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 공부를 하는 이유에 대한 정리되지 못한 이야기들


한자를 공부하고 있다고 이야기하면 사람들이 바라보는 시선이 정말 재미있다. 무척 신기해하는 느낌이라고 할까? 여튼, 대화가 끊기고 잠시 정적이 흐른다. 이제 한문이라는 것이 우리의 생활과 거의 관련되지 않는 분야라는 것을 새삼 느낀다.


IT 시대로 넘어오면서 한문은 더더욱 외면 받는다. 그리고 그게 정상이다. 중국마저도 한자를 잘 안쓰는 시대에 한자를 공부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관련 분야의 학자일 수밖에 없다. 게다가 한자는 컴퓨터에서 사용하기 정말 어려운 글자 체계라서 더더욱 사용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시대에 한자를 공부하고 사용하고 싶다고 한다면 결국, 동양철학, 한의학, 사주, 풍수 등을 공부하는 경우라고 할 수 있다. 뭐, 나도 그런 분야에 대한 호기심이 없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구태여 한자를 공부할 필요가 있을까 싶다. 어차피 다 한글로 번역되어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한문의 번역을 어디까지 믿을 수 있을까? 솔직히 믿기 어렵다. 번역이라는 것 자체가 상당히 난제다. 해당 언어에 능통하고 그리고 그 책이 다루고 있는 분야에 능통한 사람이 한국어에도 굉장히 능통해야 한다. 이 세 가지가 전부 갖춰져야 볼만한 책들이 나온다. 그래서 소설이나 시들은 상당히 번역이 잘 된다. 하지만 조금만 문학이 아닌 쪽으로 전문성이 높은 책들의 번역은 정말 슬프기 그지없다. 그런데 한문은 여기에 한 술 더 뜬다. 한문은 내가 접해본 언어들 중 가장 축약된 언어형식을 가지고 있고 문장을 읽을 때 난해한 언어다. 그래서 내용도 엄청 축약되어 있다. 따라서 이것을 한글로 다시 전개할 때, 본인의 생각이 반영될 수밖에 없다. 내용을 더 자세하게 풀어쓰면 풀어쓸수록 더 원문과 거리가 멀어진다.


읽고 있던 책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서 Anki로 한문을 공부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지만 번역이 엉망인 책들은 한문을 공부하게 된 가장 최종의 방아쇠였을 뿐, 그 전에 이미 한문에 대한 상당한 호기심이 있었고 그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스스로 생각한 한문 공부의 필요성은 다음과 같다. 

    

1) 국어가 정확해진다. 

2) 글자 자체가 풍부하게 의미작용을 한다. 

3) 암기하기 좋고 곱씹기 좋다.

4) 한문으로 읽어야 좋은 정말 좋은 문헌이 많다.

5) 언어적인 측면



1) 국어가 정확해진다.


오랫동안 ‘자유’라는 말을 영어의 ‘freedom’이라고 생각해왔다. 멜 깁슨이 “브레이브 하트”에서 ‘freedom’을 외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다가 우연한 계기로 ‘자유’의 한자어인 ‘自由’를 알게 되었다. 그것은 ‘자기 원인’, ‘스스로의 이유로’라는 의미였다. ‘freedom’은 외부의 억압과 착취가 없는 것 뿐이라면 ‘自由’는 스스로의 이유로 자신의 이유로 스스로 움직인다는 것이었다. 


서구 형이상학에서 모든 원인의 인과연쇄는 결국, 자기 자신을 원인으로 하는 제1원인으로 귀결되고 그 제1원인은 스스로 말미암아 작용하는 존재가 된다. 그리고 흔히 그러한 존재를 신(GOD)이라고 한다. 즉, 신은 ‘自由’로울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인 셈이다. ‘自由’라는 것은 어리석음에 흔들리지 않고 지혜롭게 생각하고 행동하며 스스로 작용을 시작하고 책임지는 신적인 존재로 인간의 존재를 끌어올리는 단어였던 것이다. 이를 깨닫게 된 날 내 삶은 분명히 조금 나아졌다.


