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의 포스팅에서는 지식의 숙성과 각성이라는 현상을 신경세포인 뉴런으로 바로 해석한 것처럼 이야기했지만 그럴 리가 없다. 당연히 그 동안 고민해오고 시행착오를 겪었던 배경이 있고 여전히 고민 중이다. 아무래도 그 배경이 되는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다른 이야기를 할 때마다 온전한 이해를 얻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잠시 삼천포로 빠져 그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이번에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성에 대한 맹신을 가지다가 현재는 생물학적인 뉴런으로 인간의 정신을 제멋대로 그려보고 있는 내 경험담에 불과한 사적인 이야기다. 

     

어린 시절부터 인간의 이성에 대한 신뢰와 믿음을 보여주는 계몽주의적인 정신 모델을 가지고 있었다. 즉, 인간은 이성을 가지고 있으며 교육을 통하여 이성을 발전시킬 수 있다는 생각이다. 이러한 생각의 이면에는 이성에 대한 믿음과 신뢰가 있고, 그것은 현실적으로 모든 것을 합리적인 이성에 따라 논리적으로 배치되어야 한다는 형식미학으로 발전되었다. 물론, 꿈꾸는 이상이 그랬다는 의미이지 내 삶이 그랬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럼에도 가설을 구축하고 엄정한 논리와 증명을 통하여 그 이론적 정합성을 갖추며 이를 현실의 실험결과에 맞추는 과정이 너무나 아름답게 느껴진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확률과 통계를 혐오했고, 대학 수업 중간에 등장하는 밑도 끝도 없는 이상한 공식들을 외우라고 하면 그냥 그 강의를 다운시키고 포기했다.

    

거의 대부분의 전공 수업에서 실험식 같은 것들이 사용되었기 때문에 전공 수업을 거의 포기하면서 스스로가 가진 이상한 강박을 알게 되었다. 졸업하고 싶은 마음은 있었기에 이 강박을 어떻게든 극복해보려고 했지만 그 방법을 찾지 못하고 방황했었다. 방황하면서 타과의 수업을 듣기도 하고 개이적으로 독서를 하기도 하면서 과학철학이나 과학사 그리고 근대 합리주의 철학자들을 살펴보면서 이를 극복할 수 있었다. 

       

과학철학이나 과학사를 보게 되면 우리가 흔히 말하는 과학의 명백함이라고 하는 것이 그다지 명료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과학은 항상 그 논리적 정합성과 현실적 유용성을 긴 시간에 걸쳐 검증받게 된다. 그렇게 검증된 과학적 사실도 여전히 당대의 과학에 대한 패러다임에 종속되어 있어 영원불멸한 진리라고 할 수는 없다. 그저 끊임없이 검증하고 검증하는 과정이 있을 뿐이었고 그 검증의 과정 덕분에 당대에 가장 신뢰할만한 정보로 자리매김하게 되는 것이다.

     

일례로 뉴턴 역학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뉴턴 역학은 한 시대를 풍미하다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 등장하면서 거시 세계를 규율하던 역학으로서의 권위를 잃었다. 그리고 다시 보어의 양자역학이 등장하면서 미시세계 또한 뉴턴 역학으로 올바르게 나타낼 수 없다는 점이 드러났다. 그럼에도 현실은 뉴턴 역학을 가장 많이 사용한다. 현실 세계에서는 여전히 뉴턴 역학이 매우 훌륭하게 작동하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과학자들은 뉴턴의 역학을 오류가능성이 있는 절대적인 진리가 아님에도 여전히 사용하고 있는 셈이다.

