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망상을 관찰하고 이 망상의 근원으로 올라가 뿌리째 뽑으려 했다가 파국을 맞이하는 이야기를 했다. 이 정신적 파국은 2004년에 있었고 2016년이 되어서야 스스로 어느 정도 치유되었다고 말할 정도가 되었다. 그리고 그 12년간 이 파국에 대한 경험은 내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반복적으로 재생되는 악몽이었다. 이미 많이 좋아졌다고 여겨지는 현재에도 언제 다시 그렇게 나락으로 떨어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여전히 남아있다. 그러니 이 파국이 어떻게 일어난 것이고 나에게 무슨 결과를 가져온 것인지 파악하려는 노력이 계속될 수밖에 없었다. 이번엔 그렇게 개인적으로 곱씹으면서 파악해본 파국의 근원과 양상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노파심에 말하지만 만일, 누군가 이 경험이 재미있다고 생각해서 이것을 따라하려고 한다면, 절대 그러지 않기 바란다. 내가 겪은 일이 나의 유전적, 환경적 요인 때문인지, 아니면 보편적으로 마주칠 수 있는 경험인지 알 수 없지만 구태여 10여년의 기간 동안 폐인이 될 불필요한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이 경험을 구태여 파국이라고 명명한 이유는 통제 불가능해진 삶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 경험을 경계로 하여 근본적인 정신적 변화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이 경험 이전과 이후의 나 자신은 전혀 다른 사람이라고 할 만한 변화였다. 즉, 단절이 발생한 것이다. 


 이 경험이 있기 전에도 다윈의 진화론과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에 열광하면서, 합리성과 이성이라는 신화에 도전하는 포스트모던적인 이야기들에 고개를 주억거리면서 동의했다. 즉, 인간이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라는 말이 전혀 옳지 않다고 생각한 셈이다. 그래서 효율 중심의 ‘경제적 동물’로서의 인간이나 모든 것이 통제되고 합리적으로 생각하는 ‘계몽적 인간’도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인간은 불합리하고 감정에 의해서 통제되는 ‘동물’의 하나라는 생각이 기본적으로 깔려 있었다.


 하지만 이런 모든 생각은 역설적이게 철저히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방식이라고 생각되는 방법으로 얻어낸 결과들이다. 진화론은 과학적 방법론과 광범위한 관찰이 적용되었고, 정신분석에서 프로이트는 건조할 정도로 철저하게 과학적 원인에 집착한다. 그것을 보고 전개되는 논의들도 대부분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라는 외피를 위하여 철저하게 논리성을 추구한다. 어쩌면 이는 이성과 합리성의 극단을 추구한 결과가 자기 부정으로 이어지는,  『괴델, 에셔, 바흐』 식으로 말하면 자기 부정에 도달할 정도로 고도의 이성과 합리성인 셈이다.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이성으로 관찰한 결과 인간에게는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이성이 없는 것 같다.”라는 패러독스에 가까운 결론에 도달하는 것이 만족스러웠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이는 입으로는 인간에게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이성이 없다.”라고 말하면서 지적인 허영심을 만족시키고, 은연중, 그 말을 하는 나 자신은 훈련받은 지식인으로서 “충분히 합리적이고 객관적이다.”라는 선민의식도 같이 즐겼던 것이 아닌가 싶다. 여하튼 입으로는 인간의 이성과 합리성을 부정하면서 추구하는 것은 바로 그 이성과 합리성이었다. 하지만 파국을 경험하고 난 이후에는 그냥 동물 레벨로 떨어져서 온갖 욕구에 매순간 꿈틀거리기에 바빴다.


 망상을 뿌리째 뽑으려는 의도 뒤에는 각종, 생각과 망상이 결국, 어떤 연쇄 반응에 의해서 일어났다는 가정이 있었다. 즉, 생각과 생각이 이어지면서 점차 망상으로 전개되고 그 망상에서 허우적대는 자신의 모습을 일종의 망상-모델로 떠올린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은연중 암묵적으로 전제하고 있었던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단 한가지의 근원적 망상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근원적 망상은 프로이트식으로 말하면 리비도일 것이고, 불교식으로 말하면 무명(無明)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바라봄으로써 그 경계를 뚫고 허무함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식의 모델은 칼릴지브란과 무협지의 합작이었던 것 같다. 아마도 항상 성욕에 관련된 잡념이 많이 나타나므로 프로이트를 같다 붙이고 거기에 주워들은 불교 상식과 무협지적 망상, 각종 형이상학적 모델을 짬뽕해서 얼기설기 만든 어떤 정신 모델을 은연중 신봉하고 있지 않았나 싶다. 


 하지만 망상 들여다보기를 반복하고 단기 기억상실을 몇 번 경험하면서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고통스럽게 알게 되었다. 


