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굉장히 어려운 단어들이 많다. 특히, 어떤 전문 영역에서만 사용되는 전문용어들은 매우 복잡한 개념을 구현하고 있어서 외국어가 아니더라도 그것을 익히기 위해서 상당한 배경지식과 이해를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그 대표적인 것이 의사들이 사용하는 의학용어일 것이다. 


미국 드라마 닥터 하우스는 메디컬 드라마라서 대사의 많은 부분이 생전 처음 들어보는 전문 의학용어다. 그래서 영어로 직접 듣거나 한국어 자막으로 읽거나 전혀 모르는 용어라는 점에선 똑같다. 하지만 이 모르는 용어라도 한국어 자막으로 드라마를 시청할 때는 드라마를 즐기는데 전혀 문제가 없다. 그런데 같은 단어를 자막 없이 영어로 듣게 되는 순간 갑자기 너무나 낯선 용어가 되어 버린다.


너무 많이 본 나머지 에피소드의 내용과 캐릭터 대사들에 매우 익숙해진 미국 드라마를 자막 없이 봤을 때, 잘 들린다고 생각했던 영어가 자막이 사라지면 안 들리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앞서 추론한 바가 있다. 즉, 자막에 대해서 익숙해진 나머지 영어로 들은 것이 머릿속에서 자막으로 동시 재생이 되면서 그런 착각이 발생한 것이다. 하지만 바로 다음에는 새로운 의문점이 생기게 되는데 왜 전부 아는 단어로만 이야기하고 있는데도 드라마를 알아먹지 못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다. 이 문제는 언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광범위한 이해를 선물한 문제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문제를 다루기 전에 처음 생긴 의문은 이것이다. 닥터 하우스에서 현란하게 구사되는 전문용어들이 어차피 모르는 단어들인데 왜 한국어 자막으로 볼 때에는 괜찮고 자막 없이 영어로 볼 때에는 너무나 낯설고 정신을 사납게 하는 단어로 변하는가 하는 문제였다. 즉, 이때의 관심사는 어차피 모르는 것은 똑같은데 한국어 자막으로 볼 때는 마치 내가 그 단어를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그냥 넘어가는 것이다. 반면, 자막 없이 영어로 들을 때는 그 단어가 어디서 시작해서 어디로 끝나는지도 파악할 수 없는 그저 엉망진창이었다. 


처음 이 문제를 궁금하게 여겼을 때에는 모르는 단어를 한국어의 체계에서는 이해할 수 있는데 모르는 외국어의 체계에서는 이해할 수 없다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즉, 내가 의식하지 못하는 언어적 체계가 있고 그러한 언어적 체계 안에서 단어들이 설명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것은 일정부분 사실이고 추후 이 문제를 다룰 예정이다. 하지만 좀 더 주의 깊게 살펴보니 외국어를 몰라서 생긴 부분과 별도로 고민해볼 문제가 있었다.


다시 말하지만 전문용어를 이해한다는 것은 힘들다. 관련 배경지식을 알고 실제로 적용해보면서 힘들게 하나하나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겨우, 드라마 한편을 보면서 수많은 전문용어를 자연스럽게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느낀다. 모르고 넘어갈 때는 그렇지만 호흡을 가다듬고 주의 깊게 살펴보면 대단히 신기한 현상이었다. 어떻게 그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그리고 그것은 진짜로 알고 있는 것일까? 그 안다는 것의 범위는 어디까지인가? 등등의 수많은 질문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기 시작했다.


자막이 있다고 하지만 어떻게 뜻 모르는 단어들을 들으면서 아무런 문제없이 드라마를 즐기는 것일까? 다행히 상당히 빠르게 이것에 대한 답을 낼 수 있었다. 드라마 자체가 어려운 의학용어를 쓰기 때문에 당연히 의학에 문외한인 일반 시청자들은 그것을 알아들을 수 없다. 시청자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용어를 남발하면 드라마가 재미있을 수 없는 법이다. 따라서 드라마 제작자는 일반인들이 즐겁게 시청할 수 있도록 영상과 대사가 자연스럽게 이 의학용어가 무슨 의미인지 꼭 필요한 부분은 설명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즉, 바이러스가 신체 곳곳에서 퍼지는 영상, 기생충이 세포 조직을 넘나드는 영상 등을 직접 제공하여 시청자들이 직관적으로 자연스럽게 해당 의학용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따라서 모르는 의학용어라고 해도 자연스럽게 이해가 되면서 스토리가 전개되는 것이다.