또, 자연이라는 말이 있다. 영어로는 ‘nature’다. 하지만 한자어로는 ‘自然’이다. 이 둘은 명백히 다른 언어다. ‘nature’가 문명의 반대편을 지칭하는 단어다. 장자크 루소가 “자연으로 돌아가라.”라고 이야기했을 때, 이것은 그야말로 문명을 버리고 원시 상태로 돌아가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한자어 ‘自然’은 본성에 따라서 저절로 그러하게끔 되는 것이다. 따라서 문명은 인간의 ‘自然’이므로 이 또한 배척할 대상이 아니다. 단지, 서로 이질적인 것들의 ‘自然’과 조화를 이루는 것이 중요할 뿐이다. 


사람들은 ‘자연’을 이야기하면서 전원으로 돌아가 느긋하고 평화로운 삶을 이야기한다. 서구의 ‘nature’와 동양의 ‘自然’이 섞여서 혼합되어 버린 것이다. 나는 ‘自然’이라는 단어를 알게 되면서 알게 모르게 혼동되던 개념들을 풀 수 있었고, 이제 더 이상 인간의 문명을 자연스럽지 않은 것으로 혐오하지 않게 되었다.


보다시피 서구에서 들어오는 개념들을 번역한 번역어와 기존의 언어들이 부딪히고 섞이면서 수많은 혼란을 가져온다. 그런데 기존의 언어들은 대부분 한자어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한자를 모르면 그 의미가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고 그저 사용하는 방식에 따라서 막연히 의미를 아는 경우가 많다. 이러니 점점 언어의 혼란은 가중되는 것이다. 



2) 글자 자체가 풍부하게 의미작용을 한다. 


그렇다면 “글자 자체가 풍부하게 의미작용을 한다.”라는 것은 무엇일까? 표음문자의 단어는 한 단위로 뭉뚱그려진 것이다. 가령, ‘사람’은 사람이다. 그냥 그렇게 지칭한다. 그런데 한자어로 사람은 ‘人(사람 인)’이다. 이는 두 다리로 서있는 사람의 모양이다. 즉, 형상을 본 떠 만든 글자이다. 여기에 木(나무 목)을 붙이면 사람이 나무에 기대어 쉬고 있다는 의미의 休(쉴 휴)가 된다. 글자들이 만들어진 맥락을 유추하면 그림이 그려지고 의미작용이 풍부해진다.


또, 예를 들어보자. 태양은 日(날 일)이고 달은 月(달 월)이 된다. 이 둘을 합쳐서 明(밝을 명)을 만든다. 빛의 근원이 낮에는 태양이고 밤에는 달이었던 시절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적합한 글자다. 이제는 明(밝을 명)에다가 식물이나 풀을 의미하는 초두머리(艹)를 씌우면 萌(싹 맹)이 된다. 萌(싹 맹)을 보면 땅속에서 버티던 식물들이 지표를 뚫고 나와 밝은 곳에 드러나는 것을 싹이라고 여긴 사람들의 심상이 그려진다. 


한자를 공부하다 보면 이런 식으로 글자가 만들어진 원리를 자연스럽게 생각하고 확정하게 된다. 물론, 그 원리가 고고학적으로 정확한 것은 아니고 스스로의 생각에 불과하다. 하지만 한자가 만들어진 납득할만한 이치를 찾았을 때 그 한자는 머릿속에 각인되고 그 글자가 생생하게 살아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경험을 자주 하게 된다. 이것은 표음문자에서는 맛보기 힘든 특이한 문자 경험이라고 할 수 있다. 



3) 암기하기 좋고 곱씹기 좋다.