 우선, 하나의 망상을 확인하고 그 망상의 원인이 되는 생각을 보려고 했지만 보지 못했다. 하나의 망상을 잡아서 그것을 응시하면서 이 원인이 되는 망상을 보려고 할 때, 강하게 집중하면 의식이 날아갔고, 집중하지 못했을 때는 그저 망상 속에서 허우적대기만 했다. 하지만 들여다보기를 그만두고 일어난 상황을 곰곰이 곱씹어보면 망상 속에서 허우적댈 때나 의식이 날아가서 망상 한 가운데서 깰 때나 결국은 비슷했다. 현재 망상의 원인이라고 할 만한 앞서의 생각이나 망상을 발견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저 생각은 이 생각에서 다른 생각으로 비약하고 넘어갈 뿐이었다. 단지, 그 중간에 의식의 단절이 일어나는 것을 인식하느냐 인식하지 못하느냐의 차이만 있었을 뿐이었다. 이건 큰 충격이었다. 왜냐하면 생각의 근원이 다른 생각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관찰하는 의식은 그것을 전혀 감지하지 못했다. 그것을 감지하려고 하면 의식은 그대로 전원이 꺼져버렸고, 감지하려 하지 않았을 때는 생각의 도약을 은폐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생각이라는 것은 ‘연쇄’라는 말이 붙을 만큼 많은 생각들이 이어지는 것이 전혀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용출하는 욕구에 바로 달라붙은 작은 조각에 불과했다. 어떤 근원적인 망상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실재적인 성욕, 게임욕, 식욕, 명예욕이 생각의 근원에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욕구는 외부의 자극을 받았든 내부의 자극을 받았든 생각과 상관없이 촉발되었다. 가령, 성욕이 가장 대표적이다. 성욕이 용출할 때마다 그에 따른 의식적 생각이 형성된다. 다른 사람은 어떤지 알 수 없지만 스스로의 성욕을 추적했을 때 깨닫는 바가 있었다. 일단, 성욕은 생각을 통해서 일어나지 않는다. 매력적인 이성이 지나가면 그 이성을 눈과 몸이 따라가고 그 뒤에서 생각이 달라붙어서 그 행동의 이유를 만들어낸다. 그렇게 의식에서 만들어내는 이유는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는데, 결정적으로 반응보다 생각이 먼저 일어났다고 선후를 뒤바꿔 놓는다. 즉, 자신이 그 이성을 매력적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눈과 몸이 따라가고 있다는 것으로 뒤바꿔 놓는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이제 고개를 돌리고 내 일에 집중해야지라고 마음먹어 보려고 노력해보라. 일단, 그런 생각이 잘 들지도 않고, 억지로 그런 생각을 떠올려서 움직여보려고 하면 상당한 저항감과 온갖 핑계가 순식간에 떠오른다. 즉, 욕구가 우선이고 생각은 부수적이다.


 아마 위와 같은 상황을 많이 느껴보았을 것이다. 성욕, 게임, 담배, 식욕 등등이 용출할 때마다 자주 찾아오는 현상들이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자주 겪고 느낄 수 있는 것들이다. 하지만 이 상황의 이면에 욕구가 용출하기 이전 상황과의 불연속성이 있다는 점을 잘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지하철에서 책이나 스마트폰을 집중해서 보거나, 동행인에게 집중하고 있었을 수 있고 중요한 생각을 진행시키고 있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지나가는 이성에 의해서 성욕이 용출했을 때는 그 모든 것을 잊고 성욕으로 인한 생각과 제어에 몰두하게 된다. 그리고 그 과정은 자동적이고 불연속적이며, 갑자기 그 전에 무엇을 했는지 잊게 되는 찰나의 기억상실이 있다. 게임, 좋아하는 연인, 담배 등등 우리 주위에 우리를 지배하는 이 모든 것들은 비슷하게 작동한다. 


 나 자신의 망상을 들여다볼수록 내 생각이니 합리성이니 하는 것들이 그런 욕구에 붙어서 일어난다는 점이 명확하게 느껴졌고 욕구가 이동할 때, 내 생각도 그리고 그것을 감지하는 의식도 강제로 바로 이동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생각과 의식은 그야말로 곁다리에 불과하다. 욕구가 바뀌면 생각과 의식도 같이 점프하지만 의식은 그 변화를 인지하지 못하거나 알아도 그것을 속이고 연속적인 것처럼 은폐할 뿐이었다. 


