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를 이해하지도 못하고 말하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대화와 의사소통을 할 수 있지완전언어상실증에 대한 정보를 좀 알아볼 필요가 있었다. 찾아보니 언어를 사용하지 못한다는 것이 사물을 인식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아니다. 즉, 일상에서 자주 사용하는 단어들 또는 일상 활동을 그림이나 기호들로 표현하는 보드 등을 이용해 힘들게나마 대화를 할 수 있다고 되어있다. 즉, 힘들게 대화가 가능한 셈이다. 또, 언어 능력만 없어지거나 극소량 남고 나머지 인지 기능은 그대로 남아있는 것이므로 언어를 이해하고 말하는 활동은 할 수 없지만 자주 사용되는 단어들을 사용할 수 있고 그림을 명확하게 인식할 수 있으며 욕도 내뱉을 수 있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이 무언가 언어활동이라는 것과 연계되면 갑자기 먹통이 되는 것이다. 


가령, ‘커피’라는 단어를 예로 들어보자. 완전언어상실증 환자는 이 ‘커피’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커피’를 언어로서는 모른다. 이건 과연 어떤 것일까? 그런 경험을 과연 서술할 수 있을까? 아니면 타인이 서술한 그런 기억을 더듬는 것이 가능할까? 가령, 태어날 때부터 시력을 상실한 사람의 세계를 글로써 이해할 수는 있는 것일까? 아마도 불가능할 것이다. 완전언어상실증을 경험해볼 방법은 없어 보인다. 그런데 실어증 관련 증상을 확인해보니 물건의 이름을 기억하거나 말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 명칭실어증이라는 것이 있다. 그리고 대부분의 실어증 환자에게 명칭실어증이 동반된다. ‘커피’라는 단어를 언어로서는 모른다는 것이 완전언어상실증과 같지는 않겠지만 약간이나마 비슷한 무언가를 조금은 체감해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명칭을 몰라서 고생했던 경험을 떠올려 봤다. 


1996년에 이메일에 사용되는 @ 표시를 처음 봤다. 당시는 핸드폰도 스마트폰도 없었고 삐삐가 막 도입되던 시기였다. 오직, 일부 PC통신 유저들만 이메일을 사용해봤던 시기이다. 따라서 컴퓨터와 통신으로 새로운 세상이 열릴 것이라는 기대감 속에 관련 도서들이 나오고 있었지만 체계적이지 못하고 주먹구구식인 시대였다. 그래서 처음 @ 표시를 봤을 때, 이것을 어떻게 읽는지 도저히 알 수 없었고 아는 사람을 만나기도 쉽지 않았다. 이런 기호 하나 모르는게 무슨 대단한 일도 아니었으므로 그냥 지나갔다. 그런데 점점 @ 표시가 나타나는 빈도가 늘어나기 시작하면서 책이나 각종 유인물에 @ 표시가 나타나기 시작해 나를 괴롭혔다. 책을 읽다가 문장의 중간에 @ 표시가 나타나면 갑자기 흐름이 끊어지고 맥락을 잃게 되는 것이다. 이 느낌이 정말 고약했는데 머릿속이 하얘지면서 모든 것이 헝클어지는 느낌이었다. 더 고약한 것은 이 기호가 기억되지도 잘 떠오르지도  않는다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고 싶을 때도, 책만 덮으면 언제 그런 기호를 봤냐는 듯이 전혀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 모양도 기억이 되지 않는 것이다. 지금은 이런 경우 바로 자신만의 이름을 붙이면 된다는 것을 알지만 당시에는 그런 생각을 떠올리지 못했다. 결국 사람들이 @ 기호에 ‘골뱅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나서야 이 기호를 편하게 사용할 수 있게 되고 책을 읽을 때 장애를 느끼지 않게 되었다. 


