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의 포스팅에서는 과학과 이성에 대한 종교적인 나의 태도가 어떻게 변화했는지 이야기했다. 기존에는 객관적인 현상을 합리적인 이성으로 분석하고 수학적으로 제시한 것만 과학으로 인정하고 그 외의 것은 과학이 아닌 것으로 구분했다. 과학은 과학대로 과학이 아닌 것은 과학이 아닌 것 그대로 읽고 공부하고 향유할 수 있지만 내 기준에 과학적이지 않은 확률이나 통계, 실험식 같은 것들을 과학이랍시고 제시될 때면 무척이나 거부감이 생겨 공부를 포기할 지경에 이르렀다. 하지만 과학사와 과학철학 등의 도움으로 선입견을 깨고, 과학이 단순한 진리가 아니라 인간이 진리를 찾기 위해 최선을 다한 몸부림이라는 시각으로 볼 수 있게 되면서 그러한 거부감을 극복하게 되었다. 그 덕분에 1년 정도 후에 다시 전공 공부를 시작할 수 있게 되었는데 특히, 화학 공부를 가능하게 해주었다.

    

화학은 정말 공부하기 싫어하는 과목이었다. 수학이나 물리학 교과서에서 볼 수 있는 정합성과 아름다움을 화학에서 찾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우선 명칭부터 그렇다. 화학 교과서를 보면 화학에서 화합물에 체계적인 명칭을 부여하는 방법을 가르쳐주지만 정작 교과서에서는 그 이름을 잘 쓰지 않는다. 관습적으로 사용하던 이름들이 너무 많아서 그 이름이 혼용되어 헷갈리기 일쑤였다. 또, 법칙이나 이론 등이 제시되지만 너무 제한적으로만 사용된다. 가령, 결합을 구성하는 Octet rule이니 결합법칙이니 각종 법칙을 제시하지만 실은 잘 맞는 몇몇 화합물이 있을 뿐이고 예외는 너무 많다. 그런데 왜 예외인지는 아리송하다. 그러다 보니 공부를 하다가 이론이 이해가 된다 싶으면, 그 이론이 잘 적용되지 않는 상황을 마주치게 되고 혼란에 빠지는 과정이 반복된다. 결국, 이해를 포기하고 성적을 내기 위하여 닥치는 대로 암기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과학을 진리의 교시라고 생각하지 않고,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하나하나 구축해나가는 인간의 몸부림이라고 본다면 상황은 조금 달라진다. 수학 교과서를 보면 마치 진리의 계시처럼 정리와 증명이 나오고 예제들이 나온다. 이런 정리나 증명이 왜 필요한지는 이야기가 없다. 학생은 그냥 공부해야만 한다. 물리학은 그보다 조금 나아서 현실에서 볼 수 있는 현상을 제시하면서 그 원리를 설명해준다. 하지만 앞에 원리와 현실에서의 적용 정도를 제외하면 그 뒤는 그저 수학이다. 하지만 화학은 물리학이나 수학과 그 결이 상당히 다르다. 온갖 시행착오의 흔적이 화석처럼 곳곳에 남아있기 때문이다. 진리의 계시라고 생각하기에는 너무나 예외가 많은 이론들이 끊임없는 실패의 역사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면서도 조금 더 나은 이론이 등장하지만 과거의 이론을 완전히 폐기하지는 않는다. 어느 정도의 설명력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화학은 이런 방식인 것일까? 왜냐하면 기본적으로 복잡성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화학이 다루고 있는 복잡성은 2가지로 구분해서 볼 수 있다. 하나는 원소의 식별이고 다른 하나는 원소들 간의 상호작용이다.

   

물리학이나 수학과 달리, 화학은 원소를 식별해야 한다. 지금이야 원자론과 주기율표가 연구되고 양자역학으로 이러한 원소들을 체계적으로 식별해낼 수 있지만 화학의 여명기에는 얼마나 많은 원소가 있는지 몰랐고, 그 원소의 구조는 더 몰랐기에 원소를 식별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다. 원소를 단일한 에테르로 환원시키는 사람, 지수화풍의 4가지 원소로 귀결시키는 사람. 신이나 정령으로 해석하는 사람 등 다양한 해석이 있었고, 이 해석들을 검증할 방법이 없었기에 화학은 연금술과 같이 각종 신비가 버무려진 중구난방의 기술이 될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화학의 용어체계가 그렇게 난잡한 것은 원자론과 분자론이 나오기 이전부터 연금술, 의약 제조, 산업 같은 분야에서 기술적인 연구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각각의 분야는 재료의 출처, 관련 현상, 사용되는 목적, 형이상학적인 의미 등으로 이름을 만들어냈다. 같은 원소들이 여러 가지 다른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고 다른 원소들이 같은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리고 산업 현장의 기술은 당시의 기술을 그대로 이어받아 현대에도 쓰이는 경우가 있어서 해당 명칭을 폐기하기도 어렵다. 원소를 눈으로 볼 수 없기 때문에 오직, 현상을 통해서만 해당 원소의 존재를 유추해볼 수밖에 없다. 수소 같은 원소는 금속에 강산을 섞었을 때 나오는 폭발하는 기체로 발견되었지만 그것이 물을 만드는 원소와 어떻게 같은지 알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사람들은 특별한 현상이 있을 때마다 그 현상을 일으키는 원소를 상상하여 유추하는 식으로 원소를 식별했기에 실험방법이 발전하고 원자론이 등장하여 증명될 때까지 원소의 식별은 굉장히 많은 혼란과 함께 했다. 덕분에 화학은 연금술이나 특정 화합물을 만드는 기술의 단계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다. 

    

그 다음 복잡성은 상호작용의 복잡성이다. 원소는 분자 상태로 존재하지 순수하게 원자 상태로 존재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순수하게 탄소를 모아서 순수하게 수소원자와 결합시킬 수 없다. 따라서 화학 작용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탄소가 포함된 화합물과 수소가 포함된 화합물을 반응시켜야 한다. 가장 간단한 화합물을 합성할 때에도 불순물을 완전히 제거하기 어렵고 다양한 부산물을 같이 봐야만 한다. 거기에 용매가 되는 물질까지 고려하면 변수가 너무 많다. 그래서 약한 상호작용은 무시하고 주된 상호작용 위주로 판단할 수밖에 없다. 다양한 변수가 작용하지 않도록 실험을 하고 그 실험을 기반으로 하여 다른 화학작용을 분석한다. 이런 과정이 반복되면서 점점 화학의 이론체계가 정비되고 오늘날의 마법같은 화학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화학적 개체인 원소를 식별하고 그 원소들 간의 상호작용을 규명하려는 화학의 역사를 따라가면서 나는 화학 그 자체보다는 화학 탐구의 과정에 더 집중하게 되었다. 그리고 어떤 형식이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원소의 식별에서는 같은 것과 다른 것의 2가지 항목으로 식별이 이루어진다. 다양한 화합물이 색깔, 밀도, 질량, 상(phase), 반응 등의 다양한 요소로 분류되면서 공통점과 차이점을 찾아서 원소의 분류가 이루어지기 시작한다. 이렇게 분류된 원소들은 서로 별개의 요소로 상호작용을 해야 하는 관계가 된다. 상호작용은 원소와 해당 시스템, 원소와 다른 원소의 상호작용으로 각각의 경우도 항상 2항 관계를 기본으로 해석한다. 그리고 이러한 2항 관계가 정밀하게 파악되면 그 관계를 기반으로 하여 다른 원소와의 2항 관계를 해석하게 된다. 물론, 매우 복잡한 다수의 원소들 간의 상호작용을 분석한 경우도 많다. 하지만 이런 경우는 기본적으로 2개체 간의 상호 작용을 면밀히 파악하고 있고, 이러한 상호작용이 다른 원소들과 복합적으로 상호작용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서만 가능하다. 그리고 서로 다른 2개체가 할 수 있는 상호작용은 서로 당기느냐 서로 밀쳐내느냐는 2가지로 나뉜다. 아마도 서로 아무런 작용도 하지 않는다라는 선택지가 있다고 주장하고 싶은 사람이 있겠지만 그것은 서로 밀쳐내고 당기는 것 두 상호작용이 서로 팽팽한 경우라고 생각하면 된다.

    

2항 관계로 들여다보기 시작하니 화학만 2항 관계로 해석을 하고 있지 않았다. 물리도 2항 관계였다. 서로 다른 물질 2개의 상호 작용이 물리다. 수학도 함수에는 등호(=)나 부등호(>, >=, <, <=)가 항상 1개다. 변수가 몇 개이든 항상 두 가지 값을 비교하는 2항 관계인 것이다. 화학에서 화합물의 상호작용을 분석하는 틀은 개별 분자들 간의 상호작용을 분석하든지 분자와 전체 공정의 상호작용을 분석하든지 역시 기본적으로 2항 관계로 분석한다. 사람이 어떤 집단과의 관계를 판단하는 것도 사람과 개별 사람 간의 관계를 분석하고, 사람과 집단으로 뭉뚱그려진 사람과 관계를 분석한다. 역시 2항 관계다. 

    

그렇다면 3가지 개체간의 복합적인 상호작용을 동시에 분석하지 않는 것일까? 물리학에는 3체 문제라는 꽤나 오래된 난제가 있다. 서로 만유인력으로 상호작용하는 3개의 물체들이 매순간 상호간에 중력이 어떻게 작용하고 위치가 어떻게 되며, 앞으로 어떻게 움직일 것인지를 예측하는 문제인데, 일반적인 해법을 구할 수 없다고 알려져 있다. 2개의 물체일 경우에는 만유입력 법칙으로 간단하게 일반적인 해법을 유도할 수 있다. 하지만 3개가 되면 그것이 불가능해지는 것이다. 나는 이부분에서 수학이 2항의 형식이 아닌 3항의 형식이였으면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해보았지만 마치 4차원을 사람이 상상할 수 없듯이 3항간의 관계를 다루는 수학이라는 것을 상상하기 어려웠다. 만일, 인간이 3항간의 관계를 다루는 수학을 가지고 있었다면 과학의 양상은 지금과는 차원이 달랐을지도 모르겠다. 

    

여기서 한 가지 의심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나는 여태껏 과학자들이 발견한 것이 진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대부분 2항 관계로 지식이 전개된다. 너무 광범위하게 2항 관계가 보인다. 인간사도 대부분 2항 관계로 일어난다. 사람들의 만남과 헤어짐, 어떤 집단과 친한지 적대적인지, 남자와 여자, 어른과 아이, 하늘과 땅, 삶과 죽음 등 끊임없이 2항 관계가 전개된다. 이것은 이 우주가 2항 관계로 만들어졌다는 뜻일까? 아마도 음양론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그렇게 말할 것이다. 하지만 그 2항 관계에 의한 해석은 끝없이 해석만 있고 오류투성이에 가끔은 완전히 잘못된 해석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모든 것을 2항 관계로 환원시킨다. 하늘과 땅 사이에는 산도 있고 구름도 있고 새도 있지만 하늘과 땅이다. 남자와 여자 사이에는 다양한 성소수자와 무성, 양성이 있지만 여전히 남녀다. 마치 2항 관계로 해석해야 한다는 강박이 있는 것 같다. 2항 관계를 넘어서 보려고 해보지만 3체 문제는 일반 해를 구할 수 없고, 3항간의 관계를 다루는 방법은 상상되지 않는다. 3항은 안되는 것이다.

   

나는 이쯤에서 생각을 반전해볼 수 있었다. 세상이 모두 노랗게 보인다면 세상이 노란 것이 아니라 내 눈에 노란 물이 들거나 노란 렌즈를 착용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더 상식적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람의 지성이 닿아있는 과학과 학문 그리고 인간사까지 전부 2항 관계가 개입된다면 어쩌면 세상이 2항 구조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사람이 2항 구조로 인식하고 판단하도록 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더 타당하지 않을까? 개인적으로는 이 생각이 이치에 맞는 것처럼 느껴졌다. 때마침 신경(neuron) 관련 내용을 접할 기회가 있었는데, 인체의 신경 시스템도 좌뇌와 우뇌, 중심과 말엽 등의 2항 구조로 설명하는 것을 보면서 과학자들이 인간 인식의 구조적 특성 때문에 신경시스템을 2항 구조로 나누어 판단하는 것이든 아니면 실제로 인간의 신경시스템이 명백한 2항 구조로 설계되었든 결국 2항 구조로 수렴된다고 생각했다. 

   

아무도 증명하지 않았고 아무도 옳다고 말하지 않은 사람의 2항 구조를 혼자서 발견하고 개인적으로 확신하게 되면서 내 관심사는 과학보다는 사람과 인간에 대한 궁금증으로 반전될 수밖에 없었다. 과학이 진리의 계시가 아니라 인간이 가진 어떤 지식의 틀의 반영이라고 자각하면서 과학을 인간의 흔적인 인문(人文)으로 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원래는 인간의 오류와 대비되는 과학적 지식을 숭상해왔지만 과학 속에서 인간을 발견하니 인간에 대해 통찰하는 것이 더 근원적인 통찰을 도달할 수 있는 길로 보이기 시작했다. 덕분에 내 관심사는 과학에서 문학, 역사, 철학 등 온갖 인문학으로 뻗쳐나가기 시작했다. 


앞의 포스팅에서는 지식의 숙성과 각성이라는 현상을 신경세포인 뉴런으로 바로 해석한 것처럼 이야기했지만 그럴 리가 없다. 당연히 그 동안 고민해오고 시행착오를 겪었던 배경이 있고 여전히 고민 중이다. 아무래도 그 배경이 되는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다른 이야기를 할 때마다 온전한 이해를 얻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잠시 삼천포로 빠져 그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이번에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성에 대한 맹신을 가지다가 현재는 생물학적인 뉴런으로 인간의 정신을 제멋대로 그려보고 있는 내 경험담에 불과한 사적인 이야기다. 