한문을 번역한 책들을 살펴보자. 항상 한문은 짧고 한글은 길다. 그럴 수밖에 없다. 한자는 어지간한 개념을 전부 하나의 글자로 만들기 때문이다. 우리말로 “공자가 말하기를”이라고 하면 한자어로는 “子曰”이다. 한자어는 2글자인데 한글은 공백 포함해서 8글자로 4배다. 이렇게 한자가 짧기 때문에 당연히 암기하기에 좋고 곱씹기에 좋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건 단점이기도 하다. 한자어의 번역이 어려운 이유기도 하지만 너무나 축약되어 있는 한자 덕분에 정확한 정보의 전달이 되기는 어렵다. 오히려 각 시대의 사람들은 이러한 한자어로 된 문헌을 보면서 그 시대에 맞는 깨달음을 얻기 일쑤였고, 덕분에 사람들마다 해석이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이건 한문의 문법체계와도 관련이 있는데, 한문의 문법은 정말 너무나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지나치게 열린 체계이다. 이런 열린 체계의 문법과 축약된 한문이 합쳐지면 해석은 중구난방이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따라서 이러한 한문의 공부는 외워서 곱씹는 수밖에 없다. 매일 매일 곱씹다 보면 글자들이 살아 움직이면서 합종연횡을 하고 그러다가 도달한 균형점에서 그 의미작용을 선연히 드러낸다. 이때, 의미는 단순히 하나가 아닐 수 있다. 여러 가지 의미들이 입체적이고 복합적으로 드러날 수 있다.


내가 만일 지식을 공부하려고 한다면 그 지식을 한자로 축약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일 것이다. 내가 공부한 지식을 타인에게 전달하는 용도로 한자와 한문은 별로겠지만 내 스스로 지식을 저장하고 사용하기 위한 용도로 한자는 가장 고효율의 압축을 보여준다. 그리고 곱씹기를 통하여 입체적이고 복합적으로 드러나는 의미형태가 흥미롭다. 



4) 한문으로 읽어야 좋은 정말 좋은 문헌이 많다.


평소 한문은 고리타분하고 꼬장꼬장한 잔소리 모음처럼 생각했다. 그러다가 대학 때, 구장산술(九章算術)을 읽어보고 그 정밀함에 꽤 놀랐다. 그렇게 조금씩 접하게 된 내용들을 보면서, 너무나 많은 천재들이 남겨놓은 저술들이 있음을 자각하게 되었다. 


개인적으로 고대의 기술과 수학에 관심이 있고, 노후를 위하여 명리나 풍수에도 관심이 있다. 그리고 그런 쪽을 뒤져보다 보면 정말 말이 되지 않는 이야기만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입이 벌어지는 글도 가끔 마주치게 된다. 하지만 이해하기가 너무 어렵다. 기초가 없고, 한문을 모르니 한글로는 그 맛을 잃는 경우가 많다. 


김용의 영웅문 3부작이 다시 한글로 재번역되어 나왔다. 한문을 모르는 신세대를 위하여 한자어를 한글로 풀어서 설명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볼 때마다 김이 빠지는 느낌이다. 한자어가 주는 심상이 사라지고 한글의 설명이 되면서 그 생기를 잃어버린 것이다. 한문 특유의 심상을 느낄 수 없으니 소설의 즐거움도 줄어드는 것이다. 결국, 한문도 원문으로 봐야 제대로 맛을 느낄 수 있는 셈이다.



5) 언어적인 측면


마지막으로 한문 공부를 하다 보니, 언어적인 측면도 무척 흥미로워지기 시작했다. 특히, 의미작용이라는 부분에서 그렇다. 한문은 이야기의 축적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긴 이야기가 사자성어나 고사성어로 축약되고 고유명사화 된다. 그리고 다시 축약된 성어들이 모여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고 또 축약된다. 그래서인지 익숙한 한문을 접할 때는 그 의미작용이 매우 강하게 이루어진다는 느낌을 준다. 즉, 사자성어만 들어도 관련 고사가 한꺼번에 입력되는 느낌이다. 표음문자 체계에서도 다양한 측약어를 사용하지만 한자만큼 직접적인 느낌을 주지 않는다. 기회가 닿는다면 이런 부분도 조금 연구해보고 싶다. 