 아무리 근대적이고 합리적인 인간상을 부정해 왔어도, 노력하고 경계하고 의식하면 어느 정도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겨왔던 것 같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나’라고 하는 어떤 일관되고 연속적이고 고유한 그 무엇이 있다고 여겨왔던 것 같다. 그리고 나는 스스로 그것들을 ‘의식’하고 있다는 암묵적인 믿음이 있었던 것 같다. 그렇지만 파국의 경험은 그 모든 것이 ‘의식’의 거짓말이라는 확신을 갖게 했다. 그리고 그 확신과 함께 나는 나 자신에 대한 모든 통제력을 상실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당시에는 이미 모든 것이 뜻대로 잘 되지 않는 심리적으로 힘든 시기였다. 그런데 그 동안 스스로 통제하고 일관된 ‘나’로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항상 욕구에 맞추어 생각하고 의식했을 뿐이라는 것을 깨닫고 스스로 통제되고 일관된 ‘나’가 조악한 환상이라는 것을 절감하면서 최후의 심리적 방어까지 무너졌던 것이 아닌가 싶다.

 이항구조에 대한 개인적인 발견으로 시작되어서 신경세포에 영감을 받은 나는 큰 호기심을 가지고 책들을 뒤지기 시작했다. 인간의 추상적인 정신이란 결국, 인간의 구체적인 행위와 사상으로 나타나는 것이고 이는 이항구조와 같은 어떤 추상적인 구조의 형태로 나타날 것이라는 생각에 문학, 사상 등의 책을 읽고 그러한 추상적인 구조를 추가적으로 발견하고 싶었고, 발견된 구조를 통하여 인간을 총체적으로 이해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공부들은 바로 큰 벽에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 제대로 된 인문학 공부라는 것은 무시무시할 정도로 공부량이 많기 때문이다. 특히, 암기할 것이 너무 많고 외국어 소양도 충분해야 하는데 두 가지 전부 내가 할 수 없는 종류의 행위들이었다. 결국, 깊은 수준까지 제대로 공부는 하지 못하고 교양으로 이해가능한 수준의 책만 뒤적이기를 반복하면서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인문학 공부를 통해 원하는 것을 얻지는 못했지만 다량의 독서 경력은 생겼고 나름 인문학 쪽에 소양이 생겼다. 또, 그만큼 전공 공부를 놓아버렸기 때문에 탈출구를 고민하다가 고시를 생각했다. 안정적인 신분으로 나름 편하게 살면서 평생 독서나 연구를 하면서 살겠다는 안이한 생각이었다. 당연히, 고시는 실패했다. 암기가 안 되는 사람이 고시를 공부한다는 것이 코미디였다. 그런데 이 실패가 매우 치명적이었다. 


 고시 공부는 시작부터 난항이었다. 대학을 거치면서 공부하는 법을 전부 까먹은 것인지 공부라는 행위 자체가 되지 않았다. 책상 앞에 앉아있으면 잡념이 끊이질 않았다. 그래서 처음엔 인간관계를 끊었다. 친숙하게 노는 친구들이 전부 공부랑 담을 쌓고 있어서 한번 어우러질 때마다 1~2주일의 시간이 훅 날아갔기 때문에 결단을 내리고 인간관계를 정리하고 휴대폰도 없애버렸다. 하지만 인터넷이 남아있었다. 다른 관계를 모두 끊었더니 오히려 인터넷이 삶을 좌지우지 할 정도로 비중이 높아져버렸다. 인터넷 뉴스는 매일매일 자극적인 이야기를 전달해주고 홀로 심각하게 받아들여 밤마다 세상의 불의에 분노하고 좌절하느라 공부는 뒷전이었다. 세상에 대한 분노, 공부가 안되는 좌절감 등이 너무 고통스러울 때는,  생각을 잊게 해 줄 재미있는 영화나 게임을 찾아 인터넷을 헤매기도 했다. 결국, 내 잡념은 결국, 항상 인터넷으로 연결되었다.


 공부를 하다보면 꼭, 그 동안 전혀 신경 쓰지 않았던 다른 것이 하고 싶어진다. 꼭, 시험 전날 한창 바쁠 때, 엉뚱하게도 운동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고, 평소에는 전혀 관심이 없던 엉뚱한 이상한 책을 읽고 싶어진다. 고시 공부를 하는 기간도 내내 이런 엉뚱한 충동을 겪어야 했다. 당시, 책꽂이에 대략 10년쯤 있었던 칼릴 지브란의 우화집 《어느 광인의 이야기》가 있었다. 누군가 사와서 책꽂이에 꽂아놓은지 한참 지난 책이었고 한번도 펼쳐보지 않은 책이었다. 공부를 하다가 갑자기 이 우화집이 눈에 확 들어왔고 충동적으로 그것을 펼쳐 읽었다. 그리고 “자아가 허무함을 응시”하는 이야기에 꽂혀 버렸다. 공부를 하거나 길을 걷다가도 불현듯 “자아가 허무함을 응시”하는 것을 떠올리는 것이다. 