     

어린 시절부터 인간의 이성에 대한 신뢰와 믿음을 보여주는 계몽주의적인 정신 모델을 가지고 있었다. 즉, 인간은 이성을 가지고 있으며 교육을 통하여 이성을 발전시킬 수 있다는 생각이다. 이러한 생각의 이면에는 이성에 대한 믿음과 신뢰가 있고, 그것은 현실적으로 모든 것을 합리적인 이성에 따라 논리적으로 배치되어야 한다는 형식미학으로 발전되었다. 물론, 꿈꾸는 이상이 그랬다는 의미이지 내 삶이 그랬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럼에도 가설을 구축하고 엄정한 논리와 증명을 통하여 그 이론적 정합성을 갖추며 이를 현실의 실험결과에 맞추는 과정이 너무나 아름답게 느껴진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확률과 통계를 혐오했고, 대학 수업 중간에 등장하는 밑도 끝도 없는 이상한 공식들을 외우라고 하면 그냥 그 강의를 다운시키고 포기했다.

    

거의 대부분의 전공 수업에서 실험식 같은 것들이 사용되었기 때문에 전공 수업을 거의 포기하면서 스스로가 가진 이상한 강박을 알게 되었다. 졸업하고 싶은 마음은 있었기에 이 강박을 어떻게든 극복해보려고 했지만 그 방법을 찾지 못하고 방황했었다. 방황하면서 타과의 수업을 듣기도 하고 개이적으로 독서를 하기도 하면서 과학철학이나 과학사 그리고 근대 합리주의 철학자들을 살펴보면서 이를 극복할 수 있었다. 

       

과학철학이나 과학사를 보게 되면 우리가 흔히 말하는 과학의 명백함이라고 하는 것이 그다지 명료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과학은 항상 그 논리적 정합성과 현실적 유용성을 긴 시간에 걸쳐 검증받게 된다. 그렇게 검증된 과학적 사실도 여전히 당대의 과학에 대한 패러다임에 종속되어 있어 영원불멸한 진리라고 할 수는 없다. 그저 끊임없이 검증하고 검증하는 과정이 있을 뿐이었고 그 검증의 과정 덕분에 당대에 가장 신뢰할만한 정보로 자리매김하게 되는 것이다.

     

일례로 뉴턴 역학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뉴턴 역학은 한 시대를 풍미하다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 등장하면서 거시 세계를 규율하던 역학으로서의 권위를 잃었다. 그리고 다시 보어의 양자역학이 등장하면서 미시세계 또한 뉴턴 역학으로 올바르게 나타낼 수 없다는 점이 드러났다. 그럼에도 현실은 뉴턴 역학을 가장 많이 사용한다. 현실 세계에서는 여전히 뉴턴 역학이 매우 훌륭하게 작동하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과학자들은 뉴턴의 역학을 오류가능성이 있는 절대적인 진리가 아님에도 여전히 사용하고 있는 셈이다.

     

뉴턴 역학이 가진 제한적인 합리성 보다 더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었다. 그것은 뉴턴 역학이 곧 형이상학의 종결을 의미한다는 지점이었다.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중력을 깨달았다는 뉴턴의 이야기가 매우 유명하니 그 사례를 가지고 이야기해보자. 뉴턴은 사과가 떨어지니 중력이 있다고 이야기했다. 반면, 뉴턴 당대의 지성들은 중력을 이야기하려면 이 중력의 이치를 형이상학적으로도 증명해야만 했다. 가령, 신이 중력을 부여했다는 수준에서부터 어떤 보이지 않는 매질이 있어서 사과를 아래로 잡아당긴다는 정도까지 다양한 형이상학들이 서로 경쟁하게 된다. 여기서 뉴턴의 입장은 매우 신선한데 뉴턴은 그 형이상학들을 무시했다. 오직, 현상 그 자체만 해석했다. 사과가 떨어졌고 그 사과를 떨어뜨리게 만든 작용이 있으며 그 작용을 중력이라고 불렀다. 뉴턴의 역학이 결국, 현상세계를 미적분으로 해석한 것에 가깝지 무슨 그 배경이 되는 질서를 생각하여 통합적인 질설를 제공하지 않았다. 중력이라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는 논하지 않고 그저 중력이라고 부를 수 있는 현상이 있다는 것만 계산하여 보여줄 뿐이었다. 당연히 수많은 비판이 있었고 납득하기 어려워 하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결국, 현실을 거의 정확하게 계산해내는 뉴턴의 역학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뉴턴 역학의 부흥은 인과에 대한 관점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뉴턴 이전에는 원인이 있고 결과가 있어야 했다. 즉, 원인이 선행하고 그에 따라 결과가 발생하는 것이다. 원인이 선행해야하므로 그 원인의 원인이 또 선행해야한다. 그렇기 모든 원인이 선행해야 하므로 모든 진리는 필연적으로 제1원인에서 유도되어서 나와야 한다. 즉, 태초에 빛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당시의 학자들은 그 제1원인에 대한 다양한 형이상학을 전개했고 모든 논의가 그 형이상학으로 수렴되어야만 했다. 하지만 뉴턴은 그 형이상학 보다 현상 그 자체를 중시했고 그저 현상을 계산했을 뿐이다. 아무런 원인을 제공하지 않았지만 뉴턴 역학은 현실을 너무나 명확하게 계산해내면서 성공했고 누구도 그것이 틀렸다고 말할 수 없게 되었다. 이 사건의 인과에 대한 학자들의 모델에 균열을 가했다. 기존의 원인→결과 의 인과론은 필연적으로 형이상학으로 전개되기 때문이다. 원인→결과의 인과를 대체하는 극단적인 인과론이 등장하게 되는데 ‘논리실증주의’라고 한다. 즉, 논리는 현실에서 적용되는 것을 실증할 수 있으면 된다는 입장이다. 이들은 과학을 인과가 아니라 현상을 수학적으로 기술하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그들에게 세상의 현상은 동시적인 상호 작용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가령, 트럭에 짐을 실으면 트럭이 감당하는 무게가 올라가고 트럭의 바퀴는 찌그러질 것이다. 이 경우 인과론은 트럭에 짐을 실었기 때문에 트럭의 무게가 올라갔고 트럭의 무게가 올라갔기 때문에 트럭의 바퀴가 찌그러졌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논리실증주의는 원인과 결과처럼 선행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우리의 언어적 습관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것일 뿐 그저 짐=무게=바퀴의 찌그러진 정도라는 상호 관계만 있을 뿐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우리의 언어로는 이러한 동시적 상호 관계를 명확하게 기술하기 어렵기 때문에 언어가 아닌 수학을 이용하여 기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논리실증주의적인 주장은 극단적으로 느껴질 수 있지만 후에 양자역학이 기존의 원인과 결과의 인과론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고 상식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계산 결과가 현실에서 그대로 실현되는 것만을 보게 되면 이를 어느 정도 수긍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뉴턴의 역학은 그 태생에서는 형이상학을 부정했지만 실제로는 뉴턴 역학을 기반으로 한 다양한 원인과 결과가 나열되면서 새로운 형이상학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이제 과학자가 아닌 사람들에게 과학을 새로운 종교이고 과학자들을 그 사제인 셈이다. 이 사제들은 새로운 형이상학으로 과거의 어리석은 미신과 구습을 타파하고 인간의 이성으로 구축된 과학의 발전으로 병을 고치고, 앉은뱅이를 일으키며, 달에 가기 시작하면서 새로운 이적을 현실에 현현시켰다.  

      

뉴턴 역학에 관련된 일련의 논의 덕분에 나 자신에 대한 몇 가지를 알게 되었다. 스스로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과학을 공부한다고 생각했지만 그 과학은 과학으로 대체된 형이상학, 종교화된 과학이었던 것 같다. 이 과학은 계몽주의 시대에 온갖 미신을 척결하면서 인간의 이성을 기치로 내걸고 과거의 어리석음과 악습과 폐단을 깨끗이 일소할 때 사용되었던 그 과학이었고, 찬란하게 빛나는 신성한 이성의 구현인 과학이며, 세상의 모든 질서를 이성적으로 납득할 수 있는 합리적 질서로 만들어낼 것이라는 믿음과 신앙의 대상으로서 과학이었다. 즉, 확률과 통계, 실험식이나 밑도 끝도 없는 공식에 그토록 분노한 것은 과학이라고 말하면서 이성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공식이나 불확실한 확률과 통계를 신성모독이라고 느꼈기 때문인 셈이다.

    

스스로 과학을 좋아한다고 생각했지만 깨닫고 보니 과학에 신앙을 바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스스로의 태도를 조금 더 면밀하게 살펴보게 되었다. 생각해보니 웃겼기 때문이다. 내가 무엇을 안다고 스스로의 고찰과 통찰을 통하여 이성을 절대시하는 과학의 신도가 되었을까? 하물며 그런 고민은 전공 수업을 듣지 못해서 생긴 고민으로써 그 때가 처음이었다. 그저, TV나 책 같은 것에서 주워들은 것들이 부지불식간에 자기 생각인양 고정된 것이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공고하게 다진 이유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무작정 외우는 것이 싫다는 마음을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것에 대한 미학적인 우상화로 포장하여 스스로를 기만 하고 싶었던 것에 불과했다. 이해하기 어려운 혹은, 이해하기 싫은 것들을 보고 싶어하지 않아 하면서 스스로를 포장하는 행위는 갈릴레이가 당대의 학자들에게 망원경을 보여주면서 ‘보라’라고 말했을 때, 아리스토텔레스적인 변증술로 지식을 찾지 않는 천박한 갈릴레이의 태도를 개탄하면서 망원경을 거부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과학과 미학을 착각하는 것이다.

     

과학은 미학도 종교도 형이상학도 아니다. 과학하는 과학자들은 과학이라는 종교의 사제가 아니다. 우아하게 이성적으로 사색하여 이성의 빛으로 사물을 비추어 그 진리를 꿰뚫는 신성한 행위만이 과학인 것은 아니다. 과학자들은 이미 검증된 것을 끊임없이 바라보며 그 증명의 아름다움과 진리의 명백함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는다. 그것은 교육자들이 하는 일이다. 과학자들은 오히려 비과학적인 사실들 앞에 서있다. 그리고 전혀 검증되지 않은 가설을 세우고 이것이 옳은지 그른지 검증하면서 장님이 문고리 더듬듯이 나아간다. 거기에는 연역적이고 우아한 추론과 증명은 충분한 자료를 갖춘 마지막에나 있다. 그 전까지는 망상과 가설 사이에서 갈등하고 어리석은 도박사가 투자하듯이 비용과 시간을 투자하여 가설의 검증에 뛰어들었다가 성공하거나 실패하는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그런 리스크가 있는 행위에 뛰어드는 과학자들이 우아한 사제로 보이는가? 내 눈에는 어떻게든 성공률을 높여 나아가기 위하여 있는 증거 없는 증거 전부 끌어들여서 고민하고 또 고민하는 몸부림치는 사람들로 보인다. 

     

과학사와 과학철학 덕분에 진리를 찾아 몸부림치는 과학이라는 새로운 모델을 얻게 되었다. 우아하게 가설을 세우고 수학적으로 엄밀하게 모든 것을 조합하여 새로운 공식을 찾는 것이 아니라. 유체의 난류 이동이나 복잡한 물체들 간의 상호작용이라는 해결하기 어려운 과제들을 적확하게 수학적으로 모델링하기 위하여 통계, 확률, 실험 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과학자 모델을 떠올린 것이다. 이들은 온갖 실험을 통해서 이런 저런 공식을 조합해보고 원인을 따져보면서 얼기설기 가설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시행착오를 통하여 공식을 다듬는다. 그들이 도달하는 이해는 전체를 관통하는 완벽한 이해가 아니라 부분적이고 제한적인 이해이다. 하지만 부분적인 이해들이 쌓이고 자료가 쌓이면서 현상을 이해하다가 어느 순간 운이 좋으면 혁명적인 발견이 이루어져 그 모든 이치를 꿰뚫게 되는 것이다. 이제는 케쿨레가 벤젠의 화학구조를 꿈속에서 발견한 것을 일상적인 과학자의 활동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 것이다.

    

뉴턴 역학의 제한성, 형이상학의 배격, 과학에 대한 새로운 해석 덕분에 내 안에서 과학에 대한 이미지가 바뀌고 신성모독감을 떨쳐낼 수 있었다. 이전에는 과학 교과서는 어떤 절대적인 교시처럼 당연히 배우고 익혀야할 것으로 느꼈는데, 과학에 대한 새로운 모델 정립 이후로 그 모든 내용이 과학자들이 최선을 다해 용쓴 결과물로 보이기 시작하면서 그들이 어떤 생각으로 이런 논리를 전개했는지 연상하느라 과학책을 읽는 것이 무척 흥미진진해지기 시작했다. 또, 통계와 확률은 지나치게 많은 물체들 간의  상호작용을 기술할 방법이 없기 때문에 대안적으로 찾아낸 형식이고 이것보다 효율적인 기술방법을 찾지 못했기에 이 방법으로 연구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거부감을 제거할 수 있었다. 실험식은 실험 데이터를 가장 적확하게 기술하기 위한 식에 불과하고 이 실험식을 통하여 자료를 통찰하고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아직까지 그 해답을 찾지 못한 무척 꼬아놓은 퀴즈처럼 생각되기도 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여전히 과학적 진실에 대한 믿음과 그 지지대인 이성에 대한 믿음은 생생하게 살아있었다. 단지, 맹목적이고 종교적인 신앙의 대상이나 비합리적인 것과 비논리적인 것에 대한 혐오감의 원천, 또는 어떤 절대적인 규범이라는 과학과 이성에 맞지 않는 틀을 벗고 끊임없이 진리를 모색하고 검증하는 원래의 긍정적인 과학과 이성으로 그리고 여전히 소중한 가능성의 원천으로 제 위치를 찾았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지하철에 꾸벅꾸벅 졸면서 앉아있는 나이 먹은 아저씨가 보인다. 조금 늦은 시간에 지하철을 타면 항상 볼 수 있는 삶에 무게를 버티다가 잠시 쉬고 있는 사람의 모습이다. 그런데 그날에는 유난히 아저씨의 코가 보인다. 살짝 기름이 배여서 광택이 흐르고 맑게 빛난다. 기름이 맑아서인지 피부색이 그대로 투과되어 조금 노란색으로 보인다. 그 때 허영만 화백의 “꼴”에서 봤던 내용이 떠올랐다. 코에서 황색의 상서로운 광택이 있으면 금전이 들어온다는 내용이었다. 그 때는 상서로운 기운이 뭐야? 라고 웃으면서 지나갔는데 이 아저씨의 코의 광택을 보니 바로 상서롭다는 생각이 든다. 오늘 이 아저씨에게 좋은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다. 

