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리버 색스의 책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신경과적 증세를 겪는 환자들을 옴니버스식으로 서술하면서 그 각각의 증세를 겪는 환자들에 대하여 무척 담담하면서도 따뜻한 시선을 드러내고 있다. 특이한 증세를 겪는 사람들에 대한 충격적인 이야기를 기대하고 책을 펼쳐들었기 때문인지 그 담담하고 따뜻한 시선이 오히려 너무 기이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처음 읽었을 때는 정말 읽는 보람도 기쁨도 별로 없었다. 그런데 그만 읽자니 책이 술술 잘 넘어갔고, 각 증세별 이야기 단락도 길지 않아서 어찌어찌 전부 읽어보게 되었다. 어쩌면 별로 바쁘지 않은 상황에서 기괴하고 특이한 증세에 대한 가벼운 흥미로 읽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런 책들이 있다. 읽었을 때는 별다른 감동도 흥미도 느끼지 못했고 아무런 느낌도 없었던 것 같은데 읽고 나면 어느 순간부터 끊임없이 반추되는 책들 말이다. 이 책이 나에게는 그랬다. 신경과적 증세라는 것이 인간 존엄의 밑바닥으로 떨어지게 하는 비극적 아우라를 가진다. 이 책에서 그런 느낌으로 환자들을 묘사했다면 나는 머릿속에 그런 사람들의 비극적 카테고리를 만들어 몽땅 집어넣고 그냥 슬퍼하고 나와 분리시키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은 그 모든 신경과적 증세가 비극이 아닌양 지독하리 건조하게 담담하게 기술해 버렸고 그래서인지 비극의 카테고리에 들어가지 않은 환자들은 외면되지 않고 내 일상생활에 불쑥불쑥 튀어나와 인간의 본질에 대한 일면을 자꾸 내비친다. 

 

그저 단순한 호기심과 가벼운 흥미로 스치듯 읽고 넘어갈 것 같았던 이 책은 삶의 구비 구비에서 갑자기 나타나 존재감을 드러낸다. 이 책에서 소개된 환자들의 사례가 지혜의 빛을 던져주는 것이다. 처음엔 단순 열거식으로 환자들을 보여주는 것에 불과하다고 느꼈는데 실은 환자의 사례가 모두 그 자체로 완전하고 고유한 케이스로 깊은 인상을 주면서 머릿속에 남은 것이다. 그리고 그 환자들은 모두 인간 존재에 대한 낯선 가능성들을 제시하고 있었다. 이 포스팅도 책의 대통령의 연설부분에서 소개하고 있는 언어상실증 환자 사례가 머릿속에서 스스로 확장되더니 다른 고민들과 결합하여 인식의 큰 전환을 가져다 주었고 특히, 영어 공부에 대해서도 시사하는 바가 많기 때문에 이를 정리하고 싶어 포스팅 하는 것이다.

 

이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이야기는 왼쪽 관자엽의 장애로 말을 이해할 수 없는 극심한 수용성 언어장애나 완전언어상실증 환자들이 대통령의 연설을 듣고 폭소를 터뜨리는 장면을 제시하면서 시작한다언어나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실어증 환자들이 대통령의 연설을 듣고 폭소를 터뜨린다니 일견 말이 되지 않는 것 같다. 그런데 이어지는 이야기는 더 이상하다. 

 

지능이 높은 언어상실증 환자들은 말을 알아들을 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으며 이해할 수 없지만 의사소통을 하는데 전혀 지장이 없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래서 일상적인 대화만으로는 그가 언어상실증에 걸렸다는 것을 주변 사람들은 전혀 알 수 없는 경우가 있다.