이름 즉, 명칭을 알 수 없는 기호를 접하면 머릿속에서 이어지던 일련의 텍스트 흐름이 끊긴다. 이 이름을 알 수 없는 기호를 만나면 머릿속에 블랙홀이 열리면서 그 동안의 읽었던 모든 맥락과 지식이 빨려들어가고 오직 순수한 뇌만 남는 것 같았다(나중에 언급하겠지만 이 상태를 마냥 나쁘게 볼 필요는 없다. 훈련되면 상당히 즐거운 방법으로 쓸 수 있다.) 그리고 당연히 그 기호에 대한 기억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스스로 이 기호의 명칭을 확인하려고 노력하는 경우는 책을 보면서 답답함을 느끼고 있는 그 순간뿐 뒤돌아서면 그런 기호가 있었는지도 거의 바로 까먹는다. 이름이 없으면 이해하기도 어렵고 그런 존재가 있었는지를 기억하기도 어려운 것이다. 따라서 사물의 첫 번째 지식은 바로 이름을 아는 것이다. 이름을 모르면 그것은 기억과 생각의 대상이 되기 어렵다. 그리고 기억과 생각의 대상이 아닌 것이 생각의 흐름에 끼어들 때 우리는 일상적인 정신활동을 유지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정신은 눈앞의 사물을 정신에 정위치시키지 못하는 것으로 인식한 순간 자신이 있는 위치와 맥락을 잃어버리고 오류에 빠지기 때문이다(라캉이 언급한 바 있는 정신병 환자들이 누빔점이 없어 끊임없이 맥락을 바꿔가면서 논리적인 체계를 완성해나가는 것이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령, 한국에서 자고 있는 어떤 사람을 그 사람 모르게 순식간에 몽골초원으로 이동시킨다면 그는 갑자기 변화된 자신의 주위 상황이 꿈인지 아닌지 아니라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를 받아들이기 위하여 무척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낼 것이다. 그에게 어제 무슨 일이 있었고 오늘 무슨 일을 하려고 했다는 삶의 맥락은 이해할 수 없는 현실 앞에서 순식간에 사라지고 그저 지금 일어난 일에 대한 수수께끼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만 남게 된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그 사람은 결국, 자신이 처한 상황을 파악하고 다시 맥락을 어찌어찌 복구하거나 다시 만들어나갈 수 있지만 명칭실어증의 경우에는 그러한 정위치에 도달하지 못하고 영원히 길을 잃은 채일 것이라는 점이다. 이 때의 기억을 환기하고 생각을 정리하다 보니 실어증에 걸렸을 때 갑자기 찾아올 혼란과 당혹감 같은 것이 이런 것이겠구나 하고 느끼던 와중 별안간 진실을 알게 되었다


올리버 색스의 언어상실증(실어증) 사례가 자꾸 뜬금없이 불쑥 머릿속을 점령해서 시작한 고찰이었는데, 솔직히 여기에 어떤 마법같은 해답이 숨어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무의식이 신비로운 정답을 알려준다는 식의 기대를 가졌던 것이다. 그런데 과거의 경험을 환기하고 명칭실어증으로 인한 답답함을 유추해볼 수 있는 경험을 떠올리다 보니 왜 내가 그 사례를 계속 다시 떠올렸는지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미국 드라마를 자막 없이 본 경험을 내 무의식이 완전언어상실증으로 해석했던 것이다. 즉, 자막 없이 드라마를 시청할 때 가졌던 그 막막함과 고역감은 결국 물속에서 살던 물고기가 물 밖으로 나왔을 때 가졌던 그 답답함처럼 갑자기 언어적 맥락을 잃어버리게 되었을 때 느꼈던 답답함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답답함이란 것이 명칭실어증을 유추하면서 가졌던 그런 류의 답답함과 당혹감을 한껏 늘인 것이었기 때문에 어리석게도 그제서야 내가 완전언어상실증 비슷한 것을 체험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즉, 무의식이 정답을 알려준 것이 아니고 드라마를 보면서 느꼈던 다양한 경험을 글로 읽은 적이 있다는 것을 알려준 셈이다. 


물론, 앞서 언급한 것처럼 뇌손상이 진행된 완전언어상실증을 체험할 수는 없다. 단지 어느정도 비슷한 경험일 것이라고 스스로 설득한 셈이다. 따라서 이러한 판단은 객관적으로는 올바른 판단은 아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비슷할 것 같다고 판단하면서 시행착오를 해보는 것도 전혀 나쁘지 않다. 생각을 전개하다보면 그것이 정말 올바른 것인지 아닌지 판단할 근거도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여튼, 자막 없이 드라마를 본 경험을 완전언어상실증과 동일한 경험이라고 개인적으로 간주하기 시작하니 갑자기 이 고찰이 정말로 흥미로워지기 시작했다. 정말로 새로운 세계가 열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앞서 포스팅한 미국 드라마를 자막 없이 보다가 생긴 의문점이 스스로 생각하기에 꽤 오묘하고 그 질문에 무언가 숨어있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에 이에 대한 해답을 나름 내보려고 노력했다. 제시된 의문점은 결국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잘 들리던 영어가 왜 갑자기 안 들리게 되고 영어가 안 들리는데 어째서 각각의 장면과 등장인물에 대한 공감은 강해지고, 반대로 익숙하던 스토리는 갑자기 조각조각 나서 서로 연결되지 않는가?