 시간은 흘러가고 자신에 대한 한심함과 자괴감이 이미 강해질대로 강해졌다.  결국, 공부가 손에 잡히지 않던 어느 날, 너무 많은 상상과 생각이 머릿속에 넘쳐흘러서 괴롭던 어느 날 망상을 뿌리째 잘라내고 싶다는 강력한 충동이 생겼다. 그 충동은 방법도 같이 제시했다. 그 방법이란 "허무함을 응시"하는 것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상한 충동이다. 여튼 당시 머릿속의 생각은 망상의 연쇄작용을 따라 올라가보면 "허무함"이 있을 것이라는 이상한 확신이었다. 망상을 뿔리째 잘라내고 싶었던 것인지 망상에 휘둘린 것인지 잘 구별이 가지 않는다.


 그것이 망상인지 충동인지 구분할 수는 없었다. 단지 괴로웠고, 평화가 필요했다. 모든 것의 연쇄작용을 따라 올라가서 그 망상의 근원을 보고 그것을 파괴하거나 제어하여 내면의 평화를 찾지 못하면 죽을 것 같았다. 어쩌면 "허무함"을 내면의 평화로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여하튼, 방바닥에 책상다리로 앉아서 스스로의 망상을 따라 올라가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망상을 하나하나 인식하려고 시도했다. 그리고 인식된 망상의 원인을 찾아 그 뿌리를 찾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망상은 항상 흘러넘쳤기에 망상을 인식하는 것은 쉬웠다. 망상은 인식하면 그 망상의 원인이 무엇인지 보려고 했다. 하지만 망상을 인식하고 그 원인을 찾으려는 순간 인식된 망상은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갑자기 망상이 없어지니 망상의 원인도 왜 찾아야 하는지 알 수 없게 되었다. 다시 정신을 가다듬고 망상을 다시 인식하려고 한다. 어라 조금 망상이 줄었다. 망상을 찾아 헤맨다. 다시 망상을 찾았다. 인식하고 그것의 원인을 궁구하려고 하는데 다시 망상도 사라지고 그 망상의 원인은 붕 떠버린다. 그리고 필름이 끊겼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모르겠지만 음란한 망상의 한 가운데서 의식을 자각한다. 음란한 망상이라고 구태여 말한 것은 일관된 것이 아니었지만 그 모든 것의 주제가 성행위나 폭력이었기 때문이다. 이야기처럼 서사나 내러티브가 있는 것은 아니고 그저 온갖 야동과 폭력 영화가 머릿속에서 한꺼번에 플레이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또, 음란하다고 생각한 이유는 머릿속의 영상이 어떻든 간에 거기에 투영되는 욕구가 너무 강하고 동물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무한반복이 몇 번이나 지나갔는지 알 수 없지만 멍하니 그 모든 것을 보고 들으면서 체험하다가 서서히 의식이 깨기 시작했다.


 의식이 깨어나는 순간을 뭐라고 설명해야할까? 의식이 깨어나기 이전의 체험이 전부 기억이 난다. 하지만 그 순간에 나는 방관자, 혹은 무기력한 정보의 수용자에 가까웠다. 어떤 역겨운 내용도 의도도 그저 스쳐지나가고 있었다. 길가의 돌멩이처럼 무력했다. 하지만 의식이 깨어나는 순간 이 모든 것이 조금씩 옅어졌다. 역겹다는 나의 느낌이 반영된 것일 수도 있다. 의식이 있기 전에는 그저 돌멩이 마냥 있었다면 의식이 생기면서 ‘나’라는 인식이 생기고 안정감이 돌아왔다. 통제가 가능해지는 느낌과 함께 안도감이 몰려왔고, 머릿속에서 무한 재생되고 있는 음란한 망상들이 인식되고 의식이 없는 동안 그런 음란한 망상들 속에 있었다는 기억이 떠오르면서 상황 인식이 형성되었다. 동시에 노출된 스스로의 욕망으로 인한 역겨움이 같이 떠밀려 왔다. 그리고 서서히 그런 망상들이 사라지고 안정된 현실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나는 필름이 끊긴 것을 전혀 몰랐다. 그저 지독하게 낯설고 강력한 상상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자신을 보았을 뿐이다. 앞서 망상을 인식하고 그 원인을 파악하려는 행위가 있었다는 것을 전혀 기억할 수 없었다. 의식이 깨어나고 한참 후에 기억을 되짚어 보고서야 망상을 인식하고 그 원인을 파악하려는 행위가 갑자기 종료되었다는 것을 알았을 뿐이고 그 다음은 아무런 기억이 없다. 눈을 떠보니 지독하게 낯설고 날것의 강력한 망상의 와중이었을 뿐이다. 즉, 단기적 기억상실에 가까운 단절이 일어난 것이다. 