하지만 황색포도상구균(Staphylococcus aureus) 감염(infection)이라는 자막과 함께 무언가 노란 기류 같은 것들이 세포들 사이로 퍼지는 영상을 본다고 내가 그것을 이해했을까? 당연히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황색포도상구균(Staphylococcus aureus)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그것이 어디서 생겨나 어떻게 사멸하는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자연스럽게 그것을 이해했다고 생각하고 아무런 궁금증이나 답답함 없이 넘어간다. 이상한 일이다.


아마도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은 누구나 알고 있는 이런 문제를 왜 제시하는지 의아해할지도 모르겠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현상이 무엇인지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저 이야기에 필요한 부분만 맥락에 따라 피상적으로 이해하고 넘어가는 것이 일상에서 너무 당연한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단어마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수준의 이해를 갖추어야 하거나 또는 그러한 부가 설명을 붙여서 말을 해야 한다고 하면 그 번거로움이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간략하게 말하고 듣는 사람들은 맥락에 따라서 자연스럽게 이해하고 넘어간다. 알면 아는 만큼 모르면 모르는 대로 무심하게 이해하거나 단정하고 넘어가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렇게 일상다반사인 일들을 갑자기 문제제기하는 것은 실은 나의 의문은 반전된 의문이기 때문이다. 만일, 영상이 없었다면 어땠을까? 황색의 기류가 퍼지는 영상 없이 황색포도상구균(Staphylococcus aureus) 감염(infection)이라는 말을 듣게 되면 그냥 드라마의 맥락에 따라서 어느 정도 이해가 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상당히 많은 노력이 필요할 것이고 드라마를 보려고 한 것이지 환자의 병을 토론하려고 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금세 흥미를 잃고 드라마를 끌 것이다. 그런데 그 영상이 들어감으로써 시청자는 문제의 황색포도상구균(Staphylococcus aureus) 감염(infection)이라는 말을 듣고 흥미진진하게 여긴다. 영상으로 인하여 황색포도상구균(Staphylococcus aureus) 감염(infection)이 무엇인지 진실로 이해한 것도 아닌데 말이다.


나는 여기서 비약하여 한 가지 영감을 받았다. 그것은 뜬금없게도 언어라는 것이 인간이 인지하는 여러 가지가 자연스럽게 반영되어 장전되었다가 자동으로 발사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이다. 너무 뜬금없는 이야기이긴 하다. 

드라마가 결국 언어적 구조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후에서야 자막 없이 드라마를 보는 것이 조금 편안해졌다. 그리고 드라마나 영화가 실은 실어증 체험이나 언어적인 훈련을 위해 좋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렇다고 다른 자료가 있는 것도 아니기에 큰 기대 없이 영화나 드라마를 쪼개어 가면서 보게 되었다. 즉, 장면 전환으로 스트레스가 발생하면 끊고 다시 정리하고 보는 식이었다.


이렇게 스트레스를 줄여 보니 언어가 없기 때문에 보이는 것들이 하나 둘씩 생기기 시작했다. 그것은 사소한 손동작이나 표정 등 영상으로 제공되는 모든 것이었다. 이건 언어가 없기 때문에 보인다는 측면도 있었지만 그것보다는 자막이 없기 때문에 보이는 것에 가까웠다. 수십번 반복하면서 본 드라마도 자막 없이 보게 되면 전혀 새로 보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이 자막으로 인한 경우가 많았다. 


