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경우에는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한다. 어렸을 때나 나이를 먹은 지금이나 그건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가만히 있지 못하는 것은 과연 어떤 것일까? 몸의 에너지가 넘쳐서 움직이고 싶은데 그것을 제어했을 때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까? 답답해진다. 그리고 몸 여기저기의 근육이 부들거리면서 떨리고 정신적으로 무척 부산스러워 진다. 이런 경향이 강한 사람도 있고 약한 사람도 있지만 나는 정말 강한 사람이었다. 그야말로 한시도 가만히 있기 힘든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공부한다고 앉아있으면 상황은 보통 이렇게 흘러간다. 처음에는 몸을 비비꼬면서 꿈틀거리지만 이 상황을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하면 어떤 특이한 행동을 시작한다. 초등학교 4학년까지 나에게 그런 행위는 자신의 혀를 빠는 것이었다. 그러고 있으면 그냥 시간이 쏜살같이 지나간다. 물론, 그러고 있을 때는 주위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잘 인지하지 못한다. 큰 소리로 내 이름을 호명하거나 누구나 주목할만한 사건이 벌어지면 그것을 인지하지만 그 외의 일들은 꿈결처럼 조용히 지나간다. 지속적으로 혀를 빠는 습관으로 인하여 혀의 근육이 너무 발달해서 혀로 내 코를 핥을 수 있을 정도였다. 너무 크고 강력한 혀가 앞니를 밀어버렸고, 앞니가 크게 앞으로 돌출되어 나와서 치과 교정을 해야 했다. 치과 선생님은 혀가 앞니를 밀지 못하게 혀의 움직임을 구속하는 장치를 입안에 끼워넣었고 결국, 혀를 빠는 행위는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혀를 빠는 행위를 대체한 행위는 손톱으로 피부를 긁는 행위다. 왼손의 엄지손톱 끝을 살짝 다른 손톱으로 잘라서 뾰족한 부분을 만든다. 그리고 그 뾰족한 부분으로 피부를 긁는 것이다. 이것은 자해와는 다르다. 자해와는 달리 상처가 나거나 피를 흘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피부를 손톱으로 긁으면 그 부위가 무척 시원하게 느껴졌다. 이 행위가 혀를 빠는 행위보다 조금 나은 것이 적어도 손톱으로 피부를 긁으면서 책을 읽거나 공부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혀를 빠는 행위는 몰입도가 너무 높아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반면에 그나마 인간적인 생활이 가능해진 것이다. 하지만 흥미가 떨어지는 즉시, 이 행위에 1~2시간 씩 몰두하게 되므로 시간을 잡아먹는 것은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앉기만 하면 몸을 비비꼬거나 손톱을 긁으면서 스스로를 잊고 망아의 상태로 몰입해버리니 공부가 될 리가 없다. 앉아서 공부하는 시간을 분석해보면 1시간을 앉아 있을 때 30분은 몸을 비비꼬다가 30분은 손톱을 피부에 긁으면서 무아지경에 있거나 망상에 빠져있는 것으로 실제 공부하는 시간은 10분도 채 안 되는 것 같다. 주관적 느낌으로는 책의 제목을 읽고 일단, 앞으로 펼쳐질 재미없는 공부시간을 떠올리면서 이런 재미없는 행위를 해야 하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한다. 그리고 펼쳐질 지옥같은 공부시간을 상상하며 괴로워하다가 앉아있는 자신의 몸이 답답하다고 보내오는 신호에 짜증이 나고 마지막으로, 스트레스를 못이겨 정신적으로 퇴행해서 손톱을 피부에 긁으면서 멍하니 앉아있는 것이다.