 망상의 근원으로 올라가 잡념의 원인을 파악하고 그것을 제거해보겠다는 의도를 가지고 이러한 일련의 일들을 수행했고, 그 결과는 실패였다. 그래서 다시 몇 번이고 시도했지만 항상 다락에 가까운 단기적 기억상실을 겪고 온갖 망상 속에서 깨어날 뿐이었다. 그리고 망상을 끊어보겠다는 의도와는 달리 망상은 오히려 늘어났고 그 힘도 더 강해졌다. 즉, 예전에는 잡념 수준으로 귀찮은 것에 불과했다면 이제는 거부하기 어려운 욕구가 되어 끊임없는 갈증을 선사했다. 


 원래, 잡념이 많아서 공부가 안 되는 상황에서 출발했다. 이때만 해도 모든 것은 어느 정도 건강했었다. 공부하기 싫어하는 학생이 책상 앞에 억지로 앉아서 지겨움에 몸을 비비꼬면서 망상에 빠지는 것에 가까웠다. 하지만 내가 망상의 근원을 파헤쳐보겠다고 앉아서 머릿속을 응시하면서 이 모든 것은 확연하게 병적인 것으로 악화되었다. 잡념에 불과했던 것들이 이제는 충동으로 바뀌어서 나를 제어하기 시작했다. 매순간 모든 욕구가 나를 파괴시킬 정도로 강하게 일어나기 시작했다. 성적인 욕구가 너무 강해져 낮이고 밤이고 잠을 잘 수 없었고, 감당하기 어려운 성욕이 가라앉기를 바라면서 하루 종일 야동만 보고 있어야만 했다. 지쳐 쓰러질 지경이 되어서도 머릿속에서 망상이 떠나질 않았다. 식욕도 너무 강해져서 고칼로리 음식 위주로 먹고 끊임없이 먹었다. 단맛이 역겹게 느껴지고 속이 물려도 식욕이 통제가 되지 않았다. 머릿속에서 각종 망상이 스테레오로 각성되어서 잠은 지쳐 쓰러질 지경이 되어야만 겨우 잠깐 눈을 붙일 수 있을 뿐이었다. 그것도 이상한 통증 때문에 수면 부족이 되기 일쑤였다. 담배는 줄담배로 피었고, 야동을 벗어나도 갈 수 있었던 곳은 만화방 정도였다. 무협지와 판타지의 단순한 대리 욕구로 머리를 도배해야만 가까스로 조금이나마 평화를 즐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조금씩 내가 미쳐가고 있구나 하는 자각이 몰려왔지만 방법이 없었다. 충동이 들 때마다 나는 너무나 무력하게 충동을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범죄는 저지르지 않았지만 그것은 이성적인 통제와 절제가 아니었다. 그저 그런 충동이 잘 일어나지 않았고, 범죄적인 충동이 있을 때마다 또 다른 충동인 공포가 나타나서 더 강한 충동에 따랐을 뿐이다. 즉, 타인을 상하게 하는 것에 대한 공포와 벌을 받고 싶지 않다는 공포가 있었기 때문에 범죄를 저지르지 않은 것이다.


 이제 더 이상 고시 공부가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그것 그대로 좌절이 되어서 나를 옭아매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매일매일 스스로에 대한 역겨움과 혐오감, 탐욕과 색욕, 식욕, 좌절, 공포 속에서 미친놈처럼 펄떡이다가 어느 순간 내가 진짜로 미친 것일지 모른다는 점을 깨달았다. 파국이었다.

 앞의 포스팅에서는 신경세포 연구를 통해서 인간의 정신세계를 구현한다는 발상이 가진 한계에 대해서 이것저것 늘어놓았다. 하지만 그 이야기는 신경세포 연구가 불필요하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단지, 심리학 수업을 들었던 2000년경에는 신경세포 연구가 인간의 정신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만 있을 뿐 대단한 성과를 제시하지 않았고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수많은 난제를 보면서 환원주의적 방식의 한계를 느꼈다는 점을 이야기 했을 뿐이다. 


 심리학 교과서에 등장한 신경세포에 대한 지루한 설명이 인간의 정신에 대한 섹시한 설명을 해주지는 못했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가진 선입견을 깨고 굉장히 많은 영감을 받았다. 덕분에 이후의 개인적인 모색의 방향을 잡을 수 있는 계기가 되어 주었다.


우선, 깨닫게 된 것은 뇌와 신체의 분리 문제였다. 그 전에는 뇌와 신체를 분리해서 생각했다. 즉, 신체 기관 중 뇌가 인간의 주요한 정신적 역할을 담당하고, 신체는 그저 감각 정보를 올려주고, 뇌의 신호를 받아 행동으로 옮긴다는 정도의 단순한 도식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신경세포를 들여다보면서 그런 사고방식이 가진 문제도 같이 보이기 시작했다. 