          

이 순간 떠오른 것은 허영만 화백의 “꼴” 뿐만은 아니다. 한문에서 自(스스로 자)자가 자기 자신을 가리키는 글자이면서 실제로는 코를 형상화한 상형자(象形字)라는 점도 같이 떠올랐다. 그래서 관상에서 말하는 코에 나타난 징후로 자기 자신을 살핀다고 한 것은 관상가들이 발견한 것이 아니라 그저 전통적인 생각을 좀 더 심화시켰을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즉, 한자 문화권의 뿌리부터 코를 그 사람의 자신으로 봐왔기에 “콧대가 높다.”,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 주었다.” 라는 표현들이 흔하게 사용되었고 관상은 그저 그 전통을 신뢰하고 이를 좀 더 세분화하고 술수화한 것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한 번 터진 생각은 봇물처럼 이어지고 기억을 들추어내 사실들을 꿰기 시작한다. 암으로 투병하시던 분이 코가 얽어서 생기를 잃고 쭈글쭈글하게 수축된 것이 떠오른다. 면접관의 자신만만한 미소 가운데 광택을 내며 빛나던 코도 떠오른다. 한자문화권과 무슨 관계인지 모르겠지만 여전히 코를 사람의 자신감과 연관지어 생각하는 버릇이 있다는 것도 떠올랐다. 어쩌면 관상이 완전히 거짓말은 아닐지도 모른다. 원래, 전통적으로 전해 내려오는 내용들을 오류가 많이 섞인 관찰 결과로 생각하기 때문에 오류를 가려내면 나름 쓸만한 정보의 원천으로 쓸 수 있다고 생각하는 주의이기 때문에 코를 자신감이나 자존감과 연관관계가 있다는 식으로 설명할 수 있는 많은 논리들이 떠오른다. 인간의 몸이란 매우 합리적인 것 같지만 굉장히 오래된 원시적인 체계도 같이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코에서 자기 자신의 징후가 나타난다고 하는 것을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 뒤로 내 자신의 코를 관찰하여 나의 상태를 계속 연동해서 관찰해보기 시작했다. 

               

허영만 화백의 “꼴”을 본 것은 이 경험을 하기 2년 전쯤이었다. 당시에는 나름 유행하는 컨텐츠여서 봤을 뿐이다. 재미있게 보았지만 그렇다고 진지하게 본 것은 아니고 이미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갑자기 2년만에 관련 지식이 나타나 활동을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당연히 한 번 스쳐지나가면서 본 것이기 때문에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는 지식도 아니었다. 나중에 살펴보니 조금 다르게 기억하고 있는 내용도 상당했다. 하지만 이 순간부터 어설프게 관상을 볼 수 있었다. 만화책 한 번 보고 관상을 볼 수 있다고 스스로 자신하는 부분이 제일 신기했다.

             

아는 것도 없는데 갑자기 스스로 관상을 볼 수 있다고 자신하는 것이 너무 신기해서 이 부분을 조금 깊게 고찰해보았다. 관상가들은 기본적으로 얼굴지도라는 것을 사용한다. 즉, 재물은 콧방울을 보고 배우자는 입술을 보는 식이다. 그리고 나이에 따라서 반응하는 얼굴 부위가 있다. 이 가장 기본이자 중요한 얼굴지도도 모르고 관련 용어를 하나도 모르니 실제 관성을 볼 수 있을리가 없다. 하지만 아저씨의 코를 보면서 상서롭다고 생각한 순간부터 얼굴에 나타나는 징후가 상서로운 것인지 불행한 것인지 느낄 수 있다는 확신이 생긴 것이다. 그러니 얼굴을 보고 상서롭다고 느끼면 관상이 좋은 것이고 불길하다고 느낀다면 관상이 좋지 않은 것 아니겠는가? 이 상황에서 얼굴 지도만 암기하면 이 느낌을 구체적으로 풀 수 있으니 관상이 완성되는 셈이다. 하지만 밑도 끝도 없이 생겨난 자신감을 믿고 관상을 볼 수는 없었다. 자신감이 상당해도 머리는 끊임없이 위험신호를 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스스로 어떻게 관상을 보나 의심하고 계속 관찰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내가 보는 것이 관상이 아니라 내 마음 내키는대로 보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날의 기분에 따라서 그리고 상대에 대한 선입견과 미모에 따라서 마음껏 날조하는 스스로를 발견할 따름이었다.

            

이 관상 보는 경험과 같이 갑자기 알아지는 경험은 처음이 아니다. 나름 상당히 많은 책을 읽는 편이지만 깊고 자세하게 책을 보지 않고 그 내용을 정확하게 기억하지도 않는다. 그저 흥미로운 주제를 다루는 내용을 한번 주마간산식으로 맛만 보고 정말 필요한 책만 다시 읽는 방식으로 책을 읽는다. 그런데 이렇게 주마간산식으로 읽은 책들이 대략 2년 정도 지나면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는 경우가 종종 있다. 책을 읽을 당시에는 별다른 감흥도 없고 아무 생각도 없이 덮은 책들인데 2년 후에 종종 떠오르는 것이다. 그 기간은 신기하게도 항상 2년 정도이다. 

         

책에서만 그런 것은 아니다. 소개팅에서 만난 사람의 이해하지 못했던 어떤 행동, 누군가의 조언, 당시의 이상했던 상황 같은 것도 2년 후에 갑자기 알아지게 된다. 게다가 이런 경험의 특이한 점은 그냥 깨달아지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할 수 있다는 자기 확신이 같이 생기고, 실제로 자주 사용할 수 있도록 몸에 장착되는 수준으로 체득되어 버린다는 것이다. 관상이 떠오르면서 그 때부터 관상을 볼 수 있다고 스스로 믿는 경우처럼 말이다. 이런 경험을 할 때마다 사람들이 이렇게 돌팔이가 되는가보다 생각했다.

           

이런 뜬금없는 지식의 각성 경험과 같이 고려해볼 만한 경험이 있다. 그것은 입이 말하는 경험이다.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다 보면 나도 모르는 이야기들이 마구마구 튀어나온다. 이런 경험이 하도 많아서 말은 입으로 하는 것이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갖게 할 정도로 입에서 튀어나오는 것은 너무나 많다. 앞서의 경우처럼 갑자기 알아지는 것은 아니지만 말을 하다보면 기억에서 까맣게 잊고 있었던 온갖 경험과 생각, 책에서 읽은 내용들이 튀어나온다. 생각을 하면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이런 이야기를 해야지 머리로 생각하고 나오는 말이 아니라 그냥 입에서 튀어나온다. 그리고 머리는 그 말을 들으면서 필사적으로 잘못된 점이 없는지 생각하느라 정신없다. 말이 다 끝난 다음에는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다시 스스로 복기해야만 기억을 유지할 수 있다. 물론, 나중에 찾아보면 상당 부분 틀리고 왜곡된 것들이 많다.

             

어린 시절에는 “무의식은 모든 것을 기억한다.”라는 말을 믿었기에 말을 하다보면 무의식에 저장된 기억을 끌어다 쓰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러한 설명은 실은 아무런 효용이 없는 설명이다. “온 우주가 알고 있어.”, “모든 것은 신의 뜻이야.”라는 말처럼 항상 이유를 찾는 우리의 정신을 다독일 수는 있지만 그 이상 나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가령, 2년 전에 경험한 지식과 내용은 허영만 화백의 “꼴”만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어설프게나마 지식 각성이 가지는 몇 가지 특성을 정리해보았다.


일단, 2년이 지난 것이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그렇다면 2년 내에는 새롭게 알아지는 것이 없는가? 그렇지는 않다. 하지만 그렇게 새롭게 알아지는 것들은 어떤 경이로움 없이 그냥 자연스럽게 알아진다. 즉, 2년 정도 지난 지식을 갑자기 알게되는 경험은 마치 계시를 받듯이 확 알아지는 경험으로 확연한 변화와 각성의 느낌을 받는다. 하지만 일상적인 새로운 지식을 알아지는 경험은 최근 자판기 커피의 가격이 300원에서 400원으로 인상되었다는 것을 안 것처럼 별다를 것 없는 경험이다. 

            

두 번째는 의외성이다. 모든 경험이나 지식이 2년 내에 갑자기 알아지는 것이 아니. 어떤 기준에 의해서 선택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관심에서 완전히 멀어진 의외의 내용인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이런 경험이나 지식이 2년 만에 알아질 때는 갑자기 주위의 모든 것을 뜬금없이 그 방향으로 해석하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가령,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취한 여자가 지하철 봉을 잡고 있다가 밀어내면서 넘어지는 것을 보고 떠올린 것은 바디랭귀지에서 “사람이 싫어하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는 그 것으로부터 거리를 두려고 한다.”라는 점이었다. 위에서 언급한 ‘아저씨의 코’처럼 무척 뜬금없이 과거에 읽었던 바디랭귀지 책을 다 떠올리게 되었다. 즉, 현실에 영향을 받는 부분도 없진 않겠지만 이미 내부적으로 완전한 체계를 갖추고 나타날 준비가 완료되어 현실의 사소한 유사성만으로도 격발되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세 번째는 정확하지 않다는 것이다. 무슨 “무의식이 모든 것을 안다.” 식의 가설을 적용되기에는 이 무의식은 지나치게 오류가 많았다. 엄청난 확신과 자신감 그리고 세상의 모든 것을 알 것 같은 느낌을 주면서도 잘 살펴보면 온갖 잡동사니가 어우러져 때로는 기괴한 체계를 형성한다. 과거의 경험은 왜곡되어있고 지식은 잘못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그것을 확인하고 오류를 수정해도 결론이 전혀 바뀌지 않는다는 점이 신기하다. 즉, 나는 스스로 완전 돌팔이임을 알면서도 여전히 관상을 볼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지식이나 경험이 2년이라는 기간을 지나서 다시 지하수가 용출되듯이 나오는 것을 보면서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까 고민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시간이 지나면서 지식이 숙성한다는 면에서 어떤 知의 원형을 가지고 있다는 플라톤식 사고방식이나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이성을 갖추고 있다는 계몽주의적 사고방식은 당연히 부정할 수밖에 없다. 모든 정보가 정보 그 자체로 사람의 머릿속에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환경과 준비, 그리고 앞으로의 상황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고 그 확실성을 담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무의식을 들먹이는 것도 좋아하지 않게 되었다. 무의식은 2년마다 올라오는 각성 경험을 설명해주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 각성된 지식의 오류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결국, 나는 이것을 신경 세포인 뉴런(neuron)과 연계해서 생각하기 시작했다. 우리의 고결한 영혼이나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이성으로는 이렇게 관찰된 것들을 설명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반면, 뉴런은 무척 비합리적이고 패턴 순응적이어서 개인의 모순적인 행동이나 일관되지 못한 믿음들을 설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수정: 2019/01/17 PM 3:16  문구 및 제목(전편→01) 수정. 



넒은 교정 때문인지 아니면 젊음에 대한 동경때문인지 대학교에 광인들이 잘 모이는 것 같다. 광인들은 광인이라는 것이 테가 난다. 어떤 광인은 짧은 치마를 입고 4발로 뛰기도 하고 어떤 광인은 하의 실종으로 나무 밑에 앉아서 속없이 즐거운 미소만 흘리고 있다. 중고등학교를 다닐 때에는 마주칠 수 없었던 광인들을 보는 기분은 마치 포르노처럼 인간성의 치부가 여과 없이 마구 드러나는 느낌이었다. 

          

술을 마시거나 혹은 밤새 놀다가 가끔씩 밖에서 밤을 새야할 때면 없는 돈에 여관이나 모텔에서 자기는 어렵고 24시간 만화방을 찾아가 만화책을 뒤적이면서 잠들곤 했다. 만화방에 앉아 있으면 나이 드신 아저씨들이 종종 나타나 만화를 얼굴 앞에 세워놓고 말을 한다. 연극투의 선명한 희노애락이 담겨있는 목소리로 누군가를 탓하거나 분노하고 애처롭게 울길래 처음에는 만화책의 대사를 따라하는 줄 알았다. 만화책을 보다가 호통치는 목소리에 깜짝깜짝 놀라서 보면 그 아저씨다. 길게 살펴보아도 만화책의 페이지는 넘어가지 않고 말은 너무 많다. 혼잣말이다. 그 아저씨는 밤새 호통을 치면서 내 잠을 깨우곤 했다. 

            

대학에는 정말 다양한 군상들이 돌아다녔다. 방언 터지듯 선교하는 선교사와 도를 설파하는 자들이 곳곳에서 그리스를 주제로 언쟁했고, 학교에서 거주하면서 노숙자 같이 활동하는 사람도 있었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에게 주체할 수 없이 튀어나오는 수다를 쏟아부어 도망가게 하는 사람도 있었고, 이 사람 저 사람을 붙잡고 차비를 구걸하는 분도 있었다. 간혹 식사 후에 벤치에 앉아 있으면 일면식도 없이 다가와 왕년의 삶을 이야기하면서 길고 긴 질곡 같은 삶에 대해 푸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처음에는 응수도 하고 귀를 기울여 그런 사람들의 말을 듣기도 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의존해오는 그 삶의 무게를 감당할 수 없어 도망가게 되었다. 먼 거리에서 그 사람이 보이면 빙 둘러서 돌아가곤 했다. 하지만 이미 그 사람들을 보았기 때문일까? 동기, 선후배, 친구들 사이에 이상한 징후가 보인다. 고교시절 전국 1등을 했다는 후배는 별 다른 이유 없이 방바닥에서 숨만 쉬면서 혼잣말을 하기 시작했다. 이성에 대한 광적인 집착으로 종적이 끊긴 사람이 있고, 차이고 와서 인간이 어떻게 저렇게 망가질까 싶은 폐인이 되어버린 사람들도 나타난다. 악의에 가득 차 비방에 비방을 하느라 정신줄을 놓는 사람들도 간혹 보이고 누가 봐도 부담스러울 정도로 지나친 호의와 선의로 사람들을 대하면서 대놓고 어두운 현실을 외면하는 사람들도 나타난다. 얼핏 얼핏 교정을 돌아다니는 광인들과 닮아가는 것이다. 결국, 어찌해보지 못하고 관계가 멀어지거나 도망가게 된다.

