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ki로 문장 암기하기 4 문장 암기를 하면 경험하는 것


 에서 책을 통째로 외운 이야기를 했다. 이제 그 내용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해보자. 개인적인 경험담이니 그냥 참고만 하시기 바란다.


 내가 암기했던 문장을 보면서 이야기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다음의 문장을 보자. 

    

"전통적으로 언어학에서는 음소(phoneme)를 모국어 화자가 모국어 소리 체계에 가지고 있는 지식을 나타내는 추상적인 기저형(underlying form)이라고 하고, 이음(allophone)을 실제 음성 환경에서 음소가 구체적으로 실현되는 표현형(surface form)이라고 한다."


 언어학 중 음성학 부분에서 발췌한 문장을 조금 수정했다. 명리학 관련 문장은 말로 설명하기 너무 난해할 것 같아서 최근 공부한 언어학에서 발췌했다.


 처음 이 문장을 눈으로 보면서 입으로 반복할 때는 그저 입으로 올바르게 따라가고 있는지만 집중하게 된다. 이렇게 글자 하나하나에 집중하면서 입으로 반복적으로 씹다 보면 글자는 단어가 된다. 즉, 글자 하나하나에 집중되어 발음하던 것들이 이어진 단어가 되어 자동으로 매끄럽게 발음된다. 즉, 처음에는 “음,소(pho,neme)”라고 머릿속으로 글자 하나하나를 제대로 발음했는지 점검하지만 조금만 익숙해지면 입은 어느새 “음소(phoneme)”라고 매끄럽게 한 덩어리로 발음한다. 


 마찬가지로 반복해서 읊다 보면 단어는 문장이 된다. 이 단계가 조금 시간이 걸리고 또, 가장 신기했던 부분이다. 생각 없이 문장을 반복해서 읊다 보면 문장을 읽기에 가장 적합한 호흡과 리듬이 튀어나온다. 문장이 가진 다채로운 의미들이 읽는 호흡과 강약에 반영되고 그렇게 읽기가 완성된다. 그리고 그렇게 완성된 문장은 저절로 읽힌다. 단어가 매끄럽게 읽히듯이 문장이 한 덩어리로 매끄럽게 말해지는 것이다. 그렇게 문장은 다시 문단으로 확대되면서 한 덩어리로 매끄럽게 말해진다.


 문장을 암기하면서 뭔가 깊은 사색을 한 것은 아니다. 그냥 단어와 단어를 열심히 집중해서 계속 읊어본 것에 불과하다. 하지만 글자는 단어로, 단어는 문장으로, 문장은 문단으로 정렬되면서 생각하는 의미에 따라서 자연스러운 호흡과 리듬으로 완성된다. 그리고 그 긴 문장이 그리고 여러 개의 문장이 어느 순간 정렬되면서 마치 입으로 한 단어를 말하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읊어진다. 


 가령, 위의 문장들을 보면 내가 처음 들어보거나 이제 막 익히기 시작한 단어들이 7개가 등장한다. 음소(phoneme), 소리 체계, 추상적인 기저형(underlying form), 이음(allophone), 음성 환경, 표현형(suface form)들이 그 단어들이다. 그리고 이 단어들은 처음에 읽을 때도 어색하고 이상했다. 하지만 반복하면서 이 단어들이 자연스럽게 말해진다. 그리고 문장이 익숙하게 읽혀질 때는 문장 내에서 이 단어들이 어떤 의도로 배치되고 쓰였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음소와 이음이 대비되어 설명되어 있고, 음소가 추상적인 기저형으로 번역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마찬가지로 이음을 표현형으로 번역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추상적인 기저형과 표현형으로 음소와 이음이 분할된다. 이 모든 과정이 체계적인 구조를 갖고 우리 언어생활 전반에 깔려있다는 점도 알게 된다. 또, 우리가 언어를 발화할 때, 잘 의식하지도 않고 신경쓰지도 않지만(추상적인) 이면의 원칙과 자료(기저형)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보는 것은 겉으로 드러나는 이음(표현형)이다. 이 문장에 축약된 총제적 의미는 일일이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어떤 단어에 포커스를 맞추느냐에 따라서 다양한 방향으로 해석이 가능하다. 그리고 이 모든 해석은 머리로 생각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문장을 읽다가 발견된 호흡과 리듬이 이런 의미들을 드러내고 활성화시킨다. 


 이렇게 발견된 문장들은 가볍게 한 단어를 말하는 것처럼 그 모든 문장을 매끄럽게 쉬지 않고 말할 수 있다. 가끔은 생각하는 것보다 말하는 것이 더 빠른 느낌이다. 가령, 위의 문장을 외웠을 때는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바로 문장을 입으로 말하고 넘어간다. 이 때, 머리로 그 문장을 생각할까? 이건 초기 학습과 완숙한 학습으로 나누어서 살펴보아야 한다.