 물론, 뇌에 모인 신경다발이 그 복잡한 작용으로 어떤 추상적인 정신을 구현해내는 것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부정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어디서 어디까지가 뇌인 것일까? 뇌와 나머지 신경계의 차이점은 그 연결망의 복잡성 차이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뇌와 다른 신경계가 다르다는 점은 충분히 인정할 수 있다. 어차피 그 신경계를 거슬러 올라가보면 결국, 그 종점에 뇌가 있고 우리는 뇌를 통하여 다양한 정보를 인식한다. 


 우리의 손가락 끝을 생각해보자. 손가락 끝에 바늘을 찌르면 통증이 느껴진다. 그 통증은 어디에서 느껴질까? 그 통증을 우리가 의식하는 이유는 통증이 우리의 뇌에서 신호화되기 때문이다. 만일, 손가락이 잘려나갔다면 그 잘린 손가락에 바늘을 찌른다고 해서 우리가 통증을 느끼지 않는다. 오직 뇌와 신경으로 연결되어 있을 때만 그 통증을 느낄 수 있다.


 그것은 모든 부위가 마찬가지다. 뇌와 연결이 끊어진 부위는 전부 고깃덩어리에 불과하다. 뇌와 분리되어서 자체적으로 통증을 느끼거나 감각을 느끼는 신체 부위는 없다. 우리의 통증, 감각, 운동은 모두 뇌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뇌에서 손가락 끝까지 이어진 신경은 그냥 하나의 전선 정도에 불과하고 뇌는 그것을 중앙에서 처리하는 핵심적인 기관인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심리학 교과서에서 보여준 신경세포는 뇌의 신경세포나 신체 말단의 신경세포나 큰 차이가 없다. 그저 뇌의 신경세포는 더 많은 신경세포와 연결될 뿐이고, 손가락 끝의 신경세포는 더 적은 신경세포와 그 다음 여러 근육이나 표피에 연결된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이 손가락 끝의 신경을 다른 신경과 복잡하게 연결되게 만들 수 있다면 뇌처럼 될지도 모른다. 일례로 지극히 간단한 신호는 척수 반사 등으로 처리되기도 하므로 신경세포가 그저 신호를 전송하는 역할만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신경세포에 대해서 가장 흥미로웠던 점은 정보를 어떤 방식으로 처리하는지 알 수 없었다는 점이다. 손가락 끝의 감각을 처리하는 신경세포를 떠올려 보자. 신경세포는 척수를 통해서 뇌까지 이어지면서 점점 연결이 복잡해진다. 그 연결을 통하여 다양한 것들이 조정된다. 손가락과 손과 팔의 움직임이 총체적으로 연결되고 그에 따른 신체의 균형과 자세 등이 저절로 조정된다. 우리의 의식이 손가락 끝을 의식하고 있다면 손가락 끝의 느낌이나 촉감, 온도 등을 느끼고 의식할 수 있다. 손가락 끝에 있는 재질의 촉감을 느끼는 상황이라면 그러한 촉감의 적절성을 확인하고 그에 따른 고등한 정신작용도 같이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가령, 인테리어에 적합한 소재인지 단가가 어떤지를 판단할 수 있고, 어렸을 때, 느꼈던 어떤 감촉을 떠올릴지도 모른다.


 손가락 끝에서의 신경세포는 1개가 아니다. 여러 개가 섞여있고 상호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그것이 뇌까지 이어지는 경로에 무수히 많은 신경세포들이 종횡으로 연결된다. 신경세포들이 릴레이처럼 단락단락의 작은 선들을 길게 이어붙인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이 모든 신호들이 파편적이고 신호는 분산되어 다시 뇌에서 종합적으로 표상되어야 할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손가락 끝으로 물건을 만지면서, 단단함, 온도, 질감 등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약간의 집중력을 동원하면 그것들을 하나하나 분리해서 인지할 수 있다. 그것은 종합적이지 않다. 오히려 조립식으로 각각의 감각과 그 감각의 위치를 제시하고 이것을 통으로 묶어 경험하게 해준다.


 손가락 끝의 신경에서 보낸 신호는 어떤 형태로든 확정된 정보 단위를 전송해준다. 촉감이라면 그 촉감의 날 것의 정보를 뇌가 느낄 수 있게 된다. 거기에 다양한 정신적 작용과 신체 불수의근 조절이 덧붙여지더라도 이 날 것의 정보가 크게 왜곡되지는 않는다. 물론, 좋고 싫음과 관련 상황의 맥락에 따라서 정보가 왜곡되기는 하지만 그것은 이 날 것의 촉감을 다른 것과 조합하면서 생기는 문제이다. 그리고 그것이 다른 신경들이 연결되어 다양한 정보를 만들어내더라도 우리는 촉감을 분리해서 인지할 수 있다.


