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의 포스팅에서는 신경세포 연구를 통해서 인간의 정신세계를 구현한다는 발상이 가진 한계에 대해서 이것저것 늘어놓았다. 하지만 그 이야기는 신경세포 연구가 불필요하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단지, 심리학 수업을 들었던 2000년경에는 신경세포 연구가 인간의 정신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만 있을 뿐 대단한 성과를 제시하지 않았고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수많은 난제를 보면서 환원주의적 방식의 한계를 느꼈다는 점을 이야기 했을 뿐이다. 


 심리학 교과서에 등장한 신경세포에 대한 지루한 설명이 인간의 정신에 대한 섹시한 설명을 해주지는 못했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가진 선입견을 깨고 굉장히 많은 영감을 받았다. 덕분에 이후의 개인적인 모색의 방향을 잡을 수 있는 계기가 되어 주었다.


우선, 깨닫게 된 것은 뇌와 신체의 분리 문제였다. 그 전에는 뇌와 신체를 분리해서 생각했다. 즉, 신체 기관 중 뇌가 인간의 주요한 정신적 역할을 담당하고, 신체는 그저 감각 정보를 올려주고, 뇌의 신호를 받아 행동으로 옮긴다는 정도의 단순한 도식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신경세포를 들여다보면서 그런 사고방식이 가진 문제도 같이 보이기 시작했다. 


 물론, 뇌에 모인 신경다발이 그 복잡한 작용으로 어떤 추상적인 정신을 구현해내는 것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부정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어디서 어디까지가 뇌인 것일까? 뇌와 나머지 신경계의 차이점은 그 연결망의 복잡성 차이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뇌와 다른 신경계가 다르다는 점은 충분히 인정할 수 있다. 어차피 그 신경계를 거슬러 올라가보면 결국, 그 종점에 뇌가 있고 우리는 뇌를 통하여 다양한 정보를 인식한다. 


 우리의 손가락 끝을 생각해보자. 손가락 끝에 바늘을 찌르면 통증이 느껴진다. 그 통증은 어디에서 느껴질까? 그 통증을 우리가 의식하는 이유는 통증이 우리의 뇌에서 신호화되기 때문이다. 만일, 손가락이 잘려나갔다면 그 잘린 손가락에 바늘을 찌른다고 해서 우리가 통증을 느끼지 않는다. 오직 뇌와 신경으로 연결되어 있을 때만 그 통증을 느낄 수 있다.


 그것은 모든 부위가 마찬가지다. 뇌와 연결이 끊어진 부위는 전부 고깃덩어리에 불과하다. 뇌와 분리되어서 자체적으로 통증을 느끼거나 감각을 느끼는 신체 부위는 없다. 우리의 통증, 감각, 운동은 모두 뇌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뇌에서 손가락 끝까지 이어진 신경은 그냥 하나의 전선 정도에 불과하고 뇌는 그것을 중앙에서 처리하는 핵심적인 기관인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심리학 교과서에서 보여준 신경세포는 뇌의 신경세포나 신체 말단의 신경세포나 큰 차이가 없다. 그저 뇌의 신경세포는 더 많은 신경세포와 연결될 뿐이고, 손가락 끝의 신경세포는 더 적은 신경세포와 그 다음 여러 근육이나 표피에 연결된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이 손가락 끝의 신경을 다른 신경과 복잡하게 연결되게 만들 수 있다면 뇌처럼 될지도 모른다. 일례로 지극히 간단한 신호는 척수 반사 등으로 처리되기도 하므로 신경세포가 그저 신호를 전송하는 역할만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신경세포에 대해서 가장 흥미로웠던 점은 정보를 어떤 방식으로 처리하는지 알 수 없었다는 점이다. 손가락 끝의 감각을 처리하는 신경세포를 떠올려 보자. 신경세포는 척수를 통해서 뇌까지 이어지면서 점점 연결이 복잡해진다. 그 연결을 통하여 다양한 것들이 조정된다. 손가락과 손과 팔의 움직임이 총체적으로 연결되고 그에 따른 신체의 균형과 자세 등이 저절로 조정된다. 우리의 의식이 손가락 끝을 의식하고 있다면 손가락 끝의 느낌이나 촉감, 온도 등을 느끼고 의식할 수 있다. 손가락 끝에 있는 재질의 촉감을 느끼는 상황이라면 그러한 촉감의 적절성을 확인하고 그에 따른 고등한 정신작용도 같이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가령, 인테리어에 적합한 소재인지 단가가 어떤지를 판단할 수 있고, 어렸을 때, 느꼈던 어떤 감촉을 떠올릴지도 모른다.