     

뉴턴 역학이 가진 제한적인 합리성 보다 더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었다. 그것은 뉴턴 역학이 곧 형이상학의 종결을 의미한다는 지점이었다.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중력을 깨달았다는 뉴턴의 이야기가 매우 유명하니 그 사례를 가지고 이야기해보자. 뉴턴은 사과가 떨어지니 중력이 있다고 이야기했다. 반면, 뉴턴 당대의 지성들은 중력을 이야기하려면 이 중력의 이치를 형이상학적으로도 증명해야만 했다. 가령, 신이 중력을 부여했다는 수준에서부터 어떤 보이지 않는 매질이 있어서 사과를 아래로 잡아당긴다는 정도까지 다양한 형이상학들이 서로 경쟁하게 된다. 여기서 뉴턴의 입장은 매우 신선한데 뉴턴은 그 형이상학들을 무시했다. 오직, 현상 그 자체만 해석했다. 사과가 떨어졌고 그 사과를 떨어뜨리게 만든 작용이 있으며 그 작용을 중력이라고 불렀다. 뉴턴의 역학이 결국, 현상세계를 미적분으로 해석한 것에 가깝지 무슨 그 배경이 되는 질서를 생각하여 통합적인 질설를 제공하지 않았다. 중력이라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는 논하지 않고 그저 중력이라고 부를 수 있는 현상이 있다는 것만 계산하여 보여줄 뿐이었다. 당연히 수많은 비판이 있었고 납득하기 어려워 하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결국, 현실을 거의 정확하게 계산해내는 뉴턴의 역학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뉴턴 역학의 부흥은 인과에 대한 관점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뉴턴 이전에는 원인이 있고 결과가 있어야 했다. 즉, 원인이 선행하고 그에 따라 결과가 발생하는 것이다. 원인이 선행해야하므로 그 원인의 원인이 또 선행해야한다. 그렇기 모든 원인이 선행해야 하므로 모든 진리는 필연적으로 제1원인에서 유도되어서 나와야 한다. 즉, 태초에 빛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당시의 학자들은 그 제1원인에 대한 다양한 형이상학을 전개했고 모든 논의가 그 형이상학으로 수렴되어야만 했다. 하지만 뉴턴은 그 형이상학 보다 현상 그 자체를 중시했고 그저 현상을 계산했을 뿐이다. 아무런 원인을 제공하지 않았지만 뉴턴 역학은 현실을 너무나 명확하게 계산해내면서 성공했고 누구도 그것이 틀렸다고 말할 수 없게 되었다. 이 사건의 인과에 대한 학자들의 모델에 균열을 가했다. 기존의 원인→결과 의 인과론은 필연적으로 형이상학으로 전개되기 때문이다. 원인→결과의 인과를 대체하는 극단적인 인과론이 등장하게 되는데 ‘논리실증주의’라고 한다. 즉, 논리는 현실에서 적용되는 것을 실증할 수 있으면 된다는 입장이다. 이들은 과학을 인과가 아니라 현상을 수학적으로 기술하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그들에게 세상의 현상은 동시적인 상호 작용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가령, 트럭에 짐을 실으면 트럭이 감당하는 무게가 올라가고 트럭의 바퀴는 찌그러질 것이다. 이 경우 인과론은 트럭에 짐을 실었기 때문에 트럭의 무게가 올라갔고 트럭의 무게가 올라갔기 때문에 트럭의 바퀴가 찌그러졌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논리실증주의는 원인과 결과처럼 선행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우리의 언어적 습관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것일 뿐 그저 짐=무게=바퀴의 찌그러진 정도라는 상호 관계만 있을 뿐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우리의 언어로는 이러한 동시적 상호 관계를 명확하게 기술하기 어렵기 때문에 언어가 아닌 수학을 이용하여 기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논리실증주의적인 주장은 극단적으로 느껴질 수 있지만 후에 양자역학이 기존의 원인과 결과의 인과론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고 상식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계산 결과가 현실에서 그대로 실현되는 것만을 보게 되면 이를 어느 정도 수긍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뉴턴의 역학은 그 태생에서는 형이상학을 부정했지만 실제로는 뉴턴 역학을 기반으로 한 다양한 원인과 결과가 나열되면서 새로운 형이상학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이제 과학자가 아닌 사람들에게 과학을 새로운 종교이고 과학자들을 그 사제인 셈이다. 이 사제들은 새로운 형이상학으로 과거의 어리석은 미신과 구습을 타파하고 인간의 이성으로 구축된 과학의 발전으로 병을 고치고, 앉은뱅이를 일으키며, 달에 가기 시작하면서 새로운 이적을 현실에 현현시켰다.  