 

말을 이해하지도 못하고 할 수도 없는데 의사소통에는 전혀 지장이 없다니 이게 가능한가? 어떻게 말을 하지 못하는데 의사소통이 이루어진단 말인가?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언어를 제외한 모든 것으로 의사소통하기 때문이다. 표정, 몸짓, 버릇, 태도 등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단서들과 말투, 목소리의 고저, 억양 등 귀로 확인할 수 있는 단서를 이용하여 원활한 의사소통이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언어상실증 환자가 일상적인 대화에서 이러한 각종 단서들을 이용하여 원활하게 대화를 하기 때문에 일상적인 대화로는 그가 언어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확인하기가 어려운 경우가 많다. 그렇기 때문에 의사들은 언어상실증을 확진하기 위해서 각종 단서들을 누출하지 않게끔 누가 봐도 매우 이상한 태도로 말을 걸거나 인공적인 기계음을 사용하기도 한다. 언어 외의 정보를 제거하거나 이상하게 뒤틀어 버리면 언어상실증 환자는 전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히려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언어상실증 환자들이 역설적이게도 정상인들보다 훨씬 뛰어난 의사소통을 한다. 이들이 비록 언어를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그 사람의 목소리의 고저나 버릇 등으로 거짓과 부자연스러움을 아주 자연스럽게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니 대통령이 아무리 미사여구와 감언이설을 늘어놓아도 그것을 이해할 수 없고 오히려 그 대통령의 표정과 음성의 높낮이와 이상한 신체동작 등만 보게 되니, 이는 마치 희극 배우가 우스꽝스러운 몸짓으로 누구나 아는 거짓말을 공들여 하는 느낌을 주니 언어상실증 환자들은 웃음이 터진 것이다. 


처음 이 사례를 읽었을 때는 언어상실증 환자들도 의사소통을 할 수 있다니 그저 신기하구나 하고 받아들였다. 그런데 사례라는 것이 참 재미있다사례 자체가 별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음에도 이러한 사례를 알고 있으니필요한 순간마다 이 사례가 머릿속에 불쑥 떠올라 다른 고민이나 이야기들과 어우러져 결국생각의 전환을 이룰 수 있게 도와주게 되었다. 이후, 미국 현지의 드라마를 자막없이 시청하면서 생긴 언어적인 의문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이 사례로부터 작지만 큰 도움을 받게 되었다. 


그 도움은 대충 이런 것이다. 아마도 이 이야기를 책으로 읽은 사람들은 대부분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언어상실증이어도 목소리의 고저나 버릇 등의 단서로 어느 정도 의사소통을 할 수 있구나 하고 말이다. 이와 관련된 주제에 대하여 조금 아는 사람이라면 얼굴 표정 읽기, 최면이나 관념운동 등에서 미세한 신체 반응 등을 이용하여 무의식적으로 누설되는 비밀을 확인할 수 있고 상대의 거짓말 여부를 확인할 수 있다는 식의 이약기가 있는데 언어상실증 환자들은 그런 능력이 무척 발전했구나 하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내가 그랬다. 하지만 실은 이는 정반대의 이야기도 동시에 담고 있었다.


그렇다면 어떤 정반대의 이야기인가? 


첫 번째, 지능이 뛰어난 완전실어증 환자들을 일상생활에서 찾아내기 어렵다는 말은 즉, 일상생활의 의사소통을 함에 있어 언어는 거의 필요없다는 것이다. 언어를 이해하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보통 평범한 사람인 것처럼 장애인 취급을 받지 않고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의사소통을 하고 있다. 액면 그대로 언어가 일상생활에서 별로 필요가 없는 것이다. 물론, 언어가 완전히 필요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실제로 언어가 의사소통에서 차지하는 역할이 과대평가되고 있다는 것은 자명한 것 같다. 