자막이 있으면 눈은 끊임없이 자막과 영상을 오가게 된다. 눈으로 영상을 보면서 귀로 대사와 음악을 들어야 하지만 실제로는 눈으로 영상과 자막을 보고 귀로 음악을 듣는 식인 셈이다. 그러다 보니 눈은 매우 바쁘게 자막과 영상을 오가게 된다. 앞서 언급한 현실 관찰처럼 눈은 사물을 따라가면서 관찰한다. 눈은 그것이 어떻게 변화하고 움직이고 오가는지를 연속적으로 변화하는 양상을 본능적으로 따라간다. 하지만 대사가 있을 때 마다 눈은 자막을 향한다. 드라마가 언어적 구조물이기 때문에 대사는 매우 중요하다. 실제로 모든 장면이 대사에 맞춰 구성되어 대사와 영상은 그 순간 최대의 시너지를 내게끔 되어 있지만 자막으로 보는 사람은 그 순간 가장 중요한 영상을 미묘하게 보지 못하게 된다. 물론, 별로 중요하지 않은 장면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누적되면 상당량의 영상을 보지 못하고 넘어가게 된다. 또, 대사가 길면 어떻게 될까? 그 대사를 전부 빠르게 읽어야 한다. 읽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맥락에 따라 파악까지 해야 한다. 당연히 대사가 길어지면 눈은 거의 자막으로 넘어가 있고 빠르게 대사를 읽고 영상으로 눈이 돌아와도 영상에 의식이 집중되지 않는다. 눈은 영상을 보고 있어도 머리는 상황을 파악하느라 정신없는 것이다. 결국, 자막과 함께 영화나 드라마를 보는 것은 본인은 제대로 보고 듣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내용의 상당부분이 누락된 채로 그것을 보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자막과 함께 드라마를 보는 것에 익숙해지면 정말 전혀 불편함이 없다. 자막이 대사와 싱크가 안 맞는 경우를 제외하면 나중에는 자막의 존재 자체를 잊을 정도로 편안하게 시청하게 된다. 나아가 어느 순간부터 배우들이 한국말로 대사를 말하는 것처럼 느끼거나 영어를 바로바로 알아듣고 있다는 생각까지 들게 된다. 


즉, 정리하자면 자막이 있으면 외국어의 어색함도 없고 어떤 문화적인 별다른 차이를 느끼지도 못하며 상당부분의 영상이 누락됨에도 전혀 의식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모두 드라마 속에 현전하고 있어 시청자가 느껴야하는 것들이다. 당연히 미국과 대한민국은 의사소통하는 법부터 문화적인 코드까지 전부 미묘하게 다르다. 하지만 그런 차이를 전혀 실감하지 못한다. 상당부분의 중요한 영상이 누락되거나 영상을 보는데 방해를 받았음에도 그것을 실감하지 못한다. 외국어를 말하는 것이니 입모양도 한국어와 다르고 억양 발성도 전부 다르다. 또, 결정적으로 모르는 단어를 말하고 있는데 그것을 실감하지 못한다. 영화나 드라마가 언어적 구조물이기 때문에 그 언어적 의미가 소통된다면 당연히 전체의 이야기 전개가 자연스럽게 인식되는 것이 맞다. 하지만 그에 따른 다른 이질적인 요소까지 전부 실감하지 못한다는 것은 어떻게 여겨야 할까?


반대로, 자막 없이 드라마를 볼 때는 이 모든 이질성이 극대화되어 튀어나온다.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니 제시되는 상황과 배우의 표정 손짓 등 사소한 디테일을 통하여 그것을 해석하게 되는데 공감되는 것도 있고 이질적인 것도 있다. 그리고 그 이질적인 것 중 하나를 찾아낸 것이 페퍼의 눈동자였다. 드라마에서 시공간 널뛰기 없이 어느 정도 연속적인 시선 처리와 제한적인 시공간의 상황을 보여줄 경우에는 많은 디테일한 의미들이 영상을 통해 발견된다.