                 

감당할 수 있는 정상인 사람들과 만나야겠다고 생각하지만 어느 날 후배가 똑같은 행동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모든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이성적인 후배는 사람들을 일정한 거리 위에 두려고 한다. 그 거리보다 멀어지면 친절하게 다가가 상냥하게 위로하고 다독이면서 끌어당긴다. 하지만 그 거리보다 가까워지면 참을 수 없이 불안해하고 파괴하려고 한다. 그 후배의 주위에는 친절에 반해 사랑을 느끼고 쫓아다니는 다수의 남자들과 밀어내기와 다른 남자들에게 보여주는 호의에 지쳐 쓰러지기 직전의 남자친구로 구성된 인간관계를 보여주기만 한다. 그 친구와 그런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도 항상 동일한 상황이 구현되고 이루어진다. 어떤 후배는 애정을 무척 갈구했지만 애정이 입바른 소리로 구박하거나 사실을 바로잡는 것으로 구현된다. 그리고 본인에게 다가오는 모든 애정을 의심하고 시험해보면서 결국, 상대가 애정을 접으면 그제서야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안도하는 것이 보인다. 어떤 친구는 자신을 비련의 여주인공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모든 상황을 자신이 비련과 연결 지었다. 가끔은 슬픔을 원해서 일부러 망가질 것이 뻔한 곳으로 뛰어 들어가는 것으로 보였다. 

        

패턴을 바꿔보기 위하여 이야기도 해보고 토론도 해보고 상황에 따른 대처 방법을 같이 모색해 보았다. 하지만 그 때뿐이다. 알콜 중독자들이 항상 입으로는 술을 끊어야 한다고 절절하게 말하지만 정작 술 앞에서는 마셔야할 이유를 끊임없이 만들어내 결국 술을 마시는 것과 다름이 없다. 입으로는 자신의 박복한 운명을 탓하지만 누가 봐도 불구덩이인 곳에 앞뒤 안 가리고 뛰어드는 그들을 보면서 처음으로 운명이 있다면 그것은 삶의 패턴일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모두 패턴이 있었다. 그리고 그 패턴 위에서 모두 맹목적이었다. 그나마 자기 파괴적인 패턴이 아니고 스스로의 패턴이 주위 환경과 잘 조화되면 정상인처럼 보인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패턴이 정착되지 못해서 주위 환경과 끊임없이 마찰을 빚거나 자기 파괴적인 패턴으로 스스로 지옥을 만들어 그 속의 유일한 대죄인처럼 살고 있었다. 처음 대학에서 마주쳤던 광인들을 보면서 그들이 이상한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대학을 졸업할 때에는 더 이상 광인들을 동정하지 않았다. 정상인이란 자신의 좋은 패턴과 좋은 환경이 어우러진 운좋은 사람일 뿐이라는 생각이 확고해졌기 때문이다. 패턴과 환경이 어긋날 때 사람들은 광인처럼 행동한다. 스스로에게 칩거해 들어가 생각하기를 멈추고 자기 위안에 몰두한다. 결코 패턴을 바꾸지는 못한다. 그저 운이 좋은 광인과 운이 나쁜 광인이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이런 결론에 도달했을 때 나는 어떤 광인인지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인간은 오감으로 지각되는 것을 정보로 인식한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당연한 이야기라 대부분 그러려니 한다. 인간이 오감으로 주위의 사물들과 교감한다는 것은 당연한 생각이다. 하지만 이 이야기를 뒤집어 보면 인간은 그 오감으로부터 주입되는 정보에 속수무책으로 노출되어 당하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잘 생각하지 않는다. 


잠시 자취하던 방의 위층이 옥상이었고 그 옥상에는 세탁을 할 수 있도록 세탁기들이 구비되어 있었다. 사람들은 저녁만 되면 세탁기를 돌렸는데 그럴 때마다 세탁기는 일정한 주기로 쿵쿵 소리를 내면서 돌았다. 그 쿵쿵 소리는 낮게 그리고 힘있게 울리면서 내 방과 공진했다. 다른 사람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런 규칙적인 소리가 계속 들려오면 큰 문제가 발생한다. 우연히 발생하는 불규칙한 소음이라면 어지간히 큰 소리 아니면 별로 신경쓰지 않지만 규칙적인 소리는 어느 순간부터 내 머리를 지배하기 시작한다. 그 규칙적인 주기를 머리가 자동으로 인식하고 그 주기에 동화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즉, 쿵 소리를 마음속으로 따라하면서 다음 쿵 소리가 규칙적인 주기를 준수하는지 계속 신경쓴다. 그래서 쿵 소리가 들린 후 다음 쿵 소리까지 긴장이 발생하고 계속 쿵 소리를 따라간다. 쿵 소리에 신경쓰느라 다른 것은 하나도 하지 못하게 된다. 마치 보도를 걸을 때 바닥에 깔린 규칙적인 타일을 따라 걷다보면 어느새 그 타일의 규칙성을 파악하고 그 규칙성이 준수되는지 신경쓰면서 그 타일 위에 걷는 내 발도 규칙성을 갖추면서 걷게 되는 것과 같다. 스스로 생각하기에 약간 강박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여튼, 세탁기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면 모든 활동이 강제로 정지되고 그 소리에 몰두하게 된다. 공부는 당연히 못하고, 글을 쓰거나 게시판을 둘러보는 등의 활동도 모두 하기 힘들어진다. 이 소리를 벗어나는 방법은 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크게 음악을 틀거나 매우 쉽게 몰입할 수 있을 정도로 자극적인 영상을 시청하는 것 외에는 집 밖으로 나가는 것 말고는 없었다. 이런 소리가 들렸을 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회피하거나 들리지 않도록 하는 것 말고는 없다. 소리가 들리면 그 소리에 종속된다.


사람은 정보를 무시할 수 없다. 가령, 눈앞에 절벽이 있는데 아무 걱정 없이 그 정보를 무시하고 절벽 밖으로 걸어갈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모든 사람들은 그 눈앞의 절벽을 인식하는한 그 절벽과 상호작용을 해야 한다. 절벽이 존재한다는 것을 끊임없이 두려워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그 절벽에 대해서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사람도 있다. 물론, 그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은 불필요한 걱정이나 두려움이 없다는 것이지 거기에 절벽이 있다는 것을 확실히 인지하고 있으면서 그 절벽 밖으로 떨어져 죽거나 부상당할 의도 없이 태연하게 걸어 나갈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또, 어떤 이는 생을 끝내겠다고 결심하고 뛰어내릴 수도 있고, 누군가를 밀쳐 떨어뜨리려고 할 수도 있다. 정보에 반응하는 내적이고 외적인 방식들은 매우 다를지라도 거기에 그것이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 절벽이 있기에 절벽을 인식하고 그것에 대한 스스로의 온갖 태도가 나온다. 다양한 방식으로 반응하지만 그 핵심에는 반드시 절벽이 있다는 것에 대한 인식이 있는 것이다. 


절벽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행동할 수밖에 없다는 말은 사람이 그 정보를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나는 사람이 정보를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을 인간의 “정보 종속성”이라고 지칭한다. 왜냐하면 정보가 제공되지 않았다면 모를까 마음은 정보가 제공되면 반드시 그 정보와 함께 일어나서 그것에 얽혀 전개되기 때문이다. 굳이 그것을 정보라고 표현하는 이유는 그것이 오감으로 지각된 사물일 수도 있고, 누군가의 이야기나 글일 수 있으며, 마지막으로 내면에서 올라온 마음의 소리일 수 있기 때문에 통틀어서 표현할 수 있는 단어가 정보이기 때문이다.


정보 종속성은 당연한 것들로 나타난다. 매력적인 이성을 보면 자기도 모르게 눈이 가고, 맛있는 것을 보면 침이 꿀떡 넘어가면서 먹고 싶은 마음이 생기고, 헤어진 옛 연인을 만나면 과거의 기억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것은 모두 그저 그것과 마주치기만 하면 자동으로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일들이다. 똥을 만나면 역하고, 향기로운 향에는 이끌리듯 이 모든 것이 저절로 자연스럽게 당연하다는 듯이 일어난다.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해서 이 과정을 의식하기 어렵다. 하지만 반대로 노력해보자. 노력해서 매력적인 이성을 만날 때마다 눈이 썩는 것 같고, 맛있는 것을 보기만 해도 역겹고, 헤어진 옛 연인을 볼 때마다 기억이 사라지면서 다시 처음부터 사귀듯 하게끔 노력으로 할 수 있는가? 보통은 할 수 없을 것이다. 만일, 그게 된다면 진화의 과정에서 일찍 탈락했을 것이다.


다이어트를 생각해보면 그 과정의 지독함과 지난함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다이어트는 평생 그냥 참는 것이다. 아무리 오랜 기간 다이어트를 한다고 해도 맛있는 것을 볼 때마다 토할 것 같이 역겹게 느끼게 되지 않는다. 다이어트를 그만둔 순간부터 즉시 식습관은 원상복귀한다. 만일, 식습관을 제어해서 맛있는 것을 맛없고 역겹게 느낄 수 있다면 모든 사람들이 쉽게 다이어트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거식증이라는 병적인 상태로 몰아넣을 정도의 압력이 필요하고 거식증에 걸린 순간부터는 삶이 다이어트보다 더한 지옥으로 변할 것이다. 당연히 쉽게 되지 않는다. 


정보에 반응하는 이 모든 자연스러운 과정은 인간의 생명체로서의 기능에 따라 이루어지는 부분도 있지만 또한, 경험이라는 사건을 통과해야 한다. 극단적인 경우는 마약과 같은 것이다. 그것이 좋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면 그저 호기심 정도였을 것이다. 호기심에 극단적으로 약한 것이 아니라면 평상시에 마약을 찾거나 마약을 찾아 돌아다니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마약에 중독되면 그 자극적인 경험은 그 때부터 끊임없는 갈증과 갈구를 낳고 일상생활 내내 그것을 찾아다닐 것이다. 경험이 없었다면 마약은 그저 “사람들이 너무 좋아해서 중독된다.”라고 하는 하나의 지식으로만 남았을 것이다. 


물론, 경험된 방식에 따라서 사람들은 다양한 반응을 보일 수 있다. 똑같은 상황, 사건, 사물이라도 누구는 좋아할 수 있고 누구는 싫어할 수 있다. 따라서 어떤 정보에 대하여 사람들의 반응이 달라지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위에서 이야기한 것은 이미 내 속에서 경험을 통해서 맛있다고 확립된 음식을 맛없다고 스스로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즉, 이미 사랑하는 사람을 외면하고, 이미 싫어하고 구역질 나는 똥에서 향기로운 냄새를 맡을 수는 없는 것이다. 경험을 통해 입맛대로 정보에 반응할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경험을 통해서 실제 그것을 체득하게 되고 해당 정보에 대하여 반응하는 모델이 완성되었다면 그것을 쉽게 수정하거나 변경할 수 없다는 것이다. 맛있는 것을 먹어본 경험이 있어야 그 맛을 그리워하게 되는 것이다. 맛있어 보이는 것일 뿐, 먹어보지 않은 것이라면 맛이 없을 것이라고 외면할 수도 있게 된다. 하지만 일단 맛있다고 자각하게 되면 그 때부터는 그렇게 부정할 수 없다. 마약에 중독되기 전이라면 삶을 건전하게 꾸려나가기 위해서 그것을 회피할 수 있지만, 마약에 중독된 후라면 회피가 불가능하고 그저 감내해야만 한다.


마약이나 낭떠러지와 같이 명백한 것이 아니더라도 정보 종속성은 분명히 존재한다. 로버트 치알디니의 『설득의 심리학』은 그러한 정보 종속성의 향연이다. 상대에게 호의를 베풀면 그 상대는 그 호의를 되돌려주어야 한다는 부담감을 느끼기 때문에 부탁을 거절하지 못한다는 상호성의 법칙, 스스로 한 행동의 일관성을 스스로 깰 수 없게 되는 일관성의 법칙, 군중심리나 외모 그리고 권위 등에 종속되는 인간의 행동 같은 것도 정보 종속성으로 설명이 된다. 여기서 제시된 모든 법칙은 이미 법칙이라고 불리는 시점에서 개인의 다양성과는 상관없이 사람들이 그 법칙에 종속되어 있음을 제시하고 있다.


이 정보 종속성이라는 개념은 꽤나 유용하다. 왜냐하면 상황을 올바르게 볼 수 있게 해주고 동시에 잘못된 해법을 피해서 제대로된 해법을 제시해주기 때문이다. 만일, 매일 지나가는 길목에 구역질나는 똥이 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아마도 똥을 피해 다른 길을 가거나 똥이 그 길목에 놓이는 이유를 찾아서 해결하려고 할 것이다. 그렇다면 다이어트를 하는 사람이 지나가는 길목에 평소 좋아하던 맛있는 빵집이나 음식점이 있다면 어떻게 할까? 알고 지내던 많은 사람들은 결국, 빵이나 음식을 먹고 자제력 없는 자신을 탓했다. 이건 마치 똥을 보고 구역질 한다고 스스로를 탓하는 것과 똑같다. 음식점이나 빵집을 볼 때마다 우리는 그 정보로부터 끊임없이 식욕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물론, 자제력을 발휘할 수도 있고, 열심히 외면할 수 있지만 그 과정은 결핍을 낳고 결핍은 다시 불행을 낳는다. 이 모든 것은 저절로 자연스럽게 불가피하게 일어나는 현상이다. 그 좋아하는 음식점과 빵집이라는 정보가 나타나면 거기에 그냥 종속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정보 종속성을 자각하는 사람이라면 똥을 피해서 가듯이, 맛있는 음식점이나 빵집을 피해서 다녀야 한다. 정보에 노출되지 않음으로써 스스로를 방어하는 것이다. 그곳을 피해 다니지 않은 자신의 어리석음을 탓할 수는 있겠지만 음식점이나 빵집을 보면서 식욕이 돌았다고 스스로를 탓하는 것은 똥을 향기롭게 느끼지 못한다고 스스로를 탓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올바르게 보지 못하고 잘못된 자기비하를 초래하며 자존감을 떨어뜨리는 보다 어리석은 행동인 것이다. 