두 번째는 언어가 오히려 정확한 의사소통을 막고 있다는 점이다. 언어를 잘 이해하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감동적인 연설을 듣고 무척 감동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언어에 집중하기 때문에 언어상실증 환자들이 주의깊게 보는 일상적인 단서들은 보지 못한다. 즉, 언어를 듣는 사람은 그 언어의 상대는 보지 않고 언어에 집중한다. 만일, 상대에게 집중하려고 한다 해도 언어의 감동적인 내용들이 머릿속에 재생이 되고 있다면 사소한 단서들을 정확하게 판단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흔히, 뻔한 사기꾼의 감언이설에 속아 넘어가는 사람들을 생각해보면 된다. 자신이 듣고 싶은 말을 하는 사람에 귀가 솔깃해서 누가 봐도 뻔한 사기꾼에 놀아나는 사람들이 바로 이렇게 언어에 농락당하는 사람들이다. 사실, 이부분은 오히려 조금 다르게 말할 수 도 있을 것 같다. 즉, 언어가 정확한 의사소통을 막는 것이 아니라 언어가 현실을 대체하고 있는 것에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종합적으로 이야기하면 언어는 많이 과대평가되고 있다. 그리고 언어가 오히려 의사소통의 본질이라는 측면을 가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 가령, 영어 공부를 생각해보자. 사람들은 자신이 영어를 쓰는 외국인과 대화를 하지 못하는 것이 영어를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정말 그럴까? 실은 공통의 경험이 없고, 그로 인하여 서로 말을 할 공통의 화제가 없기 때문이지 않을까? 처음 영업에 나선 자동차 세일즈맨을 생각해보자.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영업을 해본 경험이 없다. 이런 사람에게 길에서 아무나 붙잡고 자동차를 사라고 말하는 것이 너무나 어색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말하는 것에 대한 강한 거부감이 느껴질 것이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맥락에 따라서 말하려고 한다. 맥락에서 완전히 어긋나는 말을 하는 사람을 보통은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고 당연히 그것을 아는 사람들은 맥락에 따라 말하려고 한다. 그런데 영업 사원은 맥락없이 갑자기 차를 사라고 들이대어야 하니 심적인 부담감이 엄청난 것이다. 당연히, 차를 사야하는 맥락을 가진 사람들을 찾을 것이고 우선, 친구들이나 가족들에게 영업을 시도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결국, 이 영업사원은 절박하게 실적 압박을 받았을 때, 겨우 먹고 살기위해서라면 얼굴에 철판을 깔고 들이대어야 한다는 식의 스스로의 맥락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들이댈 수 있게 될 것이다. 마치 해외 여행가서 급박해지면 바디랭귀지로 의사소통을 시도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 모든 맥락에서 언어는 사실 조금 부차적이다. 이러한 맥락이 있고 그 다음 언어가 있기 때문이다. 왜 영업을 잘 하는 사람들 중에서 외국어를 잘 쓰는 사람들이 많은지, 그리고 말 한마디 못하면서도 해외에 나가서 사업으로 성공하는 사람들이 있는지 생각해보면 이건 꽤 명백하다. 그들은 맥락을 만들어내기 때문에 외국인과 원활하게 소통할 수 있고 그러한 맥락 속에서 자신의 사업을 성공시키는 것이다. 언어보다 한단계 앞서 의사소통이라는 측면에서 어떤 맥락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과 그러한 맥락을 만드는 법과 그러한 맥락에 참가하는 법을 아는 것이 먼저인 셈이다. 


이런 깨달음과 더불어 개인적으로 인간이 의사소통을 어떻게 하는지 또한, 언어의 실체에 대하여 살짝 감을 잡을 수 있었다. 그 부분에 대한 이야기는 미국 현지 드라마를 무자막으로 시청한 경험과 함께 이야기해보도록 하자.

이건 약간 신비적인 체험 이야기이다. 아마도 누군가는 종교적 경험이라고 해볼만한 이야기이지만 스스로는 그다지 종교적인 경험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누군가는 그렇게 볼 법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한번은 점술에 흥미가 생겨서 주역을 들여다본 적이 있다. 그런데 정말 무슨 이야기인지 하나도 알 수 없는 내용이었다. 그러다 보니 주역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고이 접고 그냥 규칙에 따라서 점을 치게 되었다. 주역으로 점치는 방법은 굉장히 단순한데, 동전 3개를 던져서 나오는 대로 표기해서 괘를 뽑고 그 괘에 따라서 책을 찾아서 읽으면 된다.

 

당시, 혼자 자취를 하고 있었는데 돈 관리를 잘 못해서 앞으로 15일은 매 끼니를 굶을 판이었다. 마침 점칠 내용도 없어서 돈 문제가 어떻게 해결될까 하고 점을 쳤는데, 곧 좋은 일이 있을 거라는 점괘를 얻었다. 그러다가 3일 후에 친척 결혼식에 갔는데 평생 한 번도 용돈을 준 적이 없는 친척이 갑자기 용돈을 주는 일이 발생하면서 점의 결과가 무척 신통하다고 생각했다. 또 한 번은 공무원 시험을 보는 동생이 공무원 시험 결과를 물어보았는데 사냥을 갔는데 잡을 사냥감이 없어 허탕을 친다는 괘가 나왔고 그 해 시험은 잘 되지 않았다. 그 외에도 자잘하게 점을 처서 맞은 사례는 상당히 많았고 그래서 종종 혼자서 점을 치곤 했다.