그렇다면 이제 언어를 알아들을 수 있는 한국 드라마나 영화를 직접 보는 경험과 비교할 필요가 있다고 느낄 것이다. 이런저런 미국 드라마에 대한 시도가 없었다면 한국어로 된 드라마나 영화를 볼 때 아무 것도 보지 못했을 것이다. 상황과 대사와 표정이 너무 일체화되어 있어서 느끼는 것이라곤 그저 배우가 연기를 잘 하네 못 하네 정도에 불과하다. 무언가 새로 발견할만한 문화나 행동양식이 없고 그저 모든 것이 친숙하고 그저 공감하고 말고 하는 것만 있다. 아마 이것이 미국 드라마를 원어민이 볼 때 느끼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무엇인가를 발견하기가 너무 어렵다. 반면 모르는 외국어의 드라마는 이 모든 것이 이질적이기 때문에 상당히 많은 발견을 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제 외국 드라마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한국 드라마를 보게 되면 조금씩 보이는 것이 있다. 


그것은 대사가 나오기 전에 그 대사가 나올 맥락이 먼저 만들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상황, 표정 등에 의해서 공감이 발생하고 그렇게 생긴 공감을 언어가 규정하고 전개시킨다. 그래서 상황과 대사가 엉뚱하게 어우러져 오해를 낳기도 하고, 그 모든 상황과 표정을 통하여 그 말의 무게를 시청자들에게 전달하기도 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산전수전 다 뚫고 만나러 가서 절박한 표정으로 “좋아한다.”라고 말할 때 시청자들은 그 캐릭터가 겪은 수많은 간난신고를 통해 그 마음의 진실성에 깊이 공감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좋아한다.”라는 대사와 함께 마무리된다. 이제 시청자에게 그 “좋아한다.”라는 대사는 그 캐릭터가 수많은 간난신고를 뚫고 행동하게 된 원인이자 그 결과가 된다. 즉, “그 캐릭터가 상대를 그렇게 좋아했다.”라고 짤막하지만 무거운 문장으로 마무리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상황과 맥락이 언어와 연결되면서 그 언어가 실체적인 성격을 갖게 되는 것이 바로 공감이다. 그리고 그렇게 언어로 종결되면서 그 디테일한 부분은 그 감상과 무게를 대사에 더하고 누락된다. 


하지만 자막으로 통해서 보게 되면 장면장면에서의 맥락 설정이 완전 반대가 된다. 원래 드라마의 구조는 각종 상황과 캐릭터의 표현을 통해서 공감대를 형성하고 그것이 대사를 통하여 규정되고 전개되고 마무리된다. 하지만 자막을 읽는 경우에는 먼저 자막을 읽고 언어적 맥락이 먼저 파악된 다음에야 영상을 해석하게 된다. 대사가 짧고 영상이 주된 액션영화라면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대사가 많고 상황이 주로 언어적으로 전개되는 드라마나 말이 많은 영화 장르일 경우에는 자막을 파악하고 해당 자막에 맞춰 영상을 해석하게 된다. 아무래도 언어적 맥락 파악이 우선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막으로 미국 드라마를 보게 되면 그 공감의 상당부분이 퇴색된다. 자막으로 보는 것 때문에 영상의 중요 부분이 누락되고 영상에서 눈을 떼지 않았을 경우 발견했을 가장 사소한 디테일들, 몸짓이나 손동작 등이 누락되고 그만큼 공감되는 정도가 낮아지게 된다. 원작자가 100의 공감을 전달하려고 했다면 자막을 보는 시청자는 대략 80정도 공감하는 것 같다. 세세한 디테일은 사라졌지만 그 이야기의 골간은 분명하게 전달되었기 때문에 드라마는 재미있다. 하지만 만일, 자막 없이 본 드라마를 자막과 함께 다시 보게 될 경우에는 그 헛헛한 느낌과 괴리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또 배우들은 극중 상황에 따른 특유의 문화와 행동양식 등을 충분히 녹이려고 노력하지만 자막으로 보는 경우에는 이미 자막에 맞춰서 모든 영상을 판단하게 되기 때문에 자막에서 제시해주는 언어적 맥락을 지탱해주는 영상이나 내용은 수용되지만 그와 상관없는 세세한 디테일들은 완전히 누락된다. 따라서 배우가 연기를 잘했는지 못했는지는 어지간해서는 판단하기 어렵고 배우들이 전달해주는 생동감도 상당히 떨어질 수밖에 없다. 또, 자막으로 통해서 언어적 맥락이 머릿속에서 전개되고 대사를 맞추기 때문에 짧은 대사는 잠깐이지만 서로 공존한다. 또, 나와 같이 거의 드라마를 외우다시피 했던 경우에는 실은 외운 것은 자막에 불과하다. 그리고 자막을 외웠기 때문에 자막의 첫마디만 봐도 다음 자막의 내용이 자연스럽게 머릿속에서 전개될 정도가 되면 영어를 한국어처럼 듣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즉, 상대방이 다음에 할 말이 “고맙다”라는 것을 알고 머릿속에는 “고맙다”라는 말이 이미 준비된다. 그리고 배우가 “thanks”라고 이야기하는 순간 그 말이 머릿속에서는 바로 준비된 “고맙다”라는 대사로 전환되는 식이다. 결국, 영어가 들린다고 생각했던 나의 생각은 완벽한 오류였던 셈이다. 