 

이렇게 공부가 될 수 없으니 시험성적을 잘 받고 싶었던 나는 공부를 하기 위해서 아이디어를 강구하기 시작했다. 아니, 이것은 아이디어를 강구한 것이 아니라 그냥 발악한 것에 가까웠다. 자세를 바꿔보고 다리를 꼬아보고 하면서 신체를 구속해보기도 하고, 수시로 기지개를 키면서 정신을 차리려고 노력해보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효과는 전혀 없었다. 그래도 정신적으로 퇴행되는 것을 피하려고 하다보니 멍하니 앉아있지는 않게 되었고 반대로 몸의 답답한 감각은 계속 올라와서 조금만 힘들어져도 일어나서 움직이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몸을 움직일 때는 정신이 맑아지는데 앉으면 다시 고통을 참다가 일어나는 것이 전부였다. 그래서 그냥 앉는 것을 포기했다. 도저히 앉아서 공부가 되지 않으니 굳이 머리를 굴리는데 앉아있을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고 걷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때부터 공부의 효율이 붙기 시작했다. 이것저것 실험을 하다보니 걸으면서 공부하는 방법이 명확하게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그렇게 구체화된 방식은 아래와 같다.


우선책을 1페이지 가량 혹은 챕터 별로 잘게 쪼개서 집중해서 읽는다다 읽는데 2~3분이면 충분하다


그리고 책은 놓고 일어나서 걷는다걸으면서 그 읽었던 내용이 무엇이었는지 다시 떠올리려고 노력한다


걸으면서 관련 내용을 전부 떠올렸다고 생각하면 책으로 돌아와서 확인하면서 미심쩍은 부분이나 의심스러운 부분을 확인한다.


그리고 다시 걸으면서 복습처럼 떠올리고 해당 내용을 확정한 후 책의 다음 내용으로 넘어간다.


우선, 걷기 시작하니까 평소에 앉아서 공부할 때 느껴야 했던 신체의 답답한 느낌이 다 사라지고 스트레스를 거의 느끼지 않아도 되었다. 오히려 신체에 걷는다는 목적과 방법을 부여해서인지 난잡하게 비비꼬이던 몸이 정렬되고 걷는다는 목적을 충실하게 구현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게다가 몸을 세워서 걷기 위해서는 기본적인 주의력과 통제력이 항상 작동하고 있어야 한다. 덕분에 걷는 것만으로도 애써 노력할 필요 없이 주의력과 통제력이 자연스럽게 작동해서 어느 정도 이상의 집중력이 그대로 유지되었다. 몸이 피곤한 상태가 아니라면 졸음이나 지겨움 같은 장애요소가 나타나지 않아 공부를 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나 저항감이 굉장히 완화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또한, 걸음을 걷는 코스 동안 책을 보지 않고 해당 내용을 상기하려고 노력한 것이 지금 생각해보면 굉장히 많은 이득을 안겨 주었다. 책을 암기하지 않고 내용만 흝어본 다음에 그것을 떠올리려고 하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책을 암기한 것이 아니니 토씨하나 놓치지 않고 책을 달달 외울 수 있게 될 리는 없다. 오히려 반대다. 읽은 내용을 스스로 상상하고 구축하게 된다(물론, 이 때 스스로 이것을 할 수 있다고 계속 스스로를 북돋워야 한다.). 한 페이지의 짧은 구간의 이야기가 어떤 구조로 작성되어있는지 생각해보게 된다. 당장, 책을 보면서 확인할 수 없으니 머릿속으로 내가 떠올린 것이 논리적으로 맞는지 서로 비교하게 된다. , 잔머리를 굴려서 이건 이거하고 서로 안 맞으니까 이게 맞을 것 같아.” 따위의 논리적 추론을 시도하게 된다. 그래서 가장 적은 정신에너지를 들여서 해당 내용을 완전히 떠올리게 된다. 원하는 코스를 다 걷기 전까지는 스스로 생각해낸 것이 맞는지 틀린지 알 수 없으므로 미심쩍은 부분과 확신하는 부분에 대해서 계속 추론을 하면서 코스를 걷게 된다. 그리고 책이 나타났을 때 이것을 확인하고 싶은 욕구가 강하게 일어난다. 이런 과정을 거치고 나니 읽은 내용을 완전히 이해하고 암기할 수 있게 되었다(아쉽지만 요약이나 축약은 힘들다.).