 이렇게 촉감이 그 자체로 분리되어 의식될 수 있다는 것은 비록 그것이 가닥가닥 끊어진 신경으로 연결되어 있을지라도 손가락 끝의 신경에서 보낸 신호가 중간에 흩어지지 않고 뇌에 그대로 연결되는 것으로 보였다. 단지, 뇌에서는 이렇게 들어오는 정보에 복잡한 연결을 통해서 더 복잡하고 고등한 작용을 촉발시키기는 하지만 그 자체로 고유의 정보가 우리의 뇌로 연결되는 것이다. 즉, 손가락 끝의 신경세포는 그대로 죽 이어져서 척수를 통해서 우리 뇌로 들어온다. 그리고 뇌의 내부에서도 이 신호는 다른 신호로 바뀌는 것이 아니라 해당 신경세포의 고유성이 변하지 않은 상태에서 다른 뇌의 신경세포와 연결되고 상호작용을 하는 것이다. 즉, 내가 상상한 것은 다음의 그림과 같은 모습이다.




 위의 그림은 검증되지 않은 나의 상상에 불과하다. 이 그림을 보면 손가락 끝에서 이어진 신경이 그대로 뇌 속으로 들어가 주욱 이어지고 있다. 즉, 가닥가닥 끊어진 짧은 신경을 엮어서 굵직한 신경줄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이 신경줄은 표피에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뇌 깊숙한 곳으로 꽂힌다. 다른 수많은 신경들이 이 신경줄의 중간 중간에 연결되어 신체를 조절하고 기억을 환기하며, 고등한 정신작용을 하지만 손가락 끝에서 이어진 신경은 그대로 고유하게 남아있다. 만일, 뇌와 손가락 끝을 연결한 신경이 그저 전선처럼 이어지는 것이라면 그 전선은 뇌로 넘어오는 시점에서 끝나야 하지만 이 신경은 어차피 뇌와 동일한 신경이고 따라서 문제없이 뇌 속으로 들어간다. 이렇게 보면 신경세포가 손가락 끝을 뇌에 연결해주는 것이 아니라, 뇌의 일부가 길게 촉수를 뻗어 손가락 끝까지 이어진 것이 더 맞는 설명처럼 느껴진다.


 그렇다. 내가 깨달은 것은 뇌가 신체의 각 부위에 촉수를 길게 뻗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런 설명이 몇 가지 주워들은 상황을 더 효과적으로 설명한다. 가령, 손가락이 잘린 사람을 생각해보자. 


 기존의 생각하던 방식은 뇌라는 기관이 있고 그 뇌와 각 신체 부위가 신경이라는 전선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식의 생각이었다. 마치 컴퓨터에 각종 전선으로 스마트폰이나 USB 저장소, 헤드셋 등 다양한 기기를 컴퓨터에 연결해서 쓰는 것과 마찬가지다. 따라서 그 연결이 끊어져도 컴퓨터 자체에는 큰 문제가 없다. 그저 연결이 끊어졌을 뿐이다. 다시 전선을 이어도 되고, 다른 것으로 바꿔 달수도 있다. 그렇다면 손가락이 잘려도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저 손가락이 없어졌을 뿐이고 신호가 더 이상 들어오지 않을 뿐이다. 조금 불편하겠지만 적응하면 될 일이다.


 하지만 보통 신체가 절단된 사람들은 어떤 근본적인 영혼의 상실감을 호소하는 경우가 많다. 또, 심한 경우는 잘려나간 부위에서 통증이나 가려움 등을 느끼는 환지통으로 인하여 정신적으로 고통 받는 경우도 있다. 이런 경우는 뇌와 신체를 나누는 방식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하지만 뇌의 일부가 길게 촉수를 뻗은 것이라고 판단하면 상당히 명쾌하게 설명된다. 신체 말단의 신경세포까지 뇌의 확장이므로 신체의 손실은 바로 뇌의 손실이 된다. 따라서 절단은 단순히 전선이 끊어진 것이 아니다. 뇌 자체가 끊어진 것이다. 뇌 자체가 끊어졌으니 뇌는 결손된 부위의 공백을 상실로 느끼는 것이다. 또, 결손된 부위의 말단에서 신호가 발생했을 때, 뇌는 그것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부위에서 발생한 것이라고 자동적으로 해석해버리는 것이다. 즉, 팔꿈치 아래가 절단되었다고 가정하면 팔꿈치 말단 부분의 신경은 원래대로라면 절단된 부위에 연결된 신경이다. 그런데 이 신경에서 신호가 발생하게 되면, 뇌는 그것을 기존에서처럼 이미 없어진 팔에서 발생한 신호로 해석하는 것이다. 물론, 이것들은 모두 검증되지 않는 가설이지만 훨씬 더 담백하게 설명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설명이 옳다고 가정한다면 팔이나 다리가 절단된 사람들이 보여주는 환지통이나 절단의 근본적 상실감은 사지에 뻗은 신경들이 임의적인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자리에 필연적으로 있어야 할 신경들임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그것은 USB 단자처럼 끼었다 빼는 것이 아니다. 처음부터 하나로 설계된 것이고 한번 정착되면 일부 예외를 제외하면 기계적으로 그렇게 밖에 작동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환지통이나 깊은 상실감은 잘린 팔에 해당하는 뇌의 신경세포가 재 배선되어 다른 역할을 하게 될 때까지 끝없이 이어질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생각하기 시작하면 뇌라는 것이 조금 다르게 보이기 시작한다. 손가락 끝에는 뇌가 있고 손가락 끝까지 촉수를 뻗은 뇌의 영역에는 그 손가락이 있게 된다. 그리고 그것이 한 세트가 된다. 눈에는 뇌가 있고 눈에 촉수를 뻗은 뇌의 영역에는 그 눈이 있게 된다. 코도, 입도, 촉감도, 신체 부위도 모든 부분에 뇌가 있게 되고 또 반대로 촉수를 뻗은 영역에는 그 해당 부위가 있게 된다. 신체기관에 촉수를 뻗은 뇌는 신체기관을 뇌에 담게 되고 그 신체기관에는 뇌가 존재하게 되는 셈이다. 그리고 그렇게 신체기관과 그 뇌의 부분이 한 세트로 작동한다. 한 세트를 이루는 뇌의 부분과 신체기관은 서로 묶여서 신호를 주고받으면서 하나의 단위를 이룬다. 신체기관이 없어지면 뇌의 부분은 끊임없이 신호를 갈구하면서 오작동을 일으키게 될 것이다. 이렇게 보면 이제 뇌는 두개골 안에 있는 중앙처리장치가 아니다. 오히려  여러 신체기관이 접합된 부위이고 신체의 모든 부위를 축약해서 모아놓은 미니어쳐에 가깝다.