      

뉴턴 역학에 관련된 일련의 논의 덕분에 나 자신에 대한 몇 가지를 알게 되었다. 스스로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과학을 공부한다고 생각했지만 그 과학은 과학으로 대체된 형이상학, 종교화된 과학이었던 것 같다. 이 과학은 계몽주의 시대에 온갖 미신을 척결하면서 인간의 이성을 기치로 내걸고 과거의 어리석음과 악습과 폐단을 깨끗이 일소할 때 사용되었던 그 과학이었고, 찬란하게 빛나는 신성한 이성의 구현인 과학이며, 세상의 모든 질서를 이성적으로 납득할 수 있는 합리적 질서로 만들어낼 것이라는 믿음과 신앙의 대상으로서 과학이었다. 즉, 확률과 통계, 실험식이나 밑도 끝도 없는 공식에 그토록 분노한 것은 과학이라고 말하면서 이성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공식이나 불확실한 확률과 통계를 신성모독이라고 느꼈기 때문인 셈이다.

    

스스로 과학을 좋아한다고 생각했지만 깨닫고 보니 과학에 신앙을 바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스스로의 태도를 조금 더 면밀하게 살펴보게 되었다. 생각해보니 웃겼기 때문이다. 내가 무엇을 안다고 스스로의 고찰과 통찰을 통하여 이성을 절대시하는 과학의 신도가 되었을까? 하물며 그런 고민은 전공 수업을 듣지 못해서 생긴 고민으로써 그 때가 처음이었다. 그저, TV나 책 같은 것에서 주워들은 것들이 부지불식간에 자기 생각인양 고정된 것이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공고하게 다진 이유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무작정 외우는 것이 싫다는 마음을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것에 대한 미학적인 우상화로 포장하여 스스로를 기만 하고 싶었던 것에 불과했다. 이해하기 어려운 혹은, 이해하기 싫은 것들을 보고 싶어하지 않아 하면서 스스로를 포장하는 행위는 갈릴레이가 당대의 학자들에게 망원경을 보여주면서 ‘보라’라고 말했을 때, 아리스토텔레스적인 변증술로 지식을 찾지 않는 천박한 갈릴레이의 태도를 개탄하면서 망원경을 거부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과학과 미학을 착각하는 것이다.

     

과학은 미학도 종교도 형이상학도 아니다. 과학하는 과학자들은 과학이라는 종교의 사제가 아니다. 우아하게 이성적으로 사색하여 이성의 빛으로 사물을 비추어 그 진리를 꿰뚫는 신성한 행위만이 과학인 것은 아니다. 과학자들은 이미 검증된 것을 끊임없이 바라보며 그 증명의 아름다움과 진리의 명백함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는다. 그것은 교육자들이 하는 일이다. 과학자들은 오히려 비과학적인 사실들 앞에 서있다. 그리고 전혀 검증되지 않은 가설을 세우고 이것이 옳은지 그른지 검증하면서 장님이 문고리 더듬듯이 나아간다. 거기에는 연역적이고 우아한 추론과 증명은 충분한 자료를 갖춘 마지막에나 있다. 그 전까지는 망상과 가설 사이에서 갈등하고 어리석은 도박사가 투자하듯이 비용과 시간을 투자하여 가설의 검증에 뛰어들었다가 성공하거나 실패하는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그런 리스크가 있는 행위에 뛰어드는 과학자들이 우아한 사제로 보이는가? 내 눈에는 어떻게든 성공률을 높여 나아가기 위하여 있는 증거 없는 증거 전부 끌어들여서 고민하고 또 고민하는 몸부림치는 사람들로 보인다. 