 손가락 끝에서의 신경세포는 1개가 아니다. 여러 개가 섞여있고 상호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그것이 뇌까지 이어지는 경로에 무수히 많은 신경세포들이 종횡으로 연결된다. 신경세포들이 릴레이처럼 단락단락의 작은 선들을 길게 이어붙인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이 모든 신호들이 파편적이고 신호는 분산되어 다시 뇌에서 종합적으로 표상되어야 할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손가락 끝으로 물건을 만지면서, 단단함, 온도, 질감 등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약간의 집중력을 동원하면 그것들을 하나하나 분리해서 인지할 수 있다. 그것은 종합적이지 않다. 오히려 조립식으로 각각의 감각과 그 감각의 위치를 제시하고 이것을 통으로 묶어 경험하게 해준다.


 손가락 끝의 신경에서 보낸 신호는 어떤 형태로든 확정된 정보 단위를 전송해준다. 촉감이라면 그 촉감의 날 것의 정보를 뇌가 느낄 수 있게 된다. 거기에 다양한 정신적 작용과 신체 불수의근 조절이 덧붙여지더라도 이 날 것의 정보가 크게 왜곡되지는 않는다. 물론, 좋고 싫음과 관련 상황의 맥락에 따라서 정보가 왜곡되기는 하지만 그것은 이 날 것의 촉감을 다른 것과 조합하면서 생기는 문제이다. 그리고 그것이 다른 신경들이 연결되어 다양한 정보를 만들어내더라도 우리는 촉감을 분리해서 인지할 수 있다.


 이렇게 촉감이 그 자체로 분리되어 의식될 수 있다는 것은 비록 그것이 가닥가닥 끊어진 신경으로 연결되어 있을지라도 손가락 끝의 신경에서 보낸 신호가 중간에 흩어지지 않고 뇌에 그대로 연결되는 것으로 보였다. 단지, 뇌에서는 이렇게 들어오는 정보에 복잡한 연결을 통해서 더 복잡하고 고등한 작용을 촉발시키기는 하지만 그 자체로 고유의 정보가 우리의 뇌로 연결되는 것이다. 즉, 손가락 끝의 신경세포는 그대로 죽 이어져서 척수를 통해서 우리 뇌로 들어온다. 그리고 뇌의 내부에서도 이 신호는 다른 신호로 바뀌는 것이 아니라 해당 신경세포의 고유성이 변하지 않은 상태에서 다른 뇌의 신경세포와 연결되고 상호작용을 하는 것이다. 즉, 내가 상상한 것은 다음의 그림과 같은 모습이다.




 위의 그림은 검증되지 않은 나의 상상에 불과하다. 이 그림을 보면 손가락 끝에서 이어진 신경이 그대로 뇌 속으로 들어가 주욱 이어지고 있다. 즉, 가닥가닥 끊어진 짧은 신경을 엮어서 굵직한 신경줄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이 신경줄은 표피에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뇌 깊숙한 곳으로 꽂힌다. 다른 수많은 신경들이 이 신경줄의 중간 중간에 연결되어 신체를 조절하고 기억을 환기하며, 고등한 정신작용을 하지만 손가락 끝에서 이어진 신경은 그대로 고유하게 남아있다. 만일, 뇌와 손가락 끝을 연결한 신경이 그저 전선처럼 이어지는 것이라면 그 전선은 뇌로 넘어오는 시점에서 끝나야 하지만 이 신경은 어차피 뇌와 동일한 신경이고 따라서 문제없이 뇌 속으로 들어간다. 이렇게 보면 신경세포가 손가락 끝을 뇌에 연결해주는 것이 아니라, 뇌의 일부가 길게 촉수를 뻗어 손가락 끝까지 이어진 것이 더 맞는 설명처럼 느껴진다.


 그렇다. 내가 깨달은 것은 뇌가 신체의 각 부위에 촉수를 길게 뻗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런 설명이 몇 가지 주워들은 상황을 더 효과적으로 설명한다. 가령, 손가락이 잘린 사람을 생각해보자. 