사람은 우선 아는 것을 총 동원하여 문제를 해결해보려고 하는 법이다. 그러니 이 문제점을 뭉뚱그려서나마 해결할 수 있는 것 같은 해답을 자동으로 찾게 되었다. 굉장히 익숙한 대답이 한 가지 떠올랐다. 브레히트 식의 낯설게 하기가 작동되어서 자막 없이 드라마를 본 순간 익숙했던 드라마가 낯설게 느껴지기 시작하고 원점에서 다시 이것을 보게 된 것이라는 대답이다. 아무래도 낯설게 하기가 익숙한 장면에서의 관객의 공감을 막고 이를 비틀어 원점에서 다시 그 장면을 보거나 새로운 관점으로 유도하는 것에 가까우니 내가 미국 드라마를 자막 없이 보면서 그것이 낯설어진 느낌을 느낀 것도 이와 관련이 전혀 없지는 않을 것이다. 또, 경험상 브레히트 식의 낯설게 하기 효과가 들어간 연극들을 보고 있으면 이야기로서의 기승전결을 체감하기 조금 어려웠다는 점이 이를 뒷받침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다른 점이 분명히 있다. 낯설게 하기는 익숙한 레토릭과 설정에 따라서 사람들이 자동적으로 최면처럼 공감하는 것을 막는 것에 가깝다. 따라서 공감을 억제하기 위하여 그러한 장면을 뒤틀어 그 장면을 낯설게 하게 하는 것이다. 평소 즐겨 시청하던 드라마 에피소드가 익숙해진 것은 당연하고 자막을 제거하면서 그것이 낯설어진 것도 아마 맞을 것이다. 하지만 나의 경우는 미국 드라마를 보면서 배우 개개인의 연기나 개별 장면에는 더 몰입하였고 더 공감하였다. 즉, 공감이 억제되지 않았고 오히려 매우 강하게 활성화되었다. 그리고 낯설게 하기가 들어간 연극은 어떤 공감과 감동의 기승전결은 없지만 이야기의 맥락은 매우 충실하게 살아 있다. 즉, 현재 보고 있는 극 속의 장면이 어떤 맥락에서 나왔는지에 대해서는 충분히 주지되는 바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내 미국 드라마 시청 경험은 그러한 맥락을 찾기 어려웠다. 만일, 전체적인 스토리를 거의 외우다시피 하지 않았다면 분명히 시청하는 도중에 갑자기 길을 잃고 내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 먹먹해지는 상항에 처했을 것이다. 


의문점에 대한 해답으로 브레히트의 낯설게 하기 효과가 떠오른 것 말고는 아는 것이 없으니 답이 턱 막혔다. 그러다가 올리버 색스의 언어상실증(실어증) 사례가 뜬금없이 떠올랐다. 느닷없이 환자들이 병동에서 웃고 있는 장면이 계속 떠올라서 왜 그러나 파고들게 되었다. 


올리버 색스의 언어 상실증 사례에 등장하는 실어증 환자들이 대통령의 거짓과 위선을 파악하는 것을 읽으면서 떠올린 것들은 친숙한 것들이었다. 즉, 인간 거짓말 탐지기에 가까운 사람들이 사람들의 몸짓이나 얼굴의 표정 등을 관찰해서 거짓말을 하는지 여부를 확인하는 것과 같은 것을 떠올린 것이다. 이런 모습은 라이 투 미 같은 미국 드라마에서 잘 보여주고 있다. 그 외에도 마술사들이 쇼에서 관객이 숨긴 보물을 찾기 위하여 숨긴 사람들의 미세한 신체반응을 유도하고 그를 통하여 물건을 찾는 모습 같은 것이 떠오르기도 했다. 그래서 이 사례를 읽으면서 실어증 환자들이 기본적으로 그러한 기술을 익힌 것처럼 생각하고 넘어갔다. 올리버 색스도 눈과 귀로 확인할 수 있는 단서를 이용하여 의사소통을 한다는 식으로 적었기에 그 사소한 단서가 내 머릿속으로는 앞서 언급한 인간 거짓말 탐지기나 마술사들이 활용하는 단서와 동일한 것처럼 여겨졌다.