     

과학사와 과학철학 덕분에 진리를 찾아 몸부림치는 과학이라는 새로운 모델을 얻게 되었다. 우아하게 가설을 세우고 수학적으로 엄밀하게 모든 것을 조합하여 새로운 공식을 찾는 것이 아니라. 유체의 난류 이동이나 복잡한 물체들 간의 상호작용이라는 해결하기 어려운 과제들을 적확하게 수학적으로 모델링하기 위하여 통계, 확률, 실험 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과학자 모델을 떠올린 것이다. 이들은 온갖 실험을 통해서 이런 저런 공식을 조합해보고 원인을 따져보면서 얼기설기 가설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시행착오를 통하여 공식을 다듬는다. 그들이 도달하는 이해는 전체를 관통하는 완벽한 이해가 아니라 부분적이고 제한적인 이해이다. 하지만 부분적인 이해들이 쌓이고 자료가 쌓이면서 현상을 이해하다가 어느 순간 운이 좋으면 혁명적인 발견이 이루어져 그 모든 이치를 꿰뚫게 되는 것이다. 이제는 케쿨레가 벤젠의 화학구조를 꿈속에서 발견한 것을 일상적인 과학자의 활동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 것이다.

    

뉴턴 역학의 제한성, 형이상학의 배격, 과학에 대한 새로운 해석 덕분에 내 안에서 과학에 대한 이미지가 바뀌고 신성모독감을 떨쳐낼 수 있었다. 이전에는 과학 교과서는 어떤 절대적인 교시처럼 당연히 배우고 익혀야할 것으로 느꼈는데, 과학에 대한 새로운 모델 정립 이후로 그 모든 내용이 과학자들이 최선을 다해 용쓴 결과물로 보이기 시작하면서 그들이 어떤 생각으로 이런 논리를 전개했는지 연상하느라 과학책을 읽는 것이 무척 흥미진진해지기 시작했다. 또, 통계와 확률은 지나치게 많은 물체들 간의  상호작용을 기술할 방법이 없기 때문에 대안적으로 찾아낸 형식이고 이것보다 효율적인 기술방법을 찾지 못했기에 이 방법으로 연구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거부감을 제거할 수 있었다. 실험식은 실험 데이터를 가장 적확하게 기술하기 위한 식에 불과하고 이 실험식을 통하여 자료를 통찰하고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아직까지 그 해답을 찾지 못한 무척 꼬아놓은 퀴즈처럼 생각되기도 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여전히 과학적 진실에 대한 믿음과 그 지지대인 이성에 대한 믿음은 생생하게 살아있었다. 단지, 맹목적이고 종교적인 신앙의 대상이나 비합리적인 것과 비논리적인 것에 대한 혐오감의 원천, 또는 어떤 절대적인 규범이라는 과학과 이성에 맞지 않는 틀을 벗고 끊임없이 진리를 모색하고 검증하는 원래의 긍정적인 과학과 이성으로 그리고 여전히 소중한 가능성의 원천으로 제 위치를 찾았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무협지는 여전히 즐겨보고 있지만 무협으로 촉발된 기공이나 신비주의에 대한 탐닉과 연구는 4년 정도 내 인생을 휘어잡고 사라졌다. 중학교 1학년부터 고등학교 2학년까지 모든 에너지를 쏟아 부은 덕분에 얻은 것과 잃은 것이 있다. 그리고 이 때 얻었던 것과 잃었던 것이 오늘날까지의 내 인생을 거의 좌지우지한 것으로 보인다.

 

우선,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심상(心象)을 알게 되었다는 점이다.