자막을 통해 영상과 소리를 통해 제시되는 모든 이질성이 사라지고, 영상과 상황에 따른 전개로 대사가 연결되지 않고, 대사를 먼저 확인하고 그에 따라 영상을 취사편집하게 되는데 스스로 그러한 사실을 전혀 의식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나중에 거의 드라마 대사를 외우다시피해서 자막 없이 드라마를 본 적이 있다. 그리고 그거은 매우 만족스러운 경험이었다.

개미들의 말을 알아듣지 못해도 그들의 모습을 관찰하는데 전혀 문제가 없다. 자연은 아름답고 그 속의 다양한 동식물들은 아무런 말이 없어도 우리를 매혹시키고 빠져들게 한다. 그런데 드라마는 그 언어를 모르면 보는 것이 너무 괴롭고 힘들다. 어째서 이런 것일까? 처음에는 언어를 백지처럼 완전히 모르는 것은 아니니 어떤 언어적인 기능이 본능적으로 발동하고 또 다시 좌절되기 때문에 답답함과 좌절감이 온다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그 스스로 설정한 언어적인 기능에 대한 과대망상에 빠져서 ‘모든 것이 언어다’식의 얼버무리기 식의 결론에 도달했었다. 하지만 자연관찰에 몰입하게 되면서 그 언어적인 기능에 대한 과대망상에서 벗어나 다시 생각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우선, 언어가 있고 그것을 조금이나마 알아듣기 때문에 고통을 느낀다는 스스로의 가설을 검증해볼 필요가 있었다. 유사한 상황에 처해 보면 된다. 즉, 내가 모르는 언어를 말하는 외국인을 관찰하는 경우를 생각하면 된다. 자연관찰이지만 동시에 언어가 곳곳에서 튀어나온다. 평소, 지하철이나 버스를 탈 때 사람을 유심히 관찰하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라서 해답은 금방 튀어나왔다. 전혀 괴롭지도 않고 답답하지도 않다. 모르는 외국어도 그 의미를 몰라서 괴롭지는 않고 오히려 그 사람의 표정과 몸짓 그리고 음성이 어우러져서 들리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계속 시선을 주는 것으로 인한 무례가 아니라면 사람을 관찰하는데 있어서 어떤 장애도 느끼지 않는다. 어떤 이는 웅얼거리면서 말하기 때문에 외국어가 아니라도 그 사람이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알아들을 수 없을 것 같은 사람이 있고 누군가의 말은 모르는 외국어임에도 머릿속에 새겨질 만큼 또렷하고 아름답게 말하는 사람도 있다. 입고있는 옷과 손에 들고 있는 짐들은 그들이 일시적인 관광객인지 국내에 거주중인 것인지 알게 해주고, 표정과 목소리의 톤, 몸짓은 그들이 연인인지, 친구인지, 가족인지 알려준다. 잠깐의 관찰로도 상당히 많은 것을 알게 해준다. 이렇듯 외국인을 관찰할 경우 모르는 언어가 개입하고 있지만 전혀 고통스럽지고 괴롭지도 않으며 오히려 무척 흥미진진하다. 아무래도 언어적인 기능이 작동하고 다시 좌절하면서 고통을 겪는다는 가설은 폐기해야할 것 같다.