이 방식이 훈련되기 시작하면서 중학생쯤 되었을 때는 머릿속으로 책의 전개를 쭉 이어서 하나의 이미지로 만들어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해당 이미지를 머릿속에서 반복적으로 돌리면서 공부를 했다. 나는 이것을 이미지 트레이닝이라고 불렀다. 이 이미지 트레이닝의 효과는 정말 좋아서 하다보면 책의 내용들이 꿰어지면서 머릿속에서 살아 움직이게 되었다. 그 때 스스로 내가 이것을 공부했고 알고 있구나 하는 것을 자각할 수 있엇다. 다른 친구들은 교과서를 끊임없이 베끼고 읽고 또 읽으면서 공부했는데 그렇게 암기하는 것보다 훨씬 효율이 좋았다.

 

지금에 와서 다시 생각해보면 혀를 빨거나 손톱으로 피부를 긁는 행위들은 모두 일종의 유아 퇴행현상이었다. 결국, 가만히 앉아있는 것에 너무 스트레스를 받아서 그 자리에서 바로 퇴행해버린 것이다. 이런 퇴행은 내 인생에서 굉장히 큰 마이너스 요소였다. 결국, 스트레스를 극복하지 못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정말 이상적인 것은 이러한 퇴행현상을 완전히 극복하는 것이지만 그게 그리 쉬울 리가 없다. 아니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오히려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서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아쉽게도 많은 손해를 보게 될 수도 있다. 정확한 이유를 알고 극복할 방법과 자원이 준비되어 있다면 시도해볼 수 있지만 정확한 원인도 모르고 시도해서 실패할 경우 스스로의 자존감에 큰 타격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나는 이러한 퇴행현상을 극복할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 그저 바로 내일 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받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하는가?라는 질문에만 집중했고 내가 가지고 있던 근본적인 문제점을 파악하고 이를 극복하고자 하지는 않았다. 일단, 그게 퇴행현상이고 나쁜 것이고 극복해야할 것이고 이런 생각 자체가 없었다. 그냥 내일 시험인데 어떻게 해야하나 발을 동동 구르면서 1차원적으로 아이답게 방법을 강구했을 뿐이다. 만일, 그 때 공부를 방해하는 요소들을 추려서 극복하고 나서 공부를 하자고 했다면 아마도 공부를 전혀 하지 못했을 것이다. 지금 40이 넘는 시점까지도 이 습관인지 기질인지 모를 것들은 여전히 잘 남아서 막강한 파워를 자랑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이것을 먼저 고치려고 했다면 인생이 헤어날길 없는 미궁으로 빨려들어갔을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나는 그것을 건드려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어찌나 다행인지!

 

퇴행현상을 고치지 않고 오히려 내 삶의 전제조건으로 받아들이고 공부하는 방법을 강구함으로써 걸어다니면서 공부하는 방법을 몸에 붙일 수 있었고, 그 덕분에 이미지 트레이닝이라는 기술을 얻었다. 이 이미지 트레이닝은 평생을 줄기차게 써먹은 기술이다. 만일, 계속 앉아서 공부할 생각을 했다면 평생 교과서를 연습장에 받아쓰면서 손가락으로 익숙하게 숙련이 될 때까지 반복하는 식의 공부를 해야만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퇴행 덕분에 머리로 공부할 수 있게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이것이야말로 전화위복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어린 아이에게 가장 힘든 일은 무료함이다. 물론, 질병, 가난, 가정 폭력 등과 같은 일이 더 힘들고 지옥 같은 일인 것은 자명하지만 이런 일은 스스로 극복할 수 없는 일이어서 그저 어머니 품속에 파고드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 하지만 무료함은 그렇지 않다. 무료함, 심심함은 가장 좋아하는 엄마의 품속에서도 느끼게 되고, 그 엄마의 품속에서 벗어나게 하는 동기가 된다.

