에 친구들과 어울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고 어머니가 직접 책을 빌려와서 손에 쥐어주면서 읽어보라고 강력하게 권유해서 별다른 생각없이 페이지를 넘겨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신세계가 펼쳐졌다. 어머니는 총 3부의 영웅문 중에서 11권만 빌려왔는데 첫 페이지를 열고 2시간 만에 숨도 쉬지 않고 다 읽었다. 그리고 저녁 9시쯤에 2권을 빌리기 위해서 어머니의 친구 집을 찾아가서 문을 두드렸다. 어머니 친구 분이 많이 당황스러워 하셨다.

 

아마도 태어나서 지금까지 겪어본 쾌락 중에서 가장 강렬한 쾌감을 맛 본 것이 무협지 영웅문을 읽었을 때 얻었던 쾌감이었던 것 같다. 쾌감이라는 측면만 본다면 불가능해 보였던 대학입시를 성공했을 때의 성취감, 좋아하는 여자 친구와 깊은 사랑을 나누었을 때의 충족감과 쾌감, 갑자기 많은 액수의 공돈이 생겼을 때의 쾌감도 비교할 수 없는 순수하고 강렬하면서도 그 여운마저 사랑스러운 쾌감이었다. 독서를 하면서 몰입되는 경우는 많이 있었지만 이만큼 몰입된 경험은 그 때가 처음이었고 거의 마지막이었던 것 같다.

 

영웅문에 대한 몰입 경험을 어떻게 묘사해야 할까? 처음 책을 펼칠 때는 그냥 읽기 시작했다. 무엇을 기대한 것도 아니지만 글을 읽다 보면 글을 읽고 있다는 의식적 행위가 점점 희미해지고 글의 내용이 점점 살아서 스스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무림의 고수들이 저마다 보여주는 재주가 머릿속에서 자연스럽게 그려지고 주인공의 심상이 손에 잡힐 것 같이 느껴지면서 주인공이 웃을 때는 내 마음도 웃고, 주인공이 울 때는 내 가슴도 찢어진다. 각각의 인물들은 스스로 실체화되어서 희로애락을 같이 한다. 드높은 무학의 이치가 알 듯 말 듯 내 마음 속에 스치면서 아쉬움을 낳고 상황의 공교로움과 무학의 이치와 거대한 역사의 흐름이 거대한 세계가 흐르는 법칙의 조각을 살짝 내비치고 삶의 무상함과 그 찬란한 아름다움이 동시에 사무치게 느껴지면 마음을 격동하게 한다. 마음과 다르게 흘러가는 상황과 그 필연성에 울고 웃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사람들의 마음을 응원하면서 어느새 대단원의 끝이 다가왔다. 책을 덮으면서 다시 나의 호흡과 아픈 팔과 뻣뻣한 목 등 육체가 느껴지고 현실에 돌아오면서 이 현실의 지루함과 하찮음이 절실하게 느껴졌다. 현실보다 생생하게 살아있는 그 격동과 감동을 다시 맛보고 싶은 나머지 마치, 낙원에서 쫓겨난 사람처럼 다시 허겁지겁 영웅문의 세계로 들어가기 위하여 책을 처음부터 다시 읽는다.

 

이것은 마약 같은 쾌감이었고 책을 덮고 있으면 그 금단증세도 빨리 왔다. 그래서 영웅문을 읽고 또 읽었고 총 318권의 책을 대략 300번은 읽은 것 같다. 당연히 처음 읽었을 때의 감동을 다시 맛보진 못했다. 그러니 다시 그런 감동을 줄 수 있는 작품을 찾기 시작했고 엄청난 집착으로 영웅문의 작가 김용의 작품을 모두 찾아 읽었다.

 

추후, 만화, 애니메이션, 영화 등이 나와서 유행했지만, 솔직히 독서의 몰입 경험에 비하면 솔직히 너무 약했다. 어린 마음에 왜 이런 차이가 있는지 열심히 분석한 적이 있는데, 지금도 그 분석결과와 동일하게 생각한다. 이것은 글과 그림, 영상이라는 매체의 차이 때문이다. 히로인의 외모를 설명할 때, 글은 몇 가지 특징만으로 그녀를 묘사할 뿐 그녀의 외모와 매력이 묘사하는 사람의 마음속에 느껴지는 바를 그대로 공감시킨다. 하지만 영상 매체나 그림은 그녀의 외모를 보여주고 그녀의 매력에 공감하길 바란다. 당연히 좋고 싫음이 발생한다. 만화책을 보는 사람들이 대부분 그림체를 고르면서 보는 이유도 그림에 공감해야만 즐거움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잘 쓴 글은 그렇지 않다. 마음에서 마음으로 바로 그 본질적인 경험이 이전된다. 나는 글의 묘사를 읽으면서 글쓴이의 심정에 공감하면서 그 심정에 상응하는 이상적인 히로인을 맘속에 그리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글을 읽는 사람들은 화자의 주요한 감정에 반응하면서 글의 의도를 느끼면서 글에서 보여주지 않고 제시하지 않는 여백을 자신만의 심상으로 가득 채운다. 반면, 영화나 만화나 드라마 같은 것들은 심상을 전부 제시하고 있어 주인공의 외모가 마음에 안 들고, 고증이 안 맞고, 연기가 엉망이고 등등을 따지면서 보기 때문에 시청자는 오히려 해당 내용을 즐기기 위해서 통과해야할 것들이 많다.

 

, 글로 잘 쓰여진 것은 몰입하기도 다른 매체에 비해서 쉽고, 그 풍부함도 다른 매체에 비해서 더 크다. 물론, 디테일한 사실이나 복잡한 내용을 동시에 보여주는 것이 어렵다는 단점도 있지만 즐긴다는 측면에서는 독서만한 것이 없다. 물론, 독서는 훈련되어야 한다. 그 훈련이라는 것은 책에 몰입할 수 있도록 글을 읽는데 거부감이 없고 상상력을 맘껏 발휘할 준비가 되는 것으로 충분하다. 무슨, 요약하고 축약하고 그런 훈련은 공부의 기술이지 독서의 기술은 아니다.

 

한 번 마약을 맛본 사람들은 끊임없이 마약을 찾게 된다. 마찬가지로 몰입독서의 쾌감을 제대로 맛 본 사람은 다시 똑같은 경험을 하고 싶어 재미있는 책을 열심히 찾게 된다. 내가 그랬다. 이전까지는 그저 심심할 때 무료함을 참지 못하고 읽는 것이 책이었다면 이젠 눈에 불을 켜고 광적인 집착으로 재미있는 책을 찾게 되었다. 이 경험은 정말 중요한데, 이후로 모든 책을 볼 때마다 이 책이 정말 재미있는 보물일지 모른다는 기대심리가 생겼기 때문이다. 그런 기대심리 때문에 책을 볼 때마다 무언가 재미있는 것이 있을 것 같고, 정말 훌륭한 생각이 있을 것 같아 그것을 확인하는 기대심리로 책을 읽게 되었다. 


영웅문은 대단한 작품이고 김용은 신필이라고 불리우는 사람이다. 지금, 돌이켜 생각하면 무협지를 보는 것이 재미있는 것이 아니라 그 책이 '영웅문'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독서 경험이었다. 다음 이야기는 이 영웅문에 대한 이야기로 해보아야겠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