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지는 여전히 즐겨보고 있지만 무협으로 촉발된 기공이나 신비주의에 대한 탐닉과 연구는 4년 정도 내 인생을 휘어잡고 사라졌다. 중학교 1학년부터 고등학교 2학년까지 모든 에너지를 쏟아 부은 덕분에 얻은 것과 잃은 것이 있다. 그리고 이 때 얻었던 것과 잃었던 것이 오늘날까지의 내 인생을 거의 좌지우지한 것으로 보인다.

 

우선,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심상(心象)을 알게 되었다는 점이다.

 

주화입마에 대한 공포로 수행을 하지는 않고 다양한 신비류를 비교하면서 읽어보면서 이해하려고 노력하다보니 어떤 공통점을 찾을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심상(心象)이었다. 심상이라는 것은 일종의 심리적 모델이다. 하지만 단순한 심리적 모델처럼 머릿속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 현실에 부합하는 것이라는 확신을 얻었고 실제로 현실에 작용력을 가지고 있는 것을 말한다. 가령, “나쁜 짓을 하면 죽어서 지옥에 간다.”라는 말을 들으면 어떤 이는 무시하고, 어떤 이는 존중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한 심상이 구축된 사람은 나쁜 짓을 했다는 자각이 들면 바로 죄책감이 들고 지옥에 갈지 모른다는 공포가 작동한다. 그러한 심상이 이미 세계의 규칙으로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공류, 요가, 명상 등 대부분의 수행 전통은 먼저 몸을 차분하게 하고 마음을 완전히 가라앉히는 것을 기초로 하여 해당 전통의 형이상학적인 내용들을 정신적인 작용을 통하여 신체에 구현하고, 신체에 그것이 구현되는 것을 통하여 정신적인 작용이 현실에서 그 영향력을 확보함으로써 심상이 구축되도록 한다. 심상이 구축된 것은 기본적인 믿음이 발생한 것이고 해당 믿음을 기반으로 더 복잡한 심상을 구축하거나 더 강력한 심상을 구축하는 식으로 발전시킨다.

 

어떤 부위에 기, 프라나, 에너지 등이 모인다고 심상을 만들면 실제로 해당 부위가 뜨거워진다. 사실, 이것은 자연스러운 생리작용이다. 우리의 주의력이 몸의 어떤 부분을 떠올리면 우리의 몸은 해당 부위를 쓸 것이라고 생각해서 미리 그 부위를 활성화하기 위해 피를 보내고 그로 인하여 그 부위가 따뜻해지고 민감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공류, 요가, 신비주의 등의 대부분의 전통은 그것을 세상을 이루는 기(), 프라나, 에너지 등이 정신의 작용을 통하여 모인 것으로 해석한다. , 정신이 수행을 통하여 현실세계에 작용을 이룬 것이다. 작용이 성취되었기 때문에 우리의 정신은 정신의 념()을 통하여 기()가 작동한다는 심상이 성립되면서 신체와 정신이 상호확증을 통하여 공인되고 작동하기 시작한다. 그러면 이 심상을 대상으로 조작을 시작한다. 더 강력하게 정신작용을 일으켜보기도 하고 더 약하게 일으켜보기도 하면서 해당 정신작용을 컨트롤 할 수 있게 한다. 그러면 조금 더 복잡한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 이때, 각각의 수행전통은 각자의 형이상학적 모델에 따라서 다양한 방식을 취한다. 기공류에서는 단전으로 시작하고 요가는 차크라를 이용한다. 이렇게 되면 우리에게는 추상적으로만 보이는 실제 정신의 근육이 체계적으로 발달하고 또, 형이상학적이 믿음이 몸으로 체득되면서 그 사람을 둘러싼 세계가 총체적으로 변모하게 된다. , 천인합일을 이루거나. 범아일체를 이룩하게 되거나 신과 하나가 되는 등의 세계의 구축이 완료되는 것이다.