그런데 마음을 가라앉히고 다시 원점에서 생각해보니 그들이 사용하는 단서와 그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미묘하지만 완전히 달랐다. 왜냐하면 실어증 환자들은 거짓을 파악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비언어적으로 대화와 의사소통도 했기 때문이다. 인간 거짓말 탐지기들은 상대가 하는 말을 듣고 그에 따른 반응을 보면서 거짓말 여부를 탐색한다. 즉, 의사소통은 언어로 이루어지고 그것을 뒷받침하는 다양한 단서들을 조합해서 거짓말 여부를 파악하는 것이다. 또, 마술사들은 그 사람과 신체를 맞대고 통제되지 않는 미세한 신체의 긴장을 통해서 이 관객이 보물을 숨긴 곳을 향할 때마다 맘속의 긴장이 신체에 미세하게 반영되는 것을 캐치하고 이를 이용하여 숨긴 물건의 위치를 찾아가는 것이다. 이 경우는 철저하게 계산되고 세팅된 상황이다. 즉, 그 상황에서만 적용할 수 있는 방법일 뿐, 언어를 모르면서도 일상생활에서 의사소통하고 대화하는 실어증 환자의 그것하고는 비교하기 어려운 것이다. 이렇게 비교해보고 나서야 올리버 색스의 언어상실증(실어증) 사례에 언급된 간단한 이야기들이 정말로 그렇게 간단한 것들이 아님을 깨닫게 되었다.

올리버 색스의 책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신경과적 증세를 겪는 환자들을 옴니버스식으로 서술하면서 그 각각의 증세를 겪는 환자들에 대하여 무척 담담하면서도 따뜻한 시선을 드러내고 있다. 특이한 증세를 겪는 사람들에 대한 충격적인 이야기를 기대하고 책을 펼쳐들었기 때문인지 그 담담하고 따뜻한 시선이 오히려 너무 기이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처음 읽었을 때는 정말 읽는 보람도 기쁨도 별로 없었다. 그런데 그만 읽자니 책이 술술 잘 넘어갔고, 각 증세별 이야기 단락도 길지 않아서 어찌어찌 전부 읽어보게 되었다. 어쩌면 별로 바쁘지 않은 상황에서 기괴하고 특이한 증세에 대한 가벼운 흥미로 읽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런 책들이 있다. 읽었을 때는 별다른 감동도 흥미도 느끼지 못했고 아무런 느낌도 없었던 것 같은데 읽고 나면 어느 순간부터 끊임없이 반추되는 책들 말이다. 이 책이 나에게는 그랬다. 신경과적 증세라는 것이 인간 존엄의 밑바닥으로 떨어지게 하는 비극적 아우라를 가진다. 이 책에서 그런 느낌으로 환자들을 묘사했다면 나는 머릿속에 그런 사람들의 비극적 카테고리를 만들어 몽땅 집어넣고 그냥 슬퍼하고 나와 분리시키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은 그 모든 신경과적 증세가 비극이 아닌양 지독하리 건조하게 담담하게 기술해 버렸고 그래서인지 비극의 카테고리에 들어가지 않은 환자들은 외면되지 않고 내 일상생활에 불쑥불쑥 튀어나와 인간의 본질에 대한 일면을 자꾸 내비친다. 

 

그저 단순한 호기심과 가벼운 흥미로 스치듯 읽고 넘어갈 것 같았던 이 책은 삶의 구비 구비에서 갑자기 나타나 존재감을 드러낸다. 이 책에서 소개된 환자들의 사례가 지혜의 빛을 던져주는 것이다. 처음엔 단순 열거식으로 환자들을 보여주는 것에 불과하다고 느꼈는데 실은 환자의 사례가 모두 그 자체로 완전하고 고유한 케이스로 깊은 인상을 주면서 머릿속에 남은 것이다. 그리고 그 환자들은 모두 인간 존재에 대한 낯선 가능성들을 제시하고 있었다. 이 포스팅도 책의 대통령의 연설부분에서 소개하고 있는 언어상실증 환자 사례가 머릿속에서 스스로 확장되더니 다른 고민들과 결합하여 인식의 큰 전환을 가져다 주었고 특히, 영어 공부에 대해서도 시사하는 바가 많기 때문에 이를 정리하고 싶어 포스팅 하는 것이다.