 기존의 생각하던 방식은 뇌라는 기관이 있고 그 뇌와 각 신체 부위가 신경이라는 전선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식의 생각이었다. 마치 컴퓨터에 각종 전선으로 스마트폰이나 USB 저장소, 헤드셋 등 다양한 기기를 컴퓨터에 연결해서 쓰는 것과 마찬가지다. 따라서 그 연결이 끊어져도 컴퓨터 자체에는 큰 문제가 없다. 그저 연결이 끊어졌을 뿐이다. 다시 전선을 이어도 되고, 다른 것으로 바꿔 달수도 있다. 그렇다면 손가락이 잘려도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저 손가락이 없어졌을 뿐이고 신호가 더 이상 들어오지 않을 뿐이다. 조금 불편하겠지만 적응하면 될 일이다.


 하지만 보통 신체가 절단된 사람들은 어떤 근본적인 영혼의 상실감을 호소하는 경우가 많다. 또, 심한 경우는 잘려나간 부위에서 통증이나 가려움 등을 느끼는 환지통으로 인하여 정신적으로 고통 받는 경우도 있다. 이런 경우는 뇌와 신체를 나누는 방식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하지만 뇌의 일부가 길게 촉수를 뻗은 것이라고 판단하면 상당히 명쾌하게 설명된다. 신체 말단의 신경세포까지 뇌의 확장이므로 신체의 손실은 바로 뇌의 손실이 된다. 따라서 절단은 단순히 전선이 끊어진 것이 아니다. 뇌 자체가 끊어진 것이다. 뇌 자체가 끊어졌으니 뇌는 결손된 부위의 공백을 상실로 느끼는 것이다. 또, 결손된 부위의 말단에서 신호가 발생했을 때, 뇌는 그것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부위에서 발생한 것이라고 자동적으로 해석해버리는 것이다. 즉, 팔꿈치 아래가 절단되었다고 가정하면 팔꿈치 말단 부분의 신경은 원래대로라면 절단된 부위에 연결된 신경이다. 그런데 이 신경에서 신호가 발생하게 되면, 뇌는 그것을 기존에서처럼 이미 없어진 팔에서 발생한 신호로 해석하는 것이다. 물론, 이것들은 모두 검증되지 않는 가설이지만 훨씬 더 담백하게 설명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설명이 옳다고 가정한다면 팔이나 다리가 절단된 사람들이 보여주는 환지통이나 절단의 근본적 상실감은 사지에 뻗은 신경들이 임의적인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자리에 필연적으로 있어야 할 신경들임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그것은 USB 단자처럼 끼었다 빼는 것이 아니다. 처음부터 하나로 설계된 것이고 한번 정착되면 일부 예외를 제외하면 기계적으로 그렇게 밖에 작동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환지통이나 깊은 상실감은 잘린 팔에 해당하는 뇌의 신경세포가 재 배선되어 다른 역할을 하게 될 때까지 끝없이 이어질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생각하기 시작하면 뇌라는 것이 조금 다르게 보이기 시작한다. 손가락 끝에는 뇌가 있고 손가락 끝까지 촉수를 뻗은 뇌의 영역에는 그 손가락이 있게 된다. 그리고 그것이 한 세트가 된다. 눈에는 뇌가 있고 눈에 촉수를 뻗은 뇌의 영역에는 그 눈이 있게 된다. 코도, 입도, 촉감도, 신체 부위도 모든 부분에 뇌가 있게 되고 또 반대로 촉수를 뻗은 영역에는 그 해당 부위가 있게 된다. 신체기관에 촉수를 뻗은 뇌는 신체기관을 뇌에 담게 되고 그 신체기관에는 뇌가 존재하게 되는 셈이다. 그리고 그렇게 신체기관과 그 뇌의 부분이 한 세트로 작동한다. 한 세트를 이루는 뇌의 부분과 신체기관은 서로 묶여서 신호를 주고받으면서 하나의 단위를 이룬다. 신체기관이 없어지면 뇌의 부분은 끊임없이 신호를 갈구하면서 오작동을 일으키게 될 것이다. 이렇게 보면 이제 뇌는 두개골 안에 있는 중앙처리장치가 아니다. 오히려  여러 신체기관이 접합된 부위이고 신체의 모든 부위를 축약해서 모아놓은 미니어쳐에 가깝다.