새로운 해답을 찾아 생각이 표류하다가 고통에 초점을 맞춰보게 되었다. 자막 없이 드라마를 볼 때 생기는 그 고통에 대해서는 앞서 포스팅한 미드를 자막 없이 보다가 생긴 의문점에 대하여 고찰함 2에서 명칭실어증과 개인적인 경험을 버무려서 명칭을 모르는 것에 대한 고통과 답답함을 언급했다. 이 경우 소설이나 텍스트 등 언어적 맥락 속에서 의미를 향유하다가 갑자기 나타난 이름 모를 기호 하나 때문에 무지의 벽에 부딪히고 답답해지면서 읽고 있던 맥락보다 지금 현재 눈앞의 기호 하나를 모른다는 맥락에 매몰되어서 전체 맥락이 단절되고 갑자기 글에 대한 흥미도 급격하게 사라지는 그러한 고통을 말했다. 그리고 그 고통과 답답함은 마치 자신의 위치와 맥락을 잃고 길을 잃었을 때 생기는 당혹감 또는 갑작스러운 급격한 시공간적 변화로 현재 자신의 상황을 납득하기 어려운 비현실감과 매우 닮아있다고 했다.


그렇다. 우리는 납득하기 어려운 갑작스러운 변화를 겪게 되면 그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심리적 타격을 입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언어적 맥락과 현실적 맥락이 전부 동일하다. 앞서 명칭실어증에서 모르는 기호에 마주쳤을 때는 언어적 맥락이 꼬이면서 심리적 타격을 입힌 것이라면 자고 있는 사이에 본인도 모르게 대한민국에서 몽고로 옮겨진 사람이 겪는 심리적 고통은 현실적 맥락이 꼬이면서 심리적 타격을 입는 것이다. 


완전언어상실증과 언어적 맥락의 상실이라는 것에 천착한 나머지 드라마를 자막 없이 보면서 겪는 고통도 언어적 맥락이 꼬이면서 발생하는 것이라고 전제하고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언어적 맥락이 꼬일 때 뿐만 아니라 현실적인 맥락이 꼬일 때도 비슷한 고통을 겪을 수 있다. 


그럼 다시 질문으로 돌아가보자. 드라마와 자연 관찰의 차이는 무엇일까? 어째서 자연 관찰은 언어 없이 가능한데, 드라마는 힘든 것일까? 이렇게 두 가지 서로 다른 상황을 대조하는 질문을 하니 갑자기 깨닫게 되는 바가 있었다. 딱따구리를 발견했을 때, 딱따구리의 맥락은 무척 뜬금 없었지만 이로 인한 혼란은 없었다. 딱따구리가 나무에 날아왔다는 것 그 자체로 자명하고 그 외에 별도의 맥락이 주어질 필요도 이유도 없었다. 그리고 그 딱따구리는 날아와서 나무를 두들기다가 날아갔다. 딱따구리의 생태, 종의 종류, 서식지 등을 모른다고 해서 또는, 딱따구리의 의사를 모른다고 해서 아무런 고통이나 답답함을 느끼지 않고 오히려 몰입해서 그것을 관찰한다. 이것과 드라마 시청의 차이는 무엇일까?