 

주화입마에 대한 공포로 수행을 하지는 않고 다양한 신비류를 비교하면서 읽어보면서 이해하려고 노력하다보니 어떤 공통점을 찾을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심상(心象)이었다. 심상이라는 것은 일종의 심리적 모델이다. 하지만 단순한 심리적 모델처럼 머릿속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 현실에 부합하는 것이라는 확신을 얻었고 실제로 현실에 작용력을 가지고 있는 것을 말한다. 가령, “나쁜 짓을 하면 죽어서 지옥에 간다.”라는 말을 들으면 어떤 이는 무시하고, 어떤 이는 존중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한 심상이 구축된 사람은 나쁜 짓을 했다는 자각이 들면 바로 죄책감이 들고 지옥에 갈지 모른다는 공포가 작동한다. 그러한 심상이 이미 세계의 규칙으로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공류, 요가, 명상 등 대부분의 수행 전통은 먼저 몸을 차분하게 하고 마음을 완전히 가라앉히는 것을 기초로 하여 해당 전통의 형이상학적인 내용들을 정신적인 작용을 통하여 신체에 구현하고, 신체에 그것이 구현되는 것을 통하여 정신적인 작용이 현실에서 그 영향력을 확보함으로써 심상이 구축되도록 한다. 심상이 구축된 것은 기본적인 믿음이 발생한 것이고 해당 믿음을 기반으로 더 복잡한 심상을 구축하거나 더 강력한 심상을 구축하는 식으로 발전시킨다.

 

어떤 부위에 기, 프라나, 에너지 등이 모인다고 심상을 만들면 실제로 해당 부위가 뜨거워진다. 사실, 이것은 자연스러운 생리작용이다. 우리의 주의력이 몸의 어떤 부분을 떠올리면 우리의 몸은 해당 부위를 쓸 것이라고 생각해서 미리 그 부위를 활성화하기 위해 피를 보내고 그로 인하여 그 부위가 따뜻해지고 민감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공류, 요가, 신비주의 등의 대부분의 전통은 그것을 세상을 이루는 기(), 프라나, 에너지 등이 정신의 작용을 통하여 모인 것으로 해석한다. , 정신이 수행을 통하여 현실세계에 작용을 이룬 것이다. 작용이 성취되었기 때문에 우리의 정신은 정신의 념()을 통하여 기()가 작동한다는 심상이 성립되면서 신체와 정신이 상호확증을 통하여 공인되고 작동하기 시작한다. 그러면 이 심상을 대상으로 조작을 시작한다. 더 강력하게 정신작용을 일으켜보기도 하고 더 약하게 일으켜보기도 하면서 해당 정신작용을 컨트롤 할 수 있게 한다. 그러면 조금 더 복잡한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 이때, 각각의 수행전통은 각자의 형이상학적 모델에 따라서 다양한 방식을 취한다. 기공류에서는 단전으로 시작하고 요가는 차크라를 이용한다. 이렇게 되면 우리에게는 추상적으로만 보이는 실제 정신의 근육이 체계적으로 발달하고 또, 형이상학적이 믿음이 몸으로 체득되면서 그 사람을 둘러싼 세계가 총체적으로 변모하게 된다. , 천인합일을 이루거나. 범아일체를 이룩하게 되거나 신과 하나가 되는 등의 세계의 구축이 완료되는 것이다.

 