 

점이 잘 맞으니 점에 대한 신뢰도는 매우 높아졌고 그러다 보니 신년이 되었을 때 1년의 운세를 점쳐보게 되었다. 점괘의 결과는 별로 좋지 않았다. 거의 되는 일이 없고 힘든 1년이 될 것이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끝에는 즐거움()이 있을 것이라는 점괘가 나왔다. 당시, 취직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딱히, 가리는 곳이 없어서 선배가 같이 일해보자는 말에 지방의 작은 중소기업에 취업을 했다. 그리고 정말 고생을 많이 했다. 하루하루 근무하는 것이 지옥같았고 점점 위태로워졌다. 스트레스는 받고 매일 도망가고 싶은 생각만 났다. 그런데 이미 신년 운세를 점쳤을 때 되는 일이 없고 힘든 1년이 될 것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오직, 한가지만 생각했다. 연말에 즐거움()가 있을 것이라는 점괘였다. 역설적인 이야기지만 회사 생활이 힘들면 힘들수록 점괘에 대한 신뢰가 강해져서 반드시 즐거움()이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강해져서 기대감도 덩달아 높아졌다. 마치 즐거움()을 얻기 위해서 시련을 극복해야 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정말 지독하게 힘들었다. 해야 할 일들은 전부 맨땅에 헤딩해야하는 식의 일들이었고, 해당 업무에 대해서 물어볼 수 있는 사람들은 이미 다 퇴사를 했거나 대립각을 내세우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다 보니 정말 버벅이면서 매일 밤을 새다시피 하면서 업무를 파악해야 했고, 그래도 부족해서 호의적이지 않은 사람들에게 고개를 숙이면서 물어봐야 했었다. 대부분의 직원들은 입사한지 한달도 안되어서 퇴사하고 싶어하는 분위기였고, 1년 이상 근무한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리고 상사가 주는 스트레스도 어마어마했다. 그러다 보니 매일매일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는 나날이 계속되었다. 다음 날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다는 스트레스가 정말 컸다. 언제 고소장이 날아오고, 언제 경찰서를 가야하고, 언제 법원에 출두해야 하고, 언제 노동청에 갈지 알 수 없었다.

 

불확실한 나날이 계속되면서 나는 점에 매달리기 시작했다. 매일매일 점을 치고 그 점을 해석하면서 좋은 일이 있다고 하면 안도하고 힘든 점괘가 나오면 하루 종일 초긴장하기 일쑤였다. 하루에도 몇 번씩 점을 치면서 근근이 버티는 기간이 4개월가량 되었을 때, 지방의 공장에서 근무하는 내게 전화가 오기 시작했다. 하루는 후배에게 전화가 와서 암이라면서 치료비로 목돈을 빌려달라고 했다. 하루는 어머니에게 전화가 와서 넘어졌는데 버스의 바퀴가 얼굴 바로 앞을 지나갔다는 이야기를 했다. 수시로 지인들에게서 신세한탄과 소름끼치는 사건들 그리고 무언가 불길해 보이는 이야기들이 전화로 오기 시작했다.

 

무언가 불길한 일들이 끊임없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머릿속이 간질간질해졌다. 갑자기 어떤 의문이 떠올랐다. 어째서 무당들은 천하다는 평가를 받았을까? 어째서 역사적으로 이름난 점술가들과 예언자들의 끝은 불행할까? 그리고 나 스스로 계시라고 생각하는 어떤 것이 찾아왔다그것은 무슨 메세지도 아니었고 신의 음성도 아니었다. 그저 대단히 명료하고 대단히 확실한 의식이었다. 그것은 순식간에 모든 사건을 하나로 연결해서 내가 점()을 칠 때 대가를 치르고 있다는 것을 확실하고 명징하게 보여주고 확신하게 만들었다.