 

이러한 심상에 대해서 알게 되면서, 처음에는 기공류 수행이 완전히 거짓이라고 생각하기도 했지만 조금 더 머리가 굵어지면서 형이상학적인 세계관을 논외로 치고 생각해보면 이 방법이 매우 효과적인 방법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간단한 사례로 이런 것이 있다. 매일 힘들게 육체노동을 하는 사람들이 운동부족에 시달리는 경우가 있다. 물리적으로 보면 육체노동과 운동은 동일한 행동인데, 어째서 운동부족의 증세를 보이는 것일까? 그것은 심상이 다르기 때문이다. 육체노동은 힘들고 하고싶지 않고 돈을 받는 일이다. 반면에, 운동은 상쾌하고 자족적이며 하고싶은 일이고 그 피드백은 더 쾌적해진 나의 몸이다. 따라서 기대하는 것이 다르고 임하는 자세가 다르다. 그 때 발생하는 육체의 생리적 기전이 달라질 수 있다. 가령, 운동을 할 때면 마음이 즐겁고 안정감을 느끼기 때문에 신체에 내재된 에너지를 더 쓰는 방향으로 대사가 이루어지지만 육체노동을 할 때는 불안하고 생존이 걸려 있어서 신체 에너지를 덜 쓰는 방향으로 작동할 수도 있다. 즉, 심상이 구축된 방향으로 피드백이 이루어진다. 따라서 좋은 심상을 구축하면 그에 따른 이득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형이상학적 전통에 대해서 완전히 신뢰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경험적인 지식과 지혜의 축적이 없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이를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다. 한의학만 해도 그 작동 기전을 명확히 알 수 없지만 실제로 작동한다. 그것은 환자가 한의학적인 심상을 구축한 것이 아님에도 플라시보 효과라고 치부하기는 어려울 정도로 현실적인 치유효과를 가지고 있다. 물론, 돌팔이가 많은 것은 별개로 치고 말이다. 따라서 한의학적인 체계에 따라 심상을 구축하는 기공류도 심상을 제외하고도 다양한 효과와 작용력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스승을 구할 수 없었고,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하고 그저 따라하다가 주화입마에 걸리기 싫었던 나는 어느 순간부터 이 모든 것에 공통된 것이 심상(心象)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려운 형이상학적인 체계를 제외한다면 그리고 심상을 다룰 줄 안다면 구태여 복잡한 기공이나 요가 같은 것을 구태여 할 필요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저 현대의 과학과 상식을 이용하여 심상을 구축하면 된다. , 현대 생활을 잘하는 수행을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면 몇십년씩 토굴에 박혀 수행하지 않아도 현실 생활도 더 잘 되고 수행도 잘 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심상이라는 것은 결국 마음먹는 것이다. 세상이 결국, 마음먹은 대로 이루어질 것이라는 확신이 생겼고 그렇지 못한 것은 내가 제대로 심상을 구축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자각이 생겼기에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자각도 같이 생겼다.

 