 

사람은 심심한 것을 극심한 고통으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이것은 극심한 고통이다. 실제로 사람을 고문하는 고문술에도 비슷한 종류가 있다. 사람에게 주어지는 모든 자극을 차단하면 정신적으로 붕괴한다는 것으로 매우 잔인한 고문술이기도 하다. 슈테판 츠바이크의 단편소설 체스를 보면 독방에 갇힌 주인공이 정신을 유지하기 위하여 체스에 몰입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아무것도 없는 순백의 방에서 정신이 붕괴되는 것을 느끼고는 머릿속으로 체스판을 그리고 끊임없이 체스를 두고 복기하는 장면이 나온다. 나는 이 장면에서 나의 어린 시절 무료함에 미쳐서 날뛰었던 나의 경험을 떠올렸다.

 

일상이 안정되면 이제는 심심함에 몸서리친다. 물론, 고문하듯이 강제적으로 자극이 끊어진 것은 아니지만, 아쉽게도 재미있어 보이는 것은 모두 금지되었다. 친구와 진흙 위에서 구르지도 못하고 동네 뒷산에서 서바이벌을 즐길 수도 없고 재미있는 게임도 즐길 수 없다. 접시를 깨고, 유리창에 돌을 던져 시원하게 부서지는 모습이 보고 싶지만 엄마가 감시하고 있다. 그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앉아서 숨 쉬는 것뿐이다. 보통,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 무료함에 정신이 나갈 듯 아득해지다가 본능적으로 이상한 놀이를 만든다. 파괴 본능이 앞설 때는 상상인지 백일몽인지 알 수 없는 가운데에서 악독한 마왕을 쳐부수거나 대량의 기물파괴를 한 후, 본인이 슈퍼맨 마냥 사람들에게 우러러 받들어지는 느낌을 즐기면서 히죽 웃기도 한다. 그리고 주위의 모든 것을 새로 평가하기 시작한다. 갑자기 책장 위의 조형물이 이상하게 생긴 것 같아서 갖고 놀고, 주위의 모든 것을 미친 듯이 갖고 놀기 시작한다. 이때의 경험으로 볼 때, 창의성을 발현시키고 싶다면 사람을 엄청나게 지루하게 만들면 된다. 그러면 광기에 가까운 창의성이 곳곳에 나타날 것이다. 괜히, 지루하기 그지없는 뉴질랜드에서 온갖 창의적인 발명과 발견이 이루어진 것이 아닌 것 같다.

 

나는 유난히 정신이 산만하고 가만히 앉아있지 못하는 아이였다. 모든 친척들이 이구동성으로 가장 정신 사나운 사람으로 나를 꼽았으니 아마도 객관적으로도 매우 정신 사나운 아이였던 것 같다. 나는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했고, 가만히 있는 것은 정말 끔직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가만히 앉아있으면 몸의 곳곳에서 이상한 감각이 나타나서 나를 미치게 했다. 고통스러운 느낌은 아니고 마치 좀이 쑤시는 것 같은 느낌으로 바로 일어나서 뛰게 만들고 싶은 느낌이었다. 그런 느낌은 지금도 많이 남아있는데 특히 밤에 잘 때 발생하는 하지불안 증후군의 느낌과 거의 흡사하다. 이런 감각이 고통스러운 것은 아니지만 정말 사람을 불편하게 만들고 그 느낌이 지속되면 고통스러워 진다. 그러니 몸과 마음이 전부 개별적으로 무료하고 가만히 있는 것을 참지 못했으니 가만히 앉아있는 것은 온 세상의 모든 기운을 모아서 버티는 것에 가까웠고 1시간만 앉아있어도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로 탈진하기 일쑤였다.

 

