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고등학교 시절에 미쳐있었던 수학은 지금 돈을 계산할 때 사칙역산 하는 것 말고는 잘 쓰지 않는다. 그 이상의 무슨 공식이 나오면 머리만 아프고 생각하기도 귀찮다. 대학교 때에는 각종 사회과학과 철학, 정신분석학 등에 천착했던 것 같지만 지금은 그저 흐릿한 느낌이라 그런 것을 스스로 안다고 자신할 수 없다. 1년 정도 양자역학에 미쳐서 살았지만 “파동방정식”이라는 이름 하나만 기억에 남았고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잘 생각나지 않는다. 천자문을 입에 달고 살았지만 지금은 天地玄黃만 남아있다. 그동안 공부하고 고민했던 모든 것들이 말하고 행동하는 것에 어느 정도 반영된 것 같지만 어느 순간부터 내 것이라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여전히 많은 책을 읽고 많은 흥미를 가지고 살고 있지만, 이건 지금 눈에 들어왔을 뿐 곧 잊혀진다는 것을 항상 깨닫는다. 그저 흥미를 느끼는 것을 읽고 그 와중에 마음에 와 닿는 내용 한 두 가지가 잠시 남아서 영향력을 발휘하다가 1주일 이내로 사라진다. 그래서 발전하고 싶으면 그에 관한 내용을 더 읽어야 한다. A가 쓴 책으로 얻은 것이 있으면 그 논지를 발달시킨 B의 책을 읽는다. 그리고 어느 순간 알 것 같다는 느낌을 받는다. 몇 년여에 걸친 독서 끝에 그 분야에서 사용하는 어휘가 익고 논리 전개에 익숙해지면서 이제 잘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이제 알았으니 더 이상 흥미가 생기지 않는다. 현실에서 그 내용을 업으로 삼았다면 모를까? 쓰지 않는 지식과 생각은 조금씩 사라지다가 어느 순간 그 흔적도 남지 않는다. 몇 년 후에 돌이켜 보면 너무나 허무하다. 그래도 별 수가 없었다. 그저 익히고 배우면서 조금씩 남기면서 지나가다 보면 저 무의식 깊은 곳에서 착실히 양분이 쌓이고 있을 것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할 뿐이다.


이미 지나가 버린 지식을 다시 일일이 찾아서 들여다보고 싶다는 생각도 가끔 해보지만 다시 지나간 책들은 그저 과거의 빛바랜 생각인 경우가 많다. 다시 몇 년을 투자하여 흥미가 없는 분야를 다시 공부하라고 한다면 그것은 또 새로운 수험생활일 것이다. 게다가 지금은 다른 공부를 하고 다른 사람들과 다른 일을 하고 있으니 과거의 것을 들출 여유가 남아있을 리가 없다. 


그래도 마음속에는 이런 궁금증이 있다. 삶의 환경에서 정신분석학을 검증하고 철학에 대한 결론을 내리면서 지내왔으면 어땠을까? 수학을 이용하여 상황을 모델링하고, 통계와 확률을 끌어들여 보다 나은 의사판단을 해왔으면 어땠을까? 잘못된 지식을 거르고 삶의 고민마다 결론을 이끌어냈다면 지금은 얼마나 다른 삶을 살고 있었을까? 내 삶 속에서 지식이 검증되고 정련되고 현실을 깨닫는 틀이 되며 다시 현실을 반영하는 지혜가 되었다면 내 삶은 얼마나 충실해졌을까? 이런 궁금증 말이다.


이런 궁금증이 들 때마다 호기심을 해결해줄 방법을 찾아보았지만 마음에 드는 처방은 없었다. 그저 옛날 선비들처럼 하루에 일만번씩 성현의 지식을 낭독해서 영혼에 때려 박으라는 식의 처방 말고는 없었다. 이럴 때 만난 것이 Anki였다. 더 이상 일만번씩 책을 읽을 필요가 없이 잊을만하면 예전에 공부했던 내용들이 카드로 나타난다. 어떤 카드는 이제 더 이상 유효하지 않고 어떤 카드는 수정될 필요가 있다. 어떤 카드는 내가 잊고 있었던 것이 무엇인지 환기해준다. 덕분에 지금 하고 있는 수많은 활동들이 과거의 기억과 함께 항상 재평가되고 재검토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준다. 현재의 발전된 수준으로 과거의 오류를 바로잡기도 하고 과거의 기억으로 현재의 오류를 바로잡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Anki의 카드마다 사적인 사족이나 당시의 생각을 적어놓는다. 잊을만하면 다시 나타나 과거의 내 모습을 보여주면서 대화하기 때문이다. 더 이상 독서는, 공부는 그저 한때의 흥미에 불과한 것이 되지 않는다. 그것은 항상 미래의 자산이 되고 미래의 나에게 보내는 메시지로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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