불교에 대한 관심이 식었지만 대학시절 내내 불교와 마주칠 일이 몇 번 있었다. 그 중 가장 큰 2가지 중 하나는 괴델 에셔 바흐라는 책을 읽은 것이었고, , 한번은 금강경을 읽으면서 신기한 체험을 한 것이었다.

 

괴델 에셔 바흐에 대한 서평과 논평은 다음 기회로 하고 이번에는 금강경을 읽다가 겪은 희한한 체험에 대해서 이야기해보고 싶다.

 

대학에서 나는 전공 공부를 거의 안하는 학생이었고, 오직 시험 전날 밤을 새면서 벼락치기 공부만 했다. 평소에 따로 시간을 내어서 공부를 하거나 하는 경우는 전혀 없었다. 이 부분이 슬픈 것인데, 무언가 자기만의 기준이 있어서, 가령, “대학 공부에는 전혀 관심이 없어!” 라든가 대학 공부 말고 나의 활동을 하고 싶어라든가 하는 식의 이유 따위는 없었고, 오히려 성적을 잘 받고 졸업하고 싶어서 전전긍긍 하면서도 평소에 공부를 안했다는 것이다. 아니, 못했다는 것이다.

 

원래,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벼락치기로 공부하는 것이 습관화되어 있어 뭐든지 벼락치기로 하려는 습성을 가지고 있는 것은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대학의 공부는 도저히 하루 밤새는 것으로는 커버할 수 없을 정도로 공부할 내용이 많아 매일매일 공부해야만 겨우 따라잡을 수 있다. 다시, 졸업을 하기도 힘들 정도로 학점이 나빴기 때문에 아둥바둥 공부를 해야만 하는 상황이었고 스스로 공부를 해야겠다는 자각이 있음에도 이상할 정도로 공부가 되지 않는다.

 

차라리 실컷 놀아야지라고 마음먹으면 충실하게 놀지만, “열심히 공부해야지라고 마음먹으면 노는 것도 공부하는 것도 아닌 이상한 상태가 되어버린다. 갑자기 공부와는 전혀 상관없는 다른 분야에 대한 창의력이 샘솟기도 하고, 친구들의 급한 사정이나 다른 활동으로 인하여 도저히 공부를 할 수 없는 상황으로 스스로를 몰아간다.

 

그 날도 그랬다. 바로 다음 날 아침 10시에 시험이지만 수업을 집중해서 들어본 적도 없고, 책을 펼쳐본 적도 없다. 익숙하지 않은 영어로 200페이지 정도를 공부해야 하는 시험이었다. 시험 전날임에도 아직 책을 펼치지도 않았고 어째서인지 손이 가지도 않았다. 스스로에게 시험공부를 해야 해!”라고 아무리 강조해도 그날은 유난히 손이 가지 않았다.

 