하지만 수많은 상황을 전부 피할 수 없다. 항상 사건은 일어나고 세상은 부조리하게 느껴진다. 학원을 빼먹고 PC방으로 놀러가는 아들을 보고 분노가 일어났다면 그 뒤부터는 동일한 상황에서 계속 화가 치민다. 무섭게 호통치면서 질타하는 상사에게 두려움이 일어났다면 그 뒤부터는 그 상사가 입만 열어도 끔찍하고 두려워진다. 장시간의 노동 끝에 막걸리 한 잔에서 즐거움을 찾는 습관이 있다면 노동 후에 항상 막걸리가 그리워진다. 트라우마가 되었든 자신도 모르게 하는 습관이 되었든 한 번 결정된 것은 변하지 않고 반복된다. 그리고 그런 것들이 세상에 널려있어서 피해갈 수가 없다. 정보 종속성은 이런 상황에도 도움이 된다.


정보 종속성을 이해하게 되면 일어나는 모든 것에 저절로 마음을 빼앗기는 일을 막을 수 있게 된다. 스스로 의도했는지 여부와 상관없이 화나는 상황에 처하면 화가 나게 되고, 즐거운 상황에 처하면 즐거운 기분이 된다. 어제 원하는 대학에 입학해서 날아갈 듯이 행복했는데 다음날 삶의 목표가 없어졌다는 공허감에 우울해지기도 한다. 오늘 신기했던 장난감은 내일 바로 싫증나고 오늘 첨단 유행을 달렸던 옷들은 다음 시즌 유행에 뒤쳐진 퇴물이 된다. 이 모든 변덕에는 “나 자신”이 없다. 내가 화내는 것이 아니다. 그저 그 상황에 저절로 반응하고 있을 뿐인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보통 이런 상황을 마주치면 모든 원인을 자신에게 돌려 자책한다. 내가 너무 유행을 좇고 있거나 탐욕스럽거나, 소심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스스로를 바꾸려고 자신의 탐욕을 꾸짖고 소심함을 한심하게 여기면서 스스로를 비난한다. 하지만 정보 종속성은 그런 자책이 똥의 냄새가 향기롭다고 진심으로 생각하려고 노력하는 것과 다름없다는 것을 알려준다. 애시당초 잘못된 노력인 것이다. 이러한 잘못된 연관관계를 만들지 않게 되면 많은 감정들이 날아간다. 죄책감, 자책감, 한심함, 스스로에 대한 경멸, 자랑, 자만 등이 모두 그저 반응하는 것에 스스로를 원인으로 파악하면서 따라붙는 2차적 감정이다. 그리고 우리의 지혜를 가로막는 장애물들이다.


이번엔 최면(hypnosis)에 대해서 간단히 이야기해보자. 최면도 인간의 정신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시사해주는 바가 많기 때문에 꼭 한번 들여다볼 필요가 있는 분야라고 생각한다. 아마도 최면이라고 하면 정신을 잃은 사람이 최면술사에게 조종을 당하는 장면이 떠오를 것이다. 평소라면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에 답하거나 무척 오래된 과거를 생생하게 기억하게 하거나 이상한 행동을 하게끔 하는 무언가 신비하고 것이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최면이다.


이러한 최면을 통하면 사람들을 마음껏 조종할 수 있을 것 같다. 가령, 특정 암시를 심어놓으면 신호에 맞춰서 다른 사람을 암살하게 한다거나 기밀을 빼돌리게 하는 등 사람을 도구로 쓸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해준다. 실제로 이러한 내용을 전개한 영화나 드라마도 상당수 있다. 그런 영화나 드라마를 볼 때 꼭 생각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나는 최면에 걸리지 말아야 하면서 속으로 최면을 걸리지 않을 방법을  강구해본다. 혹은, 최면에 걸린 척 하면서 적의 음모를 분쇄하는 것을 떠올려보기도 한다.


다행히,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이는 최면은 어떻게 도망갈 방법이 있을 것 같다. 가장 먼저는 최면술사를 경계하는 것이다. 실수로 최면술사의 음모에 빠지게 되면 최면으로부터 저항하면 될 것 같다. 가령, 최면을 걸 때는 일정하게 깜빡이는 빛이나 주기적으로 운동하는 진자 같은 것을 보게끔 하는데 그럴 때 눈치채고 보는 척 하면서 실제로는 그것을 보지 않는 것이다. 그러면서 최면에 걸린 것처럼 말없이 그것을 바라보는 척 하면, 최면술사가 이제 나를 유도하려 할 것이다. “몸이 이완됩니다. 몸이 편안해집니다.”와 같은 목소리가 들려오면 그에 맞추어 실제로 그렇게 느끼는 척 하면 최면술사를 속일 수 있을 것 같다. 여튼, 최면의 존재를 모르고 멋모르고 휘말릴 수는 있어도 최면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것을 경계하면 최면에 걸리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완전히 속수무책으로 당하지는 않을 것 같아 다행이다.


하지만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최면은 무대 최면의 일종이라고 한다. 즉,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하는 최면이다. 이러한 방식의 최면은 매우 오랫동안 있어왔고 조금 정형화된 최면의 방식이다. 최면은 무대에서만 사용되는 것이 아니다. 이미 프로이트 시절부터 심리치료의 방법으로 사용되었고 보다 나은 치료를 위하여 최면에 대한 연구는 계속 진행되어왔다. 당연히 그 이론이 정밀해지고 기술이 발전해왔다. 현대에 와서 밀턴 에릭슨 같은 사람들로 인하여 최면은 정형화된 형식을 벗고 그 근본적인 원리를 응용하여 일상적으로 다양한 분야에서 그것을 응용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현대의 최면은 보통 데이브 엘먼이 정의한 아래의 내용과 같이 소개된다.


“의식의 비판적 사고를 우회하여 받아들일만한 선택적 사고를 확립하는 것”


세상은 다양한 메시지를 보낸다. 메시지는 선언이 될 수도 있고, 정보가 될 수도 있고, 의견이 될 수도 있다. 공통적인 것은 그러한 메시지가 수용되면 그대로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가령, 사과를 손에서 놓으면 땅에 떨어질 것이라는 새삼 당연한 정보를 수용하게 되면, 그 때부터 이 정보에 어긋나는 것은 다른 카테고리에 묶이게 된다. 현실에서 누군가 사과를 손에 놓아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한다라고 주장한다면 거짓말이라고 여길 것이다. 그게 가능하다는 것을 보이기 시작하면 속임수가 있다고 믿거나 그것을 설명하기 위하여 엉뚱하게도 염동력이라는 것을 설정할 수 있다. 요컨대 받아들여진 진실은 최대한 고정되고 그 외부를 수정하게 된다. "개인의 인권은 존엄하다."라는 선언을 수용하게 되면, 개인의 인권을 침해하는 모든 행위에 대해서 비판하고 그것을 제거하기 위해 노력하게 된다. "회사원은 회사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해야 한다."라는 선언을 수용하게 되면 회사를 위하여 열과 성을 다하여 일하게 될 것이다. 메시지가 개인에게 수용되는 순간부터 메시지는 그 개인의 세계관, 가치관에 영향을 미치고 그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는 압력을 받게 된다. 따라서 이러한 메시지가 사람들 속에 아무런 여과없이 들어오게 되면, 사람들은 수많은 메시지 속에 매몰되어 버릴 것이다. 따라서 이것을 여과해줄 필터가 필요하다. 


메시지를 여과해주는 필터가 바로 의식의 비판적 사고다.  이 비판적 사고는 사려깊은 숙고를 통해서 작동할 수도 있고, 단순히 슬쩍 보고 거부하거나 수용하는 본능적이고 직관적인 판단이 될 수도 있다. 의식의 비판적 사고의 수준이 어떻게 되었든 간에 개인의 상황과 맥락, 사회문화계급적 상황, 가치관, 세계관 등에 따라서 결국, 해당 메시지를 수용할 것인지 거부할 것인지 결정하는 과정을 통해 개인은 자신을 사회적 메시지로부터 적절하게 보호하고 일관성과 개성이라는 것을 만들어 나간다. 


의식의 비판적 사고라는 용어는 무척 합리적인 사고인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앞서 이야기했듯이 그 비판적 사고의 수준은 깊은 숙고에서 본능적이 직관적인 판단까지 천차만별이다. 그리고 그 비판적 사고라는 것은 개인의 입맛대로 바꿀 수 있는 그 무엇도 아니다. 오히려 내부로부터 그냥 그대로 나오는 우리 자신 그 자체다. 그래서 자기 파멸적인 메시지만 수용하는 사람은 자신이 한심하거나 못난 사람이라는 메시지를 적극적으로 수용한다. 인종차별주의자는 인종차별의 정당성을 말하는 메시지를 적극 수용한다. 또, 다이어트를 하는 사람은 해당 음식을 먹으면 안된다고 스스로를 비난하면서 그것을 먹어야할 정당한 이유를 찾는 등 분열된 메시지를 수용할 것이다. 


이러한 비판적 사고를 우회하는 까닭은 최면이 보통 그 사람이 자연스럽게 당연히 하는 것들을 하라고 권유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보통이라면 하지 않을 일을 하게끔 하는 도구이기 때문이다. 특히, 우울증 극복, 다이어트, 편식하는 습관 교정 등에서는 개인의 비판적 의식이 장애물로 작동하는 경우가 있다. 즉, 자기 파멸적인 메시지만 수용하는 사람이 긍정적이 되려고 노력하는 상황을 생각해보자. 그는 여기저기서 들은 내용들을 실천해볼 수 있다. 햇빛을 본다거나 규칙적인 생활습관을 하고, 긍정적인 관계를 만들고 등등 여러가지를 수행할 것이다. 하지만 본인의 비판적 의식이 자기 파멸적인 내용을 주로 메시지로 수용하기 때문에 습관적으로 자신을 비난하고 우울해질 근거를 찾게 된다. 당연히 그런 계획들을 실천하는 것이 어리석어 보이고 불필요해 보이게 된다. 하지만 주위에서 자신이 변하길 원하는 사람들 때문에 억지로 흉내를 내게 된다. 하지만 본인이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니 성공할 수 없다. 계획한 긍정적인 습관은 계속 좌초되고 그 좌초됨으로 인하여 다시 절망하는 과정이 반복되면서 오히려 더 상황이 심각해질 수 있다. 이런 경우 그 비판적 의식이 문제가 되므로 을 우회해서 긍정적인 메시지를 주입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선택적 사고는 메시지 그 자체를 확고하게 굳히는 것을 말한다. 보통, 비판적 사고를 우회하면 메시지가 수용된다. 하지만 비판적 사고가 아니더라도 메시지가 온전히 수용되는 것을 방해하는 요소들이 있다. 만일, 최면을 통하여 우울증 환자에게 긍정적인 메시지를 수용시킨다 하면, 일시적으로는 기분이 좋아지겠지만 본인을 한심하게 생각하고 비난하는 성향과 충돌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리고 보통은 기존의 성향이 다시 튀어나오면서 긍정적인 메시지를 지우게 된다. 따라서 긍정적인 메시지를 수용시키면서 기존의 부정적인 메시지를 무시하게끔 만들어야 한다. 즉, 우리가 현실에서 자신이 원하는 것만 보고 원하지 않는 것은 무시하게 하는 확증편향적 사고를 선택적 사고라고 하는데, 그러한 확증편향이 발생하여 부정적인 메시지를 무시하게끔 만들어야만 그 최면에 의해서 심어진 긍정적인 메세지가 온전히 역할을 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최면은 심은 메세지에 대한 믿음을 구축하여 선택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선택적 사고를 확립함으로써 이루는 것이다.


그렇다면 현대 최면은 어떻게 이루어질까? 보통은 우리가 흔히 보는 것처럼 피시술자의 의식이 마비되는 트랜스 상태를 유도하여 원하는 선택적 메시지를 심는다. 즉, 무대최면에서 자주 보는 것과 유사하다. 그런데, 최면에 잘 걸리지 않아 트랜스 상태로 유도하기 어려운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은 예전이라면 최면을 걸 수 없었겠지만 현대 최면은 구태여 트랜스 상태를 유도하지 않고 말 그대로 의식을 우회하여 메시지를 심으려고 한다. 


의식이라는 것은 한 번에 하나만 집중할 수 있다. 의식의 초점 아래에 있는 것이 의식의 대상이 되고 그 외의 다른 정보는 배경으로 받아들이지만 전체적으로는 하나만 대상이 된다. 소매치기들은 한 번에 한 가지만 의식할 수 있는 인간의 속성을 이용한다. 보통 두 사람이 한 팀이 되어서 소매치기를 한다. 한 사람이 목표가 되는 사람과 먼저 부딪히거나 시비를 붙어서 그 사람의 주의를 끈다. 사람의 의식은 한 번에 한 가지만 처리할 수 있으므로 시비를 붙거나 강하게 충돌할 경우 모든 주의가 시비를 붙은 사람이나 충돌에 쏠리게 된다. 그 때, 다른 사람이 몰래 다가가 지갑을 집어간다. 평소라면 소매치기가 지갑을 집어가는 것을 의식했을 테지만 주의가 다른 것에 쏠려있기 때문에 그것을 거의 눈치채지 못하거나 뒤늦게 눈치채게 된다. 


현대 최면의 방법은 소매치기들보다 교묘하게 의식을 우회하여 메시지를 심는다. 가령, 낮은 자존감과 자기 비하에 빠진 사람에게 위로를 하면서 “당신은 착하고 훌륭한 사람입니다.”라고 이야기한다면 보통 자학에 빠진 사람들은 그 말을 빈말이나 거짓말로 여기면서 부정할 것이다. 하지만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반복해서 들려준다면 어떨까? 밑줄을 친 부분을 이야기할 때마다 탁자를 두드리거나 손바닥을 치면서 자연스럽게 강조하면서 말한다.


당신은 1990년에 착하고 훌륭한 부모님 밑에서 태어난 사람입니다.”


표면적인 메시지는 이 사람의 부모님이 착하고 훌륭하다는 것이므로 이 사람이 부모님을 좋아한다면 이 것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잠재적인 메시지는 “당신은 착하고 훌륭한 사람입니다.”이다. 이 사람의 의식은 표면적인 메시지에 주목하여 그것에 집중하지만 잠재적인 메시지는 의식을 우회하여 그에게 전달된다. 의식이 마비되는 트랜스 상태를 유도할 수 없으므로 효율이 좋지는 않지만 반복을 통하여 의식을 우회하는 메시지를 계속 전달할 수 있다. 성공적으로 메시지가 전달되면 그 사람은 약간의 자존감 회복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것은 무척 단순화된 설명이다. 