자연 관찰은 일종의 현실이다. 현실은 드라마와 달리 수많은 엉뚱하고 알 수 없는 맥락들이 섞여있다. 서로 상관없는 사람들이 매일매일 마주치고 또 그것을 스쳐지나간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은 현실적인 경험세계라는 맥락을 갖고 있고 사람들은 그것에 익숙해져 있다. 그리고 그 현실적 경험세계라는 맥락은 시간적 공간적 한계 내에서 물리법칙에 따라 연속적으로 벌어지는 현상을 보여준다. 그래서 조금 신기하거나 일상적이지 않은 일이 있어도 순식간에 적응하고 그것을 받아들이게 된다. 반면, 드라마의 맥락은 어떠한가? 우리는 신이라도 되는 것 마냥 전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거의 동시에 관찰하고 그 사람만의 사적인 장소에서 그를 엿보면서 관음증을 즐긴다. 1초전에는 뉴욕 맨하탄의 커피샵에서 노닥거리는 연인들을 보다가 그 다음 1초 후에는 사하라 사막의 한 가운데에서 낙타를 몰고 있는 남자를 보게 된다. 현실에서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스스로 제정신인지 의심할 것이다. 하지만 드라마를 보면서 그것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다. 왜 그럴까? 그것은 드라마가 실은 언어적 질서를 통하여 구축된 가상세계이기 때문이다. 드라마는 시나리오에서 나온다. 그리고 그 시나리오는 결국 글이다. 하얀 노트 위에 글로 작성된 것을 배우들이 연기하고 영상을 덧칠한 것에 불과하다. 그래서 그것이 아무리 현실처럼 보여도 결국, 배우들의 대사로 연결된 한편의 문학인 것이다. 그리고 배우의 연기와 배경의 사실성 등은 그 문학을 더욱 현실처럼 보이게 만드는 장치일 뿐이지 현실 그 자체는 아니다. 


따라서 집중해서 드마라를 보게 되면, 현실적 맥락에 충실한 상황이 전개될 때에는 자연스레 관찰이 이루어지고 고통스럽지도 않게 된다. 하지만 다음 순간 장면이 확 바뀐다. 또, 다른 인물들이 나오고 도시에서 시골로 바다에서 사막으로 완전히 다른 상황이 전개된다. 관찰하는 사람은 갑자기 변한 이 상황을 받아들이려고 노력하지만 쉽지 않다. 그리고 내용은 계속 전개되고 있다. 현실적 맥락은 이미 꼬였다. 물론, 용을 써서 바로 이전 맥락을 놓아버리고 다시 현재의 상황에 집중해서 관찰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의 뇌는 그런 상황에 익숙하지 않다. 한두 번은 어찌 노력해서 적응해도 그것이 반복될 때마다 우리의 정신은 피곤해지고 집중력은 떨어지게 된다. 결국, 길을 잃고 답답함과 고통에 매몰되고 더 이상 드라마를 보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현실적 맥락이 꼬이는 이유는 그 현실적 맥락의 전환을 언어적 맥락을 통하여 전달하고 있는데 그것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드라마에 대한 순수한 자연관찰은 처음부터 성립할 수 없었다. 드라마는 처음부터 언어적인 산물이었고 그 사이에 있는 배우와 소품으로 이루어진 영상들도 현실적인 요소처럼 보이지만 잘 통제된 언어적 배치들일 뿐이기 때문이다.