이러한 심상에 대해서 알게 되면서, 처음에는 기공류 수행이 완전히 거짓이라고 생각하기도 했지만 조금 더 머리가 굵어지면서 형이상학적인 세계관을 논외로 치고 생각해보면 이 방법이 매우 효과적인 방법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간단한 사례로 이런 것이 있다. 매일 힘들게 육체노동을 하는 사람들이 운동부족에 시달리는 경우가 있다. 물리적으로 보면 육체노동과 운동은 동일한 행동인데, 어째서 운동부족의 증세를 보이는 것일까? 그것은 심상이 다르기 때문이다. 육체노동은 힘들고 하고싶지 않고 돈을 받는 일이다. 반면에, 운동은 상쾌하고 자족적이며 하고싶은 일이고 그 피드백은 더 쾌적해진 나의 몸이다. 따라서 기대하는 것이 다르고 임하는 자세가 다르다. 그 때 발생하는 육체의 생리적 기전이 달라질 수 있다. 가령, 운동을 할 때면 마음이 즐겁고 안정감을 느끼기 때문에 신체에 내재된 에너지를 더 쓰는 방향으로 대사가 이루어지지만 육체노동을 할 때는 불안하고 생존이 걸려 있어서 신체 에너지를 덜 쓰는 방향으로 작동할 수도 있다. 즉, 심상이 구축된 방향으로 피드백이 이루어진다. 따라서 좋은 심상을 구축하면 그에 따른 이득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형이상학적 전통에 대해서 완전히 신뢰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경험적인 지식과 지혜의 축적이 없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이를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다. 한의학만 해도 그 작동 기전을 명확히 알 수 없지만 실제로 작동한다. 그것은 환자가 한의학적인 심상을 구축한 것이 아님에도 플라시보 효과라고 치부하기는 어려울 정도로 현실적인 치유효과를 가지고 있다. 물론, 돌팔이가 많은 것은 별개로 치고 말이다. 따라서 한의학적인 체계에 따라 심상을 구축하는 기공류도 심상을 제외하고도 다양한 효과와 작용력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스승을 구할 수 없었고,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하고 그저 따라하다가 주화입마에 걸리기 싫었던 나는 어느 순간부터 이 모든 것에 공통된 것이 심상(心象)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려운 형이상학적인 체계를 제외한다면 그리고 심상을 다룰 줄 안다면 구태여 복잡한 기공이나 요가 같은 것을 구태여 할 필요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저 현대의 과학과 상식을 이용하여 심상을 구축하면 된다. , 현대 생활을 잘하는 수행을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면 몇십년씩 토굴에 박혀 수행하지 않아도 현실 생활도 더 잘 되고 수행도 잘 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심상이라는 것은 결국 마음먹는 것이다. 세상이 결국, 마음먹은 대로 이루어질 것이라는 확신이 생겼고 그렇지 못한 것은 내가 제대로 심상을 구축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자각이 생겼기에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자각도 같이 생겼다.

 