 지금까지의 생각은 가설과 상상으로 전개했고, 전혀 증명되지 않은 이야기들이다. 2000년경에 생각한 것들이라서 지금 어디까지 오류로 판명되었을지 잘 모르겠다. 또, 뇌의 작용이나 신경 등을 매우 단순화한 생각이고 주로 감각이나 지각에 해당하는 부분만 고려한 생각이다. 어차피 정신적인 작용을 탐구대상으로 했을 때, 그 외의 부분의 윤곽을 그려본 것이다.  그럼에도 스스로 열심히 생각하고 무척 재미있게 발견한 것들이라서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검증되지도 않은 이야기를 열심히 하는 이유는 이 개인적인 발견이 이공계 학도에서 철학과 정신분석 등으로 삶의 궤적을 변화시킨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다음엔 그 이야기를 해보자.

운동에 스쿼트가 있다면 공부의 기초는 무엇일까?


운동이 체력과 신체의 발달이라는 측면과 테니스, 골프, 농구 등의 각종 운동기술의 습득이라는 측면에서 볼수 있다.


그리고 운동에서 체력이 뒷받침이 되면 다른 운동을 익히는데 큰 도움이 되리라는 점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렇다면 공부에는 그런 것이 없을까?


어떤 능력이 좋아진다면 공부가 편하게 될까?


우리는 무엇때문에 공부가 하기 싫은 것일까?


아마도 공부할 때 가장 하기 싫은 바로 그것이 우리 공부의 기초체력일 것이다.


공부는 다음과 같은 과정으로 이루어진다.


기 → 이해 →  → 숙고 → 응용 → 통달


한눈에 보아도 가장 어려운 부분은 이해 →  → 숙고의 과정이다. 


동기는 작은 호기심 같은 일상적인 것에서 대입이나 취직을 위한 전략적인 공부일 수도 있고, 개인적 연구를 위한 것일 수 있다.


동기는 그래서 항상 있는 것이고 단지, 동기의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게 힘들 뿐이다. 


이해라는 것은 자연스럽게 이해가 되는 것에서부터 아무리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 것까지 넓은 스펙트럼이 있다. 


이해가 안된다면 해당 과정을 바꿔서  → 숙고 → 이해의 과정으로 변용하여 쓰는 경우가 있다. 


대입시험이나 취직시험 등 당면한 과제가 있고 이를 이해하고 기억해서 좋은 성적을 내야 한다면 


아쉽게도  → 숙고 → 이해의 과정을 거치는 경우가 많고 정 안되면  → 성적의 과정으로 머리를 혹사하기도 한다. 


옛 공부법에서 선현의 문장들을 수천번 반복해서 읽어서 그 깊은 의미를 체득하는 식의 공부라면 기억을 먼저하고 이를 바탕으로 숙고하고


이해하는 과정을 거치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이런 식의 공부를 하려면 동기가 정말 강력하고 신념도 강해야 한다. 


그리고 당시에는 그저 선현의 문장 외에는 공부할만한 자료가 많지 않았다. 오늘날은 그럴 이유가 없다. 


오늘날처럼 교육교재가 풍부한 환경에서는 이는 크게 신경쓸 부분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보통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공부하지 않거나 이해할 수 있도록 낮은 난이도에서 단계적인 과정을 밟아가며 공부를 한다. 


하지만 역시 기억하는 과정이 가장 어렵다. 결국 외우는 것이 싫어서 공부를 하지 않는다.


역으로 말한다면 무언가를 외우고 기억하는 것이 부담되지 않는다면 사람은 정말 쉽게 공부한다.


체력이 충분한 사람이 몸을 써서 운동하는 것을 즐기듯이 기억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공부하는 것을 어려워하지 않는다.


물론,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의 내용이어야 할 것이다. 


RPG식 게임으로 치면 이해의 수준은 해당 플레이어의 레벨일 것이고, 기억하는 것은 해당 레벨을 올리기 위한 경험치이다.


사람마다 살아온 환경과 유전적 소인이 있어서 지능에 소소한 차이가 있다면 이해하는 수준이 다를 것이다. 이는 그저 시작 레벨이 다른 것이다 .


하지만 경험치를 쌓다보면 동일한 지점에 도달하게 된다. 물론, 머리에 이상한 기관이 달린 것 마냥 이해할 수 없는 생각들을 척척하는 천재들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결국, 공부의 기초 체력은 외우는 것이다. 그리고 이 외우는 것을 부담스럽게 생각하고 어려워하는 마음이 우리로 하여금 공부하지 못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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