 

()은 귀신과 같은 초자연적인 존재에게 물어보는 형태와 세상의 이치에 따라서 추론하는 형태의 두 종류로 나뉜다. 귀신과 같은 초자연적인 존재에게 묻는 방식의 점은 신점(神占)이라고 하고 그 방법은 무당과 도구점으로 나뉜다. 무당은 직접 귀신과 접하는 것이고 도구점은 동전을 던지거나 산대를 부리거나 하는 등 우연적인 요소들을 도입해서 귀신이 그것을 선택하게 하는 방식의 점이다. 반면, 세상의 이치에 따라서 추론하는 형태의 점은 사주(四柱)와 같이 어떤 법칙에 따라서 추론하는 것이다. 이런 점을 계산한다고 해서 산점(算占)이라고 한다. 내가 친 점은 주역점으로 도구를 이용하여 귀신에게 묻는 신점(神占)의 하나였는데 나 스스로나 정말 가까운 친인의 개인사 정도라면 매우 잘 맞았다. 그런데 이 신점(神占)을 칠 때마다 어떤 대가를 치르고 있다는 추상적인 내용이 어떠한 근거도 없지만 절대적인 확신하게 되었다.

 

그 계시의 경험은 정말 강렬하고 신기한 경험이었다. 모든 사건들과 정황들이 하나로 엮였고 머릿속에 벼락이 치는 듯한 강렬한 인상을 받았고 어떤 추상적인 무엇이 보였다. 그것은 내가 치르고 있는 대가로 내 일생의 운, 에너지, 기운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더 이상 무분별하게 점을 치면 모든 대가를 치르고 내 주위 사람들은 불행해지고 나는 일가친척 하나 없이 노숙하다가 객사할 것이라는 확신도 같이 왔다. 너무나 명료한 메시지와 내 운명에 대한 비전으로 인해서 나는 그 자리에서 신점(神占)을 더 이상 치지 않겠다고 스스로 선언했다. 그리고 그 동안 무지로 인하여 대가로 치렀던 것으로 인하여 얼마나 많은 불행이 찾아올지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점치는 것을 그만두고 더 이상 회사에서 버티지 않고 사직서를 내었다. 그리고 지방에서 다시 집으로 돌아와 그 동안 불행했던 이야기들에 대해서 물어보았다. 그런데 내가 들었다고 생각했던 그 대부분의 일들에 대해서 사람들은 자신이 그런 전화를 건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일부, 소소한 것들은 그냥 과장된 표현이었을 뿐이었고, 어머니의 사고는 어머니가 기억하지 못했다. 그리고 목돈을 빌려달라고 했던 후배는 스스로 했던 말을 후회하듯이 그 내용을 얼버무렸다. 정말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그리고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것이 내가 치른 대가이고 만일 내가 점을 계속 쳤다면 그 모든 것이 현실화되었을 것이라는 점도 알게 되었다.

 

계시로 보고 들은 것은 마치 주입된 것처럼 어떠한 근거도 없이 나에게 강력한 확신을 안겨주었다. 만일, 내가 인간의 정신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갖고 탐구했던 바가 없었더라면 이를 종교적인 체험으로 받아들여서 종교에 귀의했을 것이다. 하지만 내 스스로 인간의 의식이 얼마나 허술하고 기만에 차있으며 또 동시에 얼마나 대단한지 깨닫는 바가 있었기 때문에 그저 굉장히 특이한 경험 정도로 남아있고 오히려 인간의 무의식과 의식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가져다 주는 좋은 경험으로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종교적 체험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스스로 아무리 근거가 없다고 생각하더라도 그 정도의 확신을 거스를 때 발생하는 찝찝함과 불확실성을 감당할 용기는 없었기에 그 자리에서 바로 신점(神占)을 더 이상 치지 않겠다고 결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점을 그만두자 모든 것이 빠르게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회사는 퇴사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와 정신적 요양을 하면서 스트레스로 고통 받던 자신을 힐링할 수 있게 되었고 마지막으로 같이 회사를 다니다가 퇴산한 여직원과 생애 첫 연애를 하게 되는 즐거움()을 얻게 되었다. 결국, 그것은 이루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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