고등학교 2학년 당시의 나는 심상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수행 전통을 대체할만한 형이상학적인 체계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정신적인 성숙도가 높은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스스로 생각하고 움직여야겠다는 자각을 얻는 정도에 그쳤다. 그리고 공부를 함에 있어 그 동기를 강화하고 집중력을 온전히 발휘하는 용도 정도로만 사용했다. 원래, 심상은 생각한 바가 현실에 구현됨으로서 생명력을 얻게 되기 때문에 그러한 과정을 상세하게 절대적인 믿음을 가지고 설계해야 한다. 하지만 그러한 체계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제대로 사용할 수 없었다. 그저 공부를 통하여 집중하는 훈련을 하고 그것을 통해서 어떤 정신적 경지를 높여야겠다는 막연한 기대로 공부에 대한 거부감을 지우고 동기를 유발한 정도에 불과하다. , 암기를 할 때, 머릿속에 이미지를 선명하게 띄우는 훈련이라고 생각했고 그로 인하여 암기과목의 성적이 매우 좋았는데 딱, 그 정도 수준이었다. 보다 근본적인 개선을 이루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심상(心象)은 논리적인 과정이라기보다는 어떤 믿음이나 신앙과 같은 신뢰가 작동해야 구축된다. 가장 좋은 방법은 스스로 현실에서 부딪치면서 얻는 것이지만 원하는 현실을 상상으로 구축한다고 심상이 생기는 것이 아니므로 그러한 현실에 처하는 것이 쉽지 않다. 아마도 어떤 분야에 일하는 직장인들은 자신이 해당 분야에 들어와서 일할 때와 그렇지 않을 때의 차이에 놀랄 것이다. 해당 분야의 현실에 처하면서 구축된 심상이 사람을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이러한 협소한 심상이 아니라 초월적이고 범용적인 심상은 신앙과 믿음이 필요하다. 따라서 신실하게 믿는 종교가 있는 것도 아니고 어떤 확고한 세계관과 가치관이 정립되지 못한 학생이 심상을 활용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당시에는 심상을 통하여 기대했던 이익을 다 얻지 못했고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고 생각했지만 오늘날에는 스스로 심상을 찾음으로써 그나마 상당히 많은 이익을 얻었다는 생각이 든다. 심상을 알게 된 이후로 집이나 학교에서 그다지 좋은 대우를 받지 않았음에도 단 한 번도 스스로 나아가는 것을 의심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문제가 생기면 스스로의 심상을 고치려했고, 그게 옳든 그르든 간에 나에게는 긍정적으로 작동했다. 그리고 모든 어려운 일을 스스로 긍정적으로 뒤틀 수 있었다. 밤새워 공부하는 것도 도전이고, 학교에서 두들겨 맞는 것도 좋은 경험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기에 현실적으로는 매우 바보 같지만 개인적으로는 가고자 하는 길로 돌진할 수 있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무협, 무술, 내공, 기공에 관심을 갖는다는 것은 정말 위험한 일이다. 시중에 돌아다니는 책을 보다 보면 어느 것이 사실이고 어느 것이 거짓인지 거의 알기 어렵다. 하지만 이 세계를 들여다보게 되는 사람들 대부분이 무협이나 무술 그리고 내공이나 기공이 있었으면 하는 마음을 갖고 그런 세계를 엿보기 시작한다. 그렇게 들여다 본 그곳은 그 사람의 욕망이 그대로 투영된 세계를 보여준다. 강력한 무술을 닦고 싶다고 하면 강력해 보이는 무술이 나타날 것이고, 초능력을 얻고 싶으면 강력한 초능력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 나타날 것이다. 불로장생의 비술부터 천인합일의 경지까지 인간이 얻고자 원하는 대부분의 것이 가능하다고 말하는 세계가 눈앞에 펼쳐진다. 당연히, 그 사람은 자신의 욕망이 이루어질 것 같은 이 무한한 가능성의 세계에 빠져들 수밖에 없다.

 

하지만 아무리 사람이 바라는 것을 제시해주는 세계라고 해도 뭘 알아야 반응하는 법이고 그대로 따라할 수 있는 여건이 되어야 수행할 수 있는 것이다. 처음 소림 내공술을 읽으면서 이제 나도 무림의 고수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에 희희낙락 하면서 페이지를 넘기는 와중에 어떤 글귀가 내 눈에 콕 박혔다. 조금이라도 실수하여 익히면 주화입마 증세가 나타날 수 있으니 완전히 알고 깨닫고 수행을 할 것이며 스승을 찾아 도움을 받으라는 경고문이다. 여기서 주화입마(走火入魔)에서 주화(走火)는 온 몸에 불()이 달린다는 뜻으로 지랄병을 의미하고 입마(入魔)는 귀신들린 것으로 미치는 것을 의미하니 어린 마음에는 인생 종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그 경고문은 정말 자주 등장하기 때문에 수행의 실패는 바로 주화입마(走火入魔)라는 등식이 생길 정도였다. 처음의 희희낙락한 마음은 이제 사라지고 위기감이 엄습해온다. 잘못 익히면 인생을 종칠 수 있는데 계속 익힐 수 있을까? 스승을 구해보려고 했지만 어머니는 당연히 집에서 공부나 하라고 하셨다. 어디 가서 스승을 찾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결국, 혼자서 해봐야 하는데 잘못되면 인생을 종친다고 하니 신중해지지 않을 수 없다. 슬프지만 무림의 고수가 되보고 싶다는 욕망이 너무 강렬했기 때문에 이 분야를 더 이상 들여다보지 않는다는 옵션은 없었다.