고등학교 2학년 당시의 나는 심상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수행 전통을 대체할만한 형이상학적인 체계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정신적인 성숙도가 높은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스스로 생각하고 움직여야겠다는 자각을 얻는 정도에 그쳤다. 그리고 공부를 함에 있어 그 동기를 강화하고 집중력을 온전히 발휘하는 용도 정도로만 사용했다. 원래, 심상은 생각한 바가 현실에 구현됨으로서 생명력을 얻게 되기 때문에 그러한 과정을 상세하게 절대적인 믿음을 가지고 설계해야 한다. 하지만 그러한 체계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제대로 사용할 수 없었다. 그저 공부를 통하여 집중하는 훈련을 하고 그것을 통해서 어떤 정신적 경지를 높여야겠다는 막연한 기대로 공부에 대한 거부감을 지우고 동기를 유발한 정도에 불과하다. , 암기를 할 때, 머릿속에 이미지를 선명하게 띄우는 훈련이라고 생각했고 그로 인하여 암기과목의 성적이 매우 좋았는데 딱, 그 정도 수준이었다. 보다 근본적인 개선을 이루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심상(心象)은 논리적인 과정이라기보다는 어떤 믿음이나 신앙과 같은 신뢰가 작동해야 구축된다. 가장 좋은 방법은 스스로 현실에서 부딪치면서 얻는 것이지만 원하는 현실을 상상으로 구축한다고 심상이 생기는 것이 아니므로 그러한 현실에 처하는 것이 쉽지 않다. 아마도 어떤 분야에 일하는 직장인들은 자신이 해당 분야에 들어와서 일할 때와 그렇지 않을 때의 차이에 놀랄 것이다. 해당 분야의 현실에 처하면서 구축된 심상이 사람을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이러한 협소한 심상이 아니라 초월적이고 범용적인 심상은 신앙과 믿음이 필요하다. 따라서 신실하게 믿는 종교가 있는 것도 아니고 어떤 확고한 세계관과 가치관이 정립되지 못한 학생이 심상을 활용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당시에는 심상을 통하여 기대했던 이익을 다 얻지 못했고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고 생각했지만 오늘날에는 스스로 심상을 찾음으로써 그나마 상당히 많은 이익을 얻었다는 생각이 든다. 심상을 알게 된 이후로 집이나 학교에서 그다지 좋은 대우를 받지 않았음에도 단 한 번도 스스로 나아가는 것을 의심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문제가 생기면 스스로의 심상을 고치려했고, 그게 옳든 그르든 간에 나에게는 긍정적으로 작동했다. 그리고 모든 어려운 일을 스스로 긍정적으로 뒤틀 수 있었다. 밤새워 공부하는 것도 도전이고, 학교에서 두들겨 맞는 것도 좋은 경험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기에 현실적으로는 매우 바보 같지만 개인적으로는 가고자 하는 길로 돌진할 수 있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무협, 무술, 내공, 기공에 관심을 갖는다는 것은 정말 위험한 일이다. 시중에 돌아다니는 책을 보다 보면 어느 것이 사실이고 어느 것이 거짓인지 거의 알기 어렵다. 하지만 이 세계를 들여다보게 되는 사람들 대부분이 무협이나 무술 그리고 내공이나 기공이 있었으면 하는 마음을 갖고 그런 세계를 엿보기 시작한다. 그렇게 들여다 본 그곳은 그 사람의 욕망이 그대로 투영된 세계를 보여준다. 강력한 무술을 닦고 싶다고 하면 강력해 보이는 무술이 나타날 것이고, 초능력을 얻고 싶으면 강력한 초능력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 나타날 것이다. 불로장생의 비술부터 천인합일의 경지까지 인간이 얻고자 원하는 대부분의 것이 가능하다고 말하는 세계가 눈앞에 펼쳐진다. 당연히, 그 사람은 자신의 욕망이 이루어질 것 같은 이 무한한 가능성의 세계에 빠져들 수밖에 없다.

 

하지만 아무리 사람이 바라는 것을 제시해주는 세계라고 해도 뭘 알아야 반응하는 법이고 그대로 따라할 수 있는 여건이 되어야 수행할 수 있는 것이다. 처음 소림 내공술을 읽으면서 이제 나도 무림의 고수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에 희희낙락 하면서 페이지를 넘기는 와중에 어떤 글귀가 내 눈에 콕 박혔다. 조금이라도 실수하여 익히면 주화입마 증세가 나타날 수 있으니 완전히 알고 깨닫고 수행을 할 것이며 스승을 찾아 도움을 받으라는 경고문이다. 여기서 주화입마(走火入魔)에서 주화(走火)는 온 몸에 불()이 달린다는 뜻으로 지랄병을 의미하고 입마(入魔)는 귀신들린 것으로 미치는 것을 의미하니 어린 마음에는 인생 종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그 경고문은 정말 자주 등장하기 때문에 수행의 실패는 바로 주화입마(走火入魔)라는 등식이 생길 정도였다. 처음의 희희낙락한 마음은 이제 사라지고 위기감이 엄습해온다. 잘못 익히면 인생을 종칠 수 있는데 계속 익힐 수 있을까? 스승을 구해보려고 했지만 어머니는 당연히 집에서 공부나 하라고 하셨다. 어디 가서 스승을 찾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결국, 혼자서 해봐야 하는데 잘못되면 인생을 종친다고 하니 신중해지지 않을 수 없다. 슬프지만 무림의 고수가 되보고 싶다는 욕망이 너무 강렬했기 때문에 이 분야를 더 이상 들여다보지 않는다는 옵션은 없었다.