당연히 공부가 잘 될 리 없다. 앉아서 아무런 자극 없이 무료함에 시달리는 것도 싫은데 하고 싶은 놀이를 모두 금지당하고 하고 싶지 않은 공부를 하라고 하면 더 죽을 맛이었다. 그리고 앉아서 문제를 풀면서 몸을 이리저리 꼬다보면 보다 못한 어머니가 가만히 좀 있으라면서 구박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몸을 가만히 있는 것이 너무 싫다 보니 자꾸 지우개를 식탁 밑에 떨어뜨리고 그것을 주우면서 몸을 움직이고 어머니가 안보는 틈을 타서 책 모서리에 움직이는 그림을 그리고, 지우개질을 해서 나온 가루를 뭉쳐서 고무공을 만드는 행위에 집중하기도 했다. 하지만 여전히 재미있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정신적으로 더 이상 견디지 못하면 퇴행을 하게 되었던 것 같다. 처음에는 스스로의 혀를 빨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마치 어머니 젖을 빠는 것 같은 행위인데 스스로의 혀를 살짝 내밀고 그 혀를 빠는 것이다. 그렇게 빨다보면 정신이 가출했다고 돌아오곤 했다. 그저 시간이 지나갔을 뿐 무엇을 했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이 혀를 빠는 행위로 인해서 앞니가 앞으로 돌출되어 나오기 시작하는 바람에 치과 교정을 해야했다. 결국, 혀를 빠는 것은 금지되었고 그래서 손톱으로 피부를 긁는 버릇이 생겼다. 손톱 끝을 살짝 날카롭게 찢어 그 부분으로 피부를 긁다보면 그 감각에 정신이 집중되면서 스트레스가 풀리는 것이었다. 당연히, 이 행위도 하고 있으면 몇시간이고 집중할 수 있지만 그 동안 정신은 먼 곳으로 가출하게 된다.

 

책 읽는 것을 좋아해도 책상에 앉아서 읽지는 못했다그저 누워서 끊임없이 자세를 바꿔가면서 책을 읽었다. 그것이 아무리 재미있는 책이라도 신체가 끊임없이 움직이라고 신호를 보내기 때문에 책을 읽다보면 방구석구석까지 몸을 돌리면서 끊임없이 몸을 비비 꼬면서 책을 읽었다. 다행히도 책이 흥미로우면 몸을 비비꼬면서 온전히 책을 읽을 수 있었다. 하지만 책이 흥미롭지 않으면 몸을 비비꼬면서 책을 던져버리기 일쑤였다.

 

이런 상황들은 공부에 대한 개념이 전혀 서있지 않았을 때야 그저 공부를 하지 않아도 상관없었지만 사파(邪派)의 공부법을 깨닫고 시험 성적이 잘 나왔으면 하는 마음이 생겼다. , 내가 스스로 갖고 있던 시험에 대한 왜곡된 입자으로 인하여 사악한 교사가 학생들을 괴롭히기 위하여 시험 문제를 제출하고 이런 시험을 학생이 당당하게 극복하는 승부처럼 생각했기 때문에 시험이 있을 때마다 아드레날린이 분비되었다. , 어머니한테 자랑하고 당당하게 용돈을 요구할 수 있는 순간이었기 때문에 걸린 보상도 커서 시험 성적을 좋게 나오겠다는 의욕으로 충만했다. 

 

특이한 것이 그저 읽는 책은 몸을 비비꼬면서 읽어도 상관이 없지만 교과서는 몸을 비비꼬면서 읽을 수가 없었다. 너무 재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암기할 것을 고르고 암기하는 행위는 고도의 정신적 행위였다. 이 때, 사용되는 에너지가 있어서인지 다른 곳으로 정신이 분산되면 암기하는 것이 어렵게 느껴지곤 했다. 그래서 몸을 비비꼬면서 공부하는 것이 힘들었다. 그래서 속으로 몸을 비비꼬지 않으려고 하면 바로 손톱을 세워서 피부를 긁기 시작했다. 이렇게 되면 공부는 더 이상 문제가 아니었다. 몸을 비비 꼬는 것은 약간 자족적인 행위다. 나가서 마구 뛰고 싶은데 그러지 못하니 욕구를 달래는 과정인 것이다. 그러다가 더 이상 버티지 못하면 손톱을 세워서 피부를 긁는다. 그리고 그 느낌에 중독된다. 정말 재미있는 책을 읽을 때는 책에서 전개되는 흥미진진한 내용 때문에 그런 행위에 몰입하는 것이 책에 몰입하는 것 같은 효과를 주기도 한다. 하지만 공부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냥 어느 순간 더 이상 공부를 하지 않고 그 행위에 몰두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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