 지금까지의 생각은 가설과 상상으로 전개했고, 전혀 증명되지 않은 이야기들이다. 2000년경에 생각한 것들이라서 지금 어디까지 오류로 판명되었을지 잘 모르겠다. 또, 뇌의 작용이나 신경 등을 매우 단순화한 생각이고 주로 감각이나 지각에 해당하는 부분만 고려한 생각이다. 어차피 정신적인 작용을 탐구대상으로 했을 때, 그 외의 부분의 윤곽을 그려본 것이다.  그럼에도 스스로 열심히 생각하고 무척 재미있게 발견한 것들이라서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검증되지도 않은 이야기를 열심히 하는 이유는 이 개인적인 발견이 이공계 학도에서 철학과 정신분석 등으로 삶의 궤적을 변화시킨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다음엔 그 이야기를 해보자.

알 수 없는 질병과 고통으로 삶이 밑바닥을 쳤을 때,

 

자신의 생각이 이해되지 않고 행동은 제어되지 않았을 때,

 

그리고 자존감이 밑바닥을 쳤을 때,

 

평생 이루지 못하던 것, 회피하던 것에 도전해보기로 했다.

 

한평생 해보지 못한 턱걸이를 성공했을 때, 기뻤다.

 

훌라후프를 10분 이상 돌리고 나니 성취감이 들었다.

 

화학 주기율표를 외웠더니 머리가 맑아졌다.

 

그렇다. 화학 주기율표를 외웠더니 머리가 맑아졌다. 10년 내에 가장 맑았다.

 

머리로 외우느니 몸으로 숙련되고 습관적으로 행하는 것을 선호하는 편이었지만

 

나이 40대에 익숙하지 않은 문장을 더듬더듬 따라하면서 외우는 것이 복잡한 생각을 버리고 집중하기에 좋았다.

 

이후, 많은 기억술 계열도 살펴보았지만 단순히 정보를 빨리 외우는 것보다는

 

좋은 것을 외우고 그 뜻을 살피면서 내 인생에 밑바닥에서 작동하는 무의식에 집어넣다 보면

 

단순히 학교 공부에서 시험을 잘보기 위해서 공부하던 때에는 얻을 수 없었던

 

스스로가 커지고 발전하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또, 그저 독서가 좋아서 책을 한번 흝어보고 그저 공감되는 내용에 공감하고 넘어가던 때와는 비교할 수 없는 충실감이 있었다.

 

또한, 책을 읽고 요약하고 주요한 내용을 정리해서 암기하는 과정을 반복하다 보니,

 

머리에 외우는 근육이 생기는 것 같다. 근육이 강해지면서 점점 암기가 수월해지는 것이 느껴진다.

 

운동에 스쿼트가 있다면, 정신을 단련하는데는 정신을 집중하고 암기하는 것이 최고인 듯 싶다.

 

흥미로운 것들, 갈구하는 것들을 다른 책을 찾아 읽어보자.

 

그리고 읽고 정리하고 암기하자. 머리는 맑아지고 정신은 튼튼해지고 영혼은 살찔 것이며 발전은 가속화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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