이제 현대 최면의 정의를 살펴보았고, 현대 최면의 정의를 통하여 의식이 마비되는 트랜스 상태가 아닌 상황에서도 최면이 어느 정도 가능함을 간단하게 단순화하여 설명해보았다. 그런데 이러한 현대 최면에 대해서 살펴보니 영감을 자극하는 바가 있다. 의식을 우회하여 전달되는 메시지라는 것이 과연 최면만 있는 것 같지 않고 의식과 수용이라는 주제도 매우 흥미롭다. 무엇보다도 기존에 생각하고 있던 최면에 저항하는 방법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는 것 같다. 

삶이 너무나 힘들게 꼬여가고 있을 때, 매일 밤마다 악몽이 나를 엄습했었다. 검은 개의 악몽이었는데 불길한 검은색이라는 점과 개꿈이라는 점에서 꿈에서도 최악이었지만 깨어났을 때도 인생의 방향이 꼬일 것이라는 점을 강력하게 암시하는 여러모로 밥맛없는 악몽이었다. 원래, 꿈이란 것은 깨어나자마자 신기루처럼 사라져 기억이 희미해지는 법인데 대부분 악몽이 동일하게 검은 개와 함께 하는 꿈이었고 거의 매일 이 꿈에 시달리다 보니 점점 꿈의 디테일한 부분을 기억하기 시작했다. 


꿈의 내용은 항상 비슷했다. 불길한 검은 개가 검은 오라를 내뿜으면서 무섭게 쫒아온다. 공포와 불안, 마비된 이성으로 눈을 감고 도망간다. 공포가 심해 눈을 뜨지 못한다. 검은 개가 쫒아오고 무서워서 눈을 감고 도망가려고 하는데 땅이 나를 붙잡고 놔주질 않는다. 늪에 빠진 것 같이 발이 무겁고, 유사에 빠진 것 같이 나락으로 끌려가는 기분이며, 개미지옥에 빠진 것처럼 도망가고자 하는 나의 노력이 헛된 것처럼 느껴졌다. 마지막은 항상 검은 개가 나를 덮치면서 끝난다. 


이 악몽은 기분을 너무 우울하게 하기 때문에 이런 악몽을 꾼 날이면 괴로운 현실을 잊기 위하여 닥치고 쾌락에 몰두하며 뇌를 정지시키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악몽이 3년이나 반복되다 보면 그것을 들여보게 된다. 매번 꿈속에서의 공포와 불안, 절망감을 안고 깨어나자마자 꿈을 관찰하다 보니, 몇 가지 이상한 점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꿈이 완전히 말이 안되는 것이라는 점이었다. 나는 꿈속에서 공포와 두려움에 한 번도 눈을 뜨지 않았다. 그런데 검은 개를 본다. 어떻게 눈을 뜨지 않았는데 개를 볼 수 있었을까? 또, 현재 사막에 있는지 구덩이에 빠졌는지 늪에 빠졌는지 보지도 않고 확실하게 알고 있다. 사실, 꿈이 엉망진창으로 모순되고 비논리적이라는 점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과 꿈의 차이점을 통해서 몇가지 영감을 받을 수 있었기에 또, 악몽을 극복하고자 하는 마음에 문제를 파고들었다. 


현실은 모든 것이 정합적이고 총체적이어서 굴뚝에서 연기가 나면 그 굴뚝 아래에는 불을 붙이고 있을 것이라고 추정하면 대부분 옳다. 모든 것이 시공간의 제약을 받고 이치를 따르기 때문에 보통 하나를 보면 그 외 나머지도 대략 알 수 있다. 하지만 꿈은 그러한 정합성과 총체성이 약하기 때문에 모든 것이 불안하고 불안정하다. 하지만 꿈에서의 인식작용을 잘 살펴보면 한 가지를 알 수 있다. 즉, 꿈에서는 모든 것이 주어진다. 어떻게 눈을 감고 있는데 개를 보고 있는 것일까? 눈을 감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몸의 고유수용감각과 사물의 모습이 동시에 주어지기 때문에 눈을 감고 있어도 사물이 보이는 것이다. 개가 있고 그것을 눈으로 보았기 때문에 개를 보는 것이 현실의 논리라면 꿈에서는 개와 눈을 감는것이 각각 주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꿈에서는 증오하는 사람의 모습과 사랑이라는 감정이 동시에 주어지면 증오스러운 사람이 사랑스럽게 보이게 된다. 반대로 평소 예쁘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모습과 추하다는 느낌이 동시에 주어지면 사랑하는 사람이 추하게 느껴진다. 즉, 꿈에서는 정보가 직접적으로 주어지고 그 주어진 정보에 따라서 현실적으로 있을 수 없는 것들도 실재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나는 이 의식에 직접 주어지는 것이라는 부분이 무척 흥미롭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다시 올리버 색스의 신경증 환자들 사례를 보면서, 환상과 환청이 바로 우리에게 직접 주어진 것들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아내가 모자로 보이는 남자의 정신상태가 그랬다. 눈  앞의 노부인이 아내인 것도 알지만 동시에 모자라고 인식된다. 그냥 모자로만 보이는 것도 아니고 그냥 아내로만 보이는 것도 아니다. 아내인데도 모자인 현실에선 있을 수 없는 상황인 것이다. 그리고 그 모자를 쓰기 위해서 노력하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보여주는 것은 우리가 주어진 정보에 따라 그저 꼭두각시 인형처럼 끌려다닌다는 점이었다.


주어지는 것을 단순히 정보라고만 말하는 것 조금 적합하지 않은 것 같다. 왜냐하면 주어지는 이 정보는 어떤 행동의 방향성을 같이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는 그 자리에서 합리적으로 상황을 조율하지 않는다. 즉, 아내이고 모자이기 때문에 아내인지 모자인지 분별하거나, 잘 모르겠으면 아무것도 안한다거나, 또는 그 상황 자체를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기계적으로 눈앞의 모자를 쓰려고 할 뿐이다. 모자라는 정보는 반드시 그 모자를 당장 써야겠다는 충동을 같이 가져온다. 영화 ‘뷰티풀 마인드’에서 내쉬는 빅브라더에 대한 환상에 시달린다. 그 영화를 보면서 내내 가진 의문은 이 빅브라더들이 환상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면 이제부터는 그냥 무시하면 되는 것 아닌가? 하는 것이었다. 마치 우리가 일상에서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을 무시하고 없는 것처럼 여기듯이 말이다. 하지만 내쉬는 환상과 환청을 따르지 않기 위해서 끊임없이 그것이 환상인지 아닌지 분석해야만 했고 동시에 충동을 억제해야만 했다. 즉, 눈앞에 아내를 모자로 보는 순간 그 모자를 써야겠다는 강력한 충동이 따른다. 내쉬가 본 빅브라더도 끊임없이 내쉬로 하여금 암호를 해독하고 이것을 비밀로 유지하게끔 하는 충동이 발생한다. 실제 임상에서도 환상과 환청이 증세로 나타나면 그 사람을 거의 지배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특히, 환청은 극단적인 이상행동을 불러오는 경우가 많아 매우 주의하는 것으로 알고있다. 충동에 사로잡힌 사람은 그 충동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전심전력으로 사력을 다해야만 겨우 충동을 억제할 수 있다. 


나의 악몽도 결국, 주어진 정보들의 칵테일이었다. 처음에는 검은 개가 쫓아와서 불안하고 공포스러웠던 것으로 생각했지만 곰곰이 생각하다보니 어느 순간부터 이게 그렇게 논리적인 선후관계로 연결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납득하게 되었다. 즉, 그저 같이 주어진 것이었다. 그 꿈은 일종의 환상이고 꿈에서 느낀 공포와 불안은 바로 환상을 본 사람들이 느끼는 충동처럼 나를 사로잡는 충동이었던 셈이다. 


이렇게 정보와 그에 따른 행동을 일으키게 하는 충동이 동시에 주어지는 것이 꿈이나 정신적인 문제에 시달리는 사람에게만 있을까? 그럴 리가 없다. 정신적으로 건강하고 괜찮은 사람도 어느 순간 이상한 판단을 내리거나 말도 안 되는 짓을 하고 돌이켜 생각하면서 자신이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는지 경악하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 그런 경우를 우리는 그저 컨디션이 안 좋았다거나 착각했거나 하고 말하면서 일시적인 것으로 치부하지만 명백히 정상인들도 그러한 주어지는 정보와 충동의 지배를 벗어나기 어렵다는 것을 보여준다. 


조금 더 미세하게 들어가게 되면 나는 내가 사물을 어떻게 인지하고 반응하는지 모른다. 그저 주어질 뿐이다. 눈앞에 있는 사과를 어떻게 사과라고 인지하냐고 물어본다면 눈앞에 있는 사과를 보면서 사과라고 주어지기 때문이라고 밖에는 대답할 수 없다. 그저 ‘사과’라는 이름과 맛과 향이 떠오르면 그것을 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만일 잘못된 지식을 가지고 있다면 어떻게 될까? 가령, 사과는 강력한 독성이 있어서 먹으면 백설공주처럼 잠들게 된다고 믿는다면 사과를 먹으려 하지 않을 것이고, 사과를 먹이려는 사람이 자신을 죽이려고 한다고 믿을 것이다. 이런 경우라면 올바른 지식을 제공하고 증명하면 되겠다. 하지만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사람처럼 사과를 모자로 착각한다면 그는 의심없이 사과를 머리에 쓰려고 할 것이다. 


이렇게 의식에 직접 주어지는 것들을 살피게 되면서 인간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취약한 기반에 있는지 절감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혼자서 짱구를 굴리면서 스스로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양 하고 있지만 실은 그렇게 여기도록 주어진 것일 뿐일지도 모른다. 이렇게 생각하니 자유라는 말은 허황되게 느껴지고 주체라는 말은 꿈속의 망상처럼 느껴질지 모르겠다. 누군가의 선동에 의해서 아니면 운명의 장난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들에 우리는 끊임없이 꼭두각시의 춤을 추게 되는 존재일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이러한 위험성은 항상 우리 곁에 상존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주어지는 것들을 통해서 역설적으로 자유라는 것이 제한적으로 가능함을 깨닫게 된다. 


우리는 주위의 모든 것으로부터 정보가 주어진다. 컵을 보면 컵이 떠오르고, 컴퓨터를 보면 컴퓨터가 떠오른다. 발 아래에 천길 낭떠러지가 펼쳐져 있으면 떨어질지 모른다는 공포가 절로 나타나고 그것을 무시하고 지나가기 무척 어렵다. 이렇게 의식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주위의 사물들이 어떻게 존재하고 무엇을 해야하고 피해야 하는지 주어지기 때문에 현실에 안정적으로 적응할 수 있는 것이다. 만일, 매순간 그러한 정보를 의식적으로 취사선택해야 한다면 어땠을까? 주의력이 부족하거나 다른 것에 정신이 팔려서 사고를 내는 많은 사람들이 훌륭한 견본이 되어줄 것이다. 이들은 자동차 추돌사고, 대형 인재를 일으키는데, 한 순간의 주의력 부재 때문에 그런 일들이 일어난다. 사람들은 까딱 방심하면 옥상과 낭떠러지를 무시하고 밖으로 한걸음 내딛을 것이고 스스로를 절제하지 못해 탐욕으로 인한 범죄가 만연할 것이다. 따라서 이 주어지는 것들이 우리의 자유라는 것을 부정하는 것처럼 말했지만 실은 이 주어지는 것들이 적절하게 작동함으로써 우리의 삶이 보다 안정적인 기반 위에 서 있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따라서 주어지는 것들을 그저 무시하는 것은 결코 해법이 될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할까?


주어지는 것들은 자동적으로 주어진다. 그 자동이라는 것이 우리가 쌓아온 삶의 개인사와 시공간적 상황, 시대정신 등에 복합적으로 영향을 받아서 자동으로 주어지는 것이긴 하지만 일단 그렇게 주어지는 것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하지만 앞에 무엇이 나타나건  자동으로 주어지는 것들이 나타나기 때문에, 처음 의식에 주어지는 것에서 충동을 흘려보내고 그 주어지는 것을 외면하지 않고 바라보고 있으면 그 주어진 것을 대상으로 다시 자동으로 새로운 것이 주어진다. 마찬가지로 충동을 참아내고 가만히 보고 있으면 주어지는 것은 끊임없이 영원한 연쇄 운동을 시작하게 된다. 그러면 충동은 점점 약해지고 그 주어지는 것들은 점점 지혜롭게 변하게 된다. 즉, 생각을 정련하는 셈이다.