 초기 학습에서는 문장의 호흡과 리듬을 처음 발견하고 읽는 것은 상당한 쾌감을 준다. 읽을 때마다 잘 모르는 7개의 단어의 개념들이 머릿속에서 아름답게 정렬되는 느낌이 너무 좋았고 문장을 읽을 때마다 무언가 중요한 비밀이 드러날 것이라는 기대감이 머리 한 켠을 간질간질하게 만드는 것이 너무 좋았다. 이 간질간질한 느낌은 조금만 더 하면 무언가 새로운 통찰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적 느낌을 준다. 그 감각에는 정신적인 고양이 동반되기 때문에 그 맛을 보려고 해당 문장을 일부러 찾아서 읽고 또 읽기를 반복하기도 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 내용과 지식이 너무 당연한 것이 되면서 그런 느낌도 사라진다. 이 때는 머리와 입이 따로 노는 느낌을 받는다. 카드를 보고 입으로는 전체 문장을 빠르게 외우지만 머리는 딴 생각 중이다. 관심도 없고, 재미도 없다. 학습이 완숙의 단계에 오른 것이다. 


 그렇다면 문장 암기를 할 때마다 이런 경험을 할 수 있을까? 모든 문장에서 호흡과 리듬이 발견되고 쾌감을 준다면 공부가 참 쉬울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문장을 곱씹어보고 나서야 태어나서 처음으로 좋은 문장과 나쁜 문장이 있다는 사실을 체감하게 되었다. 좋은 문장은 금방 호흡과 리듬을 발견할 수 있고, 너무나 간결하지만 아름답게 정보들이 어우러져 있다. 이런 문장은 몇 번 읊자마자 바로 입에 달라붙어서 그 의미를 훤히 드러낸다. 마침 알고 싶은 내용이었다면 정보가 머릿속에 통합되면서 쾌감과 즐거움도 바로 동반된다. 반면, 나쁜 문장들이 있다. 호흡과 리듬을 알 수 없거나 모호한 문장들이다. 곰곰이 씹어보면 이상하거나 비문이다. 처음엔 무슨 말을 하는지 알겠다 싶지만 외우려고 읽으면 대략 머리가 멍해지는 문장들이다. 나쁜 문장들은 그 문장 그대로 몸에 익히려고 하면 안된다.


"한문의 품사가 가변적이지만 특정 품사로 자주 사용되는 빈도나 전성이 가능한 품사의 범위는 관습으로 정해져 있다."


 위의 문장은 한문의 품사에 대한 문장이다. 별 문제없는 문장이다. 그런데 외우고 복습을 해보니 계속 오류가 난다. 이유를 열심히 찾아본 결과 "특정 품사로 자주 사용되는 빈도가 관습으로 정해져 있다."라는 표현이 납득되지 않았던 것이다. 외울 때는 별 생각없이 기계적으로 외웠지만 내 머릿속에서는 "빈도를 관습으로 정한다."라는 표현을 어떤 한자가 50%의 확률로 동사, 30%의 확률로 명사, 20%의 확률로 형용사로 쓰이도록 관습적으로 정해져 있다고 받아들인 것이다. 한문의 해석이 확률 게임으로 느껴지고 그것이 납득이 안되면서 해당 기억을 떠올리는데 장애가 생긴 것이었다. 결국, "특정 품사로 자주 사용되는 빈도"라는 말을 "주로 사용되는 품사"로 수정하고 나서야 이를 해결할 수 있었다.


 문장이 좋더라도 어떤 통찰과 연결되는 지식이어야만 고양감이나 성취감 그리고 쾌감을 느낄 수 있었다. 즉, 단순히 영어 단어나 한자를 암기하는 단편적인 지식은 고양감, 성취감, 쾌감을 주지 않는다. 하지만 그 단편적 지식이 과거의 풀리지 않던 궁금증이나, 무언가를 보는 관점이 완전히 뒤바뀌게 한다거나 어떤 체계를 형성하는 최후의 조각 같은 것이라면 법열에 가까운 성취감과 고양감을 주기도 한다. 


 성취감과 고양감을 준다고 해서 정말 무슨대단한  깨달음을 얻었다거나 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내 경우에는 첫 공부가 명리학으로 완벽히 백지에서 그것을 그렸기 때문에 고양감과 쾌감을 실컷 느끼기는 했다. 하지만 책을 다 외었음에도 여전히 전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경험은 암기와 학습이라는 것에 대해서 많은 것을 깨닫게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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