 

이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이야기는 왼쪽 관자엽의 장애로 말을 이해할 수 없는 극심한 수용성 언어장애나 완전언어상실증 환자들이 대통령의 연설을 듣고 폭소를 터뜨리는 장면을 제시하면서 시작한다언어나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실어증 환자들이 대통령의 연설을 듣고 폭소를 터뜨린다니 일견 말이 되지 않는 것 같다. 그런데 이어지는 이야기는 더 이상하다. 

 

지능이 높은 언어상실증 환자들은 말을 알아들을 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으며 이해할 수 없지만 의사소통을 하는데 전혀 지장이 없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래서 일상적인 대화만으로는 그가 언어상실증에 걸렸다는 것을 주변 사람들은 전혀 알 수 없는 경우가 있다.

 

말을 이해하지도 못하고 할 수도 없는데 의사소통에는 전혀 지장이 없다니 이게 가능한가? 어떻게 말을 하지 못하는데 의사소통이 이루어진단 말인가?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언어를 제외한 모든 것으로 의사소통하기 때문이다. 표정, 몸짓, 버릇, 태도 등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단서들과 말투, 목소리의 고저, 억양 등 귀로 확인할 수 있는 단서를 이용하여 원활한 의사소통이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언어상실증 환자가 일상적인 대화에서 이러한 각종 단서들을 이용하여 원활하게 대화를 하기 때문에 일상적인 대화로는 그가 언어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확인하기가 어려운 경우가 많다. 그렇기 때문에 의사들은 언어상실증을 확진하기 위해서 각종 단서들을 누출하지 않게끔 누가 봐도 매우 이상한 태도로 말을 걸거나 인공적인 기계음을 사용하기도 한다. 언어 외의 정보를 제거하거나 이상하게 뒤틀어 버리면 언어상실증 환자는 전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히려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언어상실증 환자들이 역설적이게도 정상인들보다 훨씬 뛰어난 의사소통을 한다. 이들이 비록 언어를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그 사람의 목소리의 고저나 버릇 등으로 거짓과 부자연스러움을 아주 자연스럽게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니 대통령이 아무리 미사여구와 감언이설을 늘어놓아도 그것을 이해할 수 없고 오히려 그 대통령의 표정과 음성의 높낮이와 이상한 신체동작 등만 보게 되니, 이는 마치 희극 배우가 우스꽝스러운 몸짓으로 누구나 아는 거짓말을 공들여 하는 느낌을 주니 언어상실증 환자들은 웃음이 터진 것이다. 


처음 이 사례를 읽었을 때는 언어상실증 환자들도 의사소통을 할 수 있다니 그저 신기하구나 하고 받아들였다. 그런데 사례라는 것이 참 재미있다사례 자체가 별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음에도 이러한 사례를 알고 있으니필요한 순간마다 이 사례가 머릿속에 불쑥 떠올라 다른 고민이나 이야기들과 어우러져 결국생각의 전환을 이룰 수 있게 도와주게 되었다. 이후, 미국 현지의 드라마를 자막없이 시청하면서 생긴 언어적인 의문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이 사례로부터 작지만 큰 도움을 받게 되었다. 


그 도움은 대충 이런 것이다. 아마도 이 이야기를 책으로 읽은 사람들은 대부분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언어상실증이어도 목소리의 고저나 버릇 등의 단서로 어느 정도 의사소통을 할 수 있구나 하고 말이다. 이와 관련된 주제에 대하여 조금 아는 사람이라면 얼굴 표정 읽기, 최면이나 관념운동 등에서 미세한 신체 반응 등을 이용하여 무의식적으로 누설되는 비밀을 확인할 수 있고 상대의 거짓말 여부를 확인할 수 있다는 식의 이약기가 있는데 언어상실증 환자들은 그런 능력이 무척 발전했구나 하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내가 그랬다. 하지만 실은 이는 정반대의 이야기도 동시에 담고 있었다.


그렇다면 어떤 정반대의 이야기인가? 