주어지는 것들 사이에서 가장 올바르고 최적의 생각과 행동을 하고 싶다면 행동을 멈추고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생각을 끊임없이 정련해야만 한다. 다행히 우리가 아내를 모자로 착각하는 비극에 빠진 것이 아니고 사물을 제대로 인지할 수 있고 충동을 제어할 수 있다면 충동을 흘려보내고 생각을 지속하여 최적의 생각과 행동을 끌어낼 수 있다. 물론, 많은 시간을 소모하게 될 것이다. 가령, 영화 ‘뷰티풀 마인드’에서 내쉬는 자신에게 말을 거는 사람을 마주칠 때 그것이 환상인지 아닌지 검증한다. 주위의 사람들이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을 보고 있는지 물어보고 주위의 상황을 종합적으로 환상인지 아닌지 여부를 판단한다. 그리고 환상이라고 판단되면 그것을 멀리한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내쉬처럼 잠시 멈춰서 생각을 조금 더 끌어내면 된다. 연인이 또래의 이성이랑 행복하게 웃으며 지나가는 것을 우연히 봤다면 대부분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연인이 바람을 핀다.’일 것이고 당장 연인을 추궁하고 분노를 쏟아내고 싶은 충동이 발생하게 된다. 하지만 잠시 멈춰서 충동을 흘려보내고 그 생각을 찬찬히 바라보고 있으면 조금씩 생각이 옅어지면서 여러 생각이 떠오를 수 있다. 새롭게 주어지는 생각들은 연인의 친한 친구나 선배에 대한 이야기일 수도 있고 업무상 접대로 누군가를 만난다는 이야기가 떠오를지도 모른다. 그런 식으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지나가게 하다 보면 가장 개연성이 높은 시나리오를 생각이 수렴되고 이를 단계적으로 검증하여 가장 지혜로운 행동을 할 수 있게 된다. 즉, 가장 훌륭한 생각과 행동을 하고 싶다면 멈추고 그만두면 된다. 비록 우리가 주어지는 것들에 의해서 필연적으로 조작되지만 우리에게는 주어지는 것들을 참아냄으로써 그 주어지는 것들을 극복하고 가장 지혜롭고 뛰어난 생각과 행동으로 연결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자유라는 말은 스스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말이다. 즉, 내가 하고 싶어서 하고 멈추고 싶어서 멈추는 것이다. 오직, 스스로만이 이유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들을 살펴 보니 내가 하고 싶어서 한다고 여기는 그것은 내가 하고 싶도록 밑도 끝도 없이 주어지는 프로그래밍처럼 느껴진다. 또, 내가 멈추고 싶어서 멈추지만 역시 그것도 내 스스로 멈춘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도록 프로그래밍 된 것 같다는 느낌을 준다. 이렇게 보면 자유는 불가능할 것 같고 인간은 꼭두각시에 불과한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이 모든 제한에도 불구하고 단 한 가지 자유가 보장되어 있다. 그것은 충동을 가라앉히고 좀 더 지혜로워질 수 있는 자유다. 총의 방아쇠를 당기고 싶은 충동이 강하게 일어날 때, 그것을 당기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지그시 바라보며 충동은 흘려보내고 생각은 지그시 바라보는 그러한 자유다. 이 자유는 느리고 답답하기 때문에,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구속이라고 여길 수 있는 그런 자유지만, 인간이 언제나 그 자리에서 자신의 인생을 전체를 통해 얻어낸 최고의 지혜로 행동할 수 있다는 점에서 운명의 희롱을 벗어날 수 있는 단 하나의 역설적인 자유인 셈이다.


마지막으로 나의 악몽은 결국, 수면무호흡 때문이었다. 숨을 쉬지 못하고 숨이 부족하니 몸은 내가 뛰고 있다고 여긴 것이다. 하지만 몸이 뛰고 있어야 하는데 몸은 잠자리에 누워있으뿐이고 몸이 무거우니 사막이나 늪에 빠져서 몸이 움직이지 않는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그것이 당시 상황의 암울함과 고민과 겹쳐지면서 검은 개에게 쫓기는 악몽을 만들었고 이 수면무호흡과 악몽은 내 삶의 질을 더 나락으로 떨어뜨려 정신적 좌절과 불안을 심화시켰고 이는 다시 과식과 잘못된 생활습관을 심화시키면서 수면무호흡이 심화되는 악순환으로 이어졌다. 그렇게 수년간 동일한 내용의 악몽에 시달리게 된 것이다. 내가 이 악몽의 연쇄를 극복하고 원인을 찾아 해결할 수 있게 된 것도 공포와 불안 좌절에 매몰되는 것을 멈추고 자학적인 충동을 흘려버릴 수 있게 되면서 이 모든 것을 외면하지 않고 끌려다니지도 않고 관찰할 수 있게 되면서 부터였다. 조금만 빨리 깨달았으면 악몽의 시간을 많이 줄일 수 있었을 것이다. 

중고등학교에 공부한다고 독서실에 처박혀 있을 때는 회의주의적인 경향이 강했다. 세상에 의미있는 일 따위는 없고 그저 꾸역꾸역 살아갈 뿐이라고 생각했다. 공부만 하고 있으니 인생에 재미있는 것이 없고 따라서 만사에 회의적이고 염세적인 것은 당연해 보인다. 그렇다면 대학에 들어와서는 그렇지 않았을까? 아니다. 이제는 아주 논리적이고 당당하게 회의주의적인 철학자며 사상가들을 공부하면서 논리적으로 확고한 회의주의적 경향을 가지게 되었다.

 

90년대 대학은 회의주의적인 경향이 강했다. 그래서 대학에서 가르치는 것은 주로 의심하고 비판하라는 것이었다. 의심한다니 멋있지 않은가? 이미 갖고 있던 회의주의적 성향을 정말 멋진 쿨함으로 끌어올려줄 것 같지 않은가. 국가를 의심하고, 사회를 의심하고, 경제를 의심하고, 의도를 의심하고, 사람을 의심하라고 들었다. 멋있어 보였다. 하지만 이제 갓 대학에 들어온 신입생이 뭘 알겠는가. 이미 사람들이 의심한 내용들을 따라하는 수밖에 없다. 칸트나 데카르트 같이 모든 것을 의심하고 비판한 철학자도 있었고, 프로이트와 다윈처럼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신화를 밑바닥에서 무너뜨린 사람도 있었다. 현대의 신경과학이나 유전자학은 인간을 거의 기계나 컴퓨터처럼 다루고 있었다. 읽다 보니 도출되는 결론은 인간은 성욕으로 프로그래밍 된 원숭이에 불과하고 사회나 국가를 운영하기엔 너무 불완전해서 탐욕으로 매번 경제공황을 일으키고 최악의 정치 형태인 독재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는 운명론적인 좌절이었다. 그러니 이제는 열심히 사는 사람들을 모두 원숭이의 발정 정도로 치부하는 회의적인 태도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회의적인 성향이 더욱 강화됨에 따라서 아름답고 진정한 사랑, 정치적 선동, 선행, 혁명, 자아의 실현, 신뢰 따위를 전부 헛된 망상이라고 치부할 수 있게 되었지만 이런 회의주의적인 성향은 누군가 이런 것을 들이밀면서 하기 싫은 것을 권유할 때만 작동할 뿐이다.

 

가령, 누군가 나를 설득하기 위해서 이렇게 말한다.

 

“A씨는 너무 훌륭한 것 같아. 그분은 누구랑 진정한 사랑을 했고, 많은 선행을 하신 분이라서 믿을 수 있어, 그 분이 지금 세계 평화를 위해 기금을 모으고 있어 너도 여기에 기부도 하고 활동도 같이하자.”

 

이런 자리에서 말을 할 때, “응 그렇구나, 미안 최근 바빠서정도로 거절하면 계속 달라붙어서 설득을 시도하기 때문에 무척 피곤해진다. 상대방을 단호하게 거절하면서 동시에 적대적인 상황으로 가지 않기 위해서 범우주론적 회의적인 경향을 스스로에게 포장한다.

 

그래, 과연 인간이란 존재가 아무런 이익도 없이 선행을 베풀 수 있을까? 진정한 사랑이라니? 사춘기도 지났는데 이제 그런 상상의 세계에서 나와서 현실을 보는게 좋다고 생각해. 인간은 근본적으로 발정난 원숭이에 불과하고 불완전한 존재야.”

 

이렇게 이야기하면 상대방은 그냥 흔히 볼 수 있는 겉멋이 잔뜩 든 염세주의 똘아이구나 정도로 생각하고 가거나 토론을 하려고 한다. 하지만 이미 토론의 주제는 A라는 사람에 대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존재에 대한 추상적인 토론으로 바뀌기 때문에 서로가 마음 상할 일은 많지 않다. 게다가 이미 그런 회의주의적인 성향을 정당화하는 근거를 잔뜩 가지고 있기 때문에 상대가 나를 설득할 방법은 거의 없고 오히려 설득 당할 가능성이 더 높게 된다.

 

나의 회의주의적인 성향은 보통 이렇게 싫어하는 일을 피하고 엉뚱한 일에 끌려다니는 것을 막기 위해서 주로 사용되었으니 진정한 회의주의자라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거나 사람들에게 실망하고, 혹은 스스로 부끄러운 일이 있을 때마다 세상이 우울해지고 세상의 모든 의미와 가치가 빛바래는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된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내뱉었던 회의주의자적인 말들이 거부할 수 없는 진리처럼 다가오는 것을 피할 수는 없었다.

 

오랫동안 믿었던 가치가 사실은 허황된 것이라는 점을 조금씩 느꼈으면서도 그것을 필사적으로 부정하고, 믿었던 사람들에게 실망하고 힘이 빠지고 있으면서도 그렇지 않다고 스스로를 기만하게 되는 일이 종종 있다. 나도 그렇다. 필사적으로 부정해 오다가 어느 순간 그 부정을 더 이상 할 수 없게 되는 시점이 나타난다. 어느 유난히 조용하고 평온한 밤이 바로 그런 상황이었다. 뜬금없이 몰아닥치는 상념 속에서 갑자기 스스로를 기만해 왔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깨닫게 된다.

 

믿었던 것에 배신당하는 느낌이 너무 싫었었기 때문일까? 이솝 우화의 여우가 어차피 저 포도는 시고 맛없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나도 스스로의 상처 받은 마음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하여 어차피 인간이란 존재는 인간은 성욕으로 프로그래밍 된 원숭이에 불과하고 그런 인간들이 말하는 가치와 의미는 결국 허상이고 망상이거나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거짓으로 꾸며댄 것들에 불과하다고 진심으로 생각했다. , 거기에 확신을 얻고 싶었기 때문에 이 세상 모든 가치와 의미를 적극적으로 부정하기 시작했다.

 

당시 배운 바에 따라서 세상에 믿고 따를만한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일들이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선행은 사회의 구조적인 결함을 손바닥으로 가리면서 빈민들에게 정신적 위로를 하기 위한 가식의 수단으로 보였고, 열정과 혁명은 발정난 사람들이나 스스로에게 취한 사람들의 과대망상적이고 낭만적인 몽상으로 보였다. 종교는 감언이설로 사람들을 현혹하는 사기로 보였다. 열심히 일하는 사람은 자본주의의 노예에 불과하고, 돈 많은 부자는 그 돈에 대한 집착으로 전전긍긍하는 궁색하고 인색한 노인네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웃기는 것은 세상에 뭔가 의미 있는 일들을 하나같이 무가치한 일들로 증명하면 점차 삶이 더 우울해질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반대로 그런 생각을 깊이 할수록 점점 마음이 오히려 편해지고 밝아진다는 것이었다. 왜 그런 것일까?

 

그 의미가 문제였다. 마음속에서 모든 것이 평등하게 무의미하고 무가치해진 순간 한 가지를 깨달았다. 어차피 모두 무의미하다면 이 세상에 어떤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진정한 가치와 의미라는 것이 없다면 오히려 내 스스로 원하는 의미와 가치를 설정해도 된다. 그것도 무의미하겠지만 어차피 세상에 무슨 진정한 의미와 가치라는 것이 없다면 차라리 내 스스로 의미와 가치를 만드는 것이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

 

비록, 길가에 흐드러지게 피어난 이름 모를 잡초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모든 사람들이 아름답다고 말하는 장미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과 아무런 차이가 없다.

 

세계의 평화를 위해 내전 지역으로 가서 탱크 앞에 뛰어드는 것도 멋있겠지만 지나가다가 누군가 떨어뜨린 지갑을 주어서 주인을 찾아주는 것도 이미 그 의미에 충실하다.

 

모든 의미를 부정하니 이제 스스로 의미와 가치를 만들 수 있게 되었고 다시 돌아보면서 내가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다시 찾아보니 이번에는 앞에서 부정했던 모든 것들이 내 속에서 다시 생생하게 살아나기 시작했다. 아마도 처음으로 내 스스로 세상하고 마주친 느낌이었다. 선행은 기분이 좋고 나에게 의미가 있다. 그것으로 족했다. 열정은 진정 의미와 가치를 부여할 때 생기는 것이므로 값진 것이었다. 그것이 실패하고 그저 일종의 구애행동으로만 남았어도 그렇게 다시 일어난다는 것으로도 해보지 않은 것보다 훨씬 나았다. 무모한 사람들, 이상을 향해 뛰어가는 사람들, 자신의 이익만 돌아보는 사람들 모두 자기 자신이 만들어낸 의미를 향해 가고 있는 것이었다. 그들은 성공할 수도 실패할 수도 있지만 여기에 앉아서 속으로는 온갖 욕망이 있으면서 그 사람들을 평가만 하고 있는 나보다는 나았다. 나도 그렇게 의미를 만들고 살아 움직여서 실패도 성공도 내 스스로 감당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무엇을 하든 나에게 의미가 있다면 그것으로 족했기에 모든 것을 할 수 있었다. 더 이상 여기에 어떤 의미가 있다고 말하는 사상가나 대단한 선배와 어르신이 필요 없어졌다.

 

이것은 처음으로 스스로 발견한 역설이다. 솔직히 다시 생각해보면 그야말로 현학적이고 세상물정 모르는 생각으로 가득했던 대학시절의 이야기지만 삶이 힘들 때마다 이때를 다시 돌이켜 보게 되는 역설이다. 사회적으로 비루하고 인정받지 못해도, 남보다 늦게 가는 것 같고, 잘못된 인생을 사는 것 같아도 이때 떠올렸던 생각을 다시 해본다. 그러면 지금 내가 제대로 길을 가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게 된다. 혹시나, 누군가의 말을 듣고 이상한 명예와 자격지심으로 엉뚱한 옷을 입으려고 용을 쓰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내 스스로 가치와 의미를 생생하게 부여하고 있는지 여부를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세계에서 최고의 부와 명예를 누려도 스스로 가치와 의미를 부여할 수 없다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생생하게 알려준 것이다. 물론, 나는 부와 명예를 밝히기 때문에 세계 최고의 부와 명예에 매우 높은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고 기꺼이 누릴 것이지만 말이다.


그리고 이 때부터 정말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막 살기 시작했다. ㅜㅜ

괴델 에셔 바흐라는 책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돌이켜 보면 20대 중반의 1년 정도 이 책을 열심히 읽었는데 그로부터 지금까지 대략 20년간 내 삶의 방향은 이 책과 직접 간접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여전히 잘 이해하지 못하는 책이기도 하다.