가까스로 밤 10시가 되어서야 책을 펼친다. 영어로 200페이지를 공부할 생각을 하니 좌절감이 몰려왔다. 그러다 보니 어째서 평소에 공부하지 않았을까?”, “나는 구제불능인가?”, “나에겐 자기를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이 전혀 없는 것인가?” 따위의 생각이 몰아치면서 자괴감이 들고 스스로에 대한 한심함으로 분노와 짜증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분노와 짜증이 어찌나 넘치는지 책을 눈앞에 두고 있어도 글자가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무리 읽어도 글자의 의미에 도달하지 못하는 상황이 반복되었다. 그리고 1130분이 되었을 때는 이대로는 시간낭비일 뿐이라고 판단하고 조금이라도 자고 일어나 다시 공부해야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스스로에게 분노하고 이 상황에 대한 짜증을 내면서 집에 돌아와서 자려고 하니 형이 게임을 하고 있다. 형이랑 같은 방에서 자기 때문에 쫓아낼 수도 없어서 내일 시험 때문에 힘드니 게임을 그만두라고 양해를 구했지만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다. 분노와 짜증이 숨막힐 정도로 올라오기 시작한다. 잠을 자야 하는데 스스로에 대한 분노와 짜증으로 정신은 돌아버리고 게임소리와 불빛은 자꾸 짜증을 불러오고 형에 대한 짜증과 분노까지 겹치면서 처음으로 이 분노와 짜증이 감당하기 어렵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형의 뒤통수를 주먹으로 내려치고, 컴퓨터를 오함마로 내려찍는 상상을 계속 해보지만 분노와 짜증은 가라앉지 않고 오히려 더 기승을 부렸다. 머리가 너무 혼란스러웠고 잠을 잘 수도 공부를 할 수도 없는 상황에 생애 처음으로 생각을 분산시키고 싶다는 했다. 그 때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금강경을 꺼내들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금강경을 고른 이유는 이 책은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책이고 재미있거나 몰입해서 읽을 것이 아니라는 점 때문이라는 것이다. 당시의 상황은 진지하게 독서를 할 정신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에 오히려 그런 진지한 독서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금강경을 꺼내들어 읽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우리가 독서를 하면 글을 읽고 그 글을 의미로 조합해서 전체적인 메시지와 서사로 만들어내는 과정을 겪게 된다. 그래서 독서하는 사람은 글을 읽지만 그 글을 씨앗으로 해서 스스로의 정신이 만들어내는 의미작용을 통하여 메시지와 서사를 생생하게 구현하게 된다. 금강경을 읽기 어려운 이유는 그런 의미작용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독서 경험 자체가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단지, 정신을 분산시키기 위해서 금강경을 읽었고 독서 경험을 바라지도 않았기 때문인지 부담없이 술술 읽혔다. 어차피 의미에 관심이 없으니 그야말로 기계적으로 글자를 그대로 읽고 넘어가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읽다보니 어느새 구름이 걷히고 밝은 빛 하나가 심연 속에서 떠올라 환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시험공부를 못했다면 늦게라도 최선을 다해서 공부하면 된다. 혹은, 최선을 다하고 싶지 않다면 빠르게 포기하는 것도 좋다. 그런데 이번에는 어떤 생각도 판단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저 짜증과 분노 뿐이었다. 물론, 짜증과 분노가 언제든지 일어날 수도 있지만 분노와 짜증이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심하게 일어나는 경험을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리고 그 상황이 너무 괴롭고 고통스러웠다. 이 괴롭고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조금이라도 정신을 분산시키면 좋겠다는 생각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금강경을 읽었다. 그런데 읽다보니 빠른 속도로 짜증과 분노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구름처럼 나의 정신을 모두 가리고 있던 짜증과 분노가 가라앉으면서 몇 가지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내일 시험을 망칠 수도 있지만 일단 최선을 다해보고 할 수 있는 만큼 해보고 스스로에게 부끄럽지는 않게 하자.”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빛이 떠올랐다. 다시 학교를 가서 공부를 했는데, 공부 속도가 미쳤다. 난 영어로 200페이지를 깔끔하게 공부해서 결과적으로 무척 좋은 성적을 받게 되었다.

 

구름이 걷히고 빛이 떠오르는 심상은 당시 실제로 생생하게 겪었던 것이다. 그 심상이 너무나 선명해서 깊은 인상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시험은 성공적으로 통과했지만 후에 금강경을 아무리 읽어도 이 심상이 재현되거나 미친 공부효율을 보여준 경우는 없었다.

 

이 경이로운 경험은 대학입시 때 재수하면서 겪었던 마법같은 일과 함께 항상 그것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항상 생각하는 주제 중에 하나였다. 그래서 금강경을 숱하게 다시 읽어 보았고 관련 불교 서적을 찾아서 읽어보기도 했지만 알 수 없었고 그저 신기한 경험으로만 남았다.

 

결국, 이 현상을 스스로 해석할 수 있게 된 것은 인생의 큰 분기를 넘어서면서 부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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