첫 번째, 지능이 뛰어난 완전실어증 환자들을 일상생활에서 찾아내기 어렵다는 말은 즉, 일상생활의 의사소통을 함에 있어 언어는 거의 필요없다는 것이다. 언어를 이해하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보통 평범한 사람인 것처럼 장애인 취급을 받지 않고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의사소통을 하고 있다. 액면 그대로 언어가 일상생활에서 별로 필요가 없는 것이다. 물론, 언어가 완전히 필요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실제로 언어가 의사소통에서 차지하는 역할이 과대평가되고 있다는 것은 자명한 것 같다. 


두 번째는 언어가 오히려 정확한 의사소통을 막고 있다는 점이다. 언어를 잘 이해하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감동적인 연설을 듣고 무척 감동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언어에 집중하기 때문에 언어상실증 환자들이 주의깊게 보는 일상적인 단서들은 보지 못한다. 즉, 언어를 듣는 사람은 그 언어의 상대는 보지 않고 언어에 집중한다. 만일, 상대에게 집중하려고 한다 해도 언어의 감동적인 내용들이 머릿속에 재생이 되고 있다면 사소한 단서들을 정확하게 판단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흔히, 뻔한 사기꾼의 감언이설에 속아 넘어가는 사람들을 생각해보면 된다. 자신이 듣고 싶은 말을 하는 사람에 귀가 솔깃해서 누가 봐도 뻔한 사기꾼에 놀아나는 사람들이 바로 이렇게 언어에 농락당하는 사람들이다. 사실, 이부분은 오히려 조금 다르게 말할 수 도 있을 것 같다. 즉, 언어가 정확한 의사소통을 막는 것이 아니라 언어가 현실을 대체하고 있는 것에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종합적으로 이야기하면 언어는 많이 과대평가되고 있다. 그리고 언어가 오히려 의사소통의 본질이라는 측면을 가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 가령, 영어 공부를 생각해보자. 사람들은 자신이 영어를 쓰는 외국인과 대화를 하지 못하는 것이 영어를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정말 그럴까? 실은 공통의 경험이 없고, 그로 인하여 서로 말을 할 공통의 화제가 없기 때문이지 않을까? 처음 영업에 나선 자동차 세일즈맨을 생각해보자.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영업을 해본 경험이 없다. 이런 사람에게 길에서 아무나 붙잡고 자동차를 사라고 말하는 것이 너무나 어색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말하는 것에 대한 강한 거부감이 느껴질 것이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맥락에 따라서 말하려고 한다. 맥락에서 완전히 어긋나는 말을 하는 사람을 보통은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고 당연히 그것을 아는 사람들은 맥락에 따라 말하려고 한다. 그런데 영업 사원은 맥락없이 갑자기 차를 사라고 들이대어야 하니 심적인 부담감이 엄청난 것이다. 당연히, 차를 사야하는 맥락을 가진 사람들을 찾을 것이고 우선, 친구들이나 가족들에게 영업을 시도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결국, 이 영업사원은 절박하게 실적 압박을 받았을 때, 겨우 먹고 살기위해서라면 얼굴에 철판을 깔고 들이대어야 한다는 식의 스스로의 맥락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들이댈 수 있게 될 것이다. 마치 해외 여행가서 급박해지면 바디랭귀지로 의사소통을 시도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 모든 맥락에서 언어는 사실 조금 부차적이다. 이러한 맥락이 있고 그 다음 언어가 있기 때문이다. 왜 영업을 잘 하는 사람들 중에서 외국어를 잘 쓰는 사람들이 많은지, 그리고 말 한마디 못하면서도 해외에 나가서 사업으로 성공하는 사람들이 있는지 생각해보면 이건 꽤 명백하다. 그들은 맥락을 만들어내기 때문에 외국인과 원활하게 소통할 수 있고 그러한 맥락 속에서 자신의 사업을 성공시키는 것이다. 언어보다 한단계 앞서 의사소통이라는 측면에서 어떤 맥락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과 그러한 맥락을 만드는 법과 그러한 맥락에 참가하는 법을 아는 것이 먼저인 셈이다. 


이런 깨달음과 더불어 개인적으로 인간이 의사소통을 어떻게 하는지 또한, 언어의 실체에 대하여 살짝 감을 잡을 수 있었다. 그 부분에 대한 이야기는 미국 현지 드라마를 무자막으로 시청한 경험과 함께 이야기해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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