     

왜 읽기 시작했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어떤 선배의 펌프질로 읽기 시작했는데 읽자마자 총제적인 난관에 부딪혔다. 괴델 에셔 바흐는 당시 읽었던 다른 어떤 종류의 책으로부터도 겪어보지 못한 신기한 구성으로 방대한 분야를 통합한 책이다. 바흐의 일화로부터 시작해서 논리학, 수학, 컴퓨터 과학, 패러독스를 거쳐 에셔의 그림과, 현대 수학이 마주친 혁명적인 변화 그리고 불교의 선문답을 어우러지게 하면서 알고리즘과 생물학까지 통섭하고 있는 미친 책이다. 언급한 모든 분야에서 수박 겉핥기로 스쳐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해당 분야의 핵심을 전문적으로 간결하게 짚어나가고 있어서 배경지식이 없으면 거의 이해하기 어려운 수준의 난이도를 보여준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각각의 내용들이 따로 노는 것이 아니라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그 선배와 같이 이 책을 읽어보기로 했던 친구들은 대부분 정말 독서를 많이 했고 박학한 교양과 깊은 지성을 보여주는 사람이었지만 어디까지나 문과였기 때문에 수학, 논리학, 컴퓨터 부분에서 침묵할 수밖에 없었고, 바흐의 음악 이론은 모두가 꿀먹은 벙어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직관적으로 눈으로 보고 인식할 수 있는 에셔의 그림들과 그래도 어떻게든 알아들을 수 있고 몇 번 접해본 그리스의 패러독스, 불교의 선문답 위주로 책을 읽고 해석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독서 모임은 간단하게 한 번 읽는 수준으로 흐지부지 끝났지만 개인적으로 그 책을 계속 읽어 나갔다. 나름 독서를 좋아하는 편이지만 서사와 지식 위주의 독서를 했다면 이 괴델 에셔 바흐』를 읽는 경험은 간결하고 잘 짜여진 이야기와 조각조각 이어지는 사유의 흐름 속에서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근원적인 무언가를 묘사하고 있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면서도 조화로운 가운데 아름답다고 느꼈고 그 근원을 알고 싶은 강렬한 열망 때문에 책을 손에서 놓지 못했다.

     

괴델 에셔 바흐는 굉장히 다양한 분야를 심도있게 다루고 있지만 동시에 비슷한 이야기를 끊임없이 변주하고 있다. 그렇다 변주다. 비슷한 주제가 다른 방식으로 반복되는 것이다. 음악, 논리학, 생물학, 수학, 패러독스, 인공지능, 그림, 불교의 선문답이 마치 전혀 다른 이야기인 것처럼 심도 있게 펼쳐지지만 그 핵심에 어떤 비슷한 무엇인가가 다른 방식으로 펼쳐지고 있는 느낌을 준다. 그렇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책에서는 명시적으로 그것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 그저 상징적으로 영원한 황금 노끈이라고 말한다. 그 부분은 인간의 지성이 극대화 되는 부분이고 동시에 인간 지성의 한계가 노출되는 무한히 순환하는 어떤 뫼비우스의 띠 같은 느낌을 준다. 잘 모르니 계속 이렇게 감상적으로만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니 이 책을 이해하기 위해서 수학사와 현대 수학 그리고 논리학을 공부하기도 했다. 그리고 패러독스와 선불교의 선문답을 읽어보고 육조 혜능의 육조단경도 읽어보게 되었다. 덕분에 어떤 환상적인 비전을 그려볼 수 있게 되었는데 그것은 무한세계에 대한 어떤 동경 같은 것이었다.

       

칸토어의 무한 증명, 또, 튜링머신으로 그것을 증명한 튜링, 그들이 증명한 것은 오직 극도의 추상적인 사유와 그것을 뒷받침하는 지성으로만 도달할 수 있을 뿐 상상과 사유로 도달할 수 없는 아득하게 초월한 영역으로 그것이 무엇인지 그려보기도 힘든 영역이다. 마찬가지로 양자역학에서 말하고 있는 양자의 행동도 계산하고 증명은 가능하지만 직관적으로는 인식할 수 없다. 따라서 인간의 사유방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고 그저 계산을 통해서 확인하고 그 결과를 수용해야만 하는 기괴한 세계다. 마지막으로, 괴델은 논리적으로 정합적인 참인 명제들이 증명할 수 없다는 점을 증명한다. 이 무슨 말인가? 증명되지 않은 참인 명제라는 것은 실제로 참이지만 그것이 참인지 아닌지 증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그리스 시절에 제시된 패러독스를 통해서 다시 인간 지성의 한계를 다시 보여준다. 그리고 그것을 초월하기 위한 선불교적 시도를 보여주고 있다

    

결국, 20세기에 들어오면서 많은 분야에서는 혁명적인 발전과 동시에 어떤 지성의 한계에 봉착하게 된다. 지성 자체가 진리를 이해하기에는 부족함을 알게되는 지성, 진리의 극한에서 오히려 이해할 수 없는 진리에 도달해버린 지성이다. 그리고 그런 모순 상태, 참인지 거짓인지 증명할 수 없는 상태를 다시 어떤 절대적인 일관된 이성으로 뛰어넘으려고 하기 보다는 오히려 지성의 한계를 인정하고 역으로 그 절대적인 진리라는 것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보다 폭넓은 가능성과 다양성으로 나아가기 위한 준거로 받아들이자는 이야기로 해석했다.

           

이 책을 통해서 결국 지성이라는 것에 대해 정말 깊이 통찰하였고 덕분에 그 지성의 한계를 뼈저리게 체감할 수 있게 되었다. 덕분에 인간의 지성과 이성이 무한하고 항상 옳다는 식의 계몽주의적인 맹목적인 믿음을 거둘 수 있게 되었고 인간의 이성이 제한이 있고 부족한 것이라는 자각과 함께 인간의 지성과 지능을 설계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호기심이 생겨나게 되면서 이때 처음으로 인공지능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원래, 더글라스 호프스태터 본인도 인지심리학자로서 인간 정신의 구조나 지성의 본질에 대한 통찰, 그리고 인공지능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 책의 곳곳에서 인공지능에 대한 그의 통찰을 조금씩 읽어볼 수 있었다. 덕분에 나도 인공지능에 대해서 그리고 인간의 의식에 대한 철학적인 사유를 접하게 되었고 이러한 접근을 20년 동안 손에서 놓지 못하고 계속 지속하게 되었다. 

      

괴델 에셔 바흐를 처음 읽었던 당시에는 추상적인 느낌만 있는 수준이었지만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꼭 알아야 할 어떤 진리가 있다는 강력한 확신을 얻었고 그것을 알고 싶은 마음에 관련 공부에 몰두하게 되었다. 덕분에 꽤 오랜 기간 방황하기는 했지만 좋든 나쁘든 현재의 나에게 가장 중요한 자산 중 하나를 형성하게 되었다. 

     

덧붙이면 괴델 에셔 바흐』에서 선불교를 인용하는 장면이 많이 나온다. 이것은 저자가 지성의 한계를  지성의 미혹으로 해석하여 이것을 치료하는 방법으로 선불교의 지혜를 선문답을 통해서 말하고 싶어하는 것처럼 해석이 되었고 그 덕분에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불교에 다시 관심을 가지게 되기도 했다.

불교에 대한 관심이 식었지만 대학시절 내내 불교와 마주칠 일이 몇 번 있었다. 그 중 가장 큰 2가지 중 하나는 괴델 에셔 바흐라는 책을 읽은 것이었고, , 한번은 금강경을 읽으면서 신기한 체험을 한 것이었다.

 

괴델 에셔 바흐에 대한 서평과 논평은 다음 기회로 하고 이번에는 금강경을 읽다가 겪은 희한한 체험에 대해서 이야기해보고 싶다.

 

대학에서 나는 전공 공부를 거의 안하는 학생이었고, 오직 시험 전날 밤을 새면서 벼락치기 공부만 했다. 평소에 따로 시간을 내어서 공부를 하거나 하는 경우는 전혀 없었다. 이 부분이 슬픈 것인데, 무언가 자기만의 기준이 있어서, 가령, “대학 공부에는 전혀 관심이 없어!” 라든가 대학 공부 말고 나의 활동을 하고 싶어라든가 하는 식의 이유 따위는 없었고, 오히려 성적을 잘 받고 졸업하고 싶어서 전전긍긍 하면서도 평소에 공부를 안했다는 것이다. 아니, 못했다는 것이다.

 

원래,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벼락치기로 공부하는 것이 습관화되어 있어 뭐든지 벼락치기로 하려는 습성을 가지고 있는 것은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대학의 공부는 도저히 하루 밤새는 것으로는 커버할 수 없을 정도로 공부할 내용이 많아 매일매일 공부해야만 겨우 따라잡을 수 있다. 다시, 졸업을 하기도 힘들 정도로 학점이 나빴기 때문에 아둥바둥 공부를 해야만 하는 상황이었고 스스로 공부를 해야겠다는 자각이 있음에도 이상할 정도로 공부가 되지 않는다.

 

차라리 실컷 놀아야지라고 마음먹으면 충실하게 놀지만, “열심히 공부해야지라고 마음먹으면 노는 것도 공부하는 것도 아닌 이상한 상태가 되어버린다. 갑자기 공부와는 전혀 상관없는 다른 분야에 대한 창의력이 샘솟기도 하고, 친구들의 급한 사정이나 다른 활동으로 인하여 도저히 공부를 할 수 없는 상황으로 스스로를 몰아간다.

 

그 날도 그랬다. 바로 다음 날 아침 10시에 시험이지만 수업을 집중해서 들어본 적도 없고, 책을 펼쳐본 적도 없다. 익숙하지 않은 영어로 200페이지 정도를 공부해야 하는 시험이었다. 시험 전날임에도 아직 책을 펼치지도 않았고 어째서인지 손이 가지도 않았다. 스스로에게 시험공부를 해야 해!”라고 아무리 강조해도 그날은 유난히 손이 가지 않았다.

 

가까스로 밤 10시가 되어서야 책을 펼친다. 영어로 200페이지를 공부할 생각을 하니 좌절감이 몰려왔다. 그러다 보니 어째서 평소에 공부하지 않았을까?”, “나는 구제불능인가?”, “나에겐 자기를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이 전혀 없는 것인가?” 따위의 생각이 몰아치면서 자괴감이 들고 스스로에 대한 한심함으로 분노와 짜증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분노와 짜증이 어찌나 넘치는지 책을 눈앞에 두고 있어도 글자가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무리 읽어도 글자의 의미에 도달하지 못하는 상황이 반복되었다. 그리고 1130분이 되었을 때는 이대로는 시간낭비일 뿐이라고 판단하고 조금이라도 자고 일어나 다시 공부해야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스스로에게 분노하고 이 상황에 대한 짜증을 내면서 집에 돌아와서 자려고 하니 형이 게임을 하고 있다. 형이랑 같은 방에서 자기 때문에 쫓아낼 수도 없어서 내일 시험 때문에 힘드니 게임을 그만두라고 양해를 구했지만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다. 분노와 짜증이 숨막힐 정도로 올라오기 시작한다. 잠을 자야 하는데 스스로에 대한 분노와 짜증으로 정신은 돌아버리고 게임소리와 불빛은 자꾸 짜증을 불러오고 형에 대한 짜증과 분노까지 겹치면서 처음으로 이 분노와 짜증이 감당하기 어렵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형의 뒤통수를 주먹으로 내려치고, 컴퓨터를 오함마로 내려찍는 상상을 계속 해보지만 분노와 짜증은 가라앉지 않고 오히려 더 기승을 부렸다. 머리가 너무 혼란스러웠고 잠을 잘 수도 공부를 할 수도 없는 상황에 생애 처음으로 생각을 분산시키고 싶다는 했다. 그 때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금강경을 꺼내들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금강경을 고른 이유는 이 책은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책이고 재미있거나 몰입해서 읽을 것이 아니라는 점 때문이라는 것이다. 당시의 상황은 진지하게 독서를 할 정신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에 오히려 그런 진지한 독서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금강경을 꺼내들어 읽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우리가 독서를 하면 글을 읽고 그 글을 의미로 조합해서 전체적인 메시지와 서사로 만들어내는 과정을 겪게 된다. 그래서 독서하는 사람은 글을 읽지만 그 글을 씨앗으로 해서 스스로의 정신이 만들어내는 의미작용을 통하여 메시지와 서사를 생생하게 구현하게 된다. 금강경을 읽기 어려운 이유는 그런 의미작용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독서 경험 자체가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단지, 정신을 분산시키기 위해서 금강경을 읽었고 독서 경험을 바라지도 않았기 때문인지 부담없이 술술 읽혔다. 어차피 의미에 관심이 없으니 그야말로 기계적으로 글자를 그대로 읽고 넘어가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읽다보니 어느새 구름이 걷히고 밝은 빛 하나가 심연 속에서 떠올라 환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시험공부를 못했다면 늦게라도 최선을 다해서 공부하면 된다. 혹은, 최선을 다하고 싶지 않다면 빠르게 포기하는 것도 좋다. 그런데 이번에는 어떤 생각도 판단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저 짜증과 분노 뿐이었다. 물론, 짜증과 분노가 언제든지 일어날 수도 있지만 분노와 짜증이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심하게 일어나는 경험을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리고 그 상황이 너무 괴롭고 고통스러웠다. 이 괴롭고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조금이라도 정신을 분산시키면 좋겠다는 생각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금강경을 읽었다. 그런데 읽다보니 빠른 속도로 짜증과 분노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구름처럼 나의 정신을 모두 가리고 있던 짜증과 분노가 가라앉으면서 몇 가지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내일 시험을 망칠 수도 있지만 일단 최선을 다해보고 할 수 있는 만큼 해보고 스스로에게 부끄럽지는 않게 하자.”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빛이 떠올랐다. 다시 학교를 가서 공부를 했는데, 공부 속도가 미쳤다. 난 영어로 200페이지를 깔끔하게 공부해서 결과적으로 무척 좋은 성적을 받게 되었다.

 

구름이 걷히고 빛이 떠오르는 심상은 당시 실제로 생생하게 겪었던 것이다. 그 심상이 너무나 선명해서 깊은 인상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시험은 성공적으로 통과했지만 후에 금강경을 아무리 읽어도 이 심상이 재현되거나 미친 공부효율을 보여준 경우는 없었다.

 

이 경이로운 경험은 대학입시 때 재수하면서 겪었던 마법같은 일과 함께 항상 그것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항상 생각하는 주제 중에 하나였다. 그래서 금강경을 숱하게 다시 읽어 보았고 관련 불교 서적을 찾아서 읽어보기도 했지만 알 수 없었고 그저 신기한 경험으로만 남았다.

 

결국, 이 현상을 스스로 해석할 수 있게 된 것은 인생의 큰 분기를 넘어서면서 부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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