 

이제부터는 탐구가 시작되었다. 오늘날처럼 인터넷이 되지도 않고 주위에 물어볼 어른도 없었기 때문에 대형서점에서 필요해 보이는 책들을 닥치는 대로 읽어가면서 연구할 수밖에 없었다. 나의 욕망은 당장 하늘을 날고 바위를 깨부수게 해주는 시리즈의 책들(의 완성, 의 실상, 神功)을 원했지만 이미 주입된 주화입마(走火入魔)에 대한 공포로 인해 내가 스스로 보고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의 책 위주로 살펴보고 이론적으로 검증해보려고 노력하게 되었다. (이 부분은 정말 운이 좋았다고 생각하는데 시리즈의 책들(의 완성, 의 실상, 神功)은 주화입마에 대한 경고문이 거의 없고 너무나 쉽게 선도를 성취하여 초능력을 얻을 수 있는 것처럼 묘사되어 있었다. 아마도 앞서 다른 것들을 먼저 접하지 않았으면 그대로 따라하면서 상당한 부작용을 얻었을 것이다.) 이런 종류의 책을 광범위하게 읽다보면 저자들이 서로서로 논박하고 있어서 어느 순간부터 의심이 강력하게 들게 된다. 어떤 사람은 고행에 가까울 정도로 호흡을 멈추게 하는 훈련을 시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호흡을 멈춰선 안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을 쓰는 법을 강조하는 사람도 있고, 명상 위주로 흐르는 사람도 있다. 신체의 동작이 동반된 훈련을 강조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가부좌로 앉아있어야 한다는 사람도 있다.

 

진실이 무엇인지 검증할 방법이 없었지만 주화입마(走火入魔) 없이 뭔가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었던 나는 가장 소극적인 방법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일단, 계속 해당 분야의 책을 읽으면서 연구를 지속하는 한편, 최소한의 공통점을 찾고, 가장 안전한 방법을 선정해보기로 한 것이다. , 누군가가 위험하다고 말하는 방식은 전부 폐기했다. 그래서 일단, 호흡을 멈추는 방식의 수행을 전부 폐기했다.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방식이 조금이라도 있는 것은 전부 하지 않았다. 이해할 수 있는 만큼만 진도를 나가기로 했다.

 

이런 기준으로 수행법을 분류한 결과 이른바 안전해 보이는 나만의 방식을 결정할 수 있었다.

 

계속 관련 내용을 공부한다.

이완 훈련을 지속적으로 하여 숙련도를 올린다.

호흡을 최대한 길게 숨을 내쉬고 들이쉬도록 연습하되 호흡을 멈추지는 않는다.

()를 모으고 움직이고 하는 내용은 하는 방법을 모르므로 포기한다.

스승 없이 익힐 수 없는 역복식 호흡약을 이용한 훈련차력 같은 것은 포기한다.

마음을 고요하게 하는 훈련으로 호흡을 세는 훈련을 한다.


그리고 점차 공부를 해나가면서 기공이나 신비주의 전통에서 수행을 통해서 구축하려고 하는 핵심은 결국 심상(心象)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물론, 그 심상이라는 것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정도의 단순한 심상이 아니라 거의 존재 자체를 던질 수 있는 수준의 강력한 심상을 말하고 내 신체에 국한될 경우에는 현실적으로 현현할 정도의 절대적인 지배력을 발휘하는 심상을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이 있는 사람이 이러한 심상을 구축하는데 유리하고 신앙이 없다면 형이상학적인 학문의 뒷받침이라도 받아야 강력한 심상을 구축할 수 있다.

 

심상이라는 결론에 도달하는데 대략 4년 정도가 소요되었다. 나의 중학시절은 중2병적인 증세와 함께 시작되어 어떤 분야를 미친 듯이 파고들면서 끝났고 그 모험은 대략 고2가 되었을 때 어느 정도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게 된 것이다. 이것은 나의 첫 번째 완결된 모험이었고, 이 모험은 나에게 무척 큰 자산과 어마어마한 부작용을 동시에 안겨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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