 

이제부터는 탐구가 시작되었다. 오늘날처럼 인터넷이 되지도 않고 주위에 물어볼 어른도 없었기 때문에 대형서점에서 필요해 보이는 책들을 닥치는 대로 읽어가면서 연구할 수밖에 없었다. 나의 욕망은 당장 하늘을 날고 바위를 깨부수게 해주는 시리즈의 책들(의 완성, 의 실상, 神功)을 원했지만 이미 주입된 주화입마(走火入魔)에 대한 공포로 인해 내가 스스로 보고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의 책 위주로 살펴보고 이론적으로 검증해보려고 노력하게 되었다. (이 부분은 정말 운이 좋았다고 생각하는데 시리즈의 책들(의 완성, 의 실상, 神功)은 주화입마에 대한 경고문이 거의 없고 너무나 쉽게 선도를 성취하여 초능력을 얻을 수 있는 것처럼 묘사되어 있었다. 아마도 앞서 다른 것들을 먼저 접하지 않았으면 그대로 따라하면서 상당한 부작용을 얻었을 것이다.) 이런 종류의 책을 광범위하게 읽다보면 저자들이 서로서로 논박하고 있어서 어느 순간부터 의심이 강력하게 들게 된다. 어떤 사람은 고행에 가까울 정도로 호흡을 멈추게 하는 훈련을 시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호흡을 멈춰선 안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을 쓰는 법을 강조하는 사람도 있고, 명상 위주로 흐르는 사람도 있다. 신체의 동작이 동반된 훈련을 강조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가부좌로 앉아있어야 한다는 사람도 있다.

 

진실이 무엇인지 검증할 방법이 없었지만 주화입마(走火入魔) 없이 뭔가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었던 나는 가장 소극적인 방법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일단, 계속 해당 분야의 책을 읽으면서 연구를 지속하는 한편, 최소한의 공통점을 찾고, 가장 안전한 방법을 선정해보기로 한 것이다. , 누군가가 위험하다고 말하는 방식은 전부 폐기했다. 그래서 일단, 호흡을 멈추는 방식의 수행을 전부 폐기했다.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방식이 조금이라도 있는 것은 전부 하지 않았다. 이해할 수 있는 만큼만 진도를 나가기로 했다.

 

이런 기준으로 수행법을 분류한 결과 이른바 안전해 보이는 나만의 방식을 결정할 수 있었다.

 

계속 관련 내용을 공부한다.

이완 훈련을 지속적으로 하여 숙련도를 올린다.

호흡을 최대한 길게 숨을 내쉬고 들이쉬도록 연습하되 호흡을 멈추지는 않는다.

()를 모으고 움직이고 하는 내용은 하는 방법을 모르므로 포기한다.

스승 없이 익힐 수 없는 역복식 호흡약을 이용한 훈련차력 같은 것은 포기한다.

마음을 고요하게 하는 훈련으로 호흡을 세는 훈련을 한다.


그리고 점차 공부를 해나가면서 기공이나 신비주의 전통에서 수행을 통해서 구축하려고 하는 핵심은 결국 심상(心象)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물론, 그 심상이라는 것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정도의 단순한 심상이 아니라 거의 존재 자체를 던질 수 있는 수준의 강력한 심상을 말하고 내 신체에 국한될 경우에는 현실적으로 현현할 정도의 절대적인 지배력을 발휘하는 심상을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이 있는 사람이 이러한 심상을 구축하는데 유리하고 신앙이 없다면 형이상학적인 학문의 뒷받침이라도 받아야 강력한 심상을 구축할 수 있다.

 

심상이라는 결론에 도달하는데 대략 4년 정도가 소요되었다. 나의 중학시절은 중2병적인 증세와 함께 시작되어 어떤 분야를 미친 듯이 파고들면서 끝났고 그 모험은 대략 고2가 되었을 때 어느 정도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게 된 것이다. 이것은 나의 첫 번째 완결된 모험이었고, 이 모험은 나에게 무척 큰 자산과 어마어마한 부작용을 동시에 안겨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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