실어증 체험과 영어에 대한 호기심은 당분간 사그라들었다. 막연하게 괴물같은 언어 기능을 상정하는 식의 얼버무리기식 결론에 도달했다는 것은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 결론의 옳고 그름이 문제가 아니라 그 결론으로는 옳고 그름을 검증하기도 어렵고 무언가 새로운 영감을 얻기도 어렵다는 것에 가깝다. 그렇게 흥미가 떨어지고 관심이 사라졌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아파트 단지 앞 공터에서 딱따구리 같은 것을 보았다. 딱따구리를 실물로 본 것은 처음이었고 또, 그것이 아무리 산 아래에 있는 집이라고 해도 아파트 단지에 나타난 것이 너무나 신기해서 가는 길을 멈추고 그 딱따구리가 날아올라 사라질 때까지 하염없이 그것을 관찰하면서 사진을 찍고 동영상을 촬영했다. 딱따구리의 출현은 갑작스러웠고 그 사소한 몸짓 하나하나를 보는 것이 신기하고 즐거웠다. 전혀 계획하지 않은 새로운 것과 조우하는 신선한 경험이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딱따구리 관찰은 정말 즐거웠다. 아무 생각 없이, 어떠한 이유도 목적도 없이 그저 그 딱따구리가 신기해서 보는 행위를 한 것이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하물며 디지털이 아닌 맨 눈으로 무엇인가를 보는 경험도 너무 오래간만이었다. 덕분에 어렸을 적 아날로그 시절 추억으로 빛바랜 사진처럼 남아있던 각종 자연관찰에 대한 기억이 생생하게 살아나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 산이나 들에 가면 재미있는 것이 널려 있었다. 잠자리, 메뚜기, 물고기, 하늘소, 개구리, 뱀 등 신기한 곤충이나 생물을 잡으러 가는 것이 가장 즐거웠고 이들이 하는 행동을 차분히 보는 것도 매우 좋아했다. 물론, 너무 좋아서 하염없이 죽치고 앉아서 관찰할 정도로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여유로운 시간이면 자연스레 질릴 때까지 눈앞의 곤충이나 생물의 동작 하나하나에 흠뻑 몰두했었다. 어떠한 언어도 발화되지 않았지만 전혀 지루하지 않았고 매순간이 충실하고 충만했다. 자연스럽게 몰입이 되었고 자연스럽게 빠져들었다. 인기 있는 장난감이나 맛있는 과자처럼 짜릿하고 흥분되지는 않았지만 평소에는 좋아 죽는 그런 것들도 시골의 산과 들에서 마주치는 수많은 신기한 것들이 주는 경이로움 앞에서는 매력이 반감되었다. 꽃잎 위에서 사냥을 위해 웅크리고 있는 사마귀를 발견하면 그 사마귀가 숨죽이고 있는 모양에 따라 같이 숨죽이고 앉아서 사냥에 성공할 때까지 몇 시간씩 기다리기도 하고 손가락만한 말벌이 주는 위압감에 도망가 보기도 한다. 이 때의 나는 수많은 생명들 속에서 매우 충만했다. 그리고 그러한 모든 충만한 경험에서 언어는 없었다. 언어 없이 매우 충만했고 모든 것과 교감하고 있었다. 


이 모든 경험에서 언어의 역할은 거의 없었다. 오히려 언어는 경험에 몰두하는데 방해였기에 말을 줄이고 그 행동 하나하나를 세밀하게 보기 위해서 더 집중했었다. 이제 자연관찰에서 언어 기능의 개입은 없다고 전제해본다. 그런 관점에서 보니 언어 기능이 개입하지 않은 사례들이 무수하게 떠오른다. 만일 앞서 내린 결론에서처럼 언어 기능이 모든 인지 기능의 배후에서 작동하고 있다고 본다면, 당연히 뛰어난 화가는 자신의 그림을 언어로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고, 뛰어난 피아니스트는 자신의 연주를 언어로 설명할 수 있으며, 뛰어난 운동선수는 자신의 퍼포먼스를 언어로 완벽하게 설명할 수 있다는 것과 같다. 하지만 이런 사람들은 결코 언어적인 것을 잘 사용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언어적인 것을 거추장스러워 한다. 화가는 그림으로 피아니스트는 연주로 자신의 예술성을 드러내려고 하지 그것을 말로 드러내려고 하지 않는다. 말은 작품 위에 얹어질 뿐이지 그 알맹이가 될 수 없다. 또, 좌뇌와 우뇌에 대한 통속적인 이야기들도 떠오른다. 언어적 기능은 좌뇌의 일부에서만 작동할 따름이다. 이제 생각이 다시 반전되었다. 언어 기능이 모든 인지 기능의 배후에서 작동하고 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이제 앞서 내렸던 얼버무리기식 결론이 잘못되었음을 이제는 확실히 깨달을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면 다시 문제가 대두된다. 어째서 자막 없이 드라마를 보는 것은 자연관찰과 달리 고통스러울까? 아마도 문제 